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서울 강서고등학교 1학년인 송영민군이 보내 주었습니다. 송영민군은 2003년1월15일부터 1월27일까지 13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그리스/터키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글을 보내 주어서 감사합니다. | | 여행 떠나기 | | | 내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를 가본다는 것, 내 나라의 문화를 벗어 다른 나라의 문화를 경험해 본다는 것. 이것은 분명히 설레이고 가슴 벅찬 일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얻기 위해 해외여행을 한다. 나 또한 이것을 얻기 위해 이번 여행에 참가했으며, 여행을 끝내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그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본 그리스와 터키는 정말로 이것을 얻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그리스! 서양 문명을 만들어낸 뿌리이며, 기독교 문화와 함께 서양인의 정신적인 축의 한 부분인 그리스?로마 신화의 무대이다. 터키! 실크로드의 종착점으로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며, 한 때는 세계최대의 제국이었던 오스만제국의 후예들이 건설한 나라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두 나라이기 때문에 고대인들이 남긴 역사적인 유물도 많고, 또한 문화 또한 독특하였다. 그리스를 전통적인 서양인의 나라라고 한다면, 터키는 동양의 문화에 서양의 문화로 옷을 입힌 형태라 하겠다. 이처럼 그리스와 터키는 이웃나라이자 먼 나라이기 때문에 두 나라에서 얻은 나의 느낌 또한 다르다. 그럼 지금부터 그것을 풀어보도록 하겠다.
| | | | 2003년1월15일 그리스로 | | | | 지난 1월 15일 수요일. 나를 비롯한 우리 여행팀은 인천공항에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 로마공항으로 향했다. 인천공항에서 이탈리아 로마공항까지는 12시간, 로마공항에서 그리스 아테네 공항까지는 2시간이 걸렸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탄 나는 14시간 동안 비행기안에서 앉아 있는 덕분에 아테네 공항에 도착할 때쯤에는 설레임이 짜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비행기 안에서 짜증만 낸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그리스와 터키에서의 여행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책에서만 보던 그리스, 터키와 직접 내가 본 두 나라는 어떻게 다를까?, 사람들이 그토록 치켜세우던 유적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에서 시작하여 ‘두 나라 사람들과 말은 제대로 통할까?, 친구들은 사귀어 볼 수 있을까?’라는 상상까지, 이 것, 저 것 잡다한 상상들을 하느라 혼자서 바보처럼 웃기도 하였다. | | | | 2003년1월16일 아테네 | | | | 그렇게 비행기만 탔던 첫 번째 날이 지나가고,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는 두 번째 날이 왔다. 아테네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볼거리를 꼽으라 하면 누구나 아크로폴리스를 꼽을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도 아크로폴리스를 제일 먼저 갔다.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의 가운데 있었다. 그래서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보면 아테네 시의 전경이 다 눈에 들어왔다. 서울과 같이 스모그로 가득 차있어 답답한 느낌을 줬지만 고층 건물이 없어서 시원한 느낌을 주기도 하였다. 아크로폴리스는 볼거리가 참 많았다. 그리스 시대에 지어진 원형 극장과 몇 몇 신전, 그리고 그 신전에서 나온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박물관까지... 하지만 그 중에서 내 눈에 가장 뜨인 것은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이었다. 파르테논 신전의 ‘파르테논’은 동정녀인 아테네 여신의 별명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아테네 여신을 경배하기 위해 만든 이 신전은 아크로폴리스의 어떤 건축물보다도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큰 건축물인 이 신전은 전체 46개의 기둥을 가지고 있었다. 이 기둥들은 신전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데 하늘로 기둥들의 연장선을 그으면 신전의 1.5마일 상공에서 정확히 한 점에서 모인다고 한다. 그 옛날에 그 정도의 건축기술과 수학적?과학적 사고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볼 때 고대 그리스인의 위대함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리스가 알렉산더 대왕 이 후 단 한번도 세계사의 전면에 나선 일이 없었고, 오히려 다른 강대국들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 파르테논 신전의 역할이 많이 바뀌었다. 성당이 된 때도 있었고, 이슬람 모스크가 된 적도 있었다. 더욱이 화약창고로 사용된 적도 있었는데 이 화약이 폭발함에 따라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오던 신전이 박살이 난 적도 있었다. 나중에 그리스가 독립하고 파르테논 신전이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됨에 따라 복원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때문에 오늘날의 모습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현대인의 영향이 과거 그리스인의 환상적인 유물의 멋을 훼손시키기도 하였지만 아직도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인의 놀라운 건축술을 느낄 수 있는 가장 멋진 유물이라고 생각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필로파포스 언덕을 찾아갔다. 아테네 시에는 높은 언덕이 세 개가 있는데 첫 번째는 오전에 갔던 아크로폴리스이고, 두 번째는 지금 찾아간 필로파포스 언덕이며, 마지막은 리까비토스 언덕으로 그리스 여행 일정 마지막을 장식하기로 예정된 곳이었다. 지금은 필로파포스 언덕을 찾아갔는데 그 곳에서 받은 느낌은 한 마디로 아크로폴리스가 가장 멋있게 보이는 곳이었다. 아크로폴리스보다는 낮았기 때문에 아크로폴리스 전경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크로폴리스 아래 있는 원형 극장, 아크로폴리스 입구에 있는 기둥들, 파르테논 신전과 그 옆에 있는 에렉시온 신전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 환상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멋진 사진을 여러 번 찍을 수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파르테논 신전과는 또 다른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소크라테스 무덤이었다. 아직 명확하게 확정된 것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인류가 낳은 4대 성인의 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철학자의 무덤이라고 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무덤의 모양을 보고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무덤이라고 하지만 동물원에서 동물들을 가두어 놓은 야외 우리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 본 후 그런 나의 마음을 사라지고, 차가운 동굴 같은 곳에서 죽어가야 했던 위대한 철학자의 죽음으로 인한 안타까움이 솟아올랐다. 