고중영-그리스/터키
작성자 :
테마세이투어
작성일 :
2007.11.21
조회수 :
708
| 이 글은 서울에 사시는 고중영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고중영님은 2003년1월8일부터 20일까지 13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그리스/터키 여행을 다녀 오셨습니다. 글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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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1. 8 (수)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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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먼저 부치고 대한항공과 코드쉐어가 된 알이타리안항공을 타고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로마공항을 거쳐 2004년 올림픽을 위해 새로이 건설된 아테네 공항에 도착하니 밤 11:30분경이다. 로마에서 아테네에 갈 때는 비가 심하게 내리고 시계가 나빠서 공항활주로 두개 중 하나가 폐쇄되는 바람에 1시간가량 도착시간이 지연되었다. 우리를 마중 나온 현지가이드는 손에 테마세이라는 쪽지를 들고 공항에서 우리를 맞았다. 호텔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는 그리스를 소개한다. 그리스의 정식명칭은 헬레닉공화국(Hellenic Republic)이라는 것을 포함하여 그의 아야기를 요약하면, -인구 : 1,100만명 -면적 : 13만 평방 Km -강우량 : 년 500mm(주로 겨울에 내림) -국민소득 : 12,600$ (EU 10번째 가입) -정치 : 이원 내각제(대통령: 외교담당, 수상: 국정운영) -종교 : 동방정교회(98%), 로만카토릭, 개신교 *사도바울이 전도한 동방정교회는 전국민의 98%가 신도이며, 대통령보다 동방정교회의 교주에 관한 뉴스가 TV에 더 많이 나오고 전세계에 4억 정도 분포 -교육제도 : 6-3-3-4 *초중고만 사립인정, 대학은 불인정으로 유명대학은 학원으로 운영하며. 모든 등록금은 무료. 외국유학생은 학비면제 월 60만원 정도의 생활보조비. 각종 교재 무료제공하며 장학생은 기숙사 및 식사무료제공. 한국유학생 10명 미만(그리스학위자 5명정도) -근세사 : 터키의 430년 지배. 키프러스(사이프러스)와 국교분쟁 -군복무 : 남자는 1년간 의무복무 -주요 농산물 : 올리브, 잎담배(세계최고품질, 한국에 수출) -자연보호 : 공장건설 제한, 년 50억$ EU에서 지원 -교민 : 250명(태권도, 식당. 여행업, 상사주재원) -기타 : 관광수입이 주수입(년 1,200만명), 선박보유 세계1위(세계의 30%보유 중 15%임대), 현대, 대우, 기아차 판매 1위 아테네 중심가에 있는 아테네 아크로폴(Athens Acropol)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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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1. 9 (목) 아테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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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일찍 호텔 앞의 시내 풍경을 보기 위해 밖에 나가보니 호텔 바로 앞이 지하철역이 있는 옴모니아(Omonia)광장이다. 아침 일찍부터 출근하는 시민들 외에도 상가건물 한 귀퉁이에는 길에서 밤을 새운듯한 사람도 보인다. 환각제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서울의 가을 날씨 정도의 추위에도 모피코트를 입은 사람도 제법 보이고 길가에서는 간단한 음식을 사먹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침 뉴스를 들으니 어젯밤에 터키의 공항에서는 심한 안개로 인해 비행기 추락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가는 이스탄불지방은 아닌 모양이지만, 우리를 한시간 늦게 만들었던 날씨가 터키에서는 불행한 사고를 오게 했나보다. 걱정이 해 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도중에 성공회의 사도바울기념교회가 있다. 이곳에는 15,000명의 개신교신자가 있다고 한다. 버스를 세운 주차장 한편에는 디오니소스(Dionysos:박카스)라는 카페가 있다. 이곳에서는 유명인사들이 자주 손님을 만나고 테레비젼에 등장하는 일이 많은 곳이라고 한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고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위로 오르면서 우리는 사진 찍기에 바빴다. 오르는 길은 2,000년이 넘었다는 대리석이 깔려있어 간밤에 내린 비로 미끄러워서 걸음을 옮기기가 힘이 든다. 제일 먼저 우측 발 아래로 보이는 부채꼴 모양의 야외음악당이 오데이온(Odeion)음악당이다. BC161년에 헤롯 아티커스(Herod Atticus)왕이 부인 아니아 레질라(Annia Regilla)를 위해 지어진 이 음악당은 지금은 대리석으로 된 좌석부분이 복원되어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나 무대 쪽은 2,500년 전의 모습 그대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 좌측에는 15,000석을 가지고 있는 극장 디오니소스(Theatre of Dionysos Eleutherios)가 위용을 갖추고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음악당과 연극장을 갖추고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연극에서 희극이냐 비극이냐의 구분은 극중에 합창(Chorus:코러스)이 있느냐에 따라 구분된다고 하는 새로운 사실도 듣게 되었다. 아크로폴리스(Acropolis)는 고대의 도시국가인 폴리스가 주로 높은 산위에 성벽을 쌓고 민주정치를 하던 곳으로 akros(높은)이라는 말과 polis(도시국가)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서쪽의 진입로를 제외한 삼면이 가파른 바위 절벽으로 되어있어 천연적인 요새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조금의 인공성벽을 쌓아 완벽한 방호시설로 정치와 신앙의 중심지 노릇을 했다. 이곳은 프로폴레아(Propylaia)라는 정문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했다. 정문을 통과하면 우측에 승리의 신 니케(Nike:나이키)를 위한 신전이 있었으나, 2004년 올림픽을 위해 복원을 하려고 현재는 해체된 상태이다. 그 옆에 있는 고대 올림픽의 영웅들을 위한 동상을 세우는 좌대는 지금은 비워져 있다. 한때는 왕이 자신을 위한 동상을 세웠으나 후대에 철거하고 현재는 비워져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하이라이트는 그 위용을 자랑하는 파르테논(Parthenon)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1호로써의 이 건축물은 BC447-432년에 걸쳐 15년간 지어진 건물로써 정면에 8개 측면에 17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다. 외부 기둥은 도리스 양식으로 되어 있으나 내부는 이오니아식으로 복합형식을 갖추고 있다. 기둥은 둥근 대리석을 이용하여 20개의 홈을 파서 아래는 굵고 위는 가늘게 만들었는데, 멀리서 보면 가운데가 튀어나오는 배흘림양식(Entasis) 같아 보이는 착시 현상이 생긴다고 한다. 대리석과 대리석을 연결하는 데는 암수가 되도록 홈을 파고 놋쇠로 서로 연결하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하니 2,500년 전의 건축기술이 오늘날의 기술을 능가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이 건물이 유네스코에서 1호로 지정되는 데는 ①역사성 ②웅장함 ③의미 ④건축기술 ⑤예술성 등의 5가지 요소를 고려한 결과라고 한다. 이 건물은 처음에는 신전으로 사용되었으나 그 속에서 제사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신상만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정문 위 양측에 있는 삼각형의 박공과 아래의 긴 사각형에는 부조로 아테네의 창설신화와 여러 가지 신화예기가 만들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뿐이고 박물관에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건물의 가로 세로는 황금분할로 되어 있어 여기서 황금분할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아쉬운 것은 1687. 9. 26일 까지는 지붕을 포함 건물이 완벽히 보존되어 있었으나 세계문화유산에 대해 폭격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사람들이 이곳을 무기고로 삼아 탄약을 보관하고 있었고, 명중하기 어려운 터키군의 함포가 불행하게(?)도 지붕을 명중하는 바람에 폭발되어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박물관 입구에는 부엉이 조각이 있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 새가 밤새 잠을 자지 않고 아테네를 지켜주고, 아침에는 간밤에 일어난 일을 황제에게 보고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박물관에는 박공에서 뜯어진 부조의 원본과 모형을 포함하여 일대에서 얻어진 유물들을 전시해 두고 있다. 세계적인 미술품들 중에서 생각하는 사람,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비너스 등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아테네의 탄생신화를 포함하여 많은 유물들은 건축학도와 미술학도에게는 놓칠 수 있는 생생한 현장이라고 하는 데, 우리에게도 놀라운 작품같이 느껴진다. 6명의 여자상이 머리로 받치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엘렉시온(Erechtheion)에는 지금은 여자상 모두가 모조품으로 세워져 있으며 진품들은 모두 탈취 당해서 세계 유명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파르테논신전 옆에는 기둥의 모형과 당시의 기둥을 옮기기 위해 사용했던 도르래 같은 것이 있어 그것의 실제 크기를 알 수 있게 해 놓았고, 지붕의 기와를 어떻게 쌓았는지 모형도 만들어 두었다. 겨울이라 관람객이 많지 않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사람이 많을 때는 순서를 많이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파르테논신전 동쪽에는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아우구스투스신전(Temple of Augustus)이 있었지만 지금은 몇 개의 주춧돌만 보인다. 아크로폴리스를 내려서면 성경(행17:16-)에 등장하는 아레오바고 언덕이 있다. 이곳은 원래 많은 사람 앞에서 재판을 하던 곳인데, 사도바울은 이 어마어마한 파르테논신전 바로 앞에서 목이 달아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라고 담대히 하나님을 전했던 곳이고 이곳에는 바울의 설교내용이 동판으로 만들어져 있다. 당시에 아테네에서는 신이 무척 많아서 돌을 하나 캐낼 때마다 신이 하나 생길 정도여서, 심지어 ‘이름을 모르는 신’을 위한 제단이 있을 정도였다고 성경에서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 동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버스로 돌아갔다. 이 언덕에서는 성경에서는 저자(시장)라고 번역된 아고라(Agora)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아고라는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여러 가지 업무를 위한 야외공간으로 시장기능은 물론 도서관, 의사당, 국정청, 군무청, 재판소등의 관청과 신전 등의 공공건물이 있던 곳으로 아고라조(모이다)라는 말에서 온 ‘사람들의 모임 또는 모이는 장소’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점심은 현지식으로 하였는데 물이 귀해서 사서 먹어야 하는 것이 낯선 모습이다. 점심 후에 먼저 찾은 곳은 소크라테스 감옥이다. 그는 이 감옥에서 족쇄를 차고 있었지만, 밖에 나와 사람들과 자유롭게 토론을 하며 지냈다한다. 그를 아끼고 추종하던 후학들이 도망갈 것을 권했지만,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독약을 먹고 BC399년에 죽게 된다. 그를 분수령으로 자연철학과 분리되게 되었다. 그는 조각가인 아버지와 산파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청년시대까지는 보통의 교육을 받고 부친의 기술을 배웠으나, 델포이의 신탁을 통해서 타인의 교육적인 감화를 천직으로 알게 된다. 그가 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도 델포이신전에 적인 성현들의 말에 이미 있는 말이라고 한다. 그는 외모가 아주 못 생겼음을 ‘모습은 짐승 같으나, 말할 때는 신과 같다’고 그를 표현하고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의 아테네는 직접 민주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3만 명의 시민 중에 6,000명이 대표로 선정되어 시민법정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시민법정은 501명과 같이 항상 홀수의 배심원을 두고 다수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청년을 부패시키고, 알지 못하는 신을 전파하는 자’라는 이유로 501명의 배심재판관들의 투표에 의해 361:140표로 사형언도를 받게 되었다. 실제적인 고소의 이유는 그의 영향으로 반민주정치적 인사들이 출현했다고 미워한 사람들에 의해 고발되었다. 그의 부인인 크산티페는 악처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지만, 아무런 보수를 받지 않고 30년 이상을 청년을 교육하는 그를 대신해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고생을 했던 여성이라고 한다. 또한 재판이 있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그를 면회 온 부인에게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재판장에 나타나면 배심원들의 동정을 받을 수 있으므로 나타나지 말도록 당부했고 그의 부인은 그의 말대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단1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과 인격에 관한 지식들은 그의 제자 플라톤의 ‘대화편’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등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다. 그의 제자 플라톤은 도시국가의 수준을 1만명 정도가 이상적이라는 ‘이데아이론’을 제시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수준이 10만명 정도여야 한다는 ‘현실주의’자였다. 또한 사랑에 대해서도 ‘칼날 끝에 있는 꿀과 같다’는 표현을 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감옥을 끼고 완만한 언덕을 오르면 필로파푸스(Philopappus) 언덕이다. 이 언덕은 아테네 시가를 한눈에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아크로폴리스의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이 언덕에는 로마의 집정관인 C. Julius Antiochus Philopappus의 선정을 기념하여 아테네 시민들이 세워준 공덕비가 있어서 그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지금은 일부가 파손된 상태로 남아 있지만 AD114년에서 116년간에 세워진 대리석 기념탑은 훌륭한 예술품임을 알 수 있다. 언덕을 내려와 버스가 세워진 곳에 오면서 디오니소스를 보니, 건장하게 생긴 청년들이 몇 사람 보인다. 그들은 대통령이나 귀빈의 경호원이라고 하니 누군가가 손님과 만나고 있을 거라고 한다. 손님은 그냥 자연스럽게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고 있는 데, 이런 것이 이 나라에는 일상적이라니 부럽다. 우리는 공항에서 귀빈이 나타난다고 해서 통로를 막고 손님들을 돌아서 가게 했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나라는 언제 국민이 자연스럽게 높은 사람과 대중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을 때가 오려는지 부럽기만 하다. 버스로 근대 올림픽 경기장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쿠베르탕의 제안에 의해 제1회올림픽이 개최됐다. 아테네는 고대 올림픽의 전통과 향수가 살아있는 도시로써 근대 올림픽의 출발이 고대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역사적 의미에서 파리를 제치고 첫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제1회 아테네 올림픽은 1896년 4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 개최됐고, 이 대회에는 13개국에서 311명(선수:280명)의 선수단이 참가했다. 그리나 전체 311명의 선수 중 절대다수인 230명이 개최지인 그리스선수이고 보면 제1회 올림픽은 한 지역권의 체육대회에 불과했다. 대회종목도 육상, 수영, 테니스, 체조(역도종목은 체조의 1종목에 포함시킴), 레슬링, '사이클, 펜싱 8개 종목 41개 세부종목으로 실시됐다. 우리가 달려 본 육상 트랙도 현재와 같은 좌회전이 아니고 시계방향과 같은 우회전으로 실시되었다. 트랙종목이 현재와 같이 좌회전으로 변경된 것은 아테네대회가 끝나고 세계육상관계자들이 모여 회의 끝에 제2회 파리 올림픽부터 이루어졌다. 또한 수영경기가 바다에서 실시된 것도 지금에 와서는 생각하기 힘든 경기방식이었고, 수영선수들은 작은 증기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4월의 차가운 지중해를 헤엄쳐나가야 했다. 고대 올림픽은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형태에서 출발하였다는 설부터 몇 가지 설이 있으며, 남자만이 참석하는 누드올림픽이었고 여자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만이 참석했다고 하는 데 알 수는 없다. 이곳에 스타디움이 생긴 것은 우리가 내린 국제공항이 있는 마라톤 평원에서 이곳까지가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 코스라고 한다. 마라톤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강력한 전제주의체제와 그리스문화권과의 충돌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1세는 아테네에서 추방된 히피아스의 안내를 받아 아테네를 공격하였다. 밀티아데스를 총사령관으로 한 아테네군은 마라톤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였고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그리스의 승전보를 알리려 아테네까지 달려간 병사 페이디피데스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 바로 마라톤대회이다. 이 역사적인 달리기를 끝내고 페이디피데스는 쓰러져 죽었고 그가 달린 거리는 마라톤의 선례가 되었다.” 페르시아의 10만명을 맞서서 싸우는 1만명의 군사로 승리를 기대할 수 없어 초조하게 기다리던 왕은 승전보를 듣고 얼마나 좋았을 지 짐작할 만 하다. 그때 국왕과 왕비가 앉았을 대리석으로 된 로얄박스에 올리브가지로 만든 월계관을 쓰고 앉아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즉석에서 달리기를 하였다. 이 경기장은 96,000석의 좌석을 갖추고 가로 204m 세로 34m 의 크기로 오늘날의 경기장 규모보다는 작아 보이고 구기 경기는 하기 어려워 보인다. 경기장 한편에 대리석 기둥에 노인과 청년이 누드로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데, 어른들만 들으라는 전제를 하고는 운동을 하지 않는 청년은 정력이 약하나, 운동을 하는 노인은 정력이 세다는 것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 놓았다는 설명을 한다. 국회의사당 앞에는 전쟁에서 희생된 무명용사를 위한 기념비가 있고 그곳에는 그리스의 전통복장을 하고 있는 군인이 마치 움직이지 못하는 마네킹 같이 서 있고, 관광객의 사진 촬영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다행히 하루에 두 번만 한다는 교대식을 볼 수 있었다. 무명용사비 앞에는 대리석으로 된 관이 놓여져 있고 벽에는 세계 곳곳에서의 전쟁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데, 키프러스가 마지막이고 한국전쟁이 끝에서 두 번째로 보인다. 대통령궁과 수상관저가 나란히 붙어 있어 주변을 버스로 돌아보았는데, 우리의 청와대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경비초소에 근무하는 군인은 총을 비스듬히 메고 매우 자유스러운 자세로 근무하고 있다. 관저는 바로 이웃에 시민과 울타리를 같이 하고 있다. 다만, 관광객을 위해 전통복장을 보이기 위한 경비병 2명만 무명용사의 비 앞에서와 같은 포즈로 근무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국회를 신타그마라고 하는 데, 국회의사당 앞에 신타그마 광장이 있다. 우리나라의 명동에 해당하는 이곳에는 많은 상점이 있다. 맥도날드도 보이고 여인들을 위한 명품점들이 많이 보인다. 인터넷 카페가 있어 들려서 메일 확인을 하고 보내기도 했다. 다만 한글을 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깔려 있지만 자판의 어느 키로 한글/영문 변환이 되는지를 몰라 읽기만 하고 편지는 영문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이용요금은 최저요금 20분까지 1.2유로 그 이후는 10분에 0.1유로를 받고 있다. 저녁에는 교민이 운영하는 귀빈식당에서 한식으로 먹었는데, 갈비, 김치국, 김치, 깍두기와 상추 등이 고향 맛을 느끼게 한다. 