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세이 여행이야기

송정자-노르웨이/핀란드/스웨덴/덴마크

  • 작성자 :

    테마세이투어

  • 작성일 :

    2007.11.21

  • 조회수 :

    899

 
이 글은 서울에 사시는 송정자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송정자님은 2003년7월16일부터 7월24일까지 10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북유럽 여행을 다녀 오셨습니다. 글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3년7월16일 수요일 :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오전 10시 아시아나 항공을 타고 북경으로 출발, 1시간55분 경과하여 베이징에 도착했다. 베이징은 서울과 1시간의 시차가 난다. 베이징은 경유지인데, 웬 출입국 절차가 그리 까다로운지? 그리고 행동은 왜 그리도 만만디인지…
아무튼 다시 12시45분 스칸디나비아 항공편으로 베이징을 출발,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기내의 좁은 좌석에서 약 10여 시간을 지내야 한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이코노미 클래스 신드롬(Economy Class Syndrome, 일반석 증후군)」으로 혈전증(血栓症)이 일어나 죽는 경우도 있다는 기사를 읽은 일이 있다. 나는 좁은 기내 좌석에 앉아서 조용히 손발과 몸을 자주 움직이거나, 화장실 가는 것을 핑계로 가끔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스칸디나비아 항공은 각 좌석의 앞에 작은 모니터가 달려 있고, 영화와 음악도 자기가 선택해서 보거나 들을 수 있어 아주 편리했다.
현지 시간으로 15시40분경, 예정보다 45분 빠르게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코펜하겐은 서울보다는 7시간이 늦다.  중국과 달리 입국 수속이 여권 제출만으로 아주 간단하고 빠르다. 공항 밖에 대기 중인 현지 한국인 가이드 이형래씨를 따라,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랐다.
저녁 식사후 티볼리(Tivoli) 공원에서 2시간 정도 산책 겸 구경을 했다. 160년 전통을 가진 이 공원은 산책, 식사, 연극·서커스 관람, 각종 놀이 시설등 모든 오락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 있는 공원이다.
북유럽의 날씨는 우리나라 초여름 또는 가을 날씨 같다고 했는데 이곳도 며칠째 이상 고온이란다. 날씨도 덥고 지친 다리도 쉴 겸, 우리도 차 한 잔 하며 이들과 섞여 즐기고 싶은데 벌써 만원이라 발들여 놓을 틈이 없다. 이 공원에는 은퇴한 멋쟁이 노(老)부부들이 많이 보인다. 앉아서 쉬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다정하게 두 손을 꼭 잡고 걸어다니는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인다.
판토마임 극장의 코믹 연기, 서커스 공연장의 공중 줄타기 등을 구경하고 호수가 있는 정원으로 갔다. 그곳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에 우리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우아한 카페들과 예쁜 꽃밭,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어내는 원형 분수대. 아담한 호수에 떠 있는 배(ship) 모양의 레스토랑, 그 건너편에는 이 공원에서 가장 예쁘다는 카페. 호수 한쪽에서는 보트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2시간의 자유시간을 끝내고, 약속 장소에 모인 시각은 오후 8시경. 그러나 대낮같이 환하다. 숙소인 래디슨 호텔에 들어, 샤워로 장거리 여행의 노독(路毒)을 풀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해는 지고 9시 반경이 되었는데, 여전히 보름달 밤같이 환하다. ‘백야(白夜)의 나라’ 북유럽에 온 것을 실감하게 된다.

 

2003년7월17일  목요일 : 코펜하겐 시내 및 근교


몸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우선 코펜하겐 시내 관광을 먼저 하기로 했다. 덴마크어로는 ‘쾨벤하운(København ; ‘상인의 도시’란 뜻)’이라고 불리는 코펜하겐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관문(關門) 도시이다.

