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세이 여행이야기

함돈영-미얀마

  • 작성자 :

    테마세이투어

  • 작성일 :

    2007.11.21

  • 조회수 :

    571


이 글은 서울에 사시는 함돈영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함돈영님은 2004년11월05일부터11월12일까지 8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미얀마 여행을 다녀 오셨습니다. 글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1. 맨발의 자유로움 (바간에서)
 

사각사각 탑 아래쪽에서 마당을 쓸고 있는 빗자루 소리가 어둠 속의 정적을 깬다.
2,000개가 넘는 바간의 탑들 중에 맨 마지막으로 지어졌다는 “밍글라제디”라고 이름 붙은 탑 위에 올라와 있었다.
조금씩 걷혀 가는 먹빛 속에서 평원의 탑들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밍글라제디. '안녕'이란 뜻을 가진 이곳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으며 바간에서의 이박 삼일을 정리한다.
9세기 경부터 시작된 미얀마의 고대 수도인 바간은 중국 ‘한족’의 압력에 밀려 유랑생활을 하다가 미얀마 북쪽에 정착한 “퓨족”에 의해서 구축된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중국의침입으로 근거지를 빼앗기고 분열상태를 지속하던 중 11세기 들어 “아노라타”왕에 의해통일을 이루게 된다.
미얀마 첫 번째 왕인 아노라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통합 정책을 시행하여 바간왕조 를 탄생시킨다. 그 후 바간 왕조는 13세기 후반 몽고의 “쿠빌라이 칸”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도시 전역에 수만 개의 불탑을 만들어 놓았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하여 미얀마의최남단인 “이라와디”강 중부에 위치한 바간은 42평방 킬로의 면적에 2,300여 개의 탑들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쨍쨍한 하늘이다.
'세계에서 가장 와 볼만 한 곳이다' 라고 '마르코 폴로'가 이곳을 지칭하였다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과 함께 어떤 운명을 맞으러 가는 것처럼 서서히 바간의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초록의 평원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탑들 사이로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쉐지곤‘ 사원이었다.
사원엘 들어가기 위해선 우리 모두는 맨발이 되었다. 신분에 관계없이 종교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해야 하며 신성한 곳에 대한 예의라 생각되었다. (이후 우리가 들어 갈 수 있는 모든 사원과 올라 갈 수 있는 탑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간 최초로 지어졌다는 쉐지곤 사원의 화려함과 고대 건축미를 보면서 발바닥에 와 닿는 따갑고 때로는 시원한 느낌처럼 경내에서 만나는 이곳 사람들의 느낌도 그랬다.
부처님 상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과 낯선 이방인을 바라보는 무심한 표정에서 자신의 목적엔 열심히, 내 소관 밖의 일엔 욕심 없다는.... 글쎄,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까?
바간에서 맞는 둘째 날 아침이다.
평원의 사원들 속에 함께 어우러져 있는 호텔의 아침은 야외에 마련되어 있었다. 수채화 같은 초록의 넓은 정원에 하얀 식탁보를 깐 테이블 사이로 풀잎에 맺힌 작은 물방울 들이 발목을 간지럽힌다. 이미 한차례 큰 건(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일출을 보러 다녀왔음)을 하고 난 후라 휴식 같은 아침식사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바간 동쪽 1시간 거리에 해발 1,520m되는 '포파산'으로 갔다.
이십 오만 년 전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산으로 미얀마의 토속신앙인 정령신앙의 본산지다. 이곳에서 우리일행 모두는 각자 한 사람씩 무수리(?)의 부축을 받게 된다. 산 입구부터 정상까지 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곳곳에 많은 원숭이들이 있어 외지인을 알아보곤 간혹 당혹스럽게 한다. 이 원숭이들로부터 관광객을 보호하고 가파른 계단 오르는 것을 도와주는 처녀들이 곁에 와서 거드는 것이다. 물론 도움을 청한 것은 아니다. 어떤 작은 사례를 바라고 하는 것인데 냉정하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우리는 산궁이 되어 한 명씩의 무수리를 거느리고 포파산 정상까지 역시 맨발로 올랐었다.
저녁 식사시간 후엔 사실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 사장님의 엄명으로(한 분도 빠짐 없으렸다!) 피곤한 몸을 추스려 호텔정문으로 나갔더니 마부들이 마차를 대기시켜놓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 낯엔 무수리를 거닌 상궁이었었는데 드디어 밤엔 왕비가 되는구나.)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마차에 올라 편하게 누웠다.사원들이 있는 깜깜한 숲 속으로 들어가는 길로 안내하는 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한 별 들이다.
적당히 흔들리는 마차에 누워 생각해 본다.
과연 나를 이곳까지 불러들인 것이 무엇이었을까? 대충 살아가는데도 피곤하고 귀찮은 일상의 제도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고 싶었겠지.그리하여 몇 시간에 걸려 이곳까지 날아와 지난 천년의 세월의 흔적을 맨발로 휘젓고 다니면서 제도라는 이름의 형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느꼈다.
 
