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세이 여행이야기

함돈영-운남고도/샹그릴라

  • 작성자 :

    테마세이투어

  • 작성일 :

    2007.11.21

  • 조회수 :

    762


이 글은 서울에 사시는 함돈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함돈영님은 2004년2월12일부터 2월19일까지 8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운남고도/샹그릴라 여행을 다녀 오셨습니다. 글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1. 쿤밍(昆明) : 위기를 기회로

 
동남아와 중국 일대가 조류독감으로 법석인데도 중국 여행을 간다고 하니 주변에서 걱정스런 눈길을 보냈다.그러나 한번 마음먹고 눈독 드리면 꼭 하고야 마는 나를 누가 말리랴.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중국에서도 비교적 오지로 알려진 운남성(雲南省) 여행의 일정은 쿤밍으로부터 시작하여.중띠엔(샹그릴라), 려강, 따리 순으로 짜여졌다. 첮 도착지인 쿤밍은 운남성의 성도(省都)로 기후가 온화하여 사계절 끊임없이 꽃이 핀다 하여 꽃의 도시로 불려진다. 해발 1,891m의 고원에 위치해 있으며 운남성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앞으로 여행할 다른 도시들 보다 비교적 현대화된 곳이다. 쿤밍의 또 다른 특징은 26개의 소수민족이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이번에 같이 여행하는 인원도 이에 못지않게 각양각색의 17인이 모였다.
인천공항서 3시간 반 만에 도착한 쿤밍과의 첫 만남은 저녁식당이다. 인원에 맞추어 두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는데 누가 이리저리 가라고 일러준 것도 아니건만 용케도 알아서 나뉘어 졌다. 이름하여 신세대, 쉰세대 라고 했던가? 그렇게 갈라진 일행들은 여행 끝날 때까지 고정되어 버스 안에서도 앞뒤로 나뉘어졌지만 서로들을 배려하고 양보하여 좋은 관계가 되었다.
본격적인 여행 시작의 첫 날이다.
오전 에는 쿤밍에서 남쪽으로 120km 떨어진 곳에 있는 석림(石林) 으로 갔다.
출근길의 자전거 무리와 상쾌한 공기가 우리와 함께 했다. 거리 곳곳에선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1시간 20분 정도 고속도로를 이용 하는 석림 가는 길은, 작년 11월에 완공 되었다 한다.
바다 밑의 땅이 융기해 형성된 석림은 해발 1.750m까지 솟아 있는, 글자 그대로 돌들의 숲이다. 대석림, 소석림, 외석림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제일 먼저 간 대석림은 수십 미터에 달하는 바위들이 각종형태로 들쑥날쑥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바위와 바위 사이로 관광객들은 미로 같은 7km정도의 길을 따라갔다. 일렬로 줄지어서 머리를 부딪힐까 조심하며 걷다보면 잠깐씩 쉴 수 있는 정자들이 있고 여러개의 이정표도 나온다. 좁은 바위 사이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돌아다니지만 제한된 시간에 모든 곳을 다 볼 수는 없었고, 그래도 꼭 놓치지 않고 올라야 할 곳이 석림 전체를 다 볼 수 있는 망봉정 (望峰亭)이다.    
소석림은 대석림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규모도 작지만 바위들도 20~30m씩 되는 대석림 보다 작다. 대신 인공호수와 정원을 바위들과 어우러지게 꾸며 놓았다. 대석림의 굴속 같던 바위 속에서 헤매던 눈과 머리를 식혀준다. 호수 한가운데 솟아있는 바위는 소수민족인 나시족 처녀를 닮았다고 아시마(何詩瑪)라고 이름 붙여졌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그러고 보니 석림의 매표소 입구와 경관 좋은 곳곳에서 민족고유의상을 입고 관광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돈을 받는 아가씨들이 보인다.