코펜하겐은 오늘날에도 르네상스식 건축미를 간직하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 시청 탑(106m)보다 높은 건물을 세울 수 없다는 시 조례(條例)에 따라, 이 도시에서는 고층 건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코펜하겐 시내에서는 좀처럼 건축물을 철거할 수가 없고 아주 낡아 수리가 필요할 경우에도 내부 수리는 임의로 할 수 있으나 외관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부득이 새 건물을 지을 때는 주변 건물과의 조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가며 보니 시내의 가로등이 우리와는 달리 길거리 한복판 공중의 줄에 매달려 있는 점이 특이했다.
맨먼저 ‘시청 앞 광장(Radhus Plassen)’에 들렀다. 높이 106m의 시계탑을 지닌 시청사(市廳舍)는 1892년에 착공해 1905년에 완성된 붉은 벽돌 건물로 중세 덴마크 양식에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을 혼합한 건축물이다. 정문 바로 위에는 12세기 코펜하겐 도시의 창설자인 압살론 대주교(大主敎)의 동상이 있다.
광장 한쪽 안데르센 도로변에는 「인어 공주」, 「미운 오리새끼」등의 동화로 유명한 안데르센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은 그 시선이 도로 건너편의 티볼리 공원을 향해 있다. 그의 동화 속에 나오는 집들을 그대로 재현하여 티볼리 공원에 많이 지어 놓았기 때문이다.
안데르센 도로 사거리에서 안데르센 동상과 대각선 위치에 있는 코너 건물에는 큰 온도계가 설치되어 있는데, 수치가 30 이하로 되어 있다. 코펜하겐은 최고 온도가 30도를 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 탑 꼭대기 앞 모서리의 양쪽에 쑥 들어간 부분에는 큰 원반 위에 「자전거를 타는 여인」 조각상과  「우산을 쓴 여인」조각상이 있다. 처음 이 건물을 지었을 당시 건물의 관리인이 아침에 출근하여 날씨가 쾌청하면 「자전거를 타는 여인」을,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쓴 여인」상을 앞으로 나오도록 조절하였다 한다. 얼마나 낭만적인 발상인가!
다시 버스에 승차하여 현재 국회 의사당·최고 재판소·각료의 접견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크리스티안스보르 성(Christiansborg Slot)으로 향했다. 이 성은 압살론(Absalon) 주교(主敎)가 세운 것으로 코펜하겐의 발상지로 일컬어진다. 1794년 화재로 왕실이 아말리엔보르 궁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왕실의 주거지로 사용됐다.
국회 의사당 뜰에는 ‘자전거 보관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일반용과 국회 의원용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나라의 국회 의원은 매우 검소하고 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딸린 개인 비서도 없다고 한다. 이들은 국회 의원을 큰 명예직으로 생각하며 청렴결백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 왕립 도서관 정원에는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동상이 서 있다. 코펜하겐은 통상 ‘한스와 쇠렌의 도시’라는 애칭으로 통하는데, 동화 작가 한스 안데르센과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코펜하겐이 자랑하는 인물이다.
이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옛 증권 거래소 건물이 보인다. 이 탑의 녹청색은 붉은 벽돌색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1619년 공사가 시작되어 1640년 완성된 이 건물은 코펜하겐 시내의 현존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힌다. 애초에는 우체국으로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이 건물의 외관상 특징은 건물의 청동 첨탑)으로, 네 마리의 용(龍)이 꼬리를 꼬아 올린 형태이다. 용 4마리는 동서남북을 상징하며 우편물을 사방으로 배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다.
다음 목적지는 ‘인어 공주’ 동상이다. 인어 공주 동상은 몇 차례에 걸쳐 훼손되는 수난을 겪었으나 계속 복원되었다. 1964년엔 인어 공주 동상의 머리가 누군가에 의해 잘려져 나갔고, 1984년에는 팔이 떨어져 나가는 불상사가 있었다.
이 인어 공주 동상은 전체 길이가 80cm에 불과하지만, 그 사랑스러운 모습은 코펜하겐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며, 코펜하겐의 상징이 되었다. 「폭풍으로 배가 침몰해 정신을 잃은 왕자를 구해 낸 인어 공주는 왕자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목소리를 마녀에게 주는 대신 사람의 몸을 얻어 왕궁에 들어가서 시녀가 된다. 그러나 왕자는 벙어리인 시녀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이웃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게 되고, 이에 낙심한 인어 공주는 슬퍼하며 바닷속으로 몸을 던져 죽게 된다」는 동화의 내용에 따라 인어 공주는 수심에 가득 찬 모습을 하고 있다.
인어 공주 동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아말리엔보르 궁전 근처에 ‘게피온 분수대’가 있다. 이 분수대는 1908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사망한 선원(船員)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덴마크의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게피온(Gefion) 여신이 황소 4 마리를 몰고 가는 역동적인 모습의 이 분수대는 코펜하겐이 있는 셀란 섬의 유래를 상징하는 웅장한 분수대이다. 그러나 지금은 수리 공사중이라 기대했던 것을 못 보게 되어 여간 섭섭하지 않다.
아말리엔보르 궁전(Amalienborg Slot)은 8각형의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4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이곳은 4인의 귀족이 거주하던 곳이었는데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이 화재로 소실되자, 프레데릭 5세가 왕궁으로 꾸며, 1794년이래 덴마크 왕실의 공식 거주지로 사용하였다. 현재 마르그레테 2세 여왕과 그의 가족들이 이 궁전에 살고 있다.
이 궁전은 지나치게 검소하여 현관에 검정색 곰털 모자를 쓴 위병이 서 있지 않다면 그저 평범한 일반 건물로 보일 정도이다. 궁전 광장은 현재 로터리가 되어 있어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고 여왕의 방을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청와대 주변의 경비가 삼엄하고 근접하기가 어려운데, 이곳은 너무나 자유스러운 분위기다.
여왕 마르그레테 2세(1940-    )는 지적이고 위트가 풍부한데다 서민적인 성격으로 국민들과 격의 없는 만남을 즐겨한다. 거리에서 만나는 시민에게 여왕에 대한 평가를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공화제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을 뽑는다면 저는 역시 마르그레테를 뽑을 생각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여왕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4채의 궁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프레데릭 교회(Frederikskirken)는 1894년에 완성된 것으로 일명 ‘대리석 교회’라고도 한다. 처음 짓기 시작한 후 자금 부족으로 중단했다가 110년이 지난 뒤 한 독지가가 자금을 대주어 교회를 거의 완성하고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한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천장을 꽉 채운 벽화가 아주 장중하고 아름다웠다. 벽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은 100여 년이 지나면서 고장이 나서 맞은편 벽에 새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했다는데 새 것은 너무 기계적인 냄새가 풍긴다. 아직도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옛것을 수리하여 사용하면 더 우아할 것 같다.
