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세이 여행이야기

박길란-모로코/튀니지

  • 작성자 :

    테마세이투어

  • 작성일 :

    2009.12.20

  • 조회수 :

    9277

 

이 글은 서울에 사시는 박길란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박길란님은 2009년1월9일부터 21일까지 13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모로코/튀니지 여행을 다녀 오셨습니다. 글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랍의 얼굴과 아프리카의 심장이 뛰는 땅 - 모로코, 튀니지 -

 


2009년 1월 8일 - 2009년 1월 20일

박길란(parkkaze@hanmail.net)

지도로 본 여행일정


 

여행일정표



 

2009년 1월 8일 - 출발 전일 -

EBS가 문제였다.
김영하의 <시칠리아 기행>으로부터 시작된 세계테마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은 그동안 너무나 천편일률적이어서 식상함을 주는 다른 여행 관련 방송들에 비하면 눈에 띄게 신선했다.
찍어온 동영상 보여 주면서 깊이 없는 역사 이야기만 몇 줄 주절거리다 끝내는 차원이 아니라 여행지의 감성이 묻어나고 삶의 향기가 느껴졌다. 매일 저녁 8시 50분부터 1시간 정도 나를 꼼짝 못하게 하더니, 드디어 3월! 나는 심장에 총을 맞았다. 튀니지라는 총알에....
그 방송을 진행한 이동진 때문만이 아니라 내 머리 속에 있는 이미지로서의 아프리카를 망각하게 하는 튀니지의 밀밭이 내 호흡을 멈추게 할 줄이야! 지중해에 면해 있는 너른, 푸른 밀밭은 하얀 구름 밑에서 비올라 선율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풍경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아니, 그 곳보다 조금은 덜 정제되어 있어 편안하고 사랑스러웠다.
이국적인 문양이 가득한 창문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예술적 감각에 무덤덤해 하며 외지인들의 찬사에 오히려 신기한 눈빛을 보내는 그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그리웠다.
다음 날, 테마세이투어에 전화를 했다.
“강차장, 올 겨울에는 무조건 튀니지 가자.” “두 명 예약.”


이렇게 튀니지는 불쑥 내게로 왔다. 덤으로 모로코까지 데리고.....
새롭게 정한 튀니지가 어떤 선입견도 없이 내게로 온 것까진 좋았지만 가기 위해 책을 찾으니, 맙소사! 황무지다.
나처럼 어설픈 여행자들이 가기 힘든 곳을 찾아 갔었다는 무용담 내지는 찾아 간 곳 나열하기 바쁜 정도의 것만 몇 권 있고 전문적인 시선이 담긴 책은 찾기 힘들었다.
그나마 모로코는 형편이 나았다. 하다못해 올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르 클레지오의 책들이라도 있었다. 클레지오는 모로코 베르베르인 아내가 있어 모로코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담긴 책들을 썼다. 특히 사하라 사막에 대한 성찰은 설득력 있고 충만해 그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포만감 깃든 여행이 된다.

왜 글쓰기의 명수인 카잔차키스는 그렇게 지중해를 사랑했으면서 튀니지에 대한 글은 남기지 않았을까? 판에 박힌 기행문을 혐오하는 현대판 지성의 거장이라는 다치바나 다카시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튀니지에는 왜 관심을 두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아랍문명권 연구의 선각자, 이희수 교수는 튀니지에 머문 적도 있으면서 왜 좀 더 전문가적인 글은 쓰지 않았을까? 신선한 젊은 예술가 이영하는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시칠리아로 갔으면서 지척인 튀니지에는 왜 눈길을 주지 않았을까?

병든 몸으로 튀니지에 와 푸른 문들로 빛나는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진정한 자신의 영혼의 문을 열었던 앙드레 지드의 흔적을 느끼러 나는 튀니지로 간다.
바람이 구름처럼 흐르고 색채가 영혼을 압도하는 곳! 로마의 바다였던 지중해를 찾아 아니, 나만의 지중해를 개척하러 내일, 나는 비행기를 탈 것이다.

1월 9일(제 1 일) - 어감만 감미로운 카사블랑카! -

공항에는 오전 11시 10분 전에 도착했다. 약속 시간보다 늦지도 않았는데 여행을 같이 하게 된 대부분의 일행들이 와 계셨다. 그 분들을 뵈면서 깜짝 놀랐다.
사전에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다른 곳을 여행하면서 만났던 분들이 너무 많다.
김순태 선생님 부부는 남미 여행을 함께 했고, 이인택 선생님 부부와 박택자님은 러시아 여행에서, 오화석 선생님은 요르단, 시리아에서...... 그 중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은 함돈영님과의 재회였다. 10여 년 전 테마가 아닌 다른 여행사로 인도에 갔을 때 만난 인연을 여기서 찾은 것이다. 얼굴을 뵙는 순간 나는 금방 기억을 떠올렸는데 함선생님은 말씀을 드리자 어렴풋이 나를 알아보신다. 여행의 시작부터 즐겁고 편안해져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그리고 중선이!
우리가 일본 유학 가 있을 때, 유학생 숙사 내에서 4쌍의 부부가 유난히 친하게 지냈었다.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며 젊은 한 때를 보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만남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데, 그 중 한 엄마가 중선이를 이번 여행에 데려가 달라고 전화가 왔다. 대학 1학년인 중선이는 한국에 돌아와서 태어난 아이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 부모를 잘 아니 내 새끼나 진배없다. 키 180cm가 넘는 중선이는 순하게 생겼다. 건강하고 활달해 보이지는 않지만 여린 선이 더 애정을 느끼게 한다.
“중선아! 아줌마는 아침에 너 깨워주는 것만 할 테니, 우리 의식하지 말고 자유롭게 지내자.” 엄마 친구 따라 여행을 나선 놈이면 보기보다 배짱이 두둑하다는 생각도 든다.
더더욱 신랑 수업까지 들은 적도 있다니 상당히 어려울 수도 있을 텐데.....

비행기는 약속대로 13시 45분에 정확히 이륙했다. 자리가 많이 남아 누워 갈 수도 있을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파리까지 12시간은 날아가야 하는데 몇 시간이라도 허리를 눕힐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심리적 여유가 생긴다.

비행기는 북극권 항로를 따라 중국-몽골-러시아-발트해를 통과해 프랑스로 들어간다.
주름치마를 펼쳐놓은 것 같은 중국 북부 산악지대를 넘어 고비 사막은 하얀 겨울로 덮여 있다. 태양이 작열하고 모래 바람으로 몸살을 앓던 사막이 하얀 눈으로 몸을 가린 채 조용한 긴 동면에 빠진 모습은 참 낯설다. 끝없이 이어지는 러시아는 단단한 얼음 속에 갇혀있다.
시베리아 대기는 너무나 완벽하게 얼어붙어 어떤 빛과 공기의 순환도 이루어지지 않을 듯이 보인다. 공포심이 들 정도로 러시아는 추위에 굴복 당해 숨 죽여 있다. 러시아를 통과해 만난 유럽은 최근에 폭설이 내렸는지 하얀눈 세상이다. 몬드리안 그림처럼 자로 잰 듯한 경지와 도시는 영원히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픈 완고한 몸짓으로 나를 바라본다.











                                              <지루함을 달래준 창밖 풍경들>
비행기 타고 처음으로 지루하다는 느낌 없이 창 밖 풍경을 즐겼다.
오후 4시 45분에 파리 도착, 공항에 대기하고 있다가 9시 05분에 출발, 카사블랑카에 늦은 밤, 11시 15분에 도착했다.

모로코 제 1의 경제 도시라는 카사블랑카의 밤은 가여웠다.
호텔로 이동하면서 본 도시는 그 이름만큼 낭만적이지도 삶의 활기도 없다.
이 나라 경제 상태를 대변하듯 아주 띄엄띄엄 있는 조도 낮은 가로등은 위태롭게 몸을 곧추세우고 있다. 밤 12시를 조금 넘겼을 뿐인데 거리에 사람이 없다. 모두 잠에 빠진 것 같지도 않은데 도시는 적막하고 우울하다. 오기 전부터 카사블랑카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름값을 하지 못한다고 듣긴 했지만 이건 좀 심하다.
입 밖으로 슬쩍 “카사블랑카!”하며 소리를 내어 보았다. 얼마나 근사한가? 단어가 내뿜는 어감이 가슴에 감기도록 매력적이다. 요런 맛에 영화 <카사블랑카>는 이 도시에서 한 컷도 찍지 않았으면서도 그 이름을 썼나 보다. 세계인들은 흑백영화 속 잉그리트 버그만의 맑은 눈물과 순진한 뽀얀 뺨을 보면서 허상의 카사블랑카를 너무 동경했다.
최면에 걸렸던 내 영혼이 완전히 풀려 날 때쯤, 호텔 앞에 차는 조용히 멈추어 섰다.

1월 10일 (제 2일) - 사랑스러운 도시, 마라케쉬 -

어제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마라케쉬에서의 시간을 늘리기 위해 아침 8시부터 일정을 시작했다. 카사블랑카에서는 딱히, 꼭 들러야 할 곳은 없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하는 마음으로 하산 2세 모스크로 간다. 모스크로 가기에는 좀 이른 시각이라 도시에서 가장 먼저 하루를 여는 재래시장으로 갔다.
손님 없는 시장은 장사를 준비하는 상인들의 분주함과 신선하고 화려한 빛깔의 과일이 돋보인다.
이슬람 국가의 시장들은 어디를 가나 비슷하다. 현대화의 물결을 거부하는 고집스러운 기운과 기하학적인 물건 쌓기가 인상적이다.
과일, 과자, 향신료 등 일상의 물건들이 무게 중심을 잘 잡아 수학 문제를 풀어가듯 쌓여있다. 과일을 반질반질하게 닦아 정신을 집중시켜 쌓고 있는 상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숨을 멈추게 된다.

시장을 나와 잠시 모하메드 5세 광장을 보고 하산 2세 모스크로 갔다.
버스에서 내리니 대서양 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몸이 바싹 오그라든다.
작년 시리아에서도 경험했지만 자료집에 나와 있는 평균 기온을 믿으면 안된다.
남반구에 있는 나라로 가는 것을 제외하고 대륙 어느 곳이나 겨울은 대체로 춥다.
여기가 아프리카라구? 지중해 연안이라구? 다 잊어야 한다.
물론 살을 에는 추위는 아니지만 오리털 파카가 없으면 고달프다.

하산 2세 모스크바다를 매립해 만든 땅에 우람한 모스크는 외롭고 쓸쓸하게 서 있다.
220m의 미나렛 위용 앞에 상대적으로 모스크 자체는 납작 엎드린 늙은 사자 같다.선명한 녹색 지붕은 인상적이지만 햇빛 없는 날씨와 인적 없는 모스크는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 나라가 자랑하는 최고의 건축물이라는 모스크는 핫산 2세의 야심작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모스크 전체를 감싸고 있는 빼어난 장식들은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개폐식 지붕, 티타늄 소재의 철문, 이탈리아제 샹들리에 같은 현대적 기술과 소재, 모로코 최고의 장인들이 상감한 금속 문양과 젤류지(모로코 모자이크 타일)는 찬사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1993년에 완성된(1987년부터 7년에 걸쳐 만들어짐) 것이라면 그리 오랜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 벌써 보수 작업이 필요해 보였다.
또 무엇보다 아직 알라신의 사랑이 강림해 있지 않았다.
진정한 신의 거처로서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기에는 세월이 부족했다.
국민의 성금으로(결코 자발적이라고 할 수 없는.....) 만들어졌다지만 설명하기 힘든 강압, 허세, 비겁함이 너무 크게 보인다.
그러나 이런 악취도 세월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진시왕의 병마총, 명나라의 자금성, 무굴제국의 타지마할, 오스만 터키의 블루 모스크..... 앞에 서면, 동전의 뒷면 같은 암울하고 추한 역사가 그 거대한 건축물 자체를 폄하하지 못하게 한다.
인류 역사에서 지독한 독재자는 뫼비우스 띠와 같은 존재이다.
이 모스크도 100년 뒤에는 이 나라 국민들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향기로운 혼이 깃든 자부심이 될 수 있을까?
 
노란빛 야생화 천국, 모로코 들녘모스크를 나와 마라케쉬로 향했다.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경지에는 벌써 봄이 와있다.
밀들이 푸르게 자라고 있고 이름 모를 노란 야생화도 제법 많이 피어 있어 눈이 즐겁다.
어느 나라든 도심을 벗어나면 그 나라 속살을 볼 수 있는 농촌 풍경이 있다.
나는 이때가 참 좋다. 특별하진 않지만 놓치기 싫은 정서가 마법처럼 온전히 여행자를 이 나라에 집중하게 한다. 이 들녘은 자신을 키워 줄 비만을 기다리진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애정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보아 줄 나 같은 여행자를 그리워하기도 했을 것이다.
모로코의 들녘은 자신에게 너그러운 나를 위해 생명 순환의 환희를 보여준다. 여행 중 이동하는 시간만큼 여유와 낭만을 온전히 가질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모로코의 모든 경작지는 국가 소유다. 아니 왕의 소유라고 해야 하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을 단위로 공동 경작해 전체 소출량의 20%를 농민들이 분배해 가진다. 나머지는 물론 국가 몫이다.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 빵은 다른 물가에 비해 무척 싸다. 모로코도 우리 돈으로 200원 정도면 커다란 바게트 빵을 살 수 있다. 인간은 배고프지 않으면 너그러워지고 정치 행태에 그리 민감해 지지 않는다.
특히 종교적 신념으로 모든 것을 운명적인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한 무슬림들은 비무슬림들이 사회적 부당함이라고 느끼는 것들을 그리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무슬림들이 미개해서 열등해서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차이다.
분명 이 나라도 프랑스 식민지 시절을 경험했기 때문에 가치관에 혼란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수의 국민은 전통적 관습과 사고에 더 익숙할 것이다.
“인샬라(신의 뜻대로).”
많은 의미를 내포한 이 단어만큼 이슬람 사회를 잘 대변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우리 정부도 모든 국민이 “인샬라”를 외치며 운명에 순응해 매사에 고분고분하면 국민을 겁나게 사랑 할 텐데..... 후후후.....
북부지역의 이모작도 가능한 농지는 전 국토의 4%정도밖에 되질 않는다. 그러니 나는 지금 이 나라 최대 곡창지대를 보고 있는 것이다.

키 큰 종려나무 몇 그루가 보이는듯하더니 마라케쉬란다. 메디나(구시가지) 외곽에는 허술한 분홍빛 연립주택이 심란하게 서 있다. 낡은 빨래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다.
우리는 끝없이 이어진 붉은 성벽을 보면서 도심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고 제마 엘 프나 광장으로 나갔다. 광장은 텅 빈 공간이었다.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 광장의 진면목은 조금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제마 엘 프나는 어두워지기를... 밤이 오기를.... 느긋하게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쿠투비나 모스크로 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나렛을 보기 위해서....
터키나 이집트의 미나렛을 본 여행자라면 그리 감동받을 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 소박한 미나렛이다. 그러나 이 미나렛의 보여진 모습은 미미하지만 그 의미가 창대하다. 마라케쉬는 모로코라는 국명이 태어난 도시이며 모로코의 진정한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르베르인들이 세운 도시이기 때문이다.
베르베르인은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 연안과 사하라 사막에 살고 있는 여러 부족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이들 역시 정확하게 어디서 이동해 왔는지에 대한 설은 난무하지만 기원 전 2,000년경에 흑해 연안 지역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지배적이다.
실제로 모로코 산간 지역에서 살고 있는 베르베르인들 중에는 백인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모로코에서 피부색으로 종족을 구분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마그레브지역(모로코, 리비아, 알제리, 튀니지, 모리타니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나라들의 통칭. 동쪽 아랍인의 입장에서 본 해가 지는 곳, 서쪽이라는 뜻)의 역사를 보면 흑인, 아랍인, 페니키아인, 로마인, 유태인, 아라비아 반도의 고트족 등 수많은 인종의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씨족, 부족 상태의 베르베르인들이 힘을 규합해 11세기에 알 모라비드 왕조, 12세기
알 모하드 왕조를 세우고 수도로 정한 곳이 바로 이 마라케쉬다.

쿠투비나 모스크의 미나렛이 사원의 미나렛은 알 모하드 왕조(1199년)에 건설된 것으로 높이가 67m에 이르는 고전적 형태인 직사각형이다.
이 미나렛은 탑 건축물이 가장 안정되고 아름답게 보이는 가로, 세로 1:5의 황금비율을 처음 보여준 대표적 사원 건축물로 명성이 높다.
이 미나렛의 황금비율은 유럽의 성당, 교회 종탑 원형이 되어 사원 건축사의 한 획을 긋게 된다.
초창기 미나렛은 화려한 젤류지와 벽화 장식으로 무척 아름다웠다는데 현재는 그 화려함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웅장한 모습과 시간이라는 지혜의 산물이 더해져 존경심을 갖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 멋진 탑에서 울려 퍼진 아잔소리는 이 도시를 알라의 영광으로 넘쳐나게 했을 것이다.

미나렛 꼭대기에 황금빛 3개의 볼이 일렬로 서 있는 상징물이 있다. 중동 지역을 여행하다보면 가끔 보게 되는 것인데 그 의미가 궁금했었다. 드디어 이곳에 와 풀렸다.
가장 위에 있는 작은 구는 유대교를, 가운데 구는 크리스트교를, 가장 아래 큰 구는 이슬람교를 상징한단다. 신 아래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의미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모든 백성은 어떤 종교, 종파와 상관없이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범 우주적인 가치관의 상징이었다.
혜안의 순간 터지는 폭죽 소리가 내 머리를 쳤다. 그러나 이렇게 정확한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에서는 왜 저 의미가 상실되는 것인지에 생각이 미치니 갑자기 기운이 빠진다.
머리로 이해하면서 가슴으로 실행되지 않는 우리 인간! 가여운 존재들이다. 그래서 신은 우리를 포기 못하시나 보다. 인류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신과 인간은 똑같은 궤도를 그리며 돌고 돌 것이다.
모스크의 정원은 오렌지나무 숲이었다. 겨울 정원 유일한 꽃인 오렌지는 어느 계절의 꽃보다 풍성하다. 다른 계절에는 이 넓은 정원이 무슨 꽃으로 채워질까?

일행 중 한 분이 올리브 숲을 보고 싶다고 해서 메나라 궁전으로 갔다.
겨울 올리브 나무는 빛을 잃어서인지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다. 몇 년 전 4월! 쏟아지는 태양 아래 봄기운을 잔뜩 머금은 그리스의 올리브는 찬란한 은빛으로 대지를 덮고 있었다. 그 감동이 너무 깊어 다른 올리브가 나를 비집고 들어 올 여지가 없다.
올리브 숲 끝에는 커다란 인공호수가 있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호수에는 거짓말 좀 보태서 나만한 잉어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그 수도 엄청나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모습이 한마리 용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여름에는 이 도시의 좋은 피서지가 될 것 같다.

정원을 나와 바히아 궁전으로 갔다. 바히아 궁!! 마라케쉬는 이 궁전이 있어 더 명성이 자자해졌고, 숨은 오아시스라는 별칭도 얻었다.
이 궁전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은밀함이다. 좁고 길게, 그리고 짧게 모든 것이 숨어 있다.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한 싱그러운 많은 정원들도 언제 어느 방향에서 튀어나올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이 궁은 술탄을 위해 탄생 된 것이 아니었다. 알라위 왕조의 술탄 아브달 라만(1822∼1859년 재위)시절, 노예 출신에서 대신 자리까지 오른 시 무사의 저택이었다.
굴곡진 인생을 산 시 무사는 멋진 집을 지어 그 한을 풀고 싶었다. 처음 계획은 이 정도로 대단한 궁을 바란 건 아니었다. 단순한 저택을 꿈꾸던 시 무사는 공사가 진행 될수록 자신도 통제 불가능한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공사가 진행되는 중에도 계속 땅을 사들이고 건물 짓기를 요구했다. 나중에는 설계도 계획도 없이 무작정 건물이 들어서 현재와 같이 정원, 홀, 방, 계단들이 미로 같이 연결되어 숨은 그림 찾는 궁전이 되어버렸다. 결국 공사는 7년 만에 끝이 났다.
요즘도 모로코 사람들은 질질 끌던 문제가 해결되면 “드디어 바히아가 끝났군!” 이라고 말 한단다. 궁의 수많은 방과 홀은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어 함부로 들어갔다간 일행을 놓치기 십상이다.

<바히아 궁을 장식하고 있는 천정 문양>이 궁은 건물 자체로는 감탄할 일이 없다.
그러나 방의 천정 장식을 보면 입이 벌어진다. 모든 방의 천정은 꽃밭이다. 야생화가 가득한 꽃밭은 무슬림들이 꿈꾸는 이상향이다.
건조한 지역에 사는 무슬림들의 파라다이스는 숲과 꽃, 물이 꿀처럼 흐르는 곳에서 아름다운 여인들을 끼고 사는 것이다. 이생에서 알라신의 뜻에 거스르지 않고 진실 되게 살면 죽은 후 이런 천국을 보장 받는다고 믿는다. 시 <바히아 궁을 장식하고 있는 천정 문양>무사는 현생에서 그런 세상을 만든 것이다.
건축기법과 문양은 다마스커스의 아젬 궁전과 똑같다. 고급스러운 호두나무 천정의 장식이 압권이었는데 그 궁이 18세기 오스만 터키의 산물이었으니 이 궁도 정통 아랍예술의 정점을 보여 준다.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는 궁전은 모로코 예술과 이상을 대변하고 있다. 무리한 공사였다고는 하나 귀족의 저택이 이 정도였다면 그 당시 마라케쉬의 부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된다.
결국 시 무사가 죽은 뒤 이 집은 왕에게 빼앗겼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외면하기에는 이 궁이 너무 예뻐서다. 건축가보다 집을 장식한 예술가의 열정이 느껴졌다.

바히아 궁을 나와 수크(시장)구경에 나섰다.
조밀하게 밀집된 상점들은 모두 구멍가게 수준으로 시장이 갖고 있는 흥청거리는 생명력을 느낄 수 없다. 상인들은 무심한 눈빛으로 우리를 구경한다. 우리도 의욕적으로 물건에 흥미를 못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옹색한 상품들은 먼지 속에 퇴색되어 있고 어두운 상점은 굶은 짐승의 힘없는 목구멍 같다. 하지만 가슴 아린 서글픔이 이 시장의 매력이다. 좁은 골목은 가감 없이 이 도시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마라케쉬, 수크><마라케쉬, 수크>해발고도 550m의 마라케쉬는 예부터 교통, 물류의 중심지였다.
사하라 사막과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 온 산물과 바다로부터 들어온 교역품들이 거래되는 큰 시장이었다. 그래서 실크로드 상의 도시처럼 인종, 종교, 문화가 상충하면서 모로코 특유의 문화를 잉태시켰다.
이 도시에 모로코 여러 왕조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활발한 상업으로 얻어진 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숨 걸고 사막과 높은 산맥을 넘어 또 바다를 건너 꿈과 희망의 상징, 붉은 이 도시가 눈에 들어 왔을 때, 사람들은 안도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행복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많은 이들의 낙원이 되어 주었던 이 도시의 영광은 석양처럼 붉은 빛만 요란 할 뿐 열기가 없다.

