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인도/네팔
작성자 :
테마세이투어
작성일 :
2007.11.22
조회수 :
4503
| 이 글은 김한종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김한종님은 2007년01월08일부터 01월20일까지 13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인도/네팔 여행을 다녀 오셨습니다. 글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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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네팔 여행기 (알 수 없는 나라) 델리-자이푸르-아그라-오르차-카주라호-바라나시-카트만두 | ||
| 글: 김 한종 사진: 이 영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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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인도,네팔 전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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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인도 방문코스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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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lhi-Jaipur-Agra-Jhansi-Orcha-khajuraho-Varanasi-Sarnath-Katumndu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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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네팔-카투만두 지역 방문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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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ayambhunath-Darbal-Kumari-Thamel-Gokarna-Nagarkot-Bhaktapur-Pashupatinath-Patan-Boudhnat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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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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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년(丁亥年) 복돼지 해라고 떠들썩한 분위기는 소한이 몰고 온 추위와 눈보라에 사그라 든다. 언제나 소한다운 추위가 한동안 계속된다. 오랫동안 생각하여 오던 인도여행을 출발하는 날이다. 집에서 나서서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한다. 오늘의 화두로 논어의 있는 군자는 “和而不同”하고 소인은 “同而不和”라는 4자 성어를 생각해 본다.(군자는 화합하여 붙어 다니지 않고 소인은 붙어다니되 화합하지 못한다.) 1월8일: 우리는 방곡 행 11:35분 TG 635편을 타기위해 공항 lobby 에 들어가니 시장같이 붐빈다. 방학이라 어린 학생 출국자가 많이 보인다. Bangkog까지 약 2500 miles, 약 5시간 30분이 소요된다. TG 635 기가 12시에 출발하여 방곡의 “Suvarnabhumi” 신공항에 현지시간 15:25분에 착륙했다. (한국시간 -2시간)
( 사진: 우리가 타고 갈 Thai 항공기) 예전에 돈무앙 공항에 비해 새로운 시설로 지은 새로운 공항이다. 여기서 다시 Transit Course로 이동하여 2시간을 기다린 끝에 TG 315기로 18:10분(현지시간)에 이륙하여 Delhi로 향하여 1,833miles 의 거리를 약 4시간 30분이 소요되어 밤 8시 30분에 Delhi 공항에 내리니 안개가 자욱하고 이상한 냄새에 답답해진다. 이곳은 Bangkog보다 또 한 시간 30분이 늦는 곳, 서울보다 모두 ?3:30분이다. 입국 수속과 Baggage 를 찾느라고 오후 9시 30분이 지나 일행 13명이 모여 버스를 탄다. 어두컴컴하고 안개가 끼어 흐릿한 도로를 지나 40분 만에 Intercontinental Hotel 에 도착한다. 공항에 내릴 때 걸어주는 노랑꽃 목걸이를 목에 건 채 호텔로 들어가니 로비가 화려하고 여러 가지 꽃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기분이 누그러진다. 대기의자에 앉으니 뒤에 페치카에서 나무 타는 냄새가 나며 불길이 너울거린다. 연기기 많이 나와 공기가 탁하다. 호텔 522호에 배정 받아 하루를 마감한다. 인도인의 처음 본 인상은 검은 머리, 턱수염, 높은 코, 검은 눈동자의 큰눈, 검은 피부와 더불어 조화를 이룬 듯하다. 머리에는 흰 터번을 두른 것이 정통적인 모습이다. 방콕에서 델리 행에는 인도인이 주였고, 어린이가 많아 소란스러웠으나 4시간이 넘으니 지쳐 잠이 들었다. 나이든 여성 한 분이 호흡곤란을 일으켜 승무원들이 동원되고 산소 마스크까지 사용하였으나 착륙 시에는 좀 회복되어 다행이었다. New Delhi 지역 탐방에 나서 1월19일:오늘은 여유 있게 수도지역 답사에 나선다. 어제의 장거리 비행 여독을 어느 정도 풀었다. 아침식사를 여유 있게 한 후 09:00시에 출발. 우선 Old Delhi 로 향하였다. 아침인데도 거리에는 노숙자, 걸인들이 보이고 판자촌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뿌연 안개 속에 도심지역은 차와 사람으로 만원을 이룬다. Old Delhi는 1692년 Mughal(무굴) 제국의 “Shah Jahan” 이 건설하였고 80% 이상이 Islam(이슬람) 교도이다. 반면 New Delhi 는 영국인 들이 건설하여 150여년간을 지배하였으며 1천 6백만의 인구가 밀집하여 살고 있다.
( 사진: 인도 대도시의 거리 풍경-코끼리가 중요 운반 수단) 인도도 우리나라와 같이 2차 대전 이 후 1947년 8월 15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이제 60년이 되는 나라이다. 참고로 인도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인도 역사의 발자취 인도는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의 한곳이다. 기원전 BC 2500~1500년 사이가 초기 Indus 문명 기간이다. BC 1500~1300 년 기간에 아리아인이 인도로 들어오면서 4대 캐스트 계급이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에 생겨난다. 이때부터 Brahmin(사제들), Kshatriya(무사 계급), Vaisjya(상민-정복민), Shudra(노예-피정복민)로 나누어 진다. 그 후 BC 6세기 부터 도시 국가가 성립되고 불교가 창시된다. BC 321~104년에는 Maurya 왕조가 탄생하여 Ashoka 왕이 인도 대륙 서북부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남인도 까지 정복한다. 그 후 Gupta 왕조가 AD 300~500년 사이 융성하였으며, AD 1206~1526년 사이에 서부지역으로 이슬람 세력이 침입하면서 Dehli Sultan국을 건설하여 통일국가로 발전한다. 1526~1761년 사이에 Mughal 제국이 전성기를 이루면서 Dehli 와 Agra지역에서 강자로 등장, 2대 Humayun(1508~1556) 왕을 지나 Akbar(1542~1605) 왕 시대에 이르러 전성기에 들면서 각종 궁전을 건축하고 성곽도시를 건설하면서 수많은 문화 유적을 이룬다. 건축 왕으로 불리는 Shah Jahan(1592~1666) 시대에 “Taj Mahal”, “Jami Masjid” 등 수 많은 사원을 건축하여 인도문화의 전성기를 이룬다. Mughal 제국이 쇠퇴하면서 1600년경부터 인도를 분열시켜 영국이 지배하게 된다. Sepoy 항쟁을 거치면서 민족주의가 대두하여 국민회의가 출범한다.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나 그 대가로 여전히 독립은 멀었다. 이에 “Mahatma Gandi”가 범국민운동을 일으켜 1945년 제 2차대전이 끝나면서 힌두교와 이슬람교 중심의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47년 독립국가로 탄생한다.
(사진: 대도시 거리에 나타난 소들 ) 인도의 이슬람 문화의 정수를 찾아서 10시경에 Old Delhi 중심에 있는 “Jami Masjid” 사원을 방문한다. “Taj Mahal”(타지 마할)을 건설한 샤 자한 이 건설한 사원으로 1644년 시작하여 그가 죽은 후인 1656년에야 완성되었다. 이슬람 사원 중에 가장 큰 곳으로 약 2만 5천명이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 진주 대리석으로 쌓아올린 큰 탑이 양쪽에 서 있고 높이가 40 m 이다. 탑으로 올라가면 (인도의 수도-Delhi와 New Delhi 시내지도)
(Qutab minar complex) Delhi 시내 전체를 볼 수가 있다. 탑에는 “Coran” 이 검정색 보석으로 조각되어 멋지게 보이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사원내부는 이슬람 사원의 특징처럼 내부장식이 없고 바닥에만 카펫이 깔려 기도하는 곳으로 “마호멧”과 더불어 9명의 선지자를 모시는 9개의 돔 형태로 지어졌다. 사원은 정방형으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예배시간에는 신자만 출입이 가능하고 신을 벗고 들어가야 하며 반바지도 입을 수 없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양말을 한 켤레씩 준비한다. 다른 사원을 들어갈 때 또 사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원 건너 정면 1 km 앞 직선 거리에는 “샤자 한”의 거처가 있고 그는 자기 거처에서 이 사원을 향해 기도 하게끔 되어 있다. 좌우의 둥근 탑 위에는 비둘기 때가 까맣게 앉아있고 사원바닥에도 비둘기 똥이 많아 떨어져 있어 맨발이나 양말에 묻기가 다반사다. 중앙에는 물이 있는 곳이 있고 물 주변에서도 기도한다.
(사진: Jami masjid 사원 전경) 인도의 종교 여기서 이해를 위해 인도의 종교를 고찰해 본다. 창시자가 없는 힌두교는 경전으로 “우파니샤드”가 있다. 전인구의 80%이상이 믿는다는 힌두교는 신봉하는 신들이 너무 많고 다양하여 그들의 삶 자체가 종교라고 한다. 그러나 창조주로 “Brahma”, 법의 신 “Vishunu”, 가장 많이 신봉하는 “Shiva”신이 있다. 다음으로 전인구의 10%가 신봉하는 이슬람교로 무굴 제국 이후 쇠퇴하고 있다. 인도에서 BC 6세기경 “Siddharta” 가 창시한 불교는 당시에 인도대륙에 널리 퍼졌으나 이슬람 세력에 의해 약화되어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며 유적지를 중심으로 남아있다. 다음으로 BC 6세기경에 “마하비라”가 창시한 “Jainism”(자이나교)은 구자라트 주를 중심으로 강세를 이루나 지금은 힌두교가 대종을 이루고 생활자체의 종교로 인도를 지배한다. 인도인의 영원한 지도자 Gandhi가의 영혼을 찾아서 사원을 둘러보고 내려와 자전거 “릭샤”(인력거)에 2인씩 타고 이동한다. 사원 앞에 시장 통을 지나 도시 북쪽에 있는 “Raj Ghat” (간디의 화장터)로 이동하기위해 시내를 벗어나 Yamuna 강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화장터로 이동한다. 넓은 잔디밭으로 둘러 쌓인 평지에 조성된 정방형의 화장터이다. 그 가운데에 검은색 사각 대리석 위에 5개의 꽃 장식이 있고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기도하고 오늘도 3명이 수행자가 경전음악에 맞추어 기도 한다. 5개의 꽃 장식은 하늘, 땅, 물, 불, 바람을 상징한다. Raj Ghat 북쪽에는 “Shanti Vana”(평화의 숲)라는 공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인도 독립의 영웅이며 초대 수상인 “Jawaharlal Nehru” 와 그의 딸로서 수상을 지냈던 “Indira Gandhi” 와 그녀의 아들로 수상을 지냈던 “Rajive Gandhi” 등 가문의 화장터이다.