그 밖에 첫 번째 올림픽 경기가 열린 올림픽 경기장, 그리스 국회 의사당, 플라카 지구라고 불리는 우리 나라의 명동과 같은 곳을 돌아보았다. 그 중 기억에 남은 것은 국회 의사당에서 본 그리스의 군인들이었다. 그리스 군인들은 키가 정말 컸다. 어림잡아 2미터는 되어 보였다. 또한 서양에서 말하는 미인의 기준인 팔등신도 거의 갖추고 있었다. 의장대여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국회 의사당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었는데 광장 앞에는 죽어가는 병사의 모습을 부조로 표현한 벽이 있고, 그 앞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군인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군인들이 지키는 곳은 그리스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장소인 듯 하였다. 사람들이 가지 못하도록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영문인지는 잘 몰라도 아무튼 신성한 장소라 하니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생기기도 하였다. 때를 잘 맞추어서 갔기 때문에 군인들의 교대식을 볼 수 있었다. 한 쪽에서 다른 군인들이 왔는데 걷는 폼이 특이했다. 그냥 걷지 않고 쇼를 하면서 걷는 모습을 보고, ‘하나도 멋이 없는데 저런 짓을 왜 할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새로운 군인들이 도착하자 교대식을 가졌는데 교대식은 그 신성한 장소 앞에 있는 죽어가는 병사의 부조 앞에서 거행되었다. 간단한 의식이었지만 군인들은 아까 행진할 때보다도 더 쇼를 하면서 걸었다. 다시 한 번 ‘저 짓을 왜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그리스의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낮에 갔던 필로파포스 언덕의 카페에 가기로 하였다. 차가 없어서 지하철을 타고 갔다. 그리스의 지하철은 우리와는 많이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표를 받는 곳 이외에는 우리 나라의 지하철과는 다른 것이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나서야 나는 우리나라 지하철과의 차이점을 알 수 있었다. 그리스에는 지하철 노선이 3개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의 엄청나게 복잡한 지하철 노선표와는 대조적으로 그리스의 노선표는 간단, 그 자체였다. 지하철에서 내려 필로파포스 언덕까지 걸어갔다. 그리스에 가기 전 그리스는 밤이 되면 사람들이 거리에서 사라진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랬다. 7,8시였지만 거리에는 거의 사람이 없어 우리팀을 놀라게 하였다. 한산한 아테네의 거리를 지나 필로파포스 언덕에 도착해 잠시 언덕 정상으로 올라갔다. 아크로폴리스를 가장 멋있게 볼 수 있는 필로파포스 언덕에서 본 아크로폴리스의 야경은 그야말로 예술, 그 자체였다. 복원 작업을 위해 설치해둔 여러 가지 구조물이 엉켜있어 예술의 격을 약간 떨어뜨리던 낮과는 달리 밤에는 그 구조물이 보이지 않고, 수많은 조명을 받아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동안 그 환상적인 모습에 나는 아크로폴리스를 넋을 잃고 보고있었다. 이 멋진 광경을 못 본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첫째 날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나는 졸음이 몰려와 비몽사몽한 상태였지만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TV에서나 보던 많은 유적들, 나와는 다른 피부색과 언어를 쓰던 그리스인들, 하나하나를 되돌아 볼 때마다 그 때 받았던 느낌들이 새록새록 솟아올라 왔다. 모두다 소중한 기억들이라 생각하고 모두 다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 | | | 2003년1월17일 델포이와 메테오라 | | | | 둘째 날은 차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스에 와서 꼭 보고 가야하는 유적 중의 하나인 메테오라까지 가야했기 때문이다. 메테오라는 아테네 시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때문에 거의 하루 종일 차 속에 있었는데 가는 도중 신탁으로 유명한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을 들렸다. 여기에 만약 오지 않았다면 둘째 날은 정말 가치 없고 지루한 하루가 될 뻔했다. 하지만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은 그렇게 될 뻔한 하루의 가치를 매우 높여 놓았다. 점심 먹기 1,2 시간 전에 도착한 델포이에서 첫 번째 들른 곳은 박물관이었다. 아폴론 신전뿐만 아니라 그 밖의 델포이에 있는 여러 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박물관에서 우리를 맞이한 것은 그냥 커다란 돌덩이였다. 그냥 커다란 돌덩이 앞에 선 나는 왜 이런 돌덩이가 박물관의 첫 번째를 장식해야되는지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가이드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난 후 이 돌덩이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이 돌덩이는 ‘옴팔로스’라고 불리는 돌로 세계의 배꼽, 즉 세계의 중심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신화를 잠시 인용하여 설명하자면, 옛날 신들의 왕 제우스가 세계의 중심이 어딘가 알고자 하여 자신이 있는 곳에서 양쪽으로 독수리를 날려보냈는데 그 독수리들이 아폴론 신전 위에서 만났다고 한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이 곳에 돌을 가지고 와서 이 돌을 ‘옴팔로스’ 즉, 세계의 중심, 또는 배꼽이라고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신화가 100%로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그러한 내력이 있는 돌이라고 하니 과연 박물관에 오는 손님을 맞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박물관을 쓱 한 번 돌아보고 나와 박물관 뒤에 있는 아폴론 신전으로 향했다. 아폴론 신전은 신탁으로 유명한 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신탁은 세 개의 다리가 있는 냄비 같은 통에 무당이 앉아 신의 계시를 받아 뭐라고 말을 하면 옆에 있는 사람이 그것을 종이에 적어서 신탁을 원하는 사람에게 주었다고 한다. 냄비 같은 통에서는 메탄(혹은 유황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연기가 올라와 거기에 취해서 무당이 몽롱해지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슨 말이 튀어나왔는데 그 것을 신탁이라 하였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미신인 것 같지만 그 시대 살던 사람들은 신탁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지금의 아폴론 신전은 6개의 기둥과 터만 남아있다. 항상 이렇게 터만 남아있는 유적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절로 든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만 해서는 관광하는 것이 재미가 없기에 잠시 후, 나는 그런 생각을 접고 다시 아폴론 신전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비록 터만 남아 있지만 그 터를 보고 아폴론 신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규모는 파르테논 신전에 비해 작은 것 같았지만 신전이라 할만큼의 규모는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2층 구조로 보이는 터를 보고 만약 이 신전은 보존만 잘 되어 있었다면 파르테논 신전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폴론 신전을 보면서 생각한 또 하나는 신전이 자리한 곳이 참 명당자리라는 생각이었다. 