호텔에 복귀하여 옴모니아 광장을 거쳐 신타그마광장까지 걸어갔다가 두정거장을 전철로 돌아왔다. 전철 내에서 만난 젊은 여자가 영어를 잘 하기에 물어보니 대부분의 젊은이가 영어를 할 수 있노라고 대답한다. 호텔 가까운 곳에 수퍼마켓이 있어 들려서 호두 1통을 샀다. 우리나라 보다는 싸게 팔고 있어는 데 계산을 하면서 보니까 적혀진 금액보다 조금 더 받는 것으로 봐서 세금이 별도로 부과되는 것으로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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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1. 10 (금) 델포이와 메테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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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에서 짐을 챙겨 일단 체크아웃하여 오늘의 목적지인 델피(Delphi:델포이)로 향했다. 아테네에서 델피는 193Km로 약 2시간 거리이다. 장거리버스 안에서 그리스 신화예기를 들었다. 그리스는 신화의 나라이다. 12명의 신중에 6명의 남자(제우스, 포세이돈, 아폴론,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아레스)와 6명의 여자(헤라, 아프로디테, 다이아나(아르데미,아뎀), 데메테르, 베스타(헤스티아), 아테나(아테네, 미네르바)) 그밖에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박카스), 의술의 신 아스클레비오스등의 역할과 특징에 대해 들었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신의 음식인 암브로시아(ambrosia;신찬)와 신의 술 넥타르(nectar)를 먹으면서 사람과 같이 사랑도 하고 질투도 하며 살았으나, 사람과 다르게 늙지도 않고 하늘과 땅을 종횡무진 했다. 많은 이야기를 장황하게 들었지만 로마와 그리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를 알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만 알겠다. 우리가 탄 버스는 고속도로를 통해 아테네 북서쪽에 있는 델피로 향했는데, 도중에 터키와 그리스사이의 바다 에게해를 지나면서 에게해라고 이름 붙여진 내력을 듣게 되었다. 크레타 왕 미노스에게는 왕비의 몸을 통해서 머리는 황소이나 몸은 사람인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라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인 아들이 태어났다. 이 아들을 위해 왕은 다이달로스라는 사람을 통해 미궁(labyrinth;들어 갈 수는 있으나 나올 수 없는 감옥)을 만들게 하고 이곳에 이 괴물을 가두었다. 이 괴물은 사람고기를 먹어야 살 수 있다. 미노스왕은 약소국 아테나이왕을 협박하여 매년 12명의 선남선녀를 제물로 바치게 했다. 그리스의 3대 왕인 에게아스 시대에 그의 아들 테세우스는 그 괴물을 처치하기 위해 재물로 자청하여 선남선녀와 함께 미노스로 간다. 아들이 출발한 스니온곶에서 아버지는 괴물을 물리치고 그 증거로 승리의 흰 돛을 달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영웅 테세우스는 그의 미모에 반한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Ariadne)의 도움을 받아 괴물을 처치하기에 이른다. 공주는 테세우스에게 무기와 함께 실이 잔뜩 감겨 있는 아마 실타래를 준다. 이것을 이용하여 괴물을 처치하고 함께 간 선남선녀를 데리고 미궁을 무사히 빠져 나오게 된다. 그러나 사랑하는 공주와 함께 배를 탈 수 없었던 테세우스는 공주와 헤어진 슬픔 때문에 아버지와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죽음의 검은 돛을 단 체로 돌아오고 있었다. 먼데서 검은 돛을 단 배를 본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이 괴물에게 죽은 줄로 알아 에게해에 빠져 자살을 하게 된다. 그 이후 사람들은 이 바다를 에게해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길가에는 작은 십자가 모양을 단 교회 모형들이 자주 눈에 띄는 데 이것은 교통사고로 죽은 이를 위로하고 기념하며 운전자에게는 경각심을 주기 위해 세워둔 것이라고 한다. 유가족의 능력에 따라 어떤 것은 사과상자만 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제법 큼지막하게 집을 짓고 안에는 고인의 기념사진과 촛불이나 올리브 등잔으로 불을 밝히고 있는 곳도 있다. 넓은 평원이 온통 올리브나무로 된 숲을 지날 때는 참으로 장관이어서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올리브는 아테네의 탄생신화에서 또 델피의 신전 주변에도 심어져 있으며 오늘날에도 중요한 농작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델피는 그리스의 성산 파르나쏘스(Parnassus) 산기슭에 아폴론이 신탁을 행하던 곳이다. BC 5세기 이전에 이곳을 지구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여 옴파로스(Omphalos; 배꼽)를 중앙에 모시고 아폴론 신전을 짓고 신탁을 행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신탁에 관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서양 고대사를 읽다 보면 중요한 사건 때마다 신전에서 신의 뜻을 묻는 신탁(충고 또는 예언)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전쟁은 물론 공적?사적으로 중요한 일을 처리할 경우 꼭 신탁을 받았다. 신탁이 자신들의 뜻과 다르게 나오면 대부분 신탁의 의견을 존중해 자신의 뜻을 철회했다. 또 신탁의 뜻을 어기고 자신의 주장을 펴다가 실패하면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신탁이 고대의 정신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탁의 공정성에 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헤로도투스는 신탁이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믿었지만 외부의 압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왜곡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강력한 국가의 왕일수록 신탁을 이용하려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진 스파르타의 경우 자신의 경쟁자들에게 불리한 신탁을 계속 퍼뜨려 기세를 꺾은 것이 좋은 예다. 고대에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때가 닥쳤을 때 반드시 신탁이 행해진다. 신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신과 사람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는 무당이다. 신탁이 있는 날 무당은 몸을 정결히 하고 정해진 옷을 입는다. 그런 다음 성소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금으로 된 삼각의자에 앉는다. 곧 의뢰자가 가져온 질문이 무당에게 전달되고 무당은 신으로부터 답을 받는 동안 거의 미친 것 같은 상태가 된다. 무당은 최면 상태에 빠져 몸을 떨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노래를 부르고, 승려는 이를 의뢰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싯구 형식으로 전달한다. 무당은 어떻게 환각 상태에 빠져드는 것일까. 당시에는 환각 상태가 신들만이 소유하고 있는 커다란 특권 중에 하나라고 여겨졌다. 따라서 무당이 환각 상태에 빠진 것은 신과 접촉하는 증거로 간주됐다. 첫째 해석은 무당이 탁월한 연기력을 발휘해 일부러 그런 척 했다는 것. 요즘도 재주 많은 배우가 미친 사람 역할이나 신 내린 무당역을 잘 소화하지 않는가. 그러나 배우의 연기는 곧바로 탄로날 수 있다. 또 몇백년 동안 계속해서 연기력이 좋은 배우가 나타난다고 보장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편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무당이 환각 상태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비밀은 신전이 세워진 위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의 대표 신전 델포이는 지면에서 갈라진 틈 위에 세워졌다. 흥미로운 점은 이곳에서 질식성 가스가 새어나온다는 점이다. 현대 과학자들은 이 가스를 메탄으로 추정한다. 무당은 메탄가스를 마시고 경련을 일으키며 무슨 뜻인지 모를 말들을 주절주절 중얼거린다. 의뢰자 역시 다소 몽롱한 상태로 무당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면서 승려가 통역해주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한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취한 상태에서 주절거리는 장면은 의뢰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의식에 지나지 않고, 중요한 얘기는 이미 승려가 정해놓은 것이 아닐까. 』 아폴론신전은 여러 차례 지진 등으로 부숴 지고 복원을 거쳤다. 처음에는 월계수 기둥으로 세워졌고, 두 번째는 천막과 왁스로, 세 번째는 청동으로 지어졌으나 BC510년에 현재와 같이 대리석으로 재건이 되었다. 이 지역에는 신탁을 받으려고 오는 사람을 위한 상점, 보물(성물)들을 보관 했던 창고들과 올림픽의 영웅과 전쟁영웅들의 동상들이 세워졌던 터가 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로 5,000명의 관중이 앉을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으며, 음향공학적으로 무대의 중앙에 서면 먼 거리에 있는 사람에게도 육성으로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한사람이 박수를 치면서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걸어보아 공명이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스타디움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고대 올림픽이 치루어졌고 마차경기를 하기 위한 출발선과 결승선을 볼 수 있다. 델피를 돌아보고 오늘의 최종목적지 마테오라로 이동을 하면서 이곳에도 문명을 거부하며 자유롭게 버려진 폐품으로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집시들이 사는 동네를 보았다. 마테오라는 우리나라의 설악산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6,000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마을은 숙박시설, 기념품가게, 음식점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해가 진 이후에는 이동하는 차량이나 인적이 드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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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1. 11 (토) 메테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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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슬비가 조금씩 내리는 날씨였지만 아침 일찍 동네를 한바퀴에는 돌아보았다. 분수대가 있는 작은 공원도 있고, 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부지런한 가게는 벌써 손님을 맞기 위해 빵을 굽는 모습도 보이고, 물건을 진열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흐린 날씨 때문에 뒷산을 볼 기회가 없어 몰랐지만 차를 타려 나와 보니 동네 뒷편으로 기암괴석이 펼쳐져서 감탄을 하게 한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바위산 위에 있는 수도원을 보고는 감탄사로 인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밧줄에 의지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는 뾰죽한 바위 꼭대기에 사람은 어떻게 올라갔으며 더구나 수도원은 어떻게 지었을까? 메테오라는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지방 북서부 트리칼라주의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바위군(群) 또는 그 위에 세워진 일군의 수도원이다.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이라는 뜻이다. 피니오스강(江) 상류 근방에 기둥 모양으로 우뚝우뚝 솟은 기암들이 줄지어 있는데, 그 정상에 수도원들이 있다. 바위들은 평균 높이가 300m이나 550m에 이르는 것도 있다. 11세기부터 수도원의 별원(別院)인 스키티가 세워졌다고 하나, 비잔틴제국과 세르비아왕국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14세기 초 아토스산의 수도원에서 온 수도사 성 아타나시우스가 세운 메타몰포시스투소티로스 수도원이 최초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후 은자(隱者) 네일로스가 여러 바위 위에 4채의 교회를 세웠으며 아타나시우스의 제자인 이오아사프가 수도원을 확장하였다. 수도원들에는 터가 비좁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사의 개인 기도실과 물탱크, 교회당, 휴게실 등이 있었고 도서관이 있는 곳도 있었다. 16세기에는 24개의 수도원이 있었는데 모두 밧줄과 그물을 이용해서만 올라갈 수 있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과 잇따른 내란으로 인하여 많은 수도원이 파손되었으나 1960년 복원되어 필사본들과 16세기 프레스코가 보존될 수 있었다. 아토스산 수도원과 더불어 역사적 자료의 귀중한 보고(寶庫)로서 유명하다. 1988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이곳은 기둥처럼 솟아오른 절벽 위에 수도원을 지어 놓았다. 현재는 6개의 수도원만 사용되고 있으며 몇 개는 벽체나 흔적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세상과 격리되어 절제, 금혼, 명령복종를 지키면서 수도생활에 전념하는 수도사들이 생활하고 있다. 지금은 계단이 만들어져 있지만 예전에는 로프와 그물망만이 외부와 연결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이곳에서 지냈다고 하니 대단하다. 지금도 걷기가 불편한 사람을 위해 로프로 연결된 도르래로 사람을 실어 나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수도생활뿐 아니라 한때는 독립운동을 하던 요인들의 은신처로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우리일행은 대부분 교직에 있는 사람들이어서 중간에 학교에 들려보기로 하고 한가한 시골에 있는 학교에 들렸다. 토요일 오후여서 인지 학교는 청소를 하고 있는 중년여자만 있을 뿐 비어있고, 체육관은 동네 아이들에게 개방되어 아이들이 드나드는 것을 볼 수 있다. 학교에는 작게는 10개미만의 책상이 놓여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복합건물인 듯하나 시설이 너무 나빠서 실망스러웠다. 아테네로 돌아오는 도중에 노천온천이 있는 곳에서 잠시 온천욕을 했다.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다면 갑부가 되고도 남을 텐데, 이곳에서는 유황이 포함된 온천물을 그냥 바다로 흘러 보내고 있다. 우리가 온천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한국에서 온 젊은 학생들만이 온천욕을 하고 있었고, 나중에는 외국인도 2명 합류를 했지만 이곳 그리스인들은 온천욕을 즐기지 않는다고 하는 게 이상하다. 그리스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도시가 많이 있으며 고린도, 사모, 드라게, 네아볼리, 빌립보, 암피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테네(아덴), 고린도, 밧모등이 그것이다. 도중에 앞에 가던 차가 교통사고를 일으켜 길에서 지체를 하기도 했고, 저녁식사 후에 들린 기념품가게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저녁에 리까비토스 언덕에서 아테네 야경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도록 되어 있는 일정에는 젊은이 일부만 참석했다. 그리스에서의 마지막 밤이 아쉬워 주변을 산책하다가 같은 호텔에 투숙한 다른 팀의 부부를 길에서 만나 호프집을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 호텔방에서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면서 담소하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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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1. 12 (일) 이스탄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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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일찍 호텔을 나와 공항으로 이동하면서 4일간 우리를 안내하던 유복근씨와 작별을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노후대비를 위한 그리스의 금언이라면서 『1건(健), 2재(財), 3우(友)』을 들려준다. 먼저 건강해야하고, 재산이 있어야 하며, 친구(혹은 신앙)가 있어야 노후를 제대로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우리도 명심해야 할 내용인 것 같다. 비행기는 에게해를 건너 옛날에는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고, 그리스의 땅이었던 이스탄블에 우리를 데려다 준다. 아타투르크 국제공항에는 현지 가이드 김현문씨(김선생으로 호칭)가 마중 나와 있었다. 시내로 이동하며 터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한다. - 면적 : 78만 평방 Km - 인구 : 7,120만명 - 주요도시 : 이스탄불(1,000만명), 앙카라(400만명/정치, 군사 중심) - 해안선 : 에게해, 흑해, 지중해 - 아시아(97%), 유럽(3%) - 정치형태 : 대통령, 국무총리 2원체제 (80개주 자치제) - 우리나라와의 관계 : 멀고도 가까운 나라, 혈맹(6.25사변 때 5,000명씩 3제대 파병) - 인종 : 터키, 아랍, 유태 - 종교 : 이슬람(98%) - 교육제도 : 5-3-3-4 (고졸후 1년간 영어교육제도) *국립대학의 수업료는 한국의 1/3수준이나 사립은 2배 수준 *보아지치 대학(세계 100대 대학), 중동 공과대학이 유명 *사립중고 중 미국의 학력인정 학교도 있으며 수업료는 년 20,000불 이상 - 문자 : 알파벳에서 2자(X,Q)를 빼고, 6자(글자 위아래에 기호첨가) 추가 총 30자 *아랍문자를 사용하였으나, 유럽의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알파벳 응용하여 만듬 - 언어에 악센트가 없으며, 표시한 모든 글자 발음 - 국제 자동차 전시장, 현대자동차 50:50 현지 공장 설립, 차량 평균수명 17년 정도 - 터키는 살아있는 박물관 유럽 땅이 3%이라고는 하지만 아시아의 최서단에 있는 터키는 방금 떠나온 그리스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준다.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자동차가 도착하면 몰려드는 잡상인의 모습이다. 국민소득이 3,500불로 우리나라보다 낮고, 실직자가 많아서 가이드북이나 그림엽서 같은 것을 팔려고 하는 잡상인이 어디를 가든지 많이 보인다. 월요일에는 박물관이나 유적지 중 휴관하는 곳이 있어서 일정을 조정하되 계획된 모든 코스는 빠트리지 않겠다는 김선생의 제안에 모두 동의하고 먼저 성소피아 사원을 찾았다. 이곳은 시대에 따라 교회로 사원으로 박물관으로 역할을 바꾸면서 오늘에 이른 건물이다. 다음은 성소피아 사원에 관한 자료이다. 성 소피아(HAGHIA SOPHIA; 신성한 지혜) -아담이 태어난 이 후 지금까지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 전무후무한 성전을 지으리라- 오늘날까지 남아있게 된 이 성당은 약 1,000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의 대성당으로 사용되었고 비잔틴제국의 중심지였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의 정복으로 약 5세기 동안 아야 소피아 자미(Aya Sofia Camii)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이스탄불 왕실의 모스크 중 첫 번째로 꼽혔으며, 터키 공화국 초기까지 모스크로 사용되었으나 1935년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안 황제(AD 532년 2월 23일)는 전무후무한 성전을 짓기 위하여 당대에 유명한 트랄레스의 건축가 안데미우스와 밀레투스(밀레도)의 기하학자 이시도루스를 임명하고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 황제가 직접 측량에 나서기도 하면서 매일 100명의 기술자와 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5년(537년 12월 27일)만에 완성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약 천년간 세상에서 가장 큰 건물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준공식에서 유스티안 대제는 너무나 감격하여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앞질렀오"하고 외쳤다 한다. 