(사진: Gandhi 화장터 Raj Ghat 전경) Old Delhi 와 New Delhi 를 방문하면서 Old Delhi 에는 “Red Fort(붉은 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무굴 제국의 황제인 “샤 자한”이 1639-48년에 걸쳐 지은 성이다. 당시 사용했던 왕궁으로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당시에 위세가 얼마나 대단 했던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외에 간디 기념관과 Delhi Public Library가 자리잡고 있으며 철도가 통과하는 Old Delhi역이 위치하고 있다. 다음에는 New Delhi 지역으로 이동하여 “Bahai(Lotus) Temple” 을 방문한다. 이곳은 평지에 광활한 땅에 호주의 Sidney시의 Opera House식으로 건축한 사원으로 첨단의 건축미를 자랑한다. 이곳도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며 침묵을 지켜야 한다. 중앙 높은 곳에는 태양이 들어오는 창이 있으며 바닥에도 흰 대리석으로 깔려있다. 다른 사원과는 달리 대리석 의자가 중앙을 향해 줄지어 있다. 정면으로는 9개의 반원형 아치식으로 이루어 졌으며 사원 둘레로는 해자(垓字)가 둘러있고 주변에는 조경이 잘 되어 있다. 엄숙한 침묵이 흐르고 모두다 경건한 자세로 임한다. 인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이 전부이다. 그러나 12세 미만자, 임산부, 입원환자, 교통사고 사망자 등은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 Raj Ghat 등 방문을 마치고 우리는 Laieez Affaire라는 인도식당에서 탄두리 치킨이란 고유음식을 맛보는 기회를 가진다. 식당내부가 너무 컴컴한 곳에서 느리게 식사를 진행한다. 고유한 인도식 음식을 별 거부감 없이 마쳤다. 다음은 New Delhi 중심가인 “Connaught Place”로 나오면서 새 도시가 방사형 도로로 시원한 느낌을 준다. India Gate를 중심으로 행정 중심지인 “Raj Path”(라즈가) 를 차로 돌면서 대통령 궁, 무굴 정원, 국립 박물관 등 도심을 차 안에서 내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중심가에서는 차를 내려 걸어갈 수가 없다니? 대통령 궁은 아래는 붉은색, 위는 크림색 대리석으로 건축된 단층 건물로, 의회와 마주하고 그 아래로는 Mughal 정원이 자리잡고 뒤로는 “Buddha Jayanti Park” 가 있어 광할한 녹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사진: Bahai 중심가에 있는 India National Museum을 방문한다. 명성과는 달리 박물관 홍보나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1층은 주로 “인더스 문명”( BC3000~1500)에서 Maurya (BC 250), Gupta (AD 400), Mughal (AD 1526~1857)의 왕조시대의 유물을 전시하였다. 규모는 적으나 세련되고 정교한 조각품이 주로 전시된 6 전시실이 중요하고 이것은 “Kushan” 왕조의 유물이다. 간다라 불상과 Mathura 미술품을 주로 전시 하였고 소품이 많았다. 불교 미술의 진수만 전시된 곳이다. 2층에는 인도 내륙과 중앙 아시아 유물 전시관이 있고, 11번째 실의 “아잔타 석굴” 벽화는 대작으로 단연 시선을 끌었다. 동굴 벽화를 재현해 놓아 특이하다. 또 기원전 2,700년 전 여자의 화석도 특이하고 팔찌를 끼고 이빨이 고르게 그대로 화석화 된 것이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박물관 밖에는 기원전 300년 전에 “Ashoka” 왕이 깨달음을 얻은 것을 돌에 새겨 놓은 것을 조각형태로 둥글게 만든 것에서 옛 문자를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유적지 Qutab Minar지역을 찾아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Qutab Minar Complex”로 간다. 이곳은 인도 땅에 들어온 이슬람의 힘을 과시한 승전 탑으로 가장 뛰어난 볼거리다. Delhi지역은 이슬람 세력이 1191년 부터 인도 북부 지방을 침략한 후 델리와 인도대륙의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한 후 1857년까지 통치하였다. 그 후 “Quthap Din Aibak”이 이끈 군대가 승리하여 당시 Delhi의 통치자 “Pritviraj Chauran”의 목을 베고 힌두교를 신봉하던 왕실 가족의 거처인 “Lal Kot”요새를 불태워 버렸다. “Aibak”가 승리한 후 1193년부터 승리 기념으로 이곳에 “Qutab Minar”건축을 시작, 붉은색 사암을 이용하여 쌓은 이 탑은 당시 이슬람 신앙이 전파된 동쪽 끝의 표시이다.
(사진: Qutab Minar 전경) 73m의 높이로 Minar 는 5개 층으로 30m 땅속에서 부터 쌓아 올렸다. 직경 15m 의 받침대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져 맨 꼭대기는 폭이 2.4 m다. 탑 전체에 “Coran” 의 경구를 부조로 정교하게 새겼다. Sultan 국의 첫 군주인 “Quthap Din Aibak” 가 건축을 시작하여 세상을 떠날 때 1층만 완성, 그의 후계자 “Iltutmish”가 완성. 그 후 탑이 오랜 세월 무너져 내려 1368년 “Feroz Shah Tughlag” 가 탑을 복원, 흰 대리석을 사용하여 2층을 더 올렸으나 1803년 지진으로 허물어졌다. 이 탑 주위에는 인도의 최초의 모스크인 “Quwwat-ul-Islam(이슬람의 힘)”의 흔적이 남아있다. 길이 43m, 폭 33m 되는 부지에 세워지고 벽으로 둘러친 이 모스크는 현재 16 m 높이의 아치만 남아있다. 이슬람 양식으로 장식하여 새겨진 문장(紋章)사이에 힌두교의 상징인 연꽃 그림이 섞여있다. 당시에 기술로는 어떻게 그토록 높이 붉은 사암을 쌓아 올렸을까? 그 당시에 코끼리가 큰 힘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나무를 X 자로 겹쳐 놓고 그 위에 돌을 올려놓아 코끼리가 차츰차츰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려 놓았다 한다. 대리석을 정교하게 섞어 쌓아올려 조화를 이루는데 1층 중간에 Coran을 조각한 둥근 층을 4개나 만들었고, 2층에는 2줄, 3층에는 1 줄씩 Coran을 조각하였다. 원래는 4층이었으나 “Feroz Shah” 왕이 5층으로 새롭게 쌓았다. 당시 돔에는 지붕이 있었으나 1829년 지진으로 파괴 이 후 돔을 다시 얹었다. 지금은 아래 한쪽에 보관되어 있다. 전에는 탑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나 추락사고가 난 후 1983년부터 비공개로 되어 있다. 어둠이 내리면서 “Lakshmi Narayan Temple”인 힌두교 사원을 방문한다. 흰 대리석과 붉은 대리석으로 조화를 이루어 건축한 사원으로 아주 건축미가 뛰어나다. 중앙의 돔은 너무 정교하고 야간 조명에 신비를 더해준다. 여신을 모시고 저녁 기도 시간이라 코란을 외우는 소리가 낭랑하고 엄숙하게 울려 퍼진다. 마지막으로 “Raj Path”를 지나면서 India Gate를 마주한다. 이 기념물은 1차 대전에 참전한 전몰 용사 위령 탑이다. 높이 42 m로 내외 벽에는 전쟁에 희생된 8만 5천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영국인 “에드윈 루티엔스”경이 설계하였고, Raj Path 동쪽에 있어 오가는 길에서도 볼 수가 있다.
(사진: Humayun 의 무덤 전경) 시간에 쫓겨 보지 못한 UNESCO 문화유산으로 된 “Humayuns’ Tomb” 에 관해 기술해야 한다. 무굴 제국의 2대 왕인 “Humayun” 에 무덤으로 그가 죽은 후 왕비에 의해 건축된 것이다. 무굴 제국의 건축은 이 무덤에서 시작되어 “Taj Mahal”(타즈 마할)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한다. 사각형 구조의 정원은 너무나 아름답고 그 당시의 왕을 비롯해 궁중의 중요 인물들 약 150여명이 함께 잠들고 있다. 저녁을 오후 8시가 넘어 인도식으로 Wine을 곁들여 한 시간 이상 즐긴 후 호텔로 돌아와 하루를 마감했다. 내일은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6시간 이상을 이동하여야 한다. Rajasthan 주 Jaipur 로 이동 하면서 1월 10일: 05시에 기상하여 서둘러 트렁크를 정리한다. 06시에 Restaurant 에서 과일을 중심으로 아침을 대신하며 우유에 시리알 몇 가지를 추가한다. 캄캄한 시간에 호텔을 나와 멀고 먼 “Jaipur”를 향하여 시내를 벗어난다. 안개 낀 가운데 공사구간을 위험스럽게 지나가면서 단 5 m 앞도 제대로 분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2시간 이상을 달려도 휴게소가 안 나온다. 급한 볼일 때문에 임시로 겨자 꽃이 유채처럼 노랗게 핀 도로변에 차를 멈춘다. 다시 버스에 올라도 여전히 날씨는 쌀쌀하고 안개는 좀처럼 가시지 않는 가운데 10시가 넘어 겨우 휴게소를 찾아 들어간다. 잘 조성된 Resort가 들어서 있고 레스토랑이 있어 한동안 쉬면서 밖에 다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Tea 한잔씩을 나누며 장거리 이동의 피로를 달랜다. 30여 분을 쉰 후 Jaipur 외곽 Tollgate에서 멈추어 수속을 한 후 시내로 진입하니, 도로는 무질서의 극치를 이룬다. 5시간이 넘어 12:30분이 되어 “Amber Fort” 입구에 이른다. 우리는 우선 암베르 성을 오르기로 하고 Jeep 차에 5명씩 분승하여 출발한다. 길에는 코끼리, 낙타, 소, 돼지까지도 뒤섞여 온통 수라장이나 그 사이로 차는 빠져나가나 냄새가 지독히 역하다. 돌로 축성한 암베르 성 입구에 이르러 산성으로 진입. 여기서도 물건 파는 사람들에게 시달린다. “Amber”성이란 하늘 가까이 있는 성이란 뜻으로 산 위에 산성이 둘러 쌓여있고 누각이 사방에 높이 솟아 있다.
