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란-이집트
작성자 :
테마세이투어
작성일 :
2007.11.22
조회수 :
7392
![]() 이 글은 박길란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박길란님은 2006년1월04일부터 1월12일까지 9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이집트 여행을 다녀 오셨습니다. 글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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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한 땅, 이집트 | |||||||||||||||||||||
이집트 여행 일정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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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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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3일(출발 전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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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아 ! 엄마 아빠 이집트 간다 ” 군대 간 아들의 전화를 받고 재빨리 내 말만 했다. “이집트 ? 무슨 보물 찾으러 ? ” ‘코엘료가 많은 사람들 고정 관념을 깼다니깐.....’ “야 ! 엄마한테 너 보다 더 한 보물이 어디 있다고 이 나이에 무겁고 힘든 짓 하겠냐 ?” “별 보러 갔다 올게” 서로 농담인지 진담인지 선이 불분명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집트를 현실화 해 갔다. 이집트 ! 내 어린 시절 <새 소년>이란 잡지를 보면서 내가 살고 있는 이곳보다 더 넓은 다른 세상이 있고, 또 그 세상에는 신기하고 기이한 것들이 많다고 인식했다. 그 잡지는 세상을 향한 내 창이었다. 그 중 으뜸이 이집트였다. 거대한 피라미드, 미이라의 저주, 신기한 벽화, 클레오파트라의 미모까지.... 물리지 않는 신비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가고 싶다는 생각은 못한 것 같다. 재미는 있었지만 그냥 가상의 세상, 존재 자체는 믿지 못한 것 같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제법 똑똑해(?)지면서, 심심한 중,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가보고 싶은 곳, 써서 내라고 종이를 돌리면 1. 스위스의 산과 호수. 2. 이집트의 피라미드. 3, 페루의 맞추피추. 라고 아주 야무지게 구체적으로 써서 냈다. 이런 연유로 이집트는 나에게 있어, 세상에 눈 뜨기 시작하면서 갖게 된 어린 꿈의 완성지인 곳이다. 1번과 3번은 갔다 왔으니.... 그러나 대상이 피라미드가 아니라, ‘사막을 보러가서 피라미드를 보고 오자’로 바뀌었다. 피라미드야 내가 보지 않아도 봐 줄 사람들 많고, 보기도 전에 식상해 버렸다. 지금은 전무한 풍경에 모두가 매혹되는 사막이 보고 싶고 보고 싶다. 정말 오랜만에 소풍날 잡아놓은 아이처럼 여행이 기다려지고 설렌다. 15시간의 비행시간도 한 입에 다 먹어 버리겠다는 각오도 서고, 그야말로 용기 백백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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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4일 (제 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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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서 올라오신 여선생님 네 분이 좀 늦게 나타나고, 오후 7시 미팅에 맞추어 모두 모였다.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다. 남자 4명, 여자 14명에 강 과장까지 19명이다. 부부 네 팀 중, 나랑 2년 전에 남미 여행을 함께 한 김한종 교장 선생님도 계신다. 남미 여행길에 다음에도 꼭 같이 여행 계획 맞추자고 말한 것이 실현된 것이다. 건강하신 두 분을 뵈니 가슴이 벅찼다. 사모님은 세월이 거꾸로 간 것처럼 더 활기차 보이시고 젊어지셨다. 비행기는 예정된 시간보다 5분 늦게 밤 9시20분에 이륙했다. 자리가 창 쪽이라 오랜만에 서울의 야경을 봤다. 황홀하기까지 한 서울의 불빛은 영화 속 미래의 도시처럼 빛나고 있다. 지금부터 서쪽으로 서쪽으로 약 7,000km를 날아 갈 것이다. 어제 큰 소리 쳤지만 아무리 비행기를 타도 나의 비행기 타는 기술은 진화도 안 되고 노하우가 축척되질 않는다. 정말 지겹고 끔찍하다. 한비야는 비행 거리에 맞추어 적당한 알코올 도수의 술이 최고라지만, 나는 술을 마시면 멀미 할 것처럼 어지럽고 속도 불편해져 더 상황이 나빠진다. 아쉬운 대로 책 읽는 것이 시간 죽이기는 그만이지만, 많이 피곤하다. 옆에서 마음만 먹으면 무한대로 잘 수 있고, 쉽게 잠에 빠지는 신랑의 선천적 재능이 부럽고 얄밉다. 두바이에는 현지 시간으로 03시 경에 도착했다. 10시간 남짓 탔나보다. 밤하늘에서 본 두바이는 생각보다 석유의 나라답지 않게 불빛이 소박하다. 라스베가스나 부에노스아이레스처럼 충격적으로 부상 할 것이라고 기대 했었는데...... 공항도 맥없이 크기만 했지 짜임새가 없다. 10시간이나 갇혀있다 나오니 온 몸의 근육이 환희를 표한다. 세수도하고 양치질도 하고나니 날아 갈 것 같다. 홍선희 선생님이 다가와 남미 여행기를 받아 보았다면서 같이 여행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해주니 나도 십년지기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메일로 서로 군대 간 아들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이였다. 1시간 정도 쉬고 4시15분에 출발 6시45분에 카이로에 도착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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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5일 (제 2일) - 이해 받기를 거부한 도시, 카이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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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연 아침을 가르고 비행기는 나일의 범람원에 내려앉았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선 공항은 황무지에 낮선 이방인의 얼굴처럼 우뚝 서 있고 주변은 어수선하고 엉성하다 관광 수입으로 먹고 사는 나라의 공항치고는 너무 심하다 싶다. 비행기에서 내려 대기 중인 버스에 오를 때까지 현지 여행사에서 나온 아랫배가 볼록한 직원이 통과하는 곳마다 서 있는 경찰에게 슬쩍 슬쩍 돈을 건넨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지도 않으니 정말 관행인 것 같다. 벌써 이집트의 얼굴을 반은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처음에는 ‘좀 지저분하네.’ 하며 보다, 도시 깊숙이 들어가면서 골목골목에 쌓여있는 쓰레기를 보면 한숨과 탄식이 나온다. 그러다 천 년을 치워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을 인정하게 되면, 친청 집에 친구를 데리고 갔을 때, 온통 어지럽혀진 집 꼴을 보고 당혹해하는 낭패감과 똑 같은 감정이 생겼다. 사람 마음은 다 비슷한지 바로 뒤에 앉아 계신 교장 선생님이 처음에는 “아! 쓰레기, 아! 쓰레기 ”하시더니 종내는 연민이 깃든 괴로운 목소리로 “쯧쯧.... 좀 치우고 살지....”하신다. 1960년대에 이 나라에 온 일본 고고학자가, 첫 번째로 받은 충격은 카이로의 파리 떼라고 말했다. 또 벽도 새까맣고 심지어 노상에 둔 양고기 덩어리도 새까매서, 사람이 지나가면 벽도 하얘지고 칼을 갖다 대면 붉은 고기 덩어리가 나타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난 지금 제대로 이집트를 대면하는 정식 코스를 밟고 있는지 모르겠다. 심란한 심정으로 밖을 보고 있자니 너무도 빨리 <카라파>와 대면하게 되었다. 카라파란 우리 표현대로 하면 공동묘지다. 그러나 카이로의 공동묘지는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장소로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곳이다. 넓은 묘지 부지는 계획된 도시처럼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가족묘 형태의 가옥이 줄지어 서 있다. 이 집 내부 지하에 유골이 안치되어 있고, 그 위에 묘를 찾은 가족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무덤지기와 가족들이 살았다. 그러다 도시가 팽창되고 인구가 늘면서 1800년경에는 카이로 전체 인구의 4분의 1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지방에서 유입되는 사람과 도시의 하층민이 주거비도 들지 않고, 일터와의 접근성도 좋아 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다. 카이로 전체인구 1200만 명 중 이곳 인구가 250만 정도라니 놀랍다. 우리 정서로는 집안에 유골이 있다면 미쳐 나갈 정도로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관념과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이 삶의 연장이고 나도 언젠가는 그들과 같아질 것이며,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아니 어떤 면으로는 심적으로 의지 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한다면, 못 살 것도 없을 것이다. 터키의 인류 최초 집단 거주지 <차탈회윅>에서도 자신의 집 지하에 조상의 유골을 묻고 그 기를 받으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앙카라의 <게두콘두>(달동네)와 같이 이곳도 이슬람 사회의 온정주의가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생각된다. 가난한 이웃이 불법으로 집을 짓거나, 밀고 들어앉으면 주인이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사회적 관습 아닐까 ? 이들의 집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내 개인적인 관심이니..... 더구나 현지 가이드로 나온 에즈딘에게 실례가 될지도 몰라 참았다. 한국말을 겁나게 잘 하는 에즈딘은 나이 30대 후반 정도의 키가 크고 잘 생긴 이집트 사람이다. 남자에다 현지인 ! 아주 대박이 났다. 일찍 뜻한 바가 있어 한국까지와 연세어학당에서 2년 정도 수학을 했단다. 우리는 곧장 멤피스로 갔다. 일정을 조금 바꾸어 역사 오래된 순서대로 유적을 보기로 했다. 도심을 벗어나니 녹지가 보이고, 잘 생긴 종려나무가 어우러져 조금 눈이 아니라 마음이 편해졌다. 멤피스는 이집트가 상 이집트(나일 남부 상류), 하 이집트(나일 북부 하류)로 나누어져 있다가, 메너스 왕에 의해 처음으로 통일 왕조가 만들어지면서 건설된 최초의 수도다(BC 3000년경). 상, 하 이집트 접경 지역에 건설된 이 도시는 지금은 그 당시 유적으로 남은 것이 거의 없다. 단지 멤피스 박물관에 누워있는 람세스 2세의 석상을 보기위해 관광객들이 찾을 뿐이다. 박물관 뜰에는 BC 1200년경에 만들었다는 대리석 스핑크스, 석관, 제단, 여러 석상이 서 있다. 박물관 이층 건물은 오로지 람세스 2세의 집으로 지어진 것 같다. ![]() 전체 모습을 보기 위해 이층에 올라 애를 써도 카메라에 다 담기 힘들다. 박물관 건물은 석상이 누운 그 자리를 중심으로 지었단다. 하기야 저 파라오를 옮긴다거나, 세우는 것 보다 쉬운 방법이지 싶다. 람세스 2세(BC 1279~1212)의 재위 동안에 만든 것이라면 족히 3000년은 넘었다는 이야기인데 너무 깨끗하다. 부처님 같은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자신의 인장을 의지 강해보이는 손으로 굳건히 잡고 있는 모습은 파라오 중의 파라오라는 명성답게 위풍당당하다. 우리는 강 과장이 사온 고구마와 땅콩을 먹으면서 사카라로 이동했다. 사카라는 왕조 시대의 공동묘지 정도로 기억하면 된다 물론 신왕조 시대에는 룩소르의 <왕들의 계곡>에 높으신 분들이 묻히기도 했지만 기록에 의하면, 프톨레마이우스 왕조에도 이곳을 무덤 부지로 이용했다고 한다. 사카라 지역에 들어서니 저 멀리 조세르 왕의 6층 계단식 피라미드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피라미드가 나에게 아무 감흥을 주지 못할 걸 !” 뇌에 각인이 될 정도로 사진을 보아와서인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물건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먼저 귀족들의 묘를 보기로 했다. 두 곳을 보기로 했는데, 실내가 너무 어두워 솔직히 충분하게 구경 할 수가 없었다. 인공조명 없이 환기구 같은 곳에서 흘러들어오는 자연채광에 의지해 이 근사한 부조물을 감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거기다 통로도 좁아 많은 인원이 몰려다니기도 바빴다. 부조는 도드람이 그리 확실치 않은 양각 형태로 아주 세밀하고 깨끗했다. 채색이 남아있는 곳은 정말 아름답다. 왕조의 묘와 달리 개인의 기호에 따라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 그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여러 장면들이 새겨져 있다. ![]() 궁에서 벌어지는 파티 장면, 묘의 안주인이 제사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은 장면, 아주 단란한 가족사진을 찍어 놓은 것 같은 장면 등이 인상적이었다. 또 물 속 하마가 아주 사실적이면서도 귀엽게 표현되어 있었는데, 5,000년 전의 나일에는 하마가 흔한 동물이었나 보다. 너무 정신없이 지나다녀 두 묘의 이름도 기억 못 하고 계속 여유를 갖지 못해 안타까워하다 나온 것 같다. “첫 날부터 장난 아니네.” 이 묘들도 지상의 부속 건물은 다 사라졌지만 유골이 안치되었던 지하 묘실은 바람에 날려 온 모래에 묻혀 있어서 지금까지 보존되어졌다. 발굴이 되지 못해서이지 이 허허벌판의 사막 밑에는 아직도 수많은 묘실이 숨어 있을 것 같다. 이곳의 역사를 생각하면...... 다음으로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갔다. 피라미드로 가기위해서는 장제전을 통과해야하는데 이 건물이 놀랍다. 5,000년이라는 세월이 거짓말인 것처럼 깨끗하고 건물에서 위엄이 느껴졌다. 물론 완벽한 형태는 아니지만, 황금빛 사암은 세월의 두께가 오히려 보호막이 된 것처럼 사막의 바람을 잘 버티어 냈다. ![]() 건물의 모서리 부분은 돌을 입체적으로 짤라 앞면과 옆면을 하나의 돌로 연결한 기술이 범상치 않다. 우리는 흔히 계단식 피라미드에만 열중하지만 이 피라미드는 여느 다른 피라미드와도 다른 모습이었다. 피라미드를 가운데 두고 여러 신전을 거느린 외부와 차단된 높은 벽으로 둘러 쌓여있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 크기가 남북 500m를 넘는다고 한다. 조세르 왕하면, 꼭 같이 등장하는 유능한 재상 임테호프는, 이 피라미드를 설계하고 건설하면서 완벽한 내세의 세상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우리가 복도를 통과해 내세의 세상으로 들어섰을 때, 임테호프의 뜻대로 피라미드가 우뚝 솟아있고, 작열하는 태양조차도 지금까지 내가 속했던 세상의 빛이 아닌 다른 냄새의 공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피라미드는 멀리서 보면 볼품없고 엉성해 보이지만 바로 밑에 서니, 그 거대한 규모가 실감 난다. 거기다 다시 한 번 그의 나이를 떠올리면 존경심이 생긴다. 65m에 달하는 규모도 그렇고 돌들 하나 하나가 오랜 세월에 풍화되어 진흙 덩어리처럼 뭉개져 있다. 우리는 흩어져 사진도 찍고 자신들의 관심거리를 찾아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 다시 시내로 들어와 기자의 피라미드가 보이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올드 카이로 지역으로 갔다. 이 지역은 유난히 남녀 공히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 거리 풍경이 이채롭다 .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의 한 장소로 이동한 것 같아 흥분 된다, 올드 카이로는 도시의 남부 지역으로 바빌론 성채로 둘러싸인 곳이다. ![]() 유대 교회와 콥트 교회들이 몰려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인구의 94%가 무슬림인 사회에서 그 명맥을 이어온 역사가 눈물겹다. 우리는 먼저 유대 교회로 갔다. 나는 이집트에 유대 교회가 있다는 자체에 놀랐다. 이 나라 역사를 봤을 때 아랍 국가 중에서도 앞장 서 이스라엘 탄생을 반대 했고, 시나이 반도를 두고 전쟁도 많이 했던 나라이다. 에즈딘 만해도 이스라엘을 도둑으로 생긴 나라라고 단정 했고, 그 나라와는 대화 자체가 힘든 상대라고 했다. 그런데 “교회가 있다고 ?” 교회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외관은 하얀 건물로 여느 서방 교회와 차이가 없어 보였다. 내부는 생각보다 좁고 고색창연한 그러나 심히 우울한 대리석 기둥이 서 있다. 그리 기억에 남지 않을 풍경이다 이 교회 건물의 시작은 4세기 정도까지 올라가지만 내부 건축물은 12세기에 다시 재건 된 것이란다. 외관은 이스라엘과 충돌이 있을 때마다 공격을 당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곳은 모세가 살았던 장소이고 출애굽 때 유대인의 출발 장소였다니, 유대교로서는 포기 할 수 없는 특급 성지 일 것이다. 같은 이슬람 국가지만 터키에서 본 에페소의 <성모 마리아 집>은 성스러운 기운과 성지로서 사랑받고 있는 정서적 안정으로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기력이 쇠잔 할대로 쇠잔해진 서글픈 이 교회의 운명이 안타깝다. 지금도 100여명의 신도가 종교적 순결을 지키고 있단다. ![]() 이곳도 사진 촬영금지다. 정말 짜증난다. 이집트의 기독교인을 콥트라고 한다. 이집트가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으니 기독교가 받아들여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비잔틴 정교회에 속했던 이집트 기독교가 451년 제 4차 <칼케돈 종교 회의>에서 이단으로 선언되면서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다. 