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일산 저동고등학교 1학년인 강덕현군이 보내 주었습니다. 강덕현군은 2003년1월15일부터 1월27일까지 13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그리스/터키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글을 보내 주어서 감사합니다.
| | 해외 여행 | | | | 이 말이 내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낯설게 느껴졌다. 유럽은 막연히 다른 세상사람들이 사는 곳이었고, 책이나 사진 등을 통해 접한 곳일 뿐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겪어보지도 못한 곳을 왜 다 안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이 어리석을 뿐이다. 어쨌든 예전엔 내가 그것을 알리 없었고, 평범하게 공부하는 여느 고등학생들의 겨울방학을 보내려니 했었는데...... 인생이란 우연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또 위에서 보면 필연일런지 모르지만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일까? 나는 훌륭한 어머님을 둔 덕분에 이 여행에 나서게 됐고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우리 나라를 떠나서 외국, 유럽이란 다른 세상으로 가게된 것이다. 대한민국 여권을 처음 받고, 그것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 | | | 비행기 | | | | 유명한 곳을 가는 것이 여행의 전부라고 할 순 없다. 어느 여행자들에게나 명승지란 어쩌면 여행을 가야만 하는 그럴듯한 명분일지도 모른다. 나의 이번 여행은 공항에서부터 시작됐다. 여행의 분위기랄까? 그런 기분이 인천공항에서부터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난 인천공항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나로선 그 큰 국제공항도 재미난 구경거리였고, 외국 떠나는 과정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국내선은 여러 번 타봤지만 국제선은 처음이었다. 하늘에서 밥도 먹고(맛은 없음) 영화도 재미나게 보고, 하지만 장거리 비행은 아주 갑갑해서 꽤나 힘들었는데 난 어떤 광경을 보고 , 힘든걸 잊었다.
| | | | 시베리아 상공 | | | | 낮에 출발한 비행기가 지구 서쪽으로 날아가니 밖은 태양이 밝게 비치는 낮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눈이 많이 부셨지만 도대체 아래 뭐가 보일까 궁금해서 밑을 보다가 숨이 탁 막혔다. 광활한 벌판이 펼쳐졌다. 처음엔 구름인줄 알았다가 거뭇한 것들을 보고 하얀 눈이 덮인 시베리아의 대 평원임을 알았다. 아파트 속에 갇혀 살던 나, 그 누구라도 그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저 끝없이 드넓은 대지를 마냥 달리고 싶어서 얼굴을 비행기 유리창에 밀착시켰다. 그러나 불현듯 그 위대한 자연 속에 감춰진 외로움과 쓸쓸함이 보였다. 만약 이런 곳에 산다한들 어떤 그리움에 견딜 수 있을까? 이것도 속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인간의 어리석음인가. 하지만 그곳은 내가 막연한 기대와 동경을 간직한 곳이고, 커다란 가슴으로 안기를 소망하는 곳이다.
| | | | 알프스 상공 | | | | 그걸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승무원이 밖에 알프스가 보인다는 말에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험준한 산맥이 주는 위압감, 절로 자연 앞에 고개 숙이는 인간들, 그리고 저 곳을 넘어가려 도전했던 한니발, 나폴레옹 같은 영웅들의 얘기... 우리들 누구에게나 알프스는 있다. 그것을 넘으려 하는 자와 겁먹고 넘지 않는 자가 있다. 어느 쪽이 위대한지 역사는 말한다. 나 역시 겁먹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알프스 정도는 넘어갈 의지가 있음을 믿는다. 설령 저 수백 미터 눈길 속에 파묻혀 흔적 없이 사라진다해도 그것은 충분히 가치 있고 자랑스러워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 | | | 미니 바 | | | | 호텔에 도착했다. 그런데 나만 독방을 쓰란다. 그래서 홀로 방으로 들어가서 시차적응을 위해 자려고 했는데 잠은 안 오고 마침 목이 말라서 마실 것 찾다가 냉장고 같은 게 있어서 열어보았다. 먹을 게 많았다. 그냥 서비스인줄 알고 쥬스와 과자를 먹었는데 나중에 자세히 보니 가격표가 붙어 있고 가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한국 돈으로 계산해보니 쥬스팩 하나에 3000원 꼴이니, 촌놈이 멋도 모르고 이것저것 먹다가 ‘돈 낭비했구나’하는 생각에 순간 나름대로 위장해서 호텔직원이 모르도록 교묘하게 해놨지만 다 들통이 나서 다음 날 아침에 거의 8유로를 지불했다. 마씨 아저씨(오야붕)께서 알고는 그래도 날 위로하는 말을 일행들에게 꺼냈다. 호텔을 이용할 수준이라면 미니바 정도는 돈 생각 안하고 이용해야 된다고. 위로가 됐다. 하지만 사내자식이 대담하지 못하고 겨우 이까짓 것에 신경 쓴 게 참 나 자신이 못나 보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콘도만 가봐서 호텔을 모른 내가 겪은, 웃기는 해프닝이다.
| | | | 아크로 폴리스 | | | | 이 유적이 세계문화유산 1호인 이유라면 서양문명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문명, 그 중에서도 찬란한 아테네문명의 심장이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서 서양문명의 수원지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다. 첫 유적지라 가슴이 설레었다. 아크로폴리스가 보이고, 그 수 천년 전의 도시가 남아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멀리서 보아 높다란 성벽으로 둘러싸인 언덕은 과거의 아테네의 영광을 말해주었으나 막상 안으로 들어갈수록 세월에 무너지고 부서진 대리석들 사이로 잡초가 듬성듬성 피어있었다. 이제 찬란했던 과거의 아테네는 없고 웅장한 대리석기둥으로 옛날의 모습을 짐작할 뿐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한 이후로 역사 속에 주연자리를 뺏기고 한때는 파르테논신전이 무기고로도 사용했다가 대포도 한방 얻어맞았다니까 세계적 문화유산치고는 많이도 망가졌다. 흉물로 방치되어 있다가 이제 전세계에서 관광객을 끌어 모아, 그리스 국민들을 먹여 살리며,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가 세계문화의 원류였다는 자존심으로 남아 있었다. | | | | 파르테논 신전 | |
| ‘사물은 멀리서 봐야 아름답다.’라는 말은 파르테논 신전을 두고 한 말 같다. 아크로폴리스에 올라서 파르테논신전을 보았다. 여러 가지 특징도 있었고 일단 규모가 컸다. 하지만 아름답다기보다는 부서질 것만 같은 오랜 건축물이란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크로폴리스 맞은편 언덕에서 파르테논신전을 보면 색다르다. 균형 잡혀있고, 안정감이 있다. 특히, 달무리 지는 조용한 저녁에 조명 빛이 대리석에 반사되니 파르테논신전은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신비스러웠다. 정녕 멀리서 봐야만 파르테논신전의 절묘한 비례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 | | | 조동규 아저씨 | | | | 그리스의 얼마 안 되는 우리 교민들 중 대표이시고, 우리 여행의 안내자이시다. 그리스에 온 지는 올해로 14년, 유머와 해박한 지식이 그분의 장점이다. 그의 ‘소위 말해서’는 대박이 나서 우리일행은 그리스에서 내내 ‘소위 말해서’를 흉내냈다. | | | | 개 | | | | 서양의 어느 나라도 그렇겠지만 개 팔자가 상팔자다. 개들이 사람 가는 길 한복판에 드러누워 자는가 하면, 시내 한복판을 버젓이 기웃거린다. 우리 나라 같으면 벌써 탕집에 갔을 그런 큰 개들이 말이다. 한마디로 개들의 천국이다. 우리 나라 개들이 이것을 알면 개들이 이민이라도 갈까? | | | | 지방 풍경 | | | 인구 많고 복잡한 아테네는 여느 대도시와 다를 바 없지만 아테네를 벗어나면 보다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언덕 위에 나무는 거의 없고 바위투성이 산에 풀만 무성하다. 하지만 가볍고 발랄해 보인다. 또 집들은 하나같이 다 하얀 벽에 빨간 지붕이다. 여느 서양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리스의 시골풍경은 어딜가나 비슷비슷하다.
