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함돈영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함돈영님은 2006년10월16일부터 10월26일까지 10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티벳/구채구 여행을 다녀 오셨습니다. 글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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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벳과 구채구 여행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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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하늘에 눈이 시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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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 시절이었을 때 영국에서 파견된 모험심 많은 통치자가 인도 사람을 티벳으로 들여보내 지도를 그려 오게끔 하였고 그 지도가 얼마나 정확한지 지금껏 사용된다는 티비의 프로를 본 적이 있다. 수학 교사를 훈련시켰는데 한 발자국마다 미터를 재고 킬로수를 가르치어 종교인으로 위장을 하여 은둔의 땅인 티벳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몇 년간을 지내고 나온 그는 노고의 대가로 영국까지 가서 훈장을 받았고 많은 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오 년 후 병에 걸려 죽음을 맞았다. 헌데 그 병의 원인이 너무나 강한 햇빛에 노출되었던 ‘눈’ 이 상하여 얻은 병이었다는 설명이었다. 라싸의 시내 어느 곳에서도 고개를 들면 들어오는 포탈라궁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때문에 더욱 희고 웅장하였다. 티벳을 안내하는 책자와 그림에서 늘 보았던 곳이라 그런지 낯설지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붐비리라 예상했는데 이른 시간부터 서두른 보람이 있어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입장을 하였다. 칭짱열차가 개통된 후 심하게 몸살을 앓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기에 사람들에 치어 제대로 돌아 볼 수나 있을까 하는 맘이 들었던 예상이 빗나가 더욱 만족하였고. 모든 티벳 사람들에게 존경을 넘어 영혼의 지도자인 역대 달라이라마들의 영묘탑과 수 천 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 궁의 내부는 마치 미로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티벳의 역사와 그들의 삶, 그리고 우리들의 눈에 들어오는 신비로운 그들의 영적인 세계가 얽혀 있는 궁 안에서 잠시 혼돈을 느끼기도 하였다. 일상의 삶과 함께 가는 종교의 힘이 과연 이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줄까? 하고. 한때는 빛나는 영화를 누렸던 곳, 이제는 몇 세대가 지나고 침략자에 의해 주인이 바뀌었어도 그곳은 여전히 티벳 사람들의 영원한 안식처였으며 아직도 그들의 미래였다. 포탈라궁을 빠져 나와 우리가 가는 길엔 여러 가지의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발 4,488m의 암드록쵸 호수를 가는데 가파른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물론 가는 길 자체는 도로가 잘 닦여 있고 한가하게 노니는 야크떼와 끝없이 이어지는 비취빛의 물줄기와 만년설의 산, 간혹 보이는 목동들을 보며 더 이상의 평화는 없을 것 같았다. 허나, 한 가지를 얻으면 다른 한쪽은 포기해야 한다는 진리가 여기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아침부터 수 차례나 먹은 고산증의 약이 이제는 효험이 없나보다. 버스가 구불거리는 고갯길을 돌 때마다 옆에 앉은 사람의 몸으로 밀착되면서 머리는 깨지는 것 같이 아파왔다. 눈으로 보이는 것과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고통이 혼합되며 이 호수를 ‘분노한 신들의 안식처’ 라고 부른다는 현지인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제일 높은 고갯마루에서 버스를 세워놓고 일행들은 밖으로 나가 고통스럽게 올라온, 하나의 그림 작품 같은 구불거리는 황토색 길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꿈틀거리는 커다란 '뱀' 같이 보이기도 하였다.