앞이 산으로 되어있었지만 바로 앞을 막지 않고 트여있어, 멋진 경치와 함께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만약 아폴론 신이 있었다면 이처럼 멋진 명당자리에 자신의 신전을 지어준 델포이의 사람들을 매우 축복했을 것이다. 멋진 경치와 고대 그리스인의 정신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델포이를 지나 우리팀은 다시 지겨운 버스와의 동행을 계속 했다. 우리가 메테오라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식사를 해야할 시간이었다. 저녁을 호텔에서 먹고 소화도 할 겸해서 호텔주변을 돌아다녔다. 특별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메테오라를 ‘그리스에 오면 꼭 봐야할 명소’로 만든 거대한 바위들은 볼 만 했다. 불빛이 없어 나는 ‘처음에 무슨 거대한 돌벽을 세워두었나’하는 생각을 하였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것이 내일 볼 메테오라의 기이한 경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비록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기이한 경치의 맛을 본 나는 내일은 어떠한 경치가 펼쳐질지 상상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 | | | 2003년1월18일 메테오라와 아테네 | | | | 셋째 날은 당연히 메테오라의 관광으로 시간을 보냈다. 메테오라는 정말로 신기한 곳이었다. 멀쩡한 도시 한가운데 수백 미터나 되는 바위들이 우뚝 솟아 올라있던 것이었다. 옛날에 메테오라가 바다 속에 있었는데 지반이 융기해서 그러한 지반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기한 지형에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을 지어놓은 것이다. 옛날에는 바위 하나 하나마다 수도원이 있었지만 오스만제국의 침략으로 많은 수도원이 없어지고 지금은 6개만 남았다고 한다. 그런 절벽 꼭대기에 수도원을 세운 것을 보면 인간의 힘 또한 자연의 힘 못지 않게 위대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6개 수도원 중 가장 큰 수도원을 들어가 보았는데 그러한 절벽에 어떻게 이러한 돌을 올려와서 이러한 건축물을 지었는지 다시 한 번 놀라게 되었다. 나는 산꼭대기에 있어서 보통 수도원보다는 뭔가 부족하고 어색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엄숙하면서도 화려하였다.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답게 성상은 없었고, 대신 수많은 성화가 벽에 그려져 있었다. 비잔틴 양식으로 이 수도원은 지어졌는데 비잔틴 양식의 특징은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네 개의 기둥을 돔으로 연결한 것이었다. 돔은 예수님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기독교인인 나에게 그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수도원의 성화의 주제는 주로 옛날 그리스도인이 탄압을 받던 모습이었다. 잔인한 형벌에 의해 죽어가야만 했던 많은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지금 얼마나 신앙생활을 편하게 하는지 돌아보게 하였다. 또한 수도원의 그림은 단순히 그러한 순교자들의 죽어가는 모습만을 그려내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어간 순교자들이 부활해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려놓아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었지만 죽음 후에는 천국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었다. 성상숭배 문제 때문에 로마카톨릭교회와 갈라진 이 후 그리스정교회는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성화를 이용한 방법을 택하였다. 때문에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에 이 같은 성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여행팀 일원들은 무종교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들 또한 이러한 성화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는 것을 보면서 성화를 이용한 전도가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을 했다. 이 수도원을 돌아보고 밖으로 나가서 수도원에서 본 메테오라의 신기한 경치를 감상했다. 그 날은 비가 와서 구름이 짙게 끼었는데 구름이 감싼 바위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토록 훌륭한 자연의 아름다움은 감히 인간이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 동안 그러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넋을 잃고 보고있었다. 팀이 이동하느라 나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 때 본 그 광경은 내가 여행 중에 본 어떤 광경보다도 멋진 광경이었다. 다른 수도원 하나를 더 방문하고 오후에는 다시 아테네로 이동했다. 또 다시 지겨운 버스와의 동행이 시작되었지만 메테오라의 멋진 광경이 머리 속에 계속 떠올라 메테오라로 올 때보다는 지겹지 않았다. 5시간 동안의 지겨운 버스 여행을 끝내고 우리팀은 다시 아테네 시에 도착했다. 호텔로 돌아가기전 리까비토스 언덕에 올라 그리스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기로 하였다. 리까비토스 언덕은 전에 말한 것처럼 아테네 시의 세 개의 높은 언덕 중 하나로 그리스를 떠나는 마지막 밤을 장식하기에는 딱 알맞은 곳이었다.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었다. 비가 왔던 터라 춥고 온통 비에 젖어 있어 카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내려왔다. 잠시 머무는 동안 언제 볼 지 모르는 아테네 시의 야경을 다시 한 번 감상하였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 것은 아크로폴리스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크로폴리스가 보이긴 하였으나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처음에는 어디에 아크로폴리스가 있는지도 몰랐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아크로폴리스의 멋진 광경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기대감이 허탈감으로 바뀌었다. 허탈감을 가지고 내려와 호텔에 가서 그리스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맞이했다. 왠지 모르게 눈물까지 날려고 했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허탈감을 가지기 마련이지만 그리스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하니 허탈감이 배로 증폭되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스에서 본 많은 유적들과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리스 여행을 정리하면서 내가 본 그리스 음식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그리스 음식은 한 마디로 ‘씹는 느낌이 나는 소금덩어리’이다. 이 것은 단지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여행팀 모두가 느낀 그리스 음식에 대한 소감이다. 그리스 음식은 정말 짜다. 아무리 짜게 먹는 사람이라도 짜다고 욕할 정도로 짜다. 이것을 3일 동안 먹느라 고생했다. 