점심 식사를 한 후 로센보르 성으로 향하다. 로센보르 성(Rosenborg Slot)은 1615년에 완성되었다. 1617년 당시 국왕이었던 크리스티안 4세의 뜻에 따라 세워진 네덜란드 양식의 여름 별장이다. 작고 아담한 인상을 주지만 왕립 공원 안의 짙푸른 녹음과 빨간 벽돌빛 건물이 어우러져 무척이나 아름답다. 크리스티안 4세는 이곳을 너무 좋아하여 여기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1648년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현재 궁전은 왕실 보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하의 보물 전시실에는 왕실의 보물과 보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크리스티안 4세와 5세의 대관식에서 사용되었던 2개의 왕관이 볼 만하다.
프레데릭보르 성으로 가기 위해 버스는 코펜하겐 교외를 달리는데 목가적인 풍경이 계속된다. 가는 도중 잠시 비가 오다. 프레데릭보르 성(Frederiksborg Slot)은 흰 줄 무늬가 간간이 섞인 붉은 벽돌의 외벽과 새빨간 지붕, 꼭대기의 청록색 탑은 주변의 파란 호수(해자), 우거진 녹음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한층 아름다워 보인다.
특히 해자를 2번이나 통과해야 성에 이르는데, 그 호수의 물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심신이 어느새 호수를 닮아 맑고 시원해진다. 바깥 쪽 호수에는 어린 새끼들을 대동한 어미 백조가 유유히 노닐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백조의 어린 새끼는 털이 하얗지 않고 칙칙하다. 어린 시절에는 잿빛이다가 성조(成鳥)가 되면 새하얘진다고 한다.
이 성은 200여년 동안 7명의 왕이 이 성에서 대관식을 올릴 정도로 덴마크를 대표하는 유명한 성이다.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가꾸고 개축하였던 성은 1859년의 대화재로 건물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민주 헌법이 만들어지면서 왕실의 경제력이 약화되어 재건할 능력이 없던 차에, ‘맥주 왕’ '칼스베르(Carlsberg)'사의 사장인 J.C. 야콥슨의 원조로 재건된 이 성은 현재 국립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크론보르 성에 가기 전, 예정에 없던 왕의 별궁인 프레덴스보르 성(Fredensborg Slot)에 들르게 되었다. 일년 중 7월에만 개방한다고 하는데 한 곳이라도 더 보여 주려는 이 여행사의 열의에 늘 고마움을 느낀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 궁전 내부 견학은 미리 예약이 되어 있어야 하므로 우리는 궁전의 정원만 돌아보았다. 녹색의 대지를 밟으면서 아름다운 정원을 음미하다 보면 심신이 상쾌해진다. 피로에 지친 나그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에 있으랴?
작고 아담한 창문들을 가진 하얀 색 건물은 청록색의 둥근 지붕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잘 가꾸어진 잔디밭과 꽃밭, 그리고 녹음을 짙게 드리운 나무들. 그 사이로 간간이 놓여 있는 조각상들, 그리고 연못 속의 작은 정원. 특히 우리가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아치형 입구를 통해 보이는 빨간 장미로 가득한 정원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낙원의 동산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나오는 길에 궁전 근처 카페의 야외 풀밭 의자에 자유로이 앉아, 각자 취향대로 맥주·카푸치노·아이스크림 등을 먹고 마시며 모처럼의 여유를 즐겼다.
다음은 크론보르 성(Kronborg Slot), 일명 ‘햄릿 성’이라 불리는 곳으로 갔다. 코펜하겐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헬싱외르에 위치해 있는 성으로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의 배경이 된 성으로 유명하다.
코펜하겐에서 프레데릭보르 성, 프레덴스보르 성, 그리고 크론보르 성으로 가는 길은 그 풍광이 너무 아름답다. 도로변의 가로수와 주변의 우거진 숲, 목가적인 농촌 풍경, 그리고 아름다운 색깔의 벽과 지붕을 가진 아담한 집들, 게다가 크론보르 성에 가는 중간 도로는 바닷가를 끼고 있어 그 경관이 아주 수려하다.
크론보르 성은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 에어슨 해협의 가장 좁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애초에는 15세기 덴마크 왕 에릭 7세가 이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대해 통행료를 부과하기 위해 세운 성이다. ‘크론보르 성’의 ‘크론(kron)’은 ‘세자(世子)’를 뜻하는 말로, 에릭 7세의 아들 크리스티안 4세(1577-1648, 재위 1588∼1648)가 이 성에서 태어난 것을 기념해 성의 이름을 ‘크론보르’라 명명했다.
이 성이 유명해 진 것은 두 명의 인물 때문이다. 그 중 한 명은 ‘햄릿’이고, 다른 한 명은 덴마크의 전설 속의 영웅 ‘홀거 단스크’이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이란 작품을 쓰면서 이 성을 무대로 설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햄릿(Hamlet)’에서, 실존했던 왕자 ‘Amleth’의 이름의 마지막 문자인 ‘H’ 자를 맨 앞으로 옮겨와 ‘Hamlet’으로 정했다 한다.
지하실 한쪽에 방패와 칼을 손에 들고 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채 잠을 자는, 덴마크의 전설적 영웅 ‘홀거 단스크(Holger Danske)’의  동상이 있다 한다. 홀거 단스크는 나라에 어려움이 닥치기 전에는 크론보르 성의 지하에 잠들어 있다가, 국가에 위기가 찾아오면 떨쳐 일어나 조국을 구했다고 한다.
날씨가 쾌청하여, 크론보르 성에서 바다 너머로 스웨덴의 헬싱보리 마을이 보인다. 이곳 헬싱외르에서 기차를 타면 크고 하얀 배의 바닥에 깔린 기차 선로를 통해 기차가 통과하여 스웨덴의 헬싱보리 기차 선로에 연결된다 한다.
저녁 식사후 버스를 타고 뉘하운(Nyhavn)에 내려 자유로이 거리를 산책했다. 뉘하운은 ‘새로운 항구'라는 뜻으로 콩겐스니 광장에서 동쪽으로 뻗은 운하 연변의 보행자 천국이다. 1673년에 조성된 곳으로 본래 선원들의 거리였으나, 현재는 각종 요트와 범선(帆船)의 정박지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멋진 레스토랑·바·골동품상 등이 많이 늘어선 운하의 북쪽 거리를 주로 산책했다. ‘삼각형의 뾰족한 지붕’과 ‘작은 창들이 많은' 산뜻한 파스텔 색깔의 건물들은 나중에 본 노르웨이의 베르겐과 흡사한 점이 많다. 운하 바로 곁 거리는 약간 지저분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약간은 불량기(?)가 느껴지는 미남 청년들이 여기저기 앉아 자유를 즐기고 있고, 레스토랑이나 야외 카페에서는 오똑한 코, 하얀 피부의 미끈하게 잘생긴 남녀들이 맥주를 마시거나 저녁 식사를 즐기며 한담을 나누고 있는 정경들이 그런 대로 항구의 멋을 느끼게 한다. 머릿속으로 그 옛날 선원들의 거리 ‘뉘하운’을 상상해 본다. 오랜 항해 끝에 육지인 항구로 돌아와 술과 여자를 벗하며 향수를 달래고 모처럼의 여가를 즐겼을, 그 옛날의 뉘하운 거리가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작은 다리 위에 서서 항구 거리를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행인들을 몰아낸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바로 이 다리는 개폐교(開閉橋)로 곧 배들이 들어온다고 한다. 덕택에 다리가 들어올려지는 모습을 보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뉘하운을 ‘안데르센의 거리’라고도 한다는데, 우리는 시간 관계상 안데르센이 살던 운하의 남쪽 지역에는 가보지 못해, 이 거리에서 안데르센에 관한 어떤 흔적도 느낄 기회가 없어 아쉬웠다.