소석림을 나와 9인용의 작은 전동차를 타고 외석림 을 돌아보게 된다. 이곳은 먼저 본 두 곳과는 달리 아직 개발이 안 된 곳 인 듯 하다. 그리 높지 않은 야산 정도의 넓은 언덕, 군데군데에 심어 놓은 듯이 바위들이 보인다. 이번에 함께 동행 한 친구 남편, 농담 삼아 계속 탐낸다. "저 돌 하나만 가져갔으면" 하고.  전동차로 20여분 돌아보고 나온 곳에 우리의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버스 뿐 만이 아니라 관광객들을 상대로 군고구마, 호떡, 과일 등을 파는 현지인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어제 저녁, 오늘 아침에도 탄 버스이건만 운전기사 얼굴을 이제야 확실히 보게 되었다.아니 내가 잘못 보았나 싶어 다시 한번 보았다. 코와 웃입술 사이에 양쪽으로 수염이 났는데(길렀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10cm정도 되는 길이에 단 두 가닥씩이다. 재미있고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놀란 듯이 다시 보는 나에게 웃음으로 답한다.
점심식당은 규모가 크고 깨끗한 곳이라 모두들 만족해하며 어떤 음식이 나올까? 기대하는 눈치들이다. 열 가지의 요리 중 네 가지는 야채고 나머지는 방법을 달리한 돼지고기인데 처음 몇 번은 같은 재료로도 이렇게 다르게 만들 수 도 있구나 했지만, 하루 두 끼씩 먹는 이것이 여행 끝날 때까지 계속 되니, 몇 분이 가져온 고추장이 제 역할의 몇 배를 더 한 것 같다.    
점심 후 찾은 곳은 구향동굴(九鄕洞窟) 이다.
석림서 버스로 이동하는데 2시간 정도 걸렸다. 한창 도로포장 공사를 하고 있어서 이동하는데 더욱 시간이 걸렸다.  
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곳의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로 지하에 내려가 보트를 타고 물놀이를 즐겼다. 다시 올라와 동굴로 들어가면 종류석들의 잔치다. 어느 곳에선 제법 길고 물 양도 많은 폭포가 요란스런 소리로 떨어져 식곤증의 나른함에 빠져있던 우리들에게 청량제가 되었다. 동굴의 하이라이트는 동굴 끝나는 곳에 있는 넓은 광장이다. 물론 자연 그대로는 아니고 손질을 한 곳이겠지만 규모가 제법 커서 웬만한 공연은 할 수 있겠다 싶다.
운남성 여행의 마지막 날도 쿤밍이다. 따리(大里)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다시 서울로 가기 때문이다.
시내에 있는 취호공원(翠湖公園) 에는  이른 아침인데도 많은 현지인들로 북적인다.
춤을 추는 사람들과 노래를 하는 이들, 악기를 배우는 사람도 있고 또 어느 곳에선 토론을 하는 무리들도 있다. 사람 다니는 길을 제외한 양쪽으로 죽 늘어놓은 마작 테이블도 빈곳이 하나도 없다. 이 모든 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은퇴한 노인들인 것 같다. 가이드의 얘기로는 춤이나 마작 파트너가 부부가 아닌 쪽이 더 많단다. 노인정이라 지어놓고 방안에서만 즐기는 우리나라 노인들 보다 역동적이고 건강해 보였다.
오후에 리프트를 타고 20분간 오른 서산산림공원은 해발 2,500m이다. 쿤밍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위치해 있다하여 서산공원이라 한다.
표현은 안했지만 너무 높아, 올라가는 내내 불안했다. 무슨 일인지 중간에 몇 분 동안 리프트가 멈춰 서버려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정상에서 절벽을 끼고 나있는 좁은 계단(800여개)을 따라 걸어 내려간다. 밑을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용이 암벽을 뚫고 나간 것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용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문 위에 ‘용문’ 이라고 새겨진 곳이 있는데 그곳을 만지면 장수 한다나? 용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재미로 만든 얘기겠지. 다시 좀더 내려가면 원 시대에 지었다는 삼청각    (三淸閣)이 나온다. 더위를 피해 관리들이 공무를 행하던 곳이라는데 얼마나 깎아지른 절벽에 있는지 쳐다보기만 해도 오싹하여 제대로 일을 볼 수 있었을까?
조심하며 내려갔던 길을 다시 힘들게 올랐다.
이제야 한숨 돌리고 정상에 서서 한눈에 들어오는 쿤밍시내와 쿤밍호수를 보며 스틸사진처럼 지나가는 낯선 곳에서의 8일을 마무리한다
 