<제마 엘 프나 광장의 건과류 상>시장을 슬슬 걸어 드디어 제마 엘 프나 광장으로 나왔다.
어둠도 때맞추어 찾아오고 있었다. 낮에 잠시 본 고요함은 사라지고 광장 한가운데 하얀 천막이 줄지어 서 있고, 이국적인 온갖 향신료 냄새 가득한 숯불 연기로 하늘이 자욱하다. 광장은 축제의 준비로 분주했다.
광장의 색채를 지배하는 것은 열대의 건과류 열매였다. 보기 좋게 쌓여 있는 대추야자를 비롯한 말린 열매들은 이국의 냄새와 맛을 풍기면서 날 유혹한다. 제일 비싼 것으로 대추야자 1kg을 샀다.
달고 쫄깃한 식감이 입안에 퍼지자 내가 이 맛을 찾아 이곳에 왔다는 착각에 빠진다. 신랑도 중선이도 행복한 얼굴이다.

<물장수>여기저기 판이 벌어졌다.
차력사, 곡예사, 벌거벗은 댄서들, 약장수, 아프리카 고전적 악기에 맞추어 목을 뽑아대는 수많은 가수들.... 작고 혹은 큰 무리를 이룬 군중들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옮겨 다니며 이 광장의 향연을 즐기고 있다.
코브라, 구렁이는 피리에 맞추어 꿈틀거리고 원숭이는 달관한 얼굴로 재롱을 떤다. 물장수 케랍은 같이 사진 찍자고 추근댄다. 물론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이때까지 나는 만물상 같이 해괴한 이 광장의 원시적 오락거리에 방관자 내지는 관찰자가 되어 “오호! 이런 것도 있네.”
“아이구! 옷이나 좀 빨아 입으면 더 좋으련만....”
“약해, 약해..... 쯧쯧쯔.... 그 정도로 사람 끌겠어?”
이런 생각을 하면서 댄서들의 옷도 나무라고 중국 차력단에 비하면 유치원 수준의 쇼를 보면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다 유난히 많은 남자들이 몰려있는 작은 원을 뚫고 들여다보았다. 낮은 의자에 앉은 한 남자가 손때 뭍은 꼬질꼬질한 교본을 펼쳐놓고 성교육을 하고 있었다.
책에는 남자의 커다란 성기가 그려져 있었다. 확대해 놓은 성기는 지구의 모든 암컷을 만족시키고도 남을 것처럼 튼실했다. 과장된 성기와 침을 튀겨가며 열을 올리는 입담에 외국 여성이 끼여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남자들이 빠져 있다. 앞줄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넋이 나갔다.

순간, 내 머리에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이거다! 처칠이 “이 세상에서 마라케쉬보다 사랑스러운 도시는 없다”라고 외친 의미가.....
앙드레 지드의 <배덕자>에서 주인공은 너무 잘 생겨 자기 아내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아이가 비위에 거슬렸는데 그 아이가 아내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그 아이에게 강한 연대감을 느끼는 심정이랄까? 아니면,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먹물 든 주인공이 조르바의 꼬드김에 넘어가 과부의 육체를 맛보고 가련하고 불합리한 사내의 본능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진정한 인생의 쾌락에 몸을 떨던 통쾌함이랄까?
어떻든 완벽하게 무장 해제되는 나를 느꼈다. 깃털 같은 이성이 사라지니 광장의 모든 소란스러움이 즐겁다. 몸을 부풀려 떨어대는 저 지저분한 무희의 원초적 율동은 진실한 삶의 활력소다.
먹물로 무장된 내 이미지들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성교육에 열정을 보이는 남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형제가 몸의 언어로 영혼의 안식을 얻기 바랄 뿐이다.
문명의 이기로 분화된 말초적 쾌락은 필요 없다. 이곳에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자신들의 능력으로 환희와 천국을 체험하고 있다.

우리는 이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3층 카페로 올라갔다.
이미 카페는 만석이었다. 줄서서 기다린 끝에 입장하니 벌써 마사장님과 우리 일행 분들이 와 계셨다.
따뜻하고 달디 단 민트차가 비로소 친근감을 표시한다.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사랑스러운 제마 엘 프나 광장을 구석구석 더듬었다.
이 광장을 제대로 느끼고 싶은 여행자에게 꼭 충고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절대로 카메라를 열지 말라.” 호기심에 카메라를 들이대면 어딘가에서 나를 주시한 사람이 나타나 돈을 요구한다.
모든 포퍼먼스에는 숨은 입장료가 있다. 단 카메라에만.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내 흥이 깨진다. 그런 바보스러운 행동으로 내 여행을 B급으로 만들지 마라. 이 귀여운 광장을 모독하지 마라.
처칠뿐만 아니라 존 레논, 크리스티앙 디올, 이브 생 로랑, 재클린 같은 유명인들이 이 도시를 사랑해 별장을 장만하고 쉬어갔다.
그들은 예술적 영감이 고갈되고 잿빛 도시에서 지치면 이 도시를 찾아왔다.
원초적 유희가 난무하는 이 사랑스러운 도시에서 깊은 호흡을 하기 위해.....
어둠과 함께 광장은 더욱 살아나고 있다.
마사장님이 메디나 외곽에 있는 우리 호텔까지 마차를 타잔다.
멋진 이벤트였지만 어찌나 추운지 구경하다 얼어 죽을 것 같았다.
마차를 타고 광장을 나서면서 보니 마라케쉬의 모든 도로는 사람으로 꽉 찼다. 가족과 친구와 연인들은 손을 잡고 모두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택 옥상에 무수히 달려있는 TV 안테나도 이 도시에서는 전혀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빗속의 기마병>저녁을 먹고 현지 가이드 모하메드가 적극 추천한 쇼를 보러 갔다.
도심에서 꽤 떨어져 있는 공연장에 도착했을 땐 조금씩 내리던 비가 굵어졌다.
사막 오아시스의 삶을 재현한 천막과 화려한 조명의 건물, 넓은 야외무대는 대단한 자본가가 마음먹고 투자한 것 같다.
술탄 같은 자세로 천막에 앉으니 여러 베르베르 종족이 특색 있는 자신들의 의상을 뽐내며 간단한 춤과 노래로 인사를 하고 나간다.
그러나 야외무대에서 진짜 쇼가 진행될 쯤에는 비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내렸다. 우산을 쓰고도 쇼를 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쏟아 붓는다.
그래도 마상 쇼를 벌이는 기병들은 공연을 계속했다. 어둠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기병들이 전속력으로 내달리면서 아프리카 특유의 높은 고음의 소리를 낼 땐 소름이 끼쳤다. 십자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살라딘 군대의 재림을 보는 것 같았다.
더 보고 싶어도 추위와 비로 어쩔 수가 없다. 이제 여행의 시작인데 몸조심해야한다고 판단해 호텔로 돌아왔다. 많이 아쉽다.

 
 

1월 11일 (제 3 일) - 카스바의 여왕, 아이트 벤 하도우 -

아침 눈을 뜨니 맑은 날은 아니지만 비는 그쳐 있다.
식사 전에 호텔 구경을 했다.
여행에서 만난 호텔 중, 이집트 아스완에서 머문 곳은 참 인상 깊은 곳이었다. 1시간을 직선거리로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나일강 한가운데 있는 하중도였다.
이 호텔(Ryad Mogador Agdal Hotel)도 마라케쉬 메디나를 감싸고 있는 붉은 성벽과 꼭 닮은 모습으로 한 도시가 들어앉아 있다. 수영장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며 고층 건물과 펜숀, 방가로 형태의 객실이 꽉 들어차 있다.
어제 호화로운 로비 장식에 우리 일행은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도저히 이 나라 경제규모로는 이해되지 않아 외국 자본이냐고 물어보니 분명히 모로코 기업이 주인이란다. 여름에는 손님이 많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우리가 유일한 손님 같았다.

도시를 벗어나면서 보니 아침 공기를 가르며 달리고 있는 청년들이 눈에 꽤 띈다. 생각해보니 모로코에는 세계적인 중?장거리 육상 선수가 많다.
특히 1,500m의 엘 게루즈는 신화 같은 실력의 존재였다.
그는 1,500m을 100m달리기처럼 뛰어 인간능력 확장을 보여 주었다.
이 나라 유능한 육상선수들은 많은 오일머니를 주는 중동지역으로 진출해 국적을 바꾸어 세계 각종대회에서 뛰고 있다.
모로코 젊은이들에게 달리기는 인생 역전의 한 방이 되기도 하나 보다.
아프리카 흑인의 피가 섞인 그들의 종아리는 바싹 마른 장작 같다.

오늘은 산을 넘고 넘어 산맥 깊숙이 들어간다.
모로코 지도를 놓고 보면 네 개의 산맥이 눈에 띈다.
북부의 리프 산맥과 대충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미들(Middle), 하이(High), 안티(Anti) 산맥이 나란히 줄지어 가로지르고 있다.
미들, 하이, 안티 세 산맥이 좁고 긴 협곡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어 협곡을 달리며 양쪽 산맥의 눈 덮인 산들을 보는 재미가 기가 막힌다.
오늘 우리는 세 산맥 중 가장 높은 하이 아틀라스를 넘는다. 이 산맥 최고봉 투브칼(toubkal)산은 4,165m나 된다.

마라케쉬가 멀어지면서 소박한 베르베르인들의 삶이 녹아있는 붉은 흙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 중턱의 좁은 계단식 밭들과 어울려 서정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버스가 힘들여 산을 오르니 날씨가 심상치 않다.
구름 낀 하늘은 어느새 눈을 뿌리기 시작하더니 산 속 휴게소에 도착했을 땐 제법 많은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영하의 날씨와 펄펄 내리는 눈을 보니 또 다시 정말 이곳이 아프리카인가 또다시 의심스럽다. 그러나 신기하니 더 즐겁다. 모두 날씨를 걱정하기는 커녕 따뜻한 민트차를 마시며 때 아닌 설경에 푹 빠졌다.
가이드 모하메드는 산을 넘는 길이 폐쇄될지도 모른다고 걱정이지만 누구도 내 일이 아닌 양 귀 기울이지 않는다.

산을 오르자 눈은 완전히 그쳤다.
그리고 아틀라스 거인은 멋진 백색의 왕관을 썼다. 험악한 산악 지대로 인식하고 있던 아프리카의 산은 너무도 풍요롭고 성스럽게 빛나고 있다.
우리가 올라온 길이 벌써 아련한 추억이 되어 그림처럼 보인다.
이런 장면이 여행의 횡재다. 차를 세우고 모두 이 행운을 담기 바쁘다. 눈과 가슴과 카메라에.....
경치는 좋지만 옛 대관령 길처럼 심하게 휘어진 도로는 우리 몸을 한시도 가만두질 않았다. 남미를 함께 여행한 유혜근 선생님은 멀미를 심하게 하신다.

정상을 넘어서자 거짓말처럼 설산은 사라지고 황량한 붉은 지형으로 바뀌었다. 하이 아틀라스 산맥은 우리나라 태백산맥처럼 자연 환경에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산맥을 넘는 순간부터 소박한 베르베르인들의 삶이 거친 자연 환경 속에 박혀 있다.
이 나라의 진정한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르베르인은 4개의 산맥 속에 삶의 뿌리를 두고 있다. 지중해 연안 평야 지대 아랍인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언어조차 다르다.
그러나 외부인들이 보기에 생김새로는 그들을 구별할 수 없다. 기원전부터 이곳으로 이동한 베르베르인은 여러 민족과 섞이면서 신체적 특징이 없어진 것이다.
대규모 아랍인에 밀린 베르베르인은 산악 지대에 적응되어 진화되어 왔다. 페니키아인, 로마인, 아랍인 등이 이 나라에 수없이 드나들며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을 때도 산악 지대의 베르베르인들은 그들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삶을 유지했다.
간혹 여러 부족이 힘을 합쳐 왕조를 형성해도 그 응집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씨족의 자존심이 더 크기 때문이다. 또 부족 간의 침략으로 잠시 다른 세력에 의탁해도 위험요소가 사라지면 곧 예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독립심 강한 베르베르인들에게 그나마 많은 영향을 준 종족은 아랍인들이었다. 워낙 많은 아랍인이 오랜 기간에 걸쳐 몰려왔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아랍인의 집요한 군사적, 문화적 공격에 베르베르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교역도 확대해 나갔다. 재미있는 것은 베르베르인들이 더 엄격히 무슬림화되어 평야에 사는 아랍인들의 종교생활에 순수함이 결여되었다고 공격까지 했다.
그러나 르 클레지오의 <하늘빛 사람들>을 읽어보면 베르베르인들의 엄격한 이슬람교 안에는 척박한 땅과 가혹한 기후대에서 사는 민족이 그러하듯 원시 신앙적 요소가 들어있다. 주변의 독특한 지형이나 지물을 이슬람교의 성역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베르베르인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무슬림은 경전의 신성함보다 금욕적인 신앙생활에 더 의미를 두지 않았나 싶다.
모로코 역사상 베르베르인이 아랍인과 진정한 한 국가의 국민으로 융합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식민지 시대부터였다. 산악 지대에서 독자적 부족 체제를 유지하던 베르베르인들은 프랑스에 20여 년에 걸쳐 저항했지만 결국은 서구의 선진 군사력과 제도에 의해 모로코라는 최초의 통치권에 편입되었다.

차창 밖으로 붉고 메마른 풍경이 끝없이 이어진다.
드디어 저 멀리 아이트 벤 하도우가 나타났다. 앞으로 강이 흐르고 낮은 산에 기댄 붉은 진흙 성채는 오∼∼ 우!! 멋지고 신비롭다. 차를 일단 아이트 벤 하도우가 한 눈에 들어오는 강 반대편에 세웠다.
<카스바의 여왕>이 너무나 비밀스럽게 서있다.
태양빛을 받고 곧 통째로 들려 지구를 떠나 신이 되기 위한 건축물처럼 보인다. 이곳을 찾은 모든 이들이 순례자의 본분을 잊지 않고 경배를 드려야함이 마땅한 고독한 성스러움이 어려 있다. 인간의 손길이 아니라 대기를 순환하는 모든 순결이 응집된 결정체다.

카스바란 북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요새 내지는 성채를 말한다. 원래 목적은 다른 종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종족 통치자의 주거지를 중심으로 높은 성채를 쌓고 모여 살았다.
특히 모로코 이 지역은 베르베르인들이 사하라 사막을 건너다니며 마라케쉬로 통하는 대상(隊商)루트를 형성했는데 그 루트에 카스바가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이 대상루트는 카스바 로드로 불리운다.

<아이트 벤 하도우>우리는 아이트 벤 하도우에서 나온 사람들이 이주해 만든 새로운 마을을 지나 강 건너 아이트 벤 하도우로 들어갔다.
다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동네 아이들이 많이 해본 솜씨로 “마담! 마담!”하고 불러가며 공손히 손을 잡고 강 건너기를 도와주고 마지막에는 맹랑한 눈빛으로 돈을 요구한다.
징검다리를 날아서 건너도 시원찮을 판국에 부축까지 받기는 더더욱 싫어 그들보다 먼저 뛰어 건너버렸다. 그래도 아이들의 허망한 눈빛이 마음에 걸려 막대사탕 하나씩을 손에 쥐여 주었다.

가까이서 본 아이트 벤 하도우는 너무 적막하다. 어깨를 맞댄 붉은 진흙집들은 사람의 온기를 잃어 영화 세트장처럼 처량하기까지 했다. 마을 입구에 제법 넓은 광장이 있고 빛바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영화 <글라디에이터>의 한 장면이다.
영화는 아이트 벤 하도우를 배경으로 이 광장에 셋트를 지어 촬영하고 철거했다. 이 카스바는 2,000년 전의 역사를 끌어와도 어울릴 만큼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좁은 미로를 쫓아 위로 위로 올라갔다. 간혹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집도 있어 관광객을 상대로 먼지 낀 기념품들을 팔고 있다.
집 내부는 한결같이 좁고 어둡다. 환기니 채광이니 하는 기능보다 오로지 춥고 덥고 한 자연에 대항하고 적의 침략에 대비한 집들이다. 떠난 자들이 남기고 간 깨진 도기만이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한 채, 한 채 나누어서는 서글프지만 서로 의지해 굳게 뭉쳐진 카스바는 그 이름이 주는 어감보다 더 낭만적이고 정교하며 듬직하다. 마을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왜 이 카스바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알겠다. 주변 일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작은 강이지만 넉넉히 굽이쳐 흐르니 경관도 그만이다.
11세기경부터 만들어졌다는 카스바는 1,000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아직도 견고하다. 오로지 흙과 갈대 정도의 재료로 그 세월을 버티었다면 그만큼 인간의 품과 애정이 많이 들었다는 소리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니 앞으로 인류의 보물로 보수유지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떠나간 건축물은 피를 덥히는 온기를 잃는다. 본래의 용도를 잃어버린 건축물은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유적이 되어버린다.
집안의 고가 장식품보다 가족이 모여 대화를 나누며 사용하는 식기가 더 정겹듯이 이곳도 그런 따뜻함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다.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낙타의 발굽소리가 그리운 이곳에 우리의 사랑과 애틋함을 넉넉히 내려놓고 떠났다.

<와르자자트>다음 목적지 와르자자트로 이동하면서 보는 풍광은 사하라 사막 언저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냉혹한 자연의 습격에 살아남은 인간과 대지는 똑같은 모습이다.
이곳의 사람보다 푸른 하늘에 떠 있는 투명한 구름이 더 온전한 생명체 같아 보인다.

와르자자트는 예상보다 큰 도시였다. 인구가 4만 명이 넘는단다. 시외버스들이 줄지어 서있고 도시도 깔끔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도시 인구 절반이 영화 관련사업과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어쩌다 있는 엑스트라 출연이지만..... 이동하면서 보니 커다란 영화 세트장들이 보였다.
이집트 파라오 왕궁과 신전 같은 건물들이 사막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곳의 자연환경이 고대의 정취를 표현하기에 적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 도시의 맹주였던 글라위 가문의 성채 타오리트 카스바로 갔다.
아이트 벤 하도우와 달리 화려한 장식 문양도 많고 1인자의 권력이 느껴지는 성채였다. 이 성채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서민들의 가옥이 줄지어 서 있다. 와르자자트는 마라케쉬와 사막을 연결하는 길목이면서 주변에 금광까지 있었다.
이 일대 최대 족장 베르베르인 타미 엘 글라위(Thami el Glawi) 가문은 이 도시를 기반으로 금광 개척과 대상무역, 통행세 수입까지 축적해 소문난 부자가 되었다. 더욱 프랑스가 이곳에 진출했을 때는 발 빠르게 협조해 권력까지 얻었다. 급기야 1953년, 프랑스 정부군과 합세해 무능한 무하마드 5세를 몰아내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아랍인과 베르베르인들이 단결하여 프랑스에 대항하는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로 프랑스는 자신들의 식민지 정책을 반성하고 마다가스카르섬에 유배된 무하마드 5세를 불러들여 1956년, 주권을 돌려주었다. 1961년, 무하마드 5세가 죽고 왕위에 오른 아들이 하산 2세이다.
이렇게 모로코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글라위 가문은 이곳에서 중앙정권의 술탄 못지않은 권세와 부로 세상을 호령하며 살았다. 우리 생각으로는 프랑스에 협조한 가문이었으니 처참한 몰락으로 이어져야 마땅해 보이지만 옛날 같지는 않지만 이 가문은 여전히 모로코의 명망 높은 부자 가문으로 잘 살고 있단다.
이는 이슬람 사회에서 가진 자가 보이는 베품이 큰 적을 만들지 않는 사회적 관습의 덕이 아닐까? 우리가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념과 원칙이 어느 곳에서는 서픈 값어치도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정신적 부산물들이 기본적인 삶 앞에서는 허황된 말장난일 뿐인 것이다.

<타오리트 카스바>성채는 마라케쉬 바히아 궁에 비하면 너무도 소박하지만 그래도 최고자의 권위를 지킬 정도의 품격은 갖고 있었다.
성의 주인 부부는 2층 발코니에 앉아 대추야자 열매를 씹으며 행인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가끔 이곳에서 돈을 뿌려 사람들을 즐겁게도 했단다.
3층은 일종의 할렘구역으로 여러 부인을 위한 공간 이었다. 이곳 주인은 유대인 부인까지 두었는데 그녀만을 위한 특별한 장식이 인상적이다.
4층은 주인의 집무실 내지는 휴게실이었다. 사방이 여러 개의 창으로 되어 있어 이곳에서 자신의 경작지와 노비, 소작농을 관찰하고, 마방과 드나드는 상인과 노새의 출입까지 볼 수 있었단다. 편안한 자세로 자신의 부를 매일매일 즐겼을 이곳 주인의 나태함이 그려진다.

타오리트 카스바의 구경을 끝으로 오늘 묵을 호텔로 갔다. 호텔은 너무 예뻤다. 방가로 형태로 정원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꿈에 부풀어 방에 들어갔지만 오래된 호텔은 방만 많았지 효용성은 제로였다.
벽에 붙은 온풍기에서는 내 콧김 같은 온기의 바람이 나올 뿐, 직원을 불러 항의를 해도 개선의 여지가 없다. 결국 시베리아 벌판 같은 욕실은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오리털 파카를 입고 긴 밤을 보냈다. 오늘밤은 유난히 밖의 기온이 낮다. 중선이 감기 들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1월 12일 (제 4 일) - 모로코의 풍광은 끝없이 내 귀에 종을 울렸다 -

<카스바<카스바 로드의 풍경><카스바







8시 호텔을 출발했다.
오늘은 꼭 무엇을 보기 위함보다 이동 자체가 행복한 여정이 될 것이다.
와르자자트를 벗어나면서 황량한 땅은 계속되었다. 왼쪽은 하얀 눈이 너무나 선명한 하이 아틀라스 산맥이, 오른쪽은 지리산 능선 같은 부드러운 안티 아틀라스 산맥이 마주보고 있다.
카스바 로드는 두 산맥 사이의 평원을 관통하고 있다. 이 평원이야말로 베르베르인들의 진정한 삶의 터전이며 모로코의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다. 황량하고 메말라 인간에게 버려진 곳처럼 보이지만 잊을 만하면 마을이 나타나 이곳도 지구의 일부분임을 알려준다.
대부분의 카스바는 허물어져 있으나 여전히 맹주의 모습으로 마을을 굽어 내려다보고 있다. 세월에 삭아진 모습은 그 자체로 살아내는 현명함을 알고 있는 듯 보인다.
스코우라에 가까워지면서 여러 개의 댐이 보였다.
메마른 계곡에 담겨있는 푸른 물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이 근방에 5개의 댐이 있고, 70년대, 하산 2세에 의해 만들어져 전기와 농업, 식수로 사용한단다. 이 댐들이 모로코에서 얼마나 자랑스러운 존재인지 이 나라 지폐를 장식하고 있을 정도이다.


