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세이 여행이야기

홍선희-남프랑스

  • 작성자 :

    테마세이투어

  • 작성일 :

    2010.09.08

  • 조회수 :

    8181


이 글은 홍선희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홍선희님은 2010년5월11일부터 20일까지 10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남프랑스 여행을 다녀 오셨습니다. 글을 보내 주셔감사합니다.


 

꿈 속에서인듯 즐긴 향연 - 남프랑스 -



프랑스의 자존심, 샤모니 몽블랑



프랑스 제네바 가는 길 - 제네바 - 샤모니(에귀 드 미디 봉 - 샤모니 시내) >



남프랑스 여행인데 남쪽으로 내려가기 전에 음식에 치는 양념처럼, 식사의 에피타이저처럼 프랑스인이 그들의 자존심으로 여기고 자랑으로 앞세우는 몽블랑이 있는 샤모니에서 여행을 시작하였다. 한 나라이지만 강원도의 태백산맥의 준령과 같은 동북 지방의 풍광, 삶의 모습과 소백산맥 이남의 호남, 한려수도와 같은 남쪽의 그것들의 차이를 느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여긴다.
여행의 코드를 차마 고도에 맞췄다가 통행 허가 문제로 인해 취소되는 바람에 '황량한 자연과 거친 삶'이라는 여행 테마에서 '세련된 삶과 따뜻한 태양과 깊이 있는 예술이 있는 곳'으로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적응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마르셀의 여름', '프로방스에서의 1년' 등으로, 그리고 고흐의 아를, 세잔느의 액상 프로방스, 샤갈, 피카소의 니스, 또 영화의 도시 칸, 그레이스 켈리의 모나코 등 언젠가는 어슬렁어슬렁 한가한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던 곳이기에 기꺼이 선택한 여행 지역이다.

2010년 5월11일 파리 행 대한항공에 몸을 실었다.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저 아래 세상의 불빛이 별빛이다. 귀가 막혔다 뚫리는 구름 위 세상을, 그곳을 별천지로 만드는 태양을, 이윽고 붉게 물드는 구름의 지평선을 색다른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바라본다. 귓속에서도 이명이라는 왱왱거리는 다양하고 새로운 소리의 세계가 펼쳐진다. 교향악이다. 구름의 파노라마와 함께 웅장하다.
파리공항에서 쥬네브행 비행기로 갈아탄 후 1시간20분쯤 더 날아간 후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샤모니를 향해 달렸다. 파리도 쥬네브도 비가 추적추적 내려 우울하고 스산한 유럽 땅의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오랜 비행에 몸과 마음도 적당히 피곤하고 가라앉는다. 내 입에서는 자꾸만 "파리는 안개에 젖어, 아니 파리는 비에 젖어, 대기는 화산재에 젖어"가 반복되어 뇌어진다.

샤모니 초입의 작은 마을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맑게 갠 상쾌한 길을 달려 프랑스 북쪽 샤모니 몽블랑을 향할 때는 어제의 우울함은 흔적도 없이 씻겨 버린다. 하늘은 맑게 개어 공기마저 푸른색을 띤다. 구름 걷히는 소리가 청아한 새소리와 더불어 청량하다. 어제 내린 비로 나뭇잎에 남아 있는 빗방울이 신선한 대기를 들이마셔 경쾌, 상쾌한 아침을 연출한다.

산록에 초원을 지닌 예쁜 마을들 뒤로 펼쳐지는 거대한 바위산, 눈 산, 그리고 내 입에서 터지는 탄성,...... 이윽고 샤모니 몽블랑 입구. 장대하게 펼쳐지는 몽블랑의 만년설.
아, 오늘 날씨는 정말 환상적이다.

알프스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4,807m)의 아랫동네 샤모니.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우뚝 솟아 있는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프랑스는 알프스의 주도권이 자기네에게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이곳 샤모니의 이름도 '샤모니 몽블랑'이라고 명명한다고 한다.
중앙봉과 남봉, 북봉 등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정상까지는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다. 해발 3,842m의 에귀 디 미르(L'Aiguille du Midi)의 전망대에 오르는 동안 눈 덮인 알프스의 설경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곤돌라 2단계로 갈아타고 마지막 180m는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데 눈바람이 춥고, 롤러코스트의 스릴이 느껴진다.
곤돌라 안에서 중국 관광객들이 어찌나 시끄럽던지 불편한 내 귀에는 전쟁의 포화 소리로 들렸지만, 모두들 즐겁게 들뜬 모습들이어서 보기에 좋아 그들을 향해 미소를 날리는 여유도 부려본다.


불행하게도 3단계 엘리베이터는 운행 정지란다. 눈이 너무 내려 테라스의 눈을 안 치웠다는 프랑스답지 않은 이유, 입장료에는 전혀 반영이 안 되는 제멋대로의 운영이 이곳에서도 먹힌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위에 올라가 봐도 전망에는 별반 큰 차이가 없다는 위로의 말에 마음을 접어야지 별 수 없다. 에귀 드 미르 꼭대기 180m 아래 지점에서 로케트처럼 생긴 저 정상을 못 밟아보는 안타까움을 달랜다.
올려보고, 바라보고, 내려다보고, 커피도 마시고 눈밭에도 구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바람이 너무 세서 날려갈 뻔도 했다. 저 아래쪽에서 off road 스키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스키를 좋아하는 아들을 생각했다. 아들에게 주는 선물로 줌으로 당겨 한 장 찍었다. 
약간 오른쪽의 우뚝 솟은 봉우리가 그 유명한 '그랑 조라스'. 세계 알피니스트들에게 5대 난봉 중 하나로 알려진 봉우리가 위용을 뽐내며 서 있어 산을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또 한 컷. 신영 씨가 저 봉우리들을 보면 무척 좋아했을 것이다. 역시 줌으로 당겨 한 컷.
조망을 마치고 하산할 무렵부터 구름이 몰려와 시계가 점점 흐려진다. 2곤돌라 탑승지까지 내려온 후 눈밭에서 뒹굴었다. 한껏 멋을 부린 젊은 스키어들이 자유스러워 보인다. 내 마음도 순백으로 물든다.
눈 위에 큰 대자로 벌렁 누웠다가 일어난 후 눈도장을 사진으로 찍었다. 일행이 없는 나의 사진 찍기 방식이다. 습기가 아주 많은 차진 눈이라 옷이 금방 젖는데 스키 타기에는 아주 좋은 눈이다. 1800년대 이곳에 올라 썰매와 스키를 즐겼던 프랑스인들의 의상이 재미있어 엽서도 사진으로 찍어본다

점심식사는 미식가인 미쉘린 추천 샤머니 최고의 식당(운하같은 개울 바로 옆)에서 푸아그라(거위간)-코르호르(새보다 크고 닭보다 작은 조류)+옥수수 크림치즈 범벅한 빈대떡-마코트 사보아(야채 샐러드와 치즈 모둠)를 향미가 짙은 레드 와인에 곁들여 우아하게 먹었다. 고소한 바게뜨 빵은 무제한 리필이다.
식후에는 샤모니의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산책했다. 관광지여서 건물 대부분이 호텔과 기념품 가게이고, 별반 특징은 없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느낌이어서 휴양하기에 좋을 것 같다.
1786년 소쉬르 백작이 상금을 걸고 정상 탈환 행사를 벌였는데 처남 매부 간이었던 빠샤르와 발마가 정상 등반에 성공했음에도 발마는 혼자 공을 차지하기 위해 발 빠르게 빠샤르를 배제시켰다. 오랫동안 발마 단독으로 정상 탈환의 공로자로 알려졌고 그 공을 기리기 위한 소쉬르 백작과 함께 있는 발마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 어떤 변명도 항의도 않던 빠샤르의 정상 등반 사실이 나중에 포터들의 증언으로 알려져 뒤늦게 샤모니 광장에는 빠샤르의 동상도 세워졌다고 한다.
인간사의 부귀영화, 명예로부터 초월해 있었던 빠샤르의 침묵이 돋보인다. 산이거기 있어 올랐고, 자신이 정상에 올랐다는 건 사실이고 진실일진대 그것이면 족하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고, 뒤따르는 명예, 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에 최초의 정상 정복자가 반드시 자신이어야만 할 필요도 없다. 그런 빠샤르의 태도에서 삶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자신을 알아달라고 외치지도 않았고, 동료, 이웃의 이기심까지 조용히 포용했던 그의 넉넉함, 그는 진정한 알피니스트였다.
오늘날의 등반의 역사는 그때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그래서 몽블랑은 알피니스트들의 성지라 일컬어지며 인구 1만 명밖에 안 되는 조용한 샤머니에서는 1924년 동계 올림픽을 치렀다. 우리나라에서도 1920년 박윤석이 최초로 몽블랑 등정에 성공했다는 신문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그는 불행히도 친일파였다고.

민들레를 일부러 가꾼 듯한 올레가 있는 예쁜 집, 창가에 수탉 목각이 세워져 있는 작은 카페, 첨탑의 십자가 끝에 수탉이 장식되어 있는 조그만 성당(이곳 사보아 지방의 성당 첨탑의 특징-프랑스 중심 왕국인 부르봉 왕가의 상징이 수탉이라고 함), 광장의 분수, 그곳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노인네와 사색에 잠긴 젊은이, 뛰어노는 어린아이들. 한가한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이러한 풍경에는 평화로움이 넘쳐나고 있었다.




 

역사의 향기가 묻어나는 아름다운 호반도시 안시



안시 가는 길 - 노틀담 성당 - 성 삐에르 성당 - 성 마우리제 성당 - 일 궁전 - 안시성 - 생 클레어 대로 - 운하변 산책 - 안시호 유람



프랑스 동부,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에 위치한 작은 마을 안시는 유럽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호수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알프스의 만년설과 아름다운 호수,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운하, 일년 내내 맑고 청명한 날씨, 그리고 아담하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운 집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동화 속의 마을을 연상시키는 곳이다.'라고 테마여행사의 안내지에는 나와 있다.
이곳을 다녀간 블로거들의 글과 사진으로 대해 본 안시에 대한 인상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샤머니를 떠나 안시로 향하는 내 마음은 설레기 시작한다.
몽블랑의 봉우리들을 웅장한 파노라마로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무던히 참았던 하늘이 드디어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내렸다 그쳤다, 구름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를 반복하는, 그러나 목가적인 산자락 마을로 인해 변덕스런 날씨라는 기분이 전혀 안 드는 그런 평화로움이 거기엔 있다. 도로 옆 바위 계곡에서 장대하게 흘러내리는 폭포, 바로 이어지는 푸른 초원, 무채색의 나무 지붕을 이고 있는 차분한 주택들, 그리고 초원의 온갖 들꽃들, 민들레의 노란색부터 흰색, 붉은색, 주황색, 보라색, 갖가지 색들이 잔잔한 아름다움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길을 한껏 더 운치 있게 만드는 빗줄기.
잔잔한 음악이 그립다.

이곳 안시는 오뜨 사브와(Haute-Savoie) 주(제네바, 안시, 샤모니 지역)의 주도이다. 칼빈의 종교 개혁으로 인해 보수적이던 카톨릭 귀족들이 제네바에서 이곳 안시로 이동하여 카톨릭의 전통을 이으려 하자, 차차 제네바에서 안시로 사보아 성의 중심이 옮겨가게 되었다는 지역이다.
중국의 리장,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처럼 수로가 도시 가운데를 얽어놓고, 그 사이로 카페,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가 펼쳐지는 아기자기한 예쁜 도시라는 첫인상이다. 주변에는 오래된 성당과 고성들이 모여 있는 전형적인 구시가의 모습이다.


으스스한 한기를 녹이려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야채스프- 달팽이+새우 요리- 과일 샐러드에다 3형제분 팀의 맏형이 산 레드 와인을 곁들여 화기애애한 저녁 만찬을 즐겼다. 테라스에서 내려다보이는 불빛이 서려오는 수로변의 정경이 낡고 묵었지만 전혀 초라하거나 지저분하지않다. 오히려 격조 있고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구석구석 오밀 저밀 꾸민 장식들에서 작고 소박한 것에 정성을 기울임으로써 행복을 가꾸는 이곳 사람들의 여유, 느림의 미학이 엿보인다.
플라타너스 가지가 늘어지고 온갖 나무들이 무성한 수로를 따라, 써머 타임으로 한결 길어진 저녁, 어두워 오는 길을 산책했다.

     <안시 호수 입구에서 바라본 구시가지의 야경>

낯선 곳에서 혼자 잠자고 일어난 새벽, 완전한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며 커텐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하늘엔 별이 없고 여전히 깜깜하다. 계속 비가 오나 보다. 오늘은 비 내리는 안시의 구시가지 이곳저곳, 안시 호수를 둘러보게 생겼다.
시간이 지나 밖이 밝아오자 저 멀리 '성모 방문 기념 수도회'의 고딕식 첨탑의 종루와 회색빛 벽, 그보다 다소 어두운 갈색 지붕이 정면으로 보인다. 차가운 듯, 위엄이 어린 듯, 제복 입은 수사들같이 말이 없다. 주님 앞에, 진리 앞에 온전히 겸손하게 몸을 낮춘 자의 숭고한 뒷모습이 어린다. 평생을 주님께 서원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저들이 추구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청정함, 고결함. 그리고 나약한 인간의 속살까지 부둥켜 안고 고뇌하는, 드디어 평화로운 미소가 감도는 한 영혼의 부단한 몸짓이 보인다.
저 수도회는 12세기에 건립되었다는데, 수도회에 입회하기 전에 환자들을 직접 돌보는 봉사를 5년간 해야 자격이 주어진다고 한다.
시선을 거두려는 순간, 바로 창 앞의 아파트(주택)의 ㄷ자형과 중정에 관심이 쏠린다. 한 집, 한 집 개성이 묻어나는 소박한 삶들이 창문에서, 커텐에서, 베란다의 화분에서 이야기가 되어 새벽 공기를 장식한다. 가정의 도란거림이, 가족의 작은 부딪힘들이, 부부의 사랑과 고뇌가 감지되는 중정을 내다보며 멀리 있는 가족을 떠올렸다. 그들이 내게는 사랑임을, 살을 부비며 살아야 하는 실체임이 문득 강하게 느껴지면서 그리움에 젖는다.

 
9시에 안시 구시가지 산책이 시작된다.
알록달록 우산을 받쳐 들고 아치 형태의 문에 들어서니 아케이드가 회랑을 이루며 이어져 있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려는 상점 주인들의 일손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꽃을 파는 가게는 벽장식이 너무나 아기자기하고 화려하다. 마른 꽃들로 장식한 입구가 궁전 같다. 가게 주인들은 우리들과 시선을 맞추면서 한결같이 미소를 보낸다. 하루의 시작이 굉장히 활기에 넘친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흐르는 수로를 따라 오래되고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수로를 따라 카페, 레스토랑이 개성을 뽐내고 있다.
성당 3개를 방문했다.
먼저 성 노틀담 성당. 성당 앞 광장에는 키 작은 오벨리스크 돌기둥 아래 분수가 설치되어 있는데 꼭 우리나라의 당간지주 같은 느낌이다. 어제 샤모니의 성당 앞에서도 비슷한 느낌의 돌기둥을 보았는데 이 지역의 고대 신앙과도 관련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 성당은 15세기에 로마네스크 식으로 건립된 것을 이후 개,보수를 거쳤다고 한다. 출입구에 들어서면 성당 정면엔 장미 빛 스테인드 글라스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천정 돔을 통해 들어온 빛이 성당 내부의 조명 역할을 하도록 프레스코 벽화와 더불어 높이 장식되어 있다.
성모님께 이 자유로운 여행에 대한 감사와 안전하고 의미 깊은 여행에의 초대를 전구하는 촛불 봉헌을 했다. 성모상을 오래오래 응시하고 있던 젊은 여성과 시선이 마주치자 동시에 서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른쪽 기둥 코너의 대형 십자가, 그 위의 예수님의 모습이 어두운 성당 안을 경건한 분위기로 만들고 있다.
다음은 성 베드로 성당. 12세기 제네바에서 이곳으로 이동한 정통 가톨릭 성당으로 다각형, 다면체의 외형을 지닌 건물이다.
안에서는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평일 9시와 오후 5시 2번 있다는 미사인데 사전에 얘기 들었던 유럽의 늙어가는 가톨릭이라는 말답게 대부분의 신자들은 노인들이었다. 그러나 간간히 젊은이 특히 청소년도 눈에 띤다. 이 시간에 저 아이들이 학교에 안 가고 미사를? 의아했으나 평일 미사인데 신자들이 의외로 많아 놀랍다.
봉헌 시간이어서 웅장하게 울리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들으며 내부를 조용히 관람했다. 제대 정면에는 유명 화가의 그림이라는 성화가 걸려 있는데 멀어서 자세히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귀족 중심의 성당이 이곳 주민들과 공존을 이루며 대중 교회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다소 사이비적 신앙의 모습으로 변질되었었는데 다시금 쇄신을 통해 오늘날의 정통 가톨릭교회로 자리를 잡아가는 역사를 거친 성당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그 다음은 성 말리제(Saint Maurice) 성당.

