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원-인도/네팔
작성자 :
테마세이투어
작성일 :
2007.11.21
조회수 :
844
![]() 이 글은 서울에 사시는 유승원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유승원님은 2006년1월08일부터 1월20일까지 13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인도/네팔 여행을 다녀 오셨습니다. 글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
전식 | |||||||||||||||||||||
| |||||||||||||||||||||
지난 터키일주는 예고도 없이 굉장한 일행들과 만난 탓에 흥겨운 놀이이었습니다. 차후 여행은 보다 숙연한 마음을 갖고자 인도/네팔 행을 선택했습니다. | |||||||||||||||||||||
본식 | |||||||||||||||||||||
| |||||||||||||||||||||
<네팔> 아직 왕이 살고 있고 그 왕이 백성에게 못 되게 굴어 반군들이 봉기를 들었다합니다. 한창 항쟁기운이 돌고 있을 즈음에 우리는 네팔 관광을 시작했습니다. 해외여행에 처음 입문하던 그날부터 단 한번도 안내원 설명을 제대로 들은 적 없이 후미진 곳에서 기웃거리던 아초답게 네팔 사원들 이름이며-사원에 그려진 제3의 눈이 무얼 의미하는지 본 글을 쓰는 순간조차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무언가 빌 목적으로 사원에 찾아온 현지사람들 모습이 그 옛날 서울 달동네 시절에 할머니가 손주 녀석 잘 되라고 축원하던 잔상이 떠올라 그랬는지 살가웠습니다. 아초에게 네팔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잃어버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막연하게 떠올리며 그리워할 수 있는 쓸쓸함이 깃든 곳이었습니다. 별밤하늘이 싸했던 마루마을 나가르콧은 물론이고, 카트만두 곳곳에 먼지로 뒤 덮인 승원(僧院)에도, 순박한 사람들과 수다 떨며 긴장을 풀던 순간에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명상음악이 울리던 장터에도, 예고 없이 마을 전체가 정전되는 모습조차도 지친 시인(市人)이 쉬고 갈 만한 자리가 넉넉해 보이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촌스러움이 잘 어울리는 네팔이었습니다. ‘촌스러움’의 반대의미를 ‘인위적인’으로 재해석하며 살아가는 아초답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화장하는 과정을 묵묵히 바라보는 사람들 표정에서 숙연함을 느꼈습니다.
마루마을 나가르콧에는 맑은 공기와 맑게 솟아있는 산봉우리와 맑은 아이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오체투지 수행하던 노승 이마에 맺힌 굳은살이 불상 이마에 박힌 보석 같았습니다. <인도> 인도는 거리동물원 같았습니다. 인도는 차량박람회 같았습니다. 인도는 각종 천연비료가 길바닥에 그득했습니다. 인도는 자연 친화력이 뛰어났습니다. 강물하나로 목욕하고, 빨래하고, 배를 띄우고, 양치질하고, 차 끓이고, 화장까지 치렀습니다. ![]() 글로 옮겨보니 그나마 나름의 질서가 생겨 보이지만 직접 겪은 인도 거리는 무질서야말로 차라리 질서였습니다. 게다가 도시 전체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메케한 냄새로 절어있었으니 관광환경치고는 고약한 것이었지요. 인도를 겪는 내내 머리에 공명이 울리고 가슴이 울컥 했습니다. 인도사람들 사는 모습이 딱해서라기보다는 그간에 겪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괴팍하고 이질적이라 감정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격한 감정은 적대감이나 두려움을 불러올 법 했습니다. 그러나 자명한 것은 종교, 계급, 관습, 성차별, 가난과 거지들로 수천 년 이어온 인도가 이방인이 잠시 머무는 동안에 바뀔 리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바뀔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자신(외지인)뿐이었습니다. 생각은 멈추고 느낌으로......무얼 하려고하기보다는 느낌으로 느끼고 느낌으로 울며, 땅과 빛과 사물을 그냥 그렇게 바라봐야 할 인도였습니다.
일행 한분이 결국 혀를 찼습니다. 이놈의 나라는 어딜 가던 사람뿐이야! 가끔 논밭에 유채 꽃밭이 눈에 띄었지만 곧 바글거리는 사람들로 시야가 가렸습니다. 인도의 진정한 관광자원은 군중이었습니다.