잠시 쉬기 위해 엘 켈라 엠고우나라는 마을의 휴게소에 들렀다.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질 좋은 장미향수 원액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인들에 의해 장미가 재배되기 시작해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5월이 되면 이 마을은 핑크빛 세상이 된단다. 전체 생산량은 모르겠지만 1ℓ의 향수를 얻기 위해 10ton의 꽃잎이 필요하다니 대단한 장미산지임에 틀림없다.
또 이곳 농부들의 자부심도 강해 프랑스가 원액을 수입해 알코올을 첨가해 판다는 사실을 알고 수출 중단까지 강행했단다. 그러나 이 계절에는 아름다운 장미 산지라는 것이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 휴게소에서 파는 장미 원액 용기도 소아과에서 주는 플라스틱 약병보다 조잡했다.

장미 마을을 지나니 제법 큰 마을들이 이어졌다.
절대 인간 생존이 녹녹치 않은 자연 환경이지만 댐이 만들어지면서 큰 마을들이 형성되었다. 그 옛날에는 우기 때나 물을 볼 수 있는 와디(건천)였겠지만 이제는 항시 물이 흐르는 강으로 변해 마을이 열촌 형태로 줄지어 서 있다. 가장 긴 마을은 30㎞정도나 된단다.
물길을 따라 경작지와 팜농장,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겨우 오아시스 정도에 의지하던 사람들이 안정적인 생활이 확보되고 경제적 여유도 갖게 된 것이다. 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니 현대식 도시가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것이다. 몇 년 전 열사의 땅, 타클라마칸 사막을 여행하면서 느꼈지만 인간은 물을 따라 움직이는 바이러스 같은 존재다. 어떤 기후적 악조건 속에서도 물만 있으면 생명의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정겨운 고향땅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중간, 중간 내려 물길을 따라 멋지게 자란 대추야자 숲과 붉은 진흙집들의 완벽한 조화로움에 감탄하며 모로코를 즐겼다.
한번은 우리가 마을을 구경하고 있는데 일본팀이 왔다.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차에 오르니 모하메드가 자기는 일본여성과 한국여성을 구별할 수 있단다. 예쁘면 한국인이 틀림없단다.
할머니들을 앉혀놓고 그런 말을 하니 웃어야할지, 말아야할지.... 예쁜지 안 예쁜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여성들이 옷은 입을 줄 알지.... 유행과 개성에 상관없는 무채색 옷의 집단여성! 틀림없는 일본 관광단이다.
 
<티네기르 시장>티네기르는 고만고만한 마을 중에 제법 도시의 냄새를 풍겼다.
그리고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다. 월요일마다 장이 서는데 오늘이 딱 장날이었다. 마사장님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모하메드는 갖은 이유를 대고 난색을 표했지만 절대 사진은 찍지 않기로 약속하고 시장구경에 나섰다.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도 이런 장 구경을 했지만 현지인과 몸을 부딪혀가며 몰려다니는 것은 처음이라 아무래도 몸을 사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무리 기질이 센 사람들이라고 해도 순박한 시골사람들이다.
우리를 신기해하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얼굴들은 금방 나를 무장해제 시켰다. 사진 찍지말라구? 서로 즐기며 마구 찍었다. 이들도 노르스름한 외국인은 처음 보았는지 우리가 시장 최대의 볼거리가 되었다.
 
상설시장이 아니니 모두 좌판을 벌여 놓았다. 물건 자체는 신기한 것들이 별로 없지만 싸구려 중국산 물건들에 혼을 빼앗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훨씬 재미있다.
원래 장터에서 사람 구경이 최고 아니던가?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는 이 오지의 생활에서 장보다 더 신나고 재미있는 축제가 있을까?
구경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아쉬움...
벼르고 별러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흥정에 열중인 저 몸싸움...
오랜만에 서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나누는 남자들끼리의 진한 스킨 쉽...
시장판을 휘젓고 다니는 10대들의 몸장난과 웃음소리..
차도르로 온 몸을 가리고 내가 궁금해 숨은 눈을 치껴뜨고 나를 쫓는 여자들.... 수다 중에 나를 무심코 보고 얼음이 되어 버린 남자들.....
10대 몇 명은 계속 나를 따라 다니며 호기심을 거둘 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통하지 않는 나의 미모가 아프리카 권에서는 먹히나? ㅎㅎㅎ........
완전히 다른 인종이 만나 서로를 탐색하며 즐겼다. 원초적 즐거움이 내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잠시나마 우리가 이 장터의 행복요소였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으쓱해진다.

장터 밖에는 학생들이 모두 나와 커다란 플랜카드를 들고 가두 행진을 하고 있다.
얼마 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학살한 것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소란한 세상과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이곳조차 이념의 고리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우리도 창을 열고 그들의 행동에 박수를 보내자 어린 학생들이 좋아 죽는다.

토드라 협곡으로 가는 고갯길에서 티네기르 시내를 내려다 본 풍광은 숨을 멎게 했다. 일행 모두 일제히 일어서 탄성을 질러대고 찬사를 보내니 모하메드는 자랑스러워 코를 벌룸거리면서 행복해 한다.
토드라 강을 끼고 조성된 팜나무 숲은 맹세코 내가 본 숲 중에 최고였다. 한 그루, 한 그루의 힘찬 생명력은 거대한 거인의 모습이었다.
아틀라스처럼 이들이 있기에 지구의 하늘이 반듯하게 떠 있다고 여겨진다.

<티네기르 전경><토드라 협곡>












미국 유타주 같은 황량한 사막 속에 신의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 같은 신비로움에 눈을 뗄 수가 없다.
옛날부터 티네기르는 높은 산맥과 사하라의 경계지 역에서 대상들을 상대로 발달한 오아시스 마을이었는데 이런 훌륭한 팜 농장으로 도시는 점점 확대되고 있단다.
그러나 이제는 딱 이만큼에서 성장을 멈추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항상 그리워할 지금의 모습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빌어본다. 우리의 이상향 같은 저런 마을이 이 지구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다.
토드라 협곡은 우람하고 잘 생겼다. 붉은 사암 산은 오랜 세월 물길에 시달려 깊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협곡을 제대로 즐기려면 트레킹을 해야 했었다.
우리는 협곡 안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만 먹고 사막으로 들어가기 위해 서둘러 에르푸드로 이동했다.

에르푸드로 가는 도중 아주 인상적인 지물을 보았다.
달 표면과 똑같은 작은 분화구 내지는 흰 개미집 같은 규칙적인 지형이 보였다. 그 위로 바람에 날린 모래가 안개처럼 떠 있어 아주 특별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켓따라12 세기부터 생겨난 것으로 지하 물길을 따라 물을 퍼 올린 흔적이란다. 명칭은 <켓따라>란다. 이란의 <카나트>, 투루판의 <카레즈>와 똑같은 용도지만 인공 수로를 만들지 않은 것이 다르다. 열사(熱砂)의 땅에서 물을 얻고 지키기 위한 지혜의 산물이다.

작은 마을에서 장례식 행렬을 만났다. 널빤지 위에 천으로 싼 시신이 아무런 가림도 없이 선두에 서고 많은 남자 조문객들이 따르고 있다.
아주 단출한 장례행렬이다. 울음도 탄식도 없이 한 인간이 생을 마감하고 있다. 태어날 때와 같이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조금은 긴장된 엄숙함이 참 인상적이다.
모하메드는 거듭 절대 사진 찍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그런 충고가 아니더라도 내 뇌는 그런 짓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알려준다. 고단한 인생이 알라신의 품으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마을은 유난히 모든 여성이 검은 긴 차도르를 입었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눈만 내어놓고 긴 검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걷고 있어 거리 풍경을 압도한다.
아랍 사회는 한 마을의 족장 결정이 국가법을 능가한다. 족장의 뜻에 따라 여성의 옷차림마저 정해지는 것이다.
그 마을을 벗어나자 거짓말처럼 여성들의 옷차림이 자유롭다.

드디어 사하라 사막 투어의 관문도시 에르푸드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시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사막 언저리에서 4대의 지프차에 나누어 타고 곧장 사막으로 향했다. 곧 해가 질 것 같아 마음이 조급했다.
오랜 시간 동안 사하라를 그리워했었다. 사하라를 못보고 죽으면 저승 입구에서 쫓겨나 구천을 외롭게 떠돌게 될 것처럼 조바심을 내기도 했었다.
그러다 이집트 사하라를 보았고, 또 장대한 일몰의식을 보았었다.
사막을 향한 내 첫사랑은 나의 이상대로 멋지고 황홀했으며 뜨거웠었다. 이것으로, 그 추억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사하라라는 이름만 들으면 여전히 가슴이 뛰고 그리웠다.
이제는 구체적으로 사막이 그려지면서 다른 모습의 사하라가 나를 흥분시켰다.
차는 황량하기만 한 단단한 사막을 지나 멀리 보이는 황금빛 사구를 향해 달렸다. 저녁 햇살을 받고 있는 모래 사구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어찌나 바람이 심하고 추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항상 옷을 얇게 입어 걱정이던 중선이도 고어텍스 자켓도 입고 제법 준비가 철저해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죽어라 모자는 쓰지 않으려고 한다.

낙타 등에 올랐다.
긴 그림자를 끌고 낙타는 아주 온순하게 우리를 태우고 간다. 바람은 심하고 춥지만 기분은 너무 좋다. 적당한 흔들림도 좋고 경치가 죽음이다.
자그마한 사구들이 보드랍게 끝없이 연결되어 있다. 오르면 멀어지고 가까이 가면 다른 모래 산이 다가온다.
<모로코의 사하라. 사진: 마경찬>이 세상은 완벽하게 모래와 하늘만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깨끗하고 신성한 황금빛 모래 사구산맥은 처음이다.
이런! 마사장님 기분 최고이신가 보다. 우리를 찍어 주다가도 이 경치에 취해 노래를 흥얼거리신다.
또 <서른 살 즈음에.....>.
“레파토리 좀 늘려요!”
꼭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완성된 흡족함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계신다. 귀엽기도 하시지.

해넘이는 시시했다. 사하라도 어쩔 수 없는 때가 있나 보다.
더 거칠어진 바람은 혼을 빼 놓을 정도로 극악스럽게 요동을 쳐 낭만이 들어앉을 틈조차 내놓질 않는다. 아무런 의식도 장식도 없이 꼴까닥 넘어간 해를 원망하며 다시 낙타에 의지해 사구를 내려왔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배두인들이 풍악도 울려준다. 캐러번 복장의 눈 시린 푸른빛이 곱다. 우리의 흥을 돋우기 위해 그들은 애를 쓰지만 일행 중 누구도 참여하지 못했다. 피곤하고 배도 고프고.... 무엇보다 우리 세대 한국인은 태생적으로 저런 유흥에 익숙치 못하다. 나를 가두고 산 세월이 너무 깊었다.
 
<사막의 특급호텔>저녁을 맛있고 즐겁게 먹고 배정 받은 텐트로 갔다.
이집트 사막의 텐트에 비하면 특급호텔이다. 백사막에서는 내가 텐트를 쳐야했고 낮아서 기어들어가고 나왔다. 변변한 침구도 없어 내가 가져간 침낭에 의지해 혹독한 겨울밤을 보낸 기억이 생생하다.
여기는 높은 침대에 두툼한 이불까지.... 마사장님이 나누어준 핫팩까지 등 가득 붙였다.
그래도 백사막의 원시적 경험이 더 그립다.

중선이는 쏟아지는 별을 보고 아주 놀란 눈치다.
말 없는 아이가 저리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을 보니.... 분명 특별한 이 경험은 중선이의 평생을 지배할 것이다.
중선이를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기원이 생각이 난다.
기원이가 갔다. 1달 전, 기원이가 저 별이 있는 세상으로 갔다는 전화를 받고 난 뒤, 그 소식은 목구멍에 박힌 가시처럼 계속 나를 찔러댄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네 팀의 부부 중 한 아이인 기원이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기형이라 항상 위험하게 자랐다.
그래도 부모의 정성으로 잘 자라 공부도 잘 하고 잘 생긴 소위 <엄친아>의 전형이었다. 너무도 잘 자라주어 주위 사람들은 그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다.
그러다 갑자기 병이 악화되어 수술하기 위해 병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것이 끝이 될 줄이야....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내 아들과 동갑인 아이가 나보다 먼저 갈 수 있다는 것.... 쇼크였다.
아무리 죽음에 순서가 없다고 해도 내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원이 엄마, 아빠 생각을 하면 너무 잔인한 운명에....
내 능력으로는 어떤 위로도 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놀 때, 바라보면서 보랏빛 입술로 해맑게 웃던 기원이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기원아! 그곳에서는 더 이상 아프지 않지?”
그래서 중선이가 더 예쁘고 소중하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압사할 것 같은 이불의 무게에 짓눌려 호흡이 곤란할 지경인데 신랑은 그래서 좋단다. 그리곤 금방 잠이 들었다.
피곤은 한데 잠이 오질 않는다.
허술한 텐트 사이로 맑은 달빛이 비친다. 고양이들이 온 텐트촌을 헤집고 다니면서 천정에서 다이빙까지 즐긴다.
화장실도 갈 겸 밖으로 나오니 휘영청 밝은 달빛이 촘촘하게 내려앉아 모래 사구는 낮보다 더 진한 황금빛이다. 화려한 달빛 때문에 사막은 더 외롭고 적막하다.
힘의 균형이 어느 순간 깨졌는지 사막은 호흡을 멈추고 숨죽여 엎드려 있다.
진공 상태에 빠져있는 황금빛 사구는 한숨이 나올 정도로 귀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다.
짜릿한 공포심을 즐기며 저 곳으로 걸어가고 싶어 몸이 전율한다. 하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모두를 괴롭힐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참아야 했다.


 

1월 13일 (제 5 일) - 사하라는 역시 나의 성지다 -

<모로코의 사하라>

 옆 텐트 함선생님 부부의 대화 소리에 눈을 떴다. 남편 분은 이번 여행 중 가장 달게 주무셨다고 행복해 하신다.
우리 신랑이랑 똑같이 무거운 이불 메니아신가? 그래도 선생님의 행복이 나에게도 전해져 즐겁다. 깊은 잠은 한 숨도 못 잤는데 몸은 아주 가볍다.


해돋이를 보기 위해 낙타를 타고 사막으로 나갔다. 어제 그 바람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차가운 대기 속 청명한 하늘이 우리를 맞는다.
모래 사구 하나를 차지하고 해를 기다렸다. 사막 여기저기 꽤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이 지구상에 진정한 오지는 이제 없다. 여기 사람들도 평생 한 번의 기회라고 용기를 내어 어렵게 왔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너무 보편화되었고 오지여행은 일상화되었다.

아침 햇살을 받기 시작하는 사막은 황홀하다. 우리가 오기 전에 많은 비가 왔었는지 모래는 물기를 머금고 있어 지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굳어 있다. 사그락거리는 모래 감촉은 없지만 걷기 편하고 선명한 모래 색감이 예술이다. 붉은 빛과 노란 빛이 사이좋게 어울린 사막은 아침 햇살과 함께 화려한 꽃으로 피어났다.
멀리 있는 사구들은 음지와 양지의 선을 정확하게 그으면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빛에 젖어가는 사막은 열화의 꽃을 피우기 위한 찰나의 순간을 저 스스로 즐기고 있다. 모두 무음이 미덕인 이 순간을 이해하는 듯 각자의 사막을 즐기고 있다.
저녁의 사막이 하루를 마감하는 하늘의 의식을 묵묵히 받아내는 겸손과 해방감을 보여준다면, 아침 사막은 생의 환희를 노래하고 하루를 살 힘을 채워준다. 저녁 사막은 신을 매개로 나를 보게 하는 신성이 있다면 아침 사막은 오로지 사막과 인간 둘이서 모든 것을 주관할 것 같은 물성이 있다. 그러나 저 붉은 태양이 모든 그림자를 삼키고 쏟아지기 시작하면 사막은 신의 소관이 될 것이다. 저 고운 사구들의 자리를 끊임없이 바꾸어놓고 인간의 흔적을 덮어 자신에게 의지한 모든 생명체로 하여금 맹종과 찬양만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왜 오만하고 혹독한 이 대지에 열광하는 걸까?
우리는 왜 모래, 바람, 하늘뿐인 이곳에서 진정한 나를 보고 평화를 느끼는 걸까? 조금의 방심과 자만도 용서하질 않는 이 비정한 땅을 왜 사랑하고 존경하는 걸까? 그건 내가 바란 절대자를 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모든 허점과 오만 방자함이 이 절대적 존재 같은 어머니 앞에서 어찌 하겠는가?
사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본 사람이 절대적 존재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정말 강하거나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그리스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이 유배당해 기거한 동굴을 본 적이 있다. 좁고 음습한 동굴을 보면서 <요한 계시록>이 충분히 생길 수 있겠다고 느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자신이 그렇게 사랑한 신의 목소리를 못 듣는다는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성찰은 아름다움의 소산이 아니라 시련과 인내의 소산이다. 세계 3대 종교가 사막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가슴에 와 닿는다.
사구를 내려올 때는 모두 낙타를 포기하고 걸었다.
자신의 발로 이 대지를 확인하고 싶었으리라.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페스다.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산맥을 2개(미들, 하이 아틀라스)나 넘어야하고 하루 종일 차를 타야 할 것이다.
사막을 벗어나기 전에 베르베르인 텐트를 방문했다. 우리가 묵은 텐트보다 한심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가축우리와 차이가 없었다.
<베르베르 여인들>그곳에 너무나 예쁜 아이가 있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 사이에 5살이라는 여자 아이의 미모는 어린 불룩실즈를 보는 것 같았다. 역사를 바꿈직한 아이의 미모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경계하는 것 중 하나가 내 잣대로 판단해 쓸데없이 여행지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오만이다. 모든 인류는 자신의 운명이 있고 가치관이 있거늘..... 똑같은 높이에서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한숨이라니.... 미안하다.
아무리 우리 모두가 신의 섭리대로 삶을 사는 여행자라지만 너무나 열악한 환경 속에 놓인 저 아이가 눈에 밟힌다.
어느 투아레그족 남자아이처럼 내가 <어린 왕자>같은 책을 한 권 두고 가면 저 아이의 인생이 바뀔 수 있을까?
일행 모두 그 아이를 안고 사진 찍고 싶어 했다.

페스로 가는 길은 멀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차창 밖의 풍경은 단 1초의 졸음도 아까울 정도로 시시각각 변하면서 다양한 모로코를 보여준다. 태고 적부터 이런 <고요>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풍경! 거대한 대륙은 묵시적인 시선으로 나를 제압한다. 여행은 이래서 좋다. 쉽게 나를 내려놓게 하고 매 순간 감동하게 하고 무엇보다 내 삶을 사랑하게 한다.

<미들 아틀라스 탈간트 고개의 풍경>

우리는 중간 중간 차를 세워 자연 속에 녹아들었다.
그러다 미들 아틀라스 산맥의 탈간트(1,907m) 고개를 올라섰을 때 나타난 경치에 우리 모두 경악했다. 황량한 대지와 온 몸에 격렬한 습곡의 문신을 다 드러내고 있던 산들이 하얀 눈으로 덮여있고 밀도 높은 뽀얀 구름이 눈 시린 푸른 하늘에 비행접시처럼 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적막 속에 하얀 대지, 구름, 하늘 그리고 지평선을 향한 길뿐이었다. 설명하기 힘든 영기(靈氣)가 느껴지는 풍경은 서늘한 한기를 품은 신성함이 있었다. 차를 버리고 걷고 싶은 욕망에 온몸이 근질거린다.
 
<모로코 유일의 스키장>점심은 미델트라는 곳에서 먹었다.
눈 덮인 산맥에 둘러싸인 미델트는 여느 베르베르족 마을과 너무도 달랐다.
유럽풍 가옥이 특징인 마을은 그 옛날 프랑스 식민지 시절, 납, 아연의 광산도시란다. 그들은 떠났지만 그들이 이식해 놓은 문화는 이 아프리카 깊은 산중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한때는 이 도시 최고였을 낡은 호텔에서 식사를 했다. 손님이라고는 오로지 우리뿐인 호텔은 어떤 영화로웠던 기억도 없님이보였다. 단지 늙은 종업원들의 격식 차린 서빙에서 희미한 추억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보는 생선 요리가 반가웠다.

<눈밭으로 쏟아지는 석양><눈밭으로 쏟아지는 석양>










점심을 먹고 달리는 길은 거의 눈으로 덮여 있었다. 하이 아틀라스의 자트(2,178m) 고개를 넘으니 쌓인 눈이 내 키를 넘는다. 그리고 키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기도 해 경치가 풍성해졌다.
모로코 유일의 스키장도 보인다. 우리나라 눈썰매장보다 조금 긴 슬로프지만 아프리카에 스키장이라니? 국왕의 취미가 스키라 겨울에 자주 이곳에 납신단다. 높은 곳에 있는 나무는 이곳의 기후조건이 좋지 못함을 대변하듯 반듯하고 우람하게 자라지는 못했지만 인고의 세월을 견딘 지혜가 느껴졌다. 그런 나무들이 하얀 성의를 입고 서있는 모습은 묵상을 하고 있는 수도사 같다. 수종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측백나무 비슷하다.
어둠이 내리면서 고요한 빛의 반사는 심해지고 일몰의 붉은 빛이 하얀 눈밭에 내리는 광경은 모두의 탄성을 자아냈다. 시간만 충분하면 멈추어 서서 태양과 대지가 화합하는 멋진 의식을 보고 싶었지만 차는 페스를 향해 죽어라 달린다.