2. 그리운 것은 그곳에 다 있었다. (만달레이에서)
 
미얀마 제2의 수도인 '만달레이'에 도착하였다. 우주의 중심이라는 뜻을 가진 만달레이는 '만다라'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부처님의 예언에 의해 세워졌다는 이곳은 문화 예술의 중심지이며 중국과의 무역통로 역할도 하던 곳이다.
공항에서 '사가잉'이란 작은 도시에 있는 '까웅무도'사원으로 가는 길이다.
한적한 시골길은 내 고향을 연상시켰다.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중학교는 집에서부터 십리 길이었다. 등교길엔 버스를 이용하지만 하교땐 군것질로 날려버린 교통비 대신 흙먼지 폴폴 날리는 신작로 길을 무거운 책가방에 끌려오기 일쑤였다. 그렇게도 멀고 지루했던 그곳을 어른이 되어서 찾아 가 본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세월은 그 흙먼지를 다 마셔 버렸고, 아스팔트로 덮인 그 길 어디쯤에 묻혀버린 꿈 많던 사춘기 시절이, 지금 버스차창 밖으로 아련히 펼쳐지고 있었다.
바간 이 천년세월의 유적이 숨쉬는 곳이라면 이곳 만달레이는 종교와 사람이 일치되어 숨 쉬는 곳이었다. 사원 어느 곳에서든 부처님 상 앞에서 열심히 기도 드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서 일까? 조용한 바간과는 달리 현실감 있게 생동적으로 다가왔다. 이들에겐 신이 상징이 아니라 일상이며, 신을 모시고 믿는 것이 아니라 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은 것이었다. 사원 안에선 기도에 열심인 사람들이 있는 반면 밖은 좀더 현실적이었다.
'다나까'(미얀마 여자들이 얼굴에 바르는 것)를 칠한 여자아이들은 우리에게 “루즈‘를 달래기도 하고 남자아이들은 기념품을 팔려고 졸졸 따라 다닌다.
약간은 성가시럽기도 하지만 이것도 관광의 일부라 생각하고 즐긴다. 한 남자아이는 내가 입고 있던 점퍼를 자기가 갖고 있는 기념품과 바꾸자고 한참을 졸랐다.
'한류열풍'의 바람이 이곳까지 불어 왔는지 그 아이들은 '송승헌'과'송혜교'도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몇 년 전 방영된 '가을동화'를 최근에 이곳에서 방송되었다 한다. 기념품 파는 가게에 걸린 비닐봉투엔 '배용준'의 사진도 새겨져 있었다.
까웅무도 사원의 하얀 돔은 내려 쬐는 빛을 받아  더욱 눈부셨다.
사원 밖에선 살갗을 구울 듯이 따갑던 열기가 경내에 들어서자 커다란 나무그늘이 식혀준다. 우리를 안내하는 '정'가이드님, 검은색의 바닥보다 될 수 있으면 흰 색 바닥을 밟으란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맨 발바닥이 덜 따갑다고... 아직은 오전이건만 햇살 때문인지 사원 안의 나무그늘 밑에서 기념품을 나열해 놓은 여인네들의 표정이 나른해 보인다. 물건을 파는 것인지, 그저 노는 것인지, 그들의 편안하고 천진한 일상이 한순간 부럽기도 하다. 형식과 문화만을 쫓다가 많은 것을 잃고 있는 우리네 삶이 오히려 저들보다 불쌍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치기도 하였다.
트럭의 짐칸을 개조하여 앉을 수 있게 만든 좁은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바짝 긴장하여 '사가잉'언덕을 오른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서 이곳 사람들의 애틋한 삶이 배여 있는 집들을 볼 수 있었다.
햇빛 가득한 마당의 빨래줄 에 널어놓은 옷가지들이며 도란도란 둘러앉은 사람들 모습에서 또 다시 어슴프레 ... 지나간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밀려왔다.