 

2003년7월18일 금요일 : 핀란드 헬싱키

 
호텔에서 이른 조식을 하고 헬싱키로 향했다. 헬싱키 공항에 착륙할 준비를 한다는 기내 방송이 나올 때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온통 숲과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공항에서 대기 중이던 버스에 올라 시벨리우스 공원으로 향했다. 시벨리우스 공원은 핀란드의 대표적 작곡가 시벨리우스를 기념하여 제작한 스테인레스 파이프 기념비와 시벨리우스의 초상 부조가 있다. 다른 공원에서는 볼 수 없는, 마치 파이프 오르간 같은 철 파이프들이 우뚝 서 있는 모습에서 이상야릇한 감회에 젖는다. 그러나 결코 자연을 거스르는 느낌은 없다. 은회색의 파이프들이 푸른 숲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고, 그 모습이 파이프 오르간을 연상하게 하여 자연과 음악의 조화를 느끼게 한다. 이제 금방이라도 파이프 오르간에서 핀란드의 자연에 대한 찬가 ‘핀란디아’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곡조가 울려 나올 것 같다. 은회색의 ‘스테인레스 파이프 기념비’는 「핀란드의 숲」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자작나무 껍질의 은회색 색깔이 연상된다.
 ‘홍콩’이라는 레스토랑에서 중국식으로 점심을 먹은 후, 아르카디안 거리의 지하 암석 교회에 도착했다. 본명은 템펠리아우키오 교회(Temppeliaukionkirkko)이지만, ‘암석 교회'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1969년 완성된 이 교회는, 바위를 최대한 자연스런 형태로 보존하면서 천연 암석의 ‘결’과 ‘무늬’를 그대로 살렸다.
약간 비탈진 언덕에 위치한 이 교회는 얼핏보아서는 전혀 교회 건물 같지 않다. 지금까지 교회가 갖고 있던 이미지를 바꾸어 놓은 특이한 건물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내벽이 거의 자연석 암벽으로 되어 있거나 부분적으로는 돌을 쌓아 처리했다. 천장 주변을 원형으로 잘라 내어 만든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광선이 바위에 부드럽게 반사되어, 암석의 거칠고 딱딱함을 완화시켜 푸근한 느낌을 준다. 입구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교회 내부는 꽤 넓고 환하다. 설교단이 있는 앞쪽에서 한 여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어, 분위기를 더욱 아늑하고 경건하게 해 준다. 음향 효과를 충분히 살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이 교회에서 가끔 콘서트도 열린다 한다.
암석 교회를 나와 우스펜스키 성당(러시아 정교회)으로 갔다. 약간 경사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이 교회는 19세기에 비잔틴 슬라브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며 반구형의 꼭대기와 황금 십자가, 빨간 벽돌담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건물이다. 붉은 벽돌의 천장에는 천연 물감으로 그린 그리스도와 12 사도 그림이 있으며, 실내는 어딘지 모르게 엄숙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곳 언덕에서 멀리 건너편에 우뚝 솟은 헬싱키 대성당이 보인다. 흰색 건물에 푸른 색 돔(dome)들이 너무 조화를 잘 이루어 신비감을 자아낸다. 다음에 방문한 곳이 바로 이 헬싱키 대성당이다.
헬싱키 대성당은 헬싱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며, 핀란드 루터파 교회의 총본산이다. 1830년에 착공해 1852년에 완공되었는데, 왕궁 스타일의 이 건축물은 밝은 녹색 돔과 하얀 주랑(柱廊)이 조화를 이룬다. 중앙 돔을 중심으로 4개의 작은 돔들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중앙의 돔은 네 측면 어디에서도 보인다.
약 40만 개의 화강석이 깔린 성당 앞의 원로원 광장 중앙에는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상이 서 있다.
원로원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닷가의 광장 시장(Kauppatori)으로 갔다. 광장 시장은 기념품, 치즈, 신선한 생선과 야채·과일 등 각종 상품들을 파는 노천(露天) 시장이다. 우리 나라의 성남 ‘모란 시장’을 연상하게 한다. 예쁜 그림 액자며, 그림을 입힌 도자기며, 형형색색의 여름철 가방 등, 눈으로 보는 것만 해도 즐겁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싱싱한 생선과 야채·과일 등이 제일 시선을 끈다.
잘 정돈되고 정결한 백화점도 좋지만, 사람 사는 참모습을 적나라하게 관찰할 수 있는 이런 곳을 나는 좋아한다. 일행들은 요즘 한창 나오는 체리(cherry)를 사먹었다. 한 됫박쯤 되는 깡통으로 하나 가득 3∼4 유로(약 4,000원)씩 하는데, 우리 나라의 약 1/3 정도 값에 해당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달고 맛있다. 무엇보다도 씻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전용 버스를 타고 부자촌의 바닷가로 향했다. 광장 시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변에 네 마리의 물개에 둘러싸인 발트 해의 처녀 ‘하비스 아만다’의 누드 동상이 보인다. 쉴새 없이 선박들이 들락거리는 ‘헬싱키’는 언제부터인가 ‘발트 해의 아가씨’로 불리어지게 되었다는데 아마 이 도시의 상징으로 세운 동상인가 보다.
드디어 부자촌의 바닷가 해수욕장에 당도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보다는 별로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것 같다. 해변에는 내가 좋아하는 해당화가 한창 피어 있다. 장미보다 덜 화려하면서도 향기가 은은한, 바닷 바람을 맞으며 모래밭에서 피고 있는 해당화를 보면 강인한 생명력과 함께 어딘지 모르게 고아한 기품을 느끼게 한다. 바닷가에는 고급스런 카페와 레스토랑이 함께 있어 사람들은 해수욕을 하다가 맛있는 식사와 시원한 맥주를 즐기고 있다. 약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져서 바닷가 푸른 잔디밭에 앉아 나도 잠시나마 피서객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며 객수(客愁)를 달랜다. 이제 헬싱키에서의 육로(陸路) 여정은 끝났다.
최근에 많이 알려진 천연 소재 감미료 ‘자일리톨(Xylitol)’의 주산지는 핀란드이다. 자일리톨은 자작나무나 떡갈나무에서 얻어지며, 충치 예방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관광도 좋지만, 약간의 시간을 할애하여 대형 슈퍼라도 안내해 주었으면 핀린드산(産) 자일리톨 껌을 구입하여 친지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오후 4시경 버스에 승차, 배편으로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가기 위해 광장 시장 부근의 유람선 선착장에서 하차했다. 우리는 4시반경 「실야라인」에 탑승했다. 우리는 이 유람선의 바다를 면한 쪽(sea-side class) 선실 호텔에서 일박을 한다.
실야라인은 아름답고 낭만적인 발트 해를 만끽할 수 있는, 핀란드와 스웨덴을 잇는 5만8천 톤급 호화 유람선으로 바다에 떠 있는 호텔이다. 객실은 8층부터 11층에 걸쳐 배치되어 있는데 우리 객실은 10층이다. 객실 안에 세면대, 화장실이 다 갖추어져 있다.
16시간 정도 소요되는 아름다운 뱃길 여행이 시작된다. 헬싱키와 스톡홀름간을 발트 해의 선상에서 보내게 되는 것이다. 멀지 않은 거리를 15∼16 시간이나 걸려 가는 것은 단순히 두 도시를 왕복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배 안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즐기도록 하기 위함이라 한다. 그래서 페리에는 풀장, 카페, 나이트클럽, 도박장, 면세점, 환전소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또한 아침 9시경 스톡홀름에 입항하는 시간에 맞추기 위해 한밤중에 바다 가운데 정박해 있는 것도, 선객들이 배 안에서 편히 쉬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니 얼마나 휴머니즘 넘치는 배려인가!
6층 선실 레스토랑의 바다를 면한 특실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스뫼르고스보르드(Smørgasbord)’라 불리는 뷔페였다.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요리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회였다. ‘스뫼르고스보르드’의 유래는, 옛날에 바이킹이 전쟁에 나가 하나의 부락을 점령한 뒤 그 부락의 음식물을 커다란 테이블에 모아 놓고 각자가 먹고싶은 요리를 자유롭게 먹던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이것이 오늘날의 뷔페의 원조라고 한다. 음식은 주로 발트 해에서 나오는 해산물이 주종을 이룬다. 락스(Lax)라 불리는 연어 요리를 비롯하여 새우·가재·캐비어·치즈 등이 풍성하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연어를 많이 먹어 보려 했으나, 짜기도 하고 생각보다 많이 먹히지를 않는다.
6시경 유람선이 출발했다. 우리는 꼭대기 갑판 쪽으로 올라갔다. 출발과 함께 사람들이 주는 과자나 빵 부스러기를 얻어먹으려고 줄곧 따라오는 갈매기 떼들. 오래지 않아 수천 개의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우리나라 다도해에서 보이는 섬들은 주로 돌섬인데, 이 발트 해의 섬들은 모두가 숲이 울창하다. 그리고 호반의 아담하고 예쁜 집들과 호수에 떠 있는 범선(帆船)들! 망망대해만 보이는 바다는 지루한 느낌을 주는데, 이 유람선에서 보는 정경은 얼마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지, 잠시라도 시선을 옮길 수 없게 한다.
오후 7시경 12층에 있는 핀란드 사우나 ‘선플라워 오아시스(Sunflower Oasis)’에 들어갔다(입장료 6유로). 나는 수영복을 준비해 갔지만 미처 준비 못한 사람은  빌려 입었다. 소규모의 탕이 서너 군데 있으나 생각보다 물이 너무 미지근하고 차서 별로였다. 그래서 건식(乾式) 사우나에 들어갔다. 뜨거운 돌덩이에서 열이 나서 실내 공기가 제법 후끈거린다. 옆에 준비되어 있는 물바가지에 물을 담아 끼얹으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며 공기를 데워 준다. 그러나 몸이 벌겋게 되도록 때린다는 자작나무가 없어서 진짜 핀란드식 사우나를 경험해 보지 못해 유감이다.
10시30분이 되어서야 해가 졌으나 여전히 훤하다. 11시경 잠자리에 들었는데 우리가 배 안에 있다는 것을 전혀 실감할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림이 전혀 없다. 수면이 잔잔한 모양이다. 한밤중(밤 1시쯤) 자다 깨어 커튼을 제치고 창밖 바다를 내다보니, 백야 현상으로 수평선 근처 하늘에는 아직도 붉은 노을 기운이 여전하고 마치 보름밤같이 바닷물 표면이 뚜렷이 구분되어 보였다.