모로코 최고의 휴양도시 이프란에 들어섰을 때,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 서 있었다. 휴양 차 와 계신 이 나라 왕(모하메드 6세)께서 외출을 하신다고 차량 통제를 하고 있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이런 일이 생기니 짜증이 난다. 이제 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지겹기도 한데.....
그러나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느니... 다행히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산책하는 것은 허락해 모두 상쾌한 공기와 삼림욕을 즐겼다. 생각보다 통제는 빨리 풀렸다. 임금님이 나오시기 전에 멈추지 말고 빨리 가란다.
마사장님은 임금님이 자신과 동갑인 것을 알고 “누구는 행차하시고 누구는 행차를 기다리고 비켜주어야 하나!”하며 자조적 한탄을 하신다.
“그러게...” 허나 모두가 각자의 길이 있는 것이 운명인 것을.....
이 나라 젊은 왕은 그런대로 정치를 잘 하고 있어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단다. 이 나라를 오기 전에 인터넷을 뒤지다 모로코 왕비를 봤다. 30대 초반인 왕비는 현대판 신데렐라로 아주 미인이었다.
페스 출신인 왕비는 왕족도 귀족도 아닌 평민으로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왕자님까지 출산해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왕비는 아랍족과 베르베르족의 화합을 위하여 마라케쉬와 페스 쪽 여인이 교대로 간택되는데 라라셀마 왕비는 순서를 무시하고 페스에서 뽑혔지만 처신을 잘 해 문제가 없단다. 춥고 어두운데도 도로연변에는 왕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이프란은 알프스의 어느 마을을 떼어다 놓은 것 같다. 전혀 아프리카적이지도 모로코적이지도 않다. 몇 억을 호가하는 고급 별장들이 즐비하고 숲과 호수로 쌓인 도시는 깨끗했다.
대부분 왕족과 귀족의 별장이고 서민은 이 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특별한 도시란다.
이 도시에 왕립대학이 있는데 모로코의 경제 상태와 무관한 특수층만 입학이 허가된단다.
세상 어느 곳이든 <당신들의 천국>은 항상 존재한다.
마사장님은 다음 여행팀은 이곳에서의 하룻밤을 꼭 집어넣겠다며 우리 염장을 지른다.

페스는 망망대해 오징어 배 불빛처럼 갑자기 환하게 우리 시야에 들어왔다.
사막 가운데 있는 라스베가스 같다.
내가 알고 있는 페스와 달리 인구 120만의 거대 도시는 구시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층건물과 파리의 상제리제 같이 꼬마전구로 치장한 대로도 있었다. 우리 호텔은 번화한 신시가지 중심에 있고 드나드는 사람들도 평균 시민은 아니었다.
호텔에 짐만 내려놓고 구시가지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좁은 미로를 통과해 들어간 식당은 그 화려함에 입이 벌어졌다. 14 세기 대부호의 저택을 개조했다는데 모로코적인 모자이크 타일 장식의 이국적 향취가 넋을 잃게 한다. 벽, 기둥, 천정, 문.... 젤류지(Zelluj) 예술의 최고봉이다.
모두 집 구경에 넋을 빼고 있는데 밸리 댄서들이 차례로 나와 몸을 흔들어댄다. 나만큼 나이든 여자들도 있어 늘어진 몸매를 보면 심란하기도 하다.
식사는 잊을 만하면 하나씩 나오는데 어른은 부족함이 없지만 중선이는 양이 적어 섭섭해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먹고 있는 중선이한테 촛불화관을 쓴 늙은 나체의 댄서가 와서 몸을 비벼댄다. 아직 애기라고 생각하는 중선이를 남자라고 와서 희롱을 하니 우리 일행 모두 뒤집어진다. 애는 성욕보다 식욕이 문제인데 말이다.
멋진 식당에서 여인들의 춤을 즐기고 있으니 시대를 초월한 이국적 낭만이 달콤하게 밀려온다. 지금 나는 14세기 모로코에 안겨 꿈을 꾸고 있다.

<페스의 벨리 댄서>
<페스의 벨리 댄서><페스의 벨리 댄서>


 

1월 14일 (제 6 일) - 중세 아랍의 도시, 페스 -

페스! 페스!
2005년 무렵 이 도시에 매료되어 눈을 감으면 좁은 골목을 오가는 분주한 사람들 발소리와 작은 나귀 목에 매단 종소리가 들리면서 페스를 헤맨 적이 있었다.
페스에 열중해 있을 때, 시어머님이 친구 분들과 스페인 여행을 가신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페스를 권했다. 사진도 보여드리고 이국적 요소를 한껏 부풀려 스토리를 만들어 호기심을 자극해 바로셀로나를 포기하고 페스를 가시게 만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최악이었다. 연로하신 분들이 이 도시에 들어와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 결국 한 분이 병원에 입원까지 하셨단다. 시어머니는 이곳을 권했으니 죄인이 되셨고 시어머니 뒤에 숨어있는 주동자 나의 처지는....
중세의 옛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도시는 충분히 이국적이었지만 관광을 하기에는 최악이었나 보다. 시어머니의 페스는 덥고 더럽고 소란스러운 끔찍한 곳이었다. 좁은 거리는 말똥으로 뒤덮여 있었고 턱수염 무성한 아랍 남성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쳐다 볼 때는 공포심으로 몸을 떨었단다. 더더욱 가죽 염색공장의 악취는 혼절을 할 지경이었단다.
사람에 따라 이렇게 다른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여행이 얼마나 주관적인 것이며 시각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는 오지랖 넓은 짓을 했지만 지금은 누가 “다녀오신 곳 중 어디가 가장 좋았습니까?” 혹은 “경험 많으시니 추천 좀 해주세요.”라고 물어오면 막막해진다.
내 대답? “집 떠나면 어디든 다 좋습니다.” 더럽고 소란스럽고 끔찍해서 더 호기심이 발동하고 사랑스러워지는 그곳을 그리워하는 내 심리를 어찌 표현하겠는가? 질문자가 원하는 대답을 절대 할 수 없는 나는 아주 심오한 여인이 되었다.


이렇게 나의 정신세계 확장에 숨어서 일조한 페스에 입성해 찬란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멋진 조우를 기대한 페스는 잔뜩 흐려 도시 전체가 가라앉아 있다. 간간히 비도 뿌렸지만 왕궁 앞에 도착하니 다행히 비는 그쳤다.
<다르 엘 막젠 왕궁의 정문>아담한 광장과 맞닿아 있는 다르 엘 막젠 왕궁은 내부는 엿볼 수도 없게 높은 성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모로코에 들어 온 모든 관광객이 이곳을 오지만 어차피 왕궁은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왕궁 정문을 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
명성대로 문은 아름답고 화려했다. 나무에 망치로 두들겨 복잡한 초현실적인 아라베스크 문양을 황동으로 새겨 넣었다. 그 정교함에 감탄을 넘어서 장인정신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난다.
황동문과 조화를 이룬 문 주위 젤류지 장식도 지금까지 본 것 중 최고다. 모로코 국민과 많은 관광객의 사랑과 찬사를 받는 문은 이미 문 이상의 존재를 넘어 이 나라 문화코드의 대명사가 되어 있다.
모로코의 종교적 색채, 장인 정신의 구현, 시대를 관통하는 건축 양식 등을 가늠할 수 있는 존경의 대상으로 조금의 부족함도 없어보였다.

왕궁을 끼고 구시가지 메디나로 향했다.
왕궁의 성벽에 기대어 발달한 유대인 지구 멜라(Mellah)는 참 인상적이었다. 고졸(古拙)하지만 아름다운 문양이 돋보이는 이층 나무 발코니가 있는 유대인 거주지 집들은 다른 지역보다 깨끗하고 품위가 있다.
유사 이래 유대인만큼 아픈 박해의 상징인 민족이 있을까? 모로코의 유대인 정착도 고난의 세월을 상징하는 한 부분이다.
유럽의 각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1492년, 에스파냐 이사벨 여왕의 명령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되었다. 유럽 카톨릭 교회의 선봉장에 섰던 에스파냐는 반종교개혁을 주도하여 이교도들을 몰아냈다.
예나 지금이나 상업적 기질이 강한 유대인들은 많은 경제적 기반을 잃고 북아프리카, 특히 페스로 물밀듯 몰려왔다. 모로코 아랍 왕조는 밀려오는 유대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높은 성벽을 쌓아 왕궁을 보호했단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그들을 무서워했지만 기꺼이 받아들이는 공존의 삶을 택했다. 그래서 이렇게 왕궁 가까이 유대인 거주지역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멀리 두는 것보다 가까이 두고 감시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역사 속에서 유대인 박해는 기독교 쪽이 더 지독했다.
조직적인 가혹한 시련은 끝이 없었다. 예루살렘을 차지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의 행로에서도 유대인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진 고통과 수탈을 당했다.
그런 박해 속에서 손을 내민 쪽은 항상 이슬람교도들이었다. 물론 유대인을 좋아하고 존중하지는 않았지만 불만의 대상은 아니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종교, 인종으로 인간에게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았다. 현재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의 대립은 누가 보아도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으로 비친다.
그러나 이것은 교묘한 미국의 술수다. 처음부터 아랍인들은 <시오니즘>을 반대했지 유대인을 미워한 적이 없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공존하면서 평화롭게 살아왔다. 아랍의 영웅 살라딘도 집사, 책사에 유대인들을 기용해 그들의 지혜를 구했다.
실지로 <벨푸어 선언>이 나왔을 때, 영국 내 30만 유대인 중 시오니스트는 8,000명에 불과했다. 또 팔레스타인 영토에 이스라엘이 생기고 나서 귀환하는 유대인보다 이스라엘을 떠나는 유대인이 더 많았다.
결국 이스라엘 문제는 영국, 미국을 등에 업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스라엘 밖에 있는 유대인)>의 정치적 시각으로 볼 수 있다. 미국 내 유대인은 약 600만 정도로 추산된다. 이는 전 인구의 2%에 해당되는 수치지만 정치, 금융, 법조, 언론, 학계 등에 포진된 그들은 미국의 모든 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지구상에서 미국의 원조를 가장 많이 받는 나라? 이스라엘이다. 매년 평균 30억 달러(약 2조 8,500억 원)를 지원 받는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미국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나라다. 이스라엘에 대한 끝없는 지원을 이끌어내는 힘은 미국 내 유대인들인 것이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순수한 인류애,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이스라엘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만들기 위해 무리하게 급조된 기괴한 국가인 것이다. 이 괴상한 국가의 탄생을 묵인하고 용인한 세계는 현재 그 댓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다.
모로코 유대인들은 이 거리에 터를 잡고 금은, 보석 세공업에 종사하면서 살았다. 500년 이상 평화롭게 생업에 충실한 국민으로 뿌리 내린 이곳 유대인들의 얼굴이 새삼 따뜻하게 다가온다.

<메데르사 신학교>보수 중인 페스의 또 하나의 상징인 부 줄르드 문을 지나 본격적인 페스의 미로 속으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 빽빽하게 작은 상점들이 어깨를 맞대고 이어져있다. 우리는 미로 길을 통과해 부 이나니아 메데르사 신학교로 갔다.
이 건축물은 1350년에 세워진 것으로 신학교 또는 모스크였지만 지금은 역사적인 장소로 남아 있는 곳이다. 중정을 끼고 사방으로 방들이 연결되어 있다. 350여 명이 공부한 학교치고는 좁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학교라고 보기에는 너무 아름답다. 많이 퇴색했지만 대리석이 깔린 중정, 정교한 아라베스크 문양의 벽, 기둥, 문. 중후한 아랍천정 장식. 소박하지만 산뜻한 창. 이곳이 페스 사람들의 자부심이 될 수 있었음을 알겠다.

<페스의 전경>

우리는 이 신학교를 나와 일단 페스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도시 외곽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성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 본 페스는 노르스름한 흙집들이 여러 삶들을 끌어 안고 묵음(?音)의 아우성을 지르고 지르고 있는 듯했다. 한 곳을 지향하는 응집된 역사의 도시가 아랍의 세밀화처럼 농밀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9세기 이드리스 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정착하면서 도시의 틀이 갖추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필요에 의해 집과 길이 무질서하게 들어서고 또 적들의 침략에 대비하면서 페스에는 점점 그들만의 미로가 만들어졌다.
구도시의 반경은 2km 정도지만 9,000개가 넘는 미로의 길이가 70km에 달한다니 이 도시의 기이한 형태를 우리 같은 여행자로서는 상상도, 이해도 불가능한 것은 당연하다. 낮은 언덕을 등에 지고 푸른 미나렛이 반짝이는 모스크를 중심으로 페스는 너무도 고풍스럽다.
어느 여행객은 우리나라 달동네 같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비교를 할 수 있을까? 파블로 네루다의 표현을 빌린다면 결코 가난이 폭포처럼 엎어져 있는 경관은 아닌데 말이다.
오랜 시간과 함께 만들어진 이 도시의 정서를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품위 있는 당당함이 서려 있다. 다만 두꺼운 세월로 점철된 집들 위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접시형 위성 안테나가 기형적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도 아랍 도시의 새로운 문화 형태라고 이해하면 그리 눈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다시 메디나로 들어가기 전에 젤류지를 만드는 공장을 들렀다. 마사장님 입장에서는 꼭 빼고 싶은 장소겠지만 현지 가이드와의 보이지 않는 기 싸움으로 한번쯤 져주지 하는 심정으로 들르는 것 같았다. 모든 단체 관광객지만거치는 통과의례를 피해야 하는 고통을 마사장님 혼자 치르느라 고생이다.
터키에서도 똑같은 공장을 보았기에 별로 흥미도 없어 대충보고 나왔다. 물론 뒤통수가 뜨겁지만.... 그러나 처음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어린 소녀, 소년들의 손끝에서 그려지고 붙여져, 만들어져 나오는 예술품 탄생과정이 흥미 있을 수 있다.

<페스의 메디나>다시 메디나로 돌아와 본격적인 시장 구경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는데 온통 신경을 썼지만 좁은 길에 익숙해지자 모든 것이 흥미진진하다. 좁은 길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말 두 사람조차 나란히 걸을 수 없고 눈을 들어 올려 보면 길 건너편 집 지붕이 맞닿아 있다.
시장은 나름대로 철저히 특화되어 있다. 파는 물건과 만들어지는 수공업에 따라... 좁고 어두운 공방 속, 때 묻은 어린 소년의 손에는 두드려 광을 낸 멋진 주물 장식품이 빛나고 있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나를 아이는 초점 없는 눈길로 무심히 본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가마솥에서는 붉은 염색물이 펄펄 끓고 있다.
염색 골목에는 이 집, 저 집에서 흘러나온 다양한 색의 폐수가 도로를 적시지만 누구도 신경 쓰질 않는다. 붉은 고기들이 내걸린 정육점에 지그시 눈을 감은 낙타머리가 걸려 있다. 혓바닥을 빼어 문 낙타는 마지막 날이 된 오늘을 철학자 같은 표정으로 정리하는 듯했다.
형형색색의 올리브 절임을 파는 상점이 가장 이국적인 인상을 남긴다. 아랍 사회에서 결혼은 정말 큰 대사인가 보다.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신랑 신부를 위한 결혼 장식품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띈다.
공동 화덕에서는 구수한 빵 굽는 냄새가 풍기고 낡은 방직기의 불규칙적인 기계소리가 골목을 채운다. 넋 놓고 걷고 있으면 어김없이 당나귀의 콧바람이 귓가에 느껴진다. 오랜 노동에 단련되고 좁은 길에 익숙해진 당나귀는 자신의 눈만큼 온순해 아무런 위협이 되질 않는다. 몸만 비틀어 비켜주면 사랑스런 발자국 소리와 방울 소리를 내며 제 갈 길을 간다. 페스의 메디나는 인간의 모든 삶이 농축되어 녹아 있다.
결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평온이 고여 있다. 인간 본성을 위협하는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나 본연의 삶에 충실하며 욕심내지 않는 눈빛의 사람들이 옛것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여행 온 나도 잠시지만 그들의 일상에 합류하는 기쁨이 가슴 깊숙이 번져온다.
벌써 하교 시간인지 이 도시의 미래인 어린 아이들이 맑은 소리를 내며 학교에서 쏟아져 나온다.

드디어 카라윈 모스크에 도착했다.
이 도시 최고의 어른은 카라윈 모스크의 초록색 지붕과 미나렛이다.
페스 최고 볼거리며 상징인 모스크는 비무슬림인 우리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출입문을 통해 들여다본 모스크는 아주 정갈했다. 최근에 수리를 한 것 같다.
카라윈 모스크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슬람 3대 명문 대학(튀니지의 카이로우안 모스크, 이집트 알 아즈하르 모스크) 중 한 곳이다.
859년에 설립된 이곳은 13세기 초, 스페인에서 추방된 무어인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눈부신 발전을 했다. 무어인들은 예술, 자연과학, 천문학, 의학, 수학, 등의 지식을 전하고 발전시켰다.14세기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8,000 명이 넘는 학생들로 학문의 전당이 되었다.
현재도 옛날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모로코의 미래를 짊어진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으며 자부심도 대단하단다.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니 시장 사람들과 다르게 옷차림도 깨끗하고 영민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런 유서 깊은 장소를 공개하지 않다니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옹졸하고 미시적인 시각인 것 같아 섭섭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늘의 하이라이트 탄네리(Tanneries)로 갔다.
탄네리(가죽염색 작업장)가 가까워지면서 부패한 단백질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작업장 입구에서 말라비틀어진 박하잎이 달린 줄기를 나누어준다. 어둡고 좁은 계단을 올라 3층에 도달했다. 2층은 가죽 제품을 파는 상점이다.
그 유명한 낮 익은 풍경이 있다.
대작을 꿈꾸는 화가의 대형 팔렛트가 놓여 있다. 같은 크기의 둥글고 혹은 사각형의 웅덩이가 줄지어 서 있다. 악취를 풍기면서....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치명적인 매력으로 시각이, 후각이, 청각이 짧은 시간차를 두고 열린다.

<가죽염색 작업장 탄네리>

우선 선명한 여러 빛깔의 천연 염료들이 너무 예쁘다.
시각을 자극하던 요소에 익숙해지면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고약한 냄새에 후각이 심하게 작동한다. 박하 잎에 코를 박고 있다 보면, 구덩이 속에서 온몸으로 일을 하고 있는 말라깽이 남자들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도저히 인간이 견딜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감정 없는 연장 같은 동작으로 가죽과 함께 뒹굴고 있다. 사지가 잘린 가축의 일부를 밟고 뒤집고 치대고.... 반복적으로..... 그렇게 염색된 가죽들은 주변 건물의 벽이나 옥상에서 말려지고 있다.
행복의 상징 같은 레몬빛 가죽이 향기로운 냄새를 피울 것 같이 화사하다. 이곳만의 특별한 비법으로 만들어진 부드럽고 고운 색감을 내는 최상품 가죽은 유럽에서 인기가 높단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글을 보면 대부분 열악한 노동 환경과 힘든 노동 강도에 마음 아파한다. 하지만 꼭 그렇기만 할까?
천 년 넘게 이 방법으로 가죽을 얻는다면 분명 지금의 이 작업이 최고의 품질을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기술일 것이다. 우리 눈에 비합리적인 노동일지 모르지만 저 슬픈 눈망울 뒤에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이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는 신성함이 있다. 자부심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이 사회를 지탱하는 귀한 자존심이 있을 것이다.
이븐 할둔(1332∼1406년)의 역사서설을 보면 천 년 전에는 제화, 피혁이 문명이 번영을 구가하면서 분파된 고급 기술이었으며 북아프리카, 즉 마그레브 지역에서 가장 진보된 기술이라고 서술했다.
현재의 시각에서는 아주 원시적 기술처럼 보이지만 한 때는 컴퓨터 산업에 뒤지지 않는 선진 사업이었다. 그리고 그 기술로 천 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있다면 여행객의 감상적 느낌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경이로운 작업인 것이다.
박하 잎에 코를 박고 있는 우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남자들은 웅덩이에 선 채로 먹음직스러운 빵을 먹고 있다. 나 역시 냄새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비둘기 배설물이 가득 담긴 하얀 염색통이 자신들의 순서를 기다리며 순결하게 빛나고 있다. 우리는 30분 정도의 시간을 보냈는데 정말 질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쿠스쿠스>우리는 탄네리를 나와 페스 메디나의 중심 네자린 광장과 17세기의 대상 숙소를 구경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식당이 범상치 않았다. 허름한 골목 사이에 이런 집이 있다는 자체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그 옛날 프랑스 식민지 시절 양국 간에 평화공존 의정서가 체결된 역사적 장소란다.
은 홀과 화려한 장식들이 과거의 한순간을 붙잡고 빛나고 있었다. 이만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엄청난 금액을 지불해야 될 것 같아 여행사 걱정이 될 정도다. 아무리 생각해도 과용하는 것 같다.
요리는 꾸스꾸스였다.
타진(비행접시처럼 생긴 북아프리카 특유의 옹기그릇 요리의 총칭) 뚝배기에 먼저 곡물(밀, 조, 귀리 등)을 깔고 고기나 각종 야채, 견과류를 올려 찐 음식이다. 후각을 자극하는 향신료 냄새는 없지만 퍽퍽하고 특징 있는 맛도 없이 그저 담백하기만 하다.
너무 재미없는 맛이라 모두 심드렁해 하고 손이 가질 않는다. 한 번쯤은 이 나라 대표 음식이니 경험을 해봐야겠지만 두 번 찾지는 않을 것 같다. 마사장님도 예상을 하셨는지 “음! 역시 인기가 없군요.”하신다. 그러나 비싼 값은 음식으로가 아니라 식당 구경으로 충분했다.

이제 내일 튀니지로 넘어가기 위해 카사블랑카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마사장님이 예정을 바꾸어 기차를 타잔다. 버스는 홀로 보내고 기차라니? 정말 이 아저씨, 사업하는 사람 맞아? 기차 값이 만만치 않을 건데 이중 지출을 하니 말이다.
일본 여행객들이 그리 한다니 귀 얇고 경제개념 없는 아저씨가 일을 냈다. 그러나 솔직히 나도 귀가 솔깃했다. 이번 여행을 꿈꾸게 된 것 중 지중해 연안의 푸른 밀밭이 들어 있지 않았던가?
그 밀밭과 올리브 숲 사이를 가로질러 달려가면서 저녁 석양을 구경할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하겠는가? 마사장님 주머니 걱정을 하면서도 흥분은 감출 수 없었다.

<우리를 슬프게 한 기차>그러나.... 에이고!!!
어렵게 구한 1등석 자리는 일행을 철저히 흩어지게 배정되어 있었고 중복 판매까지 하여 자리싸움까지 났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모두 용서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결정적으로 나의 기대와 상상이 여지없이 무너진 것이다.
기차가 전혀 여행객을 배려하지 않았다. 창이 너무 작고 더 화가 나는 것은 청소가 되어 있질 않아 밖이 백내장 환자의 시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마사장님은 유럽의 기차를 상상하셨단다. 여행 중 있을 수 있는 시행착오지만 쓸데없이 큰돈을 써 약이 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모두 결과에 순응한다. 마사장님만 애가 탔을 것이다.
책도 보고 잠도 자다 밖으로 나가 열차 연결 통로에 서서 올리브 숲 사이로 사라지는 오늘의 햇님과 작별을 했다. 모로코에서의 마지막 햇님과 말이다.