이 지역의 전통적 중세 건축 양식의 외관을 지닌 성당이어서 건축가들이 관심을 많이 갖는 성당이라는데 돌을 사이사이에 박은 벽면이 아주 따뜻하고 정감이 어렸다. 로마네스크식, 고딕식을 병행했음에도 성당 내부의 가운데 기둥이 없어지면서 넓게 확 트여 제대가 한층 더 가까워지고 친근해지며 밝아진 느낌이다.
성모상의 성모님 모습은 약간 탄 피부를 지니고 있고 연륜이 어느 정도 묻어나는, 고생한 서민 아주머니의 자애와 지혜가 담긴 민중적이고 소박한 모습이다. 성모자상의 예수님은 성모님을 향해 한껏 어리광을 부리는 응석받이를 연상시켰다.
중세 시대의 성모자의 모습은 근엄하고 권위적이며 성모님, 예수님의 시선이 모두 정면을 향하고 있는 특징이 있음에 반해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간적인 모습을 취하는 경향이 있어 서로를 바라보고 사랑을 교감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머니의 자애와 아들의 어리광이 극에 달해 어느 화가는 성모님의 젖을 빨고 있는 아기 예수의 그림을 그려 파격적인 충격과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의 성모자상은 르네상스 시대의 느낌이 훨씬 더 강했다.

 
알프스에서 흘러내린 만년설의 물이 빠른 속도로 흘러 안시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어귀쯤의 수로 한가운데 아름다운 건물이 서 있었는데 이름이 '일 성'이란다. 뱃머리 모양으로 아름답게 서 있는 저 성은 불행히도 감옥 역할을 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일부 박물관, 일부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안시의 관광 명소답게 다른 곳보다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이 성 앞의 수로에는 백조도 노닐었다는데 오늘 같은 물살로 봐선 백조는 불가능할 것 같고, 호수 쪽으로 나아가니 오리 같은 물새가 점점이 유영하고 있기는 하다.
이 성이 바라보이는 카페에 앉아 따끈한 비엔나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엽서를 썼다.

안시성을 향해 걸어가는 골목이 아기자기하고 아주 예쁘다. 성 아래 구 시가지를 빙 둘러 있는 건물은 중세에는 자연적인 성벽의 역할을 했음직하고 낡고 오래된 건물은 호텔로 개조한 곳이 아주 많다. 베란다엔 화분을 내 놓아 꽃을 가꾸고, 페인트칠 정도의 보수한 벽면으로 아기자기한 덧창을 내어 실용과 조화의 멋을 살리며 자기가 흠숭하는 수호성인, 성모마리아 상을 외벽에 장식하는 등,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전통이 어린 그들의 낡음을 기꺼이 끌어안는 태도가 돋보였다. 내다버리고, 헐어버리고, 새롭고 미끈한 것으로 갈아치우는 것만이 미덕인 양 살아가는 우리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1600년, 1700년대에 지어졌다는 표시가 새겨진 육중한 문을 두드리면 옛날 옷을 입은 집사가 나와서 맞아줄 것만 같은 분위기. 가로등을 세울 공간이 없어 건물 벽에 붙여 설치한 노란 가로등의 따스한 불빛이 안겨주는 운치. 반들반들 닳아 디디면 미끄러질 것 같은 예쁜 무늬의 돌멩이 포석. 수백 년 동안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을 찾으며, 골목길과 돌다리들이 들려주는 오래 전 사람들의 소박한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걷다가 멈추고, 멈췄다가 다시 걷는 즐거움을 한없이 만끽해 본다.

 
안시의 구시가지에서는 향기가 난다. 꽃향기뿐만 아니라 역사의 향기, 오래 묵은 것들이 내는 향기를 함께 맡을 수 있다. 작고 사랑스러운, 동화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배어 있고 그 미소와 오래된 골목길, 낡은 건물들은 너무도 잘 어울린다.
안시에서는 급조한 도시, 인간이 짧은 시간에 계획해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분위기가 있다. 왜 프랑스인이 호수 주변까지 모두 합한 인구 8만, 구시가지에만 3만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 안시를 그토록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경사진 길을 올라 드디어 만나게 되는 안시성. 역시 중세 건축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후한 풍경이다. 텅 빈 내부에는 그림 전시, 퍼포먼스가 행해지고 있고, 예술적인 설치물이 있어 그것들을 감상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실제로 전시물들을 관람하는 시민들이 꽤 많다.
< 안시성 >창으로 내다보이는 안시 풍경, 밖에 나와 돌담에 기대어 바라보는 안시 호수 쪽의 전망, 붉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들은 아무리 오래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과묵하고 믿음직한 사람을 대할 때의 든든함으로 성채의 이곳저곳을 오래 응시하며 말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구 시가지를 벗어나 한가롭고 조용한 청정한 호수지역으로 나왔다. 유람선을 타고 호수 주변을 유람하기 위해서다.
선상에서 연어 샐러드와 리조토로 점심식사를 하면서 멋스러운 샤토, 생활보다는 파티를 위해 가끔씩 활용되는 인형들이 살 것 같은 예쁜 성, 착한 사람들만 살 것 같은 호수 주변의 멋진 집들을 조망했다. 다행히 잠시 동안이지만 구름이 살짝 걷힌 사이로 햇살이 비쳐 유럽에서 가장 청정하다는 물빛, 그 깨끗한 물빛을 볼 수 있었다.
알프스 연봉들은 구름이 낀 탓으로 확실히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빛의 무게를 더해 주면서 적당히 흐린 호수 주변의 풍경은 그래서 더 격조 있고 기품 있는 천상 세계를 대하는 것 같다. 모두들 자신이 살고 싶은 집, 타고 싶은 요트를 점찍으며, 찬탄과 부러움을 연발 토해내며 호수 유람을 즐겼다.

 

공군 조종사였던 생 텍쥐베리는 어느 날 안시-그르노빌 라인을 운항하다가 항로를 벗어났다고 한다. 안시 호수 때문이었다고 한다. 안시 호수가 너무 아름다워서, 호수를 보는 순간 아름다웠던 자기 어린 시절이 너무 그리워서 비행기를 고향으로 돌려버렸다는 것이다. 그가 죽기 전, 아니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불과 한 달 전의 일이란다. 그의 고향은 안시와 너무 가까운 리옹.

알프스에서 흘러나온 깨끗한 물, 따뜻하고 착한 마음을 지닌 미소가 예쁜 사람들, 너무나 아기자기하고 옹기종기 모여 사는 즐거움을 선물로 선사할 것 같은 향기 짙은 구시가지. 프랑스인이 가장 살고 싶어 한다는 안시를 향해 생 텍쥐베리가 아니라도 우리 모두는 삶의 항로를 돌려, 저 호숫가 아름다운 집에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바라보는 아름다움만이 진정한 행복은 아닐진저.

다소 혼탁하더라도 땀 냄새 풍기며 고함소리 질러가면서도 사랑으로 얽혀 있는 나와 가족과 이웃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만 살아가는 의미와 그 진정성을 찾을 수 있을진대, 허황된 꿈에서 깨어나 이런 곳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허울뿐이었던 교황청, 쓸쓸한 아비뇽



안시에서 프랑스 남부로 가는 길 - 아비뇽 교외의 리조트 - 생 베네제 다리 - 교황청



알프스 산자락의 조용하고 포근한, 유서 깊은 도시에 안겼던 짧은 시간에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일행을 태운 버스는 안시를 떠났다. 이제 본격적으로 남쪽을 향해, 우리의 원래의 여행 목적지인 남부 프랑스를 향해 달려야 한다.
샤모니, 몽블랑이라는 애피타이저로 한껏 식욕을 느낀 여행자의 눈은 메인 요리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반짝인다. 버스 안은 들뜸과 설레임으로 한결 경쾌해진다.

오늘의 목적지인 아비뇽까지 버스는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린다. 달릴수록 지평선으로 드러나는 넓은 목초지, 포도밭, 자두 밭, 올리브 숲,.......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의 노랫말 같은 평원이 계속 이어진다.
리용을 왼쪽으로 바라보며 약간 오른쪽으로 꺾어든 길 가에는 빨간 개양비귀꽃이 점점이, 때로는 지천으로 피어 있다. 그 선명한 붉은 색이라니. 우리 나라의 산야에서 피어나는 붉은 꽃들은 신열을 앓는, 한이 맺힌, 처절하게 피울음을 우는, 그런 식의 아픔으로 다가오는데 개양개비꽃의 붉음은 선명한 자유, 솔직한 외침, 정열과 낭만의 정서를 느끼게 해 준다. 그래서 몸이 한결 가볍다.
낮은 구릉을 넘어서면서부터 차창에 이슬이 맺히더니 비가 오락가락한다. 맑게 개지는 않아도, 햇살은 보이지 않아도 뿌렸다 그쳤다 하면서 연출해 내는 자연의 색감, 습기가 만들어내는 조화 속에 차창 풍경이 매우 운치 있다.

낮게 음악이 깔린다. 기타 선율이다.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인다. 싸이프러스 방풍림이 계속 펼쳐지는 들판으로 펼쳐지는 초록, 주황, 노랑의 색깔들은 내 마음을 완전 무장 해제시킨다. 한참 그렇게 우리를 휘감던 기타 음악은 노래 소리로 레파토리를 바꾸고 있다. 그런데, 이건 마 사장의 애창곡 시리즈.
조용조용 허밍으로 따라 부르던 내 볼을 타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콧등이 찡해 지고 서서히 목울대가 뻣뻣해지더니 드디어 통곡으로 바뀐다. 소리 없이 통곡을 쏟아내는 내 가슴이 먹먹하고 아프다. 왜일까? 순간 당황한 나는 버스 안을 휘돌아 보다가 마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또 하루 멀어져간다. /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간다. / 머물고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에 /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 네가 떠나간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
또 하루 멀어져간다.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평소에도 저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메어오는데, 예멘 사고 이후론 저 노래를 못 부르겠다. 사고 직전의 그 아름다운 일몰의 배경 음악으로 우린 저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따라 불렀다. 그리고 우리들의 이즈음을 돌아보며 삶의 애잔함, 허망함, 안타까움, 그리고 그리움, 희망을 잡으려 나름대로 경건할 정도의 침묵에 잠겨 들었다. 그리고 예기치도 않은 0.001초의 순간에 사고가 일어나고, 우린 떠나간 것도 아니고, 떠나보내지도 않은 이별을 했다. 사랑은 그렇게 떠나갔다. 그 후 매일 이별하는 연습을 해 왔다. 발버둥 치면서.
아직 이별이 다 되지도 않았는데 저이는 왜 저리 가혹한 걸까. 차라리 잔인하다. 아직도 저런 식으로 자신을 자학하고 있다니. 그날의 레파토리 그대로, 그 CD 그대로를 들으면서 뭘 어쩌자고. 저게 마 사장의 이별법인가?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삼키려고 무던히 애를 먹었다. 주변의 영문 몰라 할 일행에게, 특히 마 사장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했다. 어디에 눈물이 그렇게 숨어있었는지 제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라,......"
이어지는 노래들, 난 멈추라고 하지 못했다. 프로방스 지역의 산야는 너무도 무심히 내 시야에 달려들었다가는 멀어져 가면서 재롱을 부린다. 감정을 추스려야겠다.
아무리 여행이 점이 아니라 선이라지만 안시에서 아비뇽을 연결하는 선상의 여행 시간은 이렇게 잔인하게 흘렀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터널을 이룬 멋진 길에 접어들었을 때에야 간신히 진정을 하고, 새로운 풍광에 몰입하려 과장된 수선을 떨었다. 이름 모를 하얀 꽃들이 만발한 울타리를 지닌 골프 리조트가 오늘의 숙소이다. 아비뇽 유수로 유명한 도시이지만, 오늘날 연극의 도시로 더 부각되는 곳에서 묵게 되는 관계로 구시가지에 있는 호텔일 거라 예상했는데 예상 밖이다.
거기서 만난 현지가이드의 첫인상, 기대 밖이다. 파리에서 30년 가이드 경력을 지닌 베테랑이라니 첫인상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되겠지만, 제발 노련한, 박식한, 멋진 가이드이길 기대해 본다.
골프 코스가 있는 리조트라 일행들의 관심이 비상해진다. 그러나 골프를 전혀 안치는 나로서는 홀의 상태나 연습 장소에 별 흥미를 못 느끼겠다. 숙소도 지금껏 테마여행사를 통해 다녀본 곳들의 호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아비뇽과도 조화롭지 못하고, 프로방스와는 더더욱 안 어울리는 분위기이다.
저녁 식사의 메뉴, 맛, 모두 아니올씨다의 수준.

호수 위를 향해 골프공을 날리는 연습장에서 일행들은 몸이 근질거리는지 주변의 공을 주워 팔 힘으로 멀리 날리면서 실력들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눈치다.
잔디밭을 조금 걷다가 책 읽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일찌감치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천장, 머리맡의 전구가 모두 먹통이다. complain 결과는 거실의 스탠드를 옮겨 침실로 가져온 것. 혼자 쓰는 방이 가장 넓은 방이었다는 아이러니.
일단 빛은 밝았으므로 아무 생각 안 하고 독서삼매경으로 들어갔다.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환기 안 된 방의 퀴퀴한 냄새를 잊을 수 있었으니.

언제 비가 내렸나는 듯 맑게 갠 아침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다소 춥다. 지중해로부터 올라오는 미스트랄이란다. 오리털 내피점퍼를 벗지 못하겠다. 오월의 남프랑스의 햇살 강한 날씨를 언제 느낄 수 있으려는지 마음이 슬슬 초조해졌지만, 이 도시의 현재와 이 스산하게 휘감는 바람이 어쩌면 더 어울릴 거라는 생각도 해 본다. 여행 시작에서 마 사장이 강조한 말이다. 상황을 즐겨라.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라.
아비뇽 성을 향해 이동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 론 강. 유속이 무척 빠르다. 어제 어디에선가부터 우리와 함께 달려왔던 그 강이다. 그 강 위에 있는 성 베네제 교가 아비뇽에서 만나게 되는 첫 방문지이다.