그 후 잦은 지진으로 계속 위협을 받고 손상되기도 했으나 아직까지도 세계에서 4번째로 큰 건물이다. 1204년 엔리쿠스 단달로(Henricus dandalo)가 이끈 제4차 십자군 원정대의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으로 소피아 성당은 철저히 유린되었으며 이제는 더 이상 회복할 가능성이 없게 되었다. 사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점령당했을 때만해도 양초나 기름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이 성당은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미술사에도 큰 몫을 하는데 모스크로 사용하면서 우상을 금지하는 이슬람 교리 때문에 모든 인물상이나 그림은 제거되고 따라서 벽과 아취에 있던 모자이크들도 두꺼운 회칠 속으로 그 아름다운 자태를 감추게 된다. 1847년 스위스의 건축가 풋사티(Fossaati)가 건물을 보수하는 중 감추어져 있는 모자이크들을 발견했으나 그것은 다시 석회석으로 덮어져야만 했다. 이 성당은 내랑, 외랑 합친 총 면적은 7,570평방미터(약 2,290평), 본당의 커다란 돔은 지상에서의 높이가 56m, 직경은 동서가 31m, 남북이 32m로서 중앙의 돔은 4개의 작은 아취가 바쳐주고, 이 아취들은 다시 4개의 튼튼한 기둥이 바치고 있다. 40개의 창문은 중앙 돔을 띠 모양으로 두르고 있어 실내의 조명을 밝게 해주는 동시에 돔 자체의 무게도 경감시켜준다. 중앙 돔 천장에 아랍어로 된 코란 귀절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성당이 모스크로 개조된 후 19세기경에 쓰여진 것이다. 중앙 본당의 양쪽 편에 있는 녹색 기둥은 세계 7대 불가사의중에 하나인 에페스의 아르테미스(달의여신) 신전에서, 네귀퉁이에 2개씩 서 있는 8개의 붉은 기둥은 바알백(Baalbek)의 헬리오스(Helios-태양신)신전에서 가져왔다. 이 기둥들의 꼭대기 머리는 코린트 양식으로 화려하게 장식 되어 있는데 중앙에는 유스티니안 대제와 그의 아내 데오도라 칭호인 "바실레우스"와 "아우구스타"의 인장이 각각 모노그램 되어 있고, 마치 강한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아칸서스 나뭇잎이 코린트 양식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중앙 바닥의 오른쪽으로 녹색, 붉은색의 대리석 석판들이 모자이크 되어 있는데, 소위 오푸스 알렉산드리움(Opus Alexandriim)이라고 불리는 이 중앙원은 당시 "우주의 배꼽"이라 간주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중국인들이 품었던 중화사상과 같은 것으로 항상 비잔틴 황제는 하나님을 대리해서 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곳에서 비잔틴 황제들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훗날 오스만 제국시 추가로 설치된 시설물에 왼쪽의 격자 窓으로 되어 이는 술탄의 예배실, 중앙 정면에 움푹 들어가게 만든 미흐랍은 이슬람교리에 따라 사우디의 메카를 향해 예배 드릴 수 있도록 표시해 놓은 것 이다. 본당의 8개 기둥 위에 커다란 나무 원판에 초록색 바탕의 금색글씨로 하나님(알라), 예언자(무하메드), 그리고 이슬람 초기의 칼리프(후계자)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2층은 원래 초기에는 여성들만의 예배 장소였는데, 나중에는 황제의 가족들을 위한 예배장소 및 비잔틴 고위 성직자들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11세기 이후 만들어진 모자이크들을 볼 수 있다. 』 성소피아 사원에는 소원을 이루어주는 기둥이 있는 데 기둥에 나있는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끼우고 발을 떼지 않고 팔을 360도 회전하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해보고 있는 장면이 재미있다. 나오는 문 위에는 금색으로 마리아가 안고 있는 어린 예수님께 완성된 성전을 바치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이 그림은 거울을 통하여 나가는 사람에게 정면으로 보여진다. 성소피아 사원 바로 맞은편에는 6개의 첨탑을 가진 블루모스크가 있다. 우리가 방문하려고 하니 예배시간이라 입구를 막아서 점심 후에 다시 들어 와야 했다. 오늘은 이곳 기후로는 드물게 영하 4도가 넘어서 우리 모두는 모처럼 덜덜 떨어야 했다. 그런데도 이 사원에 예배를 드리려 온 사람들은 밖에 마련된 수도를 이용하여 얼굴과 손발을 정성껏 닦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블루모스크(BLUE MASQUE)는 사원의 내부가 청록색의 화초 모양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푸른색의 빛이 반사되는 모습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 데, 오늘은 비가 오는 날씨라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 이슬람 사원은 술탄 아흐멧 1세가 20세 때 소피아 성당과 버금가는 모스크를 지을 목적으로 1609-1616 사이에 건축하였다. 정식으로는 술탄 아흐멧트 모스크(SULTAN AHMET MASQUE)라고 부른다. 술탄들은 종교적인 중요한 선언 시에 이 모스크를 이용하였고, 이곳에서 종교휴일의 축제를 가졌으며, 메카에 대한 성지순례의 출발지가 되었다. 돔은 직경 27. 5m, 높이 43m 나 되며 , 그 당시 모스크에는 메카 외에 6개의 탑을 세울 수가 없었는데 이 모스크는 6개의 첨탑이 세워졌다. 왕이 전쟁터에 가면서 금으로 첨탑을 하라고 지시를 했는데, 금과 발음이 비슷한 「6」으로 잘못 듣고 첨탑을 6개 만들었다고 한다. 사원에서 설교하는 이맘은 공무원으로 설교내용은 테이프로 제출되어 종교국으로부터 감독을 받고 있다고 한다. 평일에는 하루 5번씩 기도를 하는데 메카를 향해 미흐랍이 세워져 있어 신도는 그곳을 향해 엉덩이를 치켜들고 절하는 형태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매주 금요일에는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신부와 비슷한 복장을 한 이맘이 설교단에 서서 설교를 하고, 신도들은 별도로 헌금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신도들의 소득의 1/40은 이슬람력에 정해진 때에 공원에서 소나 양을 잡아 가난한 이웃에게 구제하는 일은 철저히 행한다고 한다. 성소피아 사원과 블루모스크와 인접한 곳에 히포드럼(HIPPODROME)이 있다. 이곳은 마차 경주와 검투경기, 왕을 위한 축제가 벌어졌던 곳으로 비잔틴 제국 당시 시민활동의 중심지 였다. 히포드롬의 길이는 400m, 넓이가 120m로서 약 4만 명의 관객이 앉을 수 있었다. 입구는 현재 독일 황제 Wilhelm2세의 우물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고, 그 양 옆을 따라서 계단식의 좌석이 있었고, 반원형의 양쪽 끝을 가졌다. 이곳에는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로부터 가져온 4개의 청동 말이 서있었는데 1204년 십자군들에 의해 약탈되어 지금은 베네치아의 성마르코스 교회의 정문 꼭대기에 서있다. 이곳에서는 두 번이나 큰 반란이 일어나 비잔틴 제국시의 40,000명의 반란군과 오스만 제국시의 30,000명의 근위대가 참수 되는 비극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관중석이나 기타 시설물은 오스만 제국의 도시계획에 의하여 땅밑으로 묻히고 말았다.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기원전 15세기에 이집트의 투투모스 3세가 태양신에게 바치는 비문(오벨리스크)이다. 이 탑은 AD 390년 룩소에서 로마의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콘스탄티노풀로 가져온 것이다. 수송 중에 40%가 훼손되어 현재는 20m의 높이로 4개의 놋쇠 받침대가 있는 조각된 대리석 위에 놓여져 있다. 대리석의 조각은 동쪽에는 마차 경주의 승자를 포상하기 위한 월계관을 손에 들고 있는 데오도시우스황제, 북쪽에는 왕과 왕의 가족, 서쪽에는 왕이 정복된 적들로부터 충성의 맹서를 받고 있고, 북쪽에는 왕이 관객들과 함께 경기를 관람하는 장면, 아래 부분에는 경기코스를 보여준다. 바로 옆에 뱀 기둥(The serpent column)이 있는데 고대 그리스의 아폴로신전 델피에서 가져온 것으로 세 마리의 뱀이 뒤엉킨 것 같은 모양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기둥이다. 기원전 479년 팔라타 전투에서 페르샤군을 격퇴한 그리스가 그리스의 31개 도시의 이름을 새겨 아폴로 신에게 바친 것이다. 바로 인접해 있는 거상(The Colossus)은 AD 940년 석회석 돌(높이 32m)로 만들어 기둥 위에 청동을 덮어씌우고 그 위에 농부와 어부들의 모습을 조각을 해 두었다. 그러나 제 4차 십자군이 들어와 이 도시를 파괴하면서 청동을 벗겨서 다른 용도로 사용하였다. 현재는 거칠게 보이는 돌기둥으로 남아있다. 점심 후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패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 초호화판 궁전인 돌마바흐체(DOLMABAHCE)궁전에 갔다. 『돌마바체는 "채워진 정원" 이란 뜻이다. 이 궁전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보스포러스해협에 연하여 1843-1856년 사이에 술탄 압둘 메짓트 1세가 르네상스 스타일로 건축기사 발리안의 계획에 따라 지었다. 1923년 왕정이 종식되고 터키 공화국이 되자 대통령 궁은 앙카라로 옮겨가고 이 궁전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현존하고 있는 고대 궁전 중에서 가장 화려한 이 궁전은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로 되어 있으며, 금 14톤과 은 40톤을 사용하여 이 궁전의 건축 경비는 당시 500만 금화가 들었다 한다. 수 많은 카펫트, 크리스탈 촛대, 그림들 특히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2세가 선물한 4.5톤의 무게에 750개의 촛대가 있는 회색 빛 나는 세계 최대의 샹데리에가 도움 36m 높이인 중앙 홀에 달려 있다. 국부로 추앙 받고 있는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캐말파샤가 그의 이스탄불 여행시 지병으로 인하여 1938년 10월 10일 9시5분에 57세의 일기로 이 궁전에서 죽었다. 이 궁전은 거의 원래 모양대로 유지하고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을 입장하기 위해서는 검색대를 통과해야 하며 카메라를 위해서 별도의 비용을 받고 있어 사진촬영은 입구에 있는 멋지게 생긴 위병하고만 하고 모두 눈으로 마음속으로만 담아야 했다. 저녁에는 히포드럼 옆에 있는 지하저수지(YEREBATAN SARAYI)를 방문했다. 이곳은 바실리카 시스턴이라 불리워지기도 하는데, 이 지하 저수지는 비잔틴 제국시대에 물을 저장하는 목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이 저수지는 거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이며 이 도시에 있는 많은 지하저수지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곳이다. 이 저수지는 길이 140m, 넓이는 70m, 336개의 모양이 같지 않은 기둥들이 약 4m 간격으로 되어 있고, 기둥 높이는 8m이다. 맨 마지막 부분에 희랍 신화의 Medusa조각이 된 주춧돌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가 국교가 된 후 우상 숭배사상을 타파하기 위해 신상을 무시하는 목적으로 사용 됐다는 설이 있는데, 하나는 옆으로 하나는 거꾸로 세워져 있다. 007영화 "From Russia with love"의 몇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저녁에는 6명의 교인이 모여 호텔에서 간단하게 기도회 모임을 가졌다. 고국에 있으면 교회에 갔었을 날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거대한 파르테논 신전 옆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행한 성경의 기록’을 읽으며 이 말씀이 역사적 기록임을 상기해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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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1. 13 (월) 이스탄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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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첫 방문지는 터키 최고의 건축가 미말시난의 작품인 슐레이마니에(SULEIMANIYE CAMI) 사원이다. 이 사원은 술탄 슐레이마니에 1세가 헝가리에서의 전승 후 돌아와 당대의 名건축가 시난(Sinan)에게 명하여 1550-1557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서 오스만 시대 사원 중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 모스크 정문에 "알라(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 모하메드는 그의 예언자이다"라고 쓰여있다. 4개의 첨탑은 슐레이마니에가 이스탄불을 점령한 후 4번째 왕이라는 뜻이고, 열 개의 발코니는 그가 오스만제국의 열번째 통치자라는 뜻이다. 중앙 도움의 높이는 53m, 직경이 27.50m로서 공명장치로 유명하며, 건축 시 페르시아에서 보내온 보석들을 섞어서 진 3개의 발코니가 있는 첨탑은 보석 첨탑이라 불린다. 모든 사원에는 무덤이 있는데 이곳에도 왕비를 위한 무덤과 많은 묘비석들이 보인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운행하는 배를 타기 위해 상점이 늘어서 있는 골목길을 통해 여객선 부두까지 걸었다. 부두 부근의 한 상점은 코렐리(Koreli:한국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교민이 아닌 터키인이 운영하는 난로연통 등을 파는 상점이라고 한다. 유람선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오르내리면서 유럽과 아시아를 하루에도 여러 차례 왕복하는 것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바로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이다. 마르마라(Marmara)바다와 흑해를 연결하는 이 해협의 길이는 31Km에 달하며 넓은 폭은 4Km, 좁은 폭은 800m이다. 평균 수심은 40m, 가장 깊은 곳은 100m로서 해협의 물은 역류하고 있다. 이스탄불의 1,000만 시민의 생활하수가 제대로 정화되지 않은 상태로 버려지는 데도 물이 맑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닷가에는 숲이 우거져 있으며 음식점, 찻집, 별장 등이 있어서 조용하다. 이곳에는 부유층을 위한 별장과 호화로운 요트들을 볼 수 있다. 수면의 바닷물은 흑해에서 지중해 쪽으로 흐르고 있으나 바다 속은 지중해에서 흑해로 흐르고 있다. 흑해의 염도가 18/밀, 에게해가 33/밀, 지중해가 38/밀로서 염분의 농도가 진한 곳에서 연한 곳으로 흐르는 삼투압 현상 때문이다. 위치는 흑해-보스포러스해협-마르마라-다다넬스해협-에게해-지중해 순이다. 유람선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따라 운항하면서 아시아지역과 유럽지역의 선착장에 교대로 여객들은 내려준다. 보스포러스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로부터 시작된다.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신이 어느 날 이요 요정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눈치를 챈 제우스의 부인인 헤라가 나타나자 제우스는 놀라 그만 이요를 동물인 소로 만들어 버렸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소를 보고 "이 소가 누구의 것이요?" 하고 헤라가 묻자 제우스는 시치미를 때고 "나도 잘 모르는 일이요" 그러자 헤라가 "그럼 이 소를 내가 가져가겠소" 라고 말했다. 그리고 헤라는 눈이 100개 달린 마르고스란 괴물을 시켜 감시하도록 했다. 밤낮으로 50개의 눈을 감고 뜨면서 감시를 하니 제우스의 마음은 착잡하여 헤르메스(제우스의 손자)를 전령으로 보내어 마르고스를 죽이도록 했다. 헤르메스는 괴물을 죽이고 그 눈을 빼서 공작새를 만들었다. 헤라는 분하여 두 번째 괴물을 보내는데 소로 변한 이요는 괴물에 쫓기어 그리스의 이오니아 지방으로 도망 다니다 바다를 건너 이집트까지 가게 되었다. 이 때 소가 바다를 건넜다 하여 이 해협을 보스포러스라 한다. 제우스는 이요가 너무 불쌍하여 헤라에게 사과를 하고 다시 원래의 모습인 요정으로 바꾸어 주었다. 제1교 (보스포러스 다리: THE BOSPHORUS BRIDGE) 이 아름다운 해협을 가로 지르는 두 개의 다리 중에 하나인 이 다리는 오스만제국을 터키 공화국으로 선포한 후 50주년이 되는 1973년 10월29일 완공했다. 다리의 길이는 1,074m, 수면에서의 다리 높이는 65m, 다리의 탑 높이는 100m, 설계는 영국, 건축은 독일에서 하였으며 3년의 공사 기간을 걸쳐 완공했다. 건축비는 당시의 시가로 115,000만불 (당시 1$=10 T.L) 이 들었다. 초당 45m 강풍에도 견디게 설계되었으며 건축하기 전 모든 예상되는 천재지변에 대비하여 제일 안전도 높은 다리로 이스탄불의 명물이 되었다. 제2교(화티 술탄 메흐멧 다리:FATIH SUTAN MEHMET BRIDGE) 이 해협에 두 번째 세운 다리로서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풀(현 이스탄불)을 함락한 정복자(FATIH) 메흐멧 황제(SUTAN)의 이름을 붙인 이 다리는 1985년 5월 착공, 1988년 7월3일 일본의 기술진에 의해 건축 설계되었다. 당시의 시가로 250,000만불(당시 1$=600 TL) 공사비가 들었다. 다리의 길이는 1,090m, 앵커리지 길이는 1,150m, 바다 수면에서의 다리 높이는 64m, 다리의 탑 높이는 107m, 4차선과 인도가 있으나 보스포러스 다리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통행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자료제공: 도로공사) 선착장에 도착한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를 타고 보스포러스 해안을 따라 어제 다녀간 돌마바흐체 궁전을 지나 보스포러스가 잘 보이는 레스토랑 ‘아리아’에서 점심을 했다. 서빙하는 사람들이 친절하기도 했지만 잘 생겨서 영화배우 같다고 칭찬을 해 주니 좋아한다. 바다에는 가마우지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 옆에는 대개 갈매기들이 있다. 가마우지는 부리에서 기름이 나와 털이 젖지 않아서 잠수를 해서 물고기를 잡아 물위로 올라와서 삼키는데 미쳐 삼키지 못한 고기를 갈매기가 낚아채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갈매기의 행위가 얄미워 보이나 그런 것이 자연의 법칙 아닌가? 갈매기는 잠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 잡아채는 능력이 있는 것 아닐까. 점심 후에 이스탄불 최고의 전망대 갈라타 탑(GALATA TOWER)를 찾았다. 오늘날 보이는 탑은 원래 6세기경 "그리스도의 탑"이라는 이름으로 비잔틴 제국에 의해 세워졌던 것을 1348년 제노아 자치령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이 지역의 이름을 따서 갈라타 탑이라 부른다. 1446년 탑의 상층부가 추가 건축되었으며 제노아 상인들의 해상 감시탑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오스만제국 시는 감옥이나 화재 감시탑으로도 사용하였다. 이 탑은 총 9층 61m, 탑의 발코니는 해발 140m 높이이다. 17세기 인류 최초로 아흐멧 첼래비(Ahmet celebi)이라는 사람이 두 날개 달린 Hezarfen을 사용해서 이 탑에서 아시아 쪽 위스키다르까지 날았다. 갈라타 탑에 오르는 엘리베이터는 별도의 요금이 부과되는 것이나 회사에서 부담해 주어서 우리는 9층 전망대에서 보이는 보스포러스 해협과 이스탄불 시가지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9층 전망대에는 레스토랑과 나이트크럽이 있어서 연인들에게는 분위기 있는 장소로 보인다. 갈라타 탑에서 내려와 성소피아사원 옆에 있는 톱카프 궁전(TOPKAPI SARAY)에 갔다. 약 700만 평방미터 넓이에 5Km의 성벽으로 둘려 싸여 있는 이 오스만 제국의 궁전은 바티칸 궁전 보다 크고 모나코 公國의 거의 반이나 된다. 이 궁전이 들어서기 전에는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인 비잔틴 제국의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위치해 있었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황제) Mehmet 2세가 콘스탄티노풀을 점령한 후 현 이스탄불 대학 위치에 첫번째 궁전을 세웠으나, 이 젊은 술탄은 골든혼, 보스포러스해협, 마르마라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이 천혜의 절경을 잊지 못해 1459년 현재의 자리에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완공 1465년) 이 톱카프 궁전은 술탄 압둘 메짓트가 돌마바흐체궁전을 지은 후 옮겨가기 전(1839년)까지 공식적인 왕의 저택이었다. 이 궁전에는 왕족의 소유였던 도자기와 보석, 무기, 서예 품 그리고 많은 예술품 등이 소장되어 있으며 이들은 필적할 수 없이 훌륭한 것들이다. 예절의 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두 번째 길은 궁중의 부엌으로 이르는 길인데 현재 이 부엌들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수(10,700여 개)를 가진 도자기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왕실 부엌은 유명한 건축가 시난의 작품이다. 네 번째 길은 Divan으로 통해 지는데 디반은 두개의 방으로 회교장관 사무실과 공공기록 사무실로 되어있다. 회의 진행 중에 황제는 회교장관 사무실 뒤에 나있는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회의내용을 경청하고 회의 시간동안 스파이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 탑을 세워 감시하게 했다. 이 「비밀의 문」은 황제가 언제든지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거짓말로 보고하지 못하게 하는데 공헌했을 것이다. 이 Divan에서는 외국인을 영접하는데도 사용했다. 