그리스 여행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스에서 음식을 맛으로 먹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너무 짜서 괜히 기대했다가는 실망만 하고 올 것이므로... | | | | 2003년1월19일 이스탄불 | | | |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 터키 여행의 첫 번째 날은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안에서 해돋이를 맞이했다. 1시간 정도 타니 이스탄불에 도착하였다. ‘이스탄불 도착’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어제 가졌던 허탈감을 다 날려버리게 하였다. 기대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다. 터키는 우리나라와 피로 맺어진 혈맹이라고까지 불리고, 더욱이 이번 월드컵을 통해 더욱 가까워진 사이인 만큼 그리스를 방문했을 때보다도 기대가 컸다. 이스탄불은 참 재미있는 도시였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시가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있기 때문이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오스만제국의 수도로 사용되어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이스탄불은 제국의 중심부답게 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크고 웅대한 유적이 많으며, 더욱이 오스만제국이 이스탄불을 점령한 이 후 단 한 번도 침략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유적,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나이가 몇 백년 차이가 나는 유적들이 공존하는 곳이 이스탄불이다. 볼 것도 많고, 보존도 잘 되어있는 이스탄불? 터키 여행은 다 파괴되어서 그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을 듣지 않으면 모르는 그리스 여행과는 다를 것이란 기대를 하면서 여행에 임했다. 터키에서의 첫 번째 날 시작은 비잔틴 건축물의 가장 위대한 건축물인 성 소피아 성당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특이하게도 성 소피아 성당은 돔을 받치기 위한 네 개의 기둥이 없었다. 두 명의 설계자가 설계한 성 소피아 성당은 벽을 연결해서 돔을 올려놓고 있었다.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 중 유일하게 성 소피아 성당만이 기둥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건축물에 비해 약하게 지어졌거나 부실하게 지어지지 않다고 하니 놀라운 건축술에 감탄할 뿐이다. 비잔틴 제국 때, 지어졌던 이 건축물은 두 번 무너지고 지금 있는 것은 A.D 6세기경에 지어진 세 번째 작품이다. 그리스정교의 성당으로 지어진 이 건축물은 나중에 오스만제국이 비잔틴 제국을 멸하고 이스탄불을 정복했을 때, 이 성당을 이슬람 모스크로 바꾸었다 한다. 때문에 성당 때의 미술과 모스크일 때의 미술을 둘 다 볼 수 있다. 둘의 차이는 천장에서 나타나는데, 성당 때는 천장을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한 모자이크로 처리했다. 대부분 금색으로 처리된 성당 때의 천장은 고급스럽게 보였다. 이와는 다르게 모스크 때는 단순하게 카펫같이 처리했다. 하지만 어두운 색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다소 침침하게도 보였지만 그림은 상당히 정교하고 섬세하게 그려놓았다. 그 밖에도 많은 것을 느꼈지만 나에게 가장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은 돔이었다. 15, 16층 높이 정도 되어 보이는 큰 돔은 ‘인간이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는 존재였던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성 소피아 성당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았던 어떤 건축물보다도 멋지고, 웅장하고, 위엄있는 모습을 하였다. 또한 내가 이런 위대한 건축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였다. 나중에 성 소피아 성당을 떠날 때는 너무 안타까워서 뒤를 자주 돌아보게 되었다. 성 소피아 성당 바로 맞은 편에 있는 블루모스크보다 겉모습은 떨어졌지만 안의 모습은 정말로 블루모스크가 어떻게 되어있더라 하더라도 이보다 나을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성 소피아 성당에서 받았던 진한 감동은 그 날 하루 동안 볼 다른 곳의 관광을 방해했다. 다른 것을 보아도 성 소피아 성당에서 받았던 느낌 때문에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했고, 그러한 생각은 그 곳에서의 관광을 무미건조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호텔에 돌아와서 하루를 정리할 때 그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 밖에 이집트 시장, 한국의 명동과 같은 탁심거리, 아시아쪽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 등을 갔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돌마바흐체 궁전이었다. 세계에서 이 궁전과 같이 사치스러운 궁전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이 궁전은 사치스러움, 그 자체라고 한다. 이 궁전은 안타깝게도 오스만제국 말기에 지어졌기 때문에 오스만제국의 멸망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의 사치스러움을 대표하는 장식물은 샹들리에이다. 200개가 넘는 방이 있는 이 건물의 모든 방에는 샹들리에가 있는데 모두 크리스탈로 만들었다. 그 뿐만 아니라 스팀난로는 금으로 장식했고, 식기구도 모두 금으로 만들었다. 벽에도 크리스탈을 박았고, 난간, 문의 손잡이들도 모두 크리스탈로 만들었다. 크리스탈의 무게도 엄청났다. 가장 무거운 크리스탈 샹들리에의 무게는 무려 4.5톤. 크기도 엄청난 이 샹들리에는 한 번 청소하면 2주일이나 걸린다고 한다. 그 화려함은 정말로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또한 세계 최대의 제국인 오스만제국의 궁전답게 자기 나라의 식민지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 국왕이나 고위급 인사가 보낸 선물도 많았다. 술탄에게 바치는 선물인 만큼 화려하고 값도 엄청나게 비싼 선물만 골라 바쳤다. 그 것을 보면서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이 궁전에는 동양에 있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보내온 선물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보낸 선물은 없다는 점이었다. 세계를 너무나 좁게 본 우리 나라의 선조들이 참으로 원망스러워 지는 순간이었다. 우리 나라가 세계에 이렇게 눈이 어두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너무나 안타깝고, 부끄럽기도 하여 궁전에서 다른 나라의 선물을 볼 때마다 항상 그 생각을 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성 소피아 성당에서 받은 강한 감동 때문에 대충 보고 넘어갔었지만 나중에는 화려함을 느끼고 감탄을 했다. 순간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다면 왕 노릇도 해볼만 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나올 때는 내가 왜 처음부터 집중하여 보지 못했는지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였다. 궁전에서 나와 저녁을 먹고 호텔에 와서 하루를 정리했다. 참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하루동안 소화해 낼 수 없는 엄청난 곳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일정을 포기하고, 다시 이 곳들을 한 번 더 올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조형미의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본 오늘 하루는 내 평생동안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 | | | 2003년1월20일 이스탄불 | | | | 두 번째 날은 돕카프 궁전을 가는 것으로써 하루를 시작했다. 