2003년7월19일 토요일 : 스톡홀름

 
스웨덴 입항 시간에 맞추느라 한밤중에 바다 한가운데서 정박해 있던 유람선은, 새벽이 되어 달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아침 6시경 선상 레스토랑에서 아침밥을 먹고, 9시30분경에 하선(下船)하여 대기하고 있던 전용 버스에 올랐다. 현지 가이드는 키가 훤칠하고 시원스럽게 생긴 윤경하씨다. 윤 선생은 버스 안에서 여행시 주의 사항과 기타 몇 가지를 간단히 소개한다.
제일 먼저 당부한 것은 ‘소지품을 조심하라’는 것으로 북유럽 여행 중 자주 들은 주의 사항이다. 소매치기는 대개 본토 사람들보다는 멀리 러시아나 이탈리아 등지에서 원정온 사람들이라 한다. 스웨덴은 철저한 정찰제를 실시하며, 「바가지」는 절대 없으니 물건 살 때 상대방을 믿고 안심하고 구입해도 된다고 한다. 참으로 부러운 나라이다.
  ‘안녕하세요’는 스웨덴 어로 ‘헤이(Hej)’, ‘안녕히 가세요’는 ‘헤이도(Hej Da)’이며, ‘고맙습니다’는 ‘탁(Tack)’이라 한다. 버스 기사의 이름은 ‘로게’씨. 우리는 ‘헤이 로게’ 합창을 하며, 초면의 기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버스를 타고 제일 먼저 당도한 곳은 쿵스홀멘 섬 멜라렌(Malaren) 호반에 위치한 스톡홀름 시청(Stadshuset). 스톡홀롬 정도(定都) 400 년을 기념하기 위해 시내 중심 호숫가에 세워졌으며, 1912년∼1923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20세기의 명건축으로 불리는 붉은 벽돌의 이 건물은 스톡홀름의 상징이 되고 있다. 호반의 넓은 녹색 잔디밭에는 분수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뿜고 있다. 이 멜라렌 호반의 이 공원길은 스톡홀름 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산책로 중의 하나라 한다. 계단을 올라가면 연속적인 이십여 개의 아치형 입구가 우리를 맞이한다.
시청사를 나와 다시 버스에 승차, 여왕의 성인 ‘드로트닝홀름 성’으로 향했다. 스웨덴은 일기가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자동차들이 대낮인데도 불을 켜고 달렸다.
드디어 드로트닝홀름(Drottningholm) 성에 도착했다. 이 성은 1991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스톡홀름에서 10마일 정도 남쪽의 로뵌 섬에 위치해 있다. 현재 스웨덴 국왕이 살고 있는 이곳은 지난 1백여 년 동안 왕실의 거주지로 사용되어 왔다. 현재의 왕실 가족은 1981년부터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녹음이 우거진 숲에 둘러싸인 우아한 건물은 녹색 지붕과 흰 벽, 백조가 한가롭게 떠다니는 호수와 호숫가의 흰 파도,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마치 동화 속의 궁전을 연상시키게 한다. 정원은 잘 다듬은 정원수·분수·청동 조각상 등을 배치하여 프랑스식으로 꾸몄으며, 주위에는 지형을 자연스럽게 이용한 영국식 정원이 펼쳐져 있다.
궁전의 2, 3층은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내부에는 17∼19세기의 회화와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다. 별로 화려하지 않은 내부는 관광객인 우리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기도 하지만, 근면 검소를 몸소 실천하는 것 같은 왕실의 기품에 오히려 경의를 표하게 된다.
12시경 ‘남강회관’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에 승차, 스톡홀름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피엘가탄(Fjallgatan)으로 향했다.
피엘가탄 언덕은 스톡홀름 시가지의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이곳에서 보니, 과연 ‘물과 녹지가 2/3요, 대지가 1/3이라는 호반의 도시 스톡홀름’을 제대로 실감할 수가 있었다. 항구가 얼마나 산뜻하고 아름다운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오늘도 이상 기온으로 더운 날씨라 일행들은 그늘을 찾아서 앉아 스톡홀름의 아름다운 항구 경치를 감상하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언덕에서 시가지를 조망한 우리는 다시 버스에 승차, ‘왕의 거리'로 향했다. ‘왕의 거리(Kungsgatan)'는 스톡홀름의 대표적 번화가이다. 이 거리의 벼룩 시장에는 각종 신선한 과일·야채·꽃 등과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을 팔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재래 시장이나 벼룩 시장은 사람들의 활기찬 생활 모습이 보인다. 약간의 자유시간을 이용해 근처의 백화점, 쇼핑 센터 등도 돌아보았다.
다음으로 간 곳은 시가지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유르고르덴(Djurgarden) 섬의 스칸센(Skansen) 박물관. 스웨덴이 급격한 공업화로 오랜 전통을 잃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스웨덴의 민속학자이며 교육자인 하셀리우스(A. Hazelius)의 주창으로 세워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야외 민속 박물관이다.
이곳에는 중세 시대(17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귀족의 저택·농가·교회·풍차·산장 등 스웨덴 각지로부터 수집한 150여 개의 시설과 건물들이 있다. 내부의 장식도 당시의 양식으로 재현하고, 인쇄 공장과 직물 공장에서는 민속 의상을 입은 직원들이 당시의 작업 광경을 실연해 보인다. 한 가옥에서 전통식으로 베 짜는 여자 직원에게 기념 촬영을 함께 하자고 하니 문 밖으로 나와서 포즈를 취해 준다. 교회 건물에서는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신혼 부부가 있었다. 번잡한 대도시를 떠나 이 고풍스런 야외 박물관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신혼 부부들이 참으로 순박하게 보인다.
스칸센 동물원은 군데군데 조성된 소규모 동물원에 다양한 동물을 사육하고 있다. 농장 주변에는 우리나라 농가와 꼭 같이 소·말·양·염소 등의 가축이 있다. 농장 한쪽 구석에서 뒤뚱거리는 거위와 오리들의 모습도 마치 우리나라의 농가를 방불케 한다.
여름철 오후나 밤에는 광장의 야외 무대에서 야외 콘서트, 포크 댄스 등이 열리고, 스코가홀름 대저택에서는 실내악 콘서트가 열린다고 한다.
출구 쪽엔 스톡홀름 시내의 건물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옛 저자 거리가 있다. 저자 거리의 가게에는 나무 주방용품, 삼각 종이에 싸인 사탕 등이 진열되어 있다. 빵과 과자를 만드는 곳에서 우리 일행들은 빵을 사서 나누어 먹기도 했다. 유리 공장에서는 불이 지글지글한 가운데 직공들이 열심히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저자 거리를 빠져나오니 작은 마당에서 기타 등 악기로 연주하는 무리들이 있어 관람객들을 즐겁게 해 준다.
스웨덴 여행 일정이 하루밖에 안 되는데 이 스칸센 박물관에서 다소나마 스웨덴 여러 지방의 전통적인 생활 모습을 살펴보게 된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스칸센 박물관을 나와 구(舊)시가지이며 스톡홀름의 발상지인 감라스탄으로 갔다. 시내 남쪽의 작은 섬인 감라스탄(Gamla Stan)은 스톡홀름의 구시가지다. 이곳엔 왕궁과 대성당 등 13∼19세기에 걸쳐 세워진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데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세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삼각형의 지붕을 한 집들과 벗겨진 외벽, 닳고 닳은 계단, 오래된 돌길, 자갈이 깔린 뒷골목 등이 과거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구불구불 미로처럼 얽혀 있는 좁은 골목 길 중 가장 좁은 곳은 폭이 90cm 정도밖에 안 된다.
감라스탄의 중심은 스토르토리에트(Stortorget) 광장이고, 이 광장을 중심으로 하여 기념품점·골동품상·부띠끄·레스토랑 등이 가득찬 쇼핑거리인 ‘보행자 거리’가 빙 둘러 있다. 먼저 윤 선생의 안내로 함께 이 거리 일부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광장에서 다시 모이기로 하고 약 1시간의 자유시간을 가졌다. 이 거리의 상점들에는 예상외로 값지고 괜찮아 보이는 물건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일행들 모두가 어지간히 지쳤는지, 반시간쯤 지나니 거의 대부분이 광장에 모여 앉아 쉬고 있었다.


 

2003년7월20일  일요일 : 노르웨이 오슬로

 
아침 일찍 노르웨이 수도인 오슬로에 도착했다.
현지 가이드는 노르웨이인과 결혼해 9년째 살고 있다는 표은복씨다. 오슬로는 1,050년에 세워진 도시로 유럽의 수도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었다. 인구 약 55만명이며, 면적 대비 인구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도시이다.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바로 비겔란 조각 공원으로도 불리는 프로그네르 공원으로 향했다. 오슬로 교외의 8만 에이커의 드넓은 땅에 조성된 프로그네르 공원에는 시 당국이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G. Vigeland, 1869∼1943)에게 의뢰해 만든 조각품들이 전시된 세계 최대의 조각원(彫刻園)이 있다.
비겔란이 제작한 ‘인간의 일생’이라는 제목의 조각상들은 중앙의 ‘모놀리스’ 조각탑을 중심으로 빙 둘려 있다. ‘인간의 일생’은 제목 그대로 출생·유아기·소년기·청년기·장년기·노년기·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희로애락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리고 박진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모놀리스(Monolith)」 원주 기둥 조각탑은 비겔란이 석고 모델을 만들고 3 명의 석공이 14년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그의 인생관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이 조각탑은 높이가 17m나 되는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에 모든 나이에 해당하는 121 명의 벌거벗은 남녀노소가 밑에서 위로 밀고 밀리며 겹쳐지면서 올라가려 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들의 온갖 행태를 표현한 누드 조각군이 서로 복잡하게 뒤엉켜 있지만 에로틱한 느낌은 전혀 없다.  천재 조각가 비겔란의 놀라운 감각을 엿볼수 있는 작품이다.
프로그네르 호수 위의 다리에는 58 개의 나체 청동 조각상들이 있다. 그 중에서 한 다리를 든 채 오만상을 찌푸리며 울고 있는 ‘심술장이’ 또는 ‘성난 어린 소년’이라 불리는 조각상은 그 특이한 표정 때문에 다리 위 조각상들 중 가장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조각상은 한때(1992년) 도난을 당했다가 6개월만에 되찾았다고 한다.
점심 식사 후 방문한 곳은 「바이킹 박물관」. 이 박물관 방문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바이킹 배가 무덤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바이킹선(船)은 주로 노를 쓰던 배인데 폭과 깊이에 비하여 길이가 매우 길고 갑판이 없는 등 선형과 구조가 매우 간단한 선박으로 북해의 거친 바다에 잘 맞는 선박이었다.
 바이킹 박물관에는 19∼20세기에 오슬로 피요르드 진흙 바닥에서 발굴된 3척의 바이킹 선이 전시되고 있다. 3척 모두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중 여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오세베르그(Oseberg)’호는 길이 30m, 최대 폭 6m인데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어  3척 중 가장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이 박물관에 전시된 바이킹 배의 용머리 장식이나, 바이킹 수레, 침대 등 기타 부장품에서 보이는 조각들은 매우 정교하여 바이킹들의 예술적 기량을 엿볼 수 있다. 부장품 중에는 가죽신·나무빗·나무 함지박·나무 접시 등도 보이는데, 나무빗은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던 것과 모양이 흡사하다.
오슬로 시내에는 전차가 다니고 있는데 1896년에 가설되었다. 런던, 부다페스트에 이어 유럽에서는 3번째란다. 가로수로는 마로니에(너도밤나무)가 늘어서 있다. 오슬로 시민들은 가무잡잡한 피부가 섹시하다 하여 여름에는 온몸으로 햇볕을 즐기고 여름에 검어진 피부는 겨울에는 다시 희어진다.
표 선생의 말에 의하면 흔히 북유럽 국가가 섹스 프리(Sex-free), 곧 ‘성 개방이나 성적 문란’의 나라들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여성·남성이라는 성(sex)의 구별 없이 똑같이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점심 식사 후 간 곳은 「국립 미술관」. 본래는 ‘뭉크 미술관’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수리 중이라서 국립 미술관 「뭉크관」으로 갔다. 그의 작품들은 2층에 따로 전시되어 있다. 초기 작품 「병든 아이」에서 볼 수 있는 삶과 죽음의 응시(凝視)는 그 후의 작품에서 일관하고 있다. 뭉크가 피처럼 붉게 물든 저녁 길에 들었다는 절규의 소리를 표현한 걸작 「절규」는 커다란 충격으로 보는 이들에게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공교롭게도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 개막식 날 도난을 당해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다행히 인터폴(lnterpol) 미술  도난품 전문 경찰의 집요한 추적으로 범인을 검거하여 이 그림을 다시 감상할수 있게 되었다.
뭉크관 이외에도 다른 방의 르노와르, 모네, 렘브란트, 루벤스 등 세계적인 화가들의 작품과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들을 감상하였다.
밖으로 나오니 날씨는 여전히 덥다. 다음으로 간 곳은「아케르스후스(Akershus) 성」.  이 성(城)은 오슬로 항구 동쪽 기슭의 바위 위에 있는 중세의 성채로 최초의 건물은 노르웨이가 덴마크의 식민지로 있을 당시(1299년) 덴마크 왕의 지시에 따라 스웨덴을 방어하기 위해 노르웨이 왕 호콘 5세가 지은 것으로 왕의 거주지인 성(궁전)이지만 요새의 성격이 짙다. 이 성의 언덕에서는 오슬로 항구가 환히 내려다보인다. 이 성 안 잔디밭에서도 일광욕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오늘이 마침 30세 되는 왕자의 생일이라서 이 성에서 밤에 축제가 열릴 것이라 한다.
숙소인 브리스탈 호텔(hotel Bristal)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Mr. Hong」이라는 레스토랑에서 중국식으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백야 현상으로 아직 밝아서 식사 후 칼 요한 거리를 산책하였다. 대성당에서 국회 의사당까지 백화점을 비롯한 상점과 레스토랑이 양쪽에 늘어서 있는 보행자 천국 거리를 구경하며 부두 쪽으로 갔다. 부두에서는 시계탑을 가진 브라운색 「시청」 건물이 아주 두드러지게 잘 보인다. 부둣가까지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일행들 몇 명은 「Saras Telt」라는 분위기 있는 노천 카페에서 맥주를 한 잔씩하며 오슬로의 밤 낭만을 즐겼다.