비잔틴 정교회는 예수를 신이며 인간이라는 양성설을 주장하는 반면, 이집트 기독교는 예수가 원래는 신성을 가졌지만 육체를 가지는 순간, 인성만을 가진다는 단성설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주장을 읽으면서 무릎을 칠 정도로 이 명쾌한 논리가 마음에 들었다. 이때부터 이집트 기독교, 즉 콥트교는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 콥트교력을 따로 쓰고 대주교도 따로 뽑았다. 현재 대주교는 쉐누다 3세인데 이집트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한 마가의 117번째 후계자로 불린다. 이 콥트교가 641년 이슬람이 들어오면서 또 커다란 시련을 맞는데, 비무슬림에게 부과되는 무거운 세금 때문에 국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해 버렸다. 이런 상황에도 어려운 신앙생활을 이어온 콥트교인이 약 150만 정도가 된다. 에즈딘 설명에 의하면 콥트교인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아 고급 상권을 가진 사람과 지식인층이 두텁단다. 또 이집트에서는 무슬림과 콥트교인들이 서로 상대의 종교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으며,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거의 없단다. 내가 이집트에 간다고 했을 때, 친구 한명이 “성지 순례 팀하고 가니 ?”하고 물었다. 나는 부정을 하면서도 내심 놀랬다. “아니 ! 이집트에 왠 성지 순례 ? 이집트를 통해 이스라엘로 넘어가는 사람이 많나 보지 ?” 그러나 이곳에 와서 그들의 역사를 들여다보니, 친구의 말도 이해가 가고, 공항에서 본 수많은 성지 순례 팀도 이해가 된다. 그들은 우리 같은 유적 탐방이 목적이 아니고, 이 올드 카이로와 모세의 흔적을 따라 시나이 반도의 성지를 찾는 것이다. 아부사르 교회는 앞에 본 유대 교회에 비해 볼거리가 있다. 제법 많은 교인들이 웅성거리고 교회안의 13개의 기둥이 눈길을 끈다. 이 기둥은 예수와 12제자를 상징한다는데, 하얀 대리석 기둥 중에 한개는 검은 색이다. 예수를 배반한 유다를 의미한단다. “그러니 순간의 판단이 평생 아니 영원히 간다니깐....” 그리스 정교회에 비해 성화와 성물이 그지없이 소박하다. 헤롯 왕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 온 예수 일행이 3달 동안 머물렀다는 동굴은 출입금지 푯말이 붙어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교회들과 민가가 밀집되어 있는 골목 골목은, 아주 좁고 미로 같지만 세월의 향기도 묻어나고, 주민들의 인상도 푸근해 정겹다. 이제 호텔로 돌아가 좀 쉬었다가 디너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난 쉬지 말고 콥트 박물관을 보았으면 좋겠다. 쉐라톤 호텔 8층에서 내려다 본 나일은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 빌딩을 잔뜩 지고 유유히 흐르고 있다 배를 타기 전에 칸 엘칼릴리 시장을 구경하겠다고 들어섰다가, 퇴근길 교통체증과 딱 맞닥쳐 버스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시장 구경도 못하고 디너 쇼 예약시간도 늦추고 카이로 시내를 한바퀴 돌기로 했다. 고가 도로 위에서 내려 본 시장 통은 7,000만 이집트 전 인구가 다 모인 것처럼 북적대고 활기가 넘친다. 고가도로를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를 돌고야 좀 이상하다고 느꼈더니, 그 사이 에즈딘이 시장을 다녀왔단다. 강 과장은 머플러를 한 장씩 돌리면서 내일 사막 들어가서 꼭 필요하니 챙겨 나오란다. 강 과장의 마음 씀씀이가 끝이 없다. ![]() 저녁은 뷔페로 하고 식사 끝나기가 무섭게 벨리댄스가 시작되었다. 붉은 의상에 삼단 같은 머리채의 벨리댄서는 10대 후반 내지는 20대 초반 정도로 어려 보인다. 터키에서 아주 근사한 댄서를 보아서인지 별로 흥미가 없다. 이북 어린아이들의 만들어 붙인 웃음과 너무나 흡사한 미소가 여~~엉~~. 신랑도 처음에는 “귀엽네 ”하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지겹네”하며 웃는다. “영감 ! 많이 기대 했을 텐데 안됐구려” 후후후.... 곧 탄누라 댄스가 시작되었다. 나는 처음 강 과장이 수피 댄스를 볼 수 있다기에 터키의 수피 댄스를 떠 올렸는데, 그게 아니다. 이집트에서는 이슬람의 전도 내지는 신과의 접선을 위해 추는 춤을 탄누라 댄스라고 한다. 이 춤을 종교적 목적으로 추면 수피 댄스 라하며(주로 흰옷을 입는다 ), 여흥의 춤으로 추면 <이스티 으라디>라고 한다. ![]() 터키의 어린 소년들이 열심히 열심히 돌면서 신을 갈구하던 엄숙함에 흠뻑 빠졌던 메블라나 명상춤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 땀을 뻘뻘 흘리며 돌고 있는 턱 수염 자국이 시퍼런 이 아저씨에게 도저히 집중이 되질 않는다. 우리는 살짝 빠져나와 갑판으로 올라갔다. 밤바람이 제법 으스스하다. 카이로의 밤 나일은 화려한 야경은 아니지만 결코 품위를 잃지 않은 멋이 있다.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 중 하나이며 지금도 변함없이 한 나라의 생명줄이 되어 도도히 흐르는 강 위를 나도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벅차오른다. 에즈딘이 혼자 앉아있었다. 혹시 홀로 있고 싶어 하는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미안해하면서 말을 걸었다. 몇 마디 물어 보려던 것이 이런저런 이야기로 한 없이 길어졌다. 주로 내가 질문하는 형태지만.... 이집트의 작년 대통령 선거 이야기, 무바라크 대통령 이야기, 이스라엘 이야기, 콥트교 이야기, 수단 난민 이야기, 한국 관광객 이야기..... 에즈딘은 구사하는 단어가 한정되어 있어 충분한 의사 표현이 되지는 못했지만 부족한 부분은 듣는 사람이 채우면 될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대단했다. 외국어로 일상생활에 불편 없는 정도는 할 수 있지만 한 주제로 이야기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머리가 좋고 유하면서도 단단한 내면이 있는 사람 같았다. 대화를 나누면서 이런 사람이 가이드 일 말고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고급 인력이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본인은 이 일이 좋고 특히 손님이 거의 없는 여름철에는 자기만의 시간이 충분해 책도 실컷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생김새도, 이렇게 하는 소리도, 학자 타입이니 내가 더 속이 터진다니깐 ” 에즈딘과의 대화에서 꼭 옮기고 싶은 이야기는 한국 관광객에 관한 것이다. 한국에서 이곳을 오려면 많은 돈을 지불하고 왔을 건데 ‘저 사람은 왜 왔을까 ?’ 싶은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무엇하나 제대로 흥미 갖는 것도 없고, 이동 중인 버스에서는 잠만 자는 사람, 자신은 직업상 그 사람들을 보면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할 때, 절망감과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껴 슬프단다. 그러면서 농담처럼 테마세이투어와 한진 정도의 손님만 받았으면 좋겠단다. 마 사장 칭찬을 했다. 마 사장 같은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여행업을 한다는 자체가 너무 신선하고 놀라웠다고..... 이집트처럼 한국도 여러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말했지만 부끄러웠던 건 사실이다. 솔직히 테마랑 다니면 쇼핑 강요 사항이 없어 수입이 줄어도, 그렇게 속이 편 할 수가 없단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는데 어떤 여행사는 수고비로 한국 수표를 주고 가는 놈도 있단다. “에이~~ 씨! 어떤 빌어먹을 놈인지....” 어이없어 머리에 쥐가 나려한다. 에즈딘과 떠들다보니 밤은 더욱 깊어지고, 배는 출발지로 돌아와 있었다. “자 ! 자 ! 우리 많은 돈 내고 여행 와 병신 되지 말고 열심히 구경합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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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6일 (제 3일 ) - 하얀 사막은 별들도 많이 가졌더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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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에 눈이 떠졌다. ‘내 허리가 무사 하시려나~~’ 8시 출발했다. 여기서 바하리야 오아시스 마을까지는 약 370km이다. 4시간 정도는 가야 한다. 나일 강을 중심으로 서부 사막 지역에는 약 7개의 큰 오아시스가 있다. 그 중 바위사막인 흑 사막을 가기 위해서는 바하리야로 가야하는 것이다. 하늘은 잔뜩 흐려있고, 도심을 벗어나 사막 초입에 들어섰을 땐, 짙은 안개가 끼여 있고 간간히 비까지 뿌렸다. 아침 안개 낀 날은 더 좋은 날씨를 예고하는 거라고 말하면서도 밤에 별을 못 보게 될까봐 걱정된다. “내가 여기까지 왜 왔는데.....” 이동하면서 에즈딘은 여러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이집트 교육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귀담아 들을 만 했다. 이집트는 대학까지 무상교육이다. 1년 학비가 우리나라 돈으로 6000원 정도란다(이집트 1 파운드 = 200원, 1달러 = 5.7 파운드). 귀를 의심 할 정도로 파격적이고 꿈같은 이야기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다. 누구든 대학을 갈 수 있어 마음껏 공부는 할 수 있지만 그 공부를 써 먹을 곳이 없다(물론 실력에 따라 나름대로 대학 등급은 있다. 에즈딘은 카이로대 출신이었다). 극단적인 예로, 공부를 많이 해서 대학 교수, 박사가 되어도 길거리의 청소부보다 월급이 많지 않다. 그래서 정말 우수한 인재는 외국으로 떠난단다. 교수 월급이 우리나라 돈으로 20~30만 원 정도니 겨우 입에 풀칠만 하지 책 한 권을 마음 놓고 살 수가 없단다. 에즈딘은 피라미드 앞에서 1불 받고 손님 태우는 낙타보다 수입이 적다고 비교했다. 학생으로부터 수업료를 받지 않으니 교수 월급을 올려 줄 재원이 없는 것이다. 나라가 부자이기를 하나...... 에즈딘은 자기나라도 무상교육을 없애야만 지식의 축척과 소통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만약 정부에서 이제부터 학교는 돈을 내야 다닐 수 있다고 공표하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공짜에 익숙해 있는데 “갑자기 무슨 돈 ? 돈 내고 학교 다니는 경우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 ?” 가 되는 것이다. 대책 없고 맹목적인 사회 보장, 복지 증진 같은 포플리즘 정책은 나라 발전의 최대 적이 되고, 우리의 업이 되어 돌아오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권력을 가진 집권층으로서는 말 많고 탈 많은 지식인층이 필요가 없다. 그래서 암묵적으로 지식인을 박해하는 풍토이다. 작년 대통령 선거 전에 몇몇 지식인들이 주동이 되어 “이제 그만 ”이라는 구호들 들고, 24년 간 대통령을 하고 있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1인 독재에 맞서, 오랜 투쟁 끝에 복수 출마가 가능한 선거 제도까지는 끌어냈다. 물론 세계 여론에 굴복한 거나 마찬가지 승리지만.... 그러나 온갖 술수로 또 당선되어 앞으로 6년을 보장받아 30년을 합법적으로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최근 외신에서는 벌써부터 자신의 차남에게 정권을 물려주기 위한 물 밑 작업을 하고 있단다. 그때 반대편에 섰던 지식인들은 지금 거의 감옥에 가있단다. 자신은 암살이 무서워 집에서 집무실까지 가는 100m정도의 거리에 3,000여명의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고...... 무바라크 말고는 특별한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일반 국민들에게 그런대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꼭 우리의 어느 시절과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배 위에서 “당신은 투표권을 행사 했었느냐 ?”고 물었더니 하지 않았단다. 결과가 너무나 뻔한 선거에 참석하지 않은 에즈딘의 얼굴에 절망과 슬픔이 스쳐갔다. 가슴이 따가웠다. 지금 그에게 우리의 정서대로 그래도 국민의 권리를 포기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비겁한 짓이며 그러니 당신 나라가 이 모양이라고 말 한다면 정말 코메디가 될 것이다. 정치인들의 부도덕이 만연되어 있는 이 나라의 지식인으로 살아가야하는 에즈딘에게는 이 말이 딱 어울릴 것 같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슬프다 > 난 에즈딘에게 말 해주고 싶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당신들 문제는 당신들이 해결하라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영원한 것은 절대 없다고 ! 당신들의 자부심인 저 피라미드를 세운 왕조도 120년을 채우지 못했다고, 잘난 외국인들이 끼어들었다가는 이락크 짝 난다고 ! 에즈딘의 한국어 실력이 뛰어나니 한국 방송국에서 오면 단골 가이드를 하나보다. 한번은 KBS에서 사막의 배두윈 족을 취재하고 싶어 해서 그들을 찾아갔는데, PD가 외국 책에서 읽었다며 낙타 오줌으로 세수하는 장면을 재연해 달라고 해 모두 놀랬단다. 아무리 물이 귀해도 낙타 오줌으로 세수는 그 누구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삼 일 밤낮을 볶아대서 할 수 없이 모래로 세수하는 장면을 찍었단다. 물론 그들은 모래로도 세수 해본 적이 없다. 이집트에 와서 이 나라의 문화를 접하고 싶으면 여기 와서 일정을 잡고, 사실 있는 그대로의 장면을 잡아야하는데, 한국에서 모든 것을 정하고 와서 없으면 연출까지 해서 찍어 가는데 질렸다고 했다. 물론 방송이 시청률을 의식해 좀 더 자극적이고 엽기적이며 신기하게 만들려고 한다지만 이건 정말 무뇌아들의 소치이며 만행이다. 방송을 하든, 여행을 하든 그 나라에 들어가면 그들에게 예의를 갖추어야하고,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그들의 문화를 얏 보거나 함부로 비판하지 않음이 에티켓이다. 하물며 있지도 않은 문화를 만들어 야만적인 행동으로 보여 주기위해 돈 주면서 요구까지 했다니...... 우리 일행 여기저기에서 탄식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프랑스 여배우가 우리의 개고기 먹는 문화를 비판했다고 비분강개하면서 남의 문화를 이해도 못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도 안 보이는 것은 무슨 경우란 말인가 ? “아 !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목이 탄다 ! 2시간 정도를 달리니 안개가 완전히 걷히면서 차창 밖의 풍경은 황량함만 담고 있는 사막의 연속이다. 페루의 나스카 평원과 많이 닮아 있다. 왼편으로 좁은 철로가 끝없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차 좀 세워 달라고 부탁을 해서 이 지구상 어디서도 보기 힘든 경치를 카메라에 담았다. 어떤 지형, 지물의 방해도 없이 완벽하게 지평선과 맞닿아 있는 철도를 어디 그리 보기 쉬운가 ! 하늘과 땅은 가느다란 선으로 만나고, 기차 길은 아스라이 멀어져 허공으로 살아져버린다. 은하 철도처럼..... ![]() 이 휴게소는 사막 투어를 하기위해 사막 깊숙이 들어가는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장소이다. 우리를 따라 들어 온 작은 봉고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기어 나온다. 협소한 자리가 불편 했던지 내리자마자 모두 맨손 체조를 한다. ![]() 여행을 하다보면 배낭여행하는 우리 아이들을 자주 보게 된다. 쾌재재한 모습이지만 활기차고 반짝이는 눈빛을 보면, 대리만족하는 내 자신도 보이고 그들이 그렇게 든든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다 누리고, 많이 보면 그 만큼 성숙되고 커질 것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얼마를 달리니, 멀리 종려나무 숲이 보인다. 오아시스다. 말이 오아시스지 작은 도시 같은 마을은 먼지 많고 메말라 가엽다. 우리는 경찰서 앞에 잠시 서 이 마을로 들어온 신고를 하고, 소박한 호텔로 갔다. 식당만 빌려 카이로에서 준비해온 한식 도시락을 먹었다. 김치도 있고 쌀밥도 있어 일행들은 아쉬운 대로 흡족해 하지만 난 식욕이 나질 않는다. 호텔 건너편 레스토랑은 이곳에 오는 모든 관광객이 현지인들과 사막투어를 흥정하는 곳인지 상당히 붐빈다. 우리처럼 미리 예약하고 오기도 하지만 여기 와서 결정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4대의 지프차에 나누어 타고 본격적인 투어에 나섰다. 우리 차에는 교장 선생님 부부와 울산 여선생님 2분이 타셨다. 차는 굴러가는 것이 신기 할 정도로 엉성하지만 포장된 도로를 달리니 그리 고통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적당한 흔들림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기분 최고다. 미지의 세계를 찾는 탐험가처럼 흥분과 기대로 짜릿한 여행의 기쁨을 맛본다. 우리 팀에게 보물 지도라도 하나 쥐어주면 더 용기 백백해져서 삽 하나로 이집트 사막을 몽땅 파 버릴 것 같은 기세다. 우리 운전수는 20대 초반의 아이 같은데, 기어를 넣는 순간부터 화음도 없는 아랍 음악을 틀어댄다. 얼마간은 새로운 음색이 신기했지만 고막을 찢어대는 단조로움이 미칠 것 같다. 제발 볼륨만 줄이라고 부탁했다. 삭막한 사막을 매일 달려야하는 젊은 청춘이 안쓰럽기는 하다. 그러나 이 총각은 나름대로 음악을 들으며 스트레스를 푸나보다. 오아시스를 벗어나자, 꺼뭇꺼뭇한 쵸콜릿 분말가루를 뒤집어 쓴 사막이 시작되었다. 흑사막이다. 모래의 철 성분이 산화되어 검은 빛을 띤다. 황량할 것만 같은 사막은 검은 산들을 등에 지고 제법 근사한 경치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잠시 차를 대고 산에 오르기로 했다. 에즈딘은 산 중간 정도만 올라갔다가 내려오라지만 우리 팀 누구도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것 같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지....” 정상에서 내려다 본 감동이란...... 누가 사막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 했나 ! ![]() <흑사막의 피라미드> 눈앞에 점점이 떠 있는 산들은 너무 많이 알고 있고 품고 있어, 달관을 한 신들의 모습이었다. 