| | | | 델피 | | | 아폴론신전은 고대사회에서 신탁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신탁이란 어찌 보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그리스인들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말인 것 같지만 한편 그것은 이성의 한계점에서 느끼는 목마름을 해갈함 이었던 것 같다. 과학적으로 이곳 무당이 앉았던 자리에 메탄가스나 유황이 나왔기 때문에 사제가 환각상태에 빠져서 뭔가를 중얼거렸던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당의 말로 국가의 정책을 결정했다니 웃기는 일 아닌가? 당시 일부 그리스인들은 다른 이유에서 산을 넘어 머나먼 이 곳까지 오지 않았을까? 신탁에 신경 쓰기 보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델피를 찾아 오고가는 과정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확신을 갖는 계기로 삼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또 다른 이유라면 어느 정치가가 자신의 생각이나 정책을 델피에서 신탁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대중들에게 선전할 목적일수도 있다. | | | | 온천 | | | 우리 일행이 메테오라로 가는 중에 조동규아저씨가 아는 노천을 찾아갔다. 유황온천이라 달걀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사실 들어가기가 좀 그랬다. 왜냐하면 유황천이라 물 닿은 곳은 바위가 푸르스름한 색으로 변색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몸도 저기 들어가면 푸르딩딩하게 변하는 게 아닌가해서 께림찍했다. 허나 뭐든지 신기한 것들만 보면 다 한번씩 해보고 싶은 성격 탓에 옷을 벗었다. 먼저 들어간 조아저씨가 이곳의 모기는 독해서 물리기 싫으면 빨리 들어오라고 하셨다. 모기 몇 마리가 왱왱거리자 나는 황급히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지도 않고 적절했다. 모기가 두려워서 나는 머리만 내놓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답답해서 발가벗은 채로 물 밖을 나다니다가 모기에 한두 번 물린 것도 같다. 마아저씨는 우리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러니까 소위 말해서 단체 누드집인데 우리 대부분은 머리만 나왔으나 누구는 사정이 달랐다. 중요한 부위가 노출되어서 찍혔다. 마아저씨는 여행 내내 그 녀석한테 그 사실을 상기시키며 계속 놀렸다. 이곳은 천연 노천탕인데 의아한 것은 이렇게 좋은 유황온천에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다. 조아저씨가 설명해주셨다. 소위말해서 이곳 그리스에서는 온천은 관광의 개념이 아닌 치료의 개념이란다. 실제로 이런 유황온천은 여러 가지 질병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도 그날 이 온천 핑계 대고 샤워 안하고 잤다. | | | | 메테오라 | | | 메테오라는 사실 아테네에서 엄청 멀다. 버스를 타고 5시간 정도는 가야했다. 마 아저씨가 메테오라를 가는 여행사는 테마세이를 비롯한 몇몇밖에 안된다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런가보다 하고 버스 위에서 그리스의 시골풍경, 자연을 감상했는데 앞서 말했듯이 그리스의 시골풍경이 적어도 외국인인 내 눈에는 다 비슷했다. 메테오라를 가다보니 지루해서 이거 괜히 성격 이상한 사장님 만나서 이 먼길을 가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밤 메테오라의 밤길을 산책할 때 거대하게 솟은 바위를 보고 참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껏 기대하면서 자고 일어나서 우리일행은 메테오라 깊숙이 들어갔다. 메테오라는 그리스 여행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환타지한 곳이다. 그곳은 속세와는 확연히 다르게 보이므로 나라도 절하나 세우고 싶은 맘이었다. 그날 메테오라는 안개와 비로 날씨가 흐려서 전체적인 광경은 볼 수 없었고 부분적으로 안개에 싸인 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메테오라를 신비하게 만들고 가슴 뭉클하게 하였다. 전날은 버스 속에만 있어서 걷고 싶었는데 이곳에 오니 계단이 많아서 충분히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 계단을 걸어 오르며 메테오라의 수도원들을 보고 있노라니 인간이 위대한 것인지 신이 위대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나왔다. 왜냐하면 그 수도원은 정말 불가사의하게도 깍아지르는 듯한 벼랑 위에 세워져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수년에 걸쳐 바위 위에 올려 만든 것이리라. 신을 향한 인간들의 의지가 메테오라의 기암괴석들처럼 굳고 우뚝한 것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리라. 메테오라의 수도원 중 2곳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또다시 기이한 광경을 보고 왔다. 하나는 포도주를 만들었던 곳이다. 그러니까 스님이 절간에서 막걸리 만들고 퍼마시는 것과 같은 것 아닌가?? 그런데 몰래 숨긴 것도 아니고 여기서는 포도주 공장을 아예 차려놓고 마셨던 것 같은데, 설명에 따르면 추위를 이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나라의 절간도 다 산에 있어서 추울텐데 스님들도 술 많이 마실까??? 그리고 쇼킹한 다른 한 장면은 수도사들의 유골을 묻은 게 아니고 별실에 모아 논 것이다. 마치 백화점에서 물건 진열하듯이, 물론 이곳에는 묻을 곳도 마땅치 않아 보였지만 유골들을 모아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문화로 볼 때는 희한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누구든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신기한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죽음의 의미를 자각할 것이다. 죽음이란 항시 우리 바로 뒤에 서있다. 우리란 오래 살아봐야 몇십년이다. 수백년 전 순차적으로 죽은 수많은 유골들이 있지만 우리가 보기엔 다 비슷비슷한 유골일 뿐이다. 죽어서 비석이 없다면 누구의 유골인지도 알 수 없는데 사람이 잘나면 얼마나 잘나고 못나면 얼마나 못났겠는가? 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인데 해골 되기 전에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살아야겠다.