다시 버스는 우리를 태우고 호수가로 향해 내려갔고 일행들은 마치 호수로 풍덩 뛰어들기나 할 것 같은 마음으로 달려나갔으나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얼굴은 앞좌석의 등받이에 기대어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암드록쵸 호수의 높은 고갯길을 뒤로하고 이제 우리는 시가체로 향했다. 역시나 끝없이 이어지는 길은 황토색의 들판과 푸른 하늘, 얼음처럼 차가울 물줄기와 승부를 알 수 없는 싸움을 하는 것 같은... 내려 쬐는 햇빛이었다. 다섯 시간 이상 버스로 움직이는 동안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적어도 내게는 물과 해의 놀이처럼 보였다. 누가 끝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갈 것인가? 누가 더 내 눈을 눈부시게 할 것인가? 유리조각처럼 반짝이는 물줄기를 이겨 보려는 햇빛, 잠깐 구름 속에 가려지는 해를 놀리는 물줄기... 그렇게 오래도록 이어지던 싸움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버스가 도착지인 시가체로 들어가면서 화해를 하였다. 이번 여행 준비물을 챙기면서 제일 먼저 챙긴 것이 선글라스였다. 그러나 단 한번도 내 가방 속에서 꺼내질 않았다. 이제는 너무나 많은 개방의 물결로 자신도 모르게 문명에 이끌려 가는 티벳사람들 어느 누구에게서도 선글라스를 낀 것은 보질 못했다. 여행 며칠 동안만이라도 나는 그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 호흡하고 싶었다. 눈이 부시도록 푸른 하늘.....나의 눈뿐만이 아니라 온 몸도 그 투명한 푸른색으로 물들을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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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말이 진리인지 (고산증에 관한 여러 가지 말, 말, 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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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떠나오기 전부터 수 없이 들은 고산증. 허나 이미 몇 년 전 남미 여행 때 부딪쳐 보았고 또 운남성 ‘중전’ 에서도 약간 맛을 보았기 때문에 크게 걱정을 안 하였었다. 아니, 얼마든지 이길 자신을 가진 오만에 대한 결과였을까? 잠에서 깨면 여행 3일째의 아침을 맞게 되고 호텔서 아침식사를 하고 나면 8시에 이동을 하게 되어 있는 날이다. 어제 저녁부터 심상치 않은 컨디션에 아무것도 입에 댈 수 없었고 고산증에 도움이 된다는 그 작은 알약만을 수없이 삼키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약을 먹기 위해 몇 모금 마신 물까지 토해내며 속은 깨끗이 비워가고 있었다. 이미 여러 사람이 병원을 들락거리고 있던 참이라 나 하나만이라도 인솔자와 현지 가이드의 심려를 덜어 주려고 참고 참은 것이 오히려 불편을 주게 되었으니... 잠을 못 이루고 끙끙대니 함께 자던 룸메이트가 인솔자의 방으로 전화를 넣은 것이 새벽 3시, 30분 후에 호텔 로비로 내려오라는 말을 듣고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이미 현지 가이드에게 전화를 하고 내려온 마 사장님 보기가 얼마나 민망하던지... 똘똘하고 야무진 현지 가이드 ‘허’양과 택시를 타고 간 병원이 인민국군병원 이었다. 규모가 크고 믿을만한 종합병원이라는데 어설프기가 그지없었다. 춥고 썰렁한 병원의 대기실은 단 한군데 희미하게 켜 놓은 전등만이 있을 뿐 너무나 고요하게 죽어 있었다. ‘허’ 양이 어둠 속에서 두리번거리더니 어느 작은 문을 두드렸고 억지로 잠에서 깬 부스스 한 얼굴로 잠자던 머리가 산발이 된 여자가 나왔다. 하얀 가운 아래로 군복 바지가 보이는 것을 보고 그녀가 의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몇 가지 검사를 하곤 입원을 하라는 것이었다. 허양에게 절대로 입원은 안 하겠다고, 아니 할 수도 없지 않냐고 하였다. 아침이면 이곳을 떠날 텐데 날 더러 혼자 이곳에 남으라고... 결국 속을 달래는 주사 한대를 맞고 산소를 투입하는 것으로 진료비를 끊은 후, 산소투입을 위해 입원실로 가는 줄 알았더니 나를 진찰해준 그 여의사가 잠자던 방으로 들여보내졌다. 하나밖에 없는 작은 침대엔 방금 빠져 나온 이부자리가 터널처럼 봉긋하게 솟아 있었는데 희미한 불 빛 속에서도 그 이불이 얼마나 쪄들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난방이 안 되어 춥기도 하였지만 도저히 입고 있던 점퍼를 벗을 용기가 나지 않아 옷을 입은 채 올라가 누웠다. 문제는 허양이었다.