(사진: Amber 성내 왕궁 전경) 중세부터 남아있는 성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사암(砂巖)으로 쌓은 성이다. 이 성은 한번도 외세에 의해 침략당한 일이 없어 완벽한 상태로 남아있다. 이 암베르 성은 무굴 제국도 정복할 수 없어 무굴 왕이 이 성을 지배하던 “Man Singh”왕의 여동생과 결혼을 통해 이 왕국으로 입성하였고 성으로 하나의 독립국을 이룬 셈이다. 성안의 왕의 거처와 침실은 은거울로 벽이 장식되어 찬란하다. 기둥에 대리석 조각이 뛰어나고 그 앞의 기도원은 힌두 사원의 형식으로 대리석 기둥에 무굴 양식 조각이 아름답게 기둥 위를 장식하였다. 왕의 거처 위에 지붕 돔 3개는 물 탱크 역할을 한다. 13세기경 성안에는 주택이 많았으나 물 부족으로 거주 인구가 늘어날 수 없어 남쪽으로 도시를 옮겨 새로 건설한 것이 바로 “Jaipur” 시이다. 성안 둘레 벽에는 술병, 향수병이 채색이 되어 조각을 이루었다. 당시 Amber 성에서 Jaipur 시내로 들어가는 문이 7개 였으나 현재는 3개가 남아있다. “Jaipur시- Pink City”를 탐방하면서 성을 방문하고 다시 내려와 Jeep 에서 버스로 옮겨 타고 시내로 들어가면서 좌측으로 호수 안으로 궁전이 보인다. 이 궁전은 멋지게 지어졌으나 현재는 물이 말라 걸어서도 갈 수 있으며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다 한다. 이 곳 “Rajastan” 주는 1729년에 “Jaipur”시를 건설하고 붉은 색의 상징으로 “Pink City”라 불렸었고 현재는 350만의 인구가 사는 대도시이다. 라자스탄 주의 우측에 “Udaipur” 는 흰색의 도시로, “Jodhpur”는 푸른색으로 장식하였고, “Jaisalmer” 는 황금색으로 치장하여 3각의 “Triangle City”를 만들어 관광의 명소를 이루어 Delhi 와 연결하여 찾는 사람이 가장 많다.
(사진: Jaipur 시내에서의 축제 모습) 시내로 들어가니 버스, 승용차, 오토 릭샤, 자전거 릭샤, 코끼리, 낙타, 오토바이 등으로 도로는 뒤엉켜 무질서의 극치를 이루는 가운데 경적을 울려가며 우리 버스는 길을 뚫고 아슬 아슬하게 Sheraton Hotel로 향한다. 그러나 거리의 상점은 모두 Pink색으로 단장하였고 간판은 똑같은 규격으로 힌두어로 표기하고 점포는 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인도와 차도를 구별할 수 없이 교통지옥으로 아수라장이란 표현이 알맞은 말이다. 호텔에 도착하니 14시가 되어 늦은 점심식사를 뷔페로 해결한다. 어딜 가나 과일이 풍부하여 그런대로 괜찮다. 식사를 서둘러 끝내고 시내관광을 하기위해 오던 거리로 다시 들어가 “City Palace”로 향한다. 도로에는 축제행렬이 악기를 울리며 반대편에서 요란스럽게 다가 오며, 도로는 더욱 더 마비상태에 빠진다. 참 기막힌 현상이나 그 사이로 자전거, 오토바이, 차량이 뒤엉키면서 용케도 빠져나간다.“Jaising Ⅱ” 가 지었다는 궁전으로 들어가니 노란색 건물이 주를 이루고 깃발이 휘날리니 왕이 궁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 City Palace 전경) 마당에는 당시에 사용했던 대포, 고급마차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정원밖에는 커다란 은 항아리가 2개가 있다. 이것은 영국 왕세자 “Edward 7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랫동안 배를 타야 했던 “Man Singh Ⅱ” 왕이 갠지스 강물을 담아가는데 사용하였다는 한다. 이 항아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은제품으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왕궁 안 연회장에 이르니 2층에는 조그만 창문이 있고 그 뒤가 관람석이다. 이 왕궁은 이곳 지역의 “Jaipur” 왕이 거주하던 곳이다. 다음은 “Man Singh Ⅱ” 의 Art 박물관으로 입장하니 사랑의 신이 그려진 그림이 입구에 있고 가운데는 화려한 연회장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도 역대 왕이 사용했던 일상용품이 전시되고 무굴 시대의 그림과 각종 경전이 전시되고 있다. 아주 소형인 5㎝ⅹ5㎝의 코란이 가장 인상적인 전시물이다. “Jaipur Singh 1(1750-67)” 왕의 초상 앞에 멈추니 거장으로 18세에 세상을 떠났다 한다. 직물(Textile) 박물관에는 “Man Singh 1” 가 입었던 붉은색 가운이 길이 2 m, 너비 1.2 m, 무게 250 kg의 실제 가운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옷 전체에 자수를 놓았고, 왕비의 의상은 손으로 짠 것이다. 또 그의 승마복, 신발, 모자 등이 실물로 전시되어 있다. 끝으로 Arms & weapons 박물관을 방문 하고 그 당시 사용했던 별난 칼, 총 등 여러 가지 무기를 보았고 이제는 밖으로 나와 “바람의 궁전”으로 가기 위해 큰길로 걸어 나갔다. 원래는 “Hawa Mahal”로 일명 “바람의 궁전”으로 불리는 이 곳은 1799년 지어진 “Jaipur”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당시 바깥출입이 제한된 왕가의 여인들이 창가에서 시내를 구경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안전 문제로 안으로 들어가기 어려워 길 건너 상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곳은 남의 집 옥상이라 돈을 내야 한다.
(사진: 바람의 궁전 전경) 이 건축물은 벽을 땅밑에서부터 쌓아 올린 5층 구조로 내부공간은 사용을 안 한다. 3층 까지는 출입이 되나 현재는 낡아 입장이 어렵다. 벽에는 원숭이가 기어 다니고 역사가 살아 숨쉬는 간물이다. 마지막 답사를 마치고 길을 건너서 다시 City Palace 주차장으로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 체크인하고 오늘의 일과를 마친다. 식사 전에 민속공연 (항아리 6개를 이고 추는 춤)을 보고 내일을 위해 일찍 휴식을 취한다. 1월11일: 오늘은 멀리 Agra 로 가는 날. 04:00시에 기상하여 간단한 식사 후 05:40분 아그라로 향하는 장도에 오른다. 고속도로에 나올 까지 어둠에서 차는 안개와 어둠을 뚫고 달린다. Jaipur 외곽으로 나오니 Agra로 향하는 도로는 확장공사가 진행중이다. 어지럽고 좁은 1차선으로 곡예 하듯 오는 차를 피해간다. 아슬아슬한 순간도 많아 불안하다. 아직 도로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문제다. 어둠이 가시면서 서서히 태양이 올라와 안개는 걷히고 어제 Jaipur로 올 때 보다 일기는 좋은 편. 10시가 넘어 겨우 휴게소에 이르러 쌀쌀한 날씨에 모두 몸이 부자연스러워 짜이 한잔으로 기분을 전환하고 선물 상점으로 들어가 구경을 한다. 상품이 잘 진열되었고 가격표가 부착되어 있고 Book Corner도 상당히 큰 편인데 비싸다. 가면서 도로변의 “다락을” 마을 앞에는 창녀촌 이란다. 13~15세의 소녀들이 호객을 하나 차만 다니는 도로변이라 돈이 될 런지? 기사들이 주 대상이라나? 판자촌도 아니고 간신히 하늘을 가리고 옆을 가린 정도의 장소로 집이라 부를 수 없다. 가능한 일인가? Sikiri 성의 비밀을 찾아서 가는 도중 Old City의 “Fatehpur Sikiri” 성을 방문한다. 입장료는 인도인 10 루피, 외국인 250 루피로 어디를 가나 관광객은 10배에서 50배에 이르는 요금을 내야 하니 참 어이없는 일이다. 관광 인프라가 제대로 갖추어 지지도 않았는데 너무 심하고 외국인 관광객이 봉이라니! 아주 오래된 유적지이나 최근에 많이 정비되었다 한다. 그 중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Royal Palace” 를 방문한다. 붉은 사암으로 건축된 왕궁으로 “Akbar” 황제가 11년간 건축하였으나 5년 정도 사용 후 물 부족으로 "Arga”로 왕궁을 이전하였다.
(사진: Sikiri성의 Birbal Bhuvan 전경) 1.”Jodhi Bai Palace”: Akbar황제의 왕비인 Jodhi Bai의 궁전으로 왕자를 낳았고, 그녀는 힌두 왕조의 “Amber” 출신으로 악바르 왕과 정략 결혼을 하였다. 건물 기둥은 힌두 양식, 돔은 이슬람식으로 조화를 이룬다. 앞 마당에는 돌로 된 바닥에 놀이판이 새겨져 있다. 2. Birbal Bhuvan: 황제의 측근 권신인 Raja Birbal 을 위해 건축한 것으로 참으로 권력에 도취된 어처구니 없는 세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3. Golden Palace: 기독교 신자인 Akbar 왕의 왕비 “Miriam”을 위해 지은 궁전이다. 4. Panch Mahal: 가장 높은 5층으로 지어진 건물로 황제의 300여 명의 시녀들이 머물던 곳으로 아래층에만 약 85개의 방이 있으며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Royal Palace 방문을 마치고 Agra시내로 향했다. 참고로 이 나라의 교육제도는 초등 5년의 의무교육이나 하층 계급의 자녀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부모가 젖먹이 아이, 꼬마 등을 앞세워 구걸을 하는 모습은 이해할 수 없고 학교에 가야 할 아이들이 길거리에 넘쳐 흐르니 미래가 어떻게 될까? 그러나 많은 인구를 가지고 소수의 상층부가 사회를 이끌어가니 언젠가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도 개선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40% 이상이 문맹이란 현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2년 도합 10년이다. 다음 2년 과정의 대학 예비과정을 두고 대학 3년, 대학원 2년, 박사과정 1년으로 제도화했다. 사립학교에서는 영어로 수업을 한다. Agra시내로 들어서니 13:30분. Sheraton Hotel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한동안 휴식을 한 후 Agra Fort로 향했다. 아그라 시의 고성 Agra Fort 를 찾아서 Yamuna강가에 세워진 Agra Fort 는 높이 20m, 사방 둘레 3.5 km 규모로 둘레에 해자가 둘러있고 무굴 제국의 3대 왕인 “Akbar”황제가 1566년부터 건축한 것으로 당시 제국의 국력을 과시한 붉은 사암으로 축조된 것이다. 우리는 그 옛날 코끼리를 타고 들어갔다는 길로 걸어서 성문을 들어간다. 우측으로 이슬람교의 아홉 성인을 상징하는 9개의 문이 있고 다시 왼쪽 도로의 문으로 들어갔다. 붉은 사암으로 요새(要塞)와 같이 지어졌고, “Akbar”, “Jahangir”, “Shah Jahan”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견고한 궁전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Shah Jahan”이 말년에 아들인 “Aurangjev” 왕에게 유폐된 곳이었다.