| | | | 터키로 | | | | 사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진짜 큰 기대를 걸었던 곳은 바로 터키다. 뭐랄까 인간은 잘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동경을 가지는 것 같다. 그리스는 유럽이고, 서구의 특징을 가진다. 서구의 모습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고 우리문화에 깊숙이 침투해있다. 그러나 터키는 이슬람 국가이고, 유럽의 다른 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문화와 전통이 있다. 그러고 여행에서의 중요한 것은 역시 인간과 인간사이의 교감이라는 것을 터키를 통해 깨달았다. 적어도 나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터키인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과 직접 눈을 맞대고 간단한 대화라도 나누면서 즐겁게 형제의 나라임을 느끼고 왔다. 터키 가기 전에 나는 아랍민족의 한 갈래쯤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터키는 옛날에는 우리의 이웃나라였고 비슷한 민족이다. 동양역사에 나오는 흉노, 돌궐, 위구르 등이 터키의 조상이고 점차 서쪽으로 이동했다. 역사에 자신이 있었던 나도 미처 몰랐다. 왜나하면 이들은 유럽사 또는 중국사로 씌여진 역사의 큰 두줄기에서 항상 지류였기에 즉 주연보다는 조연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들은 우리와 같은 우랄 알타이어계의 언어를 쓴단다. | | | | 규벤 아저씨 | | | | 지겨운 비행기(?)타고 이스탄불공항에 도착하니 새로운 가이드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말총머리에 잘생긴 어떤 외국인이 우리말로 ‘어서오세요’ ‘절 따라 오세요’ 라고 하자 우리 일행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즐거워하며 탄성을 질렀다. 그 아저씨의 이름은 규벤이다. 터키인이지만 어린 시절은 독일에서 보냈고 다시 터키로 왔으며 한국어를 전공했단다. 독일어, 터키어, 한국어에 능통하고 또 영어도 할만큼 한다고 누군가가(?) 그랬다. 보통가이드의 4배 수당을 받는 사람이란 말을 듣고 그 정도로 좋은 가이드인가 하는 의구심이 생겼으나 터키 여행을 함께 하면서 규벤은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마아저씨가 참 좋은 사람을 선택했다는 것도 알았다. 내 생각엔 여행에 있어서 가이드는 한 가족이다. 그래서 가이드를 좋아하게 되면 여행이 즐거워지고 가이드와 사이가 안 좋아지면 여행은 그리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일행과 조동규 아저씨가 그리스에서 한 가족이었고, 터키에서는 규벤과 한가족이 되었다. 이별할 때 서럽고 지금도 생각나는 한 가족. | | | | 성 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 | | | | 선남선녀, 그 두 성당을 보고 내가 생각한 것이다. 성소피아는 여성적 이미지이고 블루모스크는 남성적 이미지이다. 성소피아가 붉은 이미지이고 불루모스크가 푸른 이미지인 것도 있겠지만 전자는 얌전해 보이고 구석구석 예쁜 반면에 후자는 웅장하고 화려해 보이고, 늠름하게 생겼다. 성소피아에는 감춰진 속살의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성소피아 성당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가 여행했던 곳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은 성소피아 성당이다. 그것은 단지 조형적 즉 미술적인 측면에서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형적으로 본다면 블루모스크나 파르테논도 참 멋있다. 허나 성소피아는 1500년의 세월을 가졌으며,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고, 역사의 큰 흐름이 지나간 자리이다. 이것은 불루모스크가 갖지 못한 오랜 세월의 아름다움이다. 또한 이곳은 성당이었다가 모스크가 된 곳. 그래서 성소피아에는 동방과 서방, 동물적인 기독교 모자이크와 식물적인 이슬람 페인팅들이 공존해있고, 그것들 사이에 조화가 있다. 이것은 지구상 어느 건축물에도 없을 것 같다. 물과 기름 같은 것들이라고 생각한 것이 이곳에서는 시간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소피아 성당은 조형미 ,세월미(?), 조화미 삼박자를 두루 갖춘 건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곳에서 나는 반나절이라도 머무르고 싶었지만 단체관광에 일정은 빡빡하여 그 정도의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어찌보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위쪽을 계속 쳐다보느라 목뼈가 휘어질 수도 있으니까.. | |
| | 돌마바흐체 궁전 | | | | 19세기에 세워진 궁전이란다. 근데 이슬람양식이 아닌 유럽식이다. 프랑스식으로 화려하기 이를데 없다. 세계각국에서 보내온 수많은 선물과, 귀한 보석, 온갖 치장을 한 물건들로 방을 채웠다. 이것들을 보고 왕도 해볼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19세기라면 오스만제국은 사양길로 접어들던 시기로 국력이 쇠퇴하고 전쟁에서도 지고 그리스도 독립했다. 사실 규모 면에서는 톱카프 궁전한테 훨씬 못미치나 그 화려함은 톱카프를 뛰어넘는다. 어떻게 가능한 걸까? 규벤 아저씨한테 물어봤는데 오스만제국은 그 정도로 재력이 있었다고는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오스만의 전성시절이라면 모를까 오스만이 다 망해갈 시기에 이 정도의 궁전은 국가재정을 다 터는 무리수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도 그런 장면이 있다. 대원군이 다 망해가는 조선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무리해서 세웠던 경복궁 중건. 돌마바흐체 궁전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곧 사라져야만 했던 오스만제국이 역사의 격류 앞에서 마지막으로 울부짖었다. | | | | 톱카프 궁전 | | | | 규모가 바티칸시국보다도 크고, 모나코공국의 절반이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모스크가 3개나 된다. 하나의 작은 도시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곳은 돌마바흐체와는 다르게 이슬람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15세기 오스만의 전성기 때 지은 것이니 만큼 규모도 그때의 국력과 비례한다고 보면 되겠다. 나는 이 궁전이 여름의 궁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분수들하며, 또 푸른색계열의 타일들로 벽이며 천장을 도배해 시원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날 바람부는 황금지붕(정확한 명칭은 생각 안남) 아래서 식사를 하고 분수소리를 들으면 정말 시원하겠다. 톱카프 궁전에는 그 당시 오스만 왕이 이웃나라의 선물로 받은 엄청나게 비싼 보물들이 쌓여있다. 금, 은, 보석들을 주물럭거려서 만든 것들, 저 멀리 중국에서 건너온 도자기들, 그 당시 오스만의 세력을 시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지금 오스만 터키제국은 사라졌지만 투르크의 후예들은 살아있다. 그들은 이러한 유물들을 보면서 한때 그들의 조상들이 세계를 지배했다는 자긍심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우리 민족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것인가? 우리에게는 이러한 보물들도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빼앗기던 역사를 가졌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의 조상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비록 세계를 지배하지는 못했지만 그 험난한 세월을 겪고도 절대 쓰러지지 않던 할아버지들로 인해서 우리는 적어도 이만한 나라를 이루고 살지 않는가? | | | | 한식당과 3개 1달러를 외치는 소년 | | | | 이스탄불에서의 첫날 저녁은 한식이었다. 