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녀에게 아무리 침대로 올라오라고 하여도 말을 듣지 않더니 도저히 추위를 이길 수 없었던지 침대의 내 발치 밑으로 올라왔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잠깐씩 졸다가 깨다가 하니 7시가 되었고 이 방에 들어 온 후 한번도 들여다보지 않는 의사 대신 산소호흡기의 줄을 빼고 희미한 형광등의 불도 꺼주고 얌전히 빠져 나왔다. 호텔로 돌아오니 아침식사를 끝낸 일행들이 로비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나 외에도 두 사람이 이미 병원엘 다녀왔다고... 암튼 병원 신세를 지고 오니 기분도 많이 좋아졌고 이제부터는 아무 문제없을 것 같은 확신도 들었다. 오늘은 비교적 이동거리가 가까운 간체와 시가체에 있는, 중국정부가 인정하는 판첸라마의 본거지인 타쉴훈포 사원을 가는 날이다. 갼체로 가는 시골길엔 추수가 한창이었다. 간간이 보이는 시골 농가들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고 현지가이드인 허양에게 인솔자의 엄명(?)이 떨어졌다. 무작정 어느 한 집을 선택하여 방문해 보자는 것이었다. 인솔자의 각본에는 있었겠지만 생각지 못한 이런 이벤트가 우리 일행들에게 환호성을 가져다주었음은 물론이다. 무슨 행운이었는지 우리가 선택해(?) 들어간 농가의 주인은 무척이나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주었고 따듯한 차까지 대접을 받았다. 한편으론 이런 무작정의 침입으로 그 가족에게 이질감을 주지나 않을는지 하는 마음도 가져보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간체는 티벳 교통의 중심지로 예전 크게 번창하였던 곳이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대상들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으며 티벳 불교만을 고집하지 않는 다종교의 관용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최고 유적은 펠코르쵸테라는 거대한 사원이다. 지금은 많이 파손되어 예전의 영화를 느낄 수 없다고 하지만 단아하게 버티고 있는 사원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다시 시가체로 돌아왔다. 간체에서 움직임이 많았던 관계로 일행들 중 점점 고산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버스 안에 수북히 쌓인 휴대용 산소호흡기가 불티나게 비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타쉴훈포 사원으로 갔다. 이곳은 달라이라마가 아닌 중국정부가 인정하는 판첸라마의 본거지다. 허나 그 판첸라마마저도 중국정부에서 감금을 하여 놓고 있으며 지금 이곳에 있는 판첸라마는 가짜라는 주장도 있다. 아무렇거나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이곳에서 나는 가슴속으로부터 나오는 진한 눈물을 남몰래 흘렸다. 우리가 사원엘 들어간 시간이 마침 승려들의 저녁 예불이 시작되는 때였다. 법당 안엔 이미 많은 승려들이 관광객들을 아랑곳 않고 불경을 낭송하고 있었는데 그 울림 소리가 얼마나 청아하던지 발길을 옮길 수가 없었다. 잊고 있던, 한때는 그렇게도 열심히 부처님을 찾던 나에게 새로운 깨우침과 나무람의 소리로 들리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름대로의 고산증에 대한 학설(?)이 분분하다.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산소량을 많이 필요로 하고, 그런 사람들이 고산증을 이기기가 힘들다고 하는 그럴듯한 제 1설. 제 2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어쨌든 해발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면 깨끗이 저절로 낳는다는 설. 앓을 만큼 앓아야 견딜 수 있다는 제 3의 설. 그랬다. 모두가 다 맞는 말이었으며 고통으로 나의 인내를 시험하던 그 순간들을 감히, 쉽게 근접할 수 없다는 은둔의 땅, 티벳 여행의 선물로 삼기로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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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벳의 속살을 보다. (가장 긴 이동을 한 천장공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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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이번 여행 중 가장 긴 거리를 이동하여야 하는 날이다. 