산들은 하나같이 자연이 만들어 낸 피라미드 형태였다. 이집트인들이 왜 삼각뿔 모양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는지의 해답은 여기에 있었다. 파라오들은 자신이 신이였기에 자신의 피라미드 산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제 본 계단식 피라미드보다 이곳의 피라미드 산이 더 이집트적이고, 이집트인을 이해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정말 멋진 장소이다. ![]() 다시 이동하다 황금빛 모래 언덕에 잠시 서 모래의 감촉을 만끽하고 백사막의 일몰을 향해 여정을 재촉했다. 1시간 정도를 달려 완전히 백사막으로 들어섰을 땐, 태양도 마지막 꼬리를 길게 늘려 우리를 맞이하고, 길은 어느 듯 사라져 버렸다. 포장되지 않은 길과 젊은 아이의 운전 솜씨까지 합쳐져 우리 몸은 통제를 잃어버렸다. 서로 부딪히고 포개지면서도 모두 피곤한 기색 없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들이다. 빽빽거리는 아랍음악은 어느새 볼륨이 커져있다. 드디어 백사막 한 가운데로 들어서 오늘 야영 할 장소에 도착했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뽀얀 사막은 정녕 이곳이 지구의 또 다른 모습이란 말인가 ! 그 옛날 바다였던 지역의 석회암 성분이 남아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모래 바람을 만나 지금과 같은 장관을 연출한다고 이성적으로 인지하면서도 가슴은 단순한 희열로 넘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모두들 이곳의 경치에 취해 다들 흩어져 버렸다. 우리를 데리고 온 현지인들은 지프차를 ‘ㄷ’자 모양으로 세우고, 꼬질꼬질한 아라베스크 문양의 포장을 친다. 그리고 카펫을 깔고 상을 놓으니 그럴 듯한 식당이 완성되었다. 그들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사막의 일몰을 기다렸다. 구름이 잔뜩 끼여 태양이 거대한 의식을 거행하면서 사라지는 것을 확실히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경험한 사람은 알 것이다. 이것이 다가 아니란 걸. 진정한 일몰은 지금부터였다. 대지가 태양을 온전히 삼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한 참을 걷다 뒤돌아 본 하늘은 얇은 비늘구름을 물들이며 붉게 붉게 고귀한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 <백사막의 일몰> 모두 망부석이 되어 그 자리에 서 탄성을 지른다. 태양은 지상의 쇼를 접고 어둠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을 시작했다. 해를 삼킨 서쪽 하늘은 뻘건 입김을 뿜으며 오래도록 우리를 내려보고 있다. 동방의 어느 작은 나라에서 온 모래알보다 작은 내 존재를 무시하지 않고 엄숙한 신의 의식에 초대해 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모두 하늘을 마주하고 미동도 없이 서있는 일행의 실루엣은 가슴이 쪄릿쪄릿 하도록 엄숙하다. <이집트에서 사하라 사막의 황홀한 일몰과 마주친 적이 있다. 그것은 태양과 자연과 인간이 벌이는 태고의 장엄한 의식이었다. 유난히 커 보이는 태양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모래 속으로 서서히 무너져 내릴 때. 어김없이 찾아오는 모스크의 아잔 소리. 이 소리를 신호로 인간은 하루를 접고, 식기 시작한 모래에 엎드려 신을 향해 한없는 겸손을 표한다. 그러면 태양은 그 넓은 지평선을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이며 화답한다.> -이희수의 세계 문화 기행 - 나는 이 글을 접하고 열 번 아니 수 없이 읽고 또 읽었다. 하루가 끝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단순한 해넘이를 이렇게 근사하게 표현하는 필력에 놀라고, 사하라의 사막에는 남다른 그 무엇이 있다는 확신과 그리움이 생겼다. 모스크도 아잔 소리도 없었지만 신은 우리 일행들의 겸손함을 담보로 내 그리움에 화답해 주었다. 시작과 달리 하늘은 순식간에 어둠으로 덮여 버렸다. 에즈딘에게 오늘의 일몰은 몇 점짜리냐고 물으니 80점 정도란다. 분명 20점은 에즈딘의 마음 일 것이니 내 마음 20점을 보태면 나는 오늘 세상에 둘도 없는 일몰을 본 것이리라.... ![]() 어둠과 함께 현지인들이 힘들여 준비한 저녁 식사가 차려졌다. 좋은 조리기구로 식당에서 만든 음식보다 볶은 밥도 맛있고, 양념해서 구운 닭요리도 맛있다. 그러나 어찌나 많이 주는지 모두 커다란 산에 구멍 하나 내는 정도로 씩씩거리다 포기한다. 양고기는 완전 엽기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토막도 내지 않고 삶다가 구운 것 같은데, 날씬한 양다리를 그대로 우리 앞에 놓았다. 우리는 웃다가 양다리 잡고서 기념사진만 찍고 내려놓았다. ![]() 우리 부부는 준비해 간 오리 털 점퍼까지 입으니 완전무장 상태지만, 아무리 춥다고 강 과장이 강조를 했어도, 사막의 추위를 상상 할 수 없었는지 옷 얇은 일행이 꽤 있어 보기 안쓰럽다. ![]() 아무래도 홍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것 같다. 서로 <알렘콤(이번에는 당신 차례..)>을 외치며 배두인의 악기 소리와 우리의 노래 소리는 하나가 되어 사막의 적막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하늘은 구름에 가려 좀처럼 별을 보여주지 않아 불안하다. 모닥불 빛이 사그러 들면서 모두 하늘을 원망하며 텐트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등에 핫 팩까지 2개를 붙였더니 온돌방에 누운 것처럼 등 쪽이 따뜻하다. 그러나 신발까지 신었지만 발쪽으로 올라오는 한기는 어쩔 수 없다. 사막의 추위는 우리가 경험하는 겨울 추위와 다르다. 겨울 추위는 외부의 바람과 온도에 의해 오지만 사막의 한기는 몸 속 깊은 뼈 속부터 나온다. 그러니 동상은 걸리지 않겠지만 골병은 들 것 같다. 출산을 자주한 사막의 여자들은 분명 수명이 길지 못 할 것 같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눈을 뜨니 옆의 신랑은 가는 코까지 골고 있다. 신랑을 깨웠다. 화장실(?) 가자고... 텐트를 나서다 하늘을 본 나는 순간 무릎이 딱 꺽여졌다. “아 ! 아 ! 별이다. 별 !” 더 촘촘히 박고 싶어도 자리가 없어 포기한 것 같은 .... 인공의 어떤 빛도 용서하지 않고 자연의 빛으로 칠흑 같은 밤하늘은 보석 주단을 깔아 놓은 것 같다. 책에서 본 천체 모형도는 가상이 아니었다. 가상보다 더 진짜 같은 찐한 밤하늘이다. 우리는 비틀 걸음으로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텐트에서 떨어진 바위 뒤로 가 배설을 했다. 서로 꼭 붙어, 앉거니 서거니 볼 일을 보면서도 하늘을 주시했다. 신랑은 열심히 별자리를 찾고 읊어댄다 나야 별자리 같은 것 관심도 없고, 가르쳐 주어봐야 입력도 되지 않는다. ‘선생 아니랄까 봐... 학구적이기도 하지.....’ 난 이 적막한 사막. 별이 쏟아지는 밤에 부끄럼 없이 꼭 붙어 배설하고 있는 우리 둘은 엄청난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코엘료의 <오 자히르> 소설 속 부부처럼 서로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고 갈등하며 떠나간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은 너무나 허허로운 문제 아닐까 ? 나도 신랑과 가치관의 척도가 다르다고, 이기적이다고, 생각이 깊지 못하다고, 응얼대지만 원초적 자연 앞에서 거리낌 없이 동물처럼 행동하는 것만큼 진실 되고 완전한 합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 젊은 시절, 사랑 없이 못 살고, 사랑 없는 결혼은 위선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 나이 되어보니, ‘너와나 공유하는 것이 너무 많고, 서로 부족한 것도 너무 많고, 같이 해결해야하는 의무도 너무 많아 생을 다 하는 순간까지 같이 걸어야하는구나’ 하는 그리 명쾌하지 못한 여운이 긴 인정이 가슴으로 걸어 들어온다. 우리는 별보기를 지나 유성우보기를 기다렸지만 별비는 환상이었다. 내 시간 감각으로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은 5~10분 간격인 것 같아 감질이 났다. 심장에서 뿜어 나오는 추위에 포기하고 텐트로 들어갔다. 신랑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또 금방 잠이 든다. 난 1시간 이상을 보채다 다시 나왔다. 아무리 아무리 보아도 너무 아름답다. 새삼스럽게 나에게 생명을 준 부모님께도 감사하고 아들의 행복도 빌었다. 또 내가 죽어 가게 될 세상이 저 별들 사이에 있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러려면 착하게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하고.... “어린아이 눈망울처럼 순하고 초롱초롱한 별들아 ! 정말 예쁘구나.” 끝까지 별비는 내리지 않았다. 텐트도 없이 더러움과 모래로 코팅된 담요 한 장으로 이 밤을 보내는 배두인들은 우리의 작은 소동과 관계없이 시체처럼 자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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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7일 (제 4일) - 바람의 조각 전시장, 백사막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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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텐트 속에서 들으니 모두 한번 씩은 밖으로 나와 별과의 기막힌 조우를 즐기는 듯 했다. 우리도 밖으로 나오니 모두 야영지에서 가장 가깝고 높은 언덕으로 오르고 있다. 울산 여 선생들의 옷이 가장 얇아 걱정되었는데, 무사히 밤을 견디고 살아남았나 보다. 배두인들이 나누어 준 꼬질꼬질한 침랑을 모포처럼 뒤집어쓰고 펭귄처럼 걷고 있는 그녀들이 귀엽다. “역시 우리 민족의 임기응변은 천부적이야 ” 일출은 참 시시했다. 어제 저녁 기운을 소진했는지 태양은 빛의 고통도 없이 슬쩍 올라왔다. 그나마 구름에 반 쯤 가렸다. 우리는 곧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에 이리저리 백사막을 거닐며 산책을 했다. ![]() 야영지로 돌아오니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 메뉴는 이집트 호밀 빵, 브리 치즈, 오렌지, 강 과장이 준비해 온 컵라면... 별 12개 쯤 받아도 모자랄 것 같은 노천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시셋말로 죽여준다. 밤새 떨은 몸은 따끈한 라면 국물로 원기를 회복하고, 모두 내 평생 이런 경치 좋은 곳에서의 식사가 몇 번 있겠느냐고 떠들면서 화기애애하다. 소박한 음식으로가 아니라 자신에게 온 행운으로 하루의 에너지를 얻는다. 이번 여행도 거의 선생님들이시다. 나랑 사모님. 홍 선생님 남편 되시는 분만 빼고.... 특별히 모난 사람들 없고, 매사에 적극적이고 예의 발라 정말 편안하다. 어려운(?) 밤, 특별한 추억을 함께 해서인지 모두 오랜 친구처럼 친해졌다. 아침을 먹고 나는 세수도 못 했으니 화장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모두 바르고 그리고 난리다. 물티슈 두 장으로 세수하고 화장한단다. 미련한 나는 왜 그 방법을 생각 못 했을까 ? 모두 꽃단장을 하고 똑같은 머플러를 휘날리며 9시 경에 출발했다. 어제 스쳐지나온 백사막을 제대로 즐기기로 했다. 길 없는 사막을 달리는 차는 아주 춤을 춘다. 어제 하룻밤을 지내면서 우리랑 만리장성을 쌓은 운전수는 신나게 즐기는 우리들의 실력을 알아 봤다며 맘 놓고 크게 음악도 틀고, 생음악까지 합치면서 우리더러 추임새까지 넣으란다. 사람이 사람과 친해진다는 것이 상대를 이해하는 거라고 했던가? 오늘 자세히 보니 귀엽고 유쾌한 청년이다. 창밖의 하얀 괴석은 사막이라는 걸 잊고 조각 전시장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어제 흑사막에서 피라미드를 보았다면 이곳은 수없이 많은 스핑크스가 있다. 바람은 그냥 뜻 없이 불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다듬고 가꾸어 생명을 부여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싹 마른 사막 한 가운데 혼자 서 있는 아프리카 아카시아 나무 밑으로 갔다. 사지를 뒤틀고 반 쯤 누워있는 나무는 말 하지 않아도 삶이 고통의 연속임을 느끼게 해 준다. 언제까지 저 푸른 잎을 유지 할 수 있을 런지.... 노란 꽃까지 만개한 나무는 신으로부터 어떤 달란트를 부여 받았는지, 그리 쉽게 생명을 놓지는 못 할 것 같다. ![]() 우리는 백사막 한 가운데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어디를 보아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사막도 사막 나름이지 이곳은 너무도 많은 것을 창조하고 품고 있다. 돌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느끼고 싶지만 역부족이다. 또 지프차를 타고 이동한 장소는 엄청난 크기의 석회암 산이 솟아 있다. 빙하처럼 깨끗하고 그 늠름함이 하늘을 찌른다. 세월이 흘러 저 백색의 산도 언젠가는 작은 바위가 되겠지만 자연은 위대하다. 주변에는 철 성분이 농축된 플라워 스톤이라는 화석돌이 널려있어 일행들은 돌 줍기에 여념이 없다. 사막을 오가는 많은 배두인에게는 이곳이 아주 신성한 장소였음에 틀림없다. 버스로 이동해 크리스탈 마운틴이라는 이름이 좀 무색한 장소를 구경하고 나오니 어제의 흑사막이 펼쳐졌다. 잠시 온천물을 끌어올리고 있는 곳에 들렀다. 50~60℃ 정도의 온천물은 쾌 많은 수량이었지만, 기름 냄새도 나고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았다. 식수로는 이용 못하고 농업용수로 쓰고 있단다. 관광버스가 들어오니 온 동네 아이들이 다 모였다. 한 선생님이 준비해 오신 볼펜을 줄을 세워 놓고 나누어 주신다. 영양 상태가 좋지 못 한 것이 눈에 보여 안타깝다. 그러나 볼펜을 받아들고 좋아라하는 미소는 백만 불짜리다. ![]() 우리는 어제 사막투어를 시작했던 그 호텔로 돌아왔다. 점심 식사로 샐러드와 닭구이가 나왔는데, 닭 양념이 제대로 배여 있어 모두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 휴식 시간에 마을의 시장 구경을 했다. ![]() 각종 채소와 과일은 원색을 뽐내고 있어 그 나마 눈이 시원하다. 살아있는 닭을 저울에 달아 파는 것이 이채롭다. ![]() 이들의 집이 허술하고 누추해 보여도 어느 나라든 어느 민족이든 자기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가장 과학적 일 수 있다. 이 민족의 진흙 집은 항상 덥고 건조한 기후에 외부의 열기를 차단 시켜주는 가장 훌륭한 집일 것이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화학 물질 범벅인 콘크리트 집에 살면서 항상 나무와 황토로 지은 집을 꿈꾸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은 진정한 웰빙 집을 가졌을 수 있다. 그리고 언제든지 자연스럽게 100%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이들의 집은 지구환경 보전에 선두주자 아닐까? 하지만 이 민족의 쓰레기 문제에 대한 무 개념은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일까? 나일 강이 범람하면 모든 것을 쓸어가는 하늘의 뜻에 너무 익숙한 것일까? 정말 이집트인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다. 우리는 어제 온 길을 되짚어 카이로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니 내 집에 온 것처럼 좋다. 별밤도 좋고 백사막, 흑사막 다 좋지만 온수샤워! 쾌적하고 포근한 침대는 더~~좋다! 이제 문명의 이기에 익숙한 우리가 자연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머~얼리 와 버렸나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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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8일 (제 5일) - 인류의 자부심, 룩소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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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분에 일어났다. 5시 비행기로 룩소르로 가야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 ! 아 ! 정말 졸립다. 호텔에서 받아 온 아침 도시락, 비행기에서 주는 빵, 모두 거부하고 2시간 동안 잠만 잤다. 공항을 나서니 카이로보다 확실히 기온이 높은지 후끈한 공기가 느껴진다. 공항 화장실이 너무 붐벼 일단 오늘 묵을 호텔로 이동하기로 했다. 나일 강변으로 난 도로를 달리다보니 비로소 상상해 온 서정적인 이집트를 대면한다. 마음껏 자란 종려나무와 각종 꽃들의 마알간 얼굴을 보니 살 것 같다. 호텔에 도착해 우르르 화장실로 갔다. 순서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바로 내 뒤에 서있던 강 과장이 수박 쪼개지는 소리를 내면서 앞으로 뻗어버렸다. 돌아서 엎어져 있는 강 과장을 보고 놀라기보다 현실감 없는 이 상황이 무언지 머리를 굴려야했다. 뒤집어본 강 과장의 하얀 얼굴을 보니 비로소 상황 판단이 되면서 무서웠다. 겨우 흔들어 깨웠더니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용서만 비니 안타깝다. 분명 핏기 없는 얼굴은 정상이 아닌데, 내가 헛것을 본 것처럼 멀쩡하게 행동했다. 어제 신랑이 “강 과장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저러다 곧 쓰러진다 쓰러져!”하고 안스러워 했었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고, 너무 손님 한분 한분의 상황을 챙기고, 사진 찍고, 먹거리 챙기고 볼 때마다 뛰고 분주하다. 우리들이 나서 오전투어는 에즈딘과 잘 하고 오겠으니 호텔에 남아 좀 쉬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세상에 쉬운 직업 정말 하나도 없다.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이 좀 피곤한 일인가.... 먼저 멤논 석상으로 갔다. 여기 오기 전, 사진에서 본 거상은 새똥까지 뒤집어쓰고 수명을 다한 돌들의 균열로 곧 사라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본 석상은 예상을 깨고 거대하고 위엄 있어 보였다. 수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21m나 되는 거상은 원래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앞에서 보아 오른쪽 석상은 돌의 속살이 다 들어나 근육 맨의 팔과 가슴처럼 오랜 세월 단련된 우람한 상체처럼 보였다. 