 

아비뇽 다리라 불리는 성 베네제 교(Le Pont St. Benezet)는 아비뇽에서 교황청 다음으로 유명하다. 론 강을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프랑스 동요 '아비뇽 다리 위에서'로 더욱 잘 알려진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아르데슈 작은 마을의 목동이던 브노아란 소년이 12세 때 아비뇽에 다리를 건설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 (훗날 생 베네제로 명명된) 소년 브노아와 그의 친구들은 아비뇽으로 건너갔고 1177년 아비뇽의 다리 건설이 시작되었다. 다리의 길이는 약 900m이고 22개의 기품 있는 아치로 이루어졌다. 1185년에 완공된 최초의 석조 다리로서 당시 기술로는 엄청난 대공사였다. <교황청 성벽 앞에서 바라본 성 메네체 교>
소년 브노아는 1184년 브노아 사후 그의 친구들의 노력으로 교황으로부터 'Freres Pontifes(주교의 형제)'라는 종교적 작위를 받았다. 'Pontife(퐁티프)'는 주교, 대주교를 뜻하는 말인데 다리를 뜻하는 'Pont(퐁)'이라는 단어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이 다리는 당시 프랑스 남부 중심지인 리옹과 지중해를,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육로로 연결하는데 대내외적으로 막중한 기능을 수행했으나 1660년에 일어난 론 강의 대 범람으로 대부분이 유실되고 4개의 아치만이 남아 몰락한 구교황청의 옛 영광처럼 쓸쓸하기 그지없다. 교황청과 함께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데 온전하지 못하고 끊어진 채 남아 있어 더 유명세를 치르는 것은 아닐까 한다.
이른 아침, 최초로 입장한 방문객인지라 다리 위는 우리들의 독차지가 되었다. 다리 중간에 산 니콜라라고 불리는 작은 교회와 그 교회의 아래층에 성 베네제를 기리는 교회가 있고, 교황청 성 안쪽과 연결되는 다리 입구는 출입을 막을 때 쓰는 다리 난간을 올리는 부표가 있어 기능면에서 아주 정교했음을 볼 수 있었다.

다리 위에서 도도히 흐르는 론 강의 물줄기를 굽어보았다. 역사의 소용돌이와는 무관한 듯 침묵으로 일관된 물줄기는 인간의 욕망과 부침을 비웃는 것만 같다. 다리 위에서 22개의 아치가 모두 남아있는 900m 길이의 다리의 위용을 상상해 보았다. 1/7만 남아있는 다리의 규모가 이러할진대 7배 길이의 다리의 규모와 우람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교황청의 멋진 성채가 발하였을 권위, 힘은 백성을 굴복시키고도 남을 어마어마한 장관을 연출했으리라. 이곳이 아무리 유수에 해당하는 날개 잃은 허울만의 교황이 있었던 교황청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교황청 방향을 바라보며 이곳을 빙 둘러 원을 그리고 서서 함께 춤추며 노래불렀을 동네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비뇽 다리 위에서 / 우리는 춤을 춰. 모두 원을 그리며
아름다운 부인들이 이렇게 해. / 그리고 또 다시 이렇게.
멋진 아저씨들이 이렇게 해. / 그리고 또 다시 이렇게.
제화공들이 이렇게 해. / 그리고 또 다시 이렇게.
세탁부들이 이렇게 해. / 그리고 또 다시 이렇게.“


아비뇽의 상징인 교황청
. 아비뇽을 찾는 여행객들 대부분이 이 교황청을?보기 위해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은 프랑스 제 10대 명소로 한 해에만도 약 65만 명의 관광객이 관람한다고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휑한 느낌이다. 프랑스 왕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프랑스 출신 교황 클레멘스 5세가 로마로 가지 못하고 아비뇽에 터를 잡았다. 이 사건이 바로 1309~1377까지 7대에 걸쳐 로마 교황청을 남프랑스 론 강변의 도시 아비뇽으로 이전한 '아비뇽 유수'이다. 고대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강제 이주된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유수'로 표현한 것이다.


       <성 베네제 교에서 바라본 교황청 전경>                             <아비뇽 교황청 정면 모습>


중세 이후 왕과 교황 사이의 권력 다툼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13세기 후반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Philippe IV le Bel, 1285~1314)는 국가 통치권이 걸린 영국과의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려 하였다. 이에 교황 보니파스 8세(Boniface VIII)가 강력히 반대하였고, 필리피 4세는 프랑스 왕국 밖으로 은 반출을 금지함으로써 이에 응수하였다. 로마 교황은 프랑스 주교를 로마로 소환했고 필리프 4세는 1302년 노트르담 성당에서 제후, 성직자, 시민 대표로 구성된 최초의 삼부회를 소집하여 독립을 선언하였고, 이후 프랑스 교회는 교황에 의해 파문당했다. 그 다음해인 1303년에 필리프 4세는 로마 동쪽 아나니(Anagni)에 있는 별장에 체류해 있던 교황 보니파스에게 군대를 보내 퇴위를 협박했고 끝내 거부하였으나 그 충격으로 한 달만에 사망에 이른다. 이 사건이 아비뇽 유수의 발단이 된 '아냐니 사건'인데(놓아줬다는 설도 있고, 주민에 의해 풀려났다는 설도 있음) 이 굴욕적인 사건으로 인해 모든 기독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었다. 바야흐로 프랑스 왕에 의한 수렴청정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프랑스 왕의 영향이 커진 가운데 다음 교황으로 선출된 브노와 11세는 고작 몇 달간만 통치했고, 1305년 6월 5일 보르도의 주교 베르트랑 드 고(Bertrand de Got)가 클레멘스 5세라는 이름을 얻으며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로마로 가려던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왕 가까운 곳에 머물도록 압력을 받아 이곳 아비뇽에 머물게 되었는데 원래 아비뇽 인근 지역은 1290년부터 교황의 봉신이었던 프로방스의 백작의 소유였는데 매우 평화롭고 온화한 기후 조건을 가진 지역으로 론 강을 끼고 동서남북으로 교역할 수 있는 천혜의 입지로 이전부터 주목을 받던 곳이다.

아비뇽의 교황청은 1335년 브노아 12세(Benoit XII)가 건설을 시작해 그의 계승자인 클레멘스 6세(Clement VI)까지 20여년에 걸쳐 지어졌다. 15,000평방미터의 부지에 4개의 성당 건물을 비롯, 20여 채로 구성된 고딕 양식의 교황청은 Palais(궁)이라기보다 육중한 요새 같은 인상을 풍긴다. 특히 아비뇽 구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14세기의 거대한 성벽과 성 안에 또 하나의 성이 있는 듯한 형상은 그야말로 요새의 형상이다. 또 재미있는 것은 철통 방어를 자랑할 법한 육중한 외관과는 달리 남아있는 것은 텅 빈 건물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대부분의 유물과 흔적들이 전쟁과 테러로 소실되거나 파괴되었다.
호화스럽다 못해 사치스러워 종교개혁의 발단이 된 로마 바티칸 교황청이 16세기에 건축돼 르네상스와 바로크적 역량이 총집합되었던 것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느끼는 황량함이랄까, 황폐함이랄까. 이탈리아의 저명한 예술가 마태오 지오바네티(Matteo Giovannetti)의 프레스코 장식들이 일부 남아 있는 정도이다.


아비뇽 교황청 시대의 교황들은 가톨릭 행정제도의 개편이나 내부의 개혁 조치, 대학 설립 등 눈에 띄는 업적을 수립하기도 하였지만 아비뇽의 교황청은 가톨릭의 본산인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였을까 (아비뇽 교황청 시대 이후 로마교황청이야말로 부패와 타락의 극치를 보이긴 했지만 ) 이상한 행동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암에 걸린 클레멘스 5세는 소화불량을 치료하기 위해 에메랄드 가루를 먹었는데 너무 과다하게 복용한 나머지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데, 에메랄드가 실제로 소화불량에 효과가 있다고는 하지만,......
다른 교황은 누군가로부터 '우주의 쓰레기'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병을 얻어 결국 죽게 되었다는, 또 금으로 치장하는 것만이 영예를 드러내는 길이라 생각했다던 교황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거대한 프레스코의 방에는 사냥의 호화로운 그림으로 가득 차 있어 교황이 누린 호사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가게 해 주지만 거대한 성을 쌓고 고립의 생활을 즐겼던 것도 같지만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유배생활을 하는 스트레스가 그들을 미치게 했던 것인가?

이곳에 교황청을 지은 것은 성 베네제 다리가 갖는 역할로 인한 이곳의 교통 요충지로서의 입지 요건 때문이라는 것에 상당히 공감되었다. 화려한 외관을 가진 교황청은 유럽의 고딕 양식 건물 중에서 가장 귀족적인 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다. 비록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왕권의 승리라는 역사적 의도는 담고 있지만 14세기 기독교의 본거지로서의 권위와 위엄에 걸맞을 만큼 호화스럽고 견고하다. 비록 유물은 프랑스 혁명 때 대부분 약탈당하거나 파괴되어 남은 것이 없지만 성 자체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황제의 용병들이 침입해 올 것에 대비해 무척 견고하고 튼튼하게 세워져 방어 요새적인 개념이 강하다.
추기경들이 모여 교황을 선출하던 장소인 그랑 티넬에는 주방이 달려 있고, 그 주방은 환기를 위해 거대한 굴뚝 천장이 정교하게 돌로 쌓여 있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것만도 목이 아플 만큼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압권은 사냥에 관한 14세기 벽화가 그려진 사슴 홀이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곳이라 아쉬웠지만 천장과 4벽면이 온통 화려한 색으로 그려진 프레스코화로 사냥 장면의 생생함은 당시 교황들의 화려한 삶의 단면을 대하는 것 같았다.
바닥을 장식했던 타일 조각 몇 점, 당시 사용했던 깨진 도자기 파편, 금, 은, 촛대 사진 정도의 내용물이 거대한 성의 규모와는 대조적인 쓸쓸함, 황량함, 무상감을 느끼게 했고, 장미꽃 전시로 복잡하게 바글대는 관람객들의 표정에는 이 성의 주인들이었던 그들에 대한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세속화된 부귀와 영화의 뒤끝이 갖는 무의미함, 무가치함, 허망함이 느껴져 인간의 나약함이 초라하기까지 했다.

망루 위에 올라가 교황청 일대의 풍경을 조망했다. 곳곳에 십자가를 응용한 건축 장식이 미학적으로 돋보였고, 탑의 지붕 장식에는 동물, 사람 얼굴들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어 또 다른 볼거리가 되었는데, 어느 심심한 장인의 장난이었는지 신성한 교황청 건물의 부속 장식물에 예쁘게 드러난 여자의 엉덩이가 있어 짓궂은 장난을 즐기는 남자들이 킥킥대기도 했다.
 
광장에는 중세 마녀를 연상시키는 가면과 의상을 입고 키를 높인 퍼포먼스하는 사람들, 기타, 섹스폰 등의 연주자들, 커다란 개를 끌고 산책하는 부부, 한가하게 앉아 사람 구경하는 이들로 자유로웠다.
울퉁불퉁한 거대한 바위를 자연적인 축대로 삼아 거기에 기대어 기둥을 쌓고 벽을 만든 교황청 외곽 벽을 감탄을 연발하면서 바라보다가 교황청을 벗어나는 지점의 어느 건물 창문에서 재미있는 그림을 발견했다. 연극의 도시라는 증거를 발견한 기쁨의 함성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여름철에는 1947년 이래로 이곳에서 유럽의 연극 공연의 축제가 열린다는데 건물의 창문마다 연극 장면 같은 배우들의 그림들이 있어 지나가는 행인들을 관객으로 하여 공연 중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념품 가게의 진열장에 유난히 인형들이 많았는데, 각종 의상의 사람들도 이 도시의 연극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카드, 엽서의 그림도 아주 만화를 연상시킬 개성 있는 것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곳의 연극에 대해 많은 관심이 생겼지만 오늘의 아비뇽 일정은 교황청에서 끝나는 것이어서 오늘날의 아비뇽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다.
진열장의 다양한 표정, 의상, 동작의 인형들에서 연극의 주인공을 모방한 캐릭터를 찾아보려는 시도를 해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하나보다.
문득 고개 들어 내 시선 속으로 들어온 어느 발코니에 앉은 모녀의 모습. 아쉬운 마음이 많아서인지 그곳이 연극 무대이고 그들은 지금 이 세상의 지고한 사랑이라는 주제의 연극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아를, 고흐의 흔적을 찾아서



아를 가는 길 - 생 트로핌 성당 - 아를 병원 - 밤의 카페 - 로마 원형경기장 - 로마 원형극장 - 고흐 그림 배경의 도개교



날씨는 다시 맑아지면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아비뇽을 벗어나 우리를 태운 버스는 남쪽으로 달린다. 남프랑스의 넓은 평원 - 포도밭, 자두밭, 목초지, 밀밭의 광활한 초록이 싸이프러스 방풍림을 경계로 구획되어 끝도 없이 뻗어 있다.
평원이 주는 시원함, 풍요로움. 간혹 소 떼들이 풀을 뜯는 들판을 지날 때면 내 마음도 덩달아 평화로운 한낮의 햇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대한 로마 시대의 수도교도 지난다. 우린 지금 빈센트 반 고흐의 마을인 아를로 가고 있다.

멋들어진 플라타너스가 터널을 이루는 길을 한참 달려 아를에 입성하기 4Km 전쯤 넓은 목초지가 펼쳐진 한가운데 한가하게 서 있는 호텔 겸 레스토랑 건물.
Le Mas de la Fenie're. 점심 식사를 위해 들른 곳이다. 200m쯤 야생화와 목초가 만발한 길을 걸어 들어가니 굵은 뽕나무가 등나무 터널처럼 그늘을 드리우는 예쁜 정원, 노랑 황토색의 작고 따스한 느낌의 건물.


주인의 취향이 아주 독특하다. 정원의 꾸밈은 물론 레스토랑 천정, 벽면 곳곳, 현관의 손잡이까지 세심한 장식을 한 게 아주 돋보인다. 세팅된 식탁의 냅킨 하나까지 손님을 배려하는 정성됨이 느껴져 아주 기분이 우쭐해진다. 소박한 정취가 편안함과 세련됨으로 다가온다. 여행지여서 느낄 수 있는 여유와는 또 다른 종류의 삶의 여유를 이곳에서 기웃거리며 기쁨에 젖는다.
요란하지 않으면서 개성적인 인테리어에 애정을 쏟으며 강한 자부심을 느끼는 프랑스인의 면모를 다시금 대하니 이들이야말로 삶을 긍정하면서 '카르페 디엠'(현재, 지금의 매 순간에 충실)의 삶에서 행복을 가꾸는 지혜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린 어떤가? 실체를 알 수 없는 허상을 쫓으며, 언제 올지 모르는 내일의 그 어느 날엔 좀 더 안정적이고 편안한 자리에 앉겠다고 현재를, 내 앞에 주어진 것들을 대수롭잖게, 하찮게 여기는 우리들의 불안한 오늘은 그래서 늘 불만스럽다. 오늘이, 지금이 축제의 시간인데. 내일을 볼모로 잡고 낭비하듯 지나쳐버리는 오늘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 법인데.
점심 메뉴 또한 훌륭하다. 이 집은 자기집에서 생산한 모든 것으로 음식을 장만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한 집이라고. 웰빙 음식으로 야채 샐러드가 한 접시 수북하게 담겨 나왔다. 치커리, 상추가 중심인데 소스가 담백하여 한 접시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이어서 닭다리 조림과 호박범벅. 백숙 수준의 닭다리는 어찌나 쫄깃하고 담백하던지. 특히 그 유명한 프랑스 소금에 찍어 먹으니 아주 부드럽고 맛있다. 이어서 나온 후식은 산딸기 시럽의 푸딩. 달지도 않고 환상적인 맛이다.
검은 고양이가 초록빛 눈빛을 빛내며 쏘아보는 뜰에서 이 집 딸이 풀밭에서 뛰어논다. 자연의 아이를 연상시키는 건강한 모습을 바라보며 야외 의자에 앉아 맛이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여행자의 자유와 낭만을 마음껏 만끽했다.
식사 후 긴 목초지 가운뎃길을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숨어있는 야생화를 꼼꼼히 찾아보는 여유와 한가한 시간을 잠시 가졌다.

남프랑스의 프로방스 지역 아를은 인구 5만 명 정도의 아주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도시 그 자체보다 빈센트 반 고흐가 열광적인 작품 활동을 했던 곳으로 더 유명하다. 반 고흐 덕분에 찾는 이가 일 년에 20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마을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골목은 좁아 웬만한 차량은 모두 성벽 밖에 정차한다.