 2. 중띠엔(中甸)ㅡ샹그릴라 : 마음속의 해와 달

 
쿤밍서 비행기로 한 시간 만에 도착한 곳 중띠엔, 트랩을 밟고 내려오는데 짙고 푸른 하늘 아래로 눈에 덮인 산이 보인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쪽도 마찬가지다.버스에 오르면서 가이드의 분지라는 말을 듣고서야 “그렇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중띠엔 비행장” 과 함께 “샹그릴라”(Shangrila)라고 나란히 써있는 글자가 보였다. 1933년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톤(James Hilton 1990m1945)의 “잃어버린 지평선”이라는 소설에서 인류 최후의 낙원으로 샹그릴라 라는 곳이 소개된다.
모든 종교가 화합하면서 공존하며 인간의 갈등과 탐욕이 없는 곳이며, 오염되지 않은 땅에서 몇 백 살까지도 영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티벳 어느 곳에 숨어 있으며 히말라야 동쪽 골륜 산맥의 설산에 둘러싸여 있다는, 상상속의 파라다이스로 알려졌으나 중국공산당의 집권 때는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오갈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신비스러운 곳으로 여겨졌을 듯싶다.
중국의 개방정책 이후 1996년 운남성 자치주 에서는 조사단을 동원하여 책 속에 발표된 샹그릴라 탐사에 나선다. 그 결과 1997년 샹그릴라는 중띠엔 이라고 발표를 하였다.
운남성 정부의 주장으로는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샹그릴라 지형과 비슷하며, 책 속에 나오는 것과 같이 많은 종교가 있으나 다툼 없이 화목하게 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도 관광객 유치를 위하여 자기네 지방이 샹그릴라 라고 주장하는 곳이 많아지자 2001년 중국 국무원에서 운남성 중띠엔 만이 샹그릴라 라는 명칭을 쓸수 있게 하였다.    (테마세이투어 운남성 안내책자에서 발췌)
얼마간의 주어진 자유시간을 이용해 거리로 나섰다.
인구 5만 명인 이 작은 도시를 다 둘러보는데는 한 시간이면 족하다. 번잡하지 않은 거리는 어느 순간 잠깐 정지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 장의 빛 바랜 사진 같기도 하다.
나의 눈은 샹그릴라 라는 이상향에서 무엇인가를 찾고자 계속 두리번거렸다. 현지인들의 표정도 살펴보고 작은 가게 안을 기웃거려 보기도 하였다.
 '많은 돈을 들여 여기까지 왔는데 꼭 무엇 하나라도 건져가야 밑지지 않지' 하는 심경이었다.
그때다, 낯익은 소리가 레코드 가게 안에서 퍼져 나온 것이. 가수 이 정현이 부른 “바꿔”라는 노래였다. 번역도 안한 채 우리나라 말로 나온다.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한동안 유행했던 노랫말이 조용한 거리를 향해 힘차게 울린다. 그 순간 퍼뜩 내 생각도 바뀐다. 그래, 내가 이곳에 발 들여놓은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인데 무얼 찾고자 한단 말인가?