얼굴이 너무 망가져서 아쉽다. ![]() 그 소리가 트로이 전쟁에서 죽은 멤논이 여명의 신인 어머니 <에노스>를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것이 가장 타당 할 것 같다. BC 130년경에 이곳을 방문한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도 그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후 보수가 되고 나서는 그 울음소리가 그쳤다. 이 석상은 제 18왕조 아멘호테프3세(BC 1386~1349) 때 만들어져 그의 장제전을 지켰다. 아멘호테프3세는 18왕조의 전성기를 그런대로 편안하게 즐겼던 왕으로, 즉위 초반에는 제법 유능하고 적극적으로 국사에 임했으나 후반에는 향락에 빠졌다고 한다. 제 18왕조는 이집트 역사에서 힉소스족의 점령에서 벗어나 신 왕국시대(18, 19, 20왕조)를 열어, 이집트 최고의 화려한 문화를 탄생시킨 의미 있는 왕조이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옛 유물과 유적이 거의 이 신왕국(BC1570~1069)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왕조의 파라오 중에는 이집트 최고의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가 있고,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 불리우며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 했던 투트모세스3세, 이집트의 많은 신을 통합해 유일신을 만들어 종교개혁을 꿈꾸었던 아크나톤(아멘호테프4세), 아크나톤의 아들로 화려한 황금가면의 주인 투탕카멘 등이 있다. 아멘호테프3세는 예쁜 여자도 엄청 밝혀 후궁 수만도 300명이 넘었단다, 나이 50이 넘어서도 그 욕망은 끝이 없어 미탄니(시리아 북부, 터키 동부지역) 왕국에 6년을 졸라서 어여쁘고 젊은 왕녀를 데리고 왔는데, 이 여자가 그 유명한 <네페르티티>(찾아 온 미녀)이다. 터키를 가 본 사람이라면 크고 깊은 눈의 터키 여자들의 미모는 부언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늙고 병든 왕은 이 어린 여자와 별 재미를 못 보고 2년 뒤 죽고, 이 여자는 그의 아들 아크나톤과 결혼해서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대표주자로 기록된다. 지금도 이 땅에서 거리에서는 무바라크 대통령 사진을, 석상으로는 람세스2세를, 기념품 가게에서는 네페르티티와 관련된 물건들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멤논 석상의 측면에는 나일신 2명이 연꽃(상 이집트 상징)과 파피루스(남 이집트)를 묶고 있다. 이는 이 왕조가 두 이집트를 통일하고 지배 한 것에 대한 커다란 자부심과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석상 뒤의 장제전 자리는 바람도 머물 것 같지 않는 폐허로 허무함이 가슴을 친다. 이 장제전의 석재는 약 150여년 뒤 람세스2세의 아들, 메르네프타 왕이 자신의 장제전을 짓기 위해 다 빼내 갔다. 나는 개인적으로 터키의 에페소에서 본 아름다운 히드리안 신전의 주인인 히드리안 황제가 이곳에 와 나랑 똑같이 석상의 주변을 거닐며 감탄 했다고 들었기에 내 여행의 끈들이 연결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람세스3세의 장제전으로 갔다. 룩소르 서안에는 많은 장제전이 있는데, 그 중에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많아 이곳을 선택한 것 같다. 말린 진흙 덩어리 같은 사암의 제1탑문 앞에서니 비로소 진정한 이집트의 유적을 대면하는 것 같은 짜릿함이 느껴진다. 벽마다 빼꼭히 신들과 상형문자가 들어 차 있다. 이 유적은 신왕조의 전형적인 건축물의 원형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탑문, 중정, 주랑현관, 열주실, 지성소, 창고 등을 제대로 갖춘 건축물이다. 람세스3세는 19왕조의 람세스2세와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는 20왕조의 파라오다. 그러나 50여 년 전의 영웅적인 파라오에 매료되어 그와 같은 왕이 되고 싶어 안달을 했던 인물이다. 자기 자식들에게도 람세스2세의 아들들 이름을 그대로 붙였을 정도였으니.... ![]() 네트티스 여신은 긴 날개를 펼치고 석관에만 그려져 있는 줄 알았는데.... 이곳이 죽은 왕과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공양을 하는 장소라는 걸 나타내는 증거일 것이다. 탑문을 들어서자 첫 번째 뜰이 나타난다. 왼쪽으로는 8개의 둥근 기둥이 서있고, 오른쪽으로 7개의 조각상이 서 있다. 조각상은 람세스3세의 자식들이라고 하는데 훼손이 심하다. 둥근 기둥은 이집트의 전형적인 부조들로 덮여있고, 기둥 뒤의 벽면에는 람세스3세의 전장에서의 영웅적인 모습이 새겨져 있다. 사진에서만 보던 기둥을 실물로 보니 그 크기와 규모가 엄청나다. ![]() 탑문을 나서면 바로 전면에 8개의 사각 기둥이 둥근 기둥과 짝을 이루고 서 있다. 사각 기둥의 조각상은 다 훼손되고 그 흔적만 보인다. 좌, 우에는 파피루스를 의미한다는 5개의 원형기둥이 서 있다. 이 장제전의 백미는 이곳이지 싶다. 기둥과 벽면 가득한 부조가 첫 번째 뜰보다 덜 훼손 되었고, 아름다운 채색도 많이 남아있다. 특히 좌, 우 벽면에는 람세스3세의 사람됨과 그 시대상을 알 수 있는 부조가 있다. 람세스2세의 제 19왕조가 끝나고, 람세스3세의 제 20왕조가 들어섰을 때는 국운이 많이 기운 상태였다. 이집트 국경을 확장하기는커녕, 이집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주변 국가들의 반란과 침입이 빈번하여 대규모 전투가 많았다. 특히 삼각주 일대에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에게해 일대의 바다 민족들이 빈번히 쳐들어 왔다. 그래서 그들과의 전쟁이 잦았는데, 그 해전이 아주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 부조는 특이하고 근사하다. 또 파라오가 부채 그늘 아래서 위엄을 갖추고 우아하게 앉아있고, 이집트 병사들이 적군을 잔인하게 도륙하여 손과 성기를 산처럼 쌓아놓고 보고하고 있는 장면은 일순 소름을 돋게 한다. 부분 부분 채색이 남아있는 기둥들은 발걸음을 띨 수 없을 만큼 근사하다. 이 건축물이 3,000년 전의 것이 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곳에 서 있는 내 자신이 전설처럼 느껴진다. ![]() 그러나 다주식 홀은 가을 추수가 끝난 논처럼 모든 것이 싹뚝 잘려 나가고 없어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다주식 홀 둥근기둥들은 람세스3세임을 나타내는 <카르투슈>(파라오의 이름을 타원형 윤곽으로 둘러싸서 나타낸 문자)만 남겨지고 무참히 잘려있다. 돌아서 나오면서도 이 많은 볼거리와 용감하게 이별을 못 하겠다. 이 장제전도 람세스2세의 장제전 라메세움을 본보기로 삼았다. 그러나 현재 라메세움은 철저히 파괴되어 벽면의 반 정도만 볼거리로 남아있단다. (그거라도 봤으면 조~오~켔다.) 어떤 면에선 람세스3세가 저승에서의 삶은 람세스2세 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메세움보다 더 많은 사람이 이곳에 와 그를 추억하고 경배하고 있지 않은가 ? 지나고 보니 이 장제전은 여러모로 소중한 장소였다. 다음에 가게 될 신전들에 비해 사람이 많지 않아 여유 있게 이집트 유적을 감상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신전보기의 지침서 같은 역할을 했다. 이집트 최고의 영광을 거의 마지막으로 즐겼다고 볼 수 있는 이 왕을 기점으로 이 나라는 혼란과 끝없는 외세의 침입으로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이 멋진 장제전의 주인도 파피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재위기간에 살해 음모도 있었다. 또 미이라의 아마포를 떼어냈을 땐, 머리가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었단다. 그래서 훗날 미이라를 주인공으로 하는 공포영화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엄마 뱃속에서 생명의 씨앗을 갖는 순간부터 모든 인간에게 사연 없는 인생 어디 있으며, 역사 없는 순간이 어디 있겠는가! 어찌되었든 한 인간이 이렇게 근사한 영적인 자신만의 장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보통 행운으로 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덧없고 허무한 한 낮의 꿈같은 삶이라 해도....... 이곳을 나와 왕가의 계곡을 향하면서 버스에서 본 라메세움은 몇 개의 원형기둥을 가진 작은 사당처럼 서 있다. ![]() 이집트로서는 이 하와스 박사가 보물 같은 존재일 것이다. 외국인 주도하의 유적 발굴 작업에서 하와스 박사는 자신들의 문화재를 자신들의 힘으로 발굴하는 어떤 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 또 이 사람, 정치적인 수완도 좋은지 굵직 굵직한 관직도 두루 거치고 있는 것 같다. 요즘은 외국에 밀반출 되었던 중요 문화재를 찾아오기 위한 노력을 제일 많이 하고 있다. 그 본보기가 영국에 가있는 로제타석일 것이다. 매섭게 생긴 눈초리로 도굴꾼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상상하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바위산 계곡 입구에서 기차 같은 차를 타고 깊숙이 들어갔다. 이집트에서 이 바위산이 없었다면 그 수많은 왕의 미이라는 어디다 숨겼을까 ? 18왕조의 투트모세스1세(BC 1524~1518년)는 피라미드의 왕들이 도굴범에 의해 수난 당하는 것을 보고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든 이곳의 바위산을 뚫어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62기의 무덤이 있고, 투트모세스1세의 염원과 달리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묘를 제외하고 모두 도굴 되었다. ![]() 입장권이 3개씩 묶여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세티1세의 묘를 무척 보고 싶었는데..... 그러나 3개의 무덤을 보고 난 감상은 솔직히 실망스러워, 원하는 것을 본들 별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우선 사람이 너무 많아 내 의지대로 구경을 할 수가 없다. 멈추고 싶어도 밀려들어가고 산소도 희박해 엄청 갑갑하다. 그러나 무덤 입구를 통과해 처음으로 나타나는 통로의 하얀 벽에 알록달록 수 놓여있는 상형문자는 화려한 꽃밭처럼 아름다워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그러다 밀려들어간 방과 기둥의 각종 벽화는 놀랍기는 하지만 사치스러운 감동과 감상을 토해내기 힘들다. 땀을 뻘뻘 흘리며 밀려다니다 눈이 마주친 푸른 눈의 외국인은 나랑 통하는 눈빛으로 서글픈 미소를 짓는다. “우리 이렇게 구경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 아니지요 ?” 람세스4세의 내부 깊숙한 방의 천정화는 명성대로 압권이다. 등을 맞댄 하늘의 여신<누트>의 그림이 별 손상 없이 아직까지도 세상을 주관하고 있었다. 마지막 람세스9세의 묘는 기진맥진해져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도 없고 오로지 신랑 등판만 보고 나온 것 같다. 입구에서 에즈딘이 이 묘가 미완성 이였다는 증거들을 보여줘 그것만 확인해야했다. 이러니 세티1세 묘면 어떻고 투탕카멘 묘면 뭘 하겠나? 이 유적지는 1년 12달 이런 상황이 계속 될 것이니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기분으로 돌아갈 것 같다. 람세스9세는 자신의 재위시절 왕들의 무덤 도굴이 너무나 빈번해 특별 조사팀까지 구성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작 자신은 묘의 완성도 보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 일 것이다. 본격적으로 이집트를 알기 전에는 이집트 문화재는 외국인에 의해 도굴, 파괴, 약탈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새발의 피였다. 이집트인에 의한 도굴의 역사는 파피루스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세상이 어지럽고 경제가 피폐해질 때마다 도굴은 더 조직적으로 이루어졌고, 묘의 부장품들은 손쉽게 가져 나오기 위해 무덤 안에서 녹여져 금으로 재활용 되었다. 숫제 자신의 집에서 무덤으로 통하는 전용 통로를 뚫어놓고 도굴을 감행했던 전설적인 인물들도 있었다. 지금도 한 달에 한번 꼴로 도굴범죄가 있다고 하니 이 나라 역사만큼 도굴의 역사도 길다. 또 조금만 발상을 뒤집어보면 이렇게 파고, 파도 끝없이 나오는 이 나라 유물의 끝은 어디일까 ? 궁금하다.... 에즈딘이 농담처럼 외국에 나가있는 자기들의 유물을 다 돌려준다고 해도, 카이로 국립 박물관 같은 건물을 5채를 지어도 감당 못하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말은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우리는 오전 투어를 끝내고 점심을 먹었다. 식당과 식사는 훌륭했지만 솔직히 이집트의 주요리가 무언지도 모르겠고, 모든 음식이 개성 없이 각국의 요리를 퓨전 스타일로 섞어 놓은 것 같아 특유의 맛을 찾을 수가 없다. 음식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자 ! 먹어 봅시다. 건강하고 힘찬 에너지를 얻기 위해....”하며 먹는다. 점심 후 호텔로 돌아와 2시간 정도 휴식 시간을 가졌다. 우리 부부는 호텔 주변을 좀 돌아다녔는데, 먼지가 너무 많고 특별한 볼거리도 없어 돌아왔다. ![]() 시인은 시가 나오고 화가는 저절로 그림이 그려질 장소이다. 가장 서정적인 이집트적 풍경과 무수한 룩소르의 사연을 모두 알고 있는 의미심장한 묵직함이 잘 조화된 나일의 얼굴이다. 그래서인지 이 호텔은 서구인의 장기 투숙자가 많다. 호텔 야외 풀장에는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투탕카멘의 묘를 발견한 하워드 카터에게 돈을 댄 영국의 캐너번 경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이집트 요양을 왔다고 들었을 때, 그 사람 취미 참 묘하다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이곳을 와보니, 습기 많은 영국 기후를 벗어난 이 계절의 적당한 햇님의 사랑은 요양 정도가 아니라 치료도 될 것 같다. 신랑은 내가 양말 2컬레 빨래하는 동안, 잠이 들었다. 정말 탁월한 재주다. 나는 베란다에 앉아 나일 강을 마음껏 즐겼다. 이 얼마나 평화로운 여유인가 ! 휴식을 취한 뒤 카르낙 신전으로 갔다. 매표소 앞에서부터 줄 서있는 사람들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제대로 구경을 할 수 있을런지.... 이 신전은 규모로나 역사로나 세계 제 1일 것이다. 신전 크기가 남북으로 거의 2km정도이다. 18왕조 아멘호테프2세(BC 1453~1419년)부터 짓기 시작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33~30년)까지 1,400여년에 걸쳐 계속 새로운 건축물이 세워졌다. 룩소르의 주신 아몬 신을 위해 건립되기 시작해 각 왕조를 지나면서 봉헌된 작은 신전 건물들이 늘어났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신전 자체는 미완성이다. 우리는 양머리 스핑크스 대로를 걸어 제 1탑문을 통과해 신전 내부로 들어섰다.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을 중심으로 주변에 있는 신전 중에 람세스 3세 신전 내부를 구경했다. 예상대로 사람이 많아 모두 파도처럼 휩쓸려 다닌다. 조명하나 없는 신전 내부는 음산하고 꿉꿉하다. 제대로 구경 할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제 2탑문 앞, 얼굴이 많이 훼손된 람세스2세의 거상은 호위병처럼 서 있는 종려나무 한 그루와 짝을 이루어 묘한 흡입력으로 눈길을 끈다. 제2탑문을 지나 주 신전인 다주식 홀로 들어섰다. “아 ! 아 ! 이 장엄함은 무엇인가 ?” “내 피를 일시에 덥혀 영혼을 휘감는 속수무책인 감동의 정체는 무엇일까?” 감동의 출발은 두말 할 것 없는 크기다. ![]() 기둥의 둘레는 10m정도이다. 기둥 하나 하나는 음각 부조로 가득 했으며 기둥의 머릿돌은 파피루스의 꽃받침과 꽃봉우리로 우아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다. 화려한 채색 기둥이었다는 그 흔적은 머릿돌 부근에 아직도 상처의 딱지처럼 조금씩 남아있다. 기둥의 높낮이를 이용해 만들어졌다는 천정의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이 신전의 내부를 신비하고 몽환적으로 만들었단다. 물론 지금은 그 창들이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지만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아니 넘치도록 신비하고 환상적이며 경이롭다. 인간의 사고가 무의식적인 과학적 이성에 기초하기 전에, 그 당시 이집트인들은 본능적인 육감에 의지해서 나일강의 변화에 따라 살았다. 왜 ? 왜 ? 가 사고의 중심이 아니라 자신들의 주변을 둘러 싼 모든 것의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정의이며, 사고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왜 이런 신전을 지어야 했고, 그 신에게 진심으로 의탁하고 간구했던 마음이 얼마나 절절 했을 지가 느껴진다. ![]() “도대체 이런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 수 있는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그 머릿속은 어찌 이리 깊을 수 있을까 ?” 나 개인은 볼품없는 무리의 숫자에 불과하지만, 인류라는 이름으로 묶여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 홀에 들어와 넋을 잃고 기둥 사이를 표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한 애정을 느낀다. 불가사의 ? 이곳은 인간의 본능적 오감이 집대성되어 차원이 고결해진 감각이 충만해지는 진정한 불가사의한 장소이다. 신랑이 다른 곳을 구경하고 다시 이곳을 오자고 재촉한다. 이번 여행 특별한 그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벌써 원하던 것이 모두 내 속에 들어와 버렸다는 환희와 포만감이 느껴졌다. 이 홀을 나서면 또 광장이 나타나고 여러 신전이 있지만 너무 많이 훼손되었다. 제3 탑문과 4탑문 사이에 1개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원래는 18왕조 투트모세스1세와 3세의 두쌍의 오벨리스크가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만 남았다. 