파리 생활에 싫증을 느낀 고흐는 그의 동생 테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그림하고의 악연이 지겨워진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을 잃게 한다.'라는 말이 옳은 말이겠지만 그와 반대로 진정한 애정은 예술을 싫어하는 법이다. ......인간으로서도 참을 수 없는 숱한 환쟁이 녀석들을 안 만나기 위해서 남프랑스 어딘가에 틀어박히고 싶다."

그 후 1888년 2월 남프랑스로 이주하여 이곳 아를에서 약 10개월 정도 머물렀고 이곳에서 그린 그림이 유화 100여 점에 달한다고 하니 고흐와 아를은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아를에서의 그의 그림은 색채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다. 대담한 색으로 고양된 격렬함, 확고하고 분명하며 향상된 이미지가 분명히 드러났다. 햇살이 밝게 천지에 가득히 부서지는 남프랑스 특유의 자연 속에서 그의 붓은 새로운 날개를 달았음이 분명하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짙은 블랙 커피를 몇 잔이나 마시고 몸으로 고통을 느끼면서 그리는 가운데 황색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해가 뜨면 질 때까지 온종일 죽도록 그림을 그리고, 밤이 되면 머리가 아파올 때까지 독한 압셍트를 마시고서 창녀를 찾거나 집에 돌아와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아를에 정착한 후 자신을 뒷바라지 해 준 동생 테오에게 자신의 생활을 보여주기 위해 ‘화가의 방'으로 불리는 자신의 방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다.
<그림 밤의 카페 테라스 실제 풍경>구시가지 정겨운 골목을 돌고 돌아 도착한 밤의 카페. 노란색 벽과 차양, 테이블 의자. 그림 속의 낭만은 많이 퇴색했지만 그림 속의 색깔은 그대로다.
고흐는 당시 주류 예술인들이 드나들던 이 카페에 비주류로, 가난함으로 어울리지 못하고 싸구려 술 압셍트에 취해 이리저리 외톨이로 배회하며 그림을 그렸다.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히 물감을 사서 그 물감을 아껴 가며.......
저 카페를 그림으로 남길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가끔 홀로 그 카페에서 차를, 술을 마시고 그림값 대신 지불했다는 그림, 그 그림이 지금 이 도시를, 저 카페를 먹여 살리고 있다. 그런데 카페의 내부는 전혀 고흐적이지 않다. 현대적인 여자 배우, 다소 창부의 싸구려 분위기가 풍기는 여자의 사진이 온통 벽면을 가득 메워 이 카페의 주인은 고흐를 고요히 모독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바깥에서 바라본 어떤 카페의 정경으로
푸른 밤, 카페 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
그 옆으로 별이 반짝이는 파란 하늘이 보인다.
밤 풍경이나 밤이 주는 느낌, 혹은 밤 그 자체를 그 자리에서 그리는 것이 아주 재미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글 중
 
짙은 청색의 밤하늘 아래 노란색 불이 환하게 켜진 그림 속의 밤의 카페는 부드러운 밤기운에 포근함마저 감돈다. 고흐는 사랑의 빛인 노랑, 무한을 의미하는 청색, 그리고 희망을 상징하는 별을 표현하여 자신이 느낀 대로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 어둔 하늘과 불빛 아래 노란색 카페가 이루는 대조가 특징적이다. 이 작품은 고흐의 그림 중 최초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그린 그림이고, 밝은 색조를 찾아 남쪽으로 온 그가 밤하늘의 별을 그토록 좋아하게 된 것은 죽음을 의식한 그의 정신 세계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물론 이 그림을 그릴 때의 그는 온전한 정신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가 찾은 그 시간에는 위와 같은 그림의 정취를 느낄 수가 없었다. 가운데 광장까지 노란색 차양의 좌석을 만들어 그림 속의 장소인 이곳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상업적인 속셈을 드러내 보이긴 하지만 아직은 손님이 없어 한산하다.
노란색 차양 위로 회색 하늘이 올려다 보인다. 밤이 되면 저 하늘은 푸른색으로 빛나고, 주먹만한 별도 쏟아질까? 그림을 그리던 그 자리에는 '밤의 카페 테라스' 그림 복사본이 세워져 있고 포토 존으로 각광받을 그곳엔 얌체족의 빨간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광장쪽 파라솔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맥주 한 잔을 들이키며 그림을 그릴 때의 고흐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정신 병원의 정원'은 빈센트 반 고흐가 머물렀던 병원의 정원을 그린 것인데, 지금은 병원이 아니라 미디어 센터로 바뀌었지만 '에스파스 반 고흐'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고 정원도 그림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그림을 그렸을 위치인 2층으로 올라가 그림과 똑같은 구도의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출입금지여서 아쉬웠다. 최대한 비슷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보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원에 세워 놓은 복사본 그림><그림과 비슷한 위치의 실제 정원>


이어서 도개교 그림의 현장을 찾아 교외로 나갔다. 길을 잘못 들어 이리저리 헤매다 간신히 찾았지만 아를 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복원된 도개교가 있었다.
끼니도 거른 채 술 취한 몽롱한 정신으로 화구를 끼고, 이곳까지 걸어왔을 고흐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의 자화상들에 나타나 있듯, 움푹 꺼진 볼에 수염은 거무스름하니 볼 품 없이 마구 자라 있고, 남루한 옷차림에 빈혈기 있는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그의 마음 속에 들끓는 고뇌와 예술적 영감들로 인해 쏘아보듯 예리한 눈빛을 빛내며 어쩌면 외로움에 끊임없이 혼잣말을 주절거리며 걷지는 않았을까?

<도개교가 있는 풍경 그림><실제 풍경>


그런 그도 이도개교가 있는 개울가에 도달했을 때 이곳의 한적한 풍경에서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강한 영감과 함께 어떤 위안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인적없는 고즈넉함, 햇살 가득히 내리쬐는 농촌의 한가로움과 평화스러움. 그곳은 그림 속의 분위기 그대로였다.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수다소리도, 도개교 위로 지나가는 마차의 삐그덕거리는 소리도 그대로 들릴 것 같은 정겨움이 느껴진다. 개울따라 어슬렁어슬렁 마냥 걷고 싶은 그런 길이 그곳에는 있었다.

<그림밤이 아니어서 별이 쏟아지는 론 강가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별이 빛나는 밤' 그림의 배경이 된 론 강가 분위기도 실제로 느껴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청색의 색조, 그가 갈구한 사람의, 세상의 따뜻한 정, 관심, 사랑을 닮은 노란 별들. 그의 갈망이 얼마나 컸으면 저처럼 주먹만한 별들이 호수에 풍덩 떨어질 듯 찬란할까? 강하고 거친 붓 터치에 실린 그의?마음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테오에게.
나는 지금 아를의 강변에 앉아 있다.욱신거리는 오른쪽 귀에서 강물 소리가 들린다.
별들은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빛나고 있지만
저 맑음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건지......
두 남녀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고 있다.
이 강변에 앉을 때마다 목 밑까지 출렁이는 별빛의 흐름을 느낀단다.
나를 꿈꾸게 만든 것은 저 별빛이었을까?
별이 빛나는 밤에 캔버스는 초라한 돛단배처럼 어딘가로 나를 태워 갈 것 같기도 하다.
테오,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타라스콩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듯이 별들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흔들리는 기차에서도 별은 빛나고 있다.
흔들리듯 가라앉듯 자꾸만 강물 쪽으로 무언가 빨려 들어가고 있다.
강변의 가로등, 고통스러운 것들은 저마다 빛을?뿜어내고 있구나.
심장처럼 파닥거리는 별빛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다.
나는 노란색의 집으로 가서 숨죽여야 할 테지만
별빛은 계속 빛날 테지만,
캔버스에서 별빛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테오, 나의 영혼이 물감처럼 하늘로 번져갈 수 있을까?
트왈라잇 블루, 푸른 대기를 뚫고 별 하나가 또 나오고 있다.??
------1888년 6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고흐의 편지


고흐는 생전에 36장의 자화상을 남겼다. 많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리지만 유독 고흐는 자화상과 정물을 많이 그렸는데, 모델을 구할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고흐의 '자화상' 그림 >
그 중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은 그가 아주 슬픈 일을 겪고 난 뒤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반 고흐는 동료 화가인 고갱을 특히 좋아했다. 아를에 그를 불러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 생활비를 아낄 목적이기도 했지만 요리를 잘 하는 고갱의 덕분으로 고흐는 그와의 생활에서 많은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그들은 작품 세계에 대해서도 열심히 토론했는데, 추구하는 방향도 달랐고 성격도 맞지 않아 늘 티격태격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고갱이 더 이상 반 고흐와 같이 지낼 수 없다며 그동안 함께 쓰던 아틀리에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고흐가 고갱에게 너무나 집착해 있었기 때문에 그 부담감으로 고갱이 떠난 것이라고도 하지만 너무 화가 난 고흐는 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고 말았다.
친구도 떠나버리고 한 쪽 귀마저 잃어버린 반 고흐. 그는 그런 처량한 자신의 모습도 숨김없이 화폭에 담았다. 화가는 진실을 그리는 사람인 까닭에 자화상조차 실제보다 멋있게 꾸며 그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자신을 깊이 응시하며 내면을 성찰하여 화폭에 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자신을 학대하고 죽이고, 다시 용서하면서 보냈을까? 인간의 본질을 선과 색채로 담아내면서 그림을 통해 인간 탐구에 몰입했던 그의 모습은 정녕 철학자, 고행의 길에 나선 수도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다.

아를에는 로마 유적지도 많다.
남프랑스에 있는 여러 로마 유적 중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원형경기장. 좁은골목길을 요리조리 돌다가 맞닥뜨린 원형경기장의 비현실적일 정도의 어마어마한 위용 앞에서는 입이 딱 벌어진다. 경기장은 2만 명의 수용능력을 갖춘 규모로 기둥에 사용된 돌의 크기도 어마어마하다. 이 원형 경기장의 규모로 보아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의 당시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경기장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아를은 한 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아기자기하게 작은 도시이다. 그야말로 '도시'라기보다는 '마을'이라는 호칭이 어울릴 정도이다.
그러나 이곳은 원형경기장을 세울 정도로 로마 시대에는 정치적, 경제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였던가 보다. 이 경기장에서는 현재도 투우 경기 및 각종 공연이 펼쳐진단다.

고흐는 투우 경기를 보러 온 사람들, 투우 장면의 그림도 즐겨 그렸다. 경기장 정문 앞에는 고흐의 그림이 설치되어 있다. 그림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경기가 있는 날의 이곳의 분위기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이곳에 캔버스를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던 고흐는 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투우 장면을 실제로 볼 수 있었을까?
경기장 바로 옆에 '반 고흐 재단'이라는 작은 미술관이 있고, 그곳에는 반 고흐의 그림을 재해석한 보테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들, 반 고흐의 편지와 같은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는데 들르지 못했다.

이어서 방문한 곳은 로마극장.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적지는 폐허로 변해, 그 일부만 복원이 되었지만 어마어마한 양의 돌기둥과 돌조각의 파편들, 넓은 부지로 보아 굉장한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반 타원형태의 극장의 무대 부분은 모두 부서져 부분적으로 복원하긴 했지만 무대 부분은 목재로 짰고 그리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난간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건너뛰어야 할 정도여서 배우처럼 무대 위에 서 볼 수가 없다. 허락한다면 무대 위에서 목청껏 노래라도 불러볼 수 있으련만.
무대 뒤의 커다란 기둥 아래로 쌓여있는 돌무더기에 앉아 관중석을 바라보니 관중석 스탠드 뒤로 보이는 담쟁이 넝쿨이 어우러진 건물과 음향, 조명 시설을 위한 펜스가 또 다른 연극 무대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예술적이다. 목소리 맞춰 노래라도 불러주기를 바랐지만 아닌 것 같다. 둘씩 셋씩 여기저기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여행객들의 모습이 시공을 초월해 배우 같고, 관객 같아 유대감이 느껴졌다.
이곳의 상당한 돌기둥들이 시가지 안의 생 트로핀 성당을 지을 때 기둥으로 사용되었다니 세월과 함께 영원한 것은 없고, 사물의 가치매김도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상당히 주관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어서 시청 앞 광장으로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다양한 얼굴들로 북적댄다. 아를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리라.
광장에는 부러진 오벨리스크가 높이 세워져 있는데, 보수해서 세웠다고는 하나 이집트의 잔재가 이곳에 있다는 건 다소 생뚱맞아 보였다.
BC 46년에 건립되었다는 로마극장의 돌기둥들을 옮겨와 성당 기둥으로 삼았다는 생 트로핀 교회는 7세기 건축물이고 14-15세기에 대대적으로 개보수를 했다고 한다. 정면 파사드, 내부의 기둥에서 로마 건축물의 기둥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해 보다가 그도 부질없음을 깨닫고 그만 두었다.

이곳 아를은 빈센트 반 고흐 때문에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도시이지만 지리적인 위치로 볼 때 중세 시대로부터 '로마-아를-툴르즈-성 세바스티안-스페인 산티아고'로 이어지는 가톨릭 성지 순례 코스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단다. 그렇다면 숱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이처럼 규모가 큰 로마 유적을 남길 만큼 전략적인 장소였다는 것도 알 수 있겠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세계적인 사진학교와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골목의 운치 있는 갤러리들을 지나 다시 밤의 카페 테라스가 있는 광장으로 왔다. 오늘 묵을 숙소가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 광장은 로마 시대에는 기둥으로 빙 둘러져 있는 포럼이었다는데 지금은 단 두 개의 기둥만이 남아 있고 그 호텔의 주인은 그 기둥을 그대로 살려 건물을 지어 역사적인 장소를 보존하고 있는 셈이었다.
애당초 고흐의 카페에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지만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그 집은 음식이 너무 맛없어 자기들은 절대로 그 집에서 식사를 안 한단다. 그 옆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바라보기만 하란다.
우리는 폭소를 자아내면서 그 옆 카페인 'La apostrophe'로 갔다. 그리고 그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처음 먹어 본 안심 생고기 샐러드, 카파치오 드레싱 얹은 4가지 해산물 꼬치, 후식으로 먹은 티라미슈 케잌,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로 옆의 노란 벽과 차양의 고흐 카페를 바라보며 고소를 금치 못하였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내부의 인테리어를 보니 주인의 취향이 고흐와는 영판 상관이 없더라.'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북적거리는 '쉬어가기 카페'와 손님이 없어 썰렁한 '고흐 카페'의 대조는 세상 사는 이치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덧붙여 한 가지.
숙소에서 간단한 짐 정리 후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호텔을 나서는 순간 엄청난 폭발음 소리에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놀람에 이어 공포감이 밀려오고 대책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내 상황을 아는 이 없는 이곳에서 그 순간 날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고, 난 두려움에 진정이 안 되는 가슴을 안고 한참을 얼어붙은 듯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큰 소리에 대한 충격, 공포감이 이젠 내게서 사라진 줄 알았다. 작년 사고 이후 문 닫히는 소리, 천둥소리, 오토바이 소리, 시골의 멧돼지 잡는 사냥꾼의 총소리 등에 대책 없이 놀라서 부들부들 떨던 때에 비해 이젠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줄 알았다.
폭발음이 일어난 상황을 알고 나서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후 일어섰으나 걸을 수가 없었다. 그냥 도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아니 드러눕고 싶었다. 여행 떠나고 처음으로 외롭고, 두렵고, 낯설고, 일행들과 겉도는 기분이다.
광장 밖도, 식당 안도 시끌벅적. 이곳 아를-아비뇽 연합 축구팀과 클로드몽테랑 팀과의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란다. 조금 전의 큰 소리는 광장에서 누군가가 터뜨린 폭죽 소리였고. 유럽인들, 특히 프랑스 사람들의 축구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는 대충 알았지만 실제로 접해 보니 상상을 초월한다.
맞은편 식탁에 앉은 사람 좋은 현지 가이드는 프랑스의 현 정치 상황, 30대 여자 장관의 시구 장면을 보며 관련지어 현재의 프랑스 사회 전반, 젊은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 등을 장황하게 이야기한다. 그 얘기를 들으며 내 가슴도 조금씩 진정되어 간다.
그리고 프랑스 음식에 일가견이 있는 그가 펼치는 음식평과 함께 하는 식사, 그 맛에 반해 버려 엄청 놀라기도 했다. 점심 식사한 것이 소화되기 전이기도 해서 전혀 먹고 싶지 않았던 조금 전의 상황을 깨고 북적대는 카페의 활기차고 들뜬 분위기에 동화되어 갔다.
오늘은 마냥 수다 떨고 싶은데, 혼자 있는 방으로 들어가기 싫은데, 광장의 기타리스트에게 5유로를 주고 음악 신청해서 들으며 음악에 맞춰 춤추며 즐기는 우리 일행 중의 한 부부의 자유분방함이, 개성 넘치는 그들의 매력이 돋보여 그들과 어울리고 싶었지만 낯섦이 나를 주춤거리게 했다.
저 광적인 축구팬들이 밤새워 거리 응원을 한다면 저들과 휩쓸려 소리 지르리라.
제발 음산한 바람이여, 불지 마라. 그러나 광장을 휘도는 바람결이 심상치 않다.
 