현지 가이드가 우리가 가는 “송찬림사(松贊林寺)”에 대한 설명을 한다. 덧 붙여서 하는 말이 이곳은 운남성에서 제일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이 3.300m되는 곳이라 한다. 혹시 고산증세가 올지 모르니 천천히 움직이면서 물을 많이 마시라 한다.
티벳 종교의 스님들이 살고 있는 절, 송찬림사는 티벳의 라사에 있는 포탈라궁과 흡사하다. 325년 되었다는 이곳은 “달라이라마 5세”가 지었으나 문화혁명때 부분 파괴된 것을 2001년에 다시 보수하였다. 현재 700여명의 스님이 있으며 티벳 불교의 3대 절에 속한다.
대웅전 안에서는 “살아있는 생불” 이라고 소개된 스님이 좌선 한 채 절을 찾은 보살들을 맞는다. 엎드려 합장하는 보살의 목에 긴 염주를 둘러 주면서 의식 같은 것을 베푼다. 이에 답해 보살은 자기 재량껏의 돈을 생불 옆에 놓는다. 수북히 쌓인 돈만큼이나 살이 찐 스님을 보면서 뭔가 좀 씁쓸한 느낌이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 한데도 낯 시간엔 호텔에서 난방을 안 해주었다. 덜덜 덜면서 호텔식당서 점심을 한 후 티벳족 이라는 개인집 방문을 하였다. 이층 목조로 된 집안으로 들어가자 집 주인 아주머니 장작불부터 피워준다. 빠르고 쉽게 타오르는 불 위에 차 끓일 주전자를 올리고 차잔을 챙기는 솜씨가 민첩하다.
이곳에서 많이 기르는 “야크”젖으로 만든 차는 먹기가 좀 역겨웠지만 남기면 실례라는 가이드의 말에 모두들 깨끗이 비운다. 가옥의 구조는 아래층은 가축의 먹을 것을 저장해 놓는 건조 창고다. 이층으로 오르면 작은 테라스가 있고 주인 남자가 한쪽에서 쉬지 않고 목수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집은 물론 이려니와 모든 살림 가구를 다 직접 제작 하는데, 찬장과 침대의 조각을 보니 그 섬세함이 수준급이다.
거실엔 오디오, 텔레비전이 보였고 찬장에 정갈하게 진열된 그릇들에서 안 주인의 부지런함도 눈에 보였다.  테라스 천장엔 매달아 놓은 커다란 치즈 덩어리와 고기 말린 것이 많은 것을 보니 이 집의 부의 정도도 알 수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두 아들과 어린 며느리의 해맑은 웃음을 보면서 짧지만 진심어린 정을 두고 나왔다.
납파해(納杷海) 자연 보호구로 갔다. 지금은 겨울이라서 넓은 초지(3.125㎢)는 황량해 보이지만 열심히 먹이를 찾고 있는 두견새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말을 태워주며 돈벌이를 하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별로 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지만 둘러보아도 오늘의 손님은 우리 일행뿐이다.
내 말고삐를 잡아주는 소년은 9살쯤 되어 보였다. 나를 보고 싱긋 웃더니 말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고 바로 운전(?)으로 들어간다. 저보다 몇 배 더 나가는 나를 태운 말고삐를 잡고 힘도 안 드는지 40여분 간 줄 곳 흥얼거리며 콧노래다. 오늘 일당을 했다는 즐거움 때문일까?
해발 3.266m의 높이에 있는 분지로서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납파해의 볼거리를 뒤로 한 채 이 작고 순진한 소년으로 인해 이제 사 샹그릴라에 한걸음 다가선 기분이 들었다.
티벳 언어로 샹그릴라는 “마음속의 해와 달”이란 뜻이란다.