돕카프 궁전은 어제 갔던 돌마바흐체 궁전이 지어지기 전 사용했던 궁전으로 전통 터키식으로 지어진 궁전이다. 성 소피아 성당 바로 뒤에 있는 이 궁전은 안에서 2만명이 살았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궁전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처럼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이 넘쳐흐르지는 않지만 흙색을 띠고 있는 겉모습은 소박함과 정겨움을 동시에 주었다. 그러나 안의 모습은 소박함만을 주지는 않았다. 돌마바흐체 궁전처럼 식기구는 금과 은으로 만들었고, 장식품들은 크리스탈,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등 각종 진귀한 보석들을 박아서 만들었다. 역시 제국의 술탄이 사는 궁전다웠다. 이 곳은 박물관처럼 각종 물건들을 전시해 두었는데 그 중에서도 나의 눈에 띄는 것은 의복과 그릇이었다. 의복은 처음에는 우리 나라의 의복과 비슷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나라보다 중국과 일본을 더 많이 닮았다. ‘역시 터키도 동양의 나라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 깨졌다. 바로 옆에 서양식으로 된 옷이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의복 혁명을 일으켜 옷을 모두 서양식으로 바꾸었다고 가이드 아저씨가 설명해 주었다. ‘강대한 유럽에 맞서기 위해서 이열치열이란 말처럼 군대뿐만 아니라 의복조차도 서양식으로 바꾸었나보다’라고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그릇을 구경했을 때는 또다시 나의 속이 뒤집혔다. 전시한 모든 접시들이 다 중국, 일본 그릇이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 선조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접시들은 중국과 일본의 특색을 살린 것들도 꽤 있었지만 우리 나라의 청자나 백자처럼 생긴 것들도 많았다. 불연 듯 ‘우리 나라가 세계에 대한 눈만 밝았어도 여기에 저것보다도 훨씬 훌륭한 우리 나라의 접시들이 전시되어 있을텐데.’라는 원망 반, 안타까움 반 섞인 한숨을 내쉬어 보았다. 돕카프 궁전을 나와 이스탄불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보스프러스 해협을 따라 운행하는 유람선을 탔다. 유람선을 타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있는 기분도 좋았지만, 멀리서 보이는 성 소피아 성당, 블루모스크, 슐리마니에 모스크등을 보니 더욱 멋있고 상쾌했다. 또한 옆으로는 돌마바흐체 궁전이 세워져 있었다.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있는 궁전은 내부에 못지 않게 겉모습도 화려했다. 그 속에 있을 때는 겉도 이렇게 멋있는 줄 몰랐었는데... 숲 안에서는 숲을 볼 수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또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좌우로 아시아와 유럽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강보다 약간 더 넓어보이는 보스프러스 해협을 사이로 아시아와 유럽이 나누어진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너무나 재미있게 느껴졌다. 또한 아시아와 유럽을 동시에 보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유람선에서 내려 점심을 먹고, 모스크 중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슐리마니에 모스크에 도착했다. 오스만제국의 술탄 중 가장 훌륭한 술탄(이름은 잘 모르겠다)이 자신의 위엄을 알리고자 이스탄불 시내에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세웠다는 이 모스크는 이 당시 터키 최고의 건축자인 미말시난이 만들었다고 한다. 최고의 건축자가 만든 것답게 멋있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 건축되었다. 안은 붉은 색 계통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 꽃무늬등으로 장식된 타일은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주었다. 이 모스크는 마이크 없이 뒤에까지 소리가 잘 들릴 수 있게 소리가 잘 울리도록 설계되었으며, 모든 공기가 한 곳에 모여 나가도록 설계가 되어있었다. 공기가 나가는 쪽에 방을 세워 향을 피워 생긴 그을음을 그 방에서 모아 잉크로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과학적인 사고 외에도 알뜰한 정신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제 성 소피아 성당에서의 감동 때문에 객관적으로 평가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지 감동이 별로 없었다. 천장을 덮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돔도 별로 큰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 보면서 생각해 보니 성 소피아 성당과는 다른 웅장함과 엄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슐리마니아 모스크에서 나와 그랜드 바자르란 일종의 재래시장을 갔었다. 이 곳은 내 여행 중 가장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곳이다. 바로 흥정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가이드 아저씨가 내리기 전 이 곳은 가격을 엄청나게 뻥튀기해서 파는 곳이므로 반드시 가격을 깎아야 한다고 해서 물건을 살 때 가격을 깎았다. 하지만 나중에 돌아와서 팀의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니 나는 엄청나게 바가지를 쓴 편이었다. 옷 두 벌을 샀는데 한 번은 2/3가격으로, 한 번은 절반 가격으로 샀다. 하지만 적어도 손해보지 않고 제대로 살려면 1/3가격으로 사야한다고 한다. 손해봤다는 생각에 한동안 억울해서 계속 화가 났었는데 흥정하는 재미가 있었고, 지나간 일이니까 화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화를 풀었다. 다음에 터키에 올 때는 반드시 잘 깎아서 손해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호텔로 돌아와 두 번째 날을 마무리했다. | | | | 2003년1월21일 에페스 | | | | 세 번째 날은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시작했다. 지방 여행을 위해 이스탄불에 이은 터키의 제 2의 도시인 이즈미르로 가기 위해서이다.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1시간쯤 날아서 이즈미르에 도착했다. 이즈미르에 도착하자마자 에페수스 유적으로 향했다. 에페수스, 우리식으로 고치면 에베소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바로 초대 일곱 교회 중 한 교회인 에베소 교회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처음에 에페수스 유적에 가서 당황했다. 유적이 대리석으로 만들고, 조각된 그리스의 도시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옛날에는 바다와 인접하여 무역이 발달한 이 도시는 돈이 많았다. 때문에 번창하였고, 지금도 옛날의 영광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남아있었다. 많이 파괴되어 있었지만 그리스보다는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나는 에페수스에 있는 동안 대리석으로 만든 길을 걸어가면서, 양쪽에 있는 신상들을 보면서 계속하여 여기가 터키인지 그리스인지 헷갈렸다. 이 곳은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는 곳이어서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한 신전도 있었다. 계속하여 이슬람의 유적들만 보다가 성경에 나와있는 중요한 유적(남아있는 것은 전혀 성경과 상관없는 유적들뿐이지만)을 보니 참 반가웠다. 점심을 먹고 새끼양가죽으로 유명하고, 에게해의 해수욕장이 펼쳐진 아름다운 도시 쿠시다스로 갔다. 새끼양가죽으로 유명한 만큼 가죽옷 패션쇼도 보았다. 우리 여행팀의 한 친구가 패션쇼에 나가서 찬조출연을 했는데 옷을 너무 웃기게 입어서 우리 여행팀을 웃기게 하기도 하였다. 패션쇼를 보고 쿠사다스 시내에 도착했다. 쿠사다스는 아름다운 도시이므로 부자들이 여름별장을 많이 지어놓고 여름에는 놀러오기 때문에 여름에는 도시의 인구가 배로 증가한다고 한다.