 

 

가슴을 뛰게 만드는 프로방스의 내밀한 지역들



아를 아침시장 - 레 보 드 프로방스 - CATHEDRAL D'IMAGE -고르드 - 세낭크 수도원 - 액상 프로방스(세잔느 아뜰리에-세잔느 작업 언덕- 미라보 거리)



날씨는 다행히 맑고 화창하다. 바람은 다소 강하게 불었지만 공기는 상쾌하다. 바람 때문인지 조금 쌀쌀한 한기가 느껴지긴 하다. 햇살 퍼지는 한낮은 남프랑스의 전형적인 이미지에 어울리는 날씨가 연출되기를 희망한다. TV 뉴스에서는 이곳의 태풍에 해당하는 미스트랄이 굉장한 속도로 북상중이라고 해서 다소 걱정은 되지만......

로마 유적지의 한 기둥을 감싸 안고 지어진 호텔이라는 자부심에 어울리게 어제 묵은 숙소인 GRAND HOTEL NORD-PINUS ARLES은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실내 인테리어를 갖췄다. 벽과 코너에 장식된 그림, 공예품들과 기둥과 천장의 문양, 로비의 의자와 테이블의 엔틱 가구까지 고풍스러우면서 예술적인 감각을 살린 것들이었다. 특히 삐그덕 거리는 엘리베이터는 2명 정도가 탈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인데, 혼자서 그 안에 갇혀 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계단으로만 오르내렸다.
바게뜨 빵과 과일 향 나는 빵, 실론 티, 능금의 과즙을 연상시키는 사과로 맛있는 아침 식사를 한 후 출발 전까지 천천히 내부 인테리어 감상을 하는 기분도 괜찮았다.
 

어제의 축구는 아를-아비뇽 연합팀이 승리를 거두었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한 응원의 흔적들이 아침의 광장 여기저기에 굴러다닌다.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에서 상쾌한 아를의 아침을 사진에 담은 후 8시에 출발하였다.

버스가 정차해 있는 성벽 밖으로 가는 길목에 아침 벼룩시장이 열렸다. 이곳 사람들의 생필품들이 중심이 된 시장이다. 엄청나게 많은 종류와 크기의 빵과 치즈들, 소시지들. 그리고 훈제 고기들. 울긋불긋한 각종 채소와 과일, 옷, 가방, 신발들, 그리고 향수 제품들. 물건을 사려는 현지 주민들이 상당히 많고, 시장에는 활기가 넘친다.

토마토 종류도 엄청 많다. 가지에 매달린 싱싱한 토마토와 '황소 심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주름이 접혀진 토마토를 샀다. 또 샐러드 용으로 쓰이는 '앙비브'라는 솎음배추 닮은 야채를 산 일행도 있다. 모두 간식거리다. 그리고 그 유명한 라벤다 향수도 샀다.
역시 물건 사는 건, 특히 생생한 삶의 현장인 벼룩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건 신나고 즐겁다. 건강한 웃음과 에너지가 넘친다. 목소리들도 커지고 걸음걸이도 씩씩해진다. 살아있음은, 그래서 날 것의 삶의 현장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이렇게 생명력이 넘쳐 신나면서도 감사할 일이다.
벼룩시장을 거쳐 온 일행들의 얼굴은 빛이 나고 각자 쇼핑한 물건들을 꺼내 보이며 품평회를 여는 버스 안은 활기가 돈다.

 
프랑스에는 가짜 물건이 없다고 한다. 먹거리도 인위적인 조작을 거의 하지 않는단다. 합성 비료, 농약, 신선도 유지를 위한 약품 처리는 물론이거니와 하우스 재배라고 하는, 철을 무시한 농작물, 과일 재배도 거의 하지 않는다고. 제철에 땅 기운을 받고, 햇빛과 맑은 공기 속에서 자란 식품들을 선호하고 그러다보니 농사도 그렇게 짓는 게 일반적이라고.
사실 우리나라의 영남, 호남 지방의 들판을 기차나 버스로 달릴 때 눈에 가득 들어오는 햇빛에 반짝이는 비닐이나 유리 하우스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눈에 익숙해져 버렸는데, 이곳의 농촌 들판을 달릴 때는 그런 풍경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철을 모르는 채소, 과일이 시장에 가득 넘칠 때 처음에는 첨단을 달리는 농사법에 감탄했었는데 이젠 하우스에서 재배한 깨끗한 먹거리가 아닌 제철의 생산품들이 오히려 잘 안 팔리기 때문에 많은 시설비가 듦에도 불구하고 하우스 재배를 할 수 밖에 없고 우리들은 훨씬 더 비싸진 농산물을 대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새삼 심각하게 다가왔다. 건강한 생활을 위한 먹거리 농사에서 제철에 나는 것이 가장 영양 상태가 좋은 것이고 우리의 인체에도 그게 가장 바람직한 영양소를 제공한다는 가정 시간의 배움이 무색해진 오늘날이다. 정책적인 개입을 해서라도 다시금 고려해 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농산물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공산품에서도 일명 짝퉁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어렵단다. 발견이 되는 경우 1만 유로라는 엄청난 벌금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가짜라는 판명이 나는 경우에는 인생 끝이기 때문이다.
짝퉁 천국이라는 우리 나라, 홍콩, 중국을 경멸하고 경계하는 프랑스인들의 자세는 이런 사회 배경 속에서 탄생된 자연스런 현상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를을 떠나 10분쯤 남쪽으로 향했을 때 벼농사를 짓고 이어 천일염을 생산하는 곳을 지났다. 프랑스 유일의 벼농사 지역이란다.
모내기 전 물 댄 논에 아침 햇살이 반사되는 반짝이는 들판은 장관이다. 거대한 계단식 논에 아침 해가 반사되는 원양의 다락논이 삶의 엄숙한 무게감과 더불어 진지한 아름다움을 풍긴다면 이곳의 들판에서는 삶을 경쾌하게 찬미하는, 밝고 찬란한 소년 합창단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느낌이다.
프랑스산 소금은 음식에 최고의 맛을 내는 최고의 품질로 세계인이 인정한다는데, 바로 이곳이 그 소금 산지인가 보다. 염전밭이 별로 넓지 않은 것으로 보아 본격적인 염전 지대는 아닌 모양이지만 바닷가가 아닌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형인가 의아스럽기도 했다.
바람에 출렁이는 보리밭, 영화 <어거스트 러쉬>의 첫 장면에서 바람에 파도치던 보리밭의 강렬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 정도로 광활하진 않으나 넓은 푸른 보리밭 목초지에서 바람과 함께 출렁이는 햇살을, 달리는 차창으로 만끽하는 기분도 아주 색다르다.

 

곧 이어 제법 산세가 아름다운 산길로 접어 들었다. 숲길 위로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솟아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거대한 성채의 흔적이 있는 마을이다. 바로 우리가 찾아가는 마을인 '레 보 드 프로방스'이다.


여행 자료집에는 '레 보 드 프로방스는 프로방스 지방에서 가장 특이한 곳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으로, 넓은 평원에 갑자기 우뚝 솟은 바위산에 형성된 이 마을은 옛날에 큰 도시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파괴되어 을씨년스러운 성과 매우 오래된 저택들이 모여 있어 기괴함을 더해 주는 곳이다.'라고 소개되면서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은 마귀들과 마녀들이 사는 곳이었다고 이 근방의 사람들은 믿고 있단다.
영화 <마르셀의 여름>에 나왔던 전형적인 프로방스의 소박한 암벽 산지들이 펼쳐져 있는 이곳에는 2세기 무렵 유럽 토착 원주민인 켈트족들이 살고 있었다. 로마인이 진격하자 이들은 그들의 눈에 안 띄게 알피유 산악 지대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산속에 요새와 같은 마을을 형성하여 그곳에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중세에 들어오면서 보 가문이 이 지역을 지배했는데 보 가문은 성품이 따뜻하고 gentle하여 주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강력한 봉건 영주인 보(Baux) 가문의 통치가 끝난 것이 12세기경으로 이들이 건립한 성과 정원 등의 수준 높은 문화 양식들과 높은 수준의 기사도 정신은 상당히 명성을 떨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던 중 15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이면서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나 파리의 추기경 리슬리외에 의해 1632년 성과 성벽, 마을이 초토화 되어 유령의 마을이 되었다.
1642년 모나코 왕국의 통치자로 프랑스 왕국의 후작인 그리말디 가문에서 이 도시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다시 일어서기 시작하였는데,(오늘날 모나코 가문의 여러 공식 명칭에 보 후작이라는 명칭이 들어감) 1821년 지질학자인 삐에르 베르티에에 의해 보오크사이트 광물이 이 지역에서 발견되면서 광산으로 이 지역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보오크사이트 채굴이 끝나자 이후 마을은 또 버려지는 운명에 처했다가 20세기에 들어서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이 마을로 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인구 400여 명의 작은 도시로 삶을 누리고 있다.
과거 보오크사이트 광물의 주산지로서 누리던 경제적 번영은 20세기 말 모든 채굴이 끝나면서 현재 마을의 주 경제 수입원은 프랑스 정부에서 아름다운 마을로 지정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과 역사 유적을 토대로 한 관광 산업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높은 암벽에 의지한 폐허의 성과 성벽은 현재까지 훌륭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깎아지른 절벽과 암벽군들에 둘러싸인 마을 주변은 단테의 신곡의 '지옥편'에 생생하게 묘사될 정도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서부터 바람이 어찌나 심하게 불던지 모자가 날려가고 똑바로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마을 초입은 방어 기능을 갖춘 성채 도시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 출입구부터 굴곡이 진 지그재그 형이고, 관광객이 띄엄띄엄 있기는 해도 마을 분위기는 바람과 함께 매우 스산하고 황량하며 쓸쓸하게 느껴졌다. 다른 도시처럼 골목길에 카페나 가게도 별로 보이지 않고, 어느 주택 벽의 해시계며, 성당의 종루마저 성채의 누각 같은 위엄이 감돌며, 마을의 성당 내부의 성모상, 14처의 그림, 이중 무늬로 된 스테인드 글라스조차도 비장미가 감돌 정도의 어두운 분위기여서 왠지 답답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꾸만 침울하게 가라앉는 마음을 주변의 뛰어난 산세도 달래주지 못했는데, 마을 아래쪽의 보오크사이트 폐광 지역인 'CATHEDRAL D'IMAGE'에 갔을 때는 180도로 바뀌어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다.
이곳은 폐광을 이용하여 공연장으로 꾸민 곳인데, 넓은 동굴의 굴곡진 비대칭 벽면들에 서로 같거나 다른 영상물을 쏘아 보내 감상하는 공간이다. 7~30미터 높이의 벽면들이 이어진 5,000 평방미터의 공연 홀에 3,000여 개의 이미지를 레이저로 쏘아 보내는 것인데, 약 40분 동안 완전히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와는 또 다른 그로테스크한, 대형 생명체가 살아 꿈틀대는 역동성과 자유분방함이 느껴졌다. 영상물도 영상물이지만 동굴이라는 공간 자체에서 이루어지는 대형 퍼포먼스, 그 자체가 예술이다. 예술품을 비춰 올려서 예술이 된다기보다 동굴 자체를 예술로 재창조한 대단한 비디오 아트이다. 살아있는 4차원의 예술 공간을 어슬렁거리는 내 자신의 존재마저도 비현실 세계의 일부가 된 듯했다.
그동안 일 년에 한 개씩의 주제를 공연했는데(피카소, 고흐, 세잔느), 올해에는 호주 관광청에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관광 홍보를 위해 제작한 호주 대자연과 그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영상물을 영상 쇼로 보여준다.
넓은 동굴의 내부 공간 이곳저곳에 비춰지는 호주 대자연의 세계, 원주민들의 삶, 동굴 벽화들, 영상물의 극적 효과를 위해 삽입한 음악과 음향이 넓은 동굴 속에 공명되어 울려 퍼질 때에 전신에 짜릿하게 돋는 소름, 안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핏줄이 터지듯 바깥 세계로 분출되는 나의 환희와 감동, 주체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난 춤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저가 비춰지지 않는 어두운 공간을 난 자유로운 영혼만 남은 기분으로 훨훨 춤을 추며 날아 다녔다. 내가 아는 온갖 춤, 차차차, 삼바, 룸바, 탱고, 왈츠, 퀵스텝,...... 울리는 음악의 리듬에 맞춰 이리저리 움직이는 내 망막으로는 피카소의 웅장하고 장엄한 게르니카가 포효하고, 고흐의 까마귀가 날고, 이글대는 태양 아래에 삼나무가 서 있는 밀밭에서는 광활한 에너지가 분출되어 나오는 동시에, 세잔느의 수련이 피어있는 연못의 고요와 평화로움이 떠오르고 있었다.
폐광으로 버려진 공간을 버섯 재배지로, 동굴 체험장으로, 기타 위락 시설로 바꿨다는 우리나라의 광산촌 소식은 띄엄띄엄 들었지만 이처럼 감동적인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낸 프랑스인들의 예술적 아이디어가 경탄스러울 뿐이다.
역시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이고, 프랑스인은 개성을 중시하는 '예술인'이라고 저절로 수긍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차원 높은 관광 인프라를 만들어 내는 그들이 진정 부러웠다.
오늘같이 바람이 많이 부는 날, 이곳을 찾는 여행객이 거의 없어 이곳이 진정 더 마음에 들었다. 레 보 드 프로방스 마을을 여행하기에는 오늘 같은 날씨는 최고였다. 최고의 날씨를 선물한 주님께 감사드린다.

 
프로방스 여행의 참된 매력은 평화롭고 아늑해 보이는 마을들을 찾아보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에 찾을 마을도 수많은 여행자들을 매료시킨 독특한 분위기가 있는 마을이라고 자료집에는 나와 있다.
지금의 흥분을 가라앉히기도 어려운데, 또 어떤 매력의 마을이 나를 어떤 식으로 사로잡을지 다른 설렘까지 겹쳐져서 내 가슴은 주체 못할 정도로 마냥 뛰었다.
프로방스 대평원을 바라보며 언덕을 내려가는 내내 가슴이 뛰는 건 단순히 새로 만날 마을에 대한 기대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넓고도 넓은 프로방스 평원. 끝이 없을 것 같은 올리브 숲, 포도나무 밭, 알 수 없는 작물을 기르는 밭, 갈아엎어 누렇게 드러난 골진 들판,....... 낮은 구릉을 따라 끝도 없이 펼쳐지는 들판으로 바람이 휘몰아칠 때 은빛으로 잎을 뒤집으며 그 바람에 온 몸을 내맡기는 올리브 나무들. 평원을 쉴 새 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건 바로 바람, 바람이다. 바람이 가득 지배하는 아득한 평원은 내 가슴을 사정없이 휘저어 놓으며, 찬란하리만치 화려한 몸부림을 친다. 저 바람들을 내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면.
용틀임을 하며 뻗어간 굵은 플라타너스 터널 길은 또 왜 그리 자주 마주치게 되는지. 저 굵은 줄기가 저렇게 굴곡진 것도 이곳을 휩쓸며 북쪽으로 내달리는 미스트랄의 영향이리라.