1월 15일 (제 7 일) - 전설의 카르타고를 역사로 만나다 -

<로마 수도교>

4시에 일어났다. 7시55분 튀니지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다. 비몽사몽 정든 모로코를 떠나는 감상을 가질 새도 없이 눈 뜨고 정신 차리니 튀니지란다.
공항에는 한국 가이드 아저씨가 나와 있었다. 튀니지에서 한국 가이드. 놀라운 일이다. 현대판 유목민의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어딘지 선교 목적으로 이 나라에 들어온 것 같은 냄새가 났다.
이곳 여행사 여직원이 장미꽃 한 송이씩 나누어 준다.
붉은 꽃 한 송이가 이 나라에 대해 대책 없이 무장해제 되는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나를 더 감동시킨 것은 튀니지 전체가 담긴 지도를 나누어 준 점이다. 아랍권 여러 나라를 다녀보았지만 이런 서비스는 처음이다. 이 나라 주력 산업이 관광업이라더니....
지도를 받아들면서 나도 모르게 “I love Tunisia !"하고 외쳤더니 현지 가이드 아저씨 입이 귀에 걸린다.

우리는 튀니스로 들어가지 않고 도시 외곽의 한 식당으로 가 점심을 먹었다. 식당에서 걸어 5분 거리에 아주 흥미로운 유적이 있었다. 로마의 물 저장고였다.
서울 근교의 비닐하우스와 똑같은 반원형 콘크리트 구조물인데 신기할 정도로 잘 남아 있다. 유적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는지 어떤 보호 방벽도 없이 방치된 상태다.
그러나 멀리서 달려온 물길 수도교와 쌍을 이룬 세계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희귀한 유적이다.
아치형 수도교는 로마 점령지역에 상징처럼 있어 낯익지만 저장고는 처음 보았다. 흘러온 물을 일단 저장해서 다시 도시의 여러 곳으로 배분했는지, 아니면 단지 건기를 대비한 저장고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로마인의 과학적 사고와 2,000년을 버틴 콘크리트의 견고함이 놀랍다.
내 상식으론 로마의 콘크리트에는 아직 철근을 쓰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물 저장고>무너진 저장고 사이로 샛노란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수많은 시간을 함께한 꽃과 유적은 끈끈한 동지애로 깊게 연결되어 이곳 풍광은 그들만으로도 꽉 차 보였다.
갑자기 <비 맞은 풀은 춤추고 비 맞은 돌은 잠잔다>라는 고은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꽃과 유적은 시처럼 깊은 울림을 주면서 평화롭게 이곳을 지배하고 있다.
수도교를 따라 걸으면서 이 값지고 귀한 유산을 이렇게 함부로 밟고 다녀도 되는 건지 본능적인 죄의식이 심장을 옥죈다. 주변의 넓은 평원은 푸른 하늘 아래 낮게 엎드려선 깊게 침묵하고 있다. 모두가 공유하는 유적이 아니라 나만의 유적을 가져본 것 같아 이곳의 기억은 아주 특별할 것이다.

튀니지 최고의 유적지 비르사 언덕으로 갔다. 정확하게 이 땅에 남은 카르타고의 흔적과 기억을 더듬기 위해서....
낮은 언덕 중앙에는 아랍풍 몸체에 고딕 지붕을 가진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8차 십자군 원정길에 이 근방에서 사고로 죽은 프랑스 왕을 기리기 위해 1884년 프랑스가 세운 거란다. 이런 건물이 이 땅에서 본래의 기능을 갖기는 힘든 일이고 가끔 음악회가 열리는지 포스터가 벽을 덮고 있다.
언덕에는 로마의 유적 잔해가 어지럽게 널려 있고 차가운 공기와 함께 스산하고 허허로운 폐허지의 고독이 전해온다. 언덕 아래에 희미한 카르타고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물과 화재의 잔해가 남아있는 지층 정도가.....
<비르사 언덕의 로마 유적과 튀니스 전경>비르사 언덕에 남아있는 카르타고 와 로마, 십자군 이야기는 인류사에 대변혁을 가져온 나라, 사건이지만 세월이 흐르면 이렇게 모두 한 줄기 바람처럼 우리 곁을 머물다 간다.
여행객이 폐허의 유적지에 서면 상념에 빠지는데 특히 지독하고 서러운 역사에 깊은 애정을 느낀다. 지금도 반달족에 당한 로마인의 이야기보다 로마에게 당한 페니키아인의 아픔이 내 피붙이의 고통처럼 다가온다.

<카르타고의 상상도>지금까지 카르타고 하면 한니발, 포에니 전쟁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을 계기로 책들을 찾아보니 내 상식이 얼마나 치졸했는지 부끄러웠다.
기원전 8세기∼5세기의 지중해는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들이 양분하고 있었다. 지중해의 동부(현재의 이스라엘, 레바논 지역)에 살던 페니키아인들은 레바논 산맥을 등지고 좁은 해안 지역에 모여 살고 있었다.
이런 자연적 환경으로 페니키아인들은 바다의 확장과 교역만이 살길이었다. 필요는 발명의 아버지라고 영리한 페니키아인들은 교역 품목을 위한 산업화가 어느 민족보다 절실했다. 그래서 부가가치가 높은 직조술, 대장기술, 금은 세공업, 조선업 등이 발달했다.
유럽인의 꿈의 안료였던 붉은 색은 페니키아인들이 뿔고둥에서 최초로 채취했고(호메로스 이야기에 등장) 다채로운 직물, 카펫, 상아판 장식, 금잔, 은잔(호메로스는 ‘시돈의 잔’이라고 칭함. 시돈은 페니키아의 대표도시), 유리병, 유리장식 등이 지중해의 섬과 모든 연안으로 수출되었다.
이들의 배 만드는 기술은 세계 항해사에 큰 혁명을 가져왔다. 높은 뱃머리, 굽은 선미(船尾), 긴 노, 키, 돛을 갖춘 배를 타고 연안뿐 아니라 원양 항해의 기술을 연마해 어느 나라보다 일찍 멀리 나갔다. 특히 해류와 가장 빠르고 똑바른 해로를 잘 읽었다고 한다.
이렇게 지중해를 자신들의 앞바다로 만든 요인 중 가장 주목할 것은 역청(?靑 -천연산, 아스팔트, 타르)의 확보였다. 역청은 사해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 페니키아인들은 배의 방수와 누수를 막는 데 썼다. 놀라운 항해술로 지중해를 장악한 페니키아인들은 교역을 위해 22자로 단순화 시킨 알파벳을 사용해 지중해를 하나의 상업권으로 묶는 데 성공했다.
지중해 세력의 중심에 선 페니키아인들은 해상 원정을 위한 해외 거점 지역과 자원 확보를 위한 식민지 개척에 나선다.
결국은 구리, 주석 산지인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 북부 지역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그 중에서도 이 카르타고는 제2의 페니키아라고 불리울 정도로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지중해 극서 도시인 카디스, 티루스와 본국과의 중간 지점인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에게 영광의 상징이었다. 아직까지 중심 세력을 갖지 못한 원주민 베르베르인을 밀어내고 쉽게 눌러앉은 페니키아인들은 이곳에서 마음껏 자신들의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그 때,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지점이 바로 이 비르사 언덕이었다. 전설에는 페니키아 공주 엘리사(‘디도’라고도 불리움)가 이곳에 와 베르베르족과 흥정해 황소 한 마리의 가죽으로 덮을 수 있는 땅을 샀단다. 영리한 공주는 소가죽을 끈으로 잘라 이 언덕을 둘러 차지했다. 그래서 <비르사>란 말이 그리스어로 가죽을 의미하고 <보르사>라는 말은 페니키아어로 성채란다.
페니키아인들이 이곳을 차지하고 번성하자 비로소 민족적 단결력이라는 이상을 깨우친 베르베르인들이 이방인들을 끝없이 괴롭혔다. 그래서 전설의 결말은 베르베르인 추장의 청혼을 거절하면 카르타고인을 멸종시키겠다는 협박에 못 견딘 공주 디도는 자결을 택해 자신이 세운 도시를 지켜냈단다.

이곳에 정착한 카르타고인들은 투철한 상인 정신으로 다양한 문화를 수용한 국제 도시로 키워 나갔다.
기원 전 8세기 초, 페니키아 도시들이 앗시리아의 공격으로 힘들 때 많은 페니키아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 학자에 따라서는 카르타고가 바다에서 온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도시라고 주장하지만 구성원 중 다수는 분명 페니키아인이라는 증거가 더 많다.
하지만 이 비르사 언덕을 기점으로 인구 10만 정도의 아름답고 부유했던 도시는 화마로 뒤덮여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지중해 해상권과 북부 아프리카의 비옥한 곡창 지대를 탐내던 로마와 대결하면서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이 있어 로마는 더 지독한 복수를 했다.
1,2,3차 포에니 전쟁(BC 3∼2세기)에 걸친 전쟁 중에 나타난 한니발은 2차 (BC 219∼202년) 포에니 전쟁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본토까지 위협해 로마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 앙갚음으로 3차 (BC 149∼146년)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는 눈에 가시였던 카르타고를 철저히 멸망시켰다. 모든 주민은 학살, 노예화시키고 역청으로 단장된 높은 집들(6층 집도 있었단다)을 태우고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게 소금까지 뿌렸다.
그러나 이 증오의 땅에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 여기저기 싹이 트고 나무가 자라고 있다. 튀니지 땅이 된 비르사 언덕은 아름답고 고요한 지중해의 보살핌을 받으며 하얀 주택을 거느리고 평화로움에 잠겨 있다. 화려한 영광도 무자비한 증오도 또 현재의 안락한 평화도 언젠가는 끝난다. 그리고, 그리고, 또 다시 시작된다.

비르사 언덕 한 면을 차지하고 서 있는 국립 카르타고 박물관으로 갔다. 커다란 영광과 상처로 점철된 역사의 현장에 있는 박물관치고는 참 소박하다.
쇠락한 귀족 가문의 저택 같은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도 모두 빛을 잃은 추억의 산물같이 쇠잔(衰殘)하다. 풍요함이 넘쳤던 생활의 모습이 담긴 로마 시대의 섬세한 모자이크와 대리석 조각품이 대부분이다.
<카르타고의 토핏>이집트 박물관은 너무 많은 전시물로 창고를 뒤지는 기분이었다면 이곳은 순진한 유물들이 몸을 뒤집어 가며 겨울 햇빛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한가롭다.
그러나 조그마한 비석 앞에 서니 온몸의 잔털이 일시에 일어선다. 토핏(Tophet)이다. 5살짜리 아이가 처음 사람을 그릴 때의 모습인 도식화된 인간이 두 팔을 벌리고 서있다.
카르타고는 처음 바알 하몬이라는 신을 섬겼다. 그러다 BC 5세기 경, 갑자기 타니트라는 여신이 부상하면서 바알 하몬을 밀어내고 영적 혁명을 일으켰다. 타니트 여신의 형상이 바로 저 어설픈 인간 모습이다. 삼각형 정점에 수평선을 긋고 그 위에 원판을 올려놓았다.
르타고는 지중해 교역의 교차지로 세련되고 선진화된 사회였지만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종교적 신념은 원시적이었다. 적의 침공을 받거나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신에게 인신공양을 했다. 그것도 지도층 가문의 사내아이를...
간혹 노예의 아이들을 대신 희생양으로 삼기도 했지만 BC 310년, 시칠리아의 침략으로 비옥한 영토를 잃었을 때는 그동안 속은 것에 화가 난 타니트 여신의 저주라고 여겨 명문가 자녀 500명의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아이를 죽인 그 장소에 토핏을 세웠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동굴에 6,000여 개의 토핏이 있단다. 때때로 전쟁 포로 수 천 명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단다. 어떤 학자는 이런 잔혹한 종교의식에 놀라면서도 이스라엘 셈족을 따랐다고 본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신의 제물로 받치려 했듯이...
마야 문명의 전설 중에 높은 피라미드 위 지성소에서 왕과 왕비가 피의 공양을 하는 의식이 있다.
마약으로 환각 상태에 빠진 왕비의 혀를 왕이 송곳으로 뚫고 그 구멍으로 가시 박힌 줄을 통과시켜 피를 받는다. 그리고 그 피에 종이를 적셔 태우면서 신의 충고와 축복을 얻는다. 이런 행위가 엄청나게 야만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그들의 삶을 유지하고 싶은 욕망이 강렬했다고 나는 본다.
카르타고의 종교관도 마야인들과 똑같지 않았을까?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삶 속에서 현재의 평화를 영원히 이어가려면 자신들이 가진 가장 소중하고 신성한 것을 받쳐 신의 노여움을 잠재워야 한다는 원초적 본능이 있었을 것이다. 불합리한 우리 인간에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의 역사는 이렇게 무지와 미신적 역사 속에서 눈곱만큼씩 진화를 해 왔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종교적 이념으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한, 또 같은 하늘 아래서 굶어죽는 자와 목숨 걸고 다이어트를 하는 자가 공존한 현재의 우리를 황당하고 어리석은 선조로 평가할 것이라고 본다.
아니, 제발 그런 평가를 받기 원한다. 우리 후손들은 인종, 종교, 편견, 빈부차이가 없는 조화로운 세상에서 우리의 우매함을 회자(膾炙)하고 있으면 좋겠다.
박물관 정원에는 이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예쁜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그들을 보니 무거운 짐을 일시에 내려놓은 듯 머리가 개운해지고 마음도 가볍다.

<로마 안토니우스 욕장>버스를 타고 로마 목욕장으로 갔다.
안토니우스 욕장은 옛날의 영화를 다 벗고 누추한 뼈대만 드러내고 있지만 장중했던 기개만큼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 욕장은 로마 오현 시대의 정점이었던 하드리아누스(AD 117∼138년)황제 때 짓기 시작해 안토니우스 피우스(AD 138∼161년)황제 때 완성된 로마나 팍스(로마에 의한 평화)의 상징적 건축물이다.
거대한 로마 제국의 식량 창고 역할을 해 주는 이 튀니지 땅이 사랑스러워 로마 황제들은 이곳에 본토 욕장에 버금가는 시민 유락 시설인 목욕장을 건설했다. 소금까지 뿌려가며 모독했던 이 땅에 말이다.
그야말로 침 뱉은 우물물 다시 먹고 화환까지 걸어주었으니 세상사 한치 앞을 모른다는 말 로마 속담에도 있었을까?
현재의 욕장은 상층부 부분의 몇 개의 코린트식 기둥만 남아 있고 얽히고설킨 하부 구조의벽들만이 이곳의 존재감을 대변하고 있다. 욕장 한가운데 세 동강 난 붉은 화강암 기둥이 홀로 누워 옛 영화를 유추하고 있다.
중동 지역과 북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역사적 유적지들 사이에는 꼭 저런 붉은 화강암이 있다. 붉은 화강암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암석>으로 존경받았는데 생산되는 곳이 아스완의 채석장이 유일했다. 석회암, 대리석, 사암이 대부분인 이 지역에서 단단하고 멋진 빛깔의 아스완 화강암은 최고급 건축 자재였고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돌이었다. 람세스 2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스완 채석장의 책임자로 얼마동안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런 화강암이 이곳을 장식했다을 이 욕장의 의미를 새겨볼 만하지 않는가? 시리아 팔미라 유적지에도 아스완의 화강암 기둥이 누워 있었다.
2,000년 전 이곳 욕장의 상상도가 판넬이 되어 서 있다. 온탕, 냉탕, 증기탕, 맛사지실를 오가며 배불리 먹고 손가락으로 목젖을 자극해 토해 내면서 지중해 햇살에 몸을 말리며 향락을 즐기고 있는 로마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미셸 제라파가 <카르타고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곳이며 태양과 바다와 깡마른 암석의 시가 어우러져서 만들어내는 곳>라고 썼다. 이 유적지에 이보다 더 명쾌한 해석은 없어 보인다.

<시디 부 사이드>시디 부 사이드로 이동했다.
초록빛 바다, 하얀 집, 눈 시린 푸른 창과 문, 그리고 하늘. 세계인의 로맨틱 감성을 자극하는 곳. 너무 조용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사장님이 즉시 자유를 외친다.
그 소리와 함께 우리 일행들은 정해진 약속이 있는 사람들처럼 그 조용함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져 버린다.
우리 부부는 중선이를 앞세우고 마을 중심지를 피해 뒷골목으로 숨어들었다. 하얀 상자 같은 집 벽을 타고 붉은 부겐베리가 열심히 오르고 있고, 굳게 닫힌 깊은 푸른 문은 형광 빛이 강해 내 몸이 빠져들 것 같다.
하얀, 푸른 또는 붉은 대비가 극적이면서 너무 조화로워 대상 없는 샘이 난다. 질투심에 불타 트집을 잡자면 극적 효과를 염두에 둔 연출력이 너무 드러난다고 해야 하나?

<카페 데 나트>

그러나 이 모두 사악한 악마의 헛소리고 충분히 매력적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아까워하며 마을을 즐겼다. 단순하고 소박한 마을인데 정형화된 예술적 감각이 극대화 되어 보이는 운치가 있다. 아무래도 남다른 하늘을 갖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이곳 주민들은 어떤 삶을 사는 걸까?
관광객을 위해 항상 벽의 오염도를 체크해야 하고 푸른빛의 채도를 걱정하면서 보여주기 위해 존재해야 하는 자신들의 일상이 지루하지는 않을까?
그들도 우리처럼 바람과 빛이 만들어내는 자신들의 마을에 감동 할까?
이 마을엔 상인들만 있지 주민들이 보이질 않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커녕 개 짖는 소리조차 없다. 목소리를 거세당한 페르시안 고양이 같다.
거북이걸음을 걸었는데도 금방 동네 중심에 도달했다. 동네 중심지란 증거는 그 유명한 <카페 데 나트>가 보였기 때문이다.
많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카페는 실내와 야외 테라스로 구분되어 있고 테라스에는 겨우 5개 정도의 탁자가 전부일 정도로 좁았다.
<카페 데스 델리스>내 상상과 달리 카페는 지중해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시디 부 사이드 광장으로 올라오는 비탈진 마을 중심 거리가 내려다 보였다.
이 동네에서 관광객들로 가장 소란스러운 장소에 위치한 카페에는 옛 명성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소문에는 앙드레 지드가 이 카페를 무척 사랑했고 <지상의 양식>을 구상했다고 한다.
분명 앙드레 지드가 이곳을 사랑했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침묵과 하루해가 저무는 황혼의 자리, 싸한 외로움이 배여 있는 저 비탈길, 흰옷 입은 아랍인들의 경건한 얼굴, 박하향이 고여 있는 카페의 공기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앙드레 지드는 이곳보다 알제리를 너무 좋아해 튀니지에 도착하면 알제리 사막의 관문도시 비스크라로 내빼기 바빴다.

지중해가 한 눈에 들어오는 <카페 데스 델리스>로 가니 마사장님과 우리 일행 대부분이 와 계신다. 전주 왕 언니께서 우리 모두의 찻값을 계산하셨다.
지중해에 면한 절벽에 계단식 논처럼 탁자들이 놓여있고 외국인, 내국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태양과 바다를 즐기고 있다.
중선이와 신랑은 예쁜 여자들 구경까지.... 신이 났다. 마사장님이 물 담배 시샤를 권해 모두 돌아가면서 흡연이 아니라 시연을 했다.
고요한 지중해는 저녁의 순한 햇살을 받아 회청색으로 반짝인다. 신랑 코, 마사장님 코, 중선이 코에서 환각의 여운 같은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인다. 보고 있으면서도 이곳과의 이별이 안타까워 지중해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쉰다.
 

1월 16일 (제 8 일) - 외계인의 선물, 엘젬 콜로세움 -

<하마메트의 일출>

아침에 눈을 떠 테라스로 나가니 지중해로 둥근 해가 떠오르고 있다.
바다 위로 뜨는 붉은 해는 어디서 보나 똑같은 모양이다. 화려한 빛의 향연을 벌이고 있는 태양과 달리 이곳 풍경은 철 지난 바다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하얀 긴 백사장, 해변에 늘어선 낡은 갈대 파라솔, 작은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는 무념무상의 요트, 인적 없는 도로, 줄지어 선 야자나무 가로수..... 어제 시디 부 사이드를 뒤로 하고 이동한 하마메트는 지중해의 파라다이스란다. 제주도 중문단지와 너무도 흡사하다. 여름 시즌에는 유럽 관광객들이 몰려 자동차 정체로 몸살을 앓는다는데 이 적막한 경치 속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이야기이다.
우리가 묵은 호텔도 방에서 바로 지중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름답고 쾌적한 꿈의 휴식처지만 우리 외의 손님은 찾기 힘들었다. 성 하나를 우리가 전세 낸 것 같았다. 아직 이곳의 달콤함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고 아쉬워했더니 마사장님, 우리의 마음을 짐작했다는 듯 “튀니지 마지막 날 이곳에 다시 오니 걱정 마세요.”하며 즐거워한다.