조금 더 지나면 앞에서 본 것보다 좀 더 큰 하트셉수트 여왕의 오벨리스크가 서있다. 오벨리스크는 항상 쌍으로 세워졌으나 현재 쌍으로 서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오벨리스크는 아몬신의 상징이며 파라오 권위의 상징이기도하다. 해시계 역할도 했단다. 이집트 전역에 120여개의 오벨리스크가 있다고 하나 현재, 6개 정도가 남았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오벨리스크처럼 다음 왕에 의해 계획적으로 파괴된 경우도 있지만 로마지배 시절 가장 많은 수난을 당해 유럽으로 실려 갔다. 로마로만 12개 정도가 실려 갔다. 이 카르낙 신전 투트모세스3세의 오벨리스크 중 한 개가 지금도 이태리 라테라노의 산 조반니 광장에 서 있다. 또 한 개는 터키 이스탐불 히포드롬 광장에.... 유럽으로 실려 가던 중 지중해에 수장된 것만도 족히 20여개는 된단다. 유럽인들의 오벨리스크 탐욕은 전승 기념품으로 이만큼 폼나는 물건이 없다는 확신에 기인하겠지만 나는 기독교적인 사상에 무게를 두고 싶다. 신에 가깝게 가기위한 유럽의 고딕 양식 건축물을 생각하면 유럽인들은 이 오벨리스크 앞에 서서 자신의 왜소함을 느끼고, 그래서 더 강한 신에 대한 그리움을 이 묵직한 화강암 돌에서 보았지 않았을까 ? 이집트에서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있는 오벨리스크도 반환 받고 싶어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오벨리스크만은 그대로 두어도 손해 볼 일 없을 것 같다. 솔직히 프랑스 콩코드 광장이나 바티칸 시티 광장의 오벨리스크가 이 신전의 것보다 존재감이 더 컸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집트의 약탈물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그렇게 훔치고 싶어 했던 오벨리스크의 영혼은 어디에 있던 이집트의 정신이다. 그렇다면 영원히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었던 이집트의 파라오가 근사하고 넉넉한 미소를 띠고 그들을 굽어 살펴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멋진 일 아닐까 ? 또 이집트인들은 세계인이 경의에 찬 눈길로 올려다보면서 찬사와 존경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 자신들이 얼마나 자랑스럽겠는가 ? ![]() 제 4탑문 안쪽에는 하트셉수트 여왕의 다른 오벨리스크가 길게 누워있다. 전체 길이의 3분의1 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하나 코앞에서 본 오벨리스크는 그 거대함을 우리에게 확인시킨다. 제 5탑문, 6탑문을 지나, 아몬신의 지성소까지 보고 오른편의 성스러운 연못 앞에서 기념사진 몇 장을 찍고, 지나온 모든 장소를 내달려 다주식 홀로 돌아왔다. 내 머리 속에 각인된 이 거대한 건축물을 제대로 찍고 싶어 안달을 냈지만 도저히 불가능했다. 내 카메라가 이곳의 규모를 감당하지 못한다. 포기하고 기둥 하나, 하나를 가슴에 머리에 손끝에 담았다. 룩소르에는 천천히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룩소르 신전으로 갔다. 오늘 하루 이 신전 앞을 서너 번 통과하면서 슬쩍슬쩍 구경했었다. 매표소 앞에서니 신전에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룩소르 신전은 축제기간 동안 아몬신을 모셨던 곳으로 카르낙 신전과 연결되어있다. 이 신전도 아멘호테프3세부터 계속 증축되었다. 그러나 신전 입구 탑문에 람세스2세의 건축물에 꼭 나타나는 힛타이트족과의 전투 모습이 새겨져있어 그만을 위한 신전 같다. 또 이 신전 석상들이 거의 그의 것이기도 하다. 이 신전은 카르낙 신전에 비해 규모도 작고 다주식 홀 같은 입이 딱 벌어지는 유적은 없지만 어두운 밤 붉은 조명을 받은 신전은 낭만적이다. 그리고 많은 석상과 여느 신전의 기둥과 다른 기둥이 특이해서 눈길을 끈다. 원통형 기둥에 부조가 없고 입체적으로 사암을 잘라 기둥자체에 식물 줄기 같은 골을 만들고, 머릿돌은 봉긋한 꽃 봉우리를 표현했다. 파피루스의 꽃대를 그대로 돌로 옮겨 놓았다. 신전에는 이미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아 벽면의 부조를 구경하기도 틀렸고 해서 우리는 가장 넓은 중정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아름다운 기둥에 둘려 쌓여 이렇게 앉아있으니 꿈만 같다. ![]() 타임머신을 타고와 3,000년 전 이집트인들의 꿈과 여유를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현재의 내가 영화 필름 속의 그들을 보고 있기도 한 것 같은 경계가 모호한 상태에 빠진다. “아 ! 아무려면 어떤가? 이미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 여행은 이래서 좋다. 시공간을 초월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으니.... 신전을 돌아서 입구로 나오니, 지금은 파리 하늘을 찌르고 있는 짝꿍을 그리며 서 있는 오벨리스크가 유난히 높아 보인다. ![]() 해만 지면 기온이 떨어져 은근히 춥다. 룩소르 시장으로 갔다. 이국적인 물건들로 넘쳐나지만 거의 관광객을 상대로 파는 기념품 정도이며 이 상점, 저 상점에서 어찌나 불러대는지.... 교장 선생님 내외분과 한 상점을 골라 들어가 사모님은 손자에게 줄 피라미드 모형 기념품을 사시고, 나는 종 2개를 샀다. 구경은 즐겁지만 쇼핑 자체는 고역이다. 특히 지금처럼 밀고 당겨야 할 때는.....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원칙이 있다. 내가 조금 손해 보겠다는.... “당신 나라에 들어왔으니 제가 세금을 조금 내고 가겠습니다.” 하고 마음먹으면 바가지를 써도 그리 마음 아프지 않다. 또 써 봐야 한국 돈으로 1만원 내외다. 실지로 그리 살 만한 물건도 없다. 우리나라 제품과 비교하면.... 시장을 돌아 나오니 강 과장이 호텔까지 말을 타잔다. 꼭 해봐야하는 이벤트라고.... 이러니 테마세이투어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낸 돈에 포함된 옵션이라도 그 장소에서 꼭 경험해 봐야 할 여행의 재미를 가는 그물로 걸러내 보여주면 감동 받을 수 밖에.... 두 사람씩 타고 어두운 룩소르를 달렸다. 약간 춥기는 하지만 경쾌한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를 관통하는 낭만을 무슨 언어로 표현 하리 ! 또 고대의 시장에서 전혀 진화하지 않은 룩소르 시민의 밥통인 재래시장을 통과 할 때는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좁은 골목을 말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내 달린다 ! 수많은 인파와 거리에 내놓은 물건을 요리저리 피해 말이 콧바람을 내며 달릴 땐, 영화 <벤허>의 말 경주 장면에서 느낀 스릴을 맛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어머 ! 어머 ! 사람 다치겠어...”하며 소리를 질러대다, 어느새 이 무모함이 즐거워진다. 또 진기한 구경거리는 얼마나 많은지....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자연산 수세미를 든 콧수염 아저씨가 우리를 보고 “수세미 ! 수세미 ! 사”하며 소리 지를 땐 박장대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영특한 어떤 우리 국민이 멋진 말을 가르쳤군 !” 이렇게 긴 룩소르의 하루가 지나갔다. 아직도 볼거리가 많은 이 도시를 떠나야하다니....하루만 더 머물었으면 좋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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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9일 (제 6일) - 이집트 생명의 도시, 아스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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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 30분에 일어났다. 아침 7:00시. 경찰이 지정한 장소로 아스완 쪽으로 가는 관광객은 다 모인다.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경찰 인도 하에 관광객을 태운 차량은 긴 행렬을 이루며 이동하는 것이다. 이집트 ! 참 귀여운 나라다. 눈에 안 보이는 듯 눈에 보이게 이 나라에 들어온 관광객의 호주머니를 털기 위한 모든 장치가 되어있다. 물론 어이없고 기분이 나쁘기도 하지만 화를 낼 정도가 아니라 혀를 차는 정도로 끝낼 수 있는.... 여러 나라를 다녀 봤지만 이 나라처럼 도로가 단순, 명료한 국가는 본 적이 없다. 국토의 97%가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사막이다 보니 나일 강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주도로가 있다. 그 이상의 도로는 있을 필요도 없다. 또 터키에 가서 온 나라에 널려있는 군인을 보고 놀랬다면, 이 나라는 내 감각으로 30m 간격으로 경찰이 서 있다. 관광객을 상대로 푼돈을 뜯는 사기꾼은 있어도 악질적인 범죄는 있을 수가 없어보였다. 그런데 경찰의 인도라니? 친절이 넘친다. 이것은 곳곳에 숨어있는 뇌물이 필요한 것이다. 옆에서 보니 강 과장은 숫제 주머니를 풀어놓고 있다. 운전수도 수시로 바뀌고, 왠 여행사 직원도 그리 바뀌는지.... 투어가 끝날 때쯤 약간 껴면적은 얼굴로 여행사 직원이 수금(?)을 하기 위해 나타난다. 그러나 이 나라 재정 수입의 거의 반을 관광산업에 의지하고 있는 사정을 알면 이해도 된다. 나라가 가난해서 충분한 급료를 주지 못해 공식적으로 공무원의 two-job를 권장하는 나라에서 돈 쓰겠다고 제 발로 들어온 사람들에게 조금 세금을 걷겠다는데, 이들을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매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이들이 옳고 정당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솔직히 이런 이들을 보면서 무시하고 얏잡아 보는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면 그것도 내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리라. 단지 이 나라에서는 우리 같은 엄격한 도덕적 기준이 별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건강하고 편안한 도덕적 가치가 이들에게 너무 버겁고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 같은 선진국의 무시무시한 소매치기를 생각하면, 웃으며 조금 당해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 석유 자원 확보하겠다고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남의 나라 쳐들어가는 강대국의 천인공노 할 만행과 비교하면, 이들이 하는 짓거리는 귀여워 윙크라도 해주고 싶다. 그러나 이집트 국민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당신들의 철없는 이런 행동 때문에 당신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 룩소르에서 아스완으로 가는 길 ! 여기에 따뜻한 이집트가 있다. 책에서 무수히 읽어 작심을 하고 왔지만 처음 본 나일 강은 한심하고 참 시시하다.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한 곳이라니, 강의 길이로 따지면 세계 제 1이라니 하는 의미와 무게가 무색 할 지경이다. 아무리 넓은 곳이라도 300m를 넘지 못하고, 대부분은 100m 남짓의 지극히 평범한 흐르는 듯 마는 듯한 강이다. ![]() 아마존 하류의 바다 같은 넓이의 강폭을 생각하면 확실히 비교가 된다. 이 작고 조용한 나일 강을 따라 강 양쪽은 좁고 기다란 경작지가 종려나무와 함께 펼쳐져 있고, 우리가 달리는 도로의 왼편으로는 환경에 죄 짓지 않은 이들의 소박한 흙집이 어깨를 맞대고 길게 길게 서 있다. 길손들을 위해 길에 내어놓은 푸른 이끼 낀 물 항아리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아침부터 느긋하게 물 담배를 빨고 있는 아저씨의 눈빛도 다정스럽고, 우리를 향해 손 흔드는 아이들도 사랑스럽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 이들의 삶이 불행하고 가엽다고 누가 감히 말 할 수 있겠는가 ? 그러나 이제는 그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없게 진화되었는지, 타락되어 버렸는지 모를 내가 그들을 보며 가슴 따뜻한 정서를 느끼는 것이 자만의 찌꺼기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 신전 앞에 관광객을 태우기 위한 마차가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버스처럼 도열해 있는 것이 이채롭다. 이 신전은 호로스 신을 위한 장소이다. 제 18왕조의 신전이 있던 곳에 프톨레마이우스 왕조 때(BC 333~30)거의 300여 년간, 6대에 걸쳐 만들어진 신전이다. 물론 카르낙 신전 다음으로 크기도 하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그 당시 사회가 상당히 혼란했던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실지로 신전의 벽에 새겨진 <카르투쉬>에 왕의 이름이 없는 것이 있다. 이는 언제 왕이 바뀔지 모를 정도로 불안했던 정세를 반영한 것이란다. ![]() 탑문 안쪽 중정을 싸고 있는 기둥은 지금까지 보아온 기둥과 확실히 다르다. 원형 기둥은 똑 같지만 머릿돌 부분에 헬레니즘의 영향이 묻어있다. 이집트 장인들의 솜씨로 만들어진 시대의 반영이 느껴진다. 벽의 부조도 눈여겨 볼만하다. ![]() 람세스3세 같은 경우 자신의<카르투쉬>는 팔꿈치가 다 들어 갈 정도로 깊이 팠단다. 그러나 여기 부조는 왕들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음각과 양각이 조화를 이루어 돋보인다. 3000여 년 동안 변함없는 그림 기법은 여전하지만 이 신전의 부조는 확실히 선들이 부드럽고 세련미가 더해졌다. 신전을 구경하고 나와 에드푸 시내를 통과하면서 본 시장 모습은 정말 이국적이다. 갈라베이야를 입지 않은 남성은 보기 힘들고 눈에 띄게 거리에 여성이 없다. 간혹 보이는 여성은 한결같이 눈만 내놓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단순하고 변화 없는 문화가 계속 될 수 있는지.... 카이로보다 보수적인 냄새가 짙다. ![]() 이 신전 역시 프톨레마이우스 시대와 로마 지배 시대에 건설 된 곳으로 이집트 유일의 쌍둥이 신전이다. 신전 전면에서 왼쪽은 호로스 신을 위한, 오른쪽은 악어 신(세베크)을 위한 신전이다. 지금까지 본 신전 중 유일하게 탑문을 볼 수가 없었는데, 탑문과 안뜰은 나일 강 범람 때, 유실되어 그 흔적만 남아있다. 안뜰 기둥의 3분의1 정도만 남아있는데 그런대로 운치가 있다. 이 신전의 위치가 쾌 높아 푸른 나일이 그림처럼 내려다보이는데, 나일 강의 범람이라니.... 새삼 홍수의 위력이 느껴진다. ![]() 부조는 세부장식이 더 정교하고 신들 다리 근육까지 묘사 된 점도 흥미롭다. 신전을 나와 나일 강을 따라 걸으니 바람 상쾌하고 햇살 따뜻하니 콧노래가 절로 난다. 아스완이 가까워지면서 나일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하늘빛보다 더 깊은 쪽빛 강물 위에 떠 있는 하얀 펠루카와 어우러진 경치는 너무 평화롭다. 이집트에 와 룩소르까지만 보고 떠난다는 것은 나일 강에 대한 모독이며 자신의 여행에 오점을 남기는 것이다. 아스완 시내로 들어와 점심을 먹고 이시스 신전으로 갔다. 이시스는 호로스 신의 어머니로 인자한 어머니 신이며 치료와 영생에 대한 약속의 여신이다. 1971년 아스완 하이댐이 건설되면서 아스완 일대의 20여 개 신전들이 물에 잠겼다. 이 신전들은 거의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이전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 필레 섬의 이시스 신전과 아부심벨이다. 이시스 신전은 인근의 아질카 섬으로 이전되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아질카 섬의 이시스 신전이라고 말 할 수 있으나 여전히 필레 섬의 이시스 신전으로 불리우고 있다. ![]() 멀리서부터 보이는 신전은 물 위에 떠 있는 수반 위에 얌전히 얹혀있는 작은 성처럼 보인다. 배에 내려 조금 오르니 바로 광장 같은 안뜰과 양 옆으로 열지어 서있는 기둥의 회랑이 지금까지 보아 온 어느 신전보다 아름답다. 저절로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 신전도 BC 4세기경부터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거의 프톨레마이우스와 로마 지배 시대에 만들어졌다. 이시스 신은 그리스 신화의 <헤라>에 비견되며, 로마 시대에는 자국민에게도 숭배되어 화산에 묻힌 폼베이에서도 지성소가 발견되었다. 그래서인지 극진한 정성으로 이 신전을 만들고, 또 자애로운 이 신을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섬이라는 특수 조건과 합쳐져 격조 높은 신성함이 흐르고 있다. 정면에서의 왼쪽 기둥은 머릿돌 문양이 다양하다. 파피루스 꽃대라고하나 코린트 식 기둥의 아카소스 문양과도 흡사하다. 이곳에서 우리는 특히 여유롭게 구경 할 수 있었는데, 하나 하나의 기둥이 모두 가슴에 와 닿았다. 오른 쪽 기둥은 이 신전이 미완성이란 것을 말해준다. ![]() 또 이 신전이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곳곳에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신전을 4만 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이곳으로 옮겨오는 것도 큰일이었겠지만 진흙과 이끼류를 제거하는 일도 엄청난 인내를 요구 했을 것 같다. 이 신전에서 단연코 돋보이는 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트라야누스 황제의 방이다. 분명 이집트 건축 양식임에 틀림없지만 느낌은 로마적인 냄새가 진하다. 이 신전은 밤에 불빛 쇼도 하고 음악회도 열린단다. 상상만으로도 감미로운 한밤의 추억이 되지 싶다. 밤의 이시스 신전을 그리며 아쉽게 섬을 나왔다. 선착장부터 꼬마 아이들이 이것저것 사라고 따라 다닌다. 우리는 1불짜리 기다란 이집트 나일 강 지도를 샀다. 귀찮아서 샀지만 지도는 1불 값어치를 하고도 남는다. 그 지도는 지금 우리 집 서재 벽에 붙어있는데, 지도를 보고 있으면 97%의 땅을 포기하고 오로지 3% 나일 강만을 편애하는 이집트인의 마음을 알 것 같고, 또 파피루스 꽃대처럼 서있는 나일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라는 말이 마음속으로 쏙 들어온다. 오늘 묵을 호텔로 가기위해 펠루카를 탔다. 아스완의 나일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펠루카는 커다란 돛대를 달고 바람의 힘으로만 움직인다. 펠루카를 타면 코스인 듯, 선원들이 흥을 돋우며 춤과 노래를 부르게 한다. 처음에는 우리 일행도 좀 적극적으로 응하더니 곧 열기가 식어버린다. 