디반 옆의 건물은 무기 저장고이며 옛 날엔 왕들의 보석이 저장되어 있었다. 세번째 길을 따라가면 지복 문에서 황제들의 즉위식이 있었고, 지복 문을 지나면 황제는 황금과 에메랄드로 된 옥좌에 앉아 사신을 영접했다. 使臣의 접견 시에 이 건물의 입구에 만들어진 우물에서 흐르는 물소리로 대화를 엿듣지 못하게 했으며 이곳에는 귀머거리를 근무하게 했다고 한다. 침실에도 삼단의 폭포를 만들어 침실에서의 은밀한 소리도 외부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세번째 궁정 동쪽 편으로 오스만 제국 당시에 사용되었던 보석 전시실이 있는데 영화 TOPKAPI에 등장한 바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단검(손잡이에 3개의 커다란 에메랄드가 박힌), 3,260그람이나 되는 세계에서 제일 큰 에메랄드, 세계에서 일곱번째로 큰 86카랏트 다이아 등 황금, 진주, 루비 등으로 수많은 보석들이 진열되어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둘러보지 못했다. 신성관에는 1517년 셀림(Selim) 1세가 이집트 정복 후에 가져온 것으로 모하메드와 이슬람 세계의 유물들이 있다. 왕실 뒤쪽에는 하렘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이 하렘에는 별도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해가 지고 어두어진 때에 찾은 에이읍 술탄사원은 사원을 향해서 비춰진 조명으로 인해 더욱 찬란해 보인다. 다른 사원과 마찬가지로 묘비들이 있고, 사원 안에는 비슷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사원 앞에는 물을 뿜어 올리는 분수가 있는 광장이 있어 추운 날씨에도 연인들의 모습이 종종 보인다. 이 곳에 처음 세워진 건물은 아랍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처음 포위했을 때 순교한 '에이윱 엘 엔사리'라고 알려진 할리드 빈제이드를 기념하기 위해 674-678년에 건설되었다. 메흐멧 2세가 처음 세웠던 사원의 자취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사원은 1766년 발생한 지진 후 먼저 있던 사원을 부수고 1798-1800년에 새로이 지은 것이다. 사원은 장방형의 형태를 띄며 중앙에 돔이 있다. 돔의 주위에는 8개의 작은 돔들이 있는데, 이것은 건축가 시난이 아잡카프에 지은 소콜루 사원과 상당히 비슷하다.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바로크 사원과는 상당히 판이하다. 사원내부는 당시의 필적으로 쓰인 글들과 명각(銘刻)들로 장식되어 있다. 주로 청색과 녹색의 16세기에 만들어진 타일들로 장식된 에이윱 엔사리의 무덤은 상당히 흥미롭다. 팔각형이며 돔이 있는 사원의 정원에 직면하고 있고 청동으로 양각된 '인생의 창문'은 술탄 아흐멧 1세의 후원 하에 세워졌다. 비석에는 사원의 첨탑을 만드는 동안 술탄 아흐멧이 이 무덤을 방문했었다고 쓰여 있다. 정원의 가장 뒤쪽의 아름다운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는 곳에는 우아하게 지어진 분수가 있다. 외부 정원의 3면은 12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13개의 돔이 있는 주랑으로 되어 있다. 돔들 중 내부에 있는 일곱 개의 돔으로 형성된 장소는 집회 장소로 사용된다. 플라타나스 나무주위의 계단 난간의 네 코너에는 '행운의우물'이라고 불리는 작은 분수가 있다. 에이윱 사원의 부속 건물 중에는 회교 신학교, 대상 숙소, 목욕탕과 무료 음식 배급소가 있었는데, 현재는 목욕탕과 무덤의 일부만 남아 있다. 현재도 할례를 받는 소년들, 희망이 없는 환자들, 그리고 국제적인 게임을 앞둔 스포츠 팀들이 이 사원에 와서 기도를 한다. 에이윱 지역에는 신성한 지역 근처에 묻히기를 원하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무덤들이 많이 있다. '피에르 로티' 카페에서 골든 혼을 바라보며 터키 커피를 마시며 여흥에 취할 수 있는 카페가 있다. 이 카페의 이름은 19세기에 이 곳에서 그의 작품을 썼던 프랑스작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탁심 광장이다. 이스티크랄 거리의 끝에 있는 커다란 광장으로 이스탄불에서 가장 활동적인 도시 중심지 중의 하나가 탁심 광장이다. 매일 수백 명이 통행하는 이 광장은 상업 및 쇼핑의 중심지이며, 이스티크랄 거리의 초입에 있으며 이스탄불의 각 지역으로 물을 분배해 주는 건물의 이름을 따서 탁심 광장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이 건물은 1733년에 지어졌다. 과거에는 이 광장에서 많은 정치적인 모임과 데모가 벌어졌다. 탁심 광장의 중앙에는 높이 12미터의 공화국 기념비가 있는데, 이 것은 1928년에 이태리 건축가 피에트로 카노니카가 만든 것이다. 청동의 인물 동상이 있는 받침대는 녹색과 붉은 색의 이태리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이 것은 터키의 독립 전쟁과 공화국의 탄생을 상징한다. 이 광장의 다른 쪽에 있는 커다란 건물은 1950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69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아타튜르크 문화센터이다. 이 건물은 1970년 발생한 화재 이후에 재 복구되었다. 이 곳에는 콘서트 장과 전시실, 그리고 극장이 있다. 다른 쪽에는 특급 호텔인 마르마라 호텔이 있다. 탁심에서 북서쪽으로 가는 큰 도로는 줌후리예트 도로이다. 이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엘마다와 하르비예 지역에 이르게 되고, 힐튼 호텔, 장교클럽으로 사용되는 높은 건물, 하르비예 병영, 그리고 이스탄불에서 가장 훌륭한 박물관 중의 하나인 군사 박물관이 있다. 1959년에 개막된 군사 박물관은 각종무기, 헬멧, 유니폼, 갑옷, 그리고 l2세기부터 한국 전쟁까지 참전했던 터키 군대가 사용했던 각종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 들 외에도 전쟁과 관련된 각종그림들, 텐트, 국기, 펜단트, 훈장, 그리고 적군으로부터 빼앗은 각종 전리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탁심거리에는 차를 주차하기가 어려워 만나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자유시간을 주었다. 처음에는 같이 움직이다가 나중에는 각자 흩어져서 보고 싶은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케밥을 비롯한 음식들을 파는 곳, 옷이나 귀금속을 파는 곳, 환전을 해주는 곳 등 다양한 상점들이 있다. 그리스에서는 관광지에 있는 가이드가 필요한 곳에만 동행하였으나 터키 내에서는 단체 관광객에는 항상 현지 가이드가 함께 했는데 우리의 가이드는 ‘야사르’이다. 그와 함께 탁심지역을 다니면서 신상에 대해 물어 보았다. 30세에 아직 미혼이며 카파도키아에 부모가 살고 있으며 주로 일본, 한국사람을 상대로 가이드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와 함께 컴퓨터를 파는 곳이 있는지를 찾아보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찾지를 못했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찻집이 있어 찾아갔지만 문이 잠겨 있어 같은 건물에 있는 다른 찻집에서 차를 마시기로 했다. 벽에는 전쟁에 관련되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고 반전운동하는 단체에서 발행되는 책자가 진열되어 있고 터키의 젊은이들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사과차와 터키차등을 마셨는데 한잔에 1불정도 한다. 도중에 있는 환전소에 써 있는 환율을 보니, 미화 1불에 대략 1,660,000TC(터키리라) 정도이다. 1불에 100만리라 이상이니 숫자가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나 뒤에 0 셋을 제외하면 대략 우리 돈과 비슷해진다. 리라에도 3개의 0은 적게 표시되어 있다. 유로에 가입하기 위해 예비국가로 올라 있어서-그렇게 되면 유로화를 써야 되니까-화폐개혁을 못하는 게 아닌가 추측된다. 주 5일제 근무를 시작한 것이 오래되었고, 남자는 나이에 관계없이 근속 25년, 여자는 20년 이상이면 정년퇴직을 하고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게 된다고 한다. 파출부를 고용하는 데도 월 250불 정도의 급료 외에 100불의 연금부금을 고용주가 부담해야 하는 철저한 연금제도를 도입하고 있다고 한다. 경제상황은 좋지 못해 한때는 물가상승률이 년 100% 이상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실업자 문제로 젊은이의 대다수가 직업을 가질 수가 없다고 하며 그런 면에서 야사르는 ‘행운아’라고 한다. 호텔로 돌아오는 도중에 몇 사람은 이곳의 명물인 밸리댄스(배꼽춤)을 보기 위해 도중하차를 했지만 대부분은 호텔로 바로 왔다. 호텔지하에는 실내풀장, 헬스장, 사우나 시설 등이 잘 되어 있어 시내를 벗어난 외곽지에 있지만 저녁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비즈니스 센터에는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가 있었지만 한글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깔려있지 않아 이용할 수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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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1. 14 (화) 에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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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일찍 공항에서 이즈밀로 가는 국내선을 타고 이동했다. 현지 가이드 야사르는 지난 밤새 버스로 이동하여 이즈밀 공항에서 새로운 버스기사와 함께 우리를 마중해 준다. 버스는 과속하는 일이 없으며 길에는 단속하는 교통경찰도 거의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버스에는 매일의 운행내용이 기록되는 타코메타가 있어서 언제든지 교통경찰이 과속을 확인할 수 있어 과속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도입해 볼 만한 제도인 것 같다. 차중에서 한때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노래 “우스크다라 머나먼 길 찾아왔건만....”로 시작되는 노래를 배웠다. Uskudar'a gideriken Uskudar'a gideriken aldida bir yagmur (X2) 위스퀴다르로 가는데.... 그 때에 비는 내리고.... Katibimin setresi huzun etegi camur (X2) 시인의 얼굴에는 슬픔이..... 치마는 젖고..... Katip uykudan uyanmis gozleri mahmur (X2) 시인은 잠에서 깨어나..... 눈은 아직 부어있고.... Katip benim ben katibin el ne karisir 시인은 나의, 나는 시인의..... 사람들이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네.... Katibime kolalida gomlek ne guzel yakisir (X2) 시인의 풀먹인 샤스가 어찌 그리 잘 어울리는지..... Uskudar'a gideriken bir mendil buldum (X2) 위스퀴다르로 갈 때에...... 손수건을 발견했다. Mendilimin icinede lokum doldurdum (X2) 손수건에 캔디를 가득 채웠다. Katibimi arariken yanimda buldum (X2) 시인을 찾을 때에..... 내 곁에서 그를 발견했다. Katip benim ben katibin el ne karisir 시인은 나의, 나는 시인의..... 사람들이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네.... Katibime kolalida gomlek ne guzel yakisir (X2) 시인의 풀먹인 샤스가 어찌 그리 잘 어울리는지..... * 해설: 노래의 가사를 번역할 때 그 노래 속에 숨겨진 뜻들을 표현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해석이 좀 어색합니다. 노래 자체가 오래된 것이고 사용된 단어도 옛 오스만제국 때 사용하던 언어들이 많고.... 아무튼 대략의 뜻입니다. 터키어를 잘 하시는 분들은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서 해석하여 사용하십시오. @ Katip은 서기, 비서, 시인, 작가 등으로 해석이 가능한 오스만언어입니다. 이즈밀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곳은 성경에 나타나는 7개 교회 중에 하나인 에페스(에베소:EPHESUS)지방 이다. 현재의 지명은 셀축(SELCUK)이며, 성경에서 말하는 에베소 교회는 특정교회를 지칭하는 것보다는 그 지방(에베소)에 거주하는 교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역사에서 Ephesus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의 Hittite(성경의 햇족속)비문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렸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이다. 기원 후 1세기에 에베소는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다. 37-42년 사이에 기독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바울은 그의 2차와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를 방문하여 선교를 벌이고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사도요한도 그리스도로부터 성모마리아를 돌 볼 임무를 부여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 64년 사도바울이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 당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서 에베소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다. 요한은 노구를 이끌고 버가모, 서머나 등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후 지중해 연안의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했다. 요한은 이곳에서 계시록을 썼다. 로마황제 Domitian이 피살당하자, 요한도 유배에서 풀려나(AD96) 에베소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그 후 요한은 자신의 뜻에 따라 에베소에 묻혔으며, 비잔틴 제국시대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요한의 교회’가 세워졌다. 7-8세기에 들어와 에베소는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에는 터어키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옛날의 번성하던 에베소는 흑해로 흘러들어가는 카이스테르강의 침전물이 시대에 따라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지도가 보여주듯이 전성기에는 시내에 가까운 곳까지 배로 물건을 싣고 와서 육지에 있는 상점 등에 의해 거래가 이루어 진 것을 알 수 있다. 귀족이 다니는 도로는 아름다운 대리석을 도로에 깔고 지붕을 덮었고 마차도 다니지 못 하도록 했다. 당시에도 토기로 된 수도관으로 상수도 시설과 하수도 시설을 하였고, 목욕탕에는 온탕, 위에서 찬물이 떨어지는 폭포탕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동시에 50명이 용변을 해결할 수 있는 화장실을 만들었는데 지하로 갚은 곳에 물을 흐르게 해서 처리를 했다.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지어진 셀수스 도서관과 지하통로로 연결된 곳에는 매음을 하던 창녀들이 사는 시설이 있는 것이 아이러니다. 뿐만 아니라 도로 가운데 대리석으로 발의 크기, 동전을 잴 수 있는 홈, 딸기와 하트모양의 최초의 매춘광고도 볼 수 있다. 멀리 산위에는 바울감옥이 있는데 이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하는 일이 당시에 은으로 만든 아르데미의 신상인 은감실을 만드는 은장색(銀匠色)인 데메드리오 일행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는 일이므로(행19:24) 이들의 항의시위를 로마시민인 바울을 보호하기 위하여 감옥에 두었다는 설이 있다. 사도요한의 교회 313년 콘스탄티노플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 에베소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자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가 건립되었다. 그 후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안 황제가 (527-565)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의 교회로 증축시켰다. 교회의 심장부인 본당은 십자가 모양으로 되어 있고, 이곳에 요한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에는 몸만 있고 요한의 머리는 이스탄불의 톱카프궁전에 보관되어 있다. 지금은 작은 유리 상자 안에 모형과 주춧돌과 남은 기둥으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교회의 한쪽에는 당시에 물 속에 잠기는 침례로 세례를 행했던 장소가 남아 있다. 박해의 문 이 문은 요한의 교회 앞에 세워진 것으로 대리석 부분을 에베소의 경기장에서 가져온 것인데, 야수와 전사들의 결투를 즐기던 3-4세기의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이 경기장에서 야수들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이 경기장으로 달려가서 그 대리석들을 부수어 박해의 문을 지은 것이다. 아르테미 신전 풍요의 여신이며 달의 여신을 위한 아르테미신전은 세계7대불가사의의 하나로 불리우는 BC550년에 세워진 최초의 대리석 건물로써 120개의 기둥을 가지고 있었으나 226년 고트족에 의해 파괴되어 이스탄불의 성소피아성당의 기둥으로 혹은 지하저수조의 기둥으로 사용되었고 지금은 흩어진 잔해와 콘크리트로 복원된 일부만 있을 뿐이다. 아르테미신상은 가슴에 24개의 유방을 가진 모습으로 로타리에 복제품이 세워져 있으며, 소형기념품으로도 제작되어 팔리고 있다. 이사벨라 사원 셀죽터키의 최초의 건물로 건축사의 소중한 자료로 요한 기념교회 근처에 있다. 누가의 묘지 4복음서의 하나인 누가의 묘지는 유일하게 한글로 표지가 붙어 있어 쉽게 알 수가 있고, 근처에서 황소와 십자가로 된 묘비가 있어 누가의 묘지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야외 원형극장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으로 극장의 무대는 낮은 곳에 위치하였고, 무대 주변에 물을 흐르게 하여 공명을 이용하여 소리를 전달하였다. 특히 흑해를 앞에 두어 바닷바람을 이하여 소리를 전달하게 하였고 무대 뒤의 벽에는 조각을 해서 장식 하였으나 파괴되어 있다. 그 모형은 파묵칼레에 있는 히에라폴리스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음향효과를 확인하기 위하여 김선생의 통제 하에 2개조로 나누어 ‘서울의 찬가’, ‘아리랑’등으로 노래자랑을 했다. 정말 높은 좌석에서도 노래 소리는 잘 들렸고, 노래뿐 아니라 소근거리는 말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 함께 있던 외국인들이 박수로 응원을 해 주었다. 성모마리아의 교회 이 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431년 이곳에서 제3차종교회의가 열리고 기독교 교리를 토론한 곳이다. 네스토리우스 (Nestorius)는 안디옥 교회에 있을 때부터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이론을 주장 하고 나섰다. 이 때 약 200여명의 성직자들이 3개월간 토론 끝에 네스토리우스의 견해는 이단으로 결정되었다. 이 회의록에는 성모마리아가 에베소에 왔으며, 이곳에서 살다가 묻혔다는 문구가 남아있다. 마리아의 집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죽기 전 요한을 가리키며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다시 마리아를 가리켜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다. (요 19:26-27) 그리하여 요한은 박해를 피해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로 오게 되며 제3차 종교회의록에 기록되어 있기를 요한이 마리아에게 산 위에 집 한 채를 지어드렸다고 하였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집의 장소는 잊혀가고 폐허가 되어 찾을 길이 없었다. 그 후 1878년 캐더린(Catherine)이라고 하는 독일수녀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성모마리아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펴냈는데, 이 책 속에 기이하게도 마리아의 집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수녀는 자기가 태어난 고장을 한번도 떠난 일이 없으므로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나자렛신부가 1891년 탐사반을 조직하여 오늘날의 성모마리아의 집을 발견하게 되는데, 집 터 모양은 캐더린이 기록한 모습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이에 1961년에 이르러 교황 요한21세는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고, 이곳을 성지로 공식 선포하였다. 다음은 인터넷에서 얻은 자료이다. 『 이즈밀에서 아이든 방향으로 고속도로를 타고 한시간 가량 달리면, 셀축에 도달할 수 있다. 셀축에는 터키에서 가장 큰 고대 도시였던 에베소(Efes:에페스)가 있다. 터키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인접해 있는 쿠사다스 해변은 에게해의 휴양지를 찾는 유럽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은빛 찬란한 모래사장과 진주알처럼 빛나는 에게해의 물결은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위로를 주기에 충분하다. 