하늘호수를(남체호수)보기 위해 ‘담숭’이라는 작은 도시로 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라싸에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그 호수를 보기 위해 라싸에 거점을 두고 당일로 다녀오기도 한다. 헌데 우리 일행은 시가체와 간체를 돌아 어렵고 힘든 천장공로라는 비포장의 험난한 길을 택하여 일단 담숭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그곳에서 남체호수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 길을 택한 것은 우리들이 찾던 티벳이 그곳에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인솔자의 설명이다. 호텔에서 싸준 점심도시락의 박스가 맨 마지막으로 버스에 오르자 대 장정의 출발이 시작되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벌판과 방목하는 야크떼들, 간혹 보이는 민가와 서서히 드러나는 만년설의 산 들이었다. 이따금씩 마주치는 차량들이 아니었으면 정말 이 길로 가는 것이 맞는 것일까? 할 정도로 한적하였고 버스가 높은 고개로 올라 갈수록 우리 일행들의 표정은 숙연해 졌다. 장거리 이동을 버스로 해야 하는 인도와 중국의 운남성 여행 때 잠깐씩 버스를 세우고 화장실 볼 일을 노상방뇨로 해결하고 다녔었다. 휴게실이라든지 화장실이라고 따로 없기에 다른 차량이나 사람들이 안보일 때면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다. 문제는 여자와 남자들이 따로 볼일을 봐야 하니 버스에서 내리기 전 인솔자가 여자들과 남자들이 갈 곳을 정해 주는 것이다. 이번엔 ‘남자들은 왼쪽, 여자가 오른쪽입니다’ 하고. 이럴 때마다 생각나는 한 편의 시(시)가 있다. 이운룡 시인의 ‘오래 사는 법’ 그리운 사람들 어깨 맞대고 액자 속에 모여 산다. 벌써 자리를 비운 네 자리 그 사람들 그 모습 그대로.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음에 빌 차례는 나다. 맨 뒷줄 오른쪽 끝 죽을 고비 여러 번 넘기다가 차례가 바뀌었다. 아직 살아서 부끄러운 악연이다 죄가 많으면 오래 사는 법. 산은 비료가 없어도 제대로 건강한데 오늘 아침 산에다 실례하고 내려왔다 그래, 계속 죄 짖고 나는 오래 살련다. 이 시인의 시처럼 수 없이 많은 실례를 하였으니 명은 얼마나 더 길어질지? 만년설의 흰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맑은 시냇가에서 점심 도시락을 풀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은 일행들은 점심을 먹으며 사진을 찍으며 터져 나오는 탄성에 이 모든 순간들을 뜨거워진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만이 이 한적한 곳의 유일한 소리다. 다시 버스는 길을 재촉하여 달리다가 유목민의 텐트를 발견하곤 멈추었다. 인솔자를 비롯하여 모두들 버스에서 내려 텐트를 향해 갔건만 나와 두 사람은 내리지 못했다. 움직이면 그 만큼 더 머리가 아파 오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기로 한 것이다. 다녀온 일행들의 말을 빌리면 열악하기 그지없는 살림이었지만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의 표정은 너무나 밝았다고... 푸른 하늘과 만년설의 산, 황량함이 아름다운 길을 긴 시간 달렸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보며 일행 모두는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살아 있음이 이렇게나 고마울 줄이야... 이 때묻지 않은 자연 앞에서 호사스런 감탄사말고는 마땅한 다른 찬사가 떠오르지 않음이 답답할 뿐이었다. 머리는 흔들리고 터질 것 같았지만 진정 티벳의 정경을 느끼며 드디어 목적지인 담숭에 도착하였다. 숙소는 이곳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었지만 민박 수준이다. 오랜만에 들은 손님들 때문에(우리 일행) 호텔 식구들(가족들 같았음)이 더 난리다. 방 열쇠를 나눠주고 안내를 하는데 신명이 나서 뛰어 다니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방안은 습기 때문에 침대까지도 눅눅하였고 홑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춥기도 하였으나 일행 모두들 잘 견디어 주었다. 어차피 여행이란 것이 익숙한 것을 뒤로하고 새로운 경험과 색다른 만남을 전제로 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이런 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었고. 낡고 눅눅한 침대에 누우니 오늘 하루 지나온 천장공로의 그 길이 얼룩진 천장위로 펼쳐진다. 