쿠사다스는 내가 보기에도 정말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과연 부자들이 별장을 지어 놓을만 하였다. 아담한 집들이 해변을 따라 줄지어 서있고, 태양이 지기 전 마지막 힘을 다해 내뿜는 햇살이 바다에 반사되어 빛나는 장면은 마치 러브스토리를 다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우리 호텔은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에게해 바로 앞에 세워진 호텔이었다. 호텔 베란다에서 보이는 에게해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짐만 놓고 바로 해변으로 나왔다.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어서 꼬마들과 함께 지는 태양을 보면서 해변가에서 놀기도 하였다. 외국에서 즐기는 바다는 한국의 그것과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태양이 진 후 해변가에서 노는 것을 접고 방으로 들어가 아름다운 에게해의 해변을 보면서 잠이 들었다. | | | | 2003년1월22일 파묵칼레 | | | | 네 번째 날은 이동이 주목적이었던 날이었다. 도중에 나질리라고하는 터키에서 오렌지와 올리브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도시도 보고, 초대 일곱 교회 중 하나인 라오디게아 교회 유적도 보았다. 하지만 이 두 곳은 내가 크게 감동을 받을 만한 장소는 못 되었다. 오늘 여행의 압권은 파묵칼레의 목화성이었다. 파묵칼레는 땅에서 석회질이 녹아있는 온천이 솟아오르는 곳이다. 석회질이 녹아있는 온천수가 언덕 아래로 흐르면서 언덕의 겉 부분을 석회암으로 덮기 때문에 언덕이 온통 하얀 색을 띠었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언덕 전체에 온천수가 흐르면서 언덕을 석회암으로 덮어갔지만 인간이 호텔을 세우고, 온천수를 마구 끌어다 써서 온천수가 고갈되고 지금은 부분적으로 흐르고 있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그 곳의 호텔에 규제를 가함으로써 더 이상의 파괴를 막았다. 목화성이 가지고 있는 새하얀 색은 계속해서 온천수가 흐름으로써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부족한 물을 몇 년마다 흐르는 곳을 바꾸어 가면서 목화성의 새하얀 색이 유지될 수 있게 하였다. 몇 백년, 아니 몇 천년의 세월이 만든 장관이 인간의 만행에 의해 파괴되어서 너무 안타까웠다. 또 다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목화성의 하얀 색은 주변 언덕이 흙색을 띄면서 잘 대비되어 더욱 하얗게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목화성에서 받는 감동도 더 큰 것 같았다. 물이 떨어지는 낙차가 큰 곳은 석회동굴같이 종유석이 생기기도 하였고, 온천수가 고여있는 곳은 푸른색을 가지고 있어 신비함을 주었다. 목화성의 물이 흐르는 곳을 따라 걸어가 본 후 목화성 바로 옆에 있는 히에라폴리스를 구경했다. 히에라폴리스는 옛날에는 초대 일곱 교회 중 하나인 버가모 교회가 있었던 자리로 지금은 로마 시대 때의 유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히에라폴리스에서 볼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거대한 공연장, 또 하나는 이 곳, 저 곳에 널려있는 무덤들이었다. 거대한 공연장은 로마 시대의 영광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로마 유적은 거의 못 봤는데 여기서 웅장한 유적을 보니 정말 반가웠다. 그러나 이 공연장 유적보다도 나의 흥미를 끈 것은 바로 무덤들이었다. 여러 시대의 무덤이 함께 공존하고있는 이 곳은 정말 혼잡한 곳이었다. 돌로 만든 무덤과 우리나라처럼 봉토로 쌓은 무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무덤 만들 자리가 부족해 나중에는 무덤 위에다 또 다른 무덤을 만든 것도 볼 수 있었다. 나에게는 이런 보기 드문 광경을 볼 수 있어 재미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죽어서도 이리 치고 저리 치고 있어야 하는 무덤의 주인들이 불쌍해지기도 하였다. ‘산 전체가 그런 불쌍한 사람들 천지이니 이 산은 밤에 원혼이 많겠군’이란 생각도 해봤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해가 떨어지기 전 히에라폴리스를 떠나 호텔로 도망치듯 왔다. 호텔로 돌아와 그런 생각을 접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안하게 자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 | | | 2003년1월24일 카파도키아 가는 길 | | | | 다섯 번째 날은 전날과 비슷하게 이동이 주가 된 하루였다. 터키의 명소 카파도키아를 가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이동하느라 지겨웠다. 도중에 코니아라고 하는 작은 시내마저 들리지 않았다면 지겨워 도저히 버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코니아는 특별한 무언 가는 없어서 그냥 시장에 가서 과일을 파는 것을 구경하고 과일을 사기도 하였다. 코니아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몸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었다. 기본적인 숫자를 가리키는 영어단어들도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표현하면서 몇 개 샀지만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이들과 대화하면서 재미도 있었고, 한 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하였다. 또한 body language는 어디서나 통하는 만국 공용어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알라띤 모스크라는 셀주크 시대의 모스크도 한 번 가보았다. 특별하게 두드러진 점은 없었지만 겉은 다른 모스크보다 화려하게 장식해 놓았다. 속은 그냥 평범하게 생겨서 그냥 이동하느라 지겨운 시간을 덜어보고자 간 곳 같았다. 저녁에는 드디어 카파도키아에 도착했다. 길고 긴 시간을 여행해서 그런지 카파도키아란 곳에 거는 기대가 매우 컸다. 내일의 멋진 여행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 | | | 2003년1월25일 카파도키아 | | | | 여섯 번째 날은 드디어 기다리던 카파도키아의 관광이었다. 가장 먼저 카파도키아에 있는 지하도시, 데린쿠유에 갔다. 데린쿠유는 로마시대 때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서 많은 기독교인이 지하도시를 건설하고 숨어산 곳이었다.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유적을 보게된다는 것이 감동스럽고 또한 안타까웠다. 데린쿠유는 종교라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또한 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무섭고 독한 존재라는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었다. 개종하면 빛을 보며 땅 위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의 종교,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도시에서 평생을 살았다. 자신의 목숨과 인생을 바치면서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켰던 이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또한 데린쿠유는 과학적으로 설계된 지하도시였다. 공기통로를 설치해 항상 신선한 공기를 지하에 공급하여 주고있었다. 