에베소란 헬라어로 '인내'란 뜻이다. 역사가 스트라보에 의하면, 에베소라는 이름은 아빠소스라는 아마존 족의 여왕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마존어로 ‘아빠소스’는 '꿀벌'이란 뜻이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서해안, 코레소스 산맥과 지중해 사이의 카이스테르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다. 에베소는 로마 당시 동양과 서양을 잇는 상업, 종교, 문화의 중심지였다. 특히 정치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어 '아시아 최대의 도시'라는 명예를 누렸던 곳이다. 당시 에베소에는 25만명의 인구가 살았었다. 에베소 도시의 서쪽 언덕에는 '사도 요한의 교회'와 '박해의 문'이 있고, 그 옆에는 셀축성과 이사베이 모스크가 있다. 그 밑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이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다. 도시의 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피온산(Panayir Dagi) 기슭에는 고대 에베소의 유적들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또한 피온산 남쪽의 코레소스 산(Bulul Dagi) 꼭대기에는 '마리아의 집'이 있다. 에베소 도시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역사에서 에베소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 경의 힛타이트(Hittite, 기독교 성경상의 헷족속) 비문이다. 그 비문에 아파사스(Apasas)라고 불려졌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스의 역사가요, 철학자인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에베소 도시는 아마존족이 기원전 1,400년 경에 처음으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에베소를 문화적, 상업적으로 발전시킨 민족은 아니었다. 그 후 기원전 1,100년경 이오니온 족인 아테네 왕자 안드로클레스가 여인들이 다스리는 아마존 토착민들을 추방하고 시키고 에베소를 건설하였다. 안드로클레스는 당시의 전통에 따라 새 도시를 세우기 위해 델피 신전으로부터 허락을 받고자 했다. 그는 그곳에서 '생선과 산돼지와 불이 함께 만나는 곳에 도시를 세우라'는 신탁을 받았다. 에베소 지역에 이르러 그가 부하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 먹던 중에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불똥이 튀어 코레소서 산에 불이 나고 말았다. 바로 그 때에 그 숲속에서 산돼지가 달려 나왔는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곳이 '신이 원하는 장소'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그것을 기념하는 '산돼지 상'을 건립하였다. 아마존족이 추방되고, 아테네에서 이주해 온 그리스인들은 에베소에 정착하면서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였다. 기원전 560년경, 리디아 군주 크로에수스(Croesus)가 에베소를 점령하여 일시적으로 지배를 했으나, 주민들의 열정적인 아데미 숭배에 감동하여 퇴각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546년경에는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에베소를 정복했다. 그 후 에베소는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세력을 다투는 각축장이 되었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에베소를 정복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후에 그의 부하이던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에베소의 지배자로 등장했다. 리시마쿠스는 피온산 기슭에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명하고, 도시의 성벽을 9 Km정도로 쌓았다. 그는 도시를 확장하고 난 후 도시 이름을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서 '아르시노에'로 바꾸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은 바로 이 시대때 부터의 유적이다. 그러나 리시마쿠스가 죽은 뒤 시민들은 다시 '에베소'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세력을 키워오던 시리아가 마침내 셀레우코스(Seleukos) 1세때에 에베소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지배는 오래 가지 못했고, 기원전 190년 막강한 세력으로 대두한 페르가뭄(성경의 버가모)왕국에게 에베소를 내주게 된다. 당시의 최강국이 었던 로마가 아나톨리아로 진출하게 됨에 따라 버가모의 마지막 왕 앗탈로스 3세( Attalos)는 자신의 왕국을 로마제국에 자진 헌납 함으로서, 에베소는 그리스 시대에서 로마시대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한때, 로마제국의 과중한 세금과 압제에 항거하는 폰투스왕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의 반란으로 에베소 도시는 일부가 파괴되기도 했지만, 에베소는 로마시대에 가장 큰 전성기를 맞이했다. 로마인들은 로마제국의 아시아 수도를 페르가뭄(버가모)에서 에베소로 옮기고 이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 나갔다. 기원전 33년, 로마황제 안토니우스는 그의 정적 옥타비우스(후에 Augustus로 개명)와 대치하던 중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곳 에베소에 머물기도 했다. 에베소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시대에 더욱 번성하여, 로마의 5대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에베소는 비잔틴 제국으로 그리고 오스만 제국으로 바뀌면서 오늘날에는 터키의 유명한 관광지로만 남게 되었다.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에베소가 페허가 되어 버린 것은 대지진 때문이다. 게다가 6세기 중엽 진흙으로 덮여진 항만에서 모기들이 생겨 말라리아 병이 확산됨에 따라 사람들은 아름다운 에베소를 떠나야만 했다. 12세기에 이르러 이곳에 침략해온 셀축 터키인들의 공격으로 남아있던 에베소의 기독교인들도 정든 도시를 버리고 타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곳에 침략해 온 터키인들은 회교도들이었기 때문이다. 에베소는 정치적으로 로마의 자치 도시였고, 상업적으로는 세계적인 무역 도시였다. 로마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자치 정부를 허용했다. 에베소에 로마 군대를 강제적으로 주둔시킨 적이 한 번도 없다. 에베소는 정치적으로는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아 독자적인 행정관이 있었다. 또한, 민주적으로 선출된 통치기관으로서 민회관과 순회 재판소가 있었으며 기타 민간 기구들도 있었다. 에베소는 당시 상업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고대 세계의 교통망은 오늘날처럼 용이하지 않아 주로 강 유역을 따라 상업과 무역이 성행하였다. 특별히 이곳은 이스테르 강어귀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이 지역에 성행하는 무역을 관장할 뿐 아니라 시리아, 인도, 아라비아, 이집트 등 세계 각국에서 몰려 온 상인들이 식료품, 향료, 고급 옷감에서부터 금, 은, 보석, 도자기 및 노예 판매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품을 거래하는 동양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몰려 온 상인들, 은행업자, 창고업자, 운수업자들은 물론 그들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법률가, 대서업자, 예술가, 철학자 등 수 많은 사람들이 에베소로 몰려왔다. 이곳은 기원전 3세기부터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거대한 시장이 생겼다. 이 시장의 바닥은 대리석으로 포장되고 그 주위에는 기둥들로 둘러져 있었으며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연못도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시장의 개점과 폐점을 알리기 위해 물시계와 해시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에베소에는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도시였다. 시민들을 위한 위락 시설로 2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 경기장과 체육관, 음악당, 거대한 목욕탕 등이 있었다. 지식들을 위해서는 도서관과 학교가 있었고, 여행자들을 위해서는 여관이나 유곽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세계의 많은 여성들이 에베소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후 수시로 에베소에 들러 보석과 화장품을 구입했다고 한다. 에베소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이 중에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는 곳이다. 이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큰 것으로 거대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그리스인의 구전에 의하면, '지금까지 태양이 운행하는 중에 아데미 신전보다 더 훌륭한 것을 보지 못했노라'고 하는 격찬의 말이 있다. 이 신전에서의 여신을 숭배하는 모습은 기묘하고 황홀하고 광적이다. 고함소리와 울음소리를 동반한다. 나팔이 울리면서 분향을 시작하게 되면, 군중들은 흥분과 발광으로 날뛴다. 게다가 음탕하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서슴치 않고 행하였다. 에베소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였다. 에베소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숭배했던 아데미 여신은 가슴에 유방이 24개가 달린 풍요의 여신이다. 아데미 여신의 머리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성이 있고, 몸에는 특이한 사냥꾼 니므롯을 상징하는 사자, 호랑이, 사슴 등의 다양한 짐승들의 부조로 새겨져 있다. 매년 5월 아데미 여신의 축제날이 되면 유방과 같은 수의 24명의 흰 옷을 입은 여자 사제들이 앞에 서고, 뒤에는 자신의 고환을 아데미 여신에게 바친 남자 사제들이 여신의 호위병처럼 뒤 따른다. 축제의 행렬은 아데미 신전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데미 신전에서 출발한 아데미 신상과 축제 행렬은 에베소 시의 동쪽에 있는 마그네시아 문을 통해 입성하고, 동방 체육관과 시장, 음악당을 지나서 에베소 시청에 이른다. 에베소 시청 앞에는 또 하나의 아데미 여신상이 밖을 향하여 서 있는데 두 개의 여신상이 만나게 되면 군중들의 열광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때, 에베소의 총독은 관저에서 나와서 아데미 여신에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총독의 인사를 받은 아데미 여신상은 크레테 도로를 지나 셀수스 도서관을 거쳐 에베소 광장에 이른다. 광장에서 왼쪽 방향으로 항구대로를 지나 부두에 이르게 된다. 부두에 이르면, 드디어 소들을 바치는 희생 제사가 드려진다. 남자 사제들이 24마리의 황소 고환을 잘라 아데미 여신의 목에 걸어 주면, 군중들의 열광인 함성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무용수들은 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도살된 소들이 제단에 올려지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데미 축제가 무르익게 된다. 〈출처:Kim Myung-Ho:turkeypeople@turkeypeople.com〉 에페소를 돌아보고 숙소가 있는 쿠사다시로 돌아오는 도중에 양피공장을 들렸다. 자리에 안내된 후에 터키차 한잔씩이 옮겨 돌려지고 곧 경쾌한 음악이 흐르면서 양피제품를 입은 젊은 남녀들에 의해 패션쇼가 진행되었다. 한창 절정에 오른 순간 두 명의 남녀 모델은 손님 중에서 남녀 1명씩을 끌고 무대 뒤로 들어간다. 가이드로부터 사전에 힌트가 있기는 했지만 당하는 사람은 얼떨결에 입혀주는 옷을 입고 무대에 서서 그들이 요구하는 몸짓을 흉내 내게 된다. 좌중은 폭소가 터지고 우리는 즐거울 수가 있었다.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 언제 나올지 기다려진다. 오늘 일정을 모두 끝내고 아름다운 에게해가 보이는 호텔에 일찍 여장을 풀었다. 우리 일행은 에게해 바닷가의 백사장을 걸어 보았다. 쌀쌀한 바람과 흐린 날씨 때문에 수평선으로 사라지는 저녁 해를 즐길 수는 없었지만 구름 틈으로 비치는 햇살이 운치를 느끼게 해 준다. 많은 사람이 에게해의 백사장을 걸으면서 낭만을 즐기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 호텔 옆에 있는 다른 호텔에는 독일에서 온 듯한 젊은이 단체가 와 있는 것 같았다. 호텔은 쿠사다시 시내와 떨어진 한가한 해변에 위치하여 시내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터키어로 쿠사다시(KUSADASI)란 '새들의 섬'이란 뜻이다. 조그마한 에게 연안의 만에 건설된 도시로서 황금빛의 해변을 끼고 있다. 수많은 호텔, 방갈로, 펜션 등을 갖춘 휴양객들의 천국이다. 그리스의 섬들(사모스섬, 밧모섬)과 아테네로 가는 선박들의 항구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은 성수기가 아니라 호텔은 한가롭고 쓸쓸한 느낌까지 들지만 한 여름이라면 특급호텔은 우리차지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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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1. 15 (수) 파묵칼레와 히에라폴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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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의 북쪽은 흑해(Black Sea)와 연해 있다. 이 흑해라는 이름은 밤에 육지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주로 밤중에 고기잡이를 하던 배가 뒤집히는 일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터키는 우리 역사에도 등장하는 훈(흉노)족으로서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군에 속하는 나라이다. 우랄알타이어는 동쪽으로는 중국, 한국, 일본 서쪽으로는 터키, 핀란드, 헝가리가 속한다. 터키인들은 한국사람은 ‘같은 피가 흐르는 민족’으로 생각한다. 6.25당시에는 5,000명씩 3개제대 15,000명이 참전하여 그 가족을 합하면 많은 사람이 한국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스탄불의 상점에서 코렐리(Koreli:한국인)라는 상호가 대표적인 경우다. 2002월드컵 때 터키에게 불리한 판정을 한 한국심판에게 각별한 배신감을 느끼고 1주일이 넘도록 슬로비디오로 모든 방송이 성토를 했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4강에서 다행히(?) 우리가 터키에 패하여 분위기가 회복되었다니 터키를 찾은 한국인에게는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번 참전 50년을 기념하여 한국을 다녀간 참전용사와 유족이 ‘어린아이들이 코를 흘리며 전선으로 출발하는 군인들을 향해 손을 벌리며 먹을 것을 달라고 하던 헐벗고 가난한 한국의 모습이 터키 보다 경제적으로 앞선 나라로 변하여 있는 것에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하더라’고 그들과 함께 했던 김선생의 생생한 증언을 들으며 ‘한국인의 긍지’를 느낀다. 터키는 인구가 남북한과 비슷한 수준이나 땅이 우리의 3.8배에 이르고 우리는 산지가 70%에 가까운데 비해 터키는 평지가 70%에 이르고 있어 농산물을 중심으로 1차산업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이곳에는 과일 등을 길가에 펼쳐놓고 지나가는 차를 상대로 팔고 있는 곳이 많다. 우리의 호프 고부장이 도중에 차를 세워서 오렌지, 귤, 석류 등을 팔고 있는 곳에서 싱싱한 오렌지를 사서 나누어주어서 모두 흐믓해젔다. 터키의 서남단 항구도시 쿠사다시를 출발한 버스는 내륙인 동쪽으로 이동한다. 70년대의 우리나라 시골과 너무도 흡사한 모습의 시골길에 차가 접어들면서 ‘목화의 성’ 이라는 뜻을 가진 파묵칼레( PAMUKKALE)가 시작된다. 이곳에는 17-30세의 처녀가 있으면 빈병을 지붕에 꼽아서 표시를 하는 풍습을 볼 수 있다. 처녀가 30살을 넘어도 출가를 하지 못하면 아버지는 몽둥이를 들고 지붕에 올라가서 병을 부수어 버린다고 한다. 그때 아비의 심정은 어떨까? 이곳에는 나이 차이나 결혼을 했던 적이 있었는지는 결혼조건에 고려사항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성서에는 히에라볼리라는 지명을 가진 파묵칼레는 산화칼슘이 주성분인 온천수가 언덕 꼭대기에서 솟아남으로 수천년을 두고 흘러내린 온천수는 산비탈을 온통 순백의 바위로 뒤덮게 했으며 층층이 테라스 모양의 천연 욕조를 만들어 놓아 이 세상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대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또 한쪽의 산자락에서는 유황온천이 흘러 온천수를 이용한 질병 치료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 최초로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한 군주는 페르가뭄(버가모) 왕국의 유메네스로서 페르가뭄의 창건자 텔레포스(Telephos)의 아내 히에라(Hiera)를 기념하기 위해 이 도시를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라고 명명했으며 성시(聖市)라는 의미를 갖는다. 기원전 133년에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 로마 문명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 후 티베리아 황제 시대인 AD 17년에 지진에 의해 대파되었으나 복구되어 2-3세기경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바둑판 모양의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해 복구된 이 도시는 수많은 각종 신전들이 건립되어 있어서 "신전의 전시관"이라 불릴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들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지어졌다. 히에라폴리스의 주산업은 카페트 및 직조를 주로 하는 양모산업과 꽃을 기르는 원예사업이 중심이었고 특히 석공예가 상당히 활발해서 섬세한 돌 조각이 여기저기 눈에 뜨이고 있다. 인근 지역에는 대리석 산지가 있어서 이스탄불 소피아 성당의 얼룩덜룩한 대리석 기둥은 이곳에서 생산된 것이다. 다시 6세기부터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지금의 데니즈리로 이주해 살기 시작했다. 유적으로는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원형극장으로 2세기 하드리안 황제 때 지어진 것으로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또한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것은 ‘사도 빌립의 순교 교회’인데 예수의 제자 중 한사람인 빌립이 4명의 딸과 함께 이 도시에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후에 성밖에 버려진 사건이 생겼는데 후에 그 무덤 위에 세운 교회이다. 이 도시의 북쪽 끝에 수 천 개의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가 있는데 소아시아 반도에서는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출되어 있는 무덤이 1200개가 넘으며 석관형태, 가옥형태, 봉분형태등 3가지로 구분된다. 특이한 것은 봉분 중앙에 세워진 비석은 우리나라 묘지에서 양쪽에 세워진 버섯모양을 닮았다. 이것은 남성의 상징으로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무덤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쓰이는 방법으로 대리석이 이끼에 의해 색이 변하는 데는 약 1,000년이 걸린다고 한다. 파묵칼레에서 점심을 먹고 유적지와 유적지 아래에 있는 온천탕을 둘러봤다. 야외에 있는 온천수는 미지근한 수준이었으나 그 물속에 한때 화려했던 유적들이 묻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은 라오디기아 교회에서 가까우며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어 ‘나는 부자라 부요(富饒)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는 말을 알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외부핍박과 내부혼란이 있을 때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강인하여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바위 위로 땅속으로 갔지만, 부유하면 하나님의 축복으로 착각을 하고 미지근한 신앙이 되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환상을 통해 라오디기아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네가 이같이 차지도 덥지도 아니하니 내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6)’는 말씀은 미지근한 온천수와 석회석을 포함한 광천수라 음료에 부적당한 현지의 여건에 꼭 부합되는 것이다. 