일행 중에 걸쭉하고 가무에 능한 이가 있어야하는데, 내가 봐도 그런 부류의 인물이 없다. 나는 선원의 조수인 누비안 족 미소년에게 마음을 빼앗겨 솔직히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랍인 같은 얼굴에 피부색만 새까만 자그마한 얼굴이 예술이다. 신랑도 감탄한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이미 내가 눈길을 너무 많이 보내 아이가 경계하는 표정이 역역해 포기했다. ![]() 나도 땀 흘리며 배 난간을 꼭 잡고 애쓰는 것이 안쓰러워 돈을 건네니, 에즈딘이 젊잖게 주지 말았으면 한다. 애들 보고도 작은 소리로 그만 가라고 한다. 왜 내가 에즈딘 마음을 모르겠는가 ? 무안해서 “애들이 귀엽잖아요 !” 했지만 손쉽게 돈버는 재미를 알게 될까봐 나도 걱정이 되었다. 호텔은 나일 강의 하중도 하나를 다 차지하고 서있다. 경치도 근사하고 운동장 같은 로비도 마음에 든다. 방을 배정 받고 저녁 식사 때까지 산책을 했다. 이 호텔은 내가 투숙해 본 호텔 중 가장 넓다. 본관 건물이 있고, 장기 투숙자를 위한 콘도가 수도 없이 많으며 어떤 특정인을 위한 별장까지 길게 길게 줄 서 있다. 우리는 풀장을 지나 동물원과 농장까지 구경하고 반대편은 저녁 식사 후 구경하기로 했다. 저녁 식사는 또 배를 타고 다른 섬으로 갔다. 외국인 전용식당 같았는데, 아스완에 들어 온 각국의 여행객은 다 모아놓은 것 같다. 사람이 많으니 소란스럽고, 서비스는 포기해야한다. 나오는 음식도 야박스럽고 모두 말은 없지만 식당을 나설 때 표정이 꿀꿀하다. 아스완 지역에서 단체 외국인 손님이 갈만한 식당 찾기가 쉽지 않단다. 호텔로 돌아와 소화도 시킬 겸 걸었다. 건강한 나무와 푸른 잔디로 뒤덮인 호텔은 좋은 구경거리였다. 우리는 몇km는 족히 걸었지만 호텔 끝까지 가지 못하고 되돌아섰다. 오랜만에 여유 있게 잠자리에 든 날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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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일 (제 7일) - 파라오의 숨겨진 또 하나의 제국, 아부심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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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분에 일어났다. 공항은 한산한 편이었다. 우리나라 여행 상품 중, 아부심벨을 항공편으로 가는 여행사는 <테마세이투어>가 유일하지 싶다. 거의 룩소르에서 아스완을 올 때와 마찬가지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3시간 정도 버스로 달려간다.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 할 수 없지만 나는 꼭 비행기를 타 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특별히 비행기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며(무지무지 무서워한다), 귀족 같은 여행을 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버스로 이동하면서 본 풍광이 그 나라를 대변하기도 해 좋아 한다. 그러나 아스완에서 아부심벨까지의 비행기 여정은 이집트와 나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승객이 많지 않아 뒷좌석이 텅텅 비었다. 나는 좀 넓게 갈 욕심으로 뒤로 가서 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이륙과 함께 눈에 들어 온 풍경은 전율을 느끼게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로 만들어진 나세르호는 건기인 이 계절에 맞게 온 배를 다 드러내고 누워 있었다.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발원해 6,000km를 달려 내려 온 나일은 완전 무장해제 상태로 나를 멀뚱히 올려보고 있다. 호수의 주변 사막에는 범람 했을 때 흔적으로 그래서 지금은 메마른 추억의 물길을 주름처럼 접고, 빛나는 계절 범람 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범람 기의 풍요와 횡포가 만든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보고 느껴도 믿지 못했던 나일의 진정한 저력을 여기서 느낄 수 있었다. 비행시간 50분 동안 본 나일은 광대하고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면 끝없는 사막이었겠지만 하늘에서 본 것은 그 사막이 결국 나일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 그 사랑으로 이 민족을 먹여 살리고 찬란한 문명을 탄생시켰다. 지금도 그 음덕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민족이 나일의 선물 량을 조절해 보겠다고 목 언저리에 줄을 메달아 놓고 조였다 풀었다 하고 있으니..... 왠지 불안하다.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로 이집트는 균등하고, 계획적인 삶을 가질 수 있어 분명 편안해졌다. 에즈딘도 댐 건설로 인한 실보다 득이 많다고 했다. ![]() 하늘에서 내려 본 나일은 우리 인간이 관장하기에는 너무 큰 존재였다. 진심으로 그의 노여움이 없기를 빌었다. 내가 창에 코를 박고 끝없이 밖을 보고 있으니, 남자 승무원이 이제 곧 아부심벨이 나타날 거라고 말해준다. 고맙다고 예쁘게(?) 웃어주었더니 숫제 옆에 앉아 결정적인 순간을 가르쳐준다. 그 덕에 멀기는 하지만 하늘에서 본 아부심벨을 카메라에 담았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친절하게 셔틀버스가 아부심벨까지 데려다 준단다. 비행기표 값에 이 버스비도 포함되어 있다는 소린가 ? 아부심벨 앞마을은 사막도시 특유의 쓸쓸함이 묻어있다. 휑하고 메마른 모래바람만 존재하는 마을이다. 이집트의 빈곤함이 그리 묻어있지 않은 제법 운치 있는 집들도 꽤 있다. 버스는 아부심벨 뒤 쪽 상가 앞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인적 없던 마을의 주민은 이곳에 다 모여 장사를 하는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물건들을 들고 우리들을 따라 다닌다. 이집트 와 처음으로 뇌가 익을 것처럼 햇살이 따갑고 덥다. 인공 산을 돌아서니 나일 강을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아부심벨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이집트를 거쳐 오면서 이들의 거대한 유적에 익숙해졌는지 ‘악’ 소리는 나지 않지만, 중국고사 <우공이산>이 머리를 ‘탁’ 친다.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이곳이 수몰 위기에 쳐했을 때, 세계50여 개 국이 돈과 기술을 합쳐 이 인류 유산을 구했다. 1963~66년에 걸쳐 하나의 무게가 거의 30톤 씩 나가는 2,000여 개의 돌 부럭을 위쪽으로 이동 시켰다. 저 위에 계신 분도 작정을 하고 산을 뜯어내는 대는 말릴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 신전 입구에는 절벽을 깍아 만든 4명의 람세스2세와 2명의 네페르타리가 서있다. 지금까지 본 석상에는 아무리 왕비라도 왕의 발 사이에 끼여 서 있는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왕과 대등한 크기의 석상이라니.... 대단하다. 왕과 같은 크기의 석상을 가진 이 왕비는 분명 왕의 사랑과 사회적 존경과 지위를 마음껏 누렸던 것 같다. 실지로 이 신전의 벽과 기둥에는 떨어질 수 없는 짝처럼 람세스2세와 네페르타리 이름이 항상 같이 나타난다. 또 신전 전면에 <람세스2세가 무트 신의 사랑을 받은 정비, 네페르타리를 위해 불멸의 기술을 발휘해 산을 파서 신전을 지었다>라고 한 글귀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역사를 비틀어 보는 재미를 더 해 본다면, 왕비의 신전 앞에 자신의 입상을 더 많이 세우고 신전 벽에도 수없이 등장하는 걸 보면, 자비로운 남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나 하는 가설이 더 일리 있어 보인다. 실지로 천수를 누린 왕에게는 이세트-노프레트라는 왕비도 있었고, 자신의 4명의 딸과도 결혼을 했으며 힛타이트 공주도 정비로 삼았다. 또 하렘의 수많은 여자들은 어찌하고.... 오죽했으면 자식이 100여명이나 되었을꼬.... 그런데 한 여자에게 그렇게 순정을...... 약간 냄새가 난다. 신전의 내부는 의외로 좁고 많이 어둡다. 사진을 못 찍게 해서 안타깝다. 하토르 여신이 부조된 기둥이 특이 할까 ? 특별히 인상 깊었던 것은 없다. 오랜 시간 모래에 묻혀있어서인지 보존 상태는 좋았다. ![]() 높이 22m에 달하는 람세스2세의 좌상은 너무 거대해 현실감이 없을 정도이다. 여행 첫 날 멤피스에서 본 누워있는 석상보다 인물이 떨어지지만 대~~단하다. 왼쪽 석상 중 하나는 떨어져 나와 바로 발밑에 엎어져있다. 람세스2세 살아 생전에 부서졌지만 왕에게 보고하지 않았단다.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보고 하겠는가 ? 또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만들 때는 심혈을 기우렸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러다 잊혀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신전을 들어서면 대 열주 홀이 나타나고, 양 옆으로 오시리스 신과 똑같은 포즈의 람세스2세 상이 4개 씩 8개가 서있다. 밖의 멋진 좌상에 비해 상체와 하체가 불균형을 이루어 완성미가 떨어져 보인다. 입구에서 제일 안쪽 지성소까지는 약 48m인데, 이 지성소에 1년에 두 번 햇빛이 든단다. 왕의 대관식이 있었던 10월 20일(현재는 22일), 왕의 생일 2월20일(현재는 22일 )이란다. (신전을 옮기면서 이틀의 오차가 생겼다.) 실지로 2월에 온 한국 관광객 중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 있는 것 보면 낭설은 아닌가보다. 여행 중 얻은 큰 행운이었을 건데...... 부럽다. 나는 대 열주 홀 벽면의 카네쉬 전투의 부조에 폭 빠졌다. 룩소르에서도 유사한 부조를 봤지만 이곳은 섬세함과 치밀한 묘사가 아주 돋보인다. 혼자 마차를 타고 힛타이트 군사 진영을 휘젓고 있는 람세스2세는 심한 과장을 했다 해도 아주 근사하다. 정형화 되어있는 이집트 미술에서 일보 전진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뻥쟁이 파라오는 이 부조를 보고 아주 흐뭇해 장인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지 싶다. 파라오는 아주 마음먹고 이 신전을 자신의 영광된 이야기로 꽉꽉 채우고자 했음이 느껴진다. 이집트에 와서도 이곳까지 오기는 또 쉽지 않다. 많은 돈과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 와 실망하는 사람도 많다. 대단한 그 무엇을 기대하고 왔다가 자기 풀에 기가 꺽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한 곳이다. 이집트 역사에서 파라오 중의 파라오였던 람세스2세의 모든 것을 다시 한번 보고 느낄 수 있고, 대단한 건축 중독자였던 왕의 여러 건축물 중에 예술적 가치를 따졌을 때, 이곳이 으뜸 일 것이다. 더 더욱 이 귀중한 유산이 현대 기술의 놀라운 도약으로 사라질 뻔 했던 위기에서 인류의 도움으로 구제되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뿌듯한가 ! 우리는 공항에서 받은 도시락을 상가 노천카페에서 먹기로 했다. 서늘한 그늘 속에서 도시락을 펼치니 소풍 온 것처럼 즐겁다. 도시락은 기름에 살짝 볶은 쌀밥과 튀김 종류의 반찬들인데, 좀 말라있어 목에 자꾸 걸린다. 순간 ! 비행기에서 나온 고추장 2개를 챙겼던 기억이나 꺼내 놓으니 사모님 얼굴에 화색이 도셨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과 신랑은 끝까지 손도 대질 않는다. 선생님 내외분과 우리의 공통점은 해외에서의 한식을 싫어 한다는 점이다. 한식이 먹기는 편하고 입맛에 맞기는 하지만 피하고 싶다. 그 나라에 들어왔으면 그 나라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지론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온 관광객이 스파게티와 돈까스만 먹고 간다면 너무 한심하지 않나 ? 음식은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나 같은 경우도 엄청 가리는 것도 많고 시셋말로 입도 짧다. 또 탈도 잘 난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에는 입맛에 맞는 한 가지만을 먹더라도 현지 식을 고수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지금 같이 물기가 없어 괴로울 때는 고추장이 오아시스다. 우리 일행은 음식과 상관없이 끼리끼리 모여 이집트 땅 끝의 여유를 즐기며 모두 행복한 얼굴들이다. 다시 공항으로 왔다. 우리 일행은 <움무 쿨숨>의 CD를 발견하고 동을 내 버렸다. 에즈딘이 사막 가는 버스 속에서 이 전설적인 여가수를 알려주었는데, 모두 잊지 않고 호기심을 보인 것이다. 이 여가수가 죽은 지 20여년이 흘렀어도 이집트에서 아잔 소리 빼고 가장 많이 흘러나오는 그녀의 노래 소리로 하루를 열고 닫는단다. 나도 하나 샀다. 무척 기대를 했는데, 들어 본 결과는 영 아니다. 이집트 물가에 비하면 쾌 비쌌다는 기억이 드는데, CD에는 딱 한 곡이 들어있다. 그것도 콘써트 실황을 녹음 했는지 노래 소리보다 청중의 환호 소리가 더 크다. 한 번을 듣고 너무나 아니어서 당황하기까지 했다. 연달아 3번을 듣고 깨끗한 포기를 선언했다. 아무리 내가 음악에 조애가 없다고 쳐도 이렇게 소통이 안 될 수가 없다(이글을 쓰다가도 다시 한번 들어 보았다). 그녀의 음악이 모차르트나 비틀즈처럼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분명 아랍인만이 느낄 수 있는 심오한 그 무엇이 있고 가사 내용에 그 무엇이 있나보다. 아주 갑갑하고 입맛이 쓰다. 에즈딘에게 대충의 가사 내용이라도 들어 올 걸..... 그녀의 전성기는 나세르 대통령 시대와 맞물려 있었다. 1950~60년 대, 나세르 대통령에 의해 이집트가 아랍 국가들의 맹주가 되어 범 아랍주의의 시기를 열고, 서방의 그늘에서 벗어나 황금기를 구가 할 때, 그녀가 있었다. 그녀의 노래는 이집트의 제 4 피라미드가 되어 사막 나라의 열기보다 뜨겁게 중동 국가들을 달구었다. 그러니 현재의 이집트인에게 그녀의 노래는 좋은 시절의 향수도 되고, 현재의 삶에 위안도 되나보다. 아무리 그들을 이해하려고 애를 써도 이방인으로서의 깊은 한계를 느낀다. 공항 TV에서는 계속 아부심벨의 이전 공사 현장을 녹화한 테이프를 틀어준다. 흑백의 오랜 필름이지만 그 대단한 공사는 쾌 감동적이다. 오후 1시 10분 비행기로 다시 아스완으로 돌아왔다. 곧장 아스완 하이 댐으로 갔다. 댐 위에는 관광객과 휴일을 즐기러 나온 현지인들로 북적댄다. 브라질에서 <이타이푸>댐을 본 후유증으로 댐 자체로는 별 느낌이 없다. 거대하기는 하지만 양 끝이 보이는 정도이니..... 이 댐에 들어 간 돌의 양이 쿠푸 피라미드를 세운 돌의 17배나 된단다. 이 민족의 피가 되고 살이 되었던 자양분 덩어리 토사는 댐 안에서 자꾸 쌓여 천대를 받다 일본의 자본으로 퍼 올려져 비료가 되어 수출되고 있단다. 태고 적부터 인류의 젖줄이었던 나일은 10여 개 국이 공유하고 있어 현재 지구상에서 물 분쟁 위험 지역으로 요르단 강과 1, 2위를 다투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가장 하류에 위치한 이집트가 불리 할 수 있어 어떻게 해서든 수자원을 확보해야하는 이들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에즈딘 설명대로 만약 이 댐에 무슨 일이 생기면 이집트는 한 순간에 물바다가 될 수도 있어 항상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사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과장법을 쓰자면 관광객만큼 이곳을 지키는 군인이 많다. 이곳에서 3km정도 떨어진 곳에 대규모 군사기지도 있다. 그야말로 물과의 전쟁에 대비하고 있다고나 할까 ? 최근 뉴스에 세계 위험 유적 7대 군에 룩소르가 들어있었다. 이 댐의 건설로 룩소르 유적 주위 토양의 염분도가 나날이 높아져 부식과 훼손이 가속화 되고 있단다. 눈에 띄지 않게 훼손되는 유적이 이럴진대 경작지는 어떻겠는가 ? 지력이 떨어져 화학비료를 뿌리지 않으면 이제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주름진 얼굴 가득 서글픈 미소를 짓던 TV 화면 속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렇게 피해를 알면서도 그 피해를 안고 살아가야하는 그들이 서럽다. 어느 시인의 기구(祈求)처럼 <아무도 아무를 해치지 않는 세상 되게 하옵소서>하고 빌어본다. ![]() 정확하게 채석장의 흔적만 남은 폐허의 장소이다. 돌산 하나가 무수한 상처를 안고 자신의 공로를 온 몸으로 드러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완성되었다면 지금 쯤 룩소르 신전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을 미완성 오벨리스크도 몇 천 년을 누워있다. 균열이 생겨 만들다 버려졌다는 오벨리스크는 높이만도 42m, 무게는 1,200톤가량이 되었을 거란다. 지금까지 보아온 신전의 화강암들이 거의 이곳 출신이라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다양한 볼거리를 구경했지만 채석장은 처음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이런 곳을 왜 왔지 ?” 싶지만 이곳을 통해 이들의 문화와 삶을 이해하고 엿볼 수 있다면 여행의 의미를 한층 업그레이드 할 수 있지 않을까 ? 한낮의 더위가 어느 정도 가신 채석장을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뒤돌아보니, 새로운 이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듯 서늘한 바람이 일고 있다. 숨 가쁘게 달려온 하루의 일정을 정리하고 쉬기 위해 어제 묵었던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식사 전까지 로비의 테라스에 앉아 4쌍의 부부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젊은 사람들은 우리더러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나누었냐고 물었지만, 참 말하기 서글픈 주제였다. 무릎에 좋은 약, 허리에 좋은 체조, 좋은 병원......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어제 아스완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던 장소였다. 그날은 우리가 거의 다 먹을 때 쯤 다른 일행이 들어와 비교적 오붓하게 식사를 즐겼던 것 같은데, 오늘은 영 사정이 달랐다. 우리가 도착 했을 때도 별로 빈자리가 없었는데, 우리 식사가 반 쯤 진행되었을 때는 각국의 손님들이 물 밀 듯이 들어왔다. 급기야 좌석이 없어 예약을 했던 가이드들과 지배인 사이에 언성이 높아지고 난리가 났다. 식사는 뷔페였는데, 음식이 원활히 채워 질 수가 없었다. 