(사진: Agra성 입구 ) 이슬람 사원 앞에는 그 당시 이 성을 관리했던 영국인 “Russel Golvin(1807~1857)” 의 대리석 묘지가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곳에서 “Shah Jahan” 이 유폐되어 멀리 강가의 사랑하던 왕비의 무덤인 “Taj Mahal” 을 바라보며 증오를 불태우며 죽어갔다고 한다. 몇 개의 건축물을 관찰해 본다. * Diwan-I- Am: 1628년 “Shah Jahan”이 건축한 왕의 접견실로 하얀 색의 대리석으로 연꽃무늬로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건물 옆으로는 조그마한 사원과 무굴 제국의 왕비와 여인들이 Bazaar를 열었던 곳이 네모난 잔디밭으로 변모되어 있다. * Jahangir’s Palace: Akbar가 아들인 “Jahangir”를 위해 지은 건축물. Akbar와 Jahangir는 “Shah Jahan”과 그의 아들인 “Aurangjev”사이와 같이 증오의 대상이다. 권력을 향한 집념은 부자 지간, 형제 지간도 서로 죽이고 죽는 절대권력 시대의 산물이었다. *왕의 침실: “Shah Jahan” 이 건축. “Taj Mahal” 이 바라보이는 곳으로 분수가 5개 (하늘, 땅, 물, 불, 바람의 상징)나 중앙에 있고, 침실 천장에는 그네를 걸렸던 곳이 있는 것으로 보아 휴식처인 듯 하다. 침실 벽에는 위쪽에 책을 꽂는 곳이 조각되어 있고, 이곳은 힌두, 무굴, 페르시아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아름다운 “Taj Mahal”- 영원한 세계문화유산 ![]() (사진: Taj Mahal 전경) 무굴 제국의 황제 “Shah Jahan” 은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서쪽으로는 칸다하르, 동쪽으로는 아쌈 지역까지, 북으로는 파미르 고원, 남으로는 데칸 고원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1612년 Mumtaz Mahal 왕비와 결혼. 그들은 14명의 자식을 낳고 이어서 데칸 고원 전쟁터에서 천막에서 왕비가 막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왕은 죽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묘를 지어 주기로 약속한다. 1631년 부터 20년에 걸쳐 2만 명의 인부를 동원. 1,000여 마리의 코끼리가 라자스탄 지역 마크하나 광산에서 Agra까지 거대한 대리석들을 운반, 또 인근 Fatehpur Sikri 시에서 11만 4000 수레의 사암을 가져왔고, 건물 구조에 쓰일 벽돌을 구워내느라고 수많은 주민을 동원하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청금석, 티베트에서 터키석, 중국에서 수정, 펀자브에서 벽옥, 페르시아에서 마노, 아라비아에서 산호 등을 사들였다. 이것들로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건축물을 지었다. 붉은 사암으로 건축한 30m 높이의 출입문을 지나면 문에는 코란 경구가 장식되었고, 옆에는 작은 힌두교 사원이 하나씩 서있다. 높이 75m의 웅장한 건물이 각면 57m의 사각 받침대 위에 서 있고 50m의 Minaret이 사방에 하나씩 서 있다. 흰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Taj Mahal 돔 위에는 9 m의 청동탑을 세우고 금박을 입혔다. “Taj Mahal” 은 건축, 토목 공학의 기적으로 여긴다. 돔 자체 무게만도 1만 3천 톤 이상, 모든 벽면은 우아한 꽃 모양으로 장식한 걸작이다. 주변과의 조화와 균형미가 최고이다. “Shah Jahan” 이 죽은 후 쇠락의 길로 들어가 수많은 귀중품이 도난 당했으나, 인도의 독립 후 복원되어 아름다움을 되찾았디. 안에는 그의 가묘와 왕비의 가묘가 설치되어 있다. Orcha 의 숨은 유적을 찾아서 1월 12일: 오늘은 새벽 5시에 벨이 울린다. 머나먼 “Orcha”로 가야 한다. 180km 의 거리를 이번에는 기차로 가기로 한다. 아침을 바쁘게 보내고 07시경에 “Zhansi” 기차역으로 향한다. 시내를 벗어나 기차역에 이르니 07:30분이다. 대기실에서 한동안 기다려야 한다. (사진: Zhansi 역 풍경) 남녀로 구분된 대기실로 들어가보니 남자만의 방에도 일가족이 바닥에서 자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냄새와 일어나라는 사람의 떠드는 소리, 이어 바닥에 깔았던 것을 터는 데서 나오는 먼지와 더불어 고약한 냄새는 참을 수 없다. 밖으로 나와 기둥 턱에 걸터 앉아본다. 모든 것이 이젠 그러려니 하여도 좀처럼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기차는 08:15분인데 오지 않고 구걸꾼, 잡상인들이 귀찮게 군다. 역 입구에서는 구두닦이의 횡포가 이어지더니 이번에는 청소를 한다고 플랫폼에 물을 뿌리고 비로 마구 쓸어대니 어디서나 견딜 수 없다. 걸인마저 따라 다니면서 극성인데 기차는 08:30분이 되어서 역 구내로 들어온다. C-5에 올라 앞 자리에 앉으니 안도감이 든다. 제법 널찍한데 우리나라로 치면 무궁화급이다. 기차 안에서 짜이 한 잔씩을 따듯하게 마시며 안내자의 Notebook Computer를 들여다 본다. 참 다채로운 사람이다. 33살의 인도 청년으로 우리가 가는 곳 “Orcha” 출신으로 한국어에 능통하다. 업무도 한국어로 처리한다. Internet으로 오늘의 업무를 점검한다. 기차는 황무지 같은 벌판을 달려 이제는 허수아비를 세워놓은 논을 지나니 사탕수수밭이 나타나고, 밀밭을 지나가며 다리 위로 달린다. 황량한 들판을 달려가며 2시간 30분 만에 “Zhansi” 역에 내리니 똑같은 풍경이다. 우리는 가방을 머리에 이고 가는 porter를 따라 역 구내를 나가니 또 잡상인, 걸인들이 에워싸고 만다. 우리는 “Orcha Resort”를 향해 버스를 바꿔 타고 시장 통을 지나 시골길로 나아간다. 오르차 리조트는 역에서 17km 떨어진 유적지 중심에 위치한 한적한 단층 숙소이다. 이곳 마을은 인구 8,000명의 소읍으로 안내자 “Sunil Singh”의 고향이란다. 1531년 마하라자 루드라 쁘리탑(Maharaja Rudra Pratab)이 세운 “Bundela”왕조의 수도였던 곳이다. 현재는 작은 마을로 남아 있지만 당시는 무굴 제국의 제후국의 수도였다. 이곳은 무굴 제국의 왕위 계승시에 일어났던 권력투쟁의 장소이다. “Akbar” 황제 말기인 1602년 왕자 “Salim”의 반란 사건, 즉 훗날 “Jahangir”로 등극하기 위해 아버지를 제거하면서 왕이 되려던 “Salim”은 4개월 만에 실패로 끝나 이곳 “Orcha”로 피신한다.
(사진: Orcha 의 고성 전경) 당시 “Orcha” 의 “Maharaja (수령)”인 “Bir Singh Deo”는 이 왕자를 위해, 분델라 왕조의 미래를 위해 이 궁전을 바쳤으며, 반란사건 3년 후 1605년에 이르러 “Akbar”황제가 죽고 대신 무굴 황제로 “Jahangir”가 등극하게 된다. 그 공으로 Orcha는 Jahangir의 후원으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현재 남아있는 이 근처의 유적지와 사원, 잔시 성 등은 이 시대에 지어졌고 ”Singh Deo”의 권세에 힘입어 무려 55개의 이르는 궁전, 성, 사원이 건축되었다 한다. Jahangir 의 뒤를 이어 “Shah Jahan” 이 황제에 오르자 이곳 분델라 왕조의 권세도 쇠퇴하게 되며 “Jahangir”는 1627년 무굴 제국에 반란을 일으킨다. 당시 13살 소년으로 “ Shah Jahan”의 아들인 “Aurangzev”에게 패하여 22년의 황금기를 마감하고 만다. 이곳의 “Jahangir Mahal”은 그 당시의 영화를 누리던 곳답게 100여 개의 방, 그 위의 130개의 이르는 방이 군인들을 위해 지어졌으며, 무굴, 힌두 양식이 혼합된 힌두교의 성지이다. 400년이 지나 폐허로 변하다시피 한 궁전은 당시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서야 이 궁전 부속건물은 현재 “Sheesh Mahal Hotel”로 개조되어 4개의 방이 사용중이며 Restaurant도 영업중이다. 이 궁전의 꼭대기층으로 올라가 외곽으로 돌면서 폐허의 소도시를 내려다보면서 권력무상을 떠올려 본다. 강이 흐르고 궁전 뒤로 낙타우리도 갖춰진 완전한 성곽 궁전이다. 당시 궁전의 영화를 상상해본다. 특히 90번째의 왕자의 방의 천정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으나 마모가 심해 해독하기가 어렵다. 보수를 하면 훌륭한 관광지가 될 수 있겠다는 아쉬운 생각을 하면서 발길을 돌리었다. 다리건너 Bazaar를 지나 “Chaturbhuj Mandir(Temple)” 사원으로 옮겨간다. 마치 앙코르와트 사원과 같은 첩탑이 서있는 곳으로 우리는 이 사원의 어둡고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가 탑 꼭대기까지 직접 눈으로 살펴본다.