오늘은 튀니지 국토를 가로질러 남으로, 남으로 내려간다. 리비아와 맞닿은 국경 지대까지 갈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튀니지 올리브숲>호텔을 출발해 고속도로를 달렸다. 튀니지는 국토 전체가 올리브 밭이라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끝없이 서 있는 올리브 숲을 보면 올리브가 왜 서양 신화의 모티브이고 생명의 근원인지 몸으로 느껴진다.
페니키아인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전까지 북아프리카는 석기 시대 수준이었다. 카르타고는 그런 원주민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과일 나무(올리브, 포도, 무화과, 아몬드, 석류 )의 전래와 영농기술, 포도주 양조법, 공예기법, 복식 (넓은 소매 달린 긴 튜닉과 망토) 등등 중동의 과학적 기술을 그대로 옮겼다.
특히 이곳 기후와 토양에 적합한 올리브 농사는 이곳을 지배하는 모든 나라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마그레브 국가 중, 면적으로는 작은 나라지만 튀니지 땅은 모두가 탐내는 복권이 되어 버렸다. 카르타고, 로마, 비잔티움, 아랍, 오스만 투르크, 스페인, 프랑스..... 저 작고 푸른 열매는 이 땅의 영광이며 고난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여러 종족과 문명이 충돌한 뒷면에는 의식의 확대와 문화의 다양성이 이루어낸 유산이 남기도 한다.
오늘날의 튀니지는 주변 국가, 리비아, 알제리에 비해 안정된 사회망이 구축되어 있다. 19세기 유럽 열강의 식민지가 되기 전의 알제리, 리비아는 튀니지에 비해 조직화된 국가가 존속한 역사가 없다.
두 나라는 유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다(리비아-이탈리아, 알제리-프랑스). 또 그들이 떠난 뒤에는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의 논쟁에 휩싸여 나라 발전의 걸림돌을 만들었다.
그러나 유연한 사고를 가진 튀니지는 이미 1850년대에 아랍 세계 최초로 노예 제도를 철폐 했고, 오랜 타협과 외교 공세로 유혈 없이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1956년).
독립 후에는 하비브 부르기바(1903∼2000년)라는 걸출한 대통령이 있어 극단적 종교에 얽매이지 않은 열린 정치를 했다. 다양한 문화를 수용한 단일 문화권이 형성된 튀니지는 국민을 동원하고 질서를 유지하는데 주변 국가보다 훨씬 유리했다.
하비브 부르기바 대통령은 터키의 케말 파샤와 항상 비교된다.
그러나 이런 멋진 대통령도 말년에는 이 나라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망상에 독재를 하다 쫓겨나 연금 상태에서 죽었단다. 우리나라도 이런 비슷한 사람이 있었지? 아마도.....
그는 일부일처제, 희잡의 의무조항 철폐, 이슬람법 법원 폐지, 모든 이슬람 교육기관 공영화 등 이슬람 전통과 다른 사법체제를 지향했다. 특히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적극 권장해 오늘날의 튀니지에는 다양한 분야에 여성들이 활동하고 있다.
얼마 전 조선일보에서 튀니지의 여성 장관이 우리나라를 방문해 인터뷰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장관은 튀니지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판사의 27%, 변호사의 31%, 의사의 42%가 여성인 것을 자랑했다.
여권신장 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낫다. 1998년, 법에 따라 미혼모에게 자신의 성까지 물려 줄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튀니지가 세계에서 6번째로 아동보호법을 제정한 나라라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이런 열린 사고는 부유하지는 않지만 두터운 중산층을 가질 수 있게 했다. 또 로마시대에 건설된 도로망은 지금도 유용해 아프리카 어느 나라보다 교통망이 잘 되어 있어 이동에 편리하다. 이러니 이 세상 인간사, 영원한 비극도 영원한 희극도 없는 것이다.

<엘젬 경기장>버스가 고속도로에서 내려 도착한 곳은 엘젬이었다.
처음 로마의 이 엘젬 경기장 사진을 보았을 때 충격을 받았었다. 아무리 아프리카가 로마의 땅이었다고 해도 거대한 콜로세움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권력의 중심지, 지중해 연안과 떨어진 곳에 말이다.
그런 건축물이 바로 내 눈 앞에 있다. 사진 속의 모습보다 실제의 모습은 더 감동적이다. 싸이즈만 로마의 콜로세움보다 작지 쌍둥이처럼 똑같다. 아니 형체는 더 완벽하게 남아있다.
더욱 즐거운 것은 이 경기장 모든 곳이 내 발길을 허용한다는 점이다. 278년에 완성된 경기장은 1,700여 년을 버티고도 그 웅장한 기운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1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다.
이 지역을 거쳐 간 많은 세력들도 찬사와 존경을 표했을 것 같다. 지하에는 검투사와 맹수들이 대기 했던 작은 방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경기장으로 곧장 들어가는 엘리베이터 시설도 있다.
이 일대가 로마시대 최고의 사자 공급지였음을 감안하면 이 방들 가득 야성이 살아있는 건강한 맹수들이 가득했을 것 같다. 경기장을 뱅글뱅글 돌아 가장 높은 3층에 서서 원형 경기장 전체를 내려다보면 전율도 느끼지만 이 거대한 건축물이 왜 이곳에 세워졌는지가 더 궁금해진다.
이 거대한 유적을 이렇게 온전한 모습으로 품고 있는 현재의 엘젬은 너무 초라했다. 인구 15,000명 정도의 엘젬은 이 원형 경기장과는 아무런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소박하다. 오히려 거대한 신의 모습을 한 유적에 치여 납작 엎드려 있는 형상이다.
그러나 이 도시의 역사는 화려했다.
카르타고 시절에 생겨난 이 마을은 작은 촌락에 불과했지만 BC 45년, 카이사르가 이곳에 퇴역 군인들을 이주시켜 올리브 농사를 짓게 했고 항구 도시 수스와 스팍스를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도시로 키웠다. 로마시대 이 도시의 이름은 티스드루스였다.
특별 로마시민권까지 부여받은 이 도시의 부는 본국 로마인의 사치스러운 생활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그 증거가 바로 이 콜로세움이다.
이 경기장이 간혹 황제의 연회장으로도 쓰였다고 하니 이곳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황제의 부도 아니고 아프리카 외딴 도시 상인들의 돈으로 만들어진 이 건축물은 보이는 것을 넘어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경기장에는 슬픈 이야기도 숨어있다. 8세기, 아랍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주변 베르베르족을 규합한 한 여인의 한이 서린 곳이다.
알 카히나라는 여 족장은 아랍인과 맞서 싸우다 수적 열세를 극복 못하고 이 경기장까지 밀려왔다가 결국 동료 모두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 후 이 땅은 완전히 바그다드 칼리프의 세력권에 놓이게 되고 모두 무슬림으로 개종을 하게 된다.
<해바라기가 된 중선이>이런저런 이야기와 상관없이 중선이는 스탠드 한 쪽을 차지하고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투명하고 따뜻한 햇살이 아이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더듬고 있다. 이곳이 마음에 쏙 든단다. 떠나기 싫단다. 마사장님이 이제 길을 텄으니 다음에는 혼자 배낭여행 와서 여유있게 즐기라고 용기를 준다.
신랑 옆구리를 찔러 노래를 부르게 했다.
몇 년 전, 시리아와 레바논을 갔을 때 5개 정도의 로마 야외극장을 방문했다. 특히 보스라 극장은 너무도 아름다워 <로마 극장의 아프로디테>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런 멋진 무대를 보기만 하고 떠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속이 탔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신랑을 꼬드겼다.
“자기야! 나 사랑하지? 무슨 짓이든 내가 원하면 다 해줄 거지?”
“왜! 왜! 무섭게 왜 그래.”
“이 노래 배워 꼭 불러줘. 응?”
안드레아 보첼리가 부르는 <카루소>를 들려주었다.
놀래 자빠진 신랑 왈. “야! 돌았냐? 심청가가 낫겠다.”
“그래? 좋아. 그럼 심청가로 해, 꼭 연습해.”
그리고는 잊어버렸는데 하루는 전화가 왔다. 도저히 역부족이니 실현 가능한 노래로 바꾸어 달라고....
약간 화도 나고 웃기기도 했지만 그 때 마침 TV에서 멋진 이서진이 김정은을 위해 임재범의 <고해>을 부르고 있었다.
“자기 자꾸 이러면 아웃이야. 이제 진짜 마지막이다. 임재범 <고해> 연습해”
“네! 알겠습니다. 그런 노래쯤이야.”
그러나 자꾸 들어보니 그다지 노래가 마음에 들지도 않고 무엇보다 젊은 애들을 따라하는 것도 낯간지러웠다.
한 달쯤 뒤, “자기야! 노래 바꾸자”
“진짜? 야! 그 노래 생각보다 힘들더라 ”
“그렇지? 강산애 <연어> 어때?”
“그 노래가 백 번 낫다.
하지만 원체 노래 실력이 없어서인지 여행 오기 전에 시켜보니 강산애가 부를 때는 그리도 멋진 노래가 아주 장타령이 되어 있었다.
“그냥 자기 18번 중에 하나 불러... 김종찬 <산다는 것은>”
다행인 것은 이 콜로세움이 너무 커서 보첼리가 아니라 파바로티가 와도 이 경기장을 채울 수 없다는 점이다. 듣는 사람 없어도 나를 위해 신랑은 열심히 불러주었다.
“아이구! 구여운 내 신랑!!”
그러나 다시는 아무리 로마극장이 탐이 나도 신랑을 세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앙드레 지드도 이곳에 왔었다.
마차를 타고 한밤중에 도착한 이 도시에서 잠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생했고 각혈을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빴었다. 다음 날 잔뜩 흐린 날씨 속에서 이 경기장을 보고 실망했다고, 추해 보인다고 썼다.
너무 지루해 돌아다니면서 돌 위에 새겨놓은 글씨가 있나 하면서 찾아다녔다. 평범한 감성의 소유자는 아니라고 이해해도 참 불쌍한 아저씨다.
이곳까지 와서 날씨 타령만 했으니.... 하기야 아무리 멋진 여행지라도 몸이 아프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드는 이곳을 다녀간 후 생사를 넘나들 만큼 아팠었다.
나는 주변과 너무나 동떨어진 세상 속에서 홀로 로마의 영광을 추억하고 있을 이 유적이 딱해 가슴 아플 것 같다. 경기장을 나오니 동네 어르신 몇 분이 계단에 앉아 우리를 구경하고 계신다.
갑자기 이 경기장의 존재는 외계인이 이 분들에게 준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선물이라고 주어 받기는 했지만 도대체 무슨 용도로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 그냥 던져둔 물건.
그런데 그 물건이 신기하다고 자신들과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구경을 온다.
자꾸 보니 구경 온 인종이 더 신기하게 생겼구만.....

부질없는 애련(哀憐)한 마음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고속도로가 끝나는 스팍스에서 점심을 먹고 거친 국도를 따라 또 달렸다. 사막도 아닌 황폐한 풍경은 어떤 사유(思惟)도 생기지 않는다. 해변은 모래도 갯벌도 아닌 메마른 진흙으로 덮여 있다.
간혹 있는 올리브 나무도 이곳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고전분투하고 있다. 모든 것이 보기 안쓰럽게 말라 있다. 생명체에게 무자비한 풍경은 나도 모르게 한숨짓게 한다.
현지 가이드로 나온 쏘꾸리 씨도 긴 이동에 어지간히 심심했던지 우리 이름을 튀니지 식으로 뜻풀이를 했단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의 의미를 기분 좋은 말만 골라 해준다. 무료함에 주리를 틀다가 신선한 웃음으로 버스 안이 환해졌다.
내 이름은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란다. 족집게 아저씨다. 매사에 감사해 하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으니깐....
조금은 특별해 눈에 잘 띄는 편이라 학창시절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난 내 이름이 좋았다.
신랑이름은 <당신을 위하여> ㅋㅋㅋㅋㅋ...... 우리 시아버님 <지구의 평화를 위하여> 같은 이름을 지으셨더라면 더 큰 자식을 보셨을 덴데......
중선이는 <내적 아름다움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란다. 중선이는 자기 입으로 딱 맞추었다고 좋아라 한다. 아부성이 난무하는 특별 이벤트로 지루한 길이 조금 짧아졌다.

<사랑스러운 호텔><사랑스러운 호텔>

드디어 호텔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달려온 삭막한 길 끝에 이런 사랑스러운 호텔이라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특별한 호텔이었다. 타타윈 마을의 외곽 지대에 위치한 호텔은 방가로 형태로 귀여운 오두막이 그림처럼 오밀조밀 사이좋게 서있다.
방은 아프리카의 낭만을 담은 운치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동적인 건 따뜻하고 포근한 잠자리.... 이 작은 배려가 인생을 황홀하게 한다. 짐만 방에 들여놓고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호텔 뒤에 있는 산에 올랐다.
버스에 시달린 굳은 몸을 풀고 싶었다.
소박한 타타윈의 야경이 사막에 갇혀 타성에 젖은 느린 몸짓으로 밤을 부르고 있다.
내 집에서 참 멀리도 왔다.
  

1월 17일 (제 9 일) - 단순한 삶이 향기로운 베르베르인들의 마을 -

편안한 잠자리로 그동안의 피로가 다 풀렸다.
달고 깊은 잠을 자고 여유 있게 일정표를 들여다보니 벌써 여행이 끝나가고 있다. 아깝고 안타깝다.
중선이 엄마는 깨워주지 않으면 절대 못 일어나는 아들을 걱정해 커다란 왕눈이 달린 자명종 시계까지 챙겨 보냈지만 중선이는 한 번도 늦잠을 자지 않았다.
공항에서 볼 때 여리고 조금은 걱정이 될 정도로 우울해 보이던 낯빛이었는데 현재는 맑은 미소가 살아있는 건강한 청년의 모습으로 여행을 즐기고 있다. 음식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잘 먹는다.


마사장님이 이 근처에 아주 매력적인 마을이 있다면서 들러 보잔다. 물론 거부할 이유가 없다.
바싹 마른 골짜기 몇 개를 돌아드니 천 년 전쯤 이미 자신의 모든 수분을 증발시켜 버린 듯한 산에 소박한 흙집들이 유적처럼 폐허처럼 힘들게 붙어있는 마을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 분위기가 참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끈다. 산꼭대기에 하얀 모스크가 인상적이긴 하지만 결코 이곳의 풍경을 지배하진 못했다. 인간이 떠나가 버린 서러운 빈 집과 따뜻한 가족의 냄새가 향기로운 집들이 특별한 구분 없이 공존하고 있다.
아랍인들이 이 땅에 쳐들어왔을 때 베르베르인들은 그들을 피해 이곳까지 숨어들었단다. 세상의 끝 같은 이 척박한 곳으로....
고독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아침 햇살을 받은 마을은 느리게 깨어나고 아직은 신선한 맑은 공기가 이곳을 감싸고 있다. 몇 몇 아이들이 학교를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우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우리는 구불구불 이어지는 좁은 길을 따라 정상에 있는 집까지 올라갔다. 나귀를 끌고 가는 젊은이도 만나고 아침 준비로 바쁜 아주머니와 마당을 공들여 쓸고 있는 새댁도 보았다. 그들 역시 우리에게 관심 없다. 이른 아침 이곳을 찾은 외국인들을 대하는 이들의 무관심은 의외다.
빈 집이 더 많다. 온기가 사라진 너무도 허술한 집이 짠하다. 기형도가 말하는 가엾은 사랑, 더 이상 내 것이 아니 열망,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라도 조금 남겨 놓고 떠나지.....

나는 맨 꼭대기 빈집 담장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의 끝 같은 이곳에서도 나의 하루와 별 차이 없는 삶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나그네의 감상적인 마음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나와 너무 다르다.
<베르베르인의 마을 체니니>눈 뜨는 순간부터 해치워야 하는 일상들로 꽉 찬 내 하루는 그야말로 행복하지 않아서 만든 불행한 서두름으로 바쁘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구차함에
목매지 않는 예정된 삶을 꿰뚫고 있는 성찰의 여유가 있다.
자연을 파괴하고 얻은 성공한 도시의 거대함에 짓눌려 우리는 그의 존재를 위해 달려야 한다. 도시가 주는 달콤함에 중독된 우리는 그에게서 벗어나기는 죽기보다 힘들다.
우리는 나쁜 부모를 만나 원초적 감각을 잃었다. 인터넷과 책이 아니면 나의 본성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내 감각조차 신뢰해야 하는 방법을 모른다.
우리는 많은 스승은 두었지만 존경할 대상은 잃은 지 오래다. 그러나 이 마을 사람들은 스승은 없지만 자신들의 운명을 존경하면서 사는 조화로움이 있다.
겸손한 삶으로 충만한 이곳이 참 좋다. 저속한 예술품과 오만한 문화가 내뿜는 악취 한 점 없는 이곳은 감미로운 청정지대다.
우리는 이 마을과의 짧은 만남을 긴 이별로 아쉬워했다.
크사르 올레드 솔탄으로 이동하면서 보니 가끔 군인 벙커가 눈에 띄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롬멜 장군과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이곳에서 대치하고 싸운 흔적이란다.
전쟁 고수들이 무언의 울림으로 가득 찬 이 땅에서 정말 싸우고 싶었을까? 낮에는 싸우지만 밤에는 부질없는 욕망이 부끄러웠을 것 같다.

<크사르 올레드 솔탄>우리가 먼 이곳까지 온 진정한 목적은 크사르 올레드 솔탄이다.
야트막한 언덕 위, 인적 없는 몇 채의 집들이 모여 있는 작은 광장을 지나 좁은 입구를 통해 들어서니 낮 익은 풍경. 귀여운 창고들이 나타났다.
강아지 집들을 한 층, 한 층 쌓아올린듯한 모습. 아침 햇살을 듬뿍 받아 오렌지 빛으로 물든 기이한 건축물은 동화 속 풍경을 만들고 있다.
장난감 같은 건축물에 약간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아프리카인들의 낙천적 순수함이 배어 있는 특별한 유적은 여행객들의 동심도 자극해 모두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숨박꼭질 하듯 창고를 뒤졌다. 텅 빈 창고지만 벽면에는 풍작을 의미하는 표시나 손바닥을 찍어 인간의 흔적을 남겼다.
17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건축물이니 세계 역사에 족적을 남길 만한 위대한 흔적은 결코 아니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지혜로운 생명력은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책을 뒤지다 보니 반복적으로 자주 나타나는 단어가 <메디나> <카스바> <크사르>였다. 책을 읽다 보면 글쓴이들조차 습관적으로 혹은 맹목적으로 사용해 더욱 머리 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메디나>는 기본적으로 무슬림이 조성한 방어형 도시다.
성벽 안에 모스크를 중심으로 광장, 관청, 수크(시장), 주택가, 공방 등이 조밀하게 모여 있다. 그러다 인구가 늘어나면 성벽 밖으로 도시가 팽창하면서 성벽 안 도시, 메디나는 구시가지가 되어 도시의 한 구역으로 그 의미가 축소된다.
<카스바>는 군사 방어적 요새의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대부분 언덕 위, 항구 길목 등에 위치하고 대체로 한 가문에 의해 도시가 유지된다. 그러나 알제리에서는 도시의 오래된 구역을 카스바로 지칭하기도 한다.
<크사르>는 마그레브 지역 사막의 오아시스 주민의 전통적 촌락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모스크, 창고, 집으로 구성되며 이곳 역시 방어적 성격이 강해 성벽으로 둘러 쌓인 곳이 많다.
그러나 카스바에 비해 규모가 작고 크사르마다 특정 직업군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빵, 세공, 목공 등...
이들의 목숨과 같은 식량을 저장한 창고는 크사르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어 이렇게 요새 속의 요새를 만들어 지킨 것이다.
이 지역 베르베르족을 끝없이 괴롭힌 사람들은 유럽 정복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사하라 사막의 최고 약탈자, 투아레그족이었다.

<크사르 올레드 솔탄의 성자들>창고 같은 크사르를 구경하고 나오니 조그마한 광장에 노인들이 모여 햇빛을 쬐고 계셨다. 카샤비아를 입은 모습이 모두 마법사 같다.
우리를 관심 있게 보고는 있지만 표정은 살아있는 화석처럼 견고했다.
우주의 중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 동네에서 인생 대부분을 저렇게 보내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알베르 카뮈의 글귀가 떠오른다. <인생은 건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연소 시켜야 할 대상이다>.
나는 갖고 있던 사탕을 심심하신데 드시라고 한 분에게 내밀었다.
아!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깊게 주름진 성자의 얼굴을 지닌 노인은 정중한 표정으로 손가락 하나를 들어 좌우로 가볍게 흔들면서 단호한 “NO!"를 표시했다.
순간 당황했지만 그 몸짓이 어찌나 근사한지 한 번 더 보고 싶을 정도였다.
나도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예의를 갖춰 물러섰다.
주위의 모든 분들 시선이 나에게 모아졌지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어르신은 한 분도 없었다. 느낌 상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둬.”
“당신은 나의 햇빛을 가리고 있어.” 정도랄까?
용서, 희망, 평화, 박애, 순결, 순명, 숭고......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인가? 이곳에서는 먹고, 자고, 숨쉬고.... 인간의 기본적인 행위만이 진실이고 자유이며 이상인 것이다.
그동안 갈고 닦은 나의 이성적 상식과 예술적 취향이 퇴폐적 쓰레기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곳을 오염시키지 말자는 생각에 빨리 떠나고 싶었다. 이렇게 나는 오만의 옷을 한 겹 벗었다.

<마타마트의 지하 동굴집>다시 북쪽으로 길을 잡아 마타마트로 갔다.
동굴 형태의 베르베르족 주거지가 밀집되어 있는 마타마트는 철 지난 해변처럼 조용하고 쓸쓸했다.
우리는 동굴집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시디 드리스 호텔로 갔다. 땅을 뚫고 들어간 지하에 둥그런 하늘을 가진 중정이 있고 벽을 파 만든 방들이 줄지어 있다. 더위와 추위를 피하기 위한 인간 지혜의 산물인 이 동굴 집은 지구상 여러 곳에 있지만 지하에 넓은 마당까지 끌어들인 점이 흥미롭다.
<스타워즈> 촬영 진들이 묵으면서 촬영 셋트장으로 썼다는 호텔은 너무 어설퍼 호기심만으로도 별로 머물고 싶지 않다.
호텔 여기저기 영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굴 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둔한 철문과 벽장식은 아무리 보아도 그 자체가 오염이다.
호텔을 나와 똑같은 형태의 민가에 들어 가 보았다. 얼굴 전체에 깊은 문신을 한 할머니는 익숙한 일과처럼 허브 티와 볶은 콩을 내오셨다. 사진도 즐겁게 찍으시고 콩 맛도 고소해 우리 일행 모두 기꺼이 팁을 내놓았다. 상술의 도를 넘지 않는 이런 환대는 여행자를 행복하게 한다.

마타마트를 뒤로하고 이번에는 서쪽의 도우즈로 향했다.
튀니지 쪽 사하라 투어의 관문인 도우즈로....
몇 번 졸다보니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와 있었다. 우람한 대추야자 숲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도우즈의 사하라>점심을 먹고 본격적인 사막투어를 하기위해 나섰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사막과 너무도 달라 당혹스러웠다.
관광 1번지가 되어버린 사막은 사막의 진정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모래가 아닌 흙먼지가 무시로 일고 낙타를 타고 이동하면서 보니 낙타 배설물이 분해되어 사막 전체가 검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낙타몰이꾼이 계속 나에게 “즐겁냐? 행복하냐?” 물어본다. 우리 속담에 <도둑이 제 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듯 이들도 자신들의 사막에 자신감을 잃은 것이다.
그들도 사막의 비극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신의 정원을 모독하고 조롱한 죄를 알고 있었다. 어떤 변명도 필요 없이 100년 정도 이곳을 폐쇄해 사막 스스로 정화될 수 있게 시간을 주어야 할 것 같다.
마사장님도 실망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모로코의 사하라가 그립다. 도우즈의 사하라는 테마세이에서 퇴출될 운명이 확실해 보인다.