사가잉 언덕에 있는 '우민동제'사원 방문 후엔 만달레이의 '마하무늬'사원에 도착했다.부처님 상에 금잎을 붙이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무슨 소원을 바라는 것일까? 너무도 진지한 그들의 태도에서 그 간절히 소망하는 것들은 이미 보살핌을 받았을 것만 같았다. 불교의 경전이 하얀 대리석에 새겨져 있는 '쿠두두'사원엔 729개의석장경이 눈길을 끌었다. 또한 이곳엔 부처님의 고행상도 모셔져 있어 불교신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만달레이에서 남쪽으로 11km떨어진 '아마푸라'지역으로 갔다. 이곳의 '우베인'다리는 세계에서 가장 긴 도보용 목조다리라 한다. 예전 폐허가 된 왕궁에서 옮겨온 티크 목으로 만들어 졌다는, 1.2km되는 다리의 끝까지 명상에 잠겨 걸어보기도 하였다. 돌아 올 때는 사공이 노를 젓는 배를 이용하여 약속된 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다. '마하간다용‘사원에서 스님들의 아침공양 행렬을 보는 것으로 만달레이에서의 일정은 끝나가고 있었다. 점심식사 후 우리는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인레' 호수로 가기 위해서.        
 
3.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인레 호수에서)
 
해발 1.328m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호수로 가기 위해 인레 공항에서 선착장까지, 그곳서다시 보트를 타고 1시간을 달려 “인레 호수”에 도착하였다. 미얀마에서 가장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어 독특한 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매력적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사는 “인따”족 들은 물 위에 대나무로 집을 짓고 수상경작, 고기잡이, 관광객을 위한 수상시장을 벌여놓고 생활한다.