나는 그게 엄청 싫었다. 일단 이곳의 한식당은 정말 맛 없었다. 나중에 한국가면 실컷 먹을 한식을 왜 이 먼 곳까지 와서 비싸게 시켜먹는지 이해가 안갔다. 12일이란 일정은 사실 현지 음식을 실컷 맛보기에 턱없이 부족한데 왜 한식당에 가야하는가? 나는 외국 갈 때 고추장 가져가는 사람들을 이해 못한다. 왜 그 사람들은 비싼 돈 들여서 외국여행 가는지 알 수 없다. 음식 문화 또한 여행에 있어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경험 아닌가? 그날 한식당에 간 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참 좋았다. 왜냐하면 거기서 터키 소년 ‘샤힌’과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식당 앞에서 우리나라말로 ‘3개 1달러’를 계속 외치며 팽이를 팔고있었다. 들어갈 때는 무심히 지나쳤다. 밥을 먹고 나온 후 나는 그 터키소년에게 호기심을 갖고 다가가 서있었다. 누가 먼저 말을 걸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어쨌든 서로의 이름을 물어보고, 인사를 나눴다. 그는 터키말로 뭐라고 말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샤힌이 이렇게 돈벌러 다니는 걸로 보아 학교에 안 다니거나 대충 다니나 보다. 그래서인지 그는 아주 간단한 영어 외에는 말하질 못했다. 나이를 물어봤는데 15살, 한국나이로 치면 16살. 근데 정말 키가 작다. 그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다른 곳에서 14살, 15살짜리라는 소년들도 다 키가 작고 체구도 작다. 못 먹어서 그런 건지, 투르크민족이 원래 키가 작은 건지, 이곳 아이들이 성장이 늦게 일어나는 건지 지금도 궁금하다. 규벤아저씨에게 물어볼 걸 그랬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라도 터키소년과 짧은 대화를 나눠서 즐거웠다. 꼬맹이 삼총사들이 샤힌에게서 팽이를 샀는데, 그가 자기들한테는 3개 1달러에 팔고, 다른 터키인이 살 땐 1달러에 4개나 줬다고 불평했다. 나는 샤힌에게 하나 더 달라고 ‘프렌드, 서비스’라고 말하곤 하나 더 받았다. 꼬맹이들에게 줄까하다가 하나 갖고 싸울 것 같아서 그냥 내가 가졌다. 그 팽이는 지금 서랍 속에 기념으로 모셔두고 있다. 터키 생각날 때마다 꺼내볼 생각으로. 그것은 밝은 미소를 짓고있던, 모르는걸 물어볼 때마다 귀엽게 머리를 긁적이던 그 터키소년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 |
| | 그랜드 바자르 (흥정놀이) | | | | 그랜드 바자르, 규벤 아저씨의 말씀을 들어보니 이스탄불에서 가장 크고 역사가 오랜 시장이란다. 일단 시장하니까 야채 팔고,뭐 팔고, 싸구려 물품이나 파는 시장이 내 머리 속에 이미지로 떠올랐다. 막상 가니까 그런 종류의 시장은 아니고, 우리의 동대문시장 비슷하게 옷가지들이며 가죽제품, 금은보석, 각종 수예품 등도 팔았다. 규모가 엄청났다. 나는 경범이와 영민이하고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돌아다녔는데 번호로 이백몇번인가 하는 곳까지 들어갔다. 상점 번호가 3000인 곳까지 이 시장에 있다니 우리가 한시간 내내 돌아다녔지만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드레날린이 많이 분비된 곳도 이곳이다. 수없이 많은 가게들과 사람들, 그리고 웅성거림, 열띤 흥정 이러한 것들이 나를 흥분하게 만든 것이다. 처음 들어가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릴 때만해도 이곳의 재미를 못 느꼈다. 역시 시장이란 직접 물건을 사봐야 하는 곳이다. 작은 물건이라도 사려고 이것저것 살펴봤다. 그때 영민이가 갑자기 티셔츠를 사겠다고 했다. 900만 리라를 주인이 부르기에 영민이는 좀 깎아서 700만 리라에 샀다. 본인은 즐거워하면서 샀는데 주인은 더 즐거워했다. 뭔가 좀 이상했다. 어쨋든 그런가보다 하고 이번에는 내가 살 차례가 되었다. 열쇠고리를 사려고 점원에게 물어봤더니 하나에 2달러라네. 터키시장에선 무조건 깎아야 한다기에 일단 하나에 1달러에 달라고 했다. 사실 그 때는 좀 어려울 줄 알았다. 그런데 웬일, 그 점원이 바로 오케이 했다. 오히려 내가 놀랐다. 바가지썼다는 이 느낌. 그리곤 이곳에서 물건 깎는다는 게 어느 정도인지를 알았다. 우리 나라 시장에서 처럼 몇 천원 깎거나, 비싸야 만원 깎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음가격에 30~40% 정도로 깎아야 된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그래서 억울한 느낌에 뭐라도 하나 더 사야 풀릴 것만 같았다. 영민이가 옷 한벌 더 사려했다. 아예 옷 장만하려고 마음먹었나 보다. 나와 경범이는 한번 어느 정도 가격까지 값이 내려가나 궁금하여 남방 하나 갖고 흥정해봤다. 우리 나라에서 3만원정도하는 것을 처음에는 20달러까지 얘기하다가 계속 흥정해서 7달러까지 내렸다. 살 맘도 없이 흥정하다 왠지 살 분위기다. 그래서 안 내릴 줄 뻔히 알면서도 5달러만 냅다 주장하다가 그냥 그곳을 떠났다. 소심한(?) 우리는 남방 하나 살까 고민하다가 에잇! 사고 보자 하는 심보로 다른 점포에 가서 남방을 골랐다. 거기도 20달라를 처음에 불렀다. 내가 처음부터 “그냥 똑같은 것을 딴 데선 7달러에 팔더라” 이런 식으로 말하니까 흥정이랄 것도 없이 바로 하나에 7달러에 남방을 줬다. 그래서 나와 경범이와 영민이 다해서 3개 샀다. 그 다음부터 흥정에 재미 붙어서 살 것도 아니면서 계속 흥정만 했다. 그래서 내려갈 때까지 내려가면 더 낮은 값을 불러서 그냥 가버리고, 너무 재밌어서 계속하다가 경범이 지갑 살 때도 내가 앞에 서서 흥정했다. 25달러 부르기에 아예 처음부터 5달러에 달라고 했다. 그 가게 주인은 어이없는 표정 짓길래, 그냥 가버리자 주인이 우리들을 다시 불러세웠다. 그러니까 고작 몇 달러 더 붙여주자 팔았다. 모든 흥정경험에 미뤄 볼 때 처음 부른 것의 삼분의 일 이하의 가격으로는 팔지 않는 것 같았다. 모두 버스 안에 들어가서 누가 얼마 더 깎았는지 각자 자랑처럼 말했다. 마아저씨가 가격 비교하면 기분 상한다고 그러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각자 자신의 흥정솜씨를 자랑하려는 양 얼마나 싸게 샀는지에 관해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물건 싸게 사는 걸로만 이 시장이 기억에 남은 것이 아니다. 마치 외국 같지 않은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물건 구경하는 과정에서 많은 터키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온걸 알면 같이 다 ‘대한민국’을 연호 했으며 ‘우린 형제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상인들도 있었다. 앞만 보고 걷다가 갑자기 ‘워!’ 하고 소리질러 놀래킨 뒤에 재밌다고 웃는 짖궂은 아저씨도 있었는데, 이 시장에서 그렇게 밝고 우호적인 터키인들과의 접촉을 가졌던 것이 계속 가슴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 | | | 유람선 | | | | 유람선을 타고 한번도 객실 안에 안 들어가고 계속 갑판에 서서 강바람과 바닷바람을 다(?) 맞는 바람에 다음날 몸살로 좀 고생했지만 유람선을 타면서 본 이스탄불이란 도시가 정말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서 추워도 참을 수 있었다. 전날 봤던 여러 사원과 궁전등 유적지들이 모두 멀리서 보일 뿐만 아니라, 시야에서 왼쪽으로는 아시아, 오른쪽으로는 유럽이라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곳이 이 이스탄불이고, 마치 언덕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 대부분 도시의 달동네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이스탄불이 왠지 정감이 갔다. 규벤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이 번화한 이스탄불 도시의 20년 전의 모습은 큰 시골이었다는데 앞으로 20년 후의 이스탄불은 어찌될까? 궁금해서 머리 속으로 그려본다. 터키인들이나 이곳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이 아름다운 이스탄불이 서울이나 뉴욕처럼 되는 것은 정말 싫다. 성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가 빌딩 숲에 가리는 모습은 아주 끔찍할 것이다.