 

3. 후티아오시아(호도협)에서 려강까지 : 왕패 가이드

 
운남성 여행의 3일째다.
아침 일찍 중띠엔을 떠나 려강(麗江)으로 향했다. 실제 거리로는 70km 정도지만 아직 비포장인 곳이 많고 길이 좁아 버스로 이동하는데 7시간 정도 걸린단다. 가는 길은 험하지만 펼쳐지는 주변 경관이 여러분의 눈을 즐겁게 해줄 것이라는 가이드의 말이 기대 되었다.
기온 차가 심해 아침저녁으로는 우리나라의 한겨울 날씨 못지 않게 추웠다. 버스가 출발하여 꽤 지났는데도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좌석 옆에 있는 라디에이터를 다 열었지만 춥다는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계속된다. 그러나 서서히 다가오는 창밖의 광경들이 그 원성을 잠재울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절경도 한참동안 계속되면 지루한 법, 이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현지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는다. 중띠엔부터 함께 한 김정선씨는 상세한 자기소개를 하였다.
하얼빈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우리가 오늘 저녁 도착할 려강이라 했다. 30살로 결혼 한지는 열흘 되었으며 우리일행을 안내하기 위해 려강서 중띠엔 까지 10시간 걸리는 완행버스로 왔다고 한다. 특유의 조선족 사투리로 자신이 공부한 얘기며, 가족, 가이드가 된 계기, 이제는 새로 입사한 가이드들을 교육시키는 “왕패 가이드”가 되었다는 설명을 재미있게 했다. 남의 사생활 얘기는 왜들 그리 흥미로워 하는지 간간이 질문도 많다. 그는 왕패 가이드답게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손님들을 화합시키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정지(부엌)에서 불을 안 지폈는데도 물이 펄펄 끓는 분위기네요. 이번 손님들은” 이렇게 소질(수준) 높은 분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라며 추켜세우는 데야 누군들 불만이 있을까?
정말 펄펄 끓는 커다란 물주전자를 버스 안으로 들여왔다. 모두들 추워하는데 마침 지나는  길에 허름한 인가 한 채가 있어 차를 세우고 가이드가 들어가서 물을 얻어 온 것이다. 함께 가져온 녹차를 넣어 우려낸 차는 입안으로 번지는 향기와 함께 추위에 떨던 몸을 녹여 주었다. 워낙 산간 지역인데다 오는 길에도 또 가는 길에도 휴게소가 없기 때문에 그 따뜻한 차 한 잔은 주인의 인정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 될 것 같았다.
중띠엔에서 려강으로 가는 길에 장강제일만의 물줄기가 비좁은 협곡을 이루는 곳이 있다. 버스길은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벼랑 사이의 계곡 위로 나있는데, 해발 3,000m 이상의 좁고 아슬아슬한 급커브의 길로 마치 곡예를 하는 듯한 운전이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며 바짝 긴장하여 숨을 죽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갈수록 드러나는 장관은 잠시전의 불안감을 저만큼 던져 버렸다.
 “호랑이가 뛰어 넘을 만큼 폭이 좁은 협곡(폭 30m)”이라 하여 호도협(虎跳峽)이란 이름이 붙여진 계곡까지 걸어서 내려갔다. 처음엔 “어휴 저길 어떻게 내려가나” 조금 걱정도 하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가마꾼이 있어 타고 가라고 접근해 오지만, 이 무거운 몸을 내 몸무게의 반도 못될 것 같은 그들에게 맡길 수도 없고… 아니 그보다는 그 좁은 절벽의 계단에서 가마를 탄다는 것이 더 위험하겠다는 판단이 누구라도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1,800m 까지 내려가는 길은 깎아지른 절벽에 계단으로 되어 있어 긴장감을 주었다. 한발 한발 내 디딜수록 들려오는 요란한 물소리가 내려가는 길을 더욱 조심스럽게 하였다. 그러나 힘들게 내려온 만큼의 충분한 보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터져 나오는 탄성을 잠재우며 잠시나마의 여유를 즐겼다.
삼국지 시대와 모택동군의 대장정 시절에 도하작전을 펼쳤던 장강제일만을 거쳐 려강으로 가는 길은 지금 막 봄의 시작 같았다. 끝없이 펼쳐지는 밭고랑에서 초록의 잎들이 생동감을 준다. 유유히 흐르는 장강만의 맑고 투명한 물, 그 뒤로 저 멀리 보이는 눈덮인 산, 넓은 초록의 밭, 간간이 보이는 황토로 지은 집들을 보면서 아마도 예술가들이 이런 곳에서 많이 태어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드디어 려강 입성이다.
멀리 보이는 옥룡설산(옥룡설산)이 마치 수호신처럼 이도시를 내려다보며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 잠시 호텔에 들러 짐을 정리하고 려강 고성으로 갔다. 지금은 그저 전야제로 정도로 들리고 저녁식사 후 밤에 다시 나오자고 하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음은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길고 긴 오늘의 임무를 끝내고 헤어지는 왕패가이드 정선 씨에게 놀리듯이 말한다. 며칠 만에 새 각씨 만나는 기분이 어떠냐고…   

 