설레임과 약간의 흥분을 애써 누르며 도착한 호텔(?)은 물위에 지어진 방갈로 형태였다.
두 사람이 한 집씩을 차지하여 사용하게 된 나무로 지어진 방엘 들어서자 재미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모기와 하루살이 같은 벌레들 때문인지 각자의 침대엔 보드랍고 하얀 면사포 같은 모기장을 씌어 놓은 것이다. 천장 위에서부터 삼각형으로 하늘하늘 하게 내려온 것을 보면서 오늘 밤 저 안에서 나, 아랍의 왕비가 되어볼까?
인레 호수의 일몰을 보기 위해 서둘러 온 보람이 있었다. 방 앞의 테라스에 나와 앉아 막넘어가고 있는 해가 물에다 색깔을 입히는 것을 본다. 이젠 물에다 물들이던 색을 주변 산들에게까지도 넘치게 나누어준다.
우리가 이렇듯 지는 해의 끝자락을 잡고 즐기고 있을 때 속 태우는 한 사람이 있었다.
저녁 먹는 자리에서, 혼자 고뇌(?) 하던 마 사장님이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신다. 원래 일정으론 내일 우리가 이곳에서 “양곤”으로 떠나는 시간이 오후로 잡혀있었다. 헌데 항공사의 사정으로 양곤행 비행기가 손님이 없는 관계로 한번만 운행할 예정이니 12시까지 공항으로 가야 한다는 얘기다. 이곳으로 올 때 이미 공항에서 그 얘기를 듣고 여러 가지로 많은 생각을 하셨단다.  
힘들지만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것을 시작으로오후 일정 모두를 오전으로 앞당기자는 결론을 보았다.
잠깐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혼자 고민했을 결정권자(?)의 외로움을 엿본다. 순조롭게 해결된 문제에 고마움의 표시일까?
옆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고즈넉한 호수 위 언덕길에서 정적을 깨뜨리는 노래 소리가 퍼진다.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마 사장님이 부르는 “김 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모두들 조용히 입속으로 따라 부르고 있었다. 이 좋은 곳에서 너무 짧은 시간과 이별해야 한다니...
새벽, 물안개 덮인 호수를 보트는 신나게 달린다. 반사적으로 튕겨오는 물살은 천연 화장수가 되어 얼굴을 적신다. 가슴으로 마주치는 바람이 차갑지만 상쾌함도 함께이다. 희미하게 보이는 물체들이 있다. 부지런한 현지인들이 벌써 일을 시작한 것이다. 외발로 노를 저으면서 고기를 잡기도 하고 농사일을 손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대나무로 만든 밭고랑을 엮어 부력으로 띄운 다음 그 위에 흙을 올려 수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채소와 토마토 등, 수경재배를 하는 것이다.
4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인뗑”이란 곳이다.
미얀마 가이드 책자에도 잘 나와 있지 않다는 이곳에 도착하자 한적한 동네의 집들에서연기가 피어오른다.
이른 아침이라 아침 준비를 하는 것 인가보다.유적지를 향해 가는데 문득 영혼, 신비로움, 명상, 이런 단어들이 떠오른다. 문명을 아는 체 안하고 가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이곳은, 모든 사람들의 유년기의 뜰이며 고향 같았다. 우리가 가는 길을 한 마리의 개가 겁주듯이 짖으며 계속 따라 붙는다. 아마도 이곳 사람들과 다른 문명의 냄새가 자극을 해서였을까?
1,200년 전에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인뗑의 탑들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누가?왜? 이곳에 이처럼 많은 탑을 만들었는지는 지금도 계속 연구 중이라고 한다.  
대나무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나오는데 낚싯대처럼 보이는 대나무 장대를 둘러메고 가는 두 소녀와 마주쳤다. 놀란 듯 한 커다란 눈망울을 보면서 우리 같은 이방인 들 때문에이들의 순수한 삶에 혹시나 얼룩을 남기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뗑에서 나오는 길에 수산 시장과 “파웅도우”사원, 고양이 사원으로 유명한 “응아페 짜웅”사원엘 들려 고양이들의 묘기를 보며 인레 호수에서의 일정을 마감하였다.
이젠 서둘러 공항으로 가야 했다. 어찌 될지 모르는 비행기 사정 때문에 점심도 도시락으로 준비하여 공항의 간이 의자에서 먹었다. 이런 우리들에게 사장님은 미안한 얼굴로계속 이리 저리 뛰어 다니건만, 그게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건만... 사실 조금 죄송한 생각이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아주 비행기가 안 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긴다. 그런 일들을 해결하면서 또 불편함을 겪으면서 하는 여행이 결국엔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이벤트는 생기지 않았다.애초에 예약되었던 그 시간에 순조롭게 비행기는 도착하였고, 우리들을 “양곤” 비행장에 얌전히 날라다 놓았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호텔이 있는 시내로 진입을 한다. 지난 며칠동안 잊고 있던 문명세계의 화려한 불빛에 눈이 시리다.
그러나 그것들도 어쩔 수 없는 내 삶의 동반자 인 것을.   
 