그러다 문득 마주치는 농촌 마을. 예사롭지 않은 돌담들이 농가뿐만 아니라 우리가 달리는 길옆으로도 끝없이 이어진다. 납작한 돌을 가로로 쌓은 후 맨 윗부분을 세로로 쌓아서 기하학적인 아름다움과 정갈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작은 돌 움막 같은 집도 밭 가장자리에 많은 걸 보니 곡식 저장 창고가 아닐까 싶다.
 
보리 마을인가, 보이유 마을인가 마을 이름을 듣긴 했는데, 정확히 기억 못하겠고, 어쨌든 이 지역은 독특한 돌쌓기 기술로 유명하단다. 돌담에 사용된 돌은 이 근처 압트 등의 지역에서 나오는 보리(borie)라는 돌로 모르타르 없이 순수하게 쌓아서 만든 것인데, 밭 가장자리 부근에 에스키모인의 이글루처럼 둥글게 쌓은 집들은 청동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기술로서 그러한 돌집이 18세기경까지도 새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3,000년 동안 유효하였던 아주 경이로운 건축술이다.


그 전통이 이어져 최근엔 마을을 특징짓는 돌담으로 쌓기도 하고, 농부나 목동의 오두막, 곡식 저장 창고, 포도주 저장고, 작업장, 양 우릿간 등으로 사용되었던 둥근 돌집을 전시용으로 지어 관광객을 유치하는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64년 M. Pierre Martel은 자기 할아버지가 했던 방식대로 자그마한 보리를 만들어 보았는데, 30만 개의 돌이 사용되었고, 무게는 180톤이나 되었다고 한다.
영국인 피터 메일이 쓴 <나의 프로방스>는 고르드와 루시옹 사이의 작은 마을 보니외 근처에 위치한 오랜 기간 동안 손때가 묻은 농가에서 1년간 살면서 쓴 책인데, 이곳이 혹시 그 보니외가 아닐까 싶다. 왠지 분위기가 그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근처의 뤼베룽 산에서 나는 프랑스 최고의 버섯 트뤼프(송로 버섯)의 생김새와 향을 음미해 보고 싶었던 간절함이 있었고, 기자인 책의 저자가 거닐었던 마을, 골목, 들판, 숲을 천천히 걷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컸던가! 어쩜 남프랑스, 그것도 프로방스에 대한 꿈을 꾼 것은 그 책 이후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우뚝 솟은 산 위에 있는 고르드 마을이 바라보이는, 2Km로 인접해 있는 이 돌담 마을의 골목골목을 천천히 걸으면서 아름다운 돌담의 체취를 느껴보고 싶다.
내 마음과는 달리 우리가 탄 자동차는 돌담길을 휙휙 지나쳐 우뚝 솟은 산 위의 고르드 마을 광장에 우리를 내려 놓는다.

'고르드'는 2008년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지정된 152개 고을 중 하나이다. 인구 2,000명 이하, 2개 이상의 유적지가 있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선정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므로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서는 152개 중에 속하지 못하면서도 꼭 가봐야 될 정도로 가치와 의미가 있는 마을이 많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대단한 마을에 우리는 들어와 있는 것이다. 마을 중앙에 있는 큰 성은 파괴되었던 것을 1525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축한 것으로 위대한 건축물 중 하나로 여겨지며 고르드 지역을 내려다보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곳에서 우린 자유롭게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우뚝 솟은 높은 지역이라 주변의 평원도 한 눈에 내려다 보였고, 골목골목에서 세월의 흔적인 양 거칠게 풍화된 고풍스런 건물벽도 만나고, 독특한 문양을 그리며 정갈하게 깔린 자갈길도 천천히 거닐면서 개성이 가득 담긴 가게의 진열품들도 구경했다.
골목 어디에서나 마주치는 축대는 어김없이 보리돌로 쌓은 멋진 돌담이고, 그 사이를 비집고 자라나 꽃피운 곳은 색깔들이 조화를 이뤄 자연스레 예술 작품을 연출하고 있다. 얼굴을 마주치면 순진하게 웃음을 보내는 순박한 현지인들의 표정에서 낯설지 않은 이웃을 대하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곳이 유명한 관광지라는 느낌이 안 들 정도로 사람들에게서 영악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소박한 정감이 넘쳐나는 곳, 과거의 평온한 시간이 현재에 머물러 있는 곳, 프로방스의 속살이 주는 진수는 바로 이런 것이란 생각이 든다.
빵 가게에서 풍기는 구수한 빵 냄새를 맡는 순간 강한 시장기를 느꼈다. 광장 옆의 아름답게 꽃으로 장식된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엄청난 양의 샐러드와 돼지고기 바베큐와 으깬 감자는 그 양에 질려 정작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배가 불렀다. 동양인에 비해 이들이 먹는 양이 많아서인가, 여행 내내 질릴 정도로 음식의 양이 많아 손대다 마는 식으로 음식을 남기게 되니 늘 미안하고 아까웠다.
동양인에게는 양을 좀 적게 달라고 하면 안 될까? 아니면 우리 식으로 머릿수대로 시킬 것이 아니라 양을 적절하게 조절해서 시키는 법이 음식 남기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는 더 합리적인 방법인 것 같다. 이들의 레스토랑 규칙이 인원수대로의 주문이라니 어찌할 수 없기는 하지만 무척 맛있는 음식도 양이 많아 남길 수밖에 없을 때는 어찌나 죄짓는 기분이던지.
마을을 돌아 나오며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병사의 동상을 보았다. 1, 2차 대전에 이 마을 출신 청년들이 출전했다가 희생당한 용사들의 추모탑이다. 희생자의 이름이 동상 앞에 새겨져 있다. 여행 내내 마을마다 이런 추모탑을 보게 되는데, 참으로 바람직한 탑인 것 같았다.
마을의 누구 아들이 언제 어느 전장에서 희생당했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매일 들고 나는 길목에 설치함으로써 그들을 언제나 기억해 주는 것. 스러져 간 영혼들이 억울하지 않고, 외롭지 않게 평안히 잠들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우리 나라는 마을마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론해 주는 위령탑이나 추모탑이 없고, 국가 차원의 비만 건립되어 있어, 무슨 기념일이나 되어야 행사의 요식 행위처럼 한 번 떠들썩하게 거론되고 그리고 나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너무 쉽게 요란을 떨고, 그리곤 너무 쉽게 깡그리 망각해 버린다. 천안함 사건으로 희생된 아까운 목숨들, 벌써 우리들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진 않나, 그 사건마저도 금방 퇴색해 버리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워진다.
우리가 저녁에 도착할 마르세이유에서 내일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배경이 된 이프 섬을 방문하는 여행 일정이었는데, 내일부터 출입 금지를 시킨다는 바람에 일정을 변경하여 액상 프로방스를 낼 가기로 하고 오늘 이프 섬 방문을 위해 부랴부랴 마르세이유로 가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새벽부터 움직인 하루였다.
그런데 오늘 오후 일정으로 당겼던 이프 섬 방문을 오늘도 못 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들었다. 미스트랄의 기세로 배가 못 뜬다는 것.
우리는 그런 악재를 오히려 호재로 이용하였다. 바로 수도원들 방문. 수도원 건축의 백미로 불리는 3개의 수도원 중 2개를 방문할 예정이다. 죄악으로 인해 형벌을 받는 장소로 쓰이던 감옥 대신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거룩한 장소인 수도원으로 급 변경된 우리의 일정도 어쩌면 때아니게 불어 닥치는 저 바람을 주관하는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우선 오늘은 이곳 고르드에서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세나크 수도원' 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곳은 7월에 만개하는 라벤다 꽃과 어우러진 수도원의 사진이 남프랑스를 대표하는 장소로 소개되는 곳이다. 이곳은 시토회 수도사들이 현재도 사용하고 있으며, 미리 예약한 일정한 수의 사람들만 입장시키는 수도원이다.
Cavaillon 지역의 대주교인 Alfant와 프로방스, 바르셀로나의 백작인 Ramon Berenguer 2세의 후원으로 1148년 최초로 건축되었으며, 이곳의 수도사들은 당시 Arde'che 지역에 있는 Mazan Abbey 사원의 시토 수도사들이 최초 이곳에 정착했을 당시 소박한 오두막 형태의 공동체 생활을 하였으며, 1178년 Simiane 영주의 후원에 힘입어 수도원을 추가로 건립하게 되었다. 1854년 트라피스트 수도회에서 이곳을 매입하여 현재까지 엄격한 규율 속에 계속 수도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자연친화적인 소박한 색감의 돌로 쌓아 단순하고 간결한 형태로 지어진 수도원의 모습을 대하는 순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어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번쩍 들어서 천상으로 올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교 없는 단순함이 이처럼 경건한 아름다움을 뿜어낼 수 있다니. 그 고즈넉함에 감전되어 나도 모르게 후문 쪽으로 걸어 들어가 수도사들이 미사를 드리고 있는 성당 쪽으로 갔다. 열려진 문을 통해 아름다운 그레고리안 성가의 하모니가 들렸다. 혼을 빼앗긴 듯 성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가다 보니, 수도사 한 분이 손 사레를 치며 나가란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본 건물의 벽, 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단아하고 정갈함이란! 수도사들이 추구하는 천상 세계, 그들의 하늘을 지향하는 정신세계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우린 예약이 안 되어 있어 내부 관람이나 미사 참례는 못했다. 반대편 쪽의 일반 관람객이 들어갈 수 있는 성당에 들어가 잠시 묵상, 기도의 시간을 가진 뒤 인적이 드문 쪽을 택해 걸으며 라벤다 밭의 보라색 꽃을 수도원 건물과 대비시켜 상상해 보았다.
이 수도원의 돌 색깔과 기도와 명상의 집으로서의 특징을 가장 잘 살리는 조화로운 색은 바로 보라색인 것 같다. 보라를 제외한 다른 색들은 세속의 찌꺼기를 그대로 묻혀낼 것 같았다.
고르드 성채가 있는 곳에서는 그처럼 휘몰아치던 바람도 이곳에서는 나뭇잎을 살랑거리게 할 정도의 미풍에 불과하다. 고즈넉한 수도원 분위기에 반해 하염없이 수도원 지붕을 바라보며 난 오랫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수도원 도록에 실린 사진을 보니 회랑의 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주변의 어둠을 밝히며 만들어 내는 음영들이 한 줄로 서서 성당으로 향해 가는 수도사들의 도열한 모습으로 보였다. 그 빛 속에서 영성을 느꼈다. 하늘을, 진리를 지향하는 수도자들의 고요한 열망의 빛을 대하는 감동이 진하게 밀려온다.
저런 영성을 창작해 낼 수 있었던 건축가의 놀라운 심미안에 경탄을 발하며, 그러한 능력까지 인간에게 허락하신 창조주 하느님에게 무한한 찬미를 드릴 수밖에 없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런 음영을 만들어낼 시간(아마 빛이 비껴서 들어올 시간대일 거라 추측되며, 새벽이나 저녁 무렵이 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에 저 회랑에 하염없이 앉아, 앉아있음 그 자체로 기도가 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갖고 싶다.
지난 12월에 영화를 보며 느꼈던 <위대한 침묵>의 감동이 다시금 고요히 밀려오며 난 충만한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수도원을 방문한 사람들 중에 오래된 명차 동호인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주차장에 왔을 때 눈길을 끄는 이들 차들로 인해 조금 전의 성(聖)이 곧바로 속(俗)으로 전환되는 기분이다. 개조한 비닐 유리창을 달고 있는 오래된 포드의 뒷자리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들, 영화나 소설 속에서만 대했던 페라리, 포르세 등, 소유의 기쁨을 과시하기 위해 붕붕 거리는 엔진 소리를 요란하게 출발하더니만 언덕에서 빌빌대는 통에 우리가 탄 버스가 제 속도로 갈 수가 없다.
이후 세잔느를 만나기 위해 엑상 프로방스를 향해 버스는 제법 먼 길을 달렸다. 기원전 103년, 로마인들에 의해 세워진 엑상 프로방스 중세 이후까지도 프로방스 지방의 중심지 역할을 해 온 곳이었지만 지금은 문화의 도시로 탈바꿈되어 있다. 특히 17세기의 건물들과 예쁜 카페들이 줄지어 있는 미라보 거리를 걷다 보면 엑상 프로방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멋진 분수 3개가 연이어 나온다.
프로방스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라고 하나 오늘 들렀던 마을들과는 대비되는 번잡함이 있어서인지 서울의 대학로를 연상시키는 미라보 거리는 젊음의 열기로 북적였다.
 
언덕을 한참 올라 세잔느의 아뜰리에를 방문했을 때 가는 길의 한산함에 비해 아뜰리에를 찾은 여행객들이 어찌나 많은지 정신없는 가운데 그의 그림 세계를 엿보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 서양 회화의 아버지이며 입체파의 거장인 세잔느가 그의 어머니의 고향인 이곳에서 6년간 머물면서 그림에 몰두했던 모습이 그 아뜰리에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가 즐겨 그렸던 실제의 피사체와 그림 소품들이 거의 모두 전시되어 있고 식사하는 것도 잊은 채 그림에 몰두하다 영양실조로 쓰러지기까지 했던 그의 치열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현장이었다.
붉은 색으로 칠한 창틀 너머로 빛이 거의 차단되다시피 자란 나뭇잎 그림자가 아틀리에를 넘겨다 볼 뿐, 그가 남긴 낡은 흔적과 업적과 명성을 쫓아 온 먼 동방의 여행객들을 대하는 직원의 불친절함을 꾸짖는 세잔느의 생명력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연인처럼 사랑했던, 그의 그림 세계에 일획을 그은 입체파를 낳은 대상인 생 빅토아르 산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으로 올랐다. 매일 이 언덕에 올라 시시각각 변하는 빅토와르 산의 빛을 쫓았던 세잔느의 숨결이 그곳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가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 그만의 빅토와르들이 그 언덕에는 연대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눈이 덮인 듯이 하얗게 빛나는 삼각형의 산. 거기에서 그는 빛과 형태를 찾고, 만들고, 그것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치열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언덕에서 그가 앉아 그림 작업을 했을 위치에 앉아 가만히 풀과 야생화들을 쓰다듬어 보았다. 그의 체취라도 느껴볼까 싶어서이다. 언덕 저 편으로 예전과 마찬가지로 빅토와르 산은 신비스런 손짓을 하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저 산도 자신을 열심히 응시하며 사랑하던 한 예술가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엑상 프로방스를 마지막으로 프로방스 지역을 뒤로 하며 남쪽으로 남쪽으로 서둘러 달렸다. 우리의 오늘 최종 종착지는 마르세이유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마르세이유까지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교통 체증을 겪을 모양이다. 그 도시의 축구팀이 챔피언 결정전을 벌이는 날이라 축구의 열성팬들이 다투어 마르세이유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란다. 더욱이 오늘이 토요일 저녁, 주말이 아닌가?
어두워지는 차창을 내다보며 오늘 하루의 벅찬 감동들을 조용히 반추하며 길 위에서의 이 충만감을 만끽하리라.