어느 유행가의 가사를 개사한 것처럼 들리던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 하던 소리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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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 아래 첫 호수. (남쵸호수에서 다시 라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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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숭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니 온 몸이 눅눅하며 쌀랑한 온기가 느껴진다. 내가 잠잔 방문을 열면 바로 로비고 아침식사를 하러 나온 부지런한 일행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방안까지 들려왔다. 옹색한 거울 앞, 희미한 불빛에도 완벽하게 색조 화장을 해내는 룸메이트의 얼굴이 화사하다. 로션만을 대충 문지른...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깊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 같았다. 육신의 병은 아니지만 마음의 병은 조금 앓고 있었다. 완치가 가능할 것 같기도 한 그 병은 욕심에서 온 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쓸데없는 욕심 때문에 살아가면서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상처와 위로들을 얻고자 여행을 시작하였다. 어쩌면 나와는 다른 삶, 다른 문화를 보면서 내가 딛고 있는 울타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을 수 있는 더 큰 욕심을 얻고자 함은 아닐까? 늘 바라는 것이지만 이번 여행에서 돌아가면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성숙해 지자는 마음을 다스리지만 여행지에서조차도 그 마음을 그르치는 부분들이 있으니... 중국 대륙에서 두 번째로 큰 남쵸 호수는 해발 4,719m 의 고지대에 위치하여 하늘 아래 첫 호수라고 부른다. 호수의 길이가 70km, 너비가 30km 되는 이곳을 한바퀴 돌려면 20일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티벳인들은 성지 순례의 개념으로 돈다고 한다. 탕글라 산맥의 설봉들이 병풍이 되어 호수 주변을 감싸고 있으며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물빛, 직접 가보지 않고는 상상이 안 되는 그곳을 가기 위해 모든 준비를 끝냈다. 호텔을 나온 버스가 가파른 고갯길로 들어서면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한적하기 그지없는 산길에 내리는 눈... 얼마나 낭만적인 것인가? 그러나 그런 감상도 잠시, 가이드의 말로 눈이 많이 오면 호수로 가는 길이 폐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하였다. 워낙 가파르고 좁은 산길이었기에 눈이 많이 오면 우리가 먼저 가는 길을 포기하자고 할 정도였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시작하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일행 모두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기도의 효과였을까? 아니면 함부로 접근 할 수 없다는 경고를 준 것일까? 잠시 그렇게 우리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며 내리던 눈은 가파른 고갯길의 정상에 오르자 거짓말처럼 그쳤다. 그리곤 무사히 시험을 통과한 결과인양 쏟아지는 햇살과 함께 펼쳐지는 광경, 숨이 탁 하고 멈추는 것 같았다. 잠시 넋 나간 사람처럼 그렇게 힘이 빠져 있던 내 귀에 일행들의 탄성 소리가 들려오며 다시 버스에 올라 호수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희뿌연 안개와 살포시 내리던 눈 속에 감춰졌던 곳은 내가 숨쉬었던 세상과는 너무도 다른 곳이었다. 물론 그 다른 것들을 보고자 여기까지 왔고 또 다른 많은 곳을 헤매고 돌아다녔지만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자연 앞에 너무나 연약한 인간의 힘이라는 일상적인 말이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졌다. 관광철이 지나서인지 버스가 도착한 주차장은 한가했다. 가이드의 말로는 주차장에서 호수까지 관광객을 태우고 다니는 말이 있다고 하였는데 하나도 보이질 않았으며 여행객들도 우리 외엔 보이질 않았다. 눈치가 빠르면 절에 가서도 새우젓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말처럼 주차장 근처에서 할 일없이 앉아있던 유목민처럼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바쁘게 움직이더니 곧 말 한 마리를 끌고 나타났으나 누구 한사람 선뜻 오르기를 마다한다. 