또한 공기가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어떻게 공기의 흐름을 이해하고 이런 지하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는지 감탄만 할뿐이다. 데린쿠유는 필요한 모든 생활 공간을 다 만족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방, 부엌, 또한 교회까지... 또한 가장 탄성을 자아내는 부분은 군인들의 침입을 대비한 구조였다. 보통사람의 어깨보다 약간 넓은 너비, 보통사람 키의 절반보다 조금 높은 천장 높이. 통로는 이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몸이 뚱뚱한 사람은 들어올 수도 없고, 보통체격의 사람이라도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만 하였다. 만약 로마군인들이 침입하여도 한 사람씩 밖에 못 들어와 방어를 용이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통로에는 커다란 돌문을 만들어 통로 이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카파도키아 내에 있는 수많은 다른 지하도시와 통로를 만들어 놓아 최악의 경우에도 무사히 도망갈 수 있도록 설계하여 놓았다.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잘 드러난 곳이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교회.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이 곳에 들어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그들의 힘들었던 삶이 이 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회복되지 않았을까? 또한 지금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예배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생각을 하니 지금의 내 모습을 되돌이켜 보게 되었다. ‘나는 편하게 신앙 생활하는데 이들은 이렇게 어렵게 살았다. 그러면 더 감사해서 더욱 열심히 기도 드리고 신앙 생활을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책을 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전심으로 기도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데린쿠유에서 나와 간 곳은 카파도키아가 왜 터키의 명소가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곳이었다. 카파도키아는 화산 폭발로 생긴 화산재가 쌓인 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물과 바람에 깎이어 환상적인 자연 경관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이 번에 간 곳은 그런 카파도키아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자연의 멋진 경관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가장 멋진 두 곳은 로즈벨리와 리틀캐년. 로즈벨리는 이름처럼 붉은 색을 띠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석양이 질 때 붉은 색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질녘이 아니어서 그런 장관은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름답고 멋진 곳이었다. 리틀캐년은 작은 그랜드캐년이란 뜻이다. 그랜드캐년의 멋진 광경을 난 3년 전에 봤다. 리틀캐년은 그랜드캐년에 비교가 안 되었다. 규모면에서나 그 속에서 나오는 웅장함이나... 하지만 리틀캐년은 그랜드캐년에서는 볼 수 없는 섬세함이 있었다. 그랜드캐년과는 달리 흙색을 띠고 있는 리틀캐년은 웅장함보다는 기암괴석들 하나 하나에서 풍겨 나오는 섬세함이 더욱 나를 자극했다. 고생스럽게 온 어제의 하루가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파노라마를 감상하고, 오후에 간 곳은 고대아파트와 교회들이었다. 고대아파트란 카파도키아에 널려있는 많은 기암괴석들을 속을 파고 들어가 사람이 사는 곳으로 만든 것이었다. 단지 한 가정이 살았던 것이 아니라 층을 만들어 여러 가정이 함께 살아서 고대아파트라고 하는 것이다. 험난한 자연을 이용해 살았던 고대인들의 지혜가 놀라웠다. 교회 또한 고대아파트처럼 기암괴석들 속을 뚫어 만든 곳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교회에도 성화들이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그런 곳에서도 성화를 그리고 예배를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또한 여흥으로 도자기 만드는 것을 보았다. 우리 나라 도자기 굽는 것처럼 만드는 방법이나 굽는 방법은 비슷하였다. 두 나라의 도자기와 접시의 스타일이 갈라지는 곳은 무늬였다. 소박한 우리 나라의 무늬와는 달리 터키의 무늬는 화려하고 꽉 찬 느낌을 주었다. 그 중에서는 옛날 술탄들이 쓰던 접시도 있었는데 값이 비싸서 구경만 하였다. 그것은 고급스러워 보여 과연 술탄이 쓰던 접시답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도자기 만드는 것을 보고 호텔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정말로 카파도키아는 터키의 명소가 될 만 하였다. 멋진 자연광경과 과거 기독교인들의 강한 믿음이 살아있는 카파도키아를 다시 한 번 돌이켜보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 | | | 2003년1월26일 카파도키아 | | | | 일곱번째 날은 다시 한 번 카파도키아의 멋진 자연광경을 감상하는 것으로써 시작하였다. 어제와는 다른 곳에서 카파도키아의 멋진 자연 경관을 감상하였다. 어제 봤지만 다시 봐도 감동스러운 카파도키아의 광경이었다. 펼쳐진 파노라마를 감상하고 나는 젤베벨리라는 곳을 갔다. 젤베벨리는 어제 갔던 데린쿠유처럼 기독교인들이 로마 시대 때 기독교 박해를 피해서 숨어살면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갔던 곳이다. 다만 데린쿠유와 다른 점은 데린쿠유처럼 지하도시가 아니가 고대아파트처럼 바위를 뚫어서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그 부분을 제외하고는 데린쿠유와 비슷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바깥에 노출되어서 그런지 침식이 많이 되어서 유적들이 많이 훼손되어 있었고, 계단들은 미끄러웠다. 그래서 바위를 파서 만든 교회나 수도원을 들어가는 일은 암벽 등반같은 느낌을 주었다. 또한 데린쿠유처럼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연결통로가 있었는데 이 곳의 계단도 미끄러워서 올라가기 힘들뿐만 아니라 빛이 전혀 없어서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것도 다 로마군인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이렇게 항상 불안에 떨며 살았던 이 곳의 사람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편안하게 하고 있는 신앙 생활을 돌이켜보고 반성하게 되었다. 젤베벨리에서 힘든 암벽등반을 마친 뒤 우리팀은 이스탄불로 가기 위해 카이세리란 도시로 다시 이동하였다. 가면서 낙타바위, 세 자매 바위등을 보았다. 그러나 그런 바위보다도 나는 카파도키아의 파노라마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카파도키아에서 나오는 순간 ‘언제쯤 이 곳을 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계속해서 버스 속에서 뒤를 돌아보면서 조금이라도 카파도키아의 경관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뒤를 봐도 카파도키아의 경관이 보이질 않자 허탈감에 잠시 멍하게 있었다. 카이세리에서 저녁을 먹고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속에서 계속해서 카파도키아의 경관이 떠올랐다. 그리고 터키에서의 마지막 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허무하기도 하였다. 여행하는 동안의 시간이 마치 꿈같이 느껴졌다. 너무 생생한 꿈같이 느껴졌다.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호텔 침대에 누워서 여행하는 동안 내가 보았던 것, 내가 느꼈던 것, 내가 생각했던 것을 돌이켜 보았다. 