(사진: Chaturbhui Mandir 의 퇴색한 모습) 오랜 풍화에 시달리고, 비둘기 똥에 퇴색된 탑은 검은 색 갈로 변해 풍화되어 가고 있다. 멀리 서쪽 산 위에 걸린 태양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저물어간다. 17:28분 마침내 해는 구름 속으로 갑자기 사라지고, 주위에는 허무한 폐허감이 감돈다. 이제 어둠이 내리기 전에 내려와 천연염료가 찬란한 색깔로 진열된 상점을 지나 Metua 강가로 내려온다. 오후 6시가 되어 사원의 종소리가 폐허의 유적을 상징하듯 천천히 울려 퍼진다. 나는 강가의 바위에 서서 따듯한 차를 마시며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하고 생각에 잠겨 본다. “사랑해……” 로 합창을 하며 오늘의 일정을 마감 하고 호텔로 돌아온다. 휴식 후 19:30분부터 뒤 후원에서 Garden Party를 개최하며 Campfire로 저무는 날의 고도에서 하루를 마감한다. 외국인 4명도 참가하고, Resort 관리인, 직원들도 모두 나와 야외 무대를 준비하였고 와인과 양주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하루를 여유 있게 마감한다. 인도의 시골 교육현장을 찾아서 1월 13일: 어제의 느긋한 여유에 이어 오늘도 늦게 시작한다. 아침 일찍 주변을 산책하기위해 인적이 없는 길을 찾아 나선다. 마을이 없으니 다니는 사람도 없고 고요와 적막이 흐른다. 주변에 솟아있는 빈 사원을 찾아 나선다. 우리가 머무는 “Amar Mahal Resort” 바로 옆에도 아침 햇살을 받아 노란색으로 높이 솟아있는 사원으로 향한다.
(사진: Orcha Amar Resort 옆에 방치된 사원) 높이가 30m가 넘는 두 개의 탑이 마주보고 솟아있어 운치를 자랑한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 앞 큰 나무 밑에는 노숙자가 자리잡고, 옆 무너진 탑에는 여인과 아이가 자리잡고 있다. 사원의 안내문을 보니 1700년 초기에 축조한 것이니 벌써 300년이 넘은 사원이다. 지키는 사람도 없고 모진 풍상을 맞고 버티고 있으나 그 예술성은 뛰어난 탑이다. 문화재이니 훼손하지 말라는 경고가 함께 붙어 있었다. 너무나 방치하기에 아까운 유적이나 이곳에는 이런 곳이 많다. 미처 당국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문화재이니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오늘은 늦게 출발하여 Khajuraho(카주라호)로 가는 날이다. 도로에 나오니 여전히 고르지 못하고 포장부분이 좁아 곡예운전을 한다. 이따금 소가 도로로 진출하여 경적을 울리기도 한다. 그러나 소답게 천천히 움직인다. 10:40분 경에 안내인의 고향마을에 외조부가 세웠다는 “Gauraya Inter-College (초등과정 부터 12학년까지) ”를 방문하기로 한다. “Uttar Pradesh”주 Gauraya 마을로 들어가 학교 앞 도로에 차가 서니 학생들이 몰려 나온다. 교문도 없고 운동장도 나무가 군데군데 서 있고 경사가 심하고 먼지가 몹시 난다.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있다. 우리 때문에 흩어진 것 같았다. 다시 지도교사의 지시에 의해 대열을 갖추어 땅바닥에 깔개를 깔고 앉는다. 오늘이 시험 보는 날이라 조그만 종이에 인도어로 인쇄된 것이 나눠지고 각자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 반대편에는 여학생이 역시 반별로 앉아 시험중이다. 여학생은 인도 의상을 입어 어른같이 보인다. 남녀 공학이나 반은 따로 편성되어 있다 한다. 학생이 전부 1,060명 이란다. 학교 위에 지은 사원도 둘러보았다. 학교 구내가 지저분하고 먼지가 나고 하니 최근 축제가 있어 아직 청소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 우리 앞에 다가온 여학생들) 따듯한 인도 차 한잔에 비스켓을 내놓으며 방문자를 후대한다. 우리는 즉석에서 각출하여 소액의 성금을 전달한다. 교장선생님은 나이가 들고 몸집이 크고 시골 아저씨 같은 인상이다. 안내자에게 영어를 가르쳤다는 선생님도 만나 다행이다. 그는 아주 유순하게 생겼고 인상도 좋으며 5년 만에 만남이라고 한다. 기념식수가 된 건너편 농원을 둘러보고 서둘러 출발한다. (11:50) 세계에서 가장 에로틱하다는 Khajuraho 사원을 찾아 “Khajuraho”까지는 먼 길이 남았으나 도로사정이 나빠 달리기도 어렵다. 12:40분이 되어 중간 휴게소를 만나 계란 삶은 것으로 요기를 하며 잠시 쉬어간다. 다시 끝없는 고원지대를 달려가며 가끔 시장이 서는 거리를 지나간다. 그럴 때마다 길은 사람과 차량이 뒤엉켜 혼란스럽다. 도로 판에 69km가 남았다고 나오나 벌써 한시가 넘었다. 카주라호에 가까이 오니 도로사정은 좀 나으나 이번에는 보수공사를 하느라 위험하기 짝이 없다. 15:00시가 넘어 Radisson Hotel에 도착. 뒤늦게 점심을 대충하고 잠시 휴식 후 16:00시경에 카주라호 사원으로 향한다. 걸어서 갈 정도의 거리이다. 예전에는 스님이 신발도 안 신고, 맨발로, 맨몸으로 다녔고, 머리도 안 자르고 감자나 당근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먼저 동부사원에 이르니 맨발로 입장하라고 한다. 사원도 보수 중이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동부사원은 자이나교 사원이라 한다. 우리는 먼저 박물관으로 입장하여 동부사원 유물을 둘러보고 안내를 받는다. 3개의 자이나교 사원은 비교적 관리가 잘되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나 보수중이다. 가장 큰 사원으로 “Parsvanath Mandir” 는 넘어가는 햇살에 노랗게 비추면서 신비한 조각으로 우리에게 클로즈업 된다. 브라흐마, 비쉬뉴신들이 활력 있게 조각되어 있다. 자이나교 사원에 힌두교의 신이니 잘 이해가 안 된다.
(사진: 동부사원 Parsvanath Mandir 전경) 오후 6시45분에 호텔을 나서서 이 마을에 온 사람에게 보여주는 민속춤을 관람하러 간다. 좁은 무대에 이 마을에 온 손님들이 다 모인 양 빈틈이 없다. 남녀 각 5명의 무희가 역동적이고 빠른 동작으로 전통적인 춤을 선보이나 이질적이라 동화하기가 어렵다. 전통 고유악사도 너무 진지하게 열심히 하여서 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1월 14일: 오늘은 가장 뛰어난 조각작품이 많다는 서부 사원으로 향한다. 1986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 수많은 “Mithuna(남녀 교합상)”가 3층으로 조각되었고 규모나 질적으로 엄청나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11세기 “Chandra” 왕조 당시 84개나 축조되었고 크림색 사암(Sand Stone)으로 건축 되었다 한다. 1)Lakhmana Mandir: Vishnu신에게 봉헌된 사원으로 Mahade Mandir, Vishwanath Mandir와 비슷한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이 사원의 대표적인 조각은 춤추는 요정 “Apsara” 의 조각으로 신화의 일부를 보는 느낌. 군악대와 말, 그리고 코끼리의 행렬은 당시의 생활방식을 보여준다. 기단 아래에는 작은 미투나 상들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위 3개의 층에 주로 여인의 풍만한 가슴을 특징으로 한 여인상이 부각되어 있다. 주로 3번째 위쪽 칸에 성행위의 적나라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나 관찰을 잘하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다. 2) Kandariya Mahadeya Mandir: 1025~50년 Lord Shiva에게 바치는 가장 큰 사원. 높이가 31m로 서부 사원 중 가장 크다. 내부에 226개, 외부에 646개의 조각상이 있다고 한다. 이 벽에 3층 조각상 중 가장 에로틱한 성행위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동쪽 탑면의 성교 장면은 3단계로 색깔의 변화를 표현한 것으로 단계적 성행위 표현으로 보인다. 전 사원에서 가장 야한 성교 장면은 주의 깊게 보면 찾아볼 수 있다. 외벽의 조각의 의미는 Shiva, Kumari, Bahara 등 다양한 신들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어 인도 종교의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
(사진: Kandariaya Mahadeya Mandir 전경) 3) Jagadamba Mandir : Vishnu 신에게 바쳐진 사원. 에로틱한 장면이 너무나 사실적이라 웃음을 자아낸다. 현재는 Shiva의 부인인 “Paravati”를 모시는 사원이나 내부에는 시바와 파라바티의 부부상이 세워져 있다. 여기도 여러 개의 미투나 상이 시선을 끈다. 4) Chitragupta Mandir : 태양신 “Surya”에게 바치는 사원. 사원 안에 10명의 “Avatar”(불의 신)를 거느린 Vishnu상과 함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하늘로 비상하는 신상이 새겨져 있다. 5) Vishwanath Mandir : 가장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원으로 Shiva신에게 바쳐 진 사원이다. 기타 Varaha, Parvati, Chausath Yogini 사원 등 주변에는 자세히 볼 사원이 많이 있다. 서부 사원군의 백미인 5개의 사원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인간의 욕망의 한계가 어디인가 다시 한번 생각하여본다. 나오면서 길가에 있는 원주민의 민간주택을 들여다 본다. 방이 두개인 일자 주택으로 손자까지 4대가 한 가족으로 모여 살며, 점심을 만드는 중 이었다. 아이들도 표정이 밝으며 구경하는 집이라 방문 후 사례를 해야 한다. 좌측 담 안이 개방 화장실이자 세면장이다. 지붕은 흙으로 구워 만든 것으로 보여주는 집이라 내부는 깨끗한 편이다. 오전 탐방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 점심을 해결하고 “Varanasi” 행 비행기편이 1시간 늦는다는 소식에 한결 느긋하게 공항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국내선으로 Jet airway 724 편이나 유난히 까다로운 검색을 받느라 한동안 시간이 소요된다. 액체류, 물 등이 들어 있는 것은 조그만 것도 모두 Baggage에 넣었으나 일회용 치약 등도 체크 대상이니 심한 일이다. (사진: Kajuraho사원의 Mituna상 모습)
힌두교의 영원한 성지 Varanasi 에서 14:40분이 되어 겨우 이륙한다. 날씨가 너무 화창하여 아래가 잘 보이고 태양이 작렬한다. 40분만인 15:20분에 Varanasi 공항에 내리니 새로운 버스를 타고 먼저 박물관으로 간다. 관내에서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하는 모습의 조각상을 감상하고 바로 인근 유적지 Sarnath (사르나트=녹야원)로 옮긴다. 사르나트는 바라나시에서 동북 10km 지점으로 혼잡한 도시를 벗어나 가로수가 무성한 도로를 따라가면 나무가 없는 넓은 잔디밭에 커다란 Chakra Stupa(탑)와 폐허를 발굴한 유적지가 나타난다. 내부 구조물이 없는 산처럼 둥글게 2단으로 높이 33 m, 지름 28 m 정도 되는 거대한 불탑으로 석가의 사리를 보관한 묘로 생각되며 불교의 탑의 원형으로 보인다. 이곳은 불교의 4대성지의 하나로 “Siddhartha”(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뒤 처음으로 설법한 곳이다. 당시에는 30여 개의 사찰과 3천명의 승려가 있던 곳이라고 현장법사가 쓴 기행기에 남아있다. 불교가 인도 전역으로 퍼지면서 성지가 되었으나 이슬람의 침입으로 불교 성지로서의 지위는 사라져 갔다.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이 탑 주위를 돌며 승려와 불자들이 예불을 올린다. 부다가야에서 해탈한 석가는 걸어서 바라나시로 와서 5명의 제자들을 만나 해탈의 진리를 설법한 자리가 바로 이곳이라 한다. 이후 이곳이 불교 성지가 되었고 “Ashoka” 왕이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이곳에다 돌기둥을 세워 성지로 삼았고, 그 둘레에서 당시의 유적이 발굴되어 성역화되어 있다. 그곳에는 석가가 부다가야에서 여인에게서 공양을 받는 그림도 있고 그로 인해 오해한 제자가 떠났으나 혼자 깨달음을 얻은 후에 이곳에서 다시 5명의 제자를 만나서 처음 설법한 곳으로 되어 있다.