한눈에도 너무 손님이 많아 수요와 공급이 맞을 수가 없었다. 나는 대충 배를 채웠기에 손님들을 구경했는데 너무 재미있다. 서양인들은 내가 얼굴로 식별이 되지 않아 비교 할 수 없지만 우리, 일본, 중국은 하는 모양으로 국민성을 알 수 있다. 일본인은 우리보다 조금 늦게 나타나 식당의 상황에 놀라 지정된 좌석에 앉아 30분 째 돌부처가 되어있다. 가이드가 지배인이랑 옥신각신 하느라 별도의 지시가 없었는지 누구하나 불평 없이 마냥 기다리고 있다. 겨우 스프만 종업원이 가져다주고(물론 우리는 각자 가지고와 다 먹었다) 다른 음식은 각자 가져다 먹으라고 지시하자, 우물쭈물 거리면서 음식 진열대에 다가갔지만 누구 하나 접근을 못한다. 왜 냐 구 ? 이미 음식 진열대는 중국인들이 차지하고 자신의 것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좌석에 앉아 있는 일행을 향해 “야 ! 빨리 와 음식이 다 떨어져 가 ”하며 그 엄청난 억양의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내가 중국말을 할 줄 아느냐구 ?” 후후후... 눈치 9단인 내가 그걸 모를까. 우리 일행을 비롯한 한국인 ? 소리 소문 없이 남의 것까지 챙기지는 못해도 자신의 몫은 확실히 챙기고 있다. 유능한 우리 신랑은 후식을 포기한 나를 위해 오렌지 한 알을 가져다준다. 일본 여자 하나가 오렌지 한 개를 가져와 아직 아무 것도 못 가져온 옆 좌석의 일행에게(이들은 아직 전혀 식사를 하지 못했음), 작은 목소리로 무용담을 들려주다 나랑 눈이 마주쳤다. 내가 “아이구 !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하는 표정으로 윙크와 함께 미소를 날렸더니 입을 가리고 부끄러워하며 웃는다(참고로 일본어는 정확하게 들을 수 있음). 우리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땐, 음식 진열대에는 음식이 바닥났고, 그 주변엔 중국인과 어느 나라인지 모를 (확실히 영어, 불어, 독어는 아님)서양인들이 활화산 같은 본능을 분출하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앞으로도 나는 한국 사람답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후후후.... ![]() 공항으로 이동하기에는 너무 일러 시장 구경을 하기로 했다. 아스완 역을 정면에 두고 오른편으로 시장이 끝없이 이어졌다. 우리 부부는 특별히 살 것이 없어 한가롭게 어슬렁거리며 물건 구경보다 이곳의 분위기를 즐겼다. 그러나 룩소르에서 너무나 익사이팅한 시장 구경을 해서인지 3km정도를 걷고 나니 단조로운 풍경이 지겨워 일찍 약속된 장소로 왔다. 울산 여선생님 두 분이 먼저 와있었다. 강 과장이 우리더러 시샤(물 담배)를 해 보라고 권한다. 나도 궁금했지만 신랑은 신이 났다. 몇 번 빨아보았지만 “이걸 담배라고 할 수 있나 ”싶다. 니코틴 냄새는 없고 향긋한 사과냄새만 난다. 된장찌개 한 숟가락만 먹어보고 A4 용지 두 장 분량의 그 느낌을 표현 할 자신이 있지만 이 맛은 한 줄도 힘들다. 몇 시간이고 앉아 물 담배를 즐기고 있는 이집트인을 구경하는 것이 그들을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 같다. 카이로 쉐라톤 호텔로 돌아오니 거의 밤 2시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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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 (제 8일) - 이방인의 영혼도 사랑 받는 카이로의 모스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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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느긋하게 9시부터 일정을 시작했다. 내 어린 날의 구체적인 꿈이었던 피라미드를 보러 갔다. 기자로 이동하면서 보게 되는 몇 개의 나일 강 지류는 완전히 생명을 잃었다. 바람에 날려 온 쓰레기와 폐수로 덮여있다. 쿠푸왕 피라미드 코앞에 주변과 어울리지 않게 깨끗한 호텔이 있었는데, 우리에게 아주 의미 깊은 곳이다. 1943년 카이로 1차 회담이 열렸던 장소이다. 미, 영, 중 지도자들이 모여 일본의 응징을 단합하고, 특별 조항으로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 받은 회담이 바로 이 호텔에서 이루어졌다. 피라미드 ! 너무나 오랫동안 상상하고 사진에 익숙해서인지 항상 봐 왔던 육 삼 빌딩 같은 친근감이 든다. “어이 ! 오랜만이야. 만나서 반가워 !” 하는 정도랄까 ? 그러다 그의 발밑에 서니 비로소 현실이 되어 그의 존재감이 가슴에 와 닿는다. 3기의 피라미드 중 가장 큰 쿠푸 (BC 2589~2566년)왕의 것이다. 수치상으로 2.5톤 무게의 돌 250만 개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빼고라도 어마어마하다. 아무 생각 없이도 목이 꺽이고 입이 벌어지고 기가 찬다. 여기에 4,500여 년 전의 건축물이라는 걸 상기하면 옆에 서있는 이집트인들이 다시 보인다. ![]() 우리는 그 때, 족장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고인돌이라는 무덤 형태를 사용했다. 고인돌 하나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돌이 250만 개라구 ? 이 앞에 서면 저절로 경외심이 생기고, 보고 있는 내 자신이 무언가를 해냈다는 흡족함이 온 몸에 골고루 퍼진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하다, 조금 흥분이 가라앉으면 그들은 왜? 어떻게 ? 이것을 만들었을까 ? 하는 문제에 다다르게 된다. 이런 본능이 나 같은 비 전문가에게도 꿈틀거리니 새삼 고고학자나 과학자들의 심정은 말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형태 상의로는 단순한 정4각뿔의 돌무더기지만 보면 볼수록 궁금하고 뒤집어보고 싶고, 꿰뚫어보고 싶은 그 무엇이 확실히 있다.그래서 연구를 해보면 이곳에 수많은 과학과 기술이 숨어있으니 부동의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가리라. 인류가 작은 단세포의 생명체에서부터 진화해 유인원을 거쳐 시간과 함께 뇌가 진화해 왔다는 말이 정말 근거가 있는 말일까? 이 피라미드가 건설 될 당시를 생각하면 이런 거대한 구조물을 만든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달나라에 사람을 보낸 것만큼 엄청난 일이었을 건데...... 그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현재의 이집트인을 보면, 백번 양보해도 머리가 기우뚱해진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옆에 서있는 장사하는 아저씨를 보며 웃었더니, 이 눈치 없는 아저씨 마음 놓고 물건 사라고 드리댄다. “아 아 ! 정말 ! 아저씨 이런 행동 때문에 내가 속상하고 혼란스럽다구요 !” 아 ! 신은 피곤하다. 인간의 재능을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게 골고루 나누어 주려하면, 퇴보니 머니 해가며 무시하고 업신여기니..... 모두 흩어져 사진도 찍고 피라미드에 올라보기도 하면서 각자의 크기로 이집트의 자존심을 가슴에 담았다. 오늘 날씨가 장난 아니게 춥다. 모두 옷들이 얇아 가엽다. 강 과장은 어찌나 떨어대는지 내 모자를 하나 씌웠다. 여행을 다녀보면 몸의 컨디션을 위해 항상 추위와 더위에 대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외부의 물리적 조건에 대처하지 못하면 여행 자체가 망가져버린다. 어느 정도의 괴로움은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3기의 피라미드가 그림처럼 보이는 작은 언덕에 올라 구경을 하고 가운데 서 있는 카프레 왕 피라미드까지 낙타를 탔다. 모두 호기심에 시작은 했지만 생각보다 높은 낙타 등에서 괴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특히 최영희 선생님은 울기 직전이다. 이동하는 동안에도 끝까지 “내릴 래 ! 내려 줘 !”만 외쳐댄다. ![]() 이집트 여행 중 가장 허무맹랑한 경험으로 <피라미드 내부에 들어가 보았다>는 한 문장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안 들어가 보았다면 궁금해 죽기도 한다. 후후후...... 비스듬히 경사진 통로는 몸을 반으로 접어야하고, 앞 사람 엉덩이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나는 오리 털 내피까지 입어 등에서 땀은 흐르고.... 도착한 묘실에는 석관만 덩그런히 놓여있다. 눅눅한 공기가 옥죄여오면서 이곳이 무덤 내부라는 걸 상기 시킨다. 석관도 “정말 이곳에 몇 천 년 있었을까?”싶게 어설프고 정품(?) 냄새가 나질 않는다. 하지만 위대한 건축물에 들어와 환희와 감동은 받지 못했지만 우주의 기가 집중되는 영험한 장소라니 내 몸 어딘가에 도움은 되겠지..... 스핑크스를 보러갔다. 스핑크스도 나의 우려대로 별 감흥이 없다. 가까이서 본 스핑크스는 사진보다 작고 너무 많이 훼손되어 있다. 옆얼굴은 코가 다 떨어져나가 유인원처럼 턱이 더 나와 있다. 이 바위산을 깍아 죽은 아버지 쿠푸 왕 시대의 영광을 재 결집 시키려는 노력으로 카프레 왕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이곳에서 낮잠을 자다 스핑크스의 선몽으로 왕이 되었다는 투트모세스4세의 이야기도 다 덧없어 보였다.늙고 노쇠해진 스핑크스는 아직도 생명의 끈을 놓지 못하고 부활을 꿈꾸며 동쪽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애잔함이 있었다. ![]() 1992년에는 세계 20여 개국의 전문가들이 모여 스핑크스 구제를 위한 심포지움까지 열었단다. 시멘트를 발라주는 모독적인 보수를 하지 말고 시간과 비용이 들더라도 스핑크스의 품위에 맞는 치료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역사의 아버지라는 헤로도트스가 쓴 이집트 여행기에는 스핑크스가 등장하지 않는다. BC 5세기 경 그가 이곳에 왔을 때, 스핑크스는 자신의 존재를 모래 속에 숨기고 있었다. 오랜 세월, 그에 의해 쓰여진 이집트 역사가 정설로 믿어져 왔을 만큼 대단한 기록을 남긴 헤로도트스도 보지 못한 반인 반수의 예술품을 나는 보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이곳을 떠났다. 스핑크스 앞 밸리 신전은 뼈대만 남기고 있지만 정말 늠늠하다. 어제 아스완 채석장을 보고 와서인지 그곳에서 배를 타고 여기까지 온 수고로움이 배여 있는 돌을 만지니 가슴이 뭉클하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우리 둘만이 공유하는 비밀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점심은 한식으로 했다. 집 떠나 처음이니 우리 일행은 행복해 기립 박수라도 보낼 태세다. 카이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해발 150m 정도의 언덕의 요새 시타텔로 갔다. 이 성채는 <아이 유브>왕조의 살라딘 왕이 십자군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 성벽이 거의 피라미드 외장석을 떼어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는 서글퍼진다.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유산이 확실히 있었다. 200여년 계속된 십자군 전쟁에서 살라딘만한 영웅이 없었건만 그 너그럽고 관대한 인물도 문화재에 대한 인식은 꽝이었나 보다. 시타텔로 들어가는 매표소 입구에는 지금이 바이람 축제 기간이여서인지 소풍 나온 사람들로 꽉 찼다. 가족 단위보다 청소년 정도의 아이들이 많다. 아이들은 우리의 출현이 머 그리 대단한 이벤트라고 즐거워 죽는다. 나는 그들이 귀여워 죽겠는데..... 후후후 알리 모스크는 터키에서 본 블루 모스크와 쌍둥이 같아 놀랐다. 이 모스크는 터키 건축가 <유세프 보쉬나>가 이스탐불의 소피아 사원을 본 따서 지었다지만 내 눈에는 블루 모스크에 더 가깝다. 연필 같은 미나렛은 아주 똑같다. 이 모스크는 아라바스타(대리석) 모스크로 불릴 정도로 하얀 대리석이 돋보였다는 이야기인데, 현재 안뜰을 감싸고 서있는 대리석 회랑은 너무 꼬질꼬질하다. 카이로라는 도시가 나일 강이 가져온 미세한 충적토 위에 만들어진 도시다. 그러니 항상 우리나라 황사가 나타나는 상태가 계속 될 것이니 150여 년의 세월이 그냥 흐르기만 했겠는가 ! 이제는 씻어도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다. ![]() 그 멋지고 품격 높은 오벨리스크를 보내고, 한참 격이 낮은 저 시계를 받은 무식한 알리 파샤가 미운건지, 답례로 저 시계를 선물한 프랑스 루이 필립이 얄미운 건지 모르지만 어찌 되었던 저 시계는 오래오래 이곳에 서서 세계인의 눈총을 받을 것 같다 이곳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멈쳐 섰다는 시계는 보수를 받고 있다. ![]() 블루 모스크의 이즈닉 타일에서 나오는 은근한 멋과 비교 될 정도로 눈에 띠게 직관적인 멋이다. 색감과문양의 격조도 높아 아주 고급스럽다.특히 짙은 수박색과 보랏빛은 범하기 힘든 아니, 설명하기 망설여지는 품위가 있어 그리스 정교회의 성화같은 성스러움이 있다. 천정에서 늘어뜨린 수많은 유리 등불도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있어 좋은 볼거리였다. 어느 모로 보나 이스탐불의 불루 모스크와 비교해 손색이 없다. 나는 천정만 구경하다 내부의 다른 곳은 보지도 못하고 신랑 손에 끌려나왔다.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해 아쉽다. ![]() 사진 찍어 달라고 카메라 앞에 하도 얼굴을 들이대서 마음먹고 찍으려하니 경찰이 와서 아이들과 나를 야단친다. “왜 우리가 혼이 나야 하지 ?” 항상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도 이제는 없어져 무심 할 법도 한데, 이런 관심 정말 불가사의 하다. 젊다기보다 어린 부부가 갓난아이를 안고 있어 들여다보니 여자아이다. 태어 난지 2달 되었단다. 이렇게 어린아이를 많은 사람들 사이에 데리고 다녀도 되는지 걱정이 되었다. 머리띠까지 하고 눈을 꼭 감고 고물거리는 것이 너무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아이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혹시 내가 실수 한 것 아닌가 싶어 부부를 쳐다보니 그들은 활짝 웃으며 아주 기뻐했다. 다행이 나의 진심을 알아주었나보다. 기념 될만한 것을 주고 싶었지만 가진 게 없다, 저 멀리 보이는 피라미드가 신기루 같다. ![]() 이집트가 7세기 경 아랍계에 정복되어 이슬람교를 받아 드리면서 모스크들이 늘어났다. 이 모스크는 초기 이슬람 왕조, 툴룬왕조(868~905년)의 시조 이븐 툴룬에 의해 건설된 사원으로 이집트 최대 크기를 자랑한다. 역사적으로는 아므르 븐 알라스 사원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 된 사원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모스크만큼 오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그래서 이제는 슬럼화 되어버린 좁은 골목골목을 통과해 모스크 앞에 섰다. 육중한 문을 통과해 모스크에 들어섰을 때, 넓은 안뜰 가득히 내려앉은 화창한 햇살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밖의 햇살과는 냄새도 품격도 다른 고귀한 기운이 흘렀다. 한 변이 92m나 된다는 안뜰 가운데에 세정대가 있었고, 뺑 둘러 회랑을 가진 직사각형 건물이 서있다.미흐랍(메카의 방향을 알려주는 모스크의 중심 장소)과 마주하고 있는 미나렛이 독특하다. 이 미나렛은 이 모스크의 대표 얼굴로 꼭대기에 오르는 계단이 바깥으로 드러나 있어 나사 같은 모양이다.이락크 지역에서 발원한 그 유명한 아바스 왕조의 건축물, 사마라에 있는 대 모스크 미나렛의 축소판이다. ![]() 알리 모스크의 그 많았던 사람들의 기억이 먼 옛날 같다. 거의 우리 전용 모스크 같은 분위기다. 보너스처럼 다가온 이 고요한 평화가 너무 좋다. 저 문을 나서면 절대 가질 수 없는 평화가 이곳에 흐르고 있다.내가 힘들고 고단할 때, 조건 없이 의지 할 수 있는 곳. 꼭 해답을 구하지 않아도 내 말을 할 수 있는 곳. 그런 장소다. 에즈딘이 우리 일행을 앉혀놓고 이 모스크에 대해 열강을 하고 있다. 그 옛날 아즈하르 사원에서 토론식 수업을 했을 때, 이런 모습이었겠지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바닥에 편히 앉아 경청하는 일행들 모습이 아름답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아즈하르 대학 출신의 상징인, 붉은 모자를 쓴 젊은이가 바람처럼 나타났다. 속으로 뜨끔 했다. 그들의 자부심을 조금 도용한 것뿐인데.... 그것도 마음속으로만..... 한 가족이 들어와 여자, 남자 나뉘어 오랫동안 기도를 하고 있다. 아 ! 이곳의 분위기는 오래오래 내 가슴 속에 남겨두고 가끔 꺼내봐야겠다. ![]() 지금이 희생양을 잡아 이웃과 나누는 명절이니, 이 도시에서만도 얼마나 많은 양을 잡았겠는가 ! 그 가죽을 도로변에 산처럼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피도 마르지 않은 가죽들을 처음 보았을 때는 섬뜩했지만, 곧 난생처음 본 관경이 신기하기만 하다.신의 축복을 기원하며 신성하게 잡은 저 가죽은 우리의 의복이 되고 악세사리가 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위생적으로 처리되어질 수는 없나’ 싶다. ![]() 과거 이집트에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하여 영생한다고 믿었기에 돌아와서 들어 갈 육신이 필요했다는 것을 실감나게 느껴보고 싶었다.지금까지 미이라를 볼 기회가 많았지만 항상 원치 않는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지나쳤다.그러나 이곳에서는 내가 마음을 열어서인지 두려움도 없고, 이들을 자세히 보아주는 것이 그들의 영원한 삶을 인정해 주는 것 같은 사명감까지 생겼다. 파라오들은 몇 천 년의 세월이 무색 할 정도로 깨끗하다. 물론 그들을 싸고 있는 린넨 천은 새 것으로 바뀌었겠지만 그 당시 얼마나 고도의 기술로 이들을 다루었는지가 느껴졌다. 나는 이집트에 오기 전에 람세스1세의 미이라가 참 보고 싶었다. TV에서 우연히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퍽 감동적이었다. 람세스1세는 람세스2세의 할아버지로 왕위에 올라 2년도 못 채우고 죽었지만 이집트 최고의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19왕조의 문을 연 중요한 인물이다. 이 파라오의 미이라가 겪었던 고난은 너무나 드라마틱했다. 1860년대에 이 파라오는 단 돈 몇 십 달러에 팔려 배를 타고 캐나다로 갔다. 나이야가라 폭포 박물관 주인이 박물관 구색을 맞추려고 골동품상에 부탁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기함에 찾아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한쪽 귀퉁이로 밀려나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러던 중, 어느 독일 관광객이 이 미이라에 필이 꽂히면서 연구를 시작했다. 박식한 관광객은 미이라의 팔 위치를 놓이지 않았던 것이다. 