4. 리지앙(려강ㅡ麗江) : 그리웠던 추억을 만나다

 
려강 고성에 첫발을 딛는 순간, 언젠가 내가 살았던 곳 같은 느낌이 들면서 깊숙이 묻혀있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떠나온 고향(강릉)을 아버지의 직장관계로 다시 돌아간 것이 중학3년 때이었지만 일년밖에 살지 못했다. 그때 살았던 우리 집을 비롯하여 골목 안에 마주보고 있는 다른 집 들 사이로 꽤 많은 양의 물이 흐르는 도랑이 있었다. 물론 그 위로는 다리가 놓여 있었고. 성인이 된 후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리울 때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그 골목안의 도랑이었다. 나는 여지껏 그곳을 다시 찾지 않았다. 혹시 복개공사를 하여 내 어릴적 추억도 함께 덮여지지나 않았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난 이곳 려강 에서 40년 전의 추억을 만났다.
운남성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려강 구시가지는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된 곳으로 800년 되었다는 6.000여 가구의 기와집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모든 집 앞으로는 꽤 넓은 폭의 수로가 있어 맑은 물이 흐르고 그 위로는 통행을 위한 작은 다리가 놓여있다. 미로 같은 골목의 바닥은 정사각형의 돌이 박혀져 있는데 세월의 흔적으로 닳고닳아 대리석같이 반질거렸다.
예전엔 그저 평범한 살림집이었을 가옥들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 때문인지 카페와 기념품 파는 가게로 바뀌어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였다. 낯에 본 고성(古城)은 도도한 역사의 흔적 같은 기품이 있었다. 맑은 물속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물고기들이 그것을 더욱 받쳐 주었다. 어느새 난, 이 미로 같은 기와집 골목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이곳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800년 전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상상도 해 보면서 지금껏 보존해온 그 후손들에게도 경탄을 보냈다.
저녁식사 후 느긋하게 다시 찾았을 때는 낯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가게마다 밝혀놓은 홍등(紅燈)이 짙은 유혹으로 우리의 시선을 끈다. 천천히, 최대한으로 느리게 몇 번을 돌고 돌아다니다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발길을 멈춘다. 대부분 이곳의 소수민족인 나시족 남녀들이다. 고성안의 동서남북이 마주치는 중심부에 광장이 있었고 그들은 광장의 문화를 즐기고 있었다. 둥그렇게 원을 만들어 손을 잡은 남녀들은 누군가 갖다놓은 낡은 라디오에서 희미하게 나오는 음악에 취한 듯, 선명하게 비치는 홍등 아래서 너울거렸다. 같은 시간, 하늘에선 별들이 이들의 춤사위에 동참하고 있었다.
려강 에서 둘째 날이다. 시내에서 15km 떨어진 곳에 히말라야산맥의 줄기인 옥룡설산(玉龍雪山)이 있다. 해발 5.596m 되는 산 정상에는 만년설이 덮여있고  4,300m되는 곳엔 700년 된 빙하 골짜기도 있다. 동서 길이가 25m 남북의 길이는 35m되는 이 산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옥으로 만든 용이 날고 있는 형상 같다하여 옥룡설산 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관광객들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은 4,700m되는 전망대까지다.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3,306m까지 이동했다. 여기서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4.500m되는 곳에 내린다. 이곳에서 전망대까지 나있는 계단은 온통 눈으로 다져져 있어서 무척 미끄러웠다. 이번 여행에 같이 동참한 친구가 아이젠을 준비해 와서 나에게 한쪽을 벗어 주었다. 어쩜 준비성도 좋다. 이런 것까지 챙겨 오다니 하고 칭찬을 해 주었지만 곧바로 그녀의 허실이 드러난다. 이 설산에 꼭 필요한 것이 선글라스인데 그것을 빠트린 것이다.  너무 눈이 부셔 전망대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커피한잔을 앞에 놓고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설산의 광경도 여유를 부리는 느긋함이 있어 좋았다. 해발이 높은 곳에 오르는 관계로 혹시 있을 줄 모르는 고산증세 때문에 준비해간 휴대용 산소통을 개봉하지 않고 내려오게 되어 다행이었다. 옥룡설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오늘밤만 지나면 떠날 이곳을 벌써부터 그리워하였다.
산에서 내려와 찾은 곳은 려강의 소수민족인 나시족 문화를 볼 수 있는 박물관 이었다.
이곳에선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상형문자인 동파문자(東巴文字)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인간문화재 같은 노인이 관광객이 원하는 문구를 동파문자로 써 주기도 하였다.
어제 밤엔 고성의 골목을 발이 아프도록 돌아다녔지만 오늘은 방법을 달리했다. 고성안의 제일 좋은 요지의 카페거리에 우리나라 여자가 중국인과 결혼하여 운영하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겸 식당이 있다. 가게 밖으로 나열해 놓은 식탁에 친구와 자리를 같이했다. 때마침 나시족 복장을 한 노파가 딸기를 사라고 가져왔다. 입안에서 감도는 새콤달콤한 딸기의 여운처럼 오늘밤의 길고도 짧은 기억들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옆으로 흐르는 물 저쪽에서 누군가가 띄운 종이배가 려강의 낭만을 싣고 우리 앞을 지나 또 다른 기다림을 찾아간다.
도로 하나 사이로 현대와 과거가 동시에 존재하는 려강에서의 2박 3일은 내 삶의 한부분에서 정지된 시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5. 따리(대리) : 또 다른 여행을 꿈꾸며