또 이곳은 눈병환자가 많이 와서 안약을 생산하여 팔고 있었다. 파묵칼레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산비탈에 층층이 만들어진 천연욕조지역은 지금은 각 호텔에 온천수를 공급하고 있어 가끔씩만 내보내고 있다는데 다행히 우리가 갔을 때 따뜻한 온천수가 흐르고 있었다. 흰 바위산을 맨발로 걸으며 사진을 찍으면 영락없이 눈밭을 맨발로 걷는 모습이다. 여름이면 반바지에 민소매로 눈 산을 걷는 모습을 자랑할 수가 있다고 한다. 이제는 온천수가 고갈되어 원래의 모습이 퇴색되어 가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은 장관이다. 오늘의 계획된 일정도 일찍 종료되어 예정에 없는 라오디게아(LAODICEA)교회가 있던 곳을 방문했다. 이곳은 아직 제대로 발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굴이 진행 중에 있다. 현지의 지명은 라이디캬(LAODIKYA)이나 성경에는 라오디게아로 요한계시록(계3:14)에 등장하는 일곱교회 중의 하나이다. 리쿠스(Lycus)계곡에 위치한 비옥한 땅과 양치기를 많이 하는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Antiochus 2세가 그의 부인 Laodice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라오디게아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6.5 Km 떨어진 히에라볼리의 온천물이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로 흘러 들어오게 하였다. 그런데 히에라볼리의 온천물은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덥지도 차지도 않는 물이 되어 이것을 신앙의 빈곤함에 비유하여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고 있다. 1710년과 1899년 대 지진 때 이곳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현재 복원되지 않은 채 폐허 속에 로마식 야외운동장과 원형극장터, 그리고 폐허 속에 십자가가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는 돌무더기가 남아있어 교회 터로 추정되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대형 마트에 들렸다. 우리가 머물게 될 호텔에도 실내 온천이 있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수영복이 필요한데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지방은 면사와 면직 생산시설도 있고 면제품의 품질과 가격이 좋아서 일행 중 많은 사람들이 침대보, 식탁보등을 구입했다. 매장의 점원들은 한국의 볼펜을 기념으로 가지겠다고 선물로 달라고 하는데 특히 목걸이형 볼펜을 좋아한다. 우리가 머물게 된 호텔은 데니즐리에 있으며 파묵칼레지역에서는 가장 좋은 호텔이다. 호텔의 형태가 고층이 아니고 빌라형으로 푸른 숲속에 외벽이 온통 붉은 색으로 되어 있어서 외관이 눈에 뜨인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무거운 짐을 운반하기에는 불편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호텔에 있는 풀장은 온천수를 이용하고 있는데 큰 풀장과는 별도로 몸을 담그고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탕이 위쪽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온천에서 만난 지중해 연안에서 왔다는 터키인이 자꾸 말을 걸어 왔으나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는 관계로 길게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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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1. 16 (목) 콘야 - 카파도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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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우리의 일정 중에 가장 힘든 날이다. 에게해에서 멀지 않은 데니즐리에서 중부 내륙의 콘야를 거쳐 오늘의 종착지 카파도키아까지 종일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김선생의 제안에 따라 카파도키아 일정을 하루에 끝내고 11일차 밤 비행기 일정을 오전으로 조정하여 오후에는 이스탄불에서의 일정으로 조정하자는 데에 모두 동의하여 조정키로 했다. 장거리 버스 여행에는 반드시 공부(?)가 있게 마련이다. 터키에는 유난히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이 많다.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는 물론 처음 크리스쳔이라고 이름을 불리게 된 곳인 수리아안디옥(예루살렘으로부터 500Km). 노아의 홍수에 등장하는 아라랏산, 하란평야, 라오디게아, 버가모, 사울의 출생지 다소, 갈라디아, 갑바도기아등 특히 바울의 전도여행지가 가장 많은 곳이며, 당시에도 유대인이 많이 살아서 회당이 50개나 되었다고 한다. 터키는 아나토리아 반도에 속하며 중부지방은 해발고도 1,000m 이상의 고원지대이며, 그곳의 중심지가 바로 카파도키아 지방이다. 문명의 발상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발원지가 터키에 속한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에는 터키를 비롯하여 이스라엘도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인구조사의 가장 큰 목적은 군대에 동원할 병력을 파악하는 일과 세금을 걷기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로마황제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투스로 불림)가 군대와 세금을 위하여 인구조사를 명령했고 이로 인해 요셉과 마리아가 고향을 가는 과정에 예수님이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의 로마시민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성경에서도 볼 수 있다. 바울은 다소에 태어난 유태인이었지만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며 그래서 에베소에서도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크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동생과 함께 나누어 지배를 하다가 젊은 나이(19세)에 50대 초반의 카이사르(시저)를 만나 그의 후원 하에 이집트왕이 되어 통치를 하게 된다. 당시 카이사르는 서부로마를 통치하다가 동부로마를 통치하던 폼페이우스와 전투에서 승리하여 로마의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한편, 패장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피신하였으나 이집트군에 의해 그곳에서 암살된다. 크레오파트라는 아들(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자식이라고 주장했으나 카이사르는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카이사르는 그가 가장 신뢰하던 33세의 부르투스를 포함한 부하들에 의해 암살되므로 생을 마친다. 그 후 안토니우스, 옥타비우스, 레피두스에 의해 제2의 삼두정치가 시작된다.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안토니우스는 소문에 대한 문책을 하기 위해 크레오파트라를 타르수스로 호출하였으나 그녀의 외교술에 빠져 다소에 ‘크레오파트라의 문’을 세우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나중에는 결혼하여 쌍둥이 아들을 두었고, 그리스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했을 때 안토니우스는 자결하고 생포된 크레오파트라는 그의 무덤에서 독사에 물려서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황제가 되고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의 통치기간 중에 3번에 걸쳐 인구조사를 시행하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원을 달려서 터키의 5번째 도시인 콘야(Konya)에서 늦은 점심을 먹게 되었다. 시내에 들어왔을 때 가까운 기지에서 이륙한 공군기들이 하늘에서 곡예비행을 하는 것을 만나서 탄성을 질렀다. 평소 김선생이 터키항공을 가장 신뢰하는데 군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친 후에 민간기의 조종사로 발탁되기 때문에 세계 어느 조종사보다 우수하다고 자랑을 해 왔다. 여러 대의 비행기가 편대를 이루어서 하는 묘기 혹은 단독 비행을 통한 묘기 등 여러 가지 묘기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야 무지개다. 무지개” 비행기가 사라진 하늘에 크지는 않지만 선명한 무지개가 나타났다. 우리에게 하늘에서 주시는 보너스가 아닐까? 무지개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하게 볼 수 없는 것인데 이역만리에서 만나는 무지개는 더욱 특별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콘야(KONYA)는 250만의 인구를 가진 도시로 오래된 역사도시이다. 콘야의 고대 거주지는 선사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신석기, 구석기 그리고 초기 청동기 시대의 문화가 이 선사시대에 포함된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콘야에서 36Km 떨어진 차탈효육 발굴 시에 출토되었다. 고대 거주지가 묻혀있는 작은 언덕들은 콘야의 경계선 안에 있고 히타이트족의 거주지는 콘야 외곽의 카라효육에 있다. 출토된 유적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소아시아에서 히타이트 제국을 무너뜨린 프리지야인들은 트라키야로부터 온 부족들이었다. 카라퍼나르, 기지크슬라, 시즈마 그리고 콘야의 중심지에 있는 알라딘 언덕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기원전 7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콘야(옛 지명 Cavania)는 리시아인, 알렉산더 대왕 그리고 로마의 침략을 받았다. 그 중 로마의 지배가 가장 오래 계속되었으며 AD 25년경에는 이코니움으로 불리어졌다. 사도 바울이 안탈리야에 상륙하여 소아시아 지방을 여행할 때 안티오키아를 거쳐서 콘야 땅을 밟게 된다. 그 시대에 리시드라, 라오디게아 등은 융성한 도시들이었다. 아랍족의 침략은 소아시아 지방에 이슬람을 전파하게 되었다. 1071년 말라즈기르트 전투 후에 콘야를 포함한 소아시아의 큰 부분의 땅이 셀축 투르크 족에게 점령되었다. 이 때부터 동로마 제국의 지배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슐레이만 샤(셀축 투르크의 술탄)는 콘야를 1076년에 셀축 제국의 수도로 선포했다. 1080년부터 1096년까지 수도는 이즈닉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1097년에 콘야가 수도가 되어 1277년까지 존속되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 무라드 2세가 1442년에 콘야를 정복했다. 콘야는 오스만 제국 시 명성을 얻었다. 술탄 셀림이 이집트와 페르샤를 정복하려는 전투시에 잠깐 머물렀고 슐레이만 대제와 무라드 4세가 또한 그들의 바그다드 전투에 참가하는 도중 머물렀던 곳이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이 도시는 급속하게 발전하여 대 도시가 되었다. 괄목할만한 배경과 역사를 가진 콘야는 역사적인 유적지와 수많은 예술품들로 인해 콘야 도시 자체가 야외 박물관이 되기에 충분하다. 메블라나 박물관 이 박물관은 콘야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장소이다.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를 이끌었고 명상 춤의 창시자로 알려진 메블라나의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원래 궁전의 장미정원이었는데 술탄이 메블라나의 아버지 바하틴 벨레디에게 하사한 장소이다. 1274년에 이 자리에 한 개의 무덤이 만들어 졌고 1396년에 푸른색 타일로 만들어진 탑이 세워졌다. 메블라나의 무덤을 포함한 현재의 박물관은 1927년에 문을 열었다. 이 박물관에는 메블라라나의 소지품, 신비스런 악기, 양탄자, 비문, 문서, 예술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카라타이 종교학교 술탄 이제틴 케이카우스 2세의 통치기인 1251년에 젤라에딘 카라타이에 의해 건축된 종교학교이다. 이 학교는 카디스, 코란의 번역 같은 종교적인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세워졌다. 알라틴 모스크 셀축 투르크인들에 의해 지워진 가장 오래된 모스크인 알라딘 모스크은 알라딘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이 모스크의 건축은 루크네딘 메수드의 통치기간(1116-1156) 중에 시작하여 1221년 술탄 알라틴 케이쿠바트 통치시대에 완성되었다. 셀리미에 모스크 메블라나 박물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이 모스크는 술탄 셀림 2세가 콘야의 주지사로 있었던 1558년에 시작하여 1587년에 완공되었다. 이 모스크는 오스만 제국의 건축술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일리아드 와 오딧세이'는 호메로스(호머)라는 시인이 전설을 모아 엮은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같은 천하무적 용사들은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이며, 트로이성도 어디엔가 있을 거라고 믿은 소년이 있었으니 그가 독일의 아마추어 사가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1822-1890)이다. 그의 노력으로 여러 차례 발굴을 거쳐 찾아진 유적은 시대에 따라 여러 층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9기로 나누어져 있다. 트로이전쟁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여왕 헬레네에게 반해 밤에 그녀와 도망함으로써 벌어진 트로이와 그리스의 10년 전쟁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여러 신들이 인간과 어울려 싸움에 끼어들고 심지어는 다치기도 한다. 아내가 도망을 가자 미넬리우스는 씩씩거리며 형인 아가멤논 왕을 찾아갔다. 당시 그리스의 맹주였던 아가멤논 왕은 동생의 하소연을 듣고 나서 트로이의 후견인인 히타이트가 마침 아시리아를 비롯한 여러 주변 국가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트로이지역을 공격하기에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트로이를 공격했다. 그의 예상대로 히타이트 제국은 지원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이는 난공불락이었다. 10년의 지리한 전쟁에 새로운 아이디어 ‘트로이 목마’를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트로이의 木馬(목마)는 원정(遠征) 10년 마지막 시기에 트로이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그리스군([오딧세이]에서는 "아카이아군"이라고 호칭) 총사령부에서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생각해낸 전술(그리스군 첫째가는 지장(知將) 오디세우스 Odysseus <로마에서는 Ulisses, Ulixes로 호칭>의 제안이라고 한다)이다. 커다란 木馬(목마)를 만들고 그 뱃속에 용감한 무사들을 숨겨 넣은 다음, 밤사이에 어둠을 틈타 그것을 성밖에 갖다놓고, 그리스 함대는 일제히 해안에서 먼 바다로 물러나 숨어 있었다. 아침이 되어 트로이성의 시민들은 이것을 발견하고, 그리스군이 전쟁에 지쳐 물러간 것으로 착각하고, 사제인 라오콘의 제지를 무시하고 목마를 성안에 끌어 들였다. 밤이 되자 목마동체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군 용사들이 나와 성문을 열었다. 그때는 먼 바다에 물러갔던 그리스군 함대가 되돌아와 이미 군대를 성밖에 매복시켰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군은 성안으로 대거 진입하여 방화?살육 파괴?약탈을 자행하여 트로이성을 최종적으로 격멸하고 전쟁을 끝낸다. 남자들은 모두 살해되고 여자와 어린이들은 노예가 되고 트로이는 불타고 집들은 파괴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전쟁이 일어난 지 10년째 되던 해에 지진이 일어나서 성안은 혼란 상태에 빠졌고 그 틈을 타서 그리스인들이 성을 점령되었다."고 한다. 콘야에서는 우리나라 시골의 5일장과 비슷한 장이 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직접 재배한 농산물이 직거래되고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해 갈 수 있다. 5일 장이 아니고 요일을 정해서 1주일에 한번씩 지역별로 정해진 장소에 장이 열린다고 한다. 카파토키아에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면 지하도시를 들려보려고 했지만 6시 이전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도중에 지평선에 해가 지는 일몰장면을 뒤쪽 차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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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1. 17 (금) 카파도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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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파도키아(Cappadocia)는 성경에서 갑바도기아로 현재는 네브쉐히르(Nevsehir)라고 불리는 곳이다. ‘8번째의 불가사의’ 혹은 ‘자연의 기적’등으로 찬사를 받고 있는 이곳은 수백만년 전에 주변에 있는 3개의 화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지면을 덮고 세월에 의해 지금의 모양으로 변한 것이다. “우리의 눈은 기절 초풍할 정도로 화들짝 놀라, 주변의 환상적인 풍경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1907년 여름, 최초로 이 지역의 성지를 발굴해 낸, 프랑스의 예수회(Jesuit) 회원이자 학자인 Pere cuillaume de Jerphanion이, 강렬한 태양에 늘어진 지친 몸을 말 등위에 실은 채, 이 카파도키아 지역에 들어서다 터트린 일성이다. 실로 괴레메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여행의 피로와 더위를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한 환상적인 파노라마를 담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룩할 수 없는, 오직 신의 능력과 자연의 조화로만 이를 수 있는 이 카파도키아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함으로서 여행자들의 발길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이 카파도키아 지역은 현재 터어키 영토인 소아시아 반도(일명 Anatolia) 중앙 고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의 평균 고도는 해발 1,000m로서 주변이 높은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다. 즉, 과거에 화산을 분출시킨바 있는 에르지에스(Erciyes 3,900m), 핫산(Hasan 3,200m), 괼류(Gollu 2143m) 등의 높은 산들이 카파도키아를 굽어보고 있다. 수 백 만년 전 이 산들은 차례로 용트림을 치며 용암을 분출시켜, 주변의 지형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화산에 의해 이루어진 이 지형은 그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비, 바람에 의한 침식 작용으로 오늘날과 같은 대 작품이 이루어 진 것이다. 즉, 화산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 지역이 강도가 약한 사암으로 되어 있었으나, 화산에 의해 그 위로 강도가 강한 검은 용암이 뒤덮여 졌다. 세월의 비, 바람은 강도에 따라 이 지형을 깍고 다듬어 전 세계에서도 유일한 특수한 경치를 이 카파도키아에 선사한 것이다. 이러한 특수한 지형은 인간들에게 손쉽게 지을 수 있는 거주지를 제공해 주었다. 즉, 그들은 이 천연의 바위 속에 있는 약한 사암을 파내기만 하면 훌륭한 집이 되었고, 그 겉을 둘러싸고 있는 강도가 강한 용암은 지붕이나 벽이 되어 주었다.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기초공사나 골조공사는 필요 없었던 것이다. 기원전 1,200년경, 힛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후 이 지역이 역사적 기록으로 최초로 남기 시작한 것은 동쪽으로부터의 페르시아 제국이 침략하면서이다. 그 후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의 침입으로 카파도키아는 헤레니즘 문명을 맞게 된다. 