가슴에 접혀있는 팔은 신왕조 시대 마이라들의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증거였던 것이다. 그는 베를린 국립 미술관에 있는 아름다운 네페르티티 흉상에 반해 있어서 이 미이라가 그 왕비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렵게 어렵게 전문가를 대동하고 와서 조사해보니 미이라는 남자였다. 그 바람에 또 미이라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박물관은 경영난에 허덕이다, 통째로 미국의 카를로스 박물관에 팔려 미이라는 다른 전시물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으로 건너온 미이라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연구가 되어져 람세스1세라는 것이 밝혀지고,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집트로의 귀환을 보장 받았다. 하와스 박사가 미국으로와 이 미이라를 대면하는 순간이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내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 아닌가 ! 박사는 미이라를 보는 순간 그가 람세스1세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세티1세(아들), 람세스2세(손자)와 너무도 닮아 있었던 것이다. 홀쭉하고 긴 두상에 높은 매부리코는 그들이 한 핏줄임을 입증했던 것이다. 박사가 거수경례를 하면서 “왕이시여 !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이제 집으로 갑시다.”할 때 어찌나 가슴이 뭉클한지..... 그렇게 파라오는 2003년, 이번에는 비행기를 타고 자신의 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곳에서 3대가 편안히 영생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꿈꾸며 이집트에 왔다. 그러나 람세스1세는 이곳에 있지 않고 또 배를 타고 나일 강을 따라가 룩소르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단다. 나로서는 아쉽지만 정말로 그가 머물기를 바랐던 장소는 룩소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되었다. 미이라 실에는 내가 보고자 했던 3대는 아니지만 람세스1세의 후손 3대가 나를 반겨주었다. 세티1세(할아버지), 람세스2세(아버지), 메렌프타(손자). 세티1세의 경우는 코도 좀 작고 얼굴도 작은 편이라 여성스러운 면모가 보였으나 람세스2세와 메렌프타는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똑 같다. 람세스2세는 탈색이 심한 머리카락까지 있었다. 메렌프타의 미이라를 처음 본 학자는 세티1세와 닮았다고 기록했지만 내 눈에는 아무리 비교해도 아버지 쪽에 가깝다. 메렌프타는 사망 당시, 70세가 넘는 노인으로 온갖 질병의 증세를 다 가지고 있고, 이빨도 거의 없는 대머리였다고 한다. 더 더욱, 후대 도굴꾼들에 의해 난도질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아마포에 쌓인 파라오는 그런대로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미이라 실에서 가장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람세스2세의 왼손이었다. 다른 파라오들은 얌전히 두 손을 가슴에 X자 형태로 포개고 있었는데, 람세스2세만 왼손이 허공을 향해 들려있었다. “아 ! 저 파라오는 아직도 이승에서 놓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있었나 보구나” 하며 들여다보았다. 미이라를 만든 사람도 파라오의 의지를 어찌 못할 정도라면 역시 굉장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 우연히 책을 보다 그 사연을 알게 되었다. 람세스2세의 미이라는 1902년에 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어느 날, 경비원이 보는 앞에서 왼팔을 불쑥 쳐들었다. 그 경비원이 기절초풍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이 사실이라면, 과학적인 검증을 떠나서, 3,0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육신을 움직였으니 그는 확실히 영원불멸의 존재일 것이다. 실지로 람세스2세의 미이라는 복원을 위해 파리로 옮겨지면서 죽은 국가 원수 자격으로 의장대 사열을 받았다. 이 굉장한 파라오는 3,000년 뒤에 오른손마저 들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서둘러 투탕카멘의 보물을 보러 갔다. 많은 사진에서 익히 보아온 부장품들을 실지 보게 되니 감개무량하다. 너무 화려하고 정교하여 계속 “대단해. 대단해 ”소리 밖에 나오질 않는다. 목관, 황금 관, 석관 등의 8겹관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이집트 여행 중 접했던 채색을 잃은 그 많은 유적들이 얼마나 화려했을지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죽어서도 시중을 받기위해 함께 묻은 365개의 하인 조각상도 눈길을 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여러 개의 부메랑은 왕으로서의 절대자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남자 아이를 떠올리게 했다. 10살 정도에 왕위에 올라 20세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는 이 왕은 누가 머라고 해도 혈기왕성하고 뛰어놀기 좋아하는 소년이었을 것이다. 왕궁 뜰에서 부메랑을 날리며 푸른 하늘보기를 좋아하는..... 너무 어린 나이에 죽어 독살 내지는 몽둥이에 맞아 죽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최근 CT 촬영에서 그런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단지 정강이뼈의 깊은 상처로 고생을 하다 염증으로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황금의자는 등받이 부조의 아름다움으로 세계 최고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왕이 사용했던 여러 종류의 침대들도 이채롭다. 치타의 몸통을 닮은 침대는 예술이다. 별도의 방에는 투탕카멘의 황금가면과 보석류의 장신구가 전시되어 있었다. 터키 톱카프 궁전의 보석 관에서 나는 그들의 사치와 허영, 탐욕을 보았다. 그러나 이곳의 장신구들은 화려는 하지만 권위와 품위, 명예를 느낄 수 있어 존경심을 가질 수 있었다. 몇 천 년이 흘러도 그 보물들이 가진 고귀한 기운은 전혀 빛을 잃지 않았다. ![]() 꽃과 잎은 산화된 피처럼 검게 변해 있었다. 이 무덤을 발견한 카터도 어느 부장품보다 이 꽃다발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이 꽃다발을 관 위에 놓은 이는 분명 어린 왕비 일거라고 추측하고, 남편을 보내는 심정을 이해 할 수 있었던 것이다.카터의 이런 소중한 마음이 있었기에 이 꽃다발이 발굴 당시 없어지지 않고 세계 모든 이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부장품에 비해 너무 초라해 무시 될 수도 있었는데........ 고고학의 위대함은 이런 것이다. ![]() 이 찬란한 유물이 금덩어리로만 보이고, 쓰러지고 무너진 유적이 폐허의 장소로만 보인다면, 우리는 뉴욕만 가 보아야하고, 햇빛 찬란한 바닷가만 가야 할 것이다.이집트에서 정원과 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정원이란 특권층만 가질 수 있는 권위의 상징이며, 꽃을 키우는 일은 신과 같은 존재인 왕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꽃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다리 같은 의미였다.그러니 지금은 볼품없이 말라버린 저 한 다발의 꽃은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최근에 투탕카멘의 미이라를 기초로 만든 복원된 얼굴은 아주 잘생긴 꽃미남이었다. 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투탕카멘의 왕비, 안케세나멘과는 배 다른 남매였다. 왕비는 아크나톤과 네페르티티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였으니 엄마를 닮았다면 쾌 미인이었을 것이다. 그 선남선녀는 정말 보기 좋은 한 쌍이었지 싶다. 그러다 갑자기 후계자도 없이 왕이 죽었으니, 왕비의 비탄함은 얼마나 컸겠는가 ! 그 당시 상황으로 파라오가 될만한 인물은 외할아버지 아이에 뿐이었다. 아이에는 아멘호테프3세부터 여러 왕을 섬긴 60이 넘은 노인이었으니, 어린 왕비는 얼마나 무섭고 싫었을까 ! 이집트 왕가의 결혼 풍습에 의하면, 파라오의 왕권은 왕비 우선순위 1위와 결혼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이 어린 왕비와 노인의 결혼은 기정사실이었다.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남편을 잃은 슬픔보다..... 그 마음이 힛타이트 왕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많은 아드님 중에 한 명을 급하게 보내달라고..... 그 분은 우리의 파라오가 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집트로 오던 왕자는 도중에 의문의 사망했다(그 이유는 암살의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왕비는 결국 아이에와 결혼했고, 그 뒤는 어떤 기록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 역시 각자 추측해야하는 몫이지만 나는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보다 자살 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아주 단순하게 살기 싫었을 것 같다. 저 꽃은 왕비의 한이 되어 검게 검게 변한 것이리라...... 이렇게 많은 전시물이 발굴된 3,500여 점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단다. 역사 한 자락을 차지하지 못할 정도로 미미했던 어린 왕의 부장품이 이 정도니, 오래 살기까지 한 람세스2세의 묘와 부장품은 ?...... 상상만으로 숨 가쁘다. 에즈딘의 설명과 함께 역사의 역순으로 박물관을 구경했다. 너무 많은 유물 중에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찾을 수가 없어 보였다.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유물들은 그냥 쌓여있다고 표현 할 수밖에 없었다. 제 값어치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곧 첨단 시설이 갖추어진 박물관을 만들 계획이 있다니 천만다행이다. 시간에 쫓기어 거의 뛰다시피 따라다닌 박물관 구경 후반은 별 기억을 남기지 못하고 끝이 났다. 이제 다시 하루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제대로 잘 구경 할 것 같은데.... 사진까지 찍지 못하니 최악이다. 저녁을 먹고 빛과 소리의 쇼를 보기위해 다시 스핑크스 앞으로 갔다. 강 과장이 춥다. 춥다. 강조를 하더니 거짓이 아니었다. 쇼를 보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괴롭다. 쇼는 우뢰 와 같은 소리와 피라미드에 레이저 광선을 쏘아대면서 시작되었다. 설명대로 4,500여 년 전의 건축물과 첨단 기술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쇼는 새롭고 특별했다. 그러나 이 쇼의 한계는 여기까지다. 밸리 신전의 벽을 스크린 삼아 이집트의 역사와 유물들을 설명하는 화면은 어설퍼 내가 낮 간지럽다. 그리고 음악과 성우의 목소리는 필요 이상의 감정을 넣어 화면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들뜨고 비장하기만 하다. 가끔 빨강, 파랑의 레이저 광선이 3기의 피라미드를 순서대로 비춘다. 가만히 손님들 얼굴을 보니 인내심을 갖고 무언가 한방,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 될 것을 믿고 기다리는 눈치다. 나 역시 그랬으니깐...... 그러나 빨강, 파랑의 불빛이 쿠푸 피라미드의 위, 아래를 나누어 (대단한 기술인 것처럼) 비추는 것으로 쇼는 끝이 났다. “야 야 ! 이렇게 끝내면 안돼 ! 먼가 빼먹은 게 있잖아 ? ”하며 야유의 휘파람을 불고 싶어진다. 만약 이 쇼를 기획한 사람이 이집트인 이라면 역부족인 것이고, 유럽인이라면, 유물을 빼 갈 줄만 알았지 이 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도 존경심도 없는 것이다. 또 미국인 이라면, 분명 저예산으로 하다 보니 이리 되었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에게 맡긴다면, 정말 멋진 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 ? 백남준 후예 아닌가 ! 안타깝다. 저 좋은 소재로 이렇게 밖에 못하다니...... 우리가 만든다면 세계인을 경악 시키고, 이집트인들은 자부심으로 가슴이 폭발 할 것 같은 환희를 맛보게 해 줄텐데... 이 쇼를 보지 못했다면 많이 궁금하고 아쉬워했겠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한밤의 추억을 기대한 나는 상처받았다. “그래도 못 본 것보다는 낫겠지 ?” 이 쇼를 끝으로 나의 이집트 여행도 끝이 났다. 호텔로 돌아오니 밤 9시 쯤 되었다. 아직 잠들기는 일러 거리로 나가 볼까도 생각했지만 축제 기간이라 늦은 밤인데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나와 있었다. 그들의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을 떠올리니 갑자기 피곤해졌다. 카메라까지 든 나를 그들이 놓아 줄 리가 없다. 다리만 건너면 커다란 광장이 있던데...... 에즈딘은 우리와 호텔 입구에서 작별했다. 내일 새벽 비행기로 룩소르에 가야한단다. 그리고 투어를 하고 밤기차로 다시 카이로로 와야 한다고 했다. 내 아들의 군대 생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가슴이 따갑다. 모두 그 동안 정이 들어서인지 안쓰럽게 쳐다보며 이별을 아쉬워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에즈딘이 한국에 오면 맛있는 것 많이 사 주어야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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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을 정리하면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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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마음으로 별을 보러 간다. 사막 간다. 떠들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그래서 내 뇌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원조 7대 불가사의로 남아있는 피라미드 존재를 확인 하고 싶었던 여행은 나에게 더 많은 불가사의를 남겼다. 카이로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경악과 감탄과 감동과 서글픔, 씁쓸함까지 고루고루 경험 할 수 있는 정말 신기하고 기이한 나라였다. 여행 다니면서 사람의 머리 속이 이렇게 궁금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절대 놓치지 말아야하는 것은 이집트 문명의 위대함이었다. 참 대단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놀랜 것은 의외로 이집트에 관한 책이 참 많다는 것이었다. 또 학자마다, 보는 사람마다 전부 다른 소리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내가 다녀와 보니 이해가 되었다. 나일의 문명은 너무도 불가사의해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1892~1982년)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말한 명언들이 이 문명에 딱 딱 들어맞았다. <사실은 빈 자루와 같아서 그 속에 어떤 것을 집어넣기 전에는 서 있을 수가 없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말을 걸 때만 말 한다 >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 볼 때만 비로소 이해 할 수 있고, 현재는 과거에 비추어야 충분히 이해 될 수 있다> <역사란 사실의 물렁한 과육에 쌓인 해석의 단단한 씨앗> 등등....
이 아저씨의 말대로 나일의 문명은 정말 이랬다. 나 역시 전문가나 학자가 말하는 의미와 기록의 틀에 얽매여 무언가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 없이 자유로운 상상으로 이 문명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색다르고 특이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여행의 성취감도 큰 나라였다. 지금도 땅만 파면 도깨비 방망이처럼 끝없이 보물을 토해내는 나라가 또 어디 있겠는가?
세계의 내놓으라 하는 그 많은 학자들이 달라 들어 연구에 연구를 해도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는 양파 껍질 같은 이 문명 ! 이런 불가사의한 매력을 못보고 인터넷에 떠도는 우리 젊은이들의 글을 보면 안타깝다. 모두 배낭여행에서 만난 현재의 이집트인들에게 질려 치를 떨며 이 나라를 저주했다. 주객이 전도되어 유적지 구경은 대충 짬짬이 하고, 바가지 쓰지 않고 하루보내기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양쪽 다 딱하다. 우리는 어느 학자의 말대로 4,000년 전의 이집트인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이 알고 있으면서 현재 바로 내 이웃에 사는 이집트인에 대해서 너무도 무심하고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능력만 된다면, 난 이 민족에게 몽실몽실하고 오동통한 지리산 한 자락을 선물하고 싶다. 꽃 피고 새 울며 푸른 숲이 울창한, 또 겨울이면 하얀 눈이 쌓인 우리의 멋진 산을 하나 선물하고 싶다. 나의 선물에 행복해 할 그들의 미소가 보고 싶다. 누가 머라고 해도 그들은 이만한 선물을 받을 만한 조상을 가진 민족이었다. 이집트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내가 속한 인류에 겸손해 지고 싶으면 이집트로 가라”고... “내 자신을 대면하고 싶으면, 이집트 사막 깊숙이 들어가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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