2003년7월21일  월요일 : 피오로드 가는 길

 
아침 9시30분에 피오르드 관광을 위해 출발했다. 노르웨이는 동쪽 지형이 낮고, 서쪽으로 갈수록 계곡이 깊고 산이 높다.
제일 먼저 도착할 곳은 릴레함메르. 릴레함메르(Lillehammer)는 인구 23만 정도의 작고 오래된 마을로 1994년 동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곳이다.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은  환경 보호를 위해 세심하게 배려를 한 「환경 올림픽」으로도 유명하다.
오슬로 시내를 벗어나면서 왼쪽으로 줄곧 이어지는 ‘미외사(Mjøsa)' 호수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미외사 호반의 「에스파(Espa)」라는 작은 마을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휴식을 취했다. 바이킹 배를 엎어놓은 모양의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 경기장」을 지날 땐 표 선생이 릴레함메르 올림픽 주제곡을 틀어 주었다. 「솔베이지의 노래(Solveigs Lied)」의 고향 근처를 지나면서는 ‘페르귄트(Peer Gynt)’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하며 또 그의 곡을 틀어 준다. ‘솔베이지의 노래’는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그(Edvard H. Grieg)의 가곡으로, 같은 노르웨이 태생의 문호 입센의 희곡 「페르귄트」를 위한 부수 음악 가운데 하나이다. ‘솔베이지의 노래’는 방랑의 길을 떠난 약혼자 페르귄트가 돌아오기를 한평생 애타게 기다리는 솔베이지의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4시반경엔 작은 마을 롬(Lom)에 도착했다. 「롬 스타브 교회(Lom Stave Church)」는 노르웨이의 가장 큰 목조 교회 중의 하나이다. 115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교회는 그 외양이 특이하다. 즉, 교회이면서도 지붕 꼭대기에는 모두 용머리로 장식되어 있다. 아마 기독교가 이곳으로 전래될 당시 기독교의 포교를 위해 이곳의 민속 신앙적 요소를 가미하여 건축한 것 같다.
예이랑에르 피오르드(Geiranger Fjord)를 관망하기 위해 달스니바(Dalsnibba) 전망대로 가는 도중 빙하물이 흐르는 계곡 근처에서 하차, 모두들 물에 손을 담그며 어린애들처럼 마냥 즐거워한다. 다시 버스에 승차, 6 : 30경 1,500m 높이의 달스니바(Dalsnibba) 전망대를 향했다. 버스는 가파른 절벽길을 조심조심 올라가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우리는 아찔하여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니, 우리가 올라왔던 길이 몇 굽이인지 꼬불꼬불 그야말로 구절양장(九折羊腸)이다. 멀리 선명한 옥빛깔의 예이랑에르 피오르드, 사방에서 흘러내리는 폭포, 만년설과 빙하를 이고 있는 연봉(連峰)들, 백두산 천지(天池)를 연상시키는 큰 호수…. 15분쯤 서 있으니, 어슬어슬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버스에 승차하여, 30여 분 지나 예이랑에르 피오르드가 한눈에 보이는 플뤼달스유베(Flydalsjuvet) 전망대에서 다시 절경을 감상한 후, 우리의 숙소가 있는 예이랑에르 유니온(Geiranger  Union) 호텔에서 여독을 풀었다.
장장 10시간의 긴 여정으로 지칠 대로 지쳤지만, 일행들 대부분은 저녁 식사 후 계곡을 낀 언덕길을 내려가 피오르드 유람선 선착장 쪽으로 갔다. 이곳은 기념품 가게도 즐비하여, 아이쇼핑(eye-shopping)만으로도 즐겁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숲속의 요정 「트롤(Ttoll)」이라는 인형을 자주 대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도깨비와 비슷한 개념이다. 코가 길고,  손가락·발가락이 4개씩이며, 변신술의 특기가 있고, 인간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는 한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한다.

 

 

2003년7월22일 화요일 : 예이랑에르 피오로드에서 발레스트란까지

 