(사진 : Sarnath 의 Chakra Stupa 전경) 우리는 부처가 앉았었다는 자리를 둘러보고 기반만 남은 곳에서 한동안 묵상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큰 보리수 나무 밑의 명상자리도 둘러본다. 다음에는 저녁무렵 갠지스 강가로 가기 위해 자전거 릭샤를 타고 혼란의 거리와 향냄새로 가득한 바자르를 지나 “산 데하 아르티 푸자” 라는 저녁기도회를 참관한다. 어둠 속에서 배에 올라 강물로 나가서 강가에 단위에서 벌어지는 종교행사를 참관한다. 순례자들도 강에 내려와 성수에 몸을 씻고는 종교의식을 하는 사람들과 합류한다. 7개의 제단 위에서 힌두교승이 집전하는 행사를 본다. 음악이 울리고, 향불이 피워지고 붉은 승려복을 입은 7명의 승려가 각 단위에서 행사를 진행한다. “Arti Pooja” 라는 의식으로 “신이 가까이 계시니까 사는 것이다.”라는 감사를 표시하는 행사란다. 힌두교인들의 갠지스 강 목욕 순례는 그들의 영성을 다지는 행위란다. 다시 배에서 내려 오던 길을 되돌아 나와 자전거 릭샤를 타고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니 오후 7시 30분이다.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도 한동안 갠지스 강변의 냄새가 코에서 가시지 않는다. 늦게 이상한 나라에서 알 수 없는 이상한 영적행동을 보고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 든다. 갠지스강에 배를 타고 아침 일출을 바라보며 1월15일: 아침 일찍 일어나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 05:45분에 출발한다. 버스로 로터리까지 가 걸어서 갠지스 강(Ganga river)의 “Sandhya Ghat”(Ghat란 강가에 만든 계단)로 내려가 배에 올라 선상에서 일출을 보기 위함이다. 강가에 ghat로 내려가서 사람들로 가득한 사이를 뚫고 배에 오른다. 강으로 아침 순례를 나가는 배가 많아 혼란하다. 강으로 나오면서 촛불을 켜서 신에게 빌면서 강에 꽃과 더불어 기도하며 띄워 보내는 행사이다. 강물 위에는 꽃에 촛불을 켠 것이 기원을 싣고 떠내려 가면서 강물에 반사되어 어둠을 밝힌다. 강변에는 일출 전에 성수에 목욕을 하려는 사람들이 계속 몰려든다.
(사진: 갠지스 강의 일출 장면) 이 강물에 목욕도 하고 마시기도 한다는데 마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물에는 너무 많은 오물이 떠다니고 유속이 느려 정화도 되지 않은 채로 흐르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 순례자들이 플라스틱 통에 담아 가지고 가 성수로 사용한다고 한다. 강가로 내려오는 주변에는 많은 플라스틱통이 쌓여있는 것도 볼거리이다. 갠지스 강물을 검사해본 결과 병원균 박테리아가 없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목욕행사가 2일전에 있어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영적행사에 참가한다. 강가에는 지방 각주의 왕들이 사원을 짓고 이곳에 와 기도하며 명상하기 위한 여러 개의 “Mandir”(Temple) 가 강가에 늘어서 있고 어떤 것은 제법 호화롭게 지은 것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본여성의 이름이 벽에 쓰여진 사원이 자리잡고 있고 일본인이 이곳에 와 산다는 사실이다. 아침이라 날씨가 찬데도 성수에 들어가 목욕하는 남자는 팬티만 입고 여자는 사리를 입은 채 물에 몸을 담갔다가 나온다. 그 사이에 해는 떠올라 행운의 일출을 맞이하여 신에게 감사한다. 배는 강 상류로 올라가 화장터로 향한다. 신성한 화장터에서 아침을 맞으며 “Manikarnika Ghat” 는 강가에 대규모 화장터로 아침 일찍부터 화장을 한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있고 나무가 많이 쌓여있다. 화장단위에 나무를 쌓아놓고 연기가 나는 곳에서는 3구의 시신을 화장 중이다. 냄새가 나는 곳으로 다가가며 배에서 내려 화장터로 올라간다. 연기와 불꽃 속에 시신의 상체 일부만 연소 되고 하체 부분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참 이상한 화장 방법이다. 나무를 적게 쌓아서 화장을 하기 때문이란다. 어려운 사람에게는 나무 값이 부담이 되기 때문이란다.
(사진: Manikarnika Ghat 화장터 전경) 보호자가 없이 죽은 자는 나라에서 처리하게 되는데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장 후 마지막 나머지는 그대로 강으로 밀아 넣어 떠내보낸다. 그러면 영원히 다시 태어 나지 않는다고 한다. 화장터 뒤로 올라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소도 다니고 가축들의 배설물이 그대로 골목길에 떨어져 밟히기 일수이다. 한 사람 혼자 간신히 갈 수 있는 골목에 소, 사람, 똥이 함께 있으니 참 인내심이 무한대로 필요하다. 이들에겐 일상이라 표정이 없다. “Golden Temple” (황금사원)을 방문하기 위해 좁은 골목을 이어가다 가게에다 휴대품을 맡기고, 심지어 볼펜까지도 압수한다. 좁은 골목을 내려가 우측으로 들어가니 황금사원 마당으로 들어간다. 사원의 탑은 좁은 곳이라 올려다 볼 수도 없다. 사원의 탑은 금으로 만들었는데 1kg 의 순금으로 만들었다 한다. 원래 1500년 전 시바신의 사원터로 그 아래로는 모스크 사원도 있어 힌두교와의 공존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나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많다 한다. 전에 이곳에서 충돌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경찰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고 힌두교인만 입장이 가능하며 외국인은 입장 불가라 우리는 담 밖에서 탑을 바라보기만 한다.
(사진:황금 사원 전경) 사원 방문을 마치고 골목을 나온다. 입장료가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되돌아 나오니 좁은 골목의 상점도 문을 열고 호객을 한다. 다시 강가 화장터에 이르니 아까 화장하던 시신은 다 타버리고 연기만 난다. 다시 배로 돌아와 강물로 나오니 시신이 강물 위로 조금 노출된 채 떠내려 온다. 참 어이없는 아침 풍경, 이물에 목욕하고 세수하고 빨래하고 먹기도 한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Gangatri Seva Santi” 사원 앞에는 성수에 목욕하는 남녀로 성황을 이룬다. 꼬마 아이는 싫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아이를 물에 넣었다가 꺼내기를 반복한다. 과연 어린이에게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사리를 두른 여성은 두른 채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온다. 남자는 팬티만 입고 수영도 하고 머리까지 물속에 잠수 하였다가 나와서 비누질을 하면서 몸을 닦는다. 이 도시에는 목욕탕이 없어 모두 갠지스 강이 이들의 목욕 장소이다. 강가의 Ghat 마다 까마귀 때가 몰려들고 원숭이가 올라 다니는 아침 풍경. 그 앞으로는 죽은 개가 물에 떠내려 온다. 그런데도 목욕은 계속 되고 해가 뜨자 아침 빨래를 하는 남녀가 많이 보인다. 빨래 금지구역이라고 하는데도 마구 빨래를 한다. 한참 하구로 내려가니 이곳은 정식 빨래터이다. 강가에 빨래 돌이 놓여 있고 돌에다 비비거나 큰 빨래는 돌에 처서 빨거나 큰 나무로 두들겨서 빤다.
(사진 :갠지스 강에서 목욕 장면과 사원 전경 ) 세탁소인듯하며 많은 빨래가 건조 중에 있으며 우리 돈으로 500원 정도면 다려서 주기도 한다고 한다. 강 건너로는 모래밭이 펼쳐지고 강폭은 800~1000 m 정도이다. 건너편에는 모래사장이고 Ghat 가 없어 사람이 별로 없으나 드문드문 목욕과 빨래를 한다. 이들에겐 갠지스 강의 이런 모습이 일상 생활로 그들의 전부인 것 같다. 배에서 내려 다시 가던 길로 올라오니 화장터가 보인다. 영구차로 시신 한 구가 들것에 실려 내려진다. 들것에 천으로 덮고 그 위에 꽃 몇 송이로 장식한 것이 떠나는 이의 전부이다. 오늘 화장하는 자에게 명복을 빈다. 화장터를 지나오면서 화장 후 마구 비로 쓸어 먼지를 피워 무척 역겹지만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 자세로 체험을 한다. 버스에 올라 호텔이 돌아와 휴식을 하며 오늘의 오전 체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생각해 본다. 이제 바라나시에서 인생의 모든 번뇌를 떨쳐버리고 마음의 평정을 찾아야 한다. 여기까지 세상 사에 부대끼며 살아온 하찮은 인생살이가 얼마나 부질없고 덧없는 것일까? 생명이 다하여 강가에서 한줌의 재로 변해 강물에 떠내려가면서 인생이란 그저 세상에 왔다가 가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스스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갠지스 강가에서 오늘은 새벽부터 갠지스 강을 오르내리면서 일출과 화장터, 목욕 장면 등을 본 후 오전 내내 휴식을 하고 오후 14:30분에 호텔을 나선다. “람니가르성”을 방문하기 위해 어제와 같이 강가 로타리까지 버스로 간 후 자전거 릭샤를 타고 터덜거리는 도로를 따라 삼성 전자 매장 앞을 지나 “Karnatak Stat Ghat” 앞에서 베에 승선 한다. “Nirajani Ghat”를 지나 저 멀리 보이는 임시 강다리(Pontoon Bridge) 방향으로 배를 타고 내려간다. “Ghat” 를 내려 오다 2006. 12. 03일 세상을 떠나 24시간 내에 화장을 하고 13~15일 사이에 추모의식을 가진다는 힌디오(Hindio) 언어로 쓰인 초대장을 한 장 얻어본다.