| | | | 아타튀르크 | | | | 터키에서는 학교마다 아타튀르크의 흉상이 교정중앙에 있고, 그의 동상은 마을마다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에도 다 아타투르크의 초상이고, 어딜가나 아타투르크가 있다. 사실 아타투르크가 너무 많아서 터키에는 존경할만한 인물이 이 사람밖에 없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심지어 아타투르크가 누군 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곳 터키도 북한이나 이라크처럼 한사람이 수십년 동안 독재를 하고 있나 하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료집에서 봤는데 터키인들은 아타튀르크를 진심으로 존경해서 그를 비방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나와 있었다. 한마디로 터키의 국부인 것이다. 근데 왜 우리 나라에는 국부가 없을까? 아마도 미국도 그렇고 인도, 터키, 중국도 그렇듯이 쑨원, 간디, 아타튀르크,워싱턴 모두 독립 운동을 해서 나라를 되찾은 민족의 지도자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조상의 노력도 있었지만 일본이 스스로 망해서 독립이 된 것이어서 뚜렷이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을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김구선생님은 임시정부의 주석이셨다. 만약 그분이 광복군을 이끌고 일본과 전쟁을 해서 우리의 힘으로 조국을 되찾았다면 그분이 우리 나라의 국부가 되셨을 것이다. 어쩌면 분단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김구선생님은 우리 나라의 국부가 되실 충분한 자격이 있으셨던 분이라고 생각한다. 의지와 용기가 있는 분이고 리더쉽이 있으며 감정적인 의사, 열사와는 달리 냉철한 전략가였다. 아울러 민족이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했던 인물로 우리민족의 지도자로서 혹은 국부로서 충분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 | | | 에페스의 고대도시 | | | | 에페스의 고대도시는 소위 말해서 현대에 떠있는 시간의 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곳에 가면 2000년 전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져서 마치 이곳저곳을 볼 때마다 그 옛날 이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그게 영상화되는 것이다. 그 정도로 보존이 잘된 고대도시이다. 이곳은 또한 명당이다. 좌우로 산을 거느린 폼이 좌청룡, 우백호이다. 그리고 옛날 바다가 있던 자리를 끌어안는 모양새가 역시 명당이다. 이곳 지중해쪽에 풍수지리사상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도시의 원형극장의 윗부분에 올라가서 있노라면 장관이다. 성소피아 성당과 함께 규벤아저씨의 ‘출발합니다’하는 외침이 듣기 싫었던 곳이다. 내가 특별히 맘에 들었던 곳은 이 고대도시 시내에서 바다까지 쭉 뻗은 길인데 고대에는 이곳 에페스의 관문이었을 것이다. 이 도시에는 시원하게 곧게 뻗은 길이 많은데 그걸로 미루어보아 계획적으로 세운 도시라는 걸 짐작했다. 나는 그 쭉뻗은 대로를 ‘어제로의, 오늘로의 길’이라고 맘대로 이름 붙였다. 이곳에서 알게된 것 하나는 그리스식 폴리스라고 해서 아테네처럼 다 민주정치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규벤아저씨가 어디는 양반시장이고, 어디는 양반들이 회의하는 곳이며, 어디는 서민들의 아고라라는 말을 듣고서 ‘아니 그리스는 민주 정치 아닌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해서 물어봤다. 규벤아저씨는 이 그리스 도시는 아테네가 민주정치를 하기보다 훨씬 이전부터 세운 도시이며,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다 민주정치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 에페스에는 또 재미난 것이 있었다. 바로 도서관 앞에 창녀촌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창녀촌지도(?)’ 이건 글로 쓰여진 것은 아니고 왼쪽이면 왼발을 찍는 식으로 기호화된 것이었다. 참, 어울리지 않게도 도서관 앞에 창녀촌이 있었다니. 이런 웃기는 상황 앞에서 세상살이, 예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하고 생각이 들었다.
| | | | '패션 강'이 된 사연 | | | | 에페스의 고대도시를 방문한 뒤 우리일행은 가죽패션쇼를 보러갔다. 이곳에서는 예로부터 질 좋은 가죽이 많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일행들은 약간 비좁은 듯한 패션쇼장에 들어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각자 먹고싶은 차를 주문하였다. 이 정도 규모로 볼 때 그저 관광객들에게 물건을 팔아먹기 위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쨋든 음악이 나오고 조금 있다가 키가 훤칠한 젊은 남녀들이 가죽 자켓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여자 모델이 갑자기 내게로 다가와 날 잡아끄는 것 아닌가? 순간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분위기 초칠 것 같아 끄는 대로 따라갔다. 드레스 룸에 들어가니 온갖 가죽옷들이 있던데 그때까지 나도 저것을 입고 나갈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내심 기뻐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갑자기 웬 치렁치렁한 두루마기 같은 것을 입혔다. ‘민족의상의 한 종류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황당하게도 또 내 머리에 보자기를 씌우는 것 아닌가. 그때서야 날 놀리려고 여장을 시키는구나! 라고 탄식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나는 당황스럽고 쑥스러워서 몸이 얼었고, 여자모델에게 고개 숙인 채 얼마간 그저 끌려 다녔다. 아! 그 때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얼마나 크게 느껴졌던가? 그렇게 나의 이미지는 맥없이 망가지고... 그나마 나의 희생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즐거웠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정말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중에 사진이 나오면 꼭 이 모습 찍은 걸 보고싶었다. 이 때의 일로 인해 마아저씨와 아줌마부대는 나를 부를 때 ‘패션 강’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 | | | 쿠사다시와 에게해 | | | | 쿠사다시는 에게 해변에 위치한 관광도시이다. 주로 여름에 관광객들이 몰리기 때문에 겨울의 이곳은 정말 한산하기 그지없다. 아무도 없는 별장들을 보면 흡사 이곳이 유령도시인가 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 있는 비둘기 섬에 간다고 들었다. 섬이라고 하기에 또 배를 타겠구나 하고 좋아했는데 육지에 꼭 붙어있어서 그냥 둑길(?)