 


 
 

뱃사람의 거칠고 투박한 숨결이 묻어나는 마르세이유



마르세이유 가는 길 - 구시가지, 항구 - 노트르담 드 가르드 성당



마르세이유를 향해 달리는 고속도로의 정체는 심각했다. 그러나, 그 도로 위에서 알 수 없는 활기와 들뜸이 감지된 건 나만의 느낌이었던가? 가끔씩 추월해 가는 승용차들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 그 경적에 화답하는 다른 승합차에서 내는 2배로 긴 경적들. 저건 축제의 전초를 자축하는 젊음의 신호이다.
그렇다. 오늘 저녁 마르세이유에서 마르세이유를 대표하는 축구팀 막시와 그루노빌 팀의 챔피온 결정전이 벌어진단다. 축구의 강국답게, 축구에 열광하는 유럽인들답게 챔피언 결정전에 대한 기대감과 흥분을 축제 장소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부터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세이유 시내에 접근했을 때는 눈부신 햇살이 잦아지면서 거리 풍경에 음영이 짙어지는 저녁 무렵이었다.
마르세이유의 첫인상은 '거칠고 투박한, 오래된 항구 도시의 중후함' 바로 그것이었다. 프랑스 최대의 항구 도시이자 규모로만 따지면 파리 다음의 대도시라고 할 수 있는 곳, 일찍이 프랑스가 지중해로의 진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만든 도시였기 때문에 지금도 국제 무역이 활발한 곳, 숨가쁘게 전개되던 세력 쟁탈전의 역사적 현장답게, 도시에는 분주하고 활기에 넘치는, 시간이라는 맥박이 박동수를 증가시키며 고동치는 느낌이었다.
축구 열기까지 가세되어 온통 들떠 있는 시내에는 많은 차량과 인파의 움직임으로 북적댔고, 거칠고 투박한 뱃사람들의 무뚝뚝함을 연상시킬 만큼 길거리의 보도블록 위로 쓰레기도 적당히 굴러다니는 사이로, 큼직큼직한 건물들은 역사의 증인들처럼 견고하고 우중충하게 도열되어 있다. 그 어떠한 긴박한 상황이 닥쳐도 절대로 입을 열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며 두 입술을 굳게 앙다문 취조실의 투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지금까지 지나온 지역들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여유롭고 평화스럽게 움직였는데, 갑자기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든 듯이 휘몰아치는, 세련되지 못한 대도시의 길거리 풍경에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뱃사람들의 기질에 감전이나 된 것처럼 이내 발바닥 아래에서부터 알 수 없는 힘이 불끈 치솟는 것같은 긴장감이 느껴진다. 무장 해제되듯 도취되었던 나른한 근육들이 일시에 화다닥 정신을 차려 새로운 전의를 가다듬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모르게 내 입가에는 웃음이 맴돈다. 상황에 너무도 민감하게, 빨리, 잘도 적응하는 내 감각들이 재미있어서이다.
시내를 관통하여 들어간 호텔 역시 로비부터 초만원이다. 오늘은 시내 어느 호텔이고 빈 객실이 없을 정도로 최대의 손님들로 온 도시가 들끓는 중이라고 한다.
호텔(Mercure Euro Center Hotel)에 여장을 풀고 다시 항구 가까이로 나왔다. 미식가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는 브이야베스 요리를 먹기 위해서이다.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목인 부두 근처 구시가지는 길가에서부터 광장에 이르기까지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응원객들로 인해 떠밀려 걸어야 할 지경이었다. 벌써부터 스크럼을 짜고, 소리를 질러대는 젊은 군중의 열기가 어찌나 요란한지 바람이 사납게 불어 날려갈 지경인 쌀쌀한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상대편인 그르노빌 팀의 유니폼은 어떻게 생겼는지 군중을 보아서는 알 길이 없다. 온통 푸른색 줄무늬 티셔츠, 잠바뿐이다. 길거리 상가 빌딩에도 막시팀의 대형 유니폼이 내걸려 있다. 색깔만 푸르다뿐이지 서울 광장으로 모여드는 붉은 색의 붉은 악마들을 대하고 있는 느낌이다.
부두에 가득 정박해 있는 배들도 응원객들의 열기에 동조라도 하려는 듯, 바람에 출렁이는 파도의 움직임 따라 위 아래로 흔들리고 있다.

마르세이유 지역에서만 판다는 부이야베스는 뱃사람들이 즐겨먹었다는 일종의 생선국인데, 우리가 찾은 그 레스토랑은 꽤나 유명한 곳인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빽빽하다. 요란스럽게 북적대는 레스토랑 이곳저곳은 필요 이상으로 큰 목소리를 내며 왁자하게 떠드는 덩치 큰 현지인들과 그 사이로 분주하게 드나드는 종업원들로 인해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이다. 남대문 시장의 목로 음식점 골목에 들어온 기분이랄까?
브이야베스는 유명세에 비해 아주 단순한 요리이다. 뼈 많고 살집 깊은 잡어들과 감자 몇 개를 물에 빠뜨려 넣고, 소금 간 이외 별 양념 없이 끓인, 물 넉넉히 잡은 멀건 스프라고 해야 하나 생선을 좋아하는 나인데도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 밍밍한 국물 맛을 개선해 보려고 핫소스와 후추를 넣어 보아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먹어 본, 우리의 선입견으로 자리 잡은 프랑스 요리 -모양, 색깔, 복잡한 소스를 곁들인 요리 과정-에서 가장 먼 거리에 있을 것 같은 음식이다. 뱃사람, 항구, 서민, 가식 없음, 거침, 세련되지 못함, ...... 그런 단어들과 아주 부합하는 음식이다.

콩이 그대로 둥둥 뜨는 된장을 멀겋게 푼 후에 길게 삶은 시래기를 대충 넣고 끓인 우리의 시골 시래기 국에 비교하면 적당할까? 아니, 순대, 머릿고기, 대파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대충 푹푹 끓인 순댓국과 비교해 볼까? 시래깃국, 순댓국을 요리 근처에도 포함시키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구수한 토속적인 맛에 반해 최고의 음식으로 치는 사람들이 있듯이, 브이야베스는 아마도 이 지역의 삶이 그대로 녹아든 토속성 때문에 명물로 자리매김 시킨 건 아닌지?
이어 나온 홍합살 중심의 해산물 샐러드가 그나마 구미를 돋운다. 후식도 큼직한 케이크 종류인데, 인심 후한 그 엄청난 양에 질려 손을 대기가 겁난다.
역시 마르세이유다.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있는 브이야베스 접시를 거두어 가는 종업원들의 표정과 제스처가 익살스럽다. 이 맛있는 걸 왜 안 먹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을 유머 섞인 과장된 행동으로?나타내는 그들에게서 유쾌함이 보인다. '뭐 그래도 좋다. 그건 너희들의 문제고, 난 내 일을 즐길 뿐이다.'는 식으로 씩씩하게 접시들을 거둬 간다. 화끈하면서도 긍정적인, 다름을 받아들이는, 원색적인 넉넉한 인간미가 그들에게서 물씬 풍긴다.
 

식사를 마치고 구 시가지를 천천히 산책했다. 가까이에 축구경기장이 있는지 커다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오고,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한 응원객들이 어느 중국집 앞의 60인치 정도의 TV 화면 앞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함성과 아쉬운 한숨을 토해내고 있다.
광장에 있는 대형 TV가 고장 났나 보다. 아까까지 운집해 있던 인파가 그곳에 있는 게 아니라 중국집 앞에 모두 몰려있는 것 같다. 가드레일 위에 올라앉아 있는 사람, 쪼그리고 앉은 사람, 선 채로 펄쩍펄쩍 뛰는 사람, 구경꾼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들의 진지한 표정들이 희극 배우 같다.
저 군중들이 있는 저곳이 공연 무대이고, 저 상황들이 하나의 예술 작품이며, 우리를 포함한 이 항구의 거리 자체가 축제의 장소이다. 저들의 열기, 에너지, 들뜸이 보기 좋다.
분위기에 전염성이 있는지 우리 일행들도 덩달아 흥분되고 들떠 거의 같은 수준의 크기로 깔깔거리고, 함성 지르고, 그러다가 그들과 우리들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또 큰소리로 웃는다. 여행자의 자유분방한 기분으로 우리는 우리들의 일상의 모습을 해체시켜 버리고 저들은 저들이 좋아하는 축제의 장소에서 저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오는 긴장감을 날려 보내며 우린, 마르세이유의 밤을 맞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가 되고 있었다.
항구엔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고, 파도가 넘실대는 저편으로 하나 둘 조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마르세이유 어느 지역에서도 올려다 보인다는 언덕 위의 성당도 은은한 조명을 도시로 쏘아 보내며, 도시민들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다.

날이 밝아 햇살은 눈부셨지만, 일기 예보에서도, 창문 밖의 나뭇가지들도 바람의 위세를 알려주고 있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주일의 여행 일정을 언덕 위의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에서 시작하는 건 천주교 신자인 나의 입장에선 매우 기분 좋은 일이다. 여행 중에 만나는 주일에 패키지 여행의 특성상 자유롭게 내 뜻에 맞춰 미사에 참석할 수 없음이 가장 아쉬운 일인데, 오늘은 성당 방문뿐만 아니라 운이 좋으면 미사에도 참례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언덕 초입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늠름한 성당 건물. 종탑 위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성모자상. 성모님의 시선은 항구 쪽을 향해 있고, 엄마 품에 안긴 아기 예수는 도시를 향해 아침 인사를 하듯 손을 흔들고 있다.


건물의 외관도 너무나 아름답지만 성당이 도시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 안는 느낌이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오 11: 28-30)"고 말씀하셨던 주님의 사랑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다.

이 성당은 1853년과 1864년 사이에 지어진 비잔틴 양식의 대성당이다. 도시의 제일 높은 언덕 154m 높이에 세워져 있어 마르세이유 도시 사진을 보면 언덕 위에 군림하듯이 서 있는 모습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대하는 성당은 다른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에서 느껴지는 '군림'이라는 단어보다는 '감싸 안아 어루만짐'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소박하고 정겨웠다.

성당을 향해 오르는 계단의 난간 끝에는 '쉿!'하 면서 검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입술을 가리며 조 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사내아이의 조각이 귀엽고 앙징스러워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성당 경내에 들어섰으니 조용히 하라는 긴 말이 필요 없다.
이어 피에타 상. 성 베드로 성당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은 워낙 유명한 조각이지만 이곳의 피에타 상은 죽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죽기 직전의 고통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감싸 안은 성모님을 표현하고 있으며, 세상사의 모든 고뇌와 아픔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나약한 인간을 끝없는 사랑으로 감싸 안고 위로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빼어난 작품으로 보였다.
 

이윽고 성당 정면에 서서 항구 쪽을 바라다보면 청명하게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나란한 세 개의 섬이 보인다. 항구 바깥의 포메그 섬과 고대 그리스인들의 거주지였던 라토노 섬, 그 앞의 성이 있는 조그만 섬이 '몽테 크리스트 백작'의 배경이 된 이프 섬이다. 애당초 이 섬에는 스페인의 공격으로부터 마르세이유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 요새로 성이 지어졌고, 그 이후 몽테 크리스트 백작이 유배되었다는 뒤마의 소설 암굴왕의 배경이 되는 감옥으로, 수많은 죄수들, 특히 정치범의 수용소였던 곳으로 이 섬은 더 알려졌다.
행정상의 이유로 오늘부터 저 섬으로의 출입을 통제하기도 한다지만 미스트랄의 기세가 어찌나 심한지 이 언덕에서 발걸음을 떼어놓기가 힘들 정도여서 이래저래 바라만 봐야 하는 섬이 되고 말았다. 바다는 조용하고 잔잔하게 은빛으로 반짝이는 낭만의 풍경만을 지닌 곳이 아니라, 거칠고 험한 인생살이의 터전이라는 현실을 우리에게 일깨우려는지 바람은 참으로 맹렬하게도 불어댄다.
올레 길을 개척한 서명숙은 김영갑의 사진을 보면서 날카로운 충격을 받았다. 바람이 그렇듯 아름답고 철학적일 수 있는 데 대한 놀라움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의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 바람이 보이는 풍경보다 더한 존재감을 드러냈고, 말하지 않는 바람이 전하는 말은 두터운 책보다도 더 많은 사유를 담고 있었다.
바람은 내게 말을 건넸다. 흔들리면서라도 살아내라고. 뿌리를 땅에 단단히 박은 채, 몸은 그저 맡기라고. 바람 불지 않는 삶은 없다고, 있다 하더라도 그건 산 사람의 삶이 아니라고."

그랬다.
지중해 남쪽에서부터 숱한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의연하게 버티며 삶을 지탱해 온 이곳 마르세이유로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 나무도, 깃발도, 도시도, 발아래 펼쳐지는 바다도, 그 위에 떠 있는 섬도 모두 바람에 흔들렸다. 바람은 그렇게 모든 것을 흔들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고, 많은 사유의 내용들을 내게 전하고 있다.
'살아있기에 흔들리는 거라고. 살아있음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거라고. 살아가는 일은 감사한 거라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여행길에 오른 것인데,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신념을 안고 살아가고자 알몸의 나와 직면하기 위해 혼자 떠나온 시간들인데 난 또다시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바라본다.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기에 흔들리는 거라는 일깨움을 주면서 바람은 흔들리는 나를 그렇게 위로하고 있다.
날려버릴 듯 온몸을 흔들어대는 낯선 이국땅 항구도시의 이 바람을, 죽음으로 인간을 구원하고, 희생으로 아낌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선물로 내린 그리스도의 따뜻함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성당이 있는 언덕에서 온몸으로 맞고 있는 이 바람의 기억을 평생 못 잊을 것 같다.우리들의 인생과 닮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장소에서 맞은 바람은?그 선물과 같은 일깨움, 위로의 말들을 내 몸에 새겨주고 있다.

성당에서는 10시 주일미사가 막 시작되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이곳을 모두 둘러보고 싶은 욕심에 말씀의 전례는 마음으로 함께 하고, 성찬의 전례에만 참석하리라 생각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사방으로 툭 터진 조망. 노트르담 성당 곳곳에 마련되어 있는 전망대에 서면 하늘이 어디까지이고 바다가 어디까지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끝도 없이 푸르른 바다 풍경과 더불어 마르세이유 도시가 한눈에 조망된다.


좀 더 시내를 잘 조망하도록 전망대에는 망원경도 설치되어 있다. 성당 남쪽으로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했다는 주택단지도 있다는데 한국의 도시설계 전문가들이 벤치마킹했다는 곳이다.
가까이 지나쳤던 시가지와 골목들은 다소 산만하고, 낡고 퇴락하여 생활의 냄새가 묻어났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모든 곳이 조화롭고 아름답다. '바라보는 것, 타인이 되는 것, 관념적인 것'과 '엉켜서 함께 사는 것, 나로서 있는 것,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렇게 다르다. 우리는 언제나 타자로서가 아니라 주체자로서, 삶의 한복판에서 구체적으로 살아내야 하는 생활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해 본다.


외관의 소박함과는 대조적으로 2층 성당의 내부는 너무나 화려하고 멋지다. 외벽의 기둥과 아치는 흰색과 검은색 돌이 연속적으로 무늬를 만들어내는 데 반해 내부 기둥과 아치는 흰색과 붉은색 대리석이 교대로 배합된 무늬를 만들어 속세(속)와 천상(성)을 구별해 놓았다. 그런 다음 기둥과 기둥 사이의 벽면과 바닥을 장식한?모자이크, 천장의 금장으로 채색된 대리석의 섬세한 그림과 휘황찬란한 색상은 관람객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인간의 솜씨가, 그 능력을 하느님을 찬양 하는데 쏟은 그 열정 이 어쩜 이렇게 대단 할 수 있는지 바라보고, 쳐다보아도 또 바라보고 싶은 완벽한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이 감상하는 내내 경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던 그곳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이 내내 아쉬웠다.
아쉬운 가운데에서도 그곳에 파견 나와 있는 베 네딕토 수도회 소속의 한국인 수녀님(도미니카)을 만 나 얘기 나눌 수 있음은 너무나 특별나고, 반갑고 기 쁜 일이었다.
미사가 진행 중인 아래층 성당에서 성찬의 전례에 들어가는 종소리가 나서 얼른 내려왔는데, 문이 잠 겨 있다. 경건한 미사 집전을 방해하면서 관광객이 드나드는 걸 막기 위해서라는 게 이해는 되었지만, 오늘 새벽 기도 시간에 오늘의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도 했길래 말씀의 전례는 마음으로만 함께 하고 영성체만이라도 하려고 했던 내 얄팍한 계산이 빗나가서 내심 섭섭하고 아쉬웠다.
'오늘 하루에 겪을 즐거움과 웃음, 행복감 모두를 주님, 당신께 봉헌합니다.'