(사진: 장례 추모식 초대장) 글을 전혀 알 수 없어 안내자에게 해독을 부탁하니 그런 답변이다. 이번에는 오후라 한가히 유람을 한다. 강 너머로는 명상하는 사람, 고기 잡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을 본다. 이곳 “Harish Chandra Ghat”는 남쪽에 있는 곳으로 북쪽 “Manikarnika Ghat” 보다 규모는 작으나 “Dasaswamedh Ghat” 부근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아 좀 한가하다. 오후에는 아직 화장하는 시신이 없어 여기 Ghat 부근에서 조그만 발동선에 일행이 올라 탄다. 아래로 임시 가교가 가설된 쪽으로 강을 건너 내려가 다리 앞 모래톱에 배를 대고 내려서 도로로 올라간다. 모래톱에는 온통 사람의 배설물이 빈자리를 찾지 못할 정도로 깔려있다. 미안한 일이지만 화장실이 없다고 한다. 간신히 발길을 피해 옮기면서 도로로 올라가니 먼지가 너무 심하고 릭샤와 차가 엉킨 길을 따라 성으로 향한다. 이곳은 비교적 한적한 곳이라 성 앞에는 걸인도 장사꾼도 없다. 성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이 더 많다. 이성은 14~15세기에 건축한 성이나 그 후 영국식으로 개조 건축하여 현재는 군인, 경찰이 일부에 거주하며 왼쪽은 박물관으로 이용한다. 박물관에 들어가니 18~19세기에 사용했던 마차, 영국의 자동차, 왕과 왕비가 사용하던 가마, 특히 “Singh Badadu” 왕의 1882년 사용하던 가마 등 여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직물 박물관을 거처 무기 박물관에서 칼, 대소 소총, 은 칼집, 상아 칼집 등과 시간별 별자리를 알려주는 시계 등을 둘러보고 나와 17:00시경 다시 부교다리 옆에서 발동선에 올라 아까 오던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오후에 해지는 모습을 감상. 좋은 날씨인데도 지는 해는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다시 올라가 “Dasaswamedh Ghat”앞에 정박시킨다. 이 가트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가 말을 10마리 바쳐 제사를 지냈던 곳이라 한다. 이 가트는 그 옆 가트와 더불어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대나무 우산이 여러 개나 쳐진 곳이다. 주변에는 각종 성물을 팔려는 사람들이 언제나 참가자보다 많이 보인다. 이곳에서 어둠이 내릴 때까지 행사를 지켜보다가 이제 다시 “Harish Chandra Ghat”로 내려오면서 4구의 시신을 화장하는 전경을 목격한다. 강가에서보다도 시신이 불 속에서 타는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
(사진: 갠지스 강의 돛단배 ) 그 아래로 내려와 다시 오던 대로 Ghat를 올라와 나온다. 이번에는 지프차를 타려는데 또 한구의 시신이 들것에 실려 화장터로 내려간다. 이렇게 자주 연기로 사라져 가는 시한부 인생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제 생명의 유한함에 담담해지는 느낌을 갖는다. 인간의 육신이란 지상에서 영원으로 가는 티끌 같은 존재임을 실감한다. 죽음의 철학 같은 것을 몸으로 느낀다. 호텔로 돌아와 먼지와 냄새를 대충 씻고 저녁식사에 소주 한 병을 곁들여 모두 날려보낸다. 인생은 살다가 생이 다하면 덧없이 연기로 화하는 것이구나… 인도를 떠나면서 1월16일:오늘은 인도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8시에 출발하여 “Benares Hindu University”를 방문. 1917년 인도의 민족주의자인 “Pandit Malaviya”가 바라나시에 세운 대학. 힌두문화 관련학과로 유명한 곳. 철학, Sanskrit, 전통 예술 분야가 유명한 대학이다. 구내가 넓고 모두 숲속에 쌓인 교사가 단층 또는 2층 건물이다.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이 대학 힌두사원을 방문하고, 보리수 나무 밑에 명상장소에 다가가 본다.
(사진: 힌두대학교 사원 앞에 명상 장소) 인도에서는 소가 우유를 짤 수 있을 때까지 집에서 관리하나 쓸모가 없어질 때에는 내보내기 때문에 많은 소가 길거리를 방황한다. 보통 소를 어머니라 하나 죽으면 가죽을 쓰고 고기는 개와 독수리 먹이가 된다. 비행기 시간이 당겨져 09:50분 바라나시 공항으로 간다. C751 India항공기로 12:40분 출발. 13:15분 카트만두 공항에 착륙 예정. 비행기 창 아래로 눈덮인 히말라야 연봉이 병풍처럼 보이더니 금세 하강하여 35분만에 Tribhuvan International Airport 에 착륙한다. 다시 찾은 Nepal 의 Kathumandu에서 복잡한 3일짜리 Free Visa 를 받기 위한 기재사항을 써넣는데 거의 한시간 이나 걸린다. 우리는 먼저 세관을 통과하여 내려온다. 늦은 시간에 공항을 벗어나 시내의 한국식당에서 오랜만에 한식으로 불고기 식사를 한다. 시내에 있는 “Swayambhunath”(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 사원을 방문한다. 이 사원은 카트만두를 대표하는 2000년 전에 건립한 사원으로 건너편에는 원숭이가 많아 원숭이 사원으로 불리고, 본 사찰은 높은 곳에 위치해 카트만두 시내가 다 내려다 보인다. 라마교의 성지로 Tibet식 반구형 Stupa(탑)에 “Buddaha Eyes”(부다의 눈)이 그려져 있다. 미간에 그려진 제 3의 눈은 우주의 삼라만상을 보는 혜안을 상징한다. 물음표와 같은 숫자는 모든 진리가 하나임을 의미한다. 탑에 눈, 코는 “나는 누구인가?”를 의미하며, 탑 위에서부터 줄에 매달린 많은 깃발은 부처님의 말씀의 전파를 상징한다. 탑이 13층으로 된 것도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옴마니 밤메오” 하면서 마니차(둥근 예불통)을 돌리며 탑을 돌아간다. 주변에 조그만 탑들은 죽은 자를 위해 그 자식들이 세운 것이다.
(사진: Swayambhunath 전경) 오후 17:00시경이 되어 Tamel 시장에서 자유시간을 갖는다. 지난 2000년 1월에 왔던 시장과는 많이 달라지고 현대화된 깨끗한 시장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40분 후에 다시 모여 네팔 식당에서 네팔식 식사를 하면서 고유 춤을 관람하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Kathmandu Gokarna Forest Meridian Hotel 230호에서 여장을 풀었으나 방이 추워 문제다. 1월 17일: 오늘은 시내를 나가 “Darbal Square”로 이동한다. 차가 진입하지 못해 먼 곳에서 내려 걸어서 광장으로 이동한다. 6년 전보다 많이 깨끗해지고 길도 넓어졌으나 구걸인이나 잡상인은 그대로이다. 이번에 안내자는 한국말이 서툰 국내 경희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철수” 씨라 한다. 네팔은 대가족을 구성하여 살며 시내의 1~5층 집은 아래층에서는 부모, 이층은 아들 등의 순서로 생활한다. 식사는 남자부터 하고 여자는 다음 순서란다. 부모가 죽으면 2년간 흰 상복을 입는다. 학제는 6-3-4제다. 군대는 직업 군인제도로 지원제. 철수씬 여기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어를 배우러 경희대 어학원에 유학, 국비로 월 400$씩 받으며 연수를 하였다 한다. 그러나 한국말이 서툴고 발음이 분명치 않아 알아듣기 어렵다. “Darbal” 광장 인근의 도로를 지나 “Kumari Gmar” 여신관으로 들어간다. 3층 목조건물은 AD757년에 King “Jaya Prekash Malla”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정교한 나무로 조각을 하여 예술성이 뛰어나다. 그 동안 한번 보수 공사를 한 바 있다. 오래되어 나무가 말라 갈라지고 장인들의 손재주가 퇴색되어 간다. 사원 3층의 열려진 조그만 창구에 앉아있는 사람과 대화를 통해 자선함에 팁을 넣으니 예전처럼 “Kumari Devi” 가 잠깐 얼굴을 내밀어 인사한다.