많은 것을 보면서 내가 얻었던 모든 것. 그 모든 것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 | | | 2003년1월27일 이스탄불 | | | | 마지막 날은 이스탄불의 나머지 유적들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전차경기장에 있었다던 오벨리스크로 스타트를 끊었다.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 있던 것을 뚝 잘라서 가져왔다고 한다. 지배자의 수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인 것 같았다. 오벨리스크보다도 나를 더욱 감동스럽게 만든 것은 바로 블루모스크이다. 블루모스크는 원래 이름는 술탄 아흐멧 사원인데 푸른 색 타일을 사용하여 겉과 속을 아름답게 장식해 애칭으로 블루모스크라고 불리는 것이다. 정말 내가 보기에도 그런 애칭을 가질만 하였다. 바로 앞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과는 달리 겉모습부터 화려한 블루모스크는 내부 또한 화려했다. 꽃무늬 등으로 장식된 내부는 푸른색 타일을 입혀 더욱 화려했다. 슐리마니에 모스크의 붉은 색 타일과는 달리 푸른색 타일을 입혀 또 다른 감동을 자아냈다. 무늬 하나하나는 조금씩 다르게 그려서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엿보였다. 또한 마지막으로 보는 모스크라고 생각하니 섭섭하기도 하여 계속하여 돌아보았다. 블루모스크를 나와 마지막으로 간 곳은 지하물탱크. 흔히 지하궁전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이다. 300개가 넘는 기둥은 모두 그리스 신전에서 뜯어온 것으로 다시 한번 지배자의 수탈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코린트 양식, 도리아 양식의 다양한 기둥들이 모여있는 이 곳은 엄숙한 분위기를 가졌다. 기둥들이 일자로 줄지어 서있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나오는 난쟁이의 도시 모리아처럼 생겼다.(이 영화를 안 보신 분께는 조금 죄송하지만) 빛이 없어서 어둡기 때문에 더욱 더 신비스럽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손색이 없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비행기를 탔다. 올 때처럼 이스탄불에서 로마공항까지 갔다가 로마공항에서 다시 인천공항으로 비행기를 타러 가게 되었다. 이제 정말 간다고 생각하니 허전한 마음뿐이었다. 단지 좋았던 추억으로 남기지 않기 위해서 보고 느낀 것을 계속해서 생각하였다. 여행을 단지보고 즐기는 것으로 끝낸다면 여행에 투자한 시간과 돈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고 들으며 배우고, 자신만이 얻은 느낌과 감동이 여행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얻을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경험. 이런 것이 있기에 사람들은 여행에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마무리를 하기 전 내가 본 터키인과 터키 음식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리스에서는 그리스인과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터키에서는 터키인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가장 쉽게 터키인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시장. 시장에서는 터키인과 직접 만나고 대화하기 때문에 터키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물론 내가 만난 사람들만으로 모든 터키인을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시장에서 서로 안 통하는 영어를 가지고 흥정을 하면 그만한 재미가 없을뿐더러 터키인이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진다. 시장에서는 장난을 거는 사람도 만날 수 있고, 또한 소위 말하는 건달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재미있다. 처음에 그 사람들은 ‘곤니찌와’하면서 우리에게 인사하면 내가 ‘노, 노, 노, 코리안’이라고 하면 다시 그 사람들은 ‘오, 꼬레아’이러면서 악수를 청한다. 그러면서 영어 시간에 처음으로 배우는 ‘Nice to meet you’이라든지 ‘What's your name?’같은 말을 쓰면서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서로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터키여행이 재미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같은 터키인의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터키는 ‘사람은 유럽, 문화는 아시아’인 곳이었다. 유럽문화가 들어와 있지만 유럽의 다른 나라와는 다른 분명한 아시아 문화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동양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터키가 그리스보다 지내기 편했다. 또한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그리스의 짠 음식에 비해서는 터키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중국요리, 프랑스요리와 함께 세계 3대 요리로 뽑히는 터키 요리는 ‘케밥’이란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케밥은 터키의 모든 요리를 지칭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떤 음식이든지 케밥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터키에 있는 중에서도 많은 종류에 케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음식이 맛있어서 그런지 그리스와는 달리 식사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하였다. | | | | 2003년1월28일 귀국해서 | | | | 이번 여행을 하면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다만 내가 배운 모든 것을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해외여행을 준비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리스?터키는 꼭 추천하고 싶다. 동서양의 문화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곳, 자연미와 조형미의 아름다움을 모두 느낄 수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그리스/터키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처음에 나는 이 여행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할 일이 많고 공부에 대한 부담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온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배우는 것 이상으로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또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한 해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등학생 때의 경험은 평생동안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생 때 배운 것은 대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하고, 고등학생 때 사귄 친구와의 우정은 평생동안 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난 이번 여행을 한 시절이 고등학생 때여서 참 감사하고도 다행스럽다. 이번 여행이 내 머리 속에서, 가슴 속에서 항상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