 
이제 운남성 여행의 마지막을 맞고 있었다.
려강에서 떠난 버스는 따리(大理)를 향해 가는데 내 머릿속엔 며칠동안 잊고 있었던 이것저것들이 떠오른다. 늘 하는 일이지만 평상시보다 좀 더 강도 높게 정리해 놓았던 냉장고는 흐트러졌을 것이고 싱크대엔 온갖 반찬국물과 기름때로 얼룩졌겠고 화장실은 엉망이겠지. 항상 여행 떠나기 전에 하는 약간은 귀찮고 힘든 일들을 돌아가는 즉시 다시 반복해야한다. 여행의 여운을 느낄 시간도 없이… 그러면서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려강서 따리 가는 길은 전형적인 시골길이다. 3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데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전원풍경이 펼쳐진다. 경치라는 게 나름대로 개성에 따라 좋아하는 정도가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지금 이곳, 계단식 밭이 있고 그 옆으로 조용히 얕은 물이 흐르고 간간히 집이 보이고 , 삶의 냄새가 풍기는 이런 곳을 좋아한다.
중간 중간에 보이는 유채꽃밭도 장관이다. 버스 안에서 계속 환호성을 토해내던 일행들은 차를 세워 달라고 요청하였다. 마음 좋은 운전기사는 적당한 곳에 멈추어서 우리들에게 짙은 황토색 흙을 밟으며 유채꽃 속에 파묻히게 하였다.
중띠엔부터 따리 까지 같이 행동한 버스기사는 서부개척시대의 보안관 같은 복장을 하였다. 카우보이모자는 물론이려니와 스웨이드로 된 짧은 윗도리 에 청바지를 입고 넓은 혁대에 권총도 찾다. 물론 진짜 권총은 아니었지만 카이젤 수염에 나름대로 멋을 낸 그의 취향이 재미있다. 과묵해 보이는 그는 따리 까지 가는 동안 꽤 여러 번 차를 세워달라는 우리의 요구에 성가셨겠지만 내색 없이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사람 좋은 운전기사와 현지가이드를 만난 행운도 이번 여행에 감사할 부분 이었다.
운남성 여행의 첫 시발점인 쿤밍에서 서쪽으로 4백km, 미얀마 국경에서 150km 떨어져 있는 따리에 입성하였다. 13세기 몽고에 망하기 전까지 3백년간 따리국(大理國)의 수도였던 곳으로 히말라야 산맥의 줄기인 창산(倉山)19봉이 솟아있는 만년설을 시내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특산물로 유명한 대리석은 돌 자체의 무늬가 아름다워 특별히 가공을 안 하여도 훌륭한 벽걸이가 된단다. 대리석이란 이름도 이곳 지명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따리의 상징인 따리삼탑(大理三塔)을 보러갔다. 이 작고 아늑한 도시 어디에서나 보이는 삼탑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높은 탑인 천수탑(千壽塔)은 당나라 때 지어졌다는데 높이 70m에 16층으로 되어있다. 가운데 있는 천수탑을 호위하듯 양 옆에 있는 두개의 탑 중 하나는 지진으로 인해 약간 기울어 있었다. 그 앞으로는 무척 넓은 유채꽃 밭이 있어 한창인 유채꽃의 노란색이 반사되어 삼탑을 물들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삼탑도영공원(三塔倒影公園)의 연못에선 물에 비친 탑까지 육탑을 볼 수 있었다.
따리에서도 려강과 마찬가지로 따리고성이 있다. 규모로는 려강보다 작았지만 명나라 초에는 지방행정의 중심지였으며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다 한다.
고성의 서쪽으로 얼하이(耳海)호수가 있다. 해발 1.972m 고원에 위치한 바다 같은 호수는 창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모인 곳으로 사람의 귀처럼 생겼다 하여 얼하이(이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이 호수에선 유람선을 타고 떨어지는 낙조와 함께 이번 여행의 지난 일정을 돌이켜 보면서 내 자신도 정리해 보았다.
이제 내 삶도 어느 정도 까지는 온 것 같다. 물론 나이의 숫자로 측정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의 수준으로 말이다. 그래서 더욱 여행에 애착이 간다.
‘일상의 탈출’ 얼마나 유혹적이고 매력적인 말인가?
주로 패키지 여행을 이용하지만 그 속에서나마 더 자유롭게 즐기기 위해 동반자 없이 혼자 떠나는 것을 좋아한다.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여행, 아직도 가고 싶은 곳이 수없이 많다.
어디쯤에서 마감할지는 모르지만 그때까지 열심히 마음속의 지도를 해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