(사진: Kumari 사원 입구 나무 조각모습) 이 어린 “Kumari” 의 자격은 초경을 시작하지 않은 여자아이로 미모와 카스트가 상층인 집안의 소녀라야 한다. “Kumari” 에게 Nepal 왕이 일년에 한번씩 찾아와 축복을 받는다고 한다. 초경 후 사원에서 쫓겨나면 악령이 깃든 여자로 어렵게 살아간다. 이곳을 지나 수많은 사원이 몰려있고 여러 신들을 제각기 모신 여러 개의 사원을 돌아본다. 시바의 부인상을 모신 사원, 원숭이 신을 모신 사원 등 다양하다. 어느 사원은 외국인 입장이 불허된다. 도처에 경비병이 지켜서 있고 외국인에게만 입장료를 징수하기도 한다. 너무 오래되어 낡은 곳도 많고 향냄새 등으로 머리가 아플 정도다. 오전에 “Tamel” 시장으로 이동하여 11:30~12:30 분까지 자유시간. 시장을 산책하며 등산복, 전통차, 슈퍼마켓 등을 두루 살펴보면서 레몬차와 몇 가지 물건을 사본다. 12:30분이 지나 다시 모여 시장통을 지나 Everest Steak House Restaurant에서 오랜만에 Nepal식 정통요리를 맛본다. 고기가 질기고, 감자, 당근, 콩 등으로 보충하여 식사를 한다. 다시 걸어서 Malla Hotel로 가서 버스를 바꿔 타고 이번에는 “Bhaktapur”로 향한다. 이곳에는 55개의 창문이 있는 사원으로 유명하나 보수 중이라 입장이 불가하다. 이곳을 중심으로 5층 정도의 사원이 여기저기 서있다. 1) Shiva의 링가 샘터를 지나서, 2) 큰 나무가 서있는 나무신의 기도처를 지나고 3) 공동 우물 터에서 물긷는 여인을 만난다. 4) 제일 번듯한 “Nyata Pola Temple” 을 만난다. 좌 우 계단 옆으로 사람, 코끼리, 사자, 독수리, 천사의 돌 조각상을 양쪽으로 세운 사원을 계단으로 올라 한 바퀴 돌아본다. 사자는 왕의 상징, 코끼리는 힘의 상징, 독수리가 비쉬누 신과 천사를 지킨다는 상징 아래 맨 아래 사람의 조각상은 제법 품위가 돋보인다. 옆에 “Bhairav Temple” 은 중심사원으로 위용을 자랑하며 4 층위의 황금색의 첨탑이 햇빛에 빛난다.
(사진: Nayta Pola Temple의 전경) 이곳을 나와서 이제는 시내에서 32km 떨어져 있고 해발 2100m에 위치한 “Nagalkot”을 향하여 떠난다. 히말라야 동쪽 산 군이 보이는 곳으로 일출과 일몰의 명소로 유명한 곳이다. 구비구비 산길을 돌아 올라가는 곳에는 산간 풍경과 계단식 다락논이 그림처럼 보인다. 운전하기 어려운 곡선 길을 한시간 이상 곡예운전 끝에 “Fort Resort”입구에 오른다. 정상에 5층 건물이 서있고 우리는 그 아래 리조트에 여장을 푼다. 산꼭대기라 바람이 불고 안개가 심해 일몰 감상은 포기한다. 일출의 명소 “Nagalkot” 에서 휴식을 하며 이 곳은 히말라야 산 군의 동부에 솟아 있는 Makaru(8463m)에서부터 Everest (8,848m), Chooyu(8,201m), Shisha Pangma(8,012m), Lantang(7,205m), Manaslu(8,163m) 등 8천 미터 급 고봉들과 그 앞에 6천~7천 미터 급의 모든 봉우리를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해발 2천 미터 이상의 고지대이다. 이곳 정상에 5층 규모의 “Fort Resort”호텔에서 일출을 감상하기 위해 일찍 일어난다. 5층에 있는 옥탑으로 올라가 모두 태양이 먼 산 위에서 솟아나기를 기대한다. 짙은 농도로 동쪽에서 서쪽까지 가려져 있다. 20여분 간을 추위와 맞서면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대했으나 신은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이곳 Fort Resort는 전통적인 Nepal식 건축양식으로 히말라야산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멋진 곳이며 우리가 머무는 단독 리조트는 주변의 경치가 아름답다. 우리는 간밤의 추위 속에서도 해뜨기를 기도하며 밤을 보냈으나 헛수고였다. 아침식사 후 주변 산책을 나가니 이 높은 곳의 골짜기로 향하는 비탈진 곳에는 수많은 다락논을 볼 수 있었고 산책 후에는 리조트 아래쪽으로 내려가 한동안 숲속을 산책하면서 여러 종류의 야생화도 만날 수 있었다.
(사진: Nagalkot에서 일출시 장면) 오전 내내 휴식하며 자연을 벗삼아 마음껏 호흡을 하였다. 점심에는 여유롭게 가장 맛있는 음식을 나누면서 담소하였다. 오후 2시경 출발하여 카트만두 시내로 들어오면서 가장 규모가 큰 화장터로 “Bagmati River”강변에 자리잡은 “Pashupatinath” 를 방문한다. Nepal 의 화장터에서 2000년 1월 당시보다 들어가는 입구가 도로가 잘 포장되었고 깨끗해졌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개울이 흐르는 화장터로 들어간다. 냇가에서는 화장 후 남은 나무를 건져내고 유품을 골라내는 작업을 볼 수가 있다. 그 위 다리 너머로는 힌두교 성지인 “Pashupatinath” 사원이 계단 위에 옛 건물로 서 있다. 이 곳은 외국인은 출입 금지이며 사원 이름도 쉬바신의 이름을 딴 것이다. ‘‘Ghat”의 화장터는 누구나 방문하여 사진도 찍고 앉아서 볼 수도 있다. 고행자들이 앉아서 얼굴에 이상한 칠을 한 채로 적선을 요구한다. 화장터 방문을 마치고 나오니 너무 자주 보아서 그런지 허전한 마음이 들고 마음이 무겁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 오면서 카트만두 외곽도시 “Patan”에 가기 위해 버스를 내려 복잡한 시내를 걸어간다. 차선도 없고 버스, 승용차, 릭샤, 오토바이, 자전거, 보행자 등이 뒤엉킨 상가가 밀집한 곳을 걸어서 사거리를 지난다. “Patan” 구도시에 걸어 들어가니 다른 사원과 같이 사람, 비들기, 잡상인, 걸인 등이 뒤엉키어 복잡하다. 돌로 만든 팔각정의 사원이 둘레에 정교한 조각으로 둘러쳐진 네모난 탑을 자랑한다. 앞에는 높은 솟대같은 탑 위에 합장하는 모양의 사랑의 엔젤상이 사원의 탑을 바라보고 기도한다. 주변에 다른 사원을 둘러보고 옥상 cafe 에서 차 한잔씩을 나누고 오늘의 일정을 마감한다. 어제 투숙했던 곳으로 와 저녁을 마지막으로 하고 122호에 들어오니 추워서 걱정스러웠으나 조그만 히터와 담요를 추가해 하루 밤을 보낸다. 마지막 날을 정리하면서 1월 19일: 오늘은 이제 일정의 마지막 날이다. 모든 것을 천천히 생각해 본다. 아침에 일어나 리조트 내의 Golf Course로 나오니 안개가 너무 심해 단 5 m 앞도 분간하지 못한다. 18 홀짜리 코스를 걸어서 아침 안개 속을 헤 처 나가 본다. 구릉지가 심한 곳이 많고 아침이라 아무도 없다. 연습 홀에 나가보아도 클럽 하우스에 직원 2명이 아침인사를 한다. 한시간 넘어 산책을 한다. 10:30분에 호텔을 나와 이번에는 “Boudhanath” 불교사원 방문길에 나선다. 공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곳이다.
(사진: Boudhanath 사원 전경) 카트만두에서 오래되고 최대의 사원으로 지름이 100 m, 높이 36 m 의 거대한 Stupa . 전설에 의하면 한 노인이 왕에게 물소 한 마리의 저민 살이 덮어질만한 땅이 있다면 그곳에다 불교사원을 짓겠다고 말했다. 왕은 살이 적고 칼로는 도저히 그렇게 썰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동의했지만 살을 저미는 칼 솜씨가 놀라워 직경 100 m 이상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렇게 지은 사원이 Tibet식 불교 사원으로 이 일대에는 50년대에 망명한 Tibet 망명인들이 모여있다. Stupa밑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보존되어 있다 한다. 탑 둘레에는 수십 개의 신의 상이 조그만 구멍 속에 조각되었고 탑 위에서부터 흰, 노랑, 청색, 하늘색, 빨강색 등 여러 가지의 깃발이 연결되어 있다. 평화, 친구, 부처님(녹색) 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바깥 둘레에는 원형의 탑 기단에 주문을 외우며 돌리는 회전 예불기가 뺑 둘러있어 누구나 주위를 돌며 기도한다. 그 안에는 부처님의 설법이 들어있고 108번이나 돌리면서 기도한다. 주변에는 라마승의 “오체투지”하는 모습이 시선을 끈다.
(사진: Tibet 승의 오체투지 모습) 티베트 승으로 나이가 많아 보이나 온몸을 던져서 땅에 대고 오체투지 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그의 얼굴에는 이상하게 평화로움이 감돌고있다. 이마에는 굳은살이 박혀 혹이 내밀고 힘겨운 탓인지 일어나 합장할 때는 가늘게 떨리기도 한다. 참 다양한 신앙의 세계가 펼쳐지는 곳. 우리는 알 수 없는 신비의 나라를 이제 12일이 넘도록 함께하여 왔다. 마지막 탐방을 마치고 버스에 올라 어제 탐방하였던 화장터 입구에 차를 세우고 목걸이, 염주 등을 사기위해 화장터 안쪽 다리 넘어 상점까지 갔다 오는 일행을 기다린다. 12:00시 경에 여기서 가까운 카트만두의 Tribhuvan International Airport 에 도착. 수속을 마치고 우리와 13일간을 함께한 Sunil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14:40분에 TG 320편으로 이륙한다. 17:30분에(현지 18:35) 방콕 신공항에 내리니 어둠이 내린다. 이곳 “Suvarnabhumi” 공항은 돈무앙 공항이 오래되어 교외 호수 가에 새로 들어서서 국제선이 사용한다. 현지 시간으로 30분이 늦고 이제 4시간을 쉬어야 한다. Duty Free지역에서 과일, 양주 등 몇 가지를 사고 휴식처에서 이번 여행에서 배운 것을 반추(反芻)해 본다. 인도여행에서 나는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며 여태까지 보통 인간으로 살아온 것을 되새겨 보며, 평범한 한마디로 표현해 본다. “空手來 空手去” ( 빈 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니) “世上事 如浮雲” ( 세상 일이 뜬구름 같고나) TG 638 기 편으로 인천공항에 아침 일찍 내리니 한겨울 속으로 다시 돌아온다. 인도에서 네팔까지 우리의 인도 친구 “Sunil Singh” 의 헌신적 봉사에 감사하며 그의 새로 태어난 2세와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끝으로 ㈜ Themasay Tour와 늘 넉넉한 웃음과 여유를 함께한 최 과장에게 감사를 표하며 여행을 함께한 여러 선생님과 좋은 여행에서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2007.01.31) Home Page: http://myhome.naver.com/leeook12 http://blog.daum.net/leeook11 E-Mail:leeook11@hanmail.net 02)2659-2254 (고견을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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