이미 발 빠르고 마음 빠른 일행들은 호수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으니... 하늘과 호수를 구분하는 것은 탕글라산맥의 허연 설봉들이었다. 호수를 감싸듯 병풍처럼 둘러져진 만년설의 산들이 아득한 곳에서 도도하게 때로는 온화하게 내 눈과 가슴으로 들어왔다. 호수는 움직임 없이 잔잔한 울음소리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것은 막을 내린 연극의 주인공이 꽉 찬 객석을 향해 고마움의 인사를 보내는 ...그런 표현 같았다. 함께 울면서 손으론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마치 세상의 마지막 날을 남기고 싶은 것처럼. 호수가 하늘인지 하늘이 호수인지 구별이 안 되는 남쵸 호수의 안타까움을 안고 다시 담숭으로 귀환하여 점심을 먹고 우리는 다음 일정을 위해 라싸로 향했다. 라싸 관광의 마지막은 우리 모두가 티벳인들의 성지인 조캉 사원 앞에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순례자 되기였다. 마니차를 돌리며 조캉 사원 앞에 마련된 바코르를 돌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파고 들어가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잠시나마 나를 잊었다. 성스러운 그들의 의식 속으로 점점 더 나를 끓어 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더불어 티벳 여행 일정의 반을 지나면서 이제야 진정 내가 티벳 속에 들어와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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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 저쪽으로 나를 데려다 놓다. (칭짱 열차를 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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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세상에 태어나 맨 처음 기차를 탄 것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춘천에서 서울로 이박 삼일의 수학여행을 하면서였다. 강릉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서울로 전학 올 때가지 한 번도 그곳을 벗어나 보지 못한 나로서는 기차는 커녕 버스를 타 본 것도 손가락으로 꼽아야 할 정도였다. 그런 형편이었으니 기차를 타고 서울을 간다는 들뜬 마음에 수학여행 전 날 밤을 꼬박 세웠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지구의 몇 분의 일쯤을 돌아다닌 지금도 마찬가지 다. 결혼과 함께 세 아이들한테 어느 정도 내 손길이 덜 가도 되는 때가 되자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였다. 수 십 시간 비행기를 타야하는 아프리카며 남미도 몇 년 전에 다녀왔다. 터덜거리는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는 힘든 곳도 있었고 사륜구동 지프차와 낙타를 타는 사막횡단도 해 보았다. 어린 시절 처음 탔던 기차여행의 향수 대문에 1만 km를 달린 시베리아 횡단 열차도 타 보았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 보았던 기차여행의 추억이 내 머릿속 제일 깊은 곳에 차지하고 있음이다. 몇 년 전부터 티벳 여행을 꿈꾸고 있다가 칭짱 열차 개통 소식을 신문에서 본 후 미루고 있던 티벳 여행의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테마세이에서 티벳 여행의 안내서를 보내왔고 구하기 어렵다는 칭짱 열차의 티켓을 어떻게 확보하였는지 여행 출발 확정과 함께 일정표가 내 손에 들어왔다. 상세 일정을 보니 칭짱 열차를 타는 구간이 내가 생각했던 전 구간(북경이나 상해에서 타는)이 아니었다. 라싸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하고 난 후에 열차를 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열차를 타고 티벳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올 때 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도 라싸에서 씨닝 까지만. 사실 티벳에서의 일정 보다는 열차 안의 긴 시간 보내는 것에 더 비중을 두었던 나로서는 기대에 못 미치는 구간이었다. 이런 저런 궁금증을 마사장님께 물었고 사장님의 대답은 이랬다. 