로 건너가기만 하면 되는 작은 섬이다. 에게해의 물이 너무 맑아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이 육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제주도도 예전엔 물이 맑아서 이런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사람에 시달리고 뭣에 시달리느라 더러워졌는데 부러운 마음으로 이 섬의 봉우리에 올라 에게해를 바라보았다. 푸른 에메랄드빛이 감도는 바다는 아름다웠고 내겐 그저 바닷바람 맞으며 걷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바다를 사랑하니까. 내가 사랑하는 바다는 와글벅적 사람이 많은 그런 여름 바다가 아니라 겨울의 한적하고 고요한 가운데서 파도가 지어내는 소리를 들으며 물끄러미 먼 수평선을 쳐다보는 그런 바다이다. 그 날 호텔에 체크인한 뒤 우리 일행은 그 호텔 앞에 해변으로 모두 산책을 나왔다. 그때 마침 해는 뉘엿뉘엿 지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몇몇 아줌마들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평소대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기만 했다. 넓은 들, 넓은 바다, 그런 넓고 큰 것에 대한 나의 동경은 그토록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다가 나도 갑자기 이쪽저쪽으로 숨차도록 내달리기 시작했다. 평소에 운동하는 것을 즐기는 이 몸이 이곳에 와서 못한 운동을 보충이라도 하는 것처럼. | | | | 파묵칼레 | | | | 버스는 3시간 동안이나 터키의 지방도로를 쉼 없이 달렸다. 그러다가 우리일행의 눈앞에 보인 것은 그저 높지도 않은 그런 언덕 배기가 하얗게 탈색된 그런 모습이다. 혹 신이 세상의 색을 입히다 그곳만 빼먹은 것 같이. 그 갑작스런 흰 언덕을 보고, 메테오라 이후 오랜만에 보는 오묘한 자연현상에 대해 감탄하였다. 직접 그곳에 올라 흐르는 온천물에 발을 담그고 그 흐름을 따라 걸으며 파묵칼레를 감상했는데 첨에 물이 뜨겁지나 않을까 걱정했으나 의외로 미지근해서 오히려 하류에선 발이 시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밑에 보이는 석회욕조가 흐르는 온천수를 받아 푸른빛을 내는데, 멀리서보면 보석 같은 그곳에 몸 한번 담그고자 하지만 너무 아래 있어서 갈 수는 없었다. 여기 오기 전 자료를 볼 때는 여러 사람들이 그곳에서 몸 담그고 수영하는 사진이 있었는데, 진실을 알고 보니 예전엔 지금 그 석회암이 파인 곳마다 물이 가득했단다. 그런데 수년 전 호텔들이 마구 들어서서 그 물을 거의 써버렸고, 이제야 유네스코에서 보호를 시작해서 이 정도라도 남았다고 한다. 인간의 이기심을 탓하기에는 인간이 너무 무지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 |
| | 호텔 온천수영 | | | | 파묵칼레 위에 있던 호텔들은 다 사라졌지만 우리가 묵은 호텔에서는 그 쪽에서 흐른 온천물을 끌어와 작은 수영장을 만들어 놓았다. 호텔에 체크인한 다음 나와 경범이는 3총사 꼬맹이들 몰래 수영하러 가자고 모의(?)했다. 막 가려고 나서는데 마아저씨가 아마 돈을 지불해야 할 것이라며 희망 없는 말을 했다. 그래서 공짜를 기대한 우리들은 실망스러웠지만 경범이가 눈으로 확인해봐야 겠다는 바람에 온천수영장을 찾아 호텔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겨우 물소리가 나는 곳에 이르러서 그곳 카운터에 다짜고짜 ‘프리?’ 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말을 그 직원이 말하는데 우리는 다시 ‘프리?’ 하고 더 크게 물으며 또 한번 공짜인 것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는 온천수영장에서 나와 경범이는 자유를 만끽하며 그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맘껏 헤엄쳤다. 근데 이게 웬일, 그 카운터의 직원이 우리에게 오더니, 발장구 치지 말라는 것이다. 아니 수영장에서 수영을 못하다니?? 어떻게 그게 수영장인가? 이곳의 수영장문화가 우리 나라의 수영장문화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의 수영장이란 그저 물에 몸을 적시고 조용히 있다가 나가는 그런 것이다. 참 재미없기도 하겠지만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냥 조용히 개구리헤엄이나 치다가 지치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해서 당초 공짜 수영장을 실컷 즐기자는 계획과는 달리 1시간만에 나가버렸다. | | | | 비단길 | | | | 9일째, 그 날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마아저씨 말로는)인 카파도키아를 가기 위하여 하루종일을 버스만 타던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이 그리 지루하진 않았다. 우리의 버스는 곧게 뻗은, 옛날의 비단길이라던 그 길을 달려갔는데, 황량한 벌판, 나는 그 끝없는 광야를 또 아무 생각없이 하염없이 바라봤다. 얼굴을 창에 바짝 붙인 채로 밖을 보는 내 옆에서 우균이가 계속 뭘 보냐고 자꾸 물어서 귀찮았다. 우균인 그냥 맨땅을 뭣하러 보냐는 표정인데, 노인네 같은 취향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평선에서 뭐라고 말할지 모르는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 참 좋았다. 그 감정은 아마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이고, 보다 넓은 세상에 대해 깨닫고 있는 자신에 대한 기쁨일 것이다. 그때 버스 안의 많은 이들은 자고 있어서 몰랐겠지만 난 지금까지 내가 너무나도 좁은 땅에서 우물안 개구리처럼 살아왔음에 대한 회한으로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 | | | 코니아 | | | | 이 도시는 카파도키아를 가기 위한 단순한 중간거점으로만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나름대로 이번 여행에 있어서 재미난 경험들을 한곳이라고 생각한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나서 일행들은 규벤을 따라 시내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몇몇 노인들이 지나가는 일행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급히 지갑에서 동전을 꺼냈지만 앞의 일행들이 너무 빨리 움직였다. 이런 곳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큰일이다 싶어 그 할아버지를 어쩔 수없이 지나쳤고, 동전을 손에 쥘 뿐이었다. 혹 다음에라도 걸인들을 만나면 적선하려는 생각이었다. 역시 그 뒤에도 구걸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더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20센트짜리 유로 동전들을 다 적선했다. 나는 한국에서부터 힘없는 노인들이 구걸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나칠 수가 없다. 그들은 이제 일자리도 구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한 그들을 게으른 이들로 단정짓고 인간의 가치를 경제능력으로 매기어 지나칠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그 존엄성을 가져야한다. 