<소금호수의 일몰>

이제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 토제우르로 간다.
토제우르로 가는 길이 흥미롭다. 길고 긴 호수를 가로질러 가는데 그 호수가 소금밭이란다.
그런데 우기가 아닌 이 계절 염호, 엘 제라드는 소금밭이라기보다 진흙 덮인 갯벌에 가까웠다. 가끔 소금을 끌어 모아 놓은 곳도 있지만 호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이 외롭고 처량해 보이는 막막한 풍경이다.
해가 지면서 기류가 바뀌는지 바람까지 미친 듯이 불어댄다. 모든 생명체를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잔인한 풍경 속으로 해가 지고 있다. 보통 석양이 아니라 핏빛보다 더 지독한 붉은 빛은 기괴했다.
무조건 차를 세우고 걷기로 했다.
앞서가는 우리 일행들마저 핏물이 들었다. 이 노을은 하루의 노동으로 지친 육신의 휴식을 주는 신의 자비로운 의식이 아니라 내려앉은 먹구름이 흘리는 신의 피눈물 경고였다.

북아프리카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는 가난한 자들의 종교였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민중 사이에서 기독교는 미신적 요소가 많이 포함된 이교적 기독교로 퍼졌다.
그 대표적 이교(異敎)가 도나투스파다. 도나투스는 몽매한 군중을 선동하여 지지자를 모았는데 그 첫 설교의 배경이 바로 이 소금밭이었다.
황량하고 서러운 이 땅에 저 붉은 노을 밑에서 믿음을 의심하는 신이 분노한다면 그 어느 누가 절대 복종을 서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급진적인 종교 단체는 7세기 이슬람 군대가 들어올 때까지 농촌 지방에서 번창했다.
오늘의 일몰은 이집트 백사막과는 다른 의미로 나를 지배할 것 같다. 우주를 관장하는 절대자는 무한한 사랑과 함께 사이코패스 같이 무정한 고뇌도 던진다.

오늘 묵을 호텔은 작은 오아시스 도시에는 있을 것 같지 않게 근사하다.
오늘 하루 여러 곳을 들렀지만 우리 이외의 관광객을 본 적이 없는데 호텔은 서양인들로 꽉 차 있어 놀랐다.
마사장님이 저녁식사는 호텔식이 아니라 특별한 곳으로 모시겠단다.
버스를 타고 가난한 민가를 지나 도착한 곳에는 큰 성이 버티고 있었다. 높은 성벽에 왕궁의 정문 같은 육중한 출입구는 이곳의 정체를 의심하게 한다. 레스토랑의 넓은 뜰은 건장한 야자수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깊은 하늘에는 주먹만 한 별들이 유난히 반짝거린다.
우리는 긴 뜰을 지나 베두인 천막으로 안내되었다.
정겨운 화톳불이 발그스름한 빛을 내며 우리를 맞는다. 별이 쏟아지는 밤, 훈훈한 텐트, 아랍인들의 미소와 연주, 사막의 낭만이 여행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함선생님이 오늘의 멋진 밤과 며칠 전에 지나간 자신의 환갑을 기념해 포도주를 쏘시겠단다. 즉석에서 생신 축하 노래도 부르고 행복한 여행이 끝나가는 아쉬움과 평온함을 즐겼다.
음식이 나왔다. 언제나처럼 바게트 빵과 샐러드가 나왔다. 늦은 저녁이라 모두 시장해서인지 수북이 쌓여 있던 빵이 바닥을 보였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한참을 기다려 나온 음식이 과일과 티였다.
모두 서로 말은 못하고 특별한 식당이라 음식 중간에도 이런 후식이 나오나보다 하며 달콤한 대추야자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음식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분위기가 묘했다. 써빙하는 사람들 태도도 이상하고....
현지 가이드, 마사장님이 몇 번 뛰어다니더니 식당에서 메인요리 내놓는 것을 잊어버렸단다.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지나간 것은 어쩔 수 없고 오늘 요리는 끝이란다.
다시 준비하기에는 너무 늦고 오래 걸린단다.

<대단한 시장님의 레스토랑 정문>처음에는 모두 멍했지만 그것도 잠시 다 뒤집어질 정도로 재미있어 했다.
식당에서 그것도 이 도시 시장이 운영한다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메인요리를 잊어버렸다구?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그걸 잊었다구?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있을까?
마사장님은 당혹해 어쩔 줄 몰라 하시지만 우리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었다. 유쾌한 해프닝에 즐겁기만 했다. 이 나이쯤 되면 저녁 한 끼 정도 건강을 위해서 굶어도 괜찮다.
부랴부랴 호텔로 돌아와 뷔페 식당으로 갔다.
윈래 이곳에 예약되어 있었는데 마사장님 또 이중 지출을 해 가며 우리에게 새로운 체험을 해 주려다..... ㅎㅎㅎㅎㅎ......
다시 식사를 하시라고 권했지만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사양을 하시고 방으로 올라가셨다.
우리는 중선이를 먹여야 할 것 같아 식당으로 갔다.
세상에! 지금까지 본 요리 중 최고다.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한 걸 보니 더 재미있다.
나도 중선이 덕에 잘 구워진 왕새우 2마리를 해치웠다.
오늘 하루 마사장님. 천국과 지옥? 아니, 온탕과 냉탕? 하하하.....
참! 시장님 식당에 선불로 지불한 식사비는 받지 못한단다.
왜? “인샬라” 신의 뜻이므로.
긴 하루가 갔다.
제법 굵은 빗방울이 오아시스의 밤하늘을 적시고 있다.
비는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리드미칼한 아프리카 축제를 열고 있다.
  

1월 18일 (제 10 일) - 튀니지에는 귀여운 그랜드 캐넌이 있다 -

어젯밤의 비로 대지의 공기는 한층 신선하고 상쾌하다.
호텔 앞에 지프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하라 사막 속 오아시스 마을을 찾아 나섰다.
불모의 땅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래도 오늘은 나무 한 그루 없지만 오랜 세월 속에 깎이고 풍화된 공룡 등뼈 같은 산들이 있어 차창 밖 풍경이 꽉 찬다.
실지로 이곳은 지구의 역사에서 전설 같은 모습을 간직한 지형으로 현재와 같은 대륙이 생기기 전, 한 덩어리였을 때의 지질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원시 지형이다.
또 하루에 500kg씩 풀을 먹던 40톤짜리 공룡이 뛰어다니던 장소이다.


첫 번째로 방문한 마을은 체비카였다.
사막 한가운데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마을은 생각보다 컸다.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주차장에서부터 기념품을 파는 아이들이 몰려왔다.
체비카는 단순한 오아시스 마을이 아니었다.
마을 뒷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제법 큰 내를 이루고 작은 호수, 폭포까지 만들며 흘러간다. 에메랄드빛 호수의 물도 인상적이다.
모래사막에 갇혀있는 오아시스라고 믿기 힘든 풍광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나 보다.
영화 속 주인공이 겨우 사랑하는 여인과 미래를 꿈꿀 수 <오아시스 마을 체비카>있게 되었지만 사막 가운데에서 사고가 나고, 다친 여인을 두고 구조 요청을 하러가야 했다.
그 여인을 두고 떠난 동굴은 너무 작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너무 실망스러워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로 들린다.

동네 한 바퀴를 도는 동안 계속 따라다니던 아이들은 이제 본업을 포기하고 우리랑 논다. 물론 예쁜 막대 사탕의 효과지만.....
뒷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니 천혜의 요새다.
사방 망망대해 같은 사막 가운데 풍부한 물과 봉화대를 설치할 만한 언덕이 있으니 방어적 요새로 최적이다. 그래서 카르타고, 로마의 병참기지였단다.
언덕 위에 있던 마을은 주민들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폐허가 되었다.
작은 오아시스 마을은 한 나라의 역사만큼 유구한 기억을 품고 있었다.

<미데스 협곡>다시 차를 타고 미데스 협곡으로 갔다.
분명 특별한 협곡이다. 왜? 아프리카니깐.
그러나 세계적인 협곡들에 비하면..... 양심 있는 이곳 사람들은 그래서 이곳을 작은 혹은 튀니지 그랜드 캐넌이란다.
오랜 세월 동안 단층선을 따라 물길이 생기고 물은 지층을 깎아 깊은 협곡을 만들었다. 이 좁은 협곡 사이로 스타워즈의 우주선들이 날아다니는 장면을 연출한 조지 루카스 감독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미데스 협곡을 보고 점심을 먹기 위해 타메르자로 이동했다.
식사가 준비된 곳은 타메르자 팰리스 호텔이었다.
외관상 본 호텔은 사막의 정취를 담고 있는 평범한 흙벽돌 건물이었다.
그러나 식당 테라스에서 본 전망은 지금까지 본 튀니지는 몽땅 기억에서 지워버린 후, 최고라고 외칠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누가 이곳에 호텔을 세울 생각을 했는지 존경스럽다.
이 조그마한 마을에 있는 소박한 호텔은 세상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광대한 풍광은 비밀스럽게 품고 있었다.
나는 메뉴도 기억나지 않는 점심을 후딱 해치우고 베란다로 나갔다.
아무런 조미도 안 된 통조림 꽁치 한 토막을 확실히 기억하는 걸 보면 별 볼일 없는 식사였나 보다.
그러나 모두 용서 할 수 있다.
이곳에 호텔이 있어준 것만으로도....

호텔 앞은 넓은 와디(건천)였다.
와디에는 건강한 대추야자 숲이 있고 와디 한가운데 있는 언덕 위에 폐허로 변한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멀리 우람한 산들이 이 경치를 감싸고 있다.
1969년, 큰 홍수가 났단다. 거의 한 달을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퍼부어 이 일대 지형이 크게 변했다. 앞에 있던 마을은 폐쇄되고 주민들은 더 아래로 내려가 새로운 마을을 건설했다.
푸른 대추야자 숲에 싸인 마을은 겨우 40년 전에 사람을 잃었지만 몇천년 전의 유적처럼 보인다.
이 호텔로 들어오기 전에 와디로 내려가 마을을 구경했었다.

<타메르자 팰리스 호텔 전경>

이상하게 빈집들이 주는 느낌이 서글프거나 지저분하거나 하는 구차함이 없었다.
투루판의 교하고성처럼 떠난 이들의 사랑이 느껴졌다.
“외로웠어요. 오래 머물러 주실꺼죠?”하며 나를 붙잡았다. 이 낯설은 친밀감이 설명되지 않아 신기했다.
좁은 골목, 작고 낮은 집, 낡은 문짝 등을 보니 아주 가난한 마을이었나 보다. 그러나 좁은 어깨를 맞대고 있는 걸 보니 착한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고 살았음이 분명하다.
왕언니가 이 마을을 위해 헌가(獻歌)를 바쳤다. <황성옛터> ㅎㅎㅎ......
모두 테라스로 나와 오래도록 이 풍광을 즐겼다.
사막 한가운데 꿀 같은 물길을 따라 자란 푸른 야자 숲과 폐허의 마을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은자(隱者)의 고요함과 소박한 평온이 여행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여행자의 특권은 매순간 새로워하고 마음껏 경탄하며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리라.
마사장님 다음 팀은 꼭 이곳에서 묵을 거란다. 부럽다.
근사한 일출, 일몰과 상관없이 아침에 천천히 깨어나는 햇살이나 저녁의 겸손한 바람이 스쳐가는 풍광이 참 좋을 것 같다.

<카이로우안의 이발소>오후 내내 300km를 달려 드디어 카이로우안에 도착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 우리가 묵을 카스바 호텔은 주황색 불빛에 잠겨 있었다.
옛 카스바 성을 수리하고 개조해 만든 호텔은 고풍스러운 멋이 있다.
성벽을 교묘하게 호텔 정문으로 활용해 위용(偉容)이 대단하다.
저녁 식사 후 우리는 호텔 근처 수크 구경을 했다. 대부분의 시장은 문을 닫았다.
우리 60년대 시골에서 볼 수 있었던 이발소만 환한 불을 밝히고 영업을 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도 <마카론 파는 가게>이발소는 남자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나 보다.
우연히 카이로우안 특산품인 마카론 파는 골목을 발견했다. 마카론은 우리의 약과 맛과 흡사하다.
다만 가운데 대추야자나 건과류를 채워 고소하다. EBS 테마세계기행에 소개된 집이 유독 멋지게 과자를 쌓아 놓았다.
우리가 다가가니 일본어로 호객 행위를 한다.
일행들과 나누어 먹으려고 1kg을 샀다.
중앙 시장통 외의 골목은 가로등 하나 없이 너무 어두워 들어가 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인적 없는 시장은 너무 괴괴하다.

1월 19일 (제 11 일) - 아프리카 무슬림들의 메카, 카이로우안 -

 

<로마 시대의 물저장소>맑은 아잔 소리에 잠을 깼다.
이 도시에 꼭 어울리는 자명종 소리다.
<알라는 무한하며 현명하셔라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으시다
무하마드는 알라의 사도이시다
기도하러 올지니라
행복을 향해 올지니라.>
나도 오늘 하루 무슬림이 되어 이 도시에 빠져보리라.


처음 찾아간 곳은 로마 시대의 물 저장소였다. 로마군 주둔지였다는 이 도시는 아랍인들이 차지하기 전부터 중요한 지역이었나 보다.
저수조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망루에 올랐다. 생각보다 크고 보존 상태도 훌륭하다. 40km 정도 떨어져 있는 수원(水源)에서 물을 끌어 왔으며 이런 저수조가 15개 있었단다.
현재 발굴된 것은 2개였다. 사막 한가운데 이런 인프라가 있었기에 아랍인들이 쉽게 정착했고 한 왕조의 수도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발사의 모스크>
다음은 <이발사의 모스크>라고 알려진 자오이아 시디 사하브(Zaouia sidi sahab)로 갔다.
무하마드의 이발사였다는 시디 사하브라는 성인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생전에 그는 무하마드의 턱수염 세 가닥을 지니고 다녔단다. 이슬람교도로서 예언자의 몸을 만지고 수염까지 지녔다면 부러움의 대상이자 추앙도 받았을 것이다.
또 이 근방에서 있었던 지하드(성전)에 참전해 전사까지 했으니 순교자의 영예까지 얻는 건 당연지사이리라.
알라신 이외 어떤 개인숭배도 허락하지 않는 이슬람 교리를 볼 때 개인의 기념 묘를 가졌다는 건 엄청난 영광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현지인들 사이에 알라신을 찬양하는 성소라기보다 자신들의 복을 기원하는 장소로 더 알려져 있다.
나는 건물 자체가 흥미로웠다. 좋게 말하면 여러 시대 건축 양식이 혼합된 문화의 전시장이지만 한편으로는 잡탕식, 퓨전식으로 종교 건축물이 갖고 있는 신성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랍풍의 장식과 채색도 거칠고 너무 다양해 조화로움이 전혀 없다. 더욱 성인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장소는 넘치게 많은 카펫과 덮개가 어지럽게 널려있어 보는 것만으로 질식할 것 같았다.
묘지기는 옅은 향수가 첨가된 분무기 물을 뿌려주면서 성수란다.
이것 또한 공짜가 아니다.
얼마간의 성의 표시를 하도록 유도한다.
“속되도다. 속되도다.”

<그랜드 모스크>

진정한 이 도시의 성역 그랜드 모스크로 갔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모스크에 들어섰을 때 아무도 없었다.
알라신의 영역은 고요하고 신성했다. 바깥 세상과 완벽하게 분리된 모스크는 이집트 조세르 왕의 장제전을 연상시켰다.
임호테프는 계단식 피라미드뿐만 아니라 세상과 단절된 내세의 장제전을 건설했다. 그 장제전을 통과해 광장에 섰을 때 나는 현세와 동떨어진 햇살과 신의 호흡을 느꼈었다.
지금 그때와 똑같은 감동이 밀려왔다. 동서남북 100m는 됨직한 경내는 깨끗한 대리석이 깔려있고 미나렛을 포함한 네 면의 회랑은 끝없는 돌기둥 숲을 연상시켰다.
둥근 말굽형 아치는 신의 영속성을 상징하듯 우리를 일시에 자신의 자손으로 만들어 버렸다.
<미나렛>현재 남아 있는 미나렛 중 세계 최고의 장수를 자랑하는 미나렛(724∼727년)은 미욱할 정도로 우람하다. 예술적 가치보다 실용적이며 신의 영역임을 증명하는 상징적 의미에 충실한 건축물이다.
높이는 30m 정도지만 그 앞에 서면 쿠푸 피라미드 같은 거대함이 느껴지니 아주 성공적인 미나렛이다.
오늘날의 미나렛은 신의 영역을 암시하는 상징적 의미와 신을 경배하는 찬미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 산다.
하지만 초기 모스크의 미나렛은 바다와 사막 한가운데서 등대나 망루, 혹은 기념탑으로서의 역할이 더 컸다. 미나렛과 마주한 면에 미흐랍이 있는 기도실이 있다. 우리는 무슬림이 아니어서 그곳까지는 들어 갈 수 없었다.
이 모스크에서 내 호기심을 가장 자극시킨 건 150여 개의 돌기둥이었다. 모스크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대부분 로마의 것이었다. 코린트 기둥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자세히 보면 도리아, 이오니아식 기둥도 있다.
이 모스크가 처음 세워진 것은 7세기경이지만 이 도시 최고의 전성기 아글라브 왕조(800∼909년) 때, 완전히 해체(836년)해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그 때 카르타고와 수스 근처 로마 유적지를 뒤져 곧고 반듯한 석재만을 골라와 이 모스크를 완성했다.
아랍식 건축물에 로마의 화려한 머릿돌 기둥들이 섞여 있어 기형처럼 보이지만 문명의 유한성, 내지는 순환, 무상함 같은 상념에 빠져들게 한다.
이 도시는 수니파 이슬람권에서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에 이은 네 번째 성지다. 무슬림이 이 도시를 일곱 번 방문하면 그들의 최대 의무인 메카 순례를 면제 받을 정도다. 49개의 모스크가 있다는 카이로우안 성지 도시. 그 중심에 그랜드 모스크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스크를 나와 메디나를 자유롭게 구경했다.
카이로우안은 튀니지의 보석이 아니라 지구의 보석이었다.
카이로우안은 아랍인들이 북아프리카에 진출했을 때 가장 중요한 이슬람 진지(陣地)였다. 카이로우안의 아랍어 어원(Qayrawan)이 ‘무기고’ 혹은 ‘숙영지’라는 의미이다.
튀니지 지도를 놓고 보면 아랍인들이 왜 이곳을 수도로 삼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670년 우크바 벤나피라는 전사가 세운 도시는 바그다드의 칼리프 (아바스 왕조)로부터 통치권을 부여받은 아글라브, 파티마, 지라드 왕조의 수도였다.
내 의문에 깔끔하게 대답해주는 책은 없지만 그런대로 비잔틴 함대가 순찰하는 바다에서 떨어져 있어 안전하고 내륙 깊숙이 있는 거친 베르베르인들의 위협에서도 벗어나 있다는 이점이 이 의문의 해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해답에 내 나름대로의 사족을 붙인다면 아랍 전사들이 이곳에 와 베르베르족과 싸울 때 우거진 대추야자 숲으로 숨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 대추야자가 무성했다면 인간 생존에 필요한 충분한 자연적 조건이 충족된다. 또 사막 생활에 익숙한 아랍인들이 고향과 비슷한 이곳 환경에 친근한 정서적 안정을 얻었을 것이다.
그랜드 모스크 같은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 세워지고 베르베르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도시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또 지식의 축을 담당하는 아랍인, 콥트교도(이집트 기독교인), 유대인들이 유입되어 카이로우안은 종교, 학문, 상업의 명실상부한 북아프리카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유대인은 대학 설립과 왕실 의사, 관료, 학자, 무역업자 등 각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담당했다.

이런 유서 깊은 도시의 메디나는 여느 도시의 메디나와 달랐다.
골목 골목이 페스의 메디나처럼 복잡한 미로지만 역사 깊은 도시가 갖고 있는 정서와 품위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페스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너무 상업적인 요소가 강해, 지는 해의 낙후된 서글픔이 보였다.
과잉이 누적된 피곤한 도시는 분주하지만 쓸쓸했다. 상가, 수공업 공방, 문화 공간, 학문 기관, 주거 공간 등의 기능이 혼재되어 있어 도시는 포화되고 비위생적 삶이 보였다. 그래서 메디나 밖으로 신도시가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이 도시는 다르다. 메디나가 문화유산으로 보호받으려면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야 함이 우선이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 되어야한다. 그런 도시가 바로 카이로우안이다.
카이로우안은 도시가 형성되면서부터 만들어진 주민들의 삶의 틀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모스크는 여전히 신성한 장소였고 수크에는 주민들의 일용할 양식과 물품들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메디나는 밝고 깨끗했다. 열악하다고 느낄 구석이 없다. 주민들 표정도 온화하고 다정하다. 아이들도 많고 웃음도 건강했다. 신의 가호 속에 만족하며 사는 성스러운 도시의 원형이 과거 그대로 녹아 있었다.
집들도 시디 부 사아드처럼 하얀 집에 푸른 대문이 특징이다. 삶의 향기와 손길이 느껴지는 빛바랜 푸른 문과 허름한 벽들도 엔틱 고가구처럼 정겹다. 아름답다기보다 충만한 정체성을 간직한 자존심이 느껴졌다.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질리지 않을 호기심에 한 골목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파울 클레의 선택된 장소>21세기에 온 나도 이렇게 이 도시에 반했는데 100년 전(1914년)에 왔던 화가 파울 클레는 이 도시와 사막을 보고 그의 예술 세계를 바꾸었다.
그는 보이는 것보다 그 이면에 감추어진 상징적 의미를 표현하는 색채에 탐닉했다.
4월에 이 도시에 입성한 파울 클레는 일기에서 <부드럽게 확산되는 빛이 내리는데 다사롭고 맑다..... 그 빛은 내 속에 너무 깊이 부드럽게 스며들었고 그것이 느껴지자 나는 힘들이지 않고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색채가 나를 사로잡는다. 나는 색채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이 행복한 시간의 의미이다. 색채와 나는 동일체다. 나는 화가다.>라고 썼다.
그리고 이 도시를 분해해 <카이로우안의 성문 앞에서>라는 추상미술로 이행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마술 같은 색채에 빠져 들었다. 화가로서 자신만의 확고한 영역을 찾은 것이다.
파울의 예술세계 전환의 영감을 준 카이로우안은 1904년, 이 도시를 찾은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튀니지를 다녀온 우리나라 여행객들의 글 대부분이 시디 부 사이드를 본 감상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색채가 나를 지배한다>라는 파울 클레의 일기를 인용한다. 클레의 그림을 조금만 이해해도 이런 글을 인용하지 않았을 텐데....
푸른 하늘, 푸른 바다가 지배하는 시디 부 사이드와 클레 화풍의 색채는 좀 다르다. 마티스라면 모를까. 클레는 장식성이 강한 유럽문화 사조와 대조를 이루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이 도시 내면의 색채에 반한 것이다.