릭샤 기사들은 생활 속 달인이었습니다. 전후좌우에서 각종 차량들이 압박했으나 접촉사고 없이 잘도 달렸습니다.
어느 작은 마을에 집들이 참 예뻤습니다.
마치 난민과 연합군을 보는듯한 진풍경은 이색적인 부교 덕분이었습니다. 타국문화기초지식에 전무한 아초에게 바라나시는 장면 하나하나 농축된 주스처럼 진했습니다.
더는 숨길 것 없이 적나라하게 살아가는 저들의 모습도 서글펐으나 있는 척, 아는 척, 기쁜 척, 슬픈 척 살아가야하는 내 모습도 서글펐습니다. 전날 한차례 홍역을 치러 그랬는지 새벽에 다시 찾은 가트는 남대문시장처럼 편했습니다. 혼자 강변을 거닐던 아초는 목적 없는 떠돌이였습니다.
버스가 잠시 멈춰 서자 길가에 살던 한 아이가 달려왔습니다. 구걸을 할 요량처럼 보였으나 끝내 버스 문이 열리지 않자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상징보다는 가학에 가까운 에로틱사원 조각물들. 마치 공개적으로 간음당하는 듯한 이 여성들이 설령 접신한다고 해서 남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을까요............자이라 사원의 건재함은 인간사에 뿌리 깊게 유지해온 불평등(성별이든 인권이든)에 관해 역설하는 듯 했습니다. ??
인도 건축물하면 의례히 서울역이나 시청 건물처럼 돔 인줄 알았으나 앙코르와트와 흡사한 모습 외에도 다양한 양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관광으로 얻을 수 있는 대가 중에 하나는 편견 깨기에 있었습니다. 뭐 대단한 편견은 아니었지만요. 오차에 거의 다다를 즈음 철길 앞에서 버스가 멈춰 섰습니다. 기차가 지나가겠거니 했는데 승객들이 한창 기차에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진풍경이었습니다.
새벽에 오차 마을을 둘러봤습니다. 낮에는 장터 밤에는 노숙자 연관으로 쓰이던 곳에서 한 아이가 아초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아이는 영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사진 찍(히)기가 재밌는지 언니 동생을 불러 모으더니 곧 엄마아빠 할머니 이모(아마도) 등등 가족 모두를 모아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10년 20년 뒤 이 아이들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궁리해봤습니다.
낮에 본 타지마할은 거대한 석고덩어리 같았습니다. 일몰이나 일출 혹은 안개의 힘을 빌려 쓸 처지가 아니었기에 다른 자연물을 빌려 타지마할을 담았습니다.
타지마할 정원을 다듬던 일꾼들 새참 먹는 모습에 정감이 갔습니다.
여인네들 맨발을 보며 묘하게도 자유롭다 여겨졌습니다. 문화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 상승효과를 이룬 거겠지요. 많은 젊은이들이 인도에 머물면서 해방감을 느끼듯이 말입니다.
여대학생들의 생기발랄한 웃음을 보니 마음이 싸했습니다. | |||||||||||||||||||||
| |||||||||||||||||||||
여행중 유승원님이 그렸던 스케치 | |||||||||||||||||||||
| |||||||||||||||||||||
| |||||||||||||||||||||
| |||||||||||||||||||||
후식 | |||||||||||||||||||||
| |||||||||||||||||||||
언론 보도 및 각종 여론(?)에 의하자면 인도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도인의 행복지수와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오지원주민의 행복지수 간에 분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순수한 자연 속이 아니라 피지배, 탄압, 부조리, 무지 속에서 야기된 웃음은 체념에 가깝다고 봅니다. 두 차이점을 동일시화한 여론의 본심이야말로 신비로웠습니다. | |||||||||||||||||||||
| |||||||||||||||||||||
껌 | |||||||||||||||||||||
| |||||||||||||||||||||
한달이 지나도록 머리에 온통 사람들로 우글거리던 즈음에 새 여행소식지가 도착했습니다............아마도 본 글이 실릴 즈음에 아초는 유채꽃밭을 거닐며 또 다른 공상에 빠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상 남다른 경영철학이 돋보이는 사장님 이하 여러 운영진들께 바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