기원 후 17년에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 비잔틴 제국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로마나 비잔틴 제국의 어느 황제들도 이 지역의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곳은 단지 동서와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관계로 대상들의 숙소로 요긴한 지점이 된 이외에는 역사적으로 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의 특수한 지형은 기독교인들에게는 훌륭한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혹은 7세기 말경엔 아랍인들의 침략을 피해 이들은 이곳에 굴을 파고 거주하면서 암굴 속에 새로운 기독교 문명을 남겨 놓았다. 특히 비잔틴 시대에는 당시의 성직자들의 은둔생활 풍조에 따라 많은 암굴 수도원이 건설되기도 했다. 이 지역은 출중한 신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갑바도기아 학파]까지 이루었다. 특히 4세기 때 활동했던 "바실"이나 "그레고리" 같은 사람들은 기독교 정통교리와 신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신학자이다. 그 후 터키 공화국과 그리스간의 협정에 따라 이 지역에 거주하던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자의에 의해 그리스로 이주해 감으로서 오늘날은 그들이 남겨놓은 문화적 흔적만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시몬의 수도원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3개의 갓이 있는 바위를 파고 생활한 주두행자(the stylite)들은 벽에 그들의 존경의 대상이던 시몬의 벽화를 그려 넣음으로서 시몬의 수도원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벽화의 내용은 시몬과 그의 어머니, 용을 치료하고 있는 시몬, 시몬과 밧줄 등이다. 성 시몬(St. Symeon the stylite 390-459)은 주두 고행생활의 창시자이다. 로마의 박해시절부터 자기희생과 헌신, 순교로만 이어지던 기독교인들에게 갑작스런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과 신앙의 자유는 ‘일시적인 당황’을 하게 했다. 자기희생에 익숙해 있던 이들은 이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의 고행 및 은둔생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시몬으로서 그는 안티옥(지금의 Antakya, 성서상의 수리아 안디옥)지방에서 살았다. 스스로의 고행을 위해 좁은 굴속이나 속이 빈 우물 속에 들어가 생활을 해본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산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의 몸을 바위의 쇠사슬에 묶어놓고 생활해 보나 또 이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여 이번에는 방랑생활을 시작해 본다. 그에게는 환자, 불구자 혹은 조언을 구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는 이들 사람들을 피해 이번에는 기둥을 생각해 내었다. 즉 수평적 탈출이 어려워지자 이번에는 수직적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3단의 기둥을 쌓고, 그 꼭대기에 겨우 자신만이 설 수 있는 공간 속에서 생활했다. 왕이 조언을 구하기 위하여 찾아오면 사다리를 이용해 올라가야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기둥꼭대기에서 환자들을 치료하거나 조언하며 살았다고 한다. 우치사하르(Uchisar) 우치사하르는 마을의 중심부에 암벽으로 된 거대한 산이다. 이곳의 정상까지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정상에서는 괴레메 계곡에 이르기까지 주변에 펼쳐지는 감동적인 대 장관을 경험할 수 있다. 황혼 무렵에 내려다보는 우치사하르의 전망은 더없이 황홀하다고 한다. 우치사하르에서 괴레메 야외박물관으로 가는 길에는 주변에 펼쳐지는 대파노라마(Panorama)를 즐길 수 있다. 괴뢰메 야외 박물관(Goreme Open Air Museum) 괴뢰메는 자그마한 마을 이다. 마을 외곽 2km에 있는 괴뢰메 계곡에 괴뢰메 야외박물관이 있다. 이곳에 그 유명한 석굴교회들이 있다. 사과 교회(Elmali Kilise, apple Church), 뱀 교회(Yilanli Kilise, Snake Church), 바클 교회(Tokali Kilise, Buckle Church), 신발 교회(Carikli Kilise, Shoe Church), 성 바바라 교회(Saint Barbara Church)등 다양한 이름의 교회들이 있다. 그중 카란르코 성당(Karanlik Kilise, Dark Church)은 11세기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 벽화가 있고, 비잔틴 양식에 천정은 돔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클 교회는 괴레메에 있는 교회들 중 가장 풍부한 내부장식과 뛰어난 보존상태로 가장 사랑받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이 교회는 박물관 안쪽이 아닌 바깥쪽 도로변에 있다. 데린쿠유 (Derinkuyu) 데린쿠유의 지하 동굴 도시에는 2만명이 살 수 있으며 1968년에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수 많은 환기 갱, 우물, 물탱크 및 출입 갱도 등이 광대한 망을 이루고 있다. 지하 도시 내에는 부엌, 거실, 창고, 회의실, 공동묘지, 교회, 연결 회랑 등이 다수 있으며 모든 필요한 시설이 완전하게 갖추어진 도시이다. 지하 도시를 처음 건설한 사람들은 히타이트 인이라고 여겨진다. 그 후 이 지하 도시는 기독교인들의 피신처로 이용되어 왔다. 아직도 지하 도시 전체에 대한 규모는 모르는 상태이며 현재 공개되는 부분은 지하 8층까지로 55m 깊이에 1500 ㎡ 이다. 지금은 단지 지하 8층까지만 발굴되었으나 여러 층이 더 있고 주변의 다른 지하 도시와도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일 아래층은 우물인 경우가 많고 이 때문에 이곳이 '데린쿠유 (깊은 우물)' 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데린쿠유 마을은 1962년까지 이 우물들을 실질적인 수원으로 이용해왔으며 아직 그 의존도는 상당히 크다고 한다. 지하 1층은 축사와 가축들을 위한 물과 사료 창고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축사 옆으로는 포도주 양조장이 있는데 위쪽 구멍을 통해 포도를 떨어뜨려 포도즙을 내서 아래쪽으로 구멍을 통해 흘러내리게 되어있다. 지하 1층에는 신학 교실과 학생들의 공부방도 있다. 지하 2층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파서 주거지로 그 아래층들은 피난처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층에는 부엌, 창고, 침실, 포도즙 틀, 화장실 등이 있다. 지하 3층은 주로 창고이며 우물과 연결된 통로가 있는 곳도 있다. 지하 4층에는 출구와 연결되기도 하며 주거 공간이나 창고가 있기도 하다. 길고 좁으며 높은 연결 터널이 구불구불하게 지하 3층에서 5층까지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그 중간에 돌로 된 문이 있다. 지하 5층에는 환기 갱이 있어 지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지하 5층과 6층 사이 통로 곁에는 거주를 위한 방들이 있다. 통로에는 구멍을 파서 촛불이나 기름 등잔을 올려놓아 조명을 한다. 지하 7층에는 세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십자가 모양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폭이 10 m, 길이가 25 m이며 높이는 3.5 m에 이르며 교회로 사용되었다. 지하 8층에는 작은 방들과 환기 갱들이 있다. 한편, 지하 도시들을 연결하여 주는 터널이 있는데 그 중에는 길이가 9 km에 달하는 것도 있으며, 서너 명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것도 있다. 데린쿠유 지하 도시에서 발굴된 것은 약 4km에 이른다. 현재는 2곳이 개방되어 있으나 12개 정도는 존재할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아바노스 (Avanos) 아바노스 마을은 전에는 바넷사 (Vanessa)라고 불리었으며 네브세히르에서 북쪽으로 18km 떨어져 있으며, 터키에서 가장 긴 강인 커즐러막(Kizilirmak 븕은 강:1355Km)강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일직이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아바노스'는 강변에 철분을 함유한 황토색의 점토를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도자기 산지로 유명하다. 이 마을은 도자기, 카페트, 포도주의 산지로 유명하다. 마을 주변의 철분이 함유된 흙은 옛부터 이 마을에 도기 산업이 번성하게 하였다. 이 흙은 강물을 붉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강의 이름이 키실(Kizil: 빨강) - 일막(irmak: 강)이라고 된 것이다. 이 마을의 도자기는 강으로부터 채취해온 붉은 진흙, 그러니까 우리네 황토 비슷한 진흙으로 만들어지는데, 우리는 지하에 있는 조그만 공장에 들어가 만드는 과정을 구경하고 직접 만들어볼 기회도 주어지고 기념품을 사는 순서로 진행된다. 기념품을 사면 부숴지지 않도록 포장도 해준다. 철기 시대인 히타이트 시절에도 토기가 제작되긴 했지만 자기 기술이 발달한 것은 오스만 투르크 시대에 중국으로부터의 영향 이후라고 한다. 실제로 터키 북서부의 도시 이즈닉(Iznik)은 16세기이후 타일로 아주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타일 또한 이러한 자기 기술로 인해 영향을 받은 것이었고 이즈닉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아름다운 타일 생산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후 이스탄불의 궁전이나 모스크 등에는 이즈닉 타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로즈벨리(Rose Valley) 로즈벨리(장미의 계곡)는 파노라마 언덕의 건너편에 있다. 석양의 ‘붉은 빛’ 때문에 장미의 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5시 직전에 석양을 볼 수 있을 텐데 구름 때문에 석양을 볼 수는 없어 섭섭하다. 우리는 고부장님이 준비해 준 캔을 들고 어제저녁에 본 석양을 하늘에 그려보면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구름 낀 하늘을 원망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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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1. 18 (토) 이스탄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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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파도키아로부터 카이사르 공항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을 했다. 로마의 황제에게 보고하는 문서의 제일 위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고 쓰고 시작하던 시절 황제의 이름을 따서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곳이 이곳이다.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가는 동안 잠깐 통과하였을 뿐이어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그 동안 우리와 동행했던 야사르와 헤어져 아쉬웠지만 그가 바로 다음 팀의 안내를 맡게 되어 다행으로 여겼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면서 점심은 고등어케밥으로 했다. 우스크다르로 가는 여객선 부두옆에 케밥을 파는 적은 목선이 있고 케밥을 팔고 있다. 장작불에 고등어를 구워서 빵 사이에 넣고 야채와 고추, 양상치 등을 소금에 절인 것이나 음료수와 함께 노천에 앉아 먹는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케밥을 사고 있었고 우리도 그들에 섞여서 맛있게 먹었다. 노천에는 빈 의자와 케밥과 먹을 수 있는 양배추와 오리부유 같은 양념이 놓여 있다. 신기한 것은 두 척의 배중에 한 척에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데도 다른 한 척에는 사먹는 사람을 전혀 볼 수 없다. 케밥을 먹고 나니 어린아이들이 구두를 닦으라고 극성이어서 한사람이 닦게 되니 모두 구두를 닦게 되었는데 일대의 모든 구두닦이가 다 모이는 것 같다. 자세히 보니 조금 큰 아이가 작은 아이의 돈을 빼앗는 것도 보인다. 버스로 제1교를 넘어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남산과 같이 안테나가 많은 언덕에 올라 시내를 보았다. 그 동안 우리가 가 보았던 곳-불루모스크, 성소피아, 톱카프, 슐레이만의 자미, 돌마바흐체등을 하나씩 짚어가면서 확인을 했다. 애인과 데이트를 나온 젊은 연인을 만났는데 남자 1명에 여자 2명이 짝지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결혼 전에는 남자를 만날 때 항상 여자의 친구가 함께 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그 친구는 보호자일까 아니면 감시자일까? 우스크다르(USKUDAR)는 이스탄불의 아시아 쪽에 있는 마을로 구시가에서 페리로 15분정도 간다. [USKUDAR]이 노래 가사와는 달리 시골스럽게 느껴지는 전형적인 터어키풍의 마을이다. 우스크다르 중심가를 지나 우스크다르 해변에서 잠시 산책을 했다. 추운 날씨에도 해변가 찻집에서 차를 마시거나 바닷가 바위 위에서 즐기는 가족단위로 소풍나온 사람이 많다. 소금에 배인 길에서 해바라기씨를 팔고 그것을 까먹는 사람이 많다. 이곳에도 바다 위에는 갈매기와 가마우지들이 육지에는 비들기들이 많이 보인다. 마르마라바다에 연하는 입구에는 외딴섬이 하나 있고 전용 유람선으로 손님을 나르며 장사를 하는 카페가 있다. 이 섬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왕의 딸을 보고 예언자가 ‘뱀에 물려죽을 운명’이라고 예언을 했다. 왕은 그 딸을 뱀을 피하기 위해 이 섬으로 피난시켰더니 과일바구니에 독사를 들여보내 예언을 성취하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다시 제1교를 넘어 그랜드바자르(GRAND BAZAR)를 들렸다. 이곳은 15세기에 창건되어 그 후 몇 번씩이나 확장되었던 터키에서 제일 큰 바쟈르 아케이트로 되어 있으며 3,000개의 전문점이 모여 있어 활기가 넘치고 있다. 바자르내는 미로 같아서 길을 잃기 십상이지만 일련번호를 잘 알아두면 정문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남대문이나 동대문시장 같은 분위기이지만 가격은 바가지를 쓰기가 쉽다. 값을 알고 있는 경우는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면 반값이하로 흥정을 해야한다. 대표적인 예로 양가죽으로 된 모자를 10$을 불렀지만 차를 타려고 하니 5개에 10$(1개 2$)에 판다고 해서 2$만 주고 샀다. 42$을 요구하는 아동용 가죽자켓을 25$에 살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념품으로 물건들을 사고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에 다른 방에서 난방이 잘 안된다고 연락이 와서 프론트에 연락을 했더니 사람이 오는데 30분은 족히 걸린다. 전화기 옆에는 ‘서비스에 대해 보증을 하며 고객이 만족하지 않으면 요금을 받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언행일치가 안 되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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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1. 19 (일) 이스탄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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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아침이라 아침을 먹기 전에 잠깐 기도회 모임을 가졌다. 우리의 여행목적이 성지순례가 아니지만, 터키의 곳곳이 기독교의 흔적이 있는 곳이고 성경에서 읽은 많은 지명들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격양시키는 아침이다. ‘기독교인의 가정’에 관한 인터넷에서 얻은 자료를 함께 보고 찬송을 부르면서 많은 느낌을 받았다. 지중해의 전형적인 겨울 날씨답게 춥지는 않지만 비가 내린다. 공항에 가기 전에 마트에서 선물로 준비할 생필품을 사기로 했는데 일요일이라 문이 닫혀있다. 차를 돌려 이스탄불대학 앞으로 갔다. 처음에는 왕궁으로 쓰였던 이스탄불 대학은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정을 해서 입구에 서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학교 옆에 있는 시장을 돌어보았는 데 키르키스탄에서 온 노인이 양털 모자를 팔고 있어서 2$에 하나 구입했다. 카페트를 파는 집에서 물건을 사고 차로 돌아오는 중에 주인아저씨가 우리에게 뛰어오더니 일행 중에서 색안경을 놓고 왔다고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그가 행한 선행을 칭찬하기 위해 다시 그 가게에 가서 물건도 사고 그와 기념촬영도 했다. 에집트바자르도 문이 닫혀 있어 외곽에 있는 가게들만 둘러보았다. 건과일 가게에서는 건포도, 무화과, 호두, 살구 등이 우리나라의 1/4 가격에 팔리고 있다. 아리아에서 마지막 점심을 먹고 국제공항에서 귀국하는 비행기를 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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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1. 20 (월) 귀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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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탄불에서 로마까지 약 2시간 비행 후, 로마공항에서 4시간을 체류한 후 대한항공을 타고 다시 10시간 정도의 비행이 있은 후에 인천에 도착했다. 로마와의 8시간 시차를 고려하면 모두 24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거리를 이동한 셈이다. 여행 중에는 그곳이 좋았지만 귀국해보니 역시 내나라, 우리 땅. 우리 집이 제일 좋다. 배낭여행에 비하면 너무 편하고 좋아서 여행중에 오히려 체중이 늘어서 돌아왔다. 2003년 1월8일부터 1월 20일 까지 12박 13일은 참으로 좋은 추억으로 남겨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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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공항 3층에 집결한 인원은 회사에서 T/C로 나온 고원상부장을 포함하여 모두 21명의 그룹이었다. 2쌍의 부부팀, 2쌍의 모녀팀, 나머지는 싱글들로 구성되었다. 대부분이 초등학교나 중학교 선생님들이고 서로 잘 아는 사이며 여행을 좋아해서 여행경험이 많은 사람들이다.
아크로폴리스(Acropolis)는 고대의 도시국가인 폴리스가 주로 높은 산위에 성벽을 쌓고 민주정치를 하던 곳으로 akros(높은)이라는 말과 polis(도시국가)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서쪽의 진입로를 제외한 삼면이 가파른 바위 절벽으로 되어있어 천연적인 요새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조금의 인공성벽을 쌓아 완벽한 방호시설로 정치와 신앙의 중심지 노릇을 했다.
점심 후에 먼저 찾은 곳은 소크라테스 감옥이다. 그는 이 감옥에서 족쇄를 차고 있었지만, 밖에 나와 사람들과 자유롭게 토론을 하며 지냈다한다. 그를 아끼고 추종하던 후학들이 도망갈 것을 권했지만,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독약을 먹고 BC399년에 죽게 된다.
버스로 근대 올림픽 경기장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쿠베르탕의 제안에 의해 제1회올림픽이 개최됐다. 아테네는 고대 올림픽의 전통과 향수가 살아있는 도시로써 근대 올림픽의 출발이 고대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역사적 의미에서 파리를 제치고 첫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제1회 아테네 올림픽은 1896년 4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 개최됐고, 이 대회에는 13개국에서 311명(선수:280명)의 선수단이 참가했다. 그리나 전체 311명의 선수 중 절대다수인 230명이 개최지인 그리스선수이고 보면 제1회 올림픽은 한 지역권의 체육대회에 불과했다. 대회종목도 육상, 수영, 테니스, 체조(역도종목은 체조의 1종목에 포함시킴), 레슬링, '사이클, 펜싱 8개 종목 41개 세부종목으로 실시됐다. 우리가 달려 본 육상 트랙도 현재와 같은 좌회전이 아니고 시계방향과 같은 우회전으로 실시되었다. 트랙종목이 현재와 같이 좌회전으로 변경된 것은 아테네대회가 끝나고 세계육상관계자들이 모여 회의 끝에 제2회 파리 올림픽부터 이루어졌다. 또한 수영경기가 바다에서 실시된 것도 지금에 와서는 생각하기 힘든 경기방식이었고, 수영선수들은 작은 증기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4월의 차가운 지중해를 헤엄쳐나가야 했다.
국회의사당 앞에는 전쟁에서 희생된 무명용사를 위한 기념비가 있고 그곳에는 그리스의 전통복장을 하고 있는 군인이 마치 움직이지 못하는 마네킹 같이 서 있고, 관광객의 사진 촬영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다행히 하루에 두 번만 한다는 교대식을 볼 수 있었다. 무명용사비 앞에는 대리석으로 된 관이 놓여져 있고 벽에는 세계 곳곳에서의 전쟁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데, 키프러스가 마지막이고 한국전쟁이 끝에서 두 번째로 보인다.