티벳 여행은 고산증 때문에 고생할 수도 있는데 열차를 먼저 타면 그 증세가 열차 안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서 라싸쪽을 먼저 다니면서 고산증에 적응이 된 후에 열차를 타면 열차 안에서의 시간들을 힘들지 않고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일정표를 만들었다고. 직접 부딪쳐 보니 맞는 말씀이었고 탁월한 선택이었다. 라사를 출발한 기차는 평균고도 4,500m를 오르내리며 우리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주고 있었다. 만년설이 덮인 겹겹을 산들, 호수, 광야, 양떼들.... 풍경만이 아니라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쓸쓸함과 낭만, 환희를 느낄 수 있는 감성까지도. 내 입은 호사스런 감탄사를 연방 내뱉었으며 손은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었고 두 눈은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모든 것들을 또렷이 새겨 두고 싶어 안간힘을 썼다. 연년생인 두 딸이 초등학교 4~5학년 때 남편과 함께 기차로 경주여행을 갔었다. 서울역에서 오후에 출발을 하였는데 저녁은 기차 안에서 먹는다고 아이들에게 얘기를 했었다. 기차에 오르고 좌석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딸들이 빨리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 것이다. 기차를 타는 게 처음이었던 딸들이 식당 칸에서의 먹었던 근사한 호텔식 저녁이 지금껏 이야깃거리로 남아 있음은 물론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저녁노을을 받으며 식당 칸의 절반 이상을 우리 일행이 자리잡고 앉았다. 열차 안에서의 식사라 대충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만 먹겠지, 하고 생각했던 내 예상을 빗나가는 메뉴였다. 제대로 된 정식 세트메뉴가 깨끗하고 빳빳한 흰 식탁보가 덮인 식탁이 비좁게 연방 올라왔다. 아쉬웠던 건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고산증 때문에 술 종류는 안 된다고 하여 더 이상 분위기를 고조시키지 못함이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는 나로서도 서운함이 들었다. 대신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지는 해의 끝자락이 식탁위로 들어와 붉은 와인 빛으로 물 들여 주며 우리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이방, 저방(4명씩 타게 되어있는 열차칸)에 모여 이런 저런 수다를 떨면서도 창 밖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광야의 어둠을 놓치지 않았다. 그 어둠은 사물이 보이던 낮 동안의 여러 가지 상념들을 이제는 쉬라고 다독거려 주는 것 같았다. 사물을 분간하기가 어려운 어둠이 깔리자 나는 이층 침대칸으로 올라가 누워 이젠 보이는 것 대신 소리를 느끼고 싶었다. 눈을 감으니 레일 위로 달리며 부딪히는 열차 바퀴의 금속 소리가 나를 48년 전의 세월로 되돌려 놓고 있었다. 그리곤 살아있음이 이유도 없이 고마운 밤이 칭짱 열차 안에서 깊어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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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벳여행의 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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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시간 이상을 달려온 칭짱 열차는 우리 일행을 씨닝역에 내려놓고는 달아나 버렸다. 씨닝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성도로 가기 위해 중간기착지로 들린 곳이다. 이곳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성도로 가서 황룡, 구채구 관광을 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여행기는 여기서 끝을 내려고 한다. 황룡 구채구의 아름다운 광경을 자칫 미흡한 내 글로 가릴 수 있을까봐... 티벳을 다녀온 지 벌써 석 달이 지났다. 잠깐이나마 영혼의 안식을 찾아 떠났던 티벳 여행. 다녀온 지금, 확실하게 내 손에 얻은 것도 달라진 것도 없다. 그러나 떠나기 전의 설레임과 긴장이야말로 여행의 가장 큰 선물이라 생각한다. 그 선물의 답례는 죽을 때까지도 남아있을..... 다녀온 곳에 대한 팽팽한 그리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