카이로우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이들도 좀 더 크고 문명의 이기로 가득한 세상을 그리워하며 떠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소수의 사람들로는 이 도시의 틀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을 거라는 신뢰가 생긴다. 자신들이 추구해야하는 것이 무엇이며 자신들의 뿌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현자의 도시는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신비로운 감동을 준다.
<보석같은 방>우리는 세 문 모스크를 보고 어느 부호의 집을 구경했다.
18세기 어느 고위 관리의 저택이라는데 품격 높은 화려함에 압도되어 다른 세상으로 옮겨온 착각에 빠진다. 현재는 카펫 전시 내지는 판매장으로 바뀌었지만 천정, 벽, 가구... 어디 하나 허술한 곳이 없다. 집 자체가 수준 높은 세공가가 연마한 보석 같다.
많은 방들은 차별화된 문양, 채색, 조명, 가구 등으로 각각 특별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주인아저씨가 점잖게 앉아 자신의 집에 찬사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을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즐기고 계신다. 이 정도 집이면 자부심? 당연히 누려야 할 유산이다.

카이로우안이 어떻게 해서 신성한 도시가 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신화의 장소, 바로우타로 갔다. 바로우타는 메디나 한가운데 있었다.
우물은 낙타가 드나들 정도로 꽤 넓은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간 2층에 있었다. 이곳이 정말 이 도시 최고의 신성한 장소일까? 좁고 지저분하고 어두워 의심이 든다.
우리가 올라가니 멈추어 서 있던 낙타가 주인의 호령에 돌기 시작한다. 알록달록한 장식 스카프를 잔뜩 단 낙타는 눈을 가리고 습관처럼 느릿느릿 돌기 시작했다. 전혀 즐겁지 않은 몸짓으로...
염전에서 바닷물을 퍼 올릴 때처럼 여러 개의 두레박에 물이 담겨져 나온다.

<신화를 만드는 낙타>

어찌나 좁은지 우리 일행은 낙타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벽에 바싹 달라붙어 있어야했다. 신성한 물을 퍼 올리는 낙타에게 경의를 표해야할지 아니면 이상한 이 상황에 웃어야 할지.... 참 묘하고 딱한 기분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유 없이 동물 학대를 보고 있는 듯한 거북함이 가장 컸다. 더욱이 우리 때문에 퍼포먼스를 한 낙타를 위해 돈을 주기까지 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신성한 우물에 대한 모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을 처음 점령한 우크바 벤나피가 말을 타고 가다 말발굽에 무언가 걸리는 걸 느끼고 파보니 금 주전자(혹은 금배)가 나왔단다.
그 금 주전자는 몇 년 전 메카에서 분실된 보물이었고 그것을 빼내니 물이 솟았단다. 그래서 이 우물이 메카의 젬 젬(Zem Zem) 샘물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게 되었단다.
메카의 젬 젬 샘은 메카 성지순례(하지, haji)의식이 행해지는 중요한 성지다.
아랍인의 시조,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 하갈은 아브라함에 의해 광야에 내쳐졌다. (첫째부인 사라의 질투에 의해) 목말라 하는 아들을 위해 하갈이 물을 찾아 헤맬 때,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어느 장소를 파니 그곳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그 샘이 젬 젬이다.
무슬림들은 메카 성지순례 때, 하갈의 행동을 본 따 사파와 마르 동산까지 7번 오가는 의식을 행한다. 그런 샘물과 연결되었다는 믿음이 이 도시를 이슬람 4대 성지로 만든 것이다.
신화는 아랍인들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것이 알라신의 뜻이라는 명분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지만 이런 성지 관리는 너무 의외다.
여행객의 의문은 여기까지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뜻이 있을 것이니 내 잣대는 의미가 없다. 타 문화에 대한 이해, 감탄, 존중은 필요하지만 비판, 경멸은 예의가 아니다. 오랜 세월 축적된 문화를 며칠 보는 것으로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곳을 마지막으로 시장을 둘러보고 카이로우안을 떠났다. 좀 더 시간을 가졌으면 좋았을 텐데... 많이 그립고 그래서 이 도시를 방문한 행운을 잊지 않을 것이다.
변화만이 살 길이며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 도태, 낙오자가 되는 세상에, 이 지구 어딘가에 선조로부터 내려온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지상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도시가 하나쯤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될 것 같다.

튀니지의 마지막 잠자리를 찾아 하마메트로 달렸다. 하마메트가 가까워지니 풍경도 달라졌다. 올리브 나무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예약된 식당은 멋지기도 하지만 비수기에 아주 고마운 손님인지 식탁 위를 붉은 장미 꽃잎으로 기분 좋게 장식해 놓았다. 요리도 근사해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있는 듯했다.
늦은 점심 식사 후 저녁 식사까지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가늠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급 호텔들이 끝없이 서 있는 하마메트는 그 자체가 제국의 중심처럼 보인다. 이 일대가 로마 시대에는 아프리카 식민지 최대 공동묘지였다는 사실이 묘한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죽은 자의 유골 위에 산 자들의 달콤한 휴식! 햄릿의 멋진 대사 같지 않은가?
우리 호텔을 중심으로 왼쪽, 오른쪽 어느 쪽으로 가보아도 똑같은 철 지난 휴양지의 살풍경에 외로워진다. 관광객이 없으니 상가들은 거의 문을 닫았고 호텔은 텅텅 비어 있다. 그래도 지중해인데 싶어 2시간 정도 걸어 다니다 들어왔다.
다양한 문명과 인종이 충돌하고 화해하면서 인류역사의 중심이 되었던 지중해는 너무도 고요하기만 하다. 이 깊은 침묵과 시치미가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1월 20일 (제 12 일) - 지중해 제국의 영광이 수놓인 도시, 튀니스 -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역마살을 타고 난 팔자 탓인지 매번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을 인식하게 되면 우울해진다. 그래도 인천 공항에 내리면 갑자기 집이 그리워 가슴이 뛰는 건 무슨 병인지....
오전에 이 나라 수도 튀니스를 둘러보고 오후 4시 30분 비행기로 파리를 경유해 서울로 갈 것이다.
먼저 바르도 미술관으로 갔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튀니스는 쓸쓸하고 쌀쌀했다. 얼른 실내로 들어가고픈 날씨다.
17세기 하프시드 왕조의 궁전인 바르도 국립고대문화 박물관은 훌륭했다. 거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은 아니지만 품격 높은 왕실의 권위가 느껴졌다.
이 박물관은 로마 모자이크의 진수를 보여 주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의외로 선사 시대부터 시작된 이 땅의 문명사를 담고 있는 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비르사 언덕의 카르타고 박물관에서 본 토핏보다 더 정교하고 예술성이 뛰어난 것들도 다수 있다.
로마의 대리석 거상(巨像)들을 보고 있자니 로마제국은 이 지구상에 자신들을 닮은 석상을 만들어 퍼트리기 위해 존재했던 나라라는 진단을 내리고 싶어진다.


모자이크!! 더 이상의 찬사도 설명도 필요 없다.
박물관 전시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모자이크 작품들은 예술성에서 A+다.
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많은 모자이크 작품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한 자리에서 여러 작품을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다.
작품이 너무 많아 바닥, 벽면을 장식하고 우리가 걸어 다니는 통로에도 깔려있어 황송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로마 모자이크는 로마인들의 생각, 예술, 역사, 신화. 생활상, 정치제도, 학문, 지도 등 모든 영역을 담고 있다. 사진이 없던 시절 그들은 문자보다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즐겼다.
이 바르도 박물관 모자이크 중 가장 사랑받는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의 작품은 영낙없는 사진이다.
물감보다 한정된 천연 돌조각으로 인체의 움직임, 얼굴의 표정, 명암의 대비 등을 완벽하게 표현한 작품들은 감탄을 자아낸다. ‘그냥 크다’의 정도를 넘어선 광대한 작품은 로마인들의 야망의 크기를 보는 것 같다.
목욕탕 지하에서 불을 지피는 노예만 많은 것이 아니라 저 많은 작품들이 태어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노예들의 손이 필요했을까 하는 현실적 망상에 빠진다. 로마인들은 풍요로운 이 땅에서 창출한 부를 바탕으로 이런 고품격 예술세계를 마음껏 향유하면서 살았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셉티우스 세베루스 황제 모자이크>이 박물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모자이크 하면 로마의 것을 고유명사처럼 사용하지만 비잔틴 모자이크도 있다. 물론 시대만 다를 뿐 그 나물에 그 밥인 것은 당연하지만 두 제국의 모자이크에는 차이점이 있다.
로마 모자이크는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인간 중심이며 집을 장식하는 인테리어적 예술이다. 로마 모자이크는 삶의 여유와 자유로운 영혼을 찬양한다.
그러나 비잔틴 모자이크의 기본은 신의 찬미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모자이크는 교회 미술로 정착되어 신성한 성물의 일부가 되었다. 그 여파로 모자이크는 경직되고 추상적, 상징적이며 평면화 되었다.
더욱이 모자이크 작업이 비용과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어서 비잔틴에서는 벽화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왔던 모자이크가 8∼9세기에 들어 성상파괴 운동으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
<비잔틴 모자이크><비잔틴 모자이크>이 박물관의 비잔틴 모자이크도 로마 것과 비교하면 소박하고 초라하다. 조그마한 성상(聖像)과 무덤을 장식했던 소수의 모자이크가 있다.
그래서 눈길이 더 오래 머문다. 두 시대의 모자이크를 한 장소에서 비교 감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박물관은 멋진 곳이다.

박물관에는 초등하교 학생들이 와서 제법 의젓하게 구경도 하고 레포트 작성도 열심히 하고 있다. 부유한 사립학교 아이들로 보인다.
관심을 갖고 관찰하니 참 다양한 인종이다. 눈에 띄게 세련된 남자 아이는 흑인이었다.
다양하고 거대한 문명들이 거쳐 가면서 정복자와 피정복자라는 개념도 불분명한 이 나라의 아이들은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지 참 궁금하다. 우리는 일본의 침략을 배울 때 억울함으로 치를 떨곤 했는데 이들도 그런 대상이 있을까?
자신을 누구의 후손으로 인식할까?
이 화려한 문화유산을 어떤 시각으로 볼까?
부끄러운 유산이든 자랑스러운 유산이든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나로서는 이 박물관이 부럽다.

박물관을 나와 카스바 광장으로 갔다.
많은 관공서가 몰려있는 광장을 둘러보고 본격적인 메디나 구경을 시작했다.
이번 여행에서 꽤 여러 곳의 메디나를 탐험했는데 튀니스는 여느 곳과는 다른 색을 띈다. 아랍의 전통적 정서에서 좀 벗어나 있는 느낌이다.
시장의 분주함, 향신료 향기, 눅눅한 공기. 원색의 상품,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기념품, 양탄자.... 같은 것들이 그리 눈에 띠지 않는다.
수다스럽지 않은 상인들은 우리를 깊은 눈망울을 굴리며 구경만 하고 있다.
고급스러운 카페도 보이고 근처 학교에서 점심을 사 먹기 위해 나온 청소년들의 웃음은 오히려 서구적이다. 세련되고 영양 상태도 좋아 보인다.

이글라브 왕조가 이곳을 도읍지로 정하고 야심작으로 건설한 지투나 모스크는 밖에서 슬쩍 보기만 해야 했다.
이곳도 무슬림만의 장소였다. 36,000권의 장서를 소장했던 지투나 모스크는 이슬람 사회를 대표하는 지성의 산실이었다.
이 모스크가 배출한 최고의 학자는 이븐 할둔이었다. 이븐 할둔은 이 모스크에서 공부하고 기도했다. 모스크 근처에 그의 생가가 있어 갔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소박한 생가는 한동안 관공서로 쓰이다 지금은 닫아놓은 상태였다.
신화 속 한니발보다 보배로운 튀니지를 대표하는 위대한 지성인을 자국민들이 더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나도 이븐 할둔이라는 인물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마사장님이 이곳에 오기 전에 설명을 해서 알았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그의 저서 <역사 서설>을 읽어보고 깜짝 놀랐다.

1332년에 태어난 그는 교수, 대법관, 고급 관료 등을 지낸 사람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와 맞물린 그의 인생은 본의 아니게 작가, 사상가, 여행가, 역사가로 살게 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폭넓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풍전등화 같은 권력과도 가까워 위태로운 고비도 많았다.
18세부터 관직에 나서 1406년, 73세의 나이로 카이로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최고 권력자를 따라 혹은 학문적 신념에 따라 페스, 스페인 그라나다, 이집트의 카이로 등으로 옮겨 다녔다.
너무 영민해 주변 사람들의 질시와 견제에 시달리며 유럽, 아프리카, 중동을 전전하던 이븐 할둔은 자신의 이상 정치 실현이 번번이 실패하자 정치에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그리고 은거하면서 저술한 것이 <역사 서설>이다.
단순히 마그레브 지역의 민족과 왕조의 역사를 서술하려고 시도한 창작은 단순한 연대기적 역사 서술로는 역사의 흥망성쇠, 역사의 개연성, 역사적 의의 등을 이해 할 수 없음을 알고 점점 서술 범위가 넓어졌다.
문명의 개론부터 시작된 저술은 500년 전에 한 사람의 힘으로 썼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여러 범주를 넘나드는 책을 탄생시켰다. 정치, 경제, 사회, 철학, 신학, 교육학, 인류학, 역사학, 지리학, 법학, 꿈의 해석학까지.....
물론 한 학문에 대한 깊은 지식을 서술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분명 근대적 문명의 학문이 정립되고 잉태하는 순간이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19세기에 들어와 유럽인들이 근대학문의 발견이라고 말하는 개념들을 500년 전 이븐 할둔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때 지리학을 조금 접해본 나로서는 지구의 남반부와 북반부의 정확한 이해와 기후대에 따른 인간 성격까지 고찰한 혜안(慧眼)에 입이 벌어졌다. 오늘날처럼 집안에 앉아 모든 것을 통합해서 볼 수 있는 세상도 아닌 14세기에 말이다.
토인비 조차 <그는 자신이 선택한 지적인 활동 분야에서 어떠한 선배로부터 영감을 받지 않은 듯하며 자신의 동료들 사이에서도 어깨를 같이 할 만 한 인물을 찾지 못했고 어떠한 후배들에게도 영감의 불꽃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세계사에 첨부한 ‘역사 서설’ 속에서 독자적인 역사철학을 생각하고 형상화했는데 그것은 이제껏 어느 곳 어느 때 어느 누구에 의해서 논의된 것보다 가장 위대한 작업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며 경의를 표했다.
이 학자에 대해선 이슬람 사회에서조차 고전적 가치나 통치에 필요한 실질적 지식을 제공하는 서적으로만 인정받았을 뿐 새로운 학문에 대한 학술적 가치는 몰랐다. 중세 최고의 지성, 이븐 할둔의 생가는 적막 속에서 아무런 표시판 하나 없이 메디나를 지키고 있다.

우리는 메디나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카펫 가게 전망대로 올라갔다.
가게 주인은 무심한 얼굴로 자신의 가게를 내어 준다.
솔직히 어지럽고 심란한 메디나의 낡은 지붕의 스카이라인보다 전망대 자체가 흥미롭다. 현란한 색과 다양한 문양 타일의 총 집합체인 옥상은 B급 아랍 예술가의 야심작 같다.
옥상에서 가장 가깝게 지투나 모스크의 미나렛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아주 고전적 형태지만 아름다운 장식이 돋보인다. 메디나 전체가 그의 존재에 복종하듯 발아래 조용히 호흡하고 있다.
옥상 바로 옆집 부엌에서 한 여인이 능숙한 솜씨로 점심 스파게티를 요리하고 있다. 고소하고 구수한 냄새가 다정하게 내 코로 들어온다. 붉은 토마토가 아주 감각적이다.

<옥상에서 바라 본 지투나 모스크 미나렛>우리는 시장을 걷다 그 옛날 노예 시장이었다는 장소를 만났다. 여러 개의 아치형 지붕으로 덮여 있는 작은 공터였다.
이곳으로 끌려온 노예들은 경매를 통해 각지로 팔려갔다.
튀니지는 알제리와 더불어 중세 사라센 해적의 주요 기지였다. 지중해가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해상로였기에 해적업은 큰 돈벌이었다.
북아프리카에 이슬람 세력이 들어온 7세기 말부터는 개인 사업이아니라 국가 산업으로 커졌다. 카이로우안을 건설한 아랍인들은 태수를 중심으로 지중해 기독교권을 침략해 살육과 약탈을 일삼았다.
그들은 큰 죄의식 없이 이슬람교도들이 아닌 자를 처단한다는 <지하드>를 선언하면서 해적질을 합리화했다.
<튀니스의 노예 시장터>해적질은 점점 수위가 높아져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것보다 끌고 와 노예로 파는 것이 더 큰 수익이 난다는 것을 인식했다.
13∼14세기까지 튀니지의 번영을 이룬 하프시드 왕조도 결국 오스만 터키의 세력을 등에 업은 일개 해적 <바르바로사(일명 붉은 수염)>에 의해 무너졌다.
알제와 튀니스는 중세 최대 노예무역 기지였다.
지중해 연안 각지에서 끌려온 기독교인들은 간혹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기도 했지만 대부분 심한 노동과 학대로 한 많은 삶을 살다 죽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흑인 노예의 역사 전에도 이런 야만적이며 추한 그림자가 있었다.
반질반질한 돌기둥을 가만히 만져본다.
그는 너무나 많은 힘든 사연을 보았을 것이다.
“우리 그때보다 확실히 더 나은 세상으로 가고 있는 것 맞지?”
멋진 식당에서의 식사를 끝으로 나의 여행은 끝이 났다.

  

여행을 정리 하면서

이번 여행은 아주 특별하게 시작되었다.
밀밭이 바람에 일렁이는 TV 풍경에 일순간 꽂혀 “저기다!”라고 정한 곳이다. 여행을 떠날 때는 “튀니지, 튀니지!”를 외쳤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현 시점에서 만족도는 모로코가 더 크다.
지중해에 면해있는 모로코가 아니라 사랑스러운 마라케쉬와 사막 한가운데, 높은 산맥에 감추어져있던 카스바 로드와 황량한 풍광은 지금도 생각만 하면 내 가슴이 뛴다. 아프리카와 아랍의 문화가 어우러진 정서는 야성적 풍광과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모로코는 역사적으로 로마의 세력이 북부 아프리카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을 때도 점령지의 변방으로 그리 주목 받지 못했으며 그 후, 오스만 제국의 힘이 알제리까지 미쳤지만 모로코는 그들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19세기 프랑스가 들어오기 전까지 모로코는 평야 지대의 토착 아랍인과 산악 지대의 베르베르인들은 우호적인 화합은 아니지만 세계사적인 큰 문명의 그늘에 들지 않고 자신들만의 소박한 삶을 영위하며 살았다. 그래서인지 서구와는 많이 다르고 아랍 세계와도 또 다른 모로코만의 매력이 있었다.
기대가 없었기에 포만감은 더 컸다.
원래 불현듯 찾아온 첫사랑은 강렬한 법이다.


정작 튀니지에서 그 밀밭은 보지도 못했다.
여행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꼭 흘러가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튀니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곳이다.
튀니지 남쪽 끝자락에서 만난 경치와 그들의 삶은 넘쳐나서 인간성 자체를 의심하게 하는 예술이라는 이름의 횡포를 생각하게 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황폐해진 인간 본성을 치유한다는 명목으로 너무 많은 예술이라는 장르를 남용, 오용하고 있다.
예술가 자신들도 과욕하여 판단력이 흐려진 대중을 향해 “예술은 고등 사기다(백남준).”라고 외치고, 카뮈는 “짤즈부르크는 모자르트만 없으면 조용하다.”라고 말했다.
발터 뫼르스가 쓴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 이런 글이 있다.
“나는 문학, 음악, 회화, 연극, 무용 할 것 없이 모든 예술을 없앨 겁니다. 퇴폐적이고 쓸데없는 것들 말입니다. 책은 불태우고 그림은 지우고, 조각품은 부수고 악보는 찢어버리고 악기는 화형에 쳐하고 ···(중략)··· 그런 다음에는 조용해지겠지요. 우주의 고요함과 질서가 지배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침내 숨을 쉴 수 있을 겁니다. 예술의 속박에서 벗어나 오직 현실만이 주어지는 세계로 말입니다.”
이 대사는 악마의 목소리를 빌린 작가의 본심이라고 본다.
뫼르스는 예술이 없는 세상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횡포 또한 충분히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善)의 편에 선 주인공을 통해 감금된 지하 세계에서 탈출하면 문명화에서 벗어나 있는 사막으로 가서 조용히 글을 쓰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너무나 빈곤한 사람들이 성스러운 아침을 공손하게 맞이하던 작은 마을의 골목길에서.
달콤한 사탕을 우아한 몸짓으로 거부하던 노인의 몸짓에서,
손과 간단한 연장으로 만든 그들의 목숨 같은 식량 창고에서,
때 아니 홍수로 보금자리를 버리고 떠난 인간의 흔적이 주변 풍광과 어울려 겸손했던 삶의 추억으로 남아있던 어느 호텔 앞 경치에서.
거친 소금으로 뒤덮인 호수를 붉은 노을이 광폭하게 다루고 있던 사막에서,
손바닥 선인장에 매달린 천박하지만 질긴 생명력으로 부풀어 있던 가시돋힌 열매에서......
나는 벽에 그림 하나 붙이지 않아도 삶 자체가 감동적인 예술이 되는 경우를 보았다.

얼마 전에 독립 영화로선 드물게 공전(空前)의 히트를 친 <워낭 소리>라는 영화가 있었다. 등 굽은 노인이 소와 함께 평생을 바친 노동은 너무도 성스러웠다.
계절에 순응하고 흙에 의지해 씨 뿌리고 가꾸고, 감사히 거두는 우리 생명 유지의 행위는 경건한 종교였다. 우리 모두 이 감사함을 잊고 지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단순한 삶의 행위가 얼마나 그리웠고 숭고해 보였는지 영화 내내 울고 있었다.
감동은 깊고 진했다.
이번 여행은 그 <워낭소리>의 국제판을 본 것 같았다.

여행을 끝낸 나는 또 익숙한 타성에 젖어 도시의 흐름에 맞추어 늦지 않으려고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 것이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이 퇴화되어 현재의 나를 바꿀 수가 없다.
멘델스존과 조슈아 벨을 사랑하고 르노아르와 샤갈에 위로 받으며 무라카미와 오르한 파묵과 함께 밤을 지새며 열심히 살 것이다.
그러다 이 잘 짜여진 예술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또 여행의 짐을 꾸릴 것이다.
풍요로움으로부터, 고급문화라는 이름으로 과장된 치장을 하고 있는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사물의 존재감이 감각적으로 살아있고 빛이 없어도 황홀하며, 단조로워 자유로운, 익숙하지 않아 신선한 곳으로 떠날 것이다.
나도 가끔은 순해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