밤새 쏟아진 빗줄기가 아침이 되자 맑게 개고, 날씨도 시원해졌다. 북유럽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피오르드 유람선 관광이 오늘부터 시작된다. 아침 8시 예이랑에르 선착장에서 승선)하여 헬레쉴트(hellesylt)에 도착하기까지 1시간20분에 걸친 피오르드 관광은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쌓였던 모든 시름을 일시에 걷어갈 듯이 상쾌한 여정이었다. 배 주위를 줄곧 맴돌며 승객들이 주는 빵조각을 잽싸게 채가는 갈매기 떼, 절벽 위 산꼭대기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폭포들, 절벽 위의 농가, 바닷가의 아담하고 평화로운 촌락들, 옥색을 무색케 하는 바닷물 빛깔! 더 이상의 낙원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헬레쉴트에서 하선하여 계곡물이 콸콸 쏟아지는 다리를 지나,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몸을 실은 우리는 빙하 계곡 마차 관광을 위해 브릭스달(Briksdal)로 향했다.
표 선생이 긴 여정에 감상하라고 틀어 준 노르웨이 여가수 시셀 퀴르세뵈(Sissel  Kyrsebø)의 노래를 들었다. 가는 도중 터널은 어찌 그리 많은지! 세계 최장(最長)이라는 24.5km의 터널 등 노르웨이는 인공적으로 암벽을 뚫는 터널 굴착 기술이 매우 뛰어나다고 한다. 노르웨이의 굴착기는 유명하며, 북한에서도 수입해서 땅굴 파는 데 썼다고 한다.
곳곳에 나타나는 호수와 피오르드. 거대한 호수와 피오르드를 우리는 분간하기 어렵다. 해초가 떠 있으면 피오르드라고 하나 우리의 식견으로는 쉽게 구분할 수가 없다. 가장 깊다는 호르닌달(Hornindal) 호수를 지나고, 스트륀(Stryn), 로엔(Loen), 올덴(Olden)을 경유했다. 올덴에서 조금 지나 큰 호숫가에서 하차, 빙하호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멀리 산 위로 두꺼운 빙하가 보인다.
12시경 브릭스달에 도착, 30분간의 자유시간을 가졌다. 멀리 산꼭대기에서 떨어지는 폭포, 가까이서 콸콸 쏟아지는 빙하 계곡물, 아름다운 들꽃과 이끼류들. 너무 아름다운 정경에 배고픈 줄도 모르겠다. 천장과 사방이 온통 유리창으로 된,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Briksdal Sbrasser Rest.)에서 멀리 빙하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을 감상하며, 송어 요리로 점심 식사를 하는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점심 식사를 마치고 마차로 빙하 계곡 관광을 하려는데 갑자기 큰 빗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둘러 여행사에서 마련한 비옷을 걸치고 마차를 탄 일행이 함께 출발하려고 잠깐 지체하는 사이 어느새 비가 그쳤다. 폭포와 계곡과 들꽃 등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며 30분쯤 지나 마차에서 내렸다. 걸어서 10분 정도 가면 빙하에 근접해서 볼 수 있다. 빙하로 가는 도중에 보니, 「Ice-polished Rocks」라는 바위가 있다. 빙하가 붕괴하면서 바위 표면을 깎아내려 매끈하게 된 바위이다. 또 한 곳에는 「1920년대 빙하의 선단(先端)」이라는 표시가 있다. 1920년대만 해도 빙하가 이곳까지 있었는데 현재의 빙하는 8m 뒤로 물러나 있다.
드디어 노르웨이의 여러 빙하 가운데 최대 규모라는 브릭스달 빙하가 눈앞에 보인다. 만년설(萬年雪)이 응결해서 생성된  빙하! 오랜 세월 전의 순수한 눈의 응결체를 우리 손으로 직접 만져보는 이 감격을 무엇으로 표현하랴! 장비를 갖추어 빙하 등산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빙하의 빛깔은 순백색이 아니고, 옥색의 푸른 기운이 감도는 흰색이다. 햇빛의 여러 색깔 중 파란 색을 빙하가 흡수하지 못해서 푸른 색을 띤다고 한다. 빙하 바로 앞에는 빙하물이 녹아 작은 못을 이루고 있고, 그 끝에서 아래 계곡으로 흘러내린다. 아쉬움을 달래며 다시 마차를 타러 가니, 우리를 태웠던 마부가 알아보고 손짓을 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떨어지는 폭포수에 칠색 영롱한 무지개가 떠 있었다.
왕복 1시간의 빙하 계곡 관광을 마치고 오후 3시경 브릭스달을 출발, 발레스트란(Balestrand)으로 향했다. Hella에서 배를 타고 드락스빅(Dragsvik)으로 가서 다시 버스로 발레스트란으로 가서 거기서 숙박을 하기로 되어 있다.
오후 4시경 비가 오기 시작한다. 3개의 긴 터널을 통과하였다. 터널 안의 공기는 비교적 맑은데 집진계(集塵計)의 컴퓨터 회로에서 일정량의 먼지가 감응되면 파이프를 통해 나가도록 장치가 되어 있다. 배수 장치도 잘 되어 있어 노면이 미끄럽지 않게 되어 있다.
호반이나 계곡 주변 평지, 그리고 약간 경사진 언덕에는 드문드문 아담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학생 2천 명까지 합쳐 총 8천 명의 인구를 가진 비교적 큰 마을인 송달(Sogndal)을 통과했다. 왼쪽으로 송네 피오르드(Sogne Fjord)의 지류를 끼고 차가 계속 달린다.
우리 일행이 유람선 선착장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표 선생이 전화를 하고, 버스가 아슬아슬하게 6시경 헬라(Hella) 선착장에 도착, 버스와 함께 유람선에 승선하였다. 페리는 10분 후 드락스빅(Dragsvik) 마을에 도착했다. 이 10분간의 승선을 위해 운전 기사와 표 선생이 몹시 애태우며 고생과 노력을 했던 것이다. 버스로 다시 10분간 달려 우리의 숙소가 있는 아름다운 마을 발레스트란(Balestrand)에 도착했다.
우리는 숙소 크비크네 호텔(Kvikne's Hotel)에서 짐을 풀었다. 이 호텔은 마치 궁전 같은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호텔로, 그림 등 실내 장식도 아주 훌륭했다. 차를 마시며 쉬는 휴식 공간은 바로 송네 피오르드를 감상할 수 있어 더더욱 좋았다. 호텔에서 뷔페식 저녁 식사를 할 때, 가이드 표 선생이 염소 치즈가 맛있다 권하여 시식해 보았으나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식사 후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인구 800여 명의 작고 아담한 이 마을은 바다와 산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지대에 그림 같은 아담한 집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는 성(聖) 올라브 교회(St. Olavskirken)라는 이름의 예쁘고 고풍스런 목조 교회가 있다. 이 교회에도 지붕 꼭대기에 용머리 장식이 2개가 있고, 더 위로는 십자가가 우뚝 솟아 있다.
때마침 이 호텔 리사이털 홀(Recital Hall)에서 저녁 7시반부터 이 마을 출신의 유명한 세계적 피아니스트 Age Kristoffersen의 연주회(에드바르트 그리그의 서정곡 소품들)가 있어서 직접 명연주를 듣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Age Kristoffersen은 노르웨이 출신의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현재 미국 플로리다와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면서도, 해마다 그의 범세계적 콘서트 여행이 끝나면 고국으로 돌아와서 연주를 선사한다고 한다.

 