우리가 탄 버스는 고속도로를 통해 아테네 북서쪽에 있는 델피로 향했는데, 도중에 터키와 그리스사이의 바다 에게해를 지나면서 에게해라고 이름 붙여진 내력을 듣게 되었다. 크레타 왕 미노스에게는 왕비의 몸을 통해서 머리는 황소이나 몸은 사람인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라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인 아들이 태어났다. 이 아들을 위해 왕은 다이달로스라는 사람을 통해 미궁(labyrinth;들어 갈 수는 있으나 나올 수 없는 감옥)을 만들게 하고 이곳에 이 괴물을 가두었다. 이 괴물은 사람고기를 먹어야 살 수 있다. 미노스왕은 약소국 아테나이왕을 협박하여 매년 12명의 선남선녀를 제물로 바치게 했다. 그리스의 3대 왕인 에게아스 시대에 그의 아들 테세우스는 그 괴물을 처치하기 위해 재물로 자청하여 선남선녀와 함께 미노스로 간다. 아들이 출발한 스니온곶에서 아버지는 괴물을 물리치고 그 증거로 승리의 흰 돛을 달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탁이 자신들의 뜻과 다르게 나오면 대부분 신탁의 의견을 존중해 자신의 뜻을 철회했다. 또 신탁의 뜻을 어기고 자신의 주장을 펴다가 실패하면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신탁이 고대의 정신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탁의 공정성에 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아폴론신전은 여러 차례 지진 등으로 부숴 지고 복원을 거쳤다. 처음에는 월계수 기둥으로 세워졌고, 두 번째는 천막과 왁스로, 세 번째는 청동으로 지어졌으나 BC510년에 현재와 같이 대리석으로 재건이 되었다. 이 지역에는 신탁을 받으려고 오는 사람을 위한 상점, 보물(성물)들을 보관 했던 창고들과 올림픽의 영웅과 전쟁영웅들의 동상들이 세워졌던 터가 있다.
메테오라는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지방 북서부 트리칼라주의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바위군(群) 또는 그 위에 세워진 일군의 수도원이다.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이라는 뜻이다. 피니오스강(江) 상류 근방에 기둥 모양으로 우뚝우뚝 솟은 기암들이 줄지어 있는데, 그 정상에 수도원들이 있다. 바위들은 평균 높이가 300m이나 550m에 이르는 것도 있다.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이곳은 기둥처럼 솟아오른 절벽 위에 수도원을 지어 놓았다. 현재는 6개의 수도원만 사용되고 있으며 몇 개는 벽체나 흔적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세상과 격리되어 절제, 금혼, 명령복종를 지키면서 수도생활에 전념하는 수도사들이 생활하고 있다. 지금은 계단이 만들어져 있지만 예전에는 로프와 그물망만이 외부와 연결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이곳에서 지냈다고 하니 대단하다. 지금도 걷기가 불편한 사람을 위해 로프로 연결된 도르래로 사람을 실어 나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수도생활뿐 아니라 한때는 독립운동을 하던 요인들의 은신처로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아테네로 돌아오는 도중에 노천온천이 있는 곳에서 잠시 온천욕을 했다.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다면 갑부가 되고도 남을 텐데, 이곳에서는 유황이 포함된 온천물을 그냥 바다로 흘러 보내고 있다. 우리가 온천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한국에서 온 젊은 학생들만이 온천욕을 하고 있었고, 나중에는 외국인도 2명 합류를 했지만 이곳 그리스인들은 온천욕을 즐기지 않는다고 하는 게 이상하다.
-아담이 태어난 이 후 지금까지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 전무후무한 성전을 지으리라-
성소피아 사원 바로 맞은편에는 6개의 첨탑을 가진 블루모스크가 있다. 우리가 방문하려고 하니 예배시간이라 입구를 막아서 점심 후에 다시 들어 와야 했다. 오늘은 이곳 기후로는 드물게 영하 4도가 넘어서 우리 모두는 모처럼 덜덜 떨어야 했다. 그런데도 이 사원에 예배를 드리려 온 사람들은 밖에 마련된 수도를 이용하여 얼굴과 손발을 정성껏 닦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점심 후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패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 초호화판 궁전인 돌마바흐체(DOLMABAHCE)궁전에 갔다.
저녁에는 히포드럼 옆에 있는 지하저수지(YEREBATAN SARAYI)를 방문했다. 이곳은 바실리카 시스턴이라 불리워지기도 하는데, 이 지하 저수지는 비잔틴 제국시대에 물을 저장하는 목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이 저수지는 거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이며 이 도시에 있는 많은 지하저수지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곳이다.
이 모스크 정문에 "알라(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 모하메드는 그의 예언자이다"라고 쓰여있다. 4개의 첨탑은 슐레이마니에가 이스탄불을 점령한 후 4번째 왕이라는 뜻이고, 열 개의 발코니는 그가 오스만제국의 열번째 통치자라는 뜻이다. 중앙 도움의 높이는 53m, 직경이 27.50m로서 공명장치로 유명하며, 건축 시 페르시아에서 보내온 보석들을 섞어서 진 3개의 발코니가 있는 첨탑은 보석 첨탑이라 불린다. 모든 사원에는 무덤이 있는데 이곳에도 왕비를 위한 무덤과 많은 묘비석들이 보인다.
이 아름다운 해협을 가로 지르는 두 개의 다리 중에 하나인 이 다리는 오스만제국을 터키 공화국으로 선포한 후 50주년이 되는 1973년 10월29일 완공했다. 다리의 길이는 1,074m, 수면에서의 다리 높이는 65m, 다리의 탑 높이는 100m, 설계는 영국, 건축은 독일에서 하였으며 3년의 공사 기간을 걸쳐 완공했다. 건축비는 당시의 시가로 115,000만불 (당시 1$=10 T.L) 이 들었다. 초당 45m 강풍에도 견디게 설계되었으며 건축하기 전 모든 예상되는 천재지변에 대비하여 제일 안전도 높은 다리로 이스탄불의 명물이 되었다.
점심 후에 이스탄불 최고의 전망대 갈라타 탑(GALATA TOWER)를 찾았다. 오늘날 보이는 탑은 원래 6세기경 "그리스도의 탑"이라는 이름으로 비잔틴 제국에 의해 세워졌던 것을 1348년 제노아 자치령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이 지역의 이름을 따서 갈라타 탑이라 부른다. 1446년 탑의 상층부가 추가 건축되었으며 제노아 상인들의 해상 감시탑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오스만제국 시는 감옥이나 화재 감시탑으로도 사용하였다. 이 탑은 총 9층 61m, 탑의 발코니는 해발 140m 높이이다. 17세기 인류 최초로 아흐멧 첼래비(Ahmet celebi)이라는 사람이 두 날개 달린 Hezarfen을 사용해서 이 탑에서 아시아 쪽 위스키다르까지 날았다.
네 번째 길은 Divan으로 통해 지는데 디반은 두개의 방으로 회교장관 사무실과 공공기록 사무실로 되어있다. 회의 진행 중에 황제는 회교장관 사무실 뒤에 나있는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회의내용을 경청하고 회의 시간동안 스파이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 탑을 세워 감시하게 했다. 이 「비밀의 문」은 황제가 언제든지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거짓말로 보고하지 못하게 하는데 공헌했을 것이다.
탁심거리에는 차를 주차하기가 어려워 만나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자유시간을 주었다. 처음에는 같이 움직이다가 나중에는 각자 흩어져서 보고 싶은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케밥을 비롯한 음식들을 파는 곳, 옷이나 귀금속을 파는 곳, 환전을 해주는 곳 등 다양한 상점들이 있다.
이즈밀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곳은 성경에 나타나는 7개 교회 중에 하나인 에페스(에베소:EPHESUS)지방 이다. 현재의 지명은 셀축(SELCUK)이며, 성경에서 말하는 에베소 교회는 특정교회를 지칭하는 것보다는 그 지방(에베소)에 거주하는 교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역사에서 Ephesus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의 Hittite(성경의 햇족속)비문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렸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이다.
313년 콘스탄티노플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 에베소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자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가 건립되었다. 그 후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안 황제가 (527-565)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의 교회로 증축시켰다. 교회의 심장부인 본당은 십자가 모양으로 되어 있고, 이곳에 요한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에는 몸만 있고 요한의 머리는 이스탄불의 톱카프궁전에 보관되어 있다. 지금은 작은 유리 상자 안에 모형과 주춧돌과 남은 기둥으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교회의 한쪽에는 당시에 물 속에 잠기는 침례로 세례를 행했던 장소가 남아 있다.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으로 극장의 무대는 낮은 곳에 위치하였고, 무대 주변에 물을 흐르게 하여 공명을 이용하여 소리를 전달하였다. 특히 흑해를 앞에 두어 바닷바람을 이하여 소리를 전달하게 하였고 무대 뒤의 벽에는 조각을 해서 장식 하였으나 파괴되어 있다. 그 모형은 파묵칼레에 있는 히에라폴리스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음향효과를 확인하기 위하여 김선생의 통제 하에 2개조로 나누어 ‘서울의 찬가’, ‘아리랑’등으로 노래자랑을 했다. 정말 높은 좌석에서도 노래 소리는 잘 들렸고, 노래뿐 아니라 소근거리는 말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 함께 있던 외국인들이 박수로 응원을 해 주었다.
에베소 도시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역사에서 에베소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 경의 힛타이트(Hittite, 기독교 성경상의 헷족속) 비문이다. 그 비문에 아파사스(Apasas)라고 불려졌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일 것으로 추측된다.
오늘 일정을 모두 끝내고 아름다운 에게해가 보이는 호텔에 일찍 여장을 풀었다. 우리 일행은 에게해 바닷가의 백사장을 걸어 보았다. 쌀쌀한 바람과 흐린 날씨 때문에 수평선으로 사라지는 저녁 해를 즐길 수는 없었지만 구름 틈으로 비치는 햇살이 운치를 느끼게 해 준다. 많은 사람이 에게해의 백사장을 걸으면서 낭만을 즐기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 호텔 옆에 있는 다른 호텔에는 독일에서 온 듯한 젊은이 단체가 와 있는 것 같았다. 호텔은 쿠사다시 시내와 떨어진 한가한 해변에 위치하여 시내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터키의 서남단 항구도시 쿠사다시를 출발한 버스는 내륙인 동쪽으로 이동한다. 70년대의 우리나라 시골과 너무도 흡사한 모습의 시골길에 차가 접어들면서 ‘목화의 성’ 이라는 뜻을 가진 파묵칼레( PAMUKKALE)가 시작된다. 이곳에는 17-30세의 처녀가 있으면 빈병을 지붕에 꼽아서 표시를 하는 풍습을 볼 수 있다. 처녀가 30살을 넘어도 출가를 하지 못하면 아버지는 몽둥이를 들고 지붕에 올라가서 병을 부수어 버린다고 한다. 그때 아비의 심정은 어떨까? 이곳에는 나이 차이나 결혼을 했던 적이 있었는지는 결혼조건에 고려사항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기원전 133년에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 로마 문명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 후 티베리아 황제 시대인 AD 17년에 지진에 의해 대파되었으나 복구되어 2-3세기경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바둑판 모양의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해 복구된 이 도시는 수많은 각종 신전들이 건립되어 있어서 "신전의 전시관"이라 불릴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들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지어졌다.
이 도시의 북쪽 끝에 수 천 개의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가 있는데 소아시아 반도에서는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출되어 있는 무덤이 1200개가 넘으며 석관형태, 가옥형태, 봉분형태등 3가지로 구분된다. 특이한 것은 봉분 중앙에 세워진 비석은 우리나라 묘지에서 양쪽에 세워진 버섯모양을 닮았다. 이것은 남성의 상징으로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무덤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쓰이는 방법으로 대리석이 이끼에 의해 색이 변하는 데는 약 1,000년이 걸린다고 한다.
오늘의 계획된 일정도 일찍 종료되어 예정에 없는 라오디게아(LAODICEA)교회가 있던 곳을 방문했다. 이곳은 아직 제대로 발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굴이 진행 중에 있다. 현지의 지명은 라이디캬(LAODIKYA)이나 성경에는 라오디게아로 요한계시록(계3:14)에 등장하는 일곱교회 중의 하나이다.
『콘야(KONYA)는 250만의 인구를 가진 도시로 오래된 역사도시이다. 콘야의 고대 거주지는 선사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신석기, 구석기 그리고 초기 청동기 시대의 문화가 이 선사시대에 포함된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콘야에서 36Km 떨어진 차탈효육 발굴 시에 출토되었다. 고대 거주지가 묻혀있는 작은 언덕들은 콘야의 경계선 안에 있고 히타이트족의 거주지는 콘야 외곽의 카라효육에 있다. 출토된 유적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소아시아에서 히타이트 제국을 무너뜨린 프리지야인들은 트라키야로부터 온 부족들이었다. 카라퍼나르, 기지크슬라, 시즈마 그리고 콘야의 중심지에 있는 알라딘 언덕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기원전 7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콘야에서는 우리나라 시골의 5일장과 비슷한 장이 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직접 재배한 농산물이 직거래되고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해 갈 수 있다. 5일 장이 아니고 요일을 정해서 1주일에 한번씩 지역별로 정해진 장소에 장이 열린다고 한다. 카파토키아에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면 지하도시를 들려보려고 했지만 6시 이전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도중에 지평선에 해가 지는 일몰장면을 뒤쪽 차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수 백 만년 전 이 산들은 차례로 용트림을 치며 용암을 분출시켜, 주변의 지형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화산에 의해 이루어진 이 지형은 그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비, 바람에 의한 침식 작용으로 오늘날과 같은 대 작품이 이루어 진 것이다. 즉, 화산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 지역이 강도가 약한 사암으로 되어 있었으나, 화산에 의해 그 위로 강도가 강한 검은 용암이 뒤덮여 졌다. 세월의 비, 바람은 강도에 따라 이 지형을 깍고 다듬어 전 세계에서도 유일한 특수한 경치를 이 카파도키아에 선사한 것이다.
기원전 1,200년경, 힛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후 이 지역이 역사적 기록으로 최초로 남기 시작한 것은 동쪽으로부터의 페르시아 제국이 침략하면서이다. 그 후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의 침입으로 카파도키아는 헤레니즘 문명을 맞게 된다. 기원 후 17년에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 비잔틴 제국으로 이어진다.
우치사하르는 마을의 중심부에 암벽으로 된 거대한 산이다. 이곳의 정상까지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정상에서는 괴레메 계곡에 이르기까지 주변에 펼쳐지는 감동적인 대 장관을 경험할 수 있다. 황혼 무렵에 내려다보는 우치사하르의 전망은 더없이 황홀하다고 한다. 우치사하르에서 괴레메 야외박물관으로 가는 길에는 주변에 펼쳐지는 대파노라마(Panorama)를 즐길 수 있다.
괴뢰메는 자그마한 마을 이다. 마을 외곽 2km에 있는 괴뢰메 계곡에 괴뢰메 야외박물관이 있다. 이곳에 그 유명한 석굴교회들이 있다. 사과 교회(Elmali Kilise, apple Church), 뱀 교회(Yilanli Kilise, Snake Church), 바클 교회(Tokali Kilise, Buckle Church), 신발 교회(Carikli Kilise, Shoe Church), 성 바바라 교회(Saint Barbara Church)등 다양한 이름의 교회들이 있다. 그중 카란르코 성당(Karanlik Kilise, Dark Church)은 11세기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 벽화가 있고, 비잔틴 양식에 천정은 돔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클 교회는 괴레메에 있는 교회들 중 가장 풍부한 내부장식과 뛰어난 보존상태로 가장 사랑받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이 교회는 박물관 안쪽이 아닌 바깥쪽 도로변에 있다.
데린쿠유의 지하 동굴 도시에는 2만명이 살 수 있으며 1968년에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수 많은 환기 갱, 우물, 물탱크 및 출입 갱도 등이 광대한 망을 이루고 있다. 지하 도시 내에는 부엌, 거실, 창고, 회의실, 공동묘지, 교회, 연결 회랑 등이 다수 있으며 모든 필요한 시설이 완전하게 갖추어진 도시이다. 지하 도시를 처음 건설한 사람들은 히타이트 인이라고 여겨진다. 그 후 이 지하 도시는 기독교인들의 피신처로 이용되어 왔다.
로즈벨리(장미의 계곡)는 파노라마 언덕의 건너편에 있다. 석양의 ‘붉은 빛’ 때문에 장미의 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5시 직전에 석양을 볼 수 있을 텐데 구름 때문에 석양을 볼 수는 없어 섭섭하다. 우리는 고부장님이 준비해 준 캔을 들고 어제저녁에 본 석양을 하늘에 그려보면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구름 낀 하늘을 원망하면서....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면서 점심은 고등어케밥으로 했다. 우스크다르로 가는 여객선 부두옆에 케밥을 파는 적은 목선이 있고 케밥을 팔고 있다. 장작불에 고등어를 구워서 빵 사이에 넣고 야채와 고추, 양상치 등을 소금에 절인 것이나 음료수와 함께 노천에 앉아 먹는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케밥을 사고 있었고 우리도 그들에 섞여서 맛있게 먹었다.
노천에는 빈 의자와 케밥과 먹을 수 있는 양배추와 오리부유 같은 양념이 놓여 있다. 신기한 것은 두 척의 배중에 한 척에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데도 다른 한 척에는 사먹는 사람을 전혀 볼 수 없다. 케밥을 먹고 나니 어린아이들이 구두를 닦으라고 극성이어서 한사람이 닦게 되니 모두 구두를 닦게 되었는데 일대의 모든 구두닦이가 다 모이는 것 같다. 자세히 보니 조금 큰 아이가 작은 아이의 돈을 빼앗는 것도 보인다.
다시 제1교를 넘어 그랜드바자르(GRAND BAZAR)를 들렸다. 이곳은 15세기에 창건되어 그 후 몇 번씩이나 확장되었던 터키에서 제일 큰 바쟈르 아케이트로 되어 있으며 3,000개의 전문점이 모여 있어 활기가 넘치고 있다. 바자르내는 미로 같아서 길을 잃기 십상이지만 일련번호를 잘 알아두면 정문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지중해의 전형적인 겨울 날씨답게 춥지는 않지만 비가 내린다. 공항에 가기 전에 마트에서 선물로 준비할 생필품을 사기로 했는데 일요일이라 문이 닫혀있다. 차를 돌려 이스탄불대학 앞으로 갔다. 처음에는 왕궁으로 쓰였던 이스탄불 대학은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정을 해서 입구에 서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학교 옆에 있는 시장을 돌어보았는 데 키르키스탄에서 온 노인이 양털 모자를 팔고 있어서 2$에 하나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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