물론 개중에는 진짜 일하기 싫어 구걸하는 자도 있을 테지만, 난 먼저 인간을 믿고 싶다. 코니아 시내에서 우리일행은 화장실이 없어서 곤혹스러워했다. 돈을 내야하는 그 터키의 귀찮은 화장실도 없었다. 소변이 마려워 계속 규벤에게 호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화장실 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결국 화장실 특공대를 모아 화장실을 찾았다. 우리 일행에게 화장실을 제공한 곳은 인터넷 카페, 피씨방이다. 이곳의 피씨방 환경은 상당히 깨끗했는데, 담배냄새가 없어서 좋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업무나 정보를 얻기 위한 사람들, 피파를 하거나 퀘이크(맞나?)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나라에서처럼 모든 사람들이 온라인게임을 하는 것과는 달랐다. 화장실이 하나 뿐이었으므로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거기 있던 직원이 우리에게 차이를 제공했다. 그리곤 내게 다가와 손을 입에 대고 ‘잉글리쉬?’ 라고 묻길래, 약간이란 뜻으로 ‘ 어 리틀’ 이랬다. 근데 그 사람이 못 알아듣는 것이었다. 버스에 탈 때까지 그것이 계속 뇌리에 남아 나의 영어실력을 계속 의심하면서, 왜 못 알아들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적어도 난 l과 r발음의 차이 정도는 안다. 그리고 내가 한말 자체가 그런 상황에서는 쓰이지 않는 걸까? 하고 생각해봤지만 도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이스탄불에 다시 갔을 때 마아저씨가 똑같은 질문을 받고, ‘어 리틀’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듣고서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영어를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영어를 잘 모르는 그 사람은 왜 자신 있게 영어 할 줄 아느냐고 물었을까? 다음 버스를 타고 가다 우리일행이 내린 곳은 과일시장이다. 나는 과일시장을 돌면서 상인들이 계속 내미는 것들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느새 손은 찐득하고, 배는 불렀다. 뭐라도 하나 사보려고 50만리라(375원정)를 내밀고, 과일을 가리키며(상인들이 영어를 전혀 모름) 그 액수만큼 산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한 봉지에 그 과일을 가득 담는 것이다. 어라? 이 사람 지금 500만리라 받은 줄로 착각한 것 아냐? 규벤아저씨가 이곳에서 식료품들은 싸다는 말을 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싼 것은 알았지만 겨우 400원 정도로 귤을 한 비닐봉지 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었다. 터키의 식료품은 너무 쌌다. 감자 5킬로에 50만리라, 큼지막한 열매 2개가 20만리라(200원정도) 되는 것을 보고 터키의 거지들은 절대 굶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뿔싸! 거지하니까 그때서야 자선을 베풀었던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곳 과일시장에서는 유로화를 받지 않았다. 아직 터키는 유로 회원국도 아니고, 특히 지방 사람들은 유로화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몰라 리라로 잘 환산이 안돼서 통용이 불편하여 안쓰나 보다. 그런데 나는 걸인들에게 유로 동전 20센트를 다 적선했으니 실수한 것이다. 아마도 관광객이 많은 이스탄불 같은 대도시면 괜찮았을텐데... 생각이 짧았다.
| | | | 카파도키아 | | | | 이번 여행에서 하이라이트라는 카파도키아, 9일째 밤에 드디어 도착했다. 마아저씨가 우리 여행사만이 이곳에 이틀이나 묵는다고 자랑했던 곳이다. 다른 여행사들은 반나절동안 수박 겉핥기 식으로 돌다가 간다면서... 하여간 그 정도로 대단한 곳이구나. 기대하면서 잠을 충분히 자두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 일행은 카파도키아를 향해 갔다. 카파도키아에서 받은 첫인상은 ‘외계!’ 이곳은 지구라고 하기엔 너무나 낯설고 기이한 풍경이었다. 그 애길 마아저씨께 했더니, 이곳이 바로 스타워즈의 촬영장이었단다. 사실, 난 카파도키아에서 물밀듯한 감동이나 아름다움 같은 것을 느끼진 않았다. 아니, 느끼려고도 하지 않았다. 머리는 텅 비었었다. 그래서 카파도키아를 잘못 여행했나 하고 약간 아쉽기도 하다. 그 대신 난 즐거웠다. 단지 그곳의 바위를 걷고 오르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그저 이틀간을 산책한다는 기분으로 여기저기를 다녔다. 때론 해담이처럼 바위 위에서 미끄러지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어디선가 마아저씨가 내게 ‘패션강, 인생을 생각하나? 그녀를 생각하나?’ 라고 물으셨는데, 사실 난 그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눈으로는 그 광경을 필름처럼 계속 찍고 있었고, 코로는 맑은 공기를 마시고, 손으로는 카파도키아를 만지느라 바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카파도키아 같은 카파도키아, 카파도키아는 카파도키아다.’ 이런 것이었다. 내가 본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곳이었으므로, 세상에서 비유할만한 알맞은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이곳에선 별 말이 필요 없었다. 한편 젤베 야외박물관에서 옛날 수도원의 그 어두운 터널을 갔었을 때를 잊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통로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는 꼬맹이들을 밀쳐내고 가장 앞서서 터널로 들어섰다. 규벤아저씨가 내게 라이타를 주면서 좀만 걸으면 빛이 나올거라고 하셨는데, 아저씨가 그 말을 안했더라면 더 좋았을걸. 왜나하면 미리 빛이 나올거라는 것을 알고 가는 어두운 통로는 그냥 통로와 별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통로가 카파도키아에서는 많았다. 사실 그 통로들은 그 옛날 기독교 신자들이 숨어 다니던 그런 통로이다. 좁고 어두운 통로, 제대로 된 나무하나 없는 곳,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곳. 관광객이라는 입장을 떠나면 카파도키아는 혹독하고 거친 땅이다. 저녁에 흐르던 한 맺힌 카파도키아 음악처럼 사람살기엔 마땅치 않은 곳이다. 그 수많은 어린 십자가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 | | | 희한한 카페 | | | | 마경찬 아저씨의 안내를 받아 우리 일행은 카파도키아의 그 기암괴석 안에다가 만들어놓은 카페를 찾아갔다. 이런 곳이야말로 다른 여행사라면 절대 올 수 없는 곳이리라. 우리일행들은 맨 꼭대기층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다리를 타고 계속 올라갔다. 사다리를 올라가면 또 그 위에 사다리가 있고, 그러다가 결국 더 이상 사다리가 없는 작고 아늑한 방에 둘러앉았다. 카페트를 벽이며 바닥에다 깔아놔서, 밖에서 보는 거친 외양과는 다르게 카페안은 매우 포근했다.