4. 다시 문명의 세계로 (양곤에서)
 
양곤은 미얀마의 수도이며 미얀마로 들어오고 나가는 관문이다.
한 때 동방의 정원 도시로 알려졌던 양곤은 '알라웅파야' 왕이 1755년 미얀마 남부 지방을 정복 한 후 '다곤'이라 불리는 지역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전쟁의 종식'이란 뜻을 가진 '양곤' 이란 이름은 1885년 영국군이 미얀마를 통치한 후에는 '랭군'이라는 영어식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 미얀마에서 생산되는 목재와 보석류를 강탈하기 위한 항구도시로 건설한 것이 양곤 역사의 시작이라 하였다.
우리가 묵는 호텔 가까이에 “쉐다곤”사원이 있었다.
미얀마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며 종교, 역사, 문화의 총 집결체라고 할 수 있는 2,500년 전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지어졌다 한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부처님의 머리카락이 모셔진사원으로 알려져 있어 미얀마 사람들 뿐 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 불교 신자들이 찾는 곳이다.
황금빛의 광채가 눈부신 사원은 수 킬로미터 반경에서도 보이는 가히 세계적인 종교 건축물로 손색이 없었다.
오늘 오전 관광이 끝나면 미얀마를 떠난다. 아침 일찍 어제 밤에 멀리서 바라보던 쉐다곤 사원으로 갔다. 경내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사원의 화려함보다는 이곳을 찾아 기도하는 사람들이 더 눈길을 끈다. 넓은 사원 어느 한 구석이고 빈곳이 없을 만큼 곳곳에서 경건하게 무릎 꿇고 있다. 이슬람 신자들이 “메카”를 최고의 성지로 찾는 것처럼 미얀마 사람들의 최고의 성지가 이곳인 것이다. 바간에서 우리를 안내하였던 현지 가이드 '쉐쉐'도 열심히 돈을 모아 이곳에 올 거라고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이 기도만 하러 오는 것이 아니었다. 젊은 사람들은 데이트를 하러 오기도 하며 잠 잘 곳을 찾아온 것인지, 아니면 기도를 드리다 잠깐 잠이 든 것인지 그늘진 곳엔 낮잠에 빠진 이들도있었다.아름드리 보리수나무 그늘에선 도시락을 펴놓고 있는 가족도 보인다. 이들에겐 삶이 공기와 함께 하듯이 종교도 삶의 일부이며, 사원은 신성한 곳이면서 내 집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종교에 대한 그들의 절대 믿음과 신앙심에 무신론자인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점심 후 비행기 시간까지 약간의 여유시간이 있었다.
시내에 있는 “인야” 호수로 갔다.
호숫가의 찻집에서 한가로이 앉아 지난 일주일의 여행 정리도 하면서 때마침 이곳의 영화를 찍는 미얀마 배우들을 보기도 하였다. 미얀마 최고의 배우들이라고 하지만 우리와 다른 문화 탓인지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나라 '미얀마'
여행 첫 만남에서 현지 가이드가 한 말이 생각난다. “유적도 좋지만 순박한 이곳 사람들과의 만남에 관심을 가져 보라고”. 비록 많은 사람들과 직접 접촉은 못 하였지만 그들의근처를 맴돌면서 전해오는 그 무엇을 느낄 수 있었다. 초라한 모습이지만 분수처럼 뻗어 나오는 삶의 진정한 풍요를. 이방인들의 눈에는 가난이 웅크리고 있는 미얀마지만, 절대빈곤의 끝자락에서 태어나 약간의 궁핍 생활을 경험한 나에겐 가슴에 와 닿는 여행지였다.  이제는 다시 혼잡하게 뒤엉킨 우리네 삶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을 정상으로 알고 살아온 57년이란 세월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