2003년7월23일  수요일 : 발레스트란에서 베르겐까지
 
호텔 조식 후 발레스트란 마을을 떠나 드락스빅 페리 선착장으로 갔다. 9시40경 우리가 탈 전용 버스와 함께 드락스빅∼방스네스 구간 페리에 탑승, 20분 정도 지난 후 하선했다.  버스로  송네 피오르드 관광을 위해 구드방겐(Gudvangen) 선착장으로 향했다. 버스가 산 오르기 시작하더니 뜻밖에도 산꼭대기에 평지가 나타난다. 고원 지대의 광활한 초원, 산과 도로에 드문드문 보이는 잔설과, 작고 아담한 호수들, 호숫가에서 풀 뜯는 젖소 무리. 도로면보다 약간 낮은 곳에 위치한 좀더 큰 호수에서는 인근 산에서 작은 폭포가 흘러내리고 있다.
산 하나를 넘으니 양쪽 산에서 상쾌한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폭포가 모여 큰 계곡을 이루는 곳 주변에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다. 염소를 방목하여 사육하는데, 주변에 Geltose라는 염소 치즈를 제조하는 공장이 있다 한다. 스키장으로 유명한 아담한 보스(Voss) 마을을 지나고 호수를 끼고 도는 꼬불꼬불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길을 지나고, 연이은 2 개의 긴 터널을 통과하여 드디어 구드방겐(Gudvangen)에 도착했다.
11시30분 송네 피오르드 관광을 위해 구드방겐∼플롬(Flam) 구간 페리에 탑승하였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송네 피오르드는 외해(外海)에서 179km나 되며, 몇 가닥이나 되는 지류 피오르드까지 합치면 전체 길이는 300km에 가깝다. 피오르드에 접한 낭떠러지는 제일 높은 곳이 1,680m나 된다고 한다. 우리는 2시간 동안 ‘송네 피오르드’의 한 지류인 「네뢰위 피오르드(Nærøy Fjord)」의 절경을 감상했다.
플롬 철도역 근처 「Furukroa Centra」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플롬 철도」로 플롬역∼미르달 역까지 왕복 40.4㎞ 거리의 이른바 「로맨틱 열차」 여행을 2시간15분 정도 즐겼다.
우리는 이 낭만 열차를 타고 해발 2m 폴롬에서 해발 866m 미르달에 이르는 엄청난 급경사를 오르내리며, 산의 여러 층을 꼬불꼬불 통과하는 20개의 터널도 지나면서, 인상적인 노르웨이 산악 풍경을 보게 되었다. 깊은 계곡을 가로지르면서 강이 흐르고, 눈과 빙하가 덮인 산의 가파른 절벽에는 폭포가 여기저기 흘러내리고, 고산 지대 농장은 깎아지르는 산비탈에 아찔하게 매달려 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들꽃들은 객수에 젖은 나그네의 애수와 고독감을 달래 준다.
플롬에서 15.6㎞ 지점, 해발 669m의 쿄스포센 역은 폭포 역으로 열차는 이곳에서 5분간 정차한다. 높은 지대의 레이눙가 호수에서 떨어지는 웅장한 쿄스 폭포를 가까이서 관망하고 사진 촬영도 할 수 있도록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관광객들을 위한 깜짝 이벤트가 벌어진다. 즉, 빨간 드레스를 입은 2명의 요정이 하나는 폭포 속에서, 하나는 폐허가 된 옛 성터에서 갑자기 나타난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하얀 폭포와 새빨간 드레스의 요정 아가씨는 동화 속의 한 풍경 같다.  
플롬에서 전용 버스에 승차, 베르겐으로 향했다. 버스는 왔던 길을 되돌아서 구드방겐 지역의 2개의 터널 구간(18㎞)을 통과하여 해발 0m의 협곡을 지나 계속 달린다. 구불구불 비탈길을 올라가다 보니, 장대한 규모의 시블레 폭포(Sivlefoss), 스탈헤임 폭포가 시야에 들어온다. 곧 이어 해발 370m의 절벽 위에 있는 스탈헤임(Stalheim)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정원으로 나가 전망대에 서면 네뢰위(Nærøy) 협곡의 절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특히 눈앞에 외연(巍然)히 솟아 있는 하얀 색의 화강암 바위가 아래의 푸른 계곡물과 어우러져 한층 멋을 더해 준다.
오후 6시경 출발한 버스는 왼쪽으로 피오르드를 끼고 계속 달리다가, 트빈네 폭포(Tvindefoss)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이 폭포 물을 마시면 10년은 젊어진다는 말에 너도 나도 준비한 물병을 들고 가서 가득 담았다.
가랑비가 오기 시작한다. 다시 버스에 승차하여 베르겐으로 향했다. 스키(ski)의 고장 ‘보스(Voss)’ 마을을 지났다. 오전 중에 지난 같은 보스 마을이지만, 그때와는 다른 방향의 마을을 지나게 된 것이다. 보스에서 베르겐 사이에는 터널이 40여 개나 있다 한다.
비가 많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30분쯤 지나 개었다. 밤 8시가 넘어 베르겐의 숙소(Edbard Grieg Hotel)에 도착했다. 버스 기사 알트레 씨는 베르겐 출신이라 이 마을 도로를 샅샅이 알고 있어 지름길로 왔다 한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행 들 중 일부는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가 베르겐 항구 주변과 브뤼겐 거리의 오래된 목조 가옥 골목을 거닐다가 300 년 된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노르웨이의 고대 생활 풍속도와 옛 지도가 걸려 있어 더욱 고풍스러웠다. 옛날 이 거리를 오고간 선원들이 향수를 달래듯 우리도 맥주로 객수를 달래었다. 일제히 ‘스콜!(건강)’을 외치며.

 
2003년7월24일  목요일 : 북유럽의 마지막 일정 베르겐
 
베르겐은 오슬로보다 먼저 1070년에 수도가 되었던 곳으로 노르웨이 제2의 도시이며 항구 도시이다.
베르겐 사람들은 자부심이 아주 강하여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노르웨이에서’라고 하지 않고 ‘베르겐’에서라고 할 정도다. 내향적인 사람이 많은 노르웨이에서 베르겐 사람들은 예외적으로 밝고 개방적이며 진취적인 기풍이 강하다. 그들이 사용하는 ‘베르겐 방언’은 웬만한 타지 사람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발성이나 억양이 독특하다 한다. 그들은 베르겐 방언을 사랑하며, 방송도 베르겐 방언으로 한다고 한다.
호텔에서 아침 아침 식사를 하고, 먼저 ‘북국의 쇼팽’이라 불리는 그리그(Edvard Grieg, 1843∼1907)가 22년간 살았다는 저택을 방문했다. 먼저 그리그의 일생이나 작곡에 관한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그리그 박물관」을 들른 후, 트롤하우겐(Troldhaugen)이라 불리는 「그리그의 생가(生家)」를 방문했다. 생가는 베르겐 교외 바닷가 근처 노르다스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생가에는 그리그가 사용했던 피아노·악보·편지·초상화와 가구 등이 진열되어 있다. 이 집은 그리그가 태어나고 그의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이 집에서 부인 니나(Nina ; 인기 있는 소프라노 가수였음)와 함께 살면서 많은 명곡들을 작곡했다. 녹색 풀들로 덮인 바이킹 전통 지붕의 별채는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콘서트홀로 꾸며져 지금도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공연이 개최되고 있으며, 콘서트홀 앞에는 실물 크기의 조각상이 서 있다.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킨 호반의 작업실인 오두막에는 생전에 사용하던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다.
생가에서 조금 떨어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절벽 중간에는 그리그와 그의 아내를 합장한 묘가 있다. 절벽의 돌을 파낸 공간에 묘를 만든 후 입구를 봉쇄한 이곳은 얼른 보기에는 전혀 무덤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의 유언에 따라 양지바른 이곳에 그의 화장 유골을 매장했고 부인 니나는 10년 후 남편 곁에 묻혔다.
다시 시내로 돌아와 어시장 맞은 편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고도 320m의 플뢰엔 산(Mount Floien) 정상으로 올라갔다. 최대 경사 26도인 경사면을 8분쯤 걸려 전망대에 오르면 아름다운 항구 도시 베르겐의 시내는 물론 항구와 피오르드 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온 우리는 베르겐 항구 주변과 어시장, 그리고 브뤼겐 거리를 산책했다.
베르겐은 항구 도시로 대서양에서 가장 어족 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이곳에서 잡히는 연어는 가장 맛좋은 연어로, 유럽 전역에 수출된다 한다. 베르겐 항구의 노천 어시장은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다. 이제 막 잡아 올린 싱싱한 게나 새우, 연어 등 어패류가 풍부하다. 삶아서 데친 새우도 그 자리에서 직접 맛볼 수 있다. 신선한 야채·과일·꽃 등을 사고 파는 사람들로 항상 붐비며 훈제 연어, 연어 샐러드 등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도 판매한다.
베르겐 항구 북쪽 브뤼겐(Bryggen) 거리에는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도 들어 있는 목조 가옥들이 즐비하다. 베르겐은 14세기에 상인들의 동맹인 한자(Hansa) 동맹에 가담했다. 이때 건너온 독일 상인들은 당시 건축의 전형적 형태인 삼각형 지붕의 목조 건물들을 지으면서 고국에서의 습관대로 주거와 일터가 한 지붕 밑에 있도록 했다. 이 목조 건물들은 14∼16세기에 건립된 이후로 6차례에 걸친 화재를 입었으나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으며, 현재 레스토랑·선물 가게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당시의 활발했던 상업 활동을 보여 주는 흥미로운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는 ‘한자 박물관’ 건물도 1702년에 건립되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아름다운 베르겐 항구를 뒤로 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공항으로 향했다. 베르겐 공항에서 스칸디나비아 항공편으로 오후 5시15분에 출발, 약 1시간반 후 코펜하겐 도착, 오후 7시50분 코펜하겐에서 SK 995편으로 북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