터키 차에는 사과 차와 차이가 있다. 나는 터키에서 그 둘을 번갈아서 계속 마셔댔다. 차 맛보다 맘에 드는 것은 차를 담은 찻잔이다. 찻잔은 조그마한 게 아주 귀엽게 생겼다. 터키에서 찻잔을 보는 맛에 차를 마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른 관광객들이 자꾸 이 꼭대기 방으로 올라오려고 했다. 이미 우리 일행들이 거의 전세 내다시피 했지만, 그들이 올라 올 때마다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이에 당황해서 내려가는 사람도 있고, 올라와서 재밌다는 듯 우리와 어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리고 어설픈 영어로 서로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묻기도 하였다. 우리 일행 어느 아줌마는 올라오는 사람한테 두더지 잡기처럼 머리를 내밀 때마다 쳐서 떨어뜨리고 싶다는 농담도 했다. 계속 웃으며 감흥이 고조된 우리의 아줌마부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누구 아줌마가 먼저 한 곡조 뽑고, 이어서 아줌마들의 트로트 메들리가 계속 되었다. 떠날 시간이 되었지만 다들 이 아늑하고 포근한 방을 떠나기 싫어 뭉기적거리는 모습들이었다. | | | | 터키와 축구이야기 | | | | 터키는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우리 나라의 이을용선수가 뛰고있는 트라브존도 터키다.(요즘은 부상으로 많이 힘듦) 스포츠신문에 일면은 항상 축구기사이다. 호텔에서 TV를 켜면 스페인리그나 터키리그를 볼 수 있으므로, 나는 항상 그것들을 보며 잤다. 어느 밤, 까페에 갔을 때도 갈라타사라이의 경기 중계를 시청하기도 했다. 그만큼 터키에서는 축구가 인기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가이드이신 규벤아저씨도 축구광이다. 아저씨가 신문이나 잡지에서 축구에 관한 글을 보는 것도 몇 번 봤다. 나는 규벤아저씨와 별다른 대화를 하진 않았지만 축구와 관련된 애기는 좀 했다. 규벤아저씨는 터키리그의 2인자(아저씬 아마 이 말을 싫어할 것이다.) 페네르바체에 팬이다. 그러나 나는 예전에 갈라타사라이에서 봤던 다이나믹한 플레이에 매료되어 갈라타사라이를 더 좋아한다. 하지만 갈라타사라이도 이제 수쿠르같은 큰 선수들이 떠나 상당히 전력이 약화되었다. 규벤아저씨는 터키국가대표의 사진을 가리키며 누구는 어느 팀이고, 누구는 어느 팀에 갔다는 식으로 내게 알려 주셨다. 버스 안에서도 아저씨는 터키의 어느 선수가 레알 소시에티드니 인터밀란에서 뛴다는니 말했다. 물론 아줌마들이나 대부분 일행들에게는 별 쓰잘데기 없는 소리였겠지만 내게는 정말 부러움을 가져다주었다. 확실히 터키축구가 우리보다 한수 위라는 것을 그 터키 국가대표선수들이 소속된 팀만 봐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규벤아저씨는 2002한일월드컵에서 비춰지던 우리국민들의 응원을 보고, 한국인들도 터키에 뒤지지 않을 만큼 축구에 관심이 많구나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진짜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얼마 안 된다. 단지 대부분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이겨야된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을용 선수의 선전을 기원한다.
| | | | 터키를 떠나며 | | | | 12일째, 실질적으로 여행 마지막 날이다. 오전에 이스탄불의 불루모스크와 지하궁전(물탱크)을 방문했다. 불루모스크는 여전히 화려했지만 이제 이슬람 사원은 모두 익숙해져서 대부분의 일행들은 덤덤했다. 조금 더 걸어간 곳에 있는 지하궁전의 천장에서는 끊임없이 물방울들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헤어짐을 슬퍼하듯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곧 물방울들이 떨어져 둥글게 퍼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차분하게 되었다. 그리스의 신전 기둥들을 가져와 받치고는 참으로 웅장하게도 지었다. 여행와서 보는 그리스인의 심정은 어떠할까? 저것들만 본국에 남아있어도 관광객을 더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까? 아니면 수 백년 동안 압제와 착취에 시달린 과거에 대한 비애를 느낄까? 점심식사는 말마라 해변 음식점에서 하였다. 이곳에서 현지식으로 먹는 마지막 점심이었다. 집 건물은 고급스러웠으나 기대한 만큼 맛있는 식사는 아니었다. 메인으로 나온 고기에 향신료가 너무 짙고, 짜서 도저히 입맛에 맞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음식을 남겼다. 고국으로 돌아가면 케밥과 비데가 그리울 날이 있을 텐데도..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는데 이것이 마지막이로구나 아쉬움에 모두들 이스탄불의 어느 것 하나라도 더 보려고 창가에 얼굴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그동안 정들었던 규벤아저씨와 헤어질시간이 왔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의 좋은 인상을 마지막까지 잃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들 그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나는 터키를 떠나는 비행기에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과 생각과 느낌을 되씹고 정리한 다음 앞으로의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이번 여행으로 인하여 나의 사고나 행동은 약간의 변화가 생길 것이다. 로마공항에 도착하여서 그곳 공항의 서점에서 작은 책을 샀다. 영어로 된 작은 수필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비행기안에서 읽어보니 시집이어서 살 때 잘 살펴보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지만 후회할 것은 전혀 없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이제 한국으로 간다. 로마공항에서 대한항공을 탄 순간부터 한국에 와있었다. 탄 비행기는 오로지 한국인들로만 채워져 있었기에 이미 고국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시 힘든 장거리 비행을 12시간동안 하였다. 두어 시간마다 일어나서 몸을 풀었지만 이제 비행기라면 정말 지긋지긋하다. | | | | 인천공항에서 | | | | 고국에 도착하여서 어머니께서 내게 여권을 주셨다. 기념으로 가지라면서... 그것으로 나의 난생 처음 외국 여행은 끝났다. 인천공항에서 느낀 점이 하나 있다.로마나 이스탄불, 아테네 공항에서는 동양인도 많이 볼 수 있고,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인천공항은 출국하는 사람도 한국인, 입국하는 사람도 한국인이다. 즉 해외로 가는 관광객은 많은데, 우리 나라로 오는 외국관광객은 거의 없다는 얘기다. 그만큼 우리 정부의 관광정책실패와 함께 아울러 우리가 관광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관광을 쉬고 술 마시고 노는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규벤아저씨의 말대로 한국의 관광산업은 터키에 20년 뒤떨어져 있다. 관광적자와 한국사람이 대부분인 인천국제공항이 그것을 증명한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에게 내가 외국에서 보고 느낀 것을 말하자면 어디서부터 말해야될지를 모를 정도지만 아버지는 가족이 다시 왔다는 것이 가장 기쁘신 듯 하다. 그리고 마아저씨와 아줌마들과 정든 꼬맹이들이며 영민이, 경범이, 말도 제대로 못 붙인 소녀들도 모두 각자의 길 또는 각자의 가족들에게로 돌아갔다. 집에 와서 친구 놈들에게 내가 온 것을 알렸다. 근데 그놈들은 내가 온 것보다 선물에 더 신경 쓰는 듯하다. | | | | 여행후기를 쓰고 | | | | 이 여행후기를 쓴 직접적인 이유라면 마아저씨와의 약속이다. 물론 몇 번을 포기하거나 안 쓰려고도 했다. 내가 어떻게 여행기 같은 글을 쓸 수 있겠어 하고. 그러나 그냥 잘 때마다 가슴이 무거웠다. 마아저씨는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 사람인데, 굳이 안 써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테지만 사나이의 승낙은 무거운 것이기에 나는 결국 이 글을 쓰고 말았다. 사실 자신의 글을 남에게 보인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대하여 자신이 없다면 글을 쓸 수가 없다. 특히 스스로 글을 못쓴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할 것이다. 나도 그런 경우다. 스스로도 이번 여행에서 보고 느낀 것을 그저 머릿속에만 담아 두는 것이 힘들었다. 솔직히 그리스에 대해서는 억지로 썼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하지만 서투른 모습이나마 머리와 가슴속의 모든 것을 토해 이렇게라도 끝마쳐서 조금은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번 여행에 함께 한 모든 분들, 마아저씨, 조아저씨, 규벤아저씨 그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