성당 마당 한 켠의 기념품 가게에서 피에타 상 사진엽서를 한 장 사서 언제나 나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고국의 수녀 언니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 후 주차장에 내려왔을 때에는 일행들 모두 차에 오른 뒤였다. 미사에 참석했더라도 늦어져서 일행들에게 민폐를 끼칠 뻔했다.

마르세이유가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00년 '마실리아'라는 이름부터다. 작은 만을 다스리고 있던 부족장의 딸은 어느 날 불쑥 먼 바다에서 찾아온 구릿빛 선원을 배필로 선택했다.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춘 작은 만은 자연스레 그리스의 식민지로 지중해 무역의 거점이 됐다. 그 후 마르세이유는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어 십자군 원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프로방스의 군주 킹 르네(King Rene)의 지배를 거쳐 15세기에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됐다.
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항이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인 마르세이유는 부와 권력을 거머쥐었지만 그로 인한 불행도 끊이지 않았다. 마르세이유 구항구의 입구를 지키는 생 니콜라 요새(Port St. Nicolas)와 생 장 요새(Port St. Jean)는 외적으로부터 마르세이유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포문이 바다가 아니라 도시를 향하고 있다. 한 때 독자적인 공화국을 이루기도 했던 마르세이유는 항상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했고, 그를 실현시킬 수 있는 부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1660년 마르세이유를 장악한 프랑스 왕정은 한시도 감시의 눈을 떼지 않았다. 마르세이유 시청의 파사드에는 이 도시 출신의 피에르 퓌제(1620-1694)가 조각한 루이 14세가 아직도 의심 많은 시선으로 항구를 바라보고 있다. 자유를 갈망하는 마르세이유의 정신이 기치를 올린 것은 프랑스 혁명 때였다. 분연히 일어선 600여 명의 의용군들이 파리까지 행군하는 동안 목청을 드높여 노래를 불렀다. '가자, 조국의 아이들아. 영광의 날이 왔다.'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되살려 주었던 마르세이유 군단의 노래는 현재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가 됐다.
이런 굴곡진 역사를 지닌 마르세이유를 떠나면서 아쉬웠던 점은 마르세이유, 아비뇽 같은 관광객이 많은 도시에서 운행한다는 미니 열차를 보지 못한 점이다. 배낭 여행처럼 본인의 의지에 따라 시간을 조절할 수 있었다면 가능했겠지만 일정에 매여야 하는 패키지 여행의 한계인 것을 받아들여야 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타 여행사의 상품보다는 여유있게, 잘 알려지지 않은 구석진 곳까지 꼼꼼하게 다니는 우리의 일정에 감사해야지.



 

수도사들의 세계 - 빛과 어둠, 그리고 고요함이 머무는 곳



수도원 가는 길 - 르 토르네 수도원 - 생 라파엘 - 코트다쥐르 해안 - 칸느 - 니스



이프 섬을 포기하고 대신 선택한 수도원 방문 두 번째.
우리 일행은 바람 부는 마르세이유를 뒤로 하고 르 토르네(Le Thoronet) 수도원을 향해 고속도로를 타고 달렸다. 다시 프로방스 지역에 들어섰다.
노란 유채꽃밭을 지나 목초지에서 노닐듯 풀을 뜯는 양떼들을 지나 생 빅토와르 산의 뒷면이 바라보이는 길을 따라 간다. 세잔느의 입체인 삼각형이 아니라, 평편한 윗면의 흰색 바위산의 웅장함이 또 다른 감회를 자아낸다.
액상 프로방스에서 바라보는 산과는 그 분위기가 완연 다르다. 푸른 나무와 숲을 골짜기에 품고, 과일 나무, 농작물이 자라는 밭을 옆으로 내 주면서, 사람들과 함께 계절 따라 삶을 공유하는 이웃집 할아버지의 넉넉한 품 같다고나 할까?

비움과 여백을 편애하고 자신의 건축미학의 기초로 삼는 건축가 승효상의 <건축, 사유의 기호>에서,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가 설계한 라 투레트(La Tourette) 수도원의 건물을 방문하고서
'한 편의 아름다운 음악', 혹은 '서정시를 읽는 듯한' 감동을 느끼고 즐거움을 만끽했노라고 고백한다.
수도원이야말로 비움과 여백의 건축물이 아니겠는가! 일체의 장식이 배제된 담백하고 단순한 직선으로 구성된 수도원의 대문, 입구에서 본 중정 건너의 풍경, 예배실로 인도하는 경사진 통로, 리드미컬한 창문, 중정을 둘러싸고 있는 복도와 수도사들의 방, 돌출된 오라트리엄과 중정에서 본 하늘. 수도원의 그 모든 곳들을 둘러보고 그 건축물이야말로 '위선에 대한 진실의 승리', '물질에 대한 혼의 승리'라고 말한다.
이 아름다운 수도원의 원본에 해당되는 모델이 1176년 프랑스 남쪽, 프로방스의 상수리나무가 울창한 계곡 물가를 부지로 삼아 지어진 르 토르네 수도원이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쿠튀리에 신부는 새롭게 짓는 수도원에 옛 수도원의 정신을 내타내 줄 것을 부탁하면서 르 코르뷔지에게 중세 수도원 건물인 이 수도원을 방문해 볼 것을 권했다. 그는 이 프로방스 지방에 있는 르 토르네 수도원을 보고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곧바로 파리의 사진가에게 그 공간을 담게 하고, 짙은 빛과 깊은 그림자가 재현한 수도원의 공간이 담긴 <진실의 건축>이라는 사진집을 내면서 그 책의 서문까지 직접 썼다. '이 책의 사진들은 진실에 대한 증언이다.'라고 시작되는.
수도원의 회랑의 열주들 사이 공간으로 들어와 석재 바닥을 환하게 물들이는 빛들을 바라보며 르 코르뷔지에는 그 공간을 가득 채운 침묵의 신비로움에 영감을 받고 투레트 수도원을 설계했을 것이다.
"구릉의 땅에 세워진 콘크리트의 볼륨이 갖는 시적 언어와 본당의 텅 빈 공간에 충만한 침묵과 빛의 아름다움, 경사진 길과 리드미컬한 빛의 행렬, 검박하기 이를 데 없는 수도사들의 방, 옥상의 경이로운 세계 등, 이 건축은 코르뷔지에의 지적 완성과 영적 충만 그 자체이며 모든 건축가들에게 현대 건축의 성서적 존재다." 라고 평가받는 라 투레트 수도원은 리옹에 있는데, 이번에 방문할 기회는 갖지 못한다. 대신 현대 건축의 대부라고 할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학의 백미'로 예찬하면서 벤치마킹했다는 수도원인 르 토르네로 간다.
"육체 노동과 경건한 독서, 기도와 찬송"만으로 이루어진 수도사들의 일상과 예배를 위한 건물인 수도원, "경사진 통로, 음악처럼 흐르는 열주와 황홀한 빛, 그리고 긴장과 고요함"을 찬양한 승효상이 아니더라도 이미 영화 <위대한 침묵>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수도원에서 펼쳐지는 일상의 평화로움, 침묵으로 미만해 있는 자연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진실에 살짝 맛들인 나로서는 세속과 절연된 수도원의 침묵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설렐 수밖에 없다. 수도원의 원형 같은 르 토르네 수도원 방문 그 자체만으로도 말 이전의 세계,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기대감으로 내 가슴은 떨려온다.
차창 밖으로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초록의 물결. 푸르름이 갖는 싱싱한 생명력. 감탄사가 저절로 터진다. 생명의 주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속을 벗어나 성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일은 아무래도 쉽지 않은가 보다.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가 1분전 12시. 12시부터 미사가 진행되는 탓으로 관광객 입장을 안 시킨단다. 미사가 끝난 이후라야 입장이 가능하다고. 나는 미사가 끝날 때까지 수도원 주변의 상수리나무 숲을 이리저리 산책하며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그만큼 주변 숲에서 쏘아내는 공기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심시간과 맞물려 있어 그곳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서 식사를 위해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 포도주 공장 >지도에도 표시가 되지 않을 작은 농촌 마을은 참으로 소박하고 정겹다. 옛날식 포도즙 짜는 틀을 길가에 전시해 놓은 곳에 포도주 생산 공장 겸 공판장 같은 건물도 있고, 띄엄띄엄 서 있는 농가 건물은 단아하면서도 풍족해 보이며, 예쁘게 단장한 집의 외양들에서 주인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진다. 길가에는 빨간 개양비귀며 이름 모를 야생화가 눈부신 햇살을 받아 소담스레 피어있어 한결 여유 있어 보인다. 천천히 걸으면서 음미하면 딱 좋을, 프랑스의 보통 농촌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런 아담하고 예쁜 마을이다.
간신히 찾아낸 식당도 그 마을의 정취와 잘 어울리는 곳(Le Ballon Restaurant)이다. 종업원 없이 인상 좋아 보이는 두 부부가 정답게 운영하는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 두 줄로 길게 자리를 잡아 앉았다. 구름이 예쁜 맑은 하늘 아래, 나뭇잎 사이로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나무 그늘에 앉아 식사를 하는 기분도 독특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음식에 대한 자존심의 강국답게 이렇게 작은 마을에도 유명한 음식 전문 인증을 받은 식당이 있다니! 전국 곳곳에 KBS, SBS, MBC 음식 기행의 이름을 남발하다시피 내걸고 있는 우리네의 유행과 같은 맥락으로 인식해야 할까? 그러나 내걸고 있는 인증 마크가 요란스럽지 않고 정갈해 보여 괜히 신뢰가 간다.
갑자기 들이닥친 일행들의 예약 안 된 식사 준비 로 주인 내외는 땀을 뻘뻘 흘린다. 준비된 재료로 는 샐러드와 피자밖에 만들 수 없어 피자를 주문했 는데, 특이하게도 통영에서나 볼 수 있을 생멸치 (앤초비)를 토핑으로 얹은 피자여서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그것도 피자 도우부터 일일이 반죽하여 화 덕에서 직접 굽느라 시간차를 두고 서빙이 되어 일 행들은 익살스러운 장난을 쳐 가며 재미있게 나누어 먹었다.
점심 식사 후 다시 르 토르네 수도원을 찾아 갔다. 호젓하게 이어진 상수리나무 숲을 한참 달려 수도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깊은 산중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윽고 수도원의 아담한 자태를 지닌 건물과 마주 대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단아한 건물의 외양은 간결함의 극치를 보여 준다. 바닥, 벽, 천장이 완벽한 한 재료로 구축되고, 돌과 흙이라는 재료의 통일된 질박함이 만들어내는 꾸밈없는 형태가 나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하늘과 숲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흐르는 건축물의 소박함이 어찌나 정직한 느낌인지 나 자신의 세속적인 무게가 너무 무거운 건 아닌지 저절로 돌아보게 만든다.


옆쪽으로 작게 나 있는 출입문을 통해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의 넓은 공간은 텅 비어 있다. 가식이 없이 철저한 비움으로 숙연한 공간을 만들어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뺄 것이 없다. 대신 그 빈 공간에 들어오는 외부의 것은 모두 소중히 받아들인다. 발자국 소리, 낮은 말소리, 누군가가 짧게 발성한 굵은 바리톤의 성가 한 자락이 소중하게 공명되어 벽에서, 천장에서 스며 나오는 소리처럼 경건하게 울려 퍼진다. 이러한 공간에 영혼을 울리는 영혼의 소리라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면 감정과 이성을 포함한 마음이라는 것과는 따로 영혼이라는 것이 있음을 누구나 실감하리라. 그리고 그 영혼의 떨림 속에서 순진무구하게 선해짐, 성스러워짐을 체험하리라.
정면 제대 위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실내를 밝히는 유일한 조명으로 조명 을 받은 제대와 그 옆의 나무 십자가 에서는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뿜어 져 나와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성당 왼쪽으로 연결된 회랑으로 나 가 보았다. 순간 숨이 멎는 듯 했다. 회랑을 물들이고 있는 빛과 그림자. 거기에 머무는 고요함. 그 고요는 단순한 소리 없음이 아니라 침묵의 음악이다.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흡입한 후에?내밀한 언어로 새롭게 변주되어 연주되는 건축물의 교향악이다.
 

그곳에는 완벽한 침묵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주 가끔씩 흘러들어오는 바람결 따라 그림자만 조용히 일렁일 뿐. 그 침묵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려고(listening) 한동안 아치에 기대 앉아 있었다.


영화 <위대한 침묵>의 한 장면.
중정의 채마밭에서 노동하던 수사가 회랑 난간에 기대 앉아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으며 바람, 햇살, 그리고 그림자를 응시할 때 천천히 음식을 씹는 소리, 턱관절 따라 움직이는 얼굴 근육의 움직임으로 화면을 채우던 영상에서 묘한 충격을 받았었는데 그때의 무념무상의 시간 속에 깃든 영혼의 평온 같은 것. 그런 기분에 살짝 젖어들어 본다.

인디언들은 듣기를 '숨쉬기'라고 하고, 티벳 인들은 듣기를 '존재함'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생명을 이어가는 숨쉬기처럼, 듣고 새기고 되새기는 가운데 영혼은 숨 쉬며 성장한다.
인간은 듣기를 멈추는 순간 삶은 영원히 끝난다. 살아있는 영혼이 참된 진리를 찾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몸짓으로 텅 빈 공간 속에 가득한 충만한 소리를 들으려 귀를 기울이는 행동. 언어가 사라진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보기 시작한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사무엘 전서 3,10)"
고요한 침묵의 일상 중에 늘 그분께 귀 기울이는 사람은 진정 행복과 사랑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햇살, 같은 바람이라도 수도원 뜰, 수도원의 회랑에 서면 왜 이리 느낌이 다른 걸까? 그림자조차도 영성을 지니고서 그분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아치나 건물 벽의 돌의 각도에 따라, 빛이 들어오는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분위기로 연출되는 그림자는 그대로 하나의 예술이다.
회랑의 아치 사이로 내다보이는 중정, 중정 위로 펼쳐지는 하늘, 무심한 듯 피어있는 꽃, 시간이 정지된 듯 고요한 평화가 넘쳐흐르는 천상 세계에서 잠시 노닐다 온 느낌이다.


르 토르네 수도원을 끝으로 프로방스 지방에서 코트 다쥐르 지역으로의 여행을 위해 시원한 고속도로를 달렸다.
드디어 푸른 지중해. 우중충 흐리거나 비 내리는 날씨, 바람 휘몰아치는 날씨와도 이젠 이별이다. 푸른 물결 위로 반짝이며 눈부시게 부서지는 햇살을 대하니 갑자기 마음이 용솟음치며 붕 뜨는 기분이다.
지중해에서 처음 만난 마을은 생 라파엘이다. 1799년 이집트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나폴레옹이 이 마을의 아름다움에 반해 휴식을 취하고 갔다는 곳이다.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들과 종려나무가 멋진 조화를 이루는 산책로가 아름답다고도 하고, 여행자에 따라서는 이 마을에서 보는 지중해가 가장 아름답다는 사람도 있다.
아기자기한 요트들이 늘어서 있는 항구와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길거리 카페 등으로 보아 전형적인 휴양 도시인데, 조금 전까지의 고즈넉한 수도원의 정갈한 분위기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아서인지 휴양도시의 부산하고 산만한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된다.
붉은 색 차양의 카페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해 본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긴 하지만 별로 덥지 않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민소매, 반팔, 끈 달린 옷과 반바지, 샌들 차림의 사람들로 길거리는 활기에 넘친다. 사람들의 다양한 밝은 표정, 빠르고 톤 높은 말소리들이 종려나무 가로수 사이로 푸른 바다 물결만큼이나 넘실댄다.

생 라파엘을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코트 다쥐르의 아름다움이 시작된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펼쳐지는 해안의 풍경은 영화에서 보아왔던 바로 그 모습들이다. 드넓게 넘실대는 지중해 물결 위로 부서지는 햇살, 해안의 절벽과 언덕 위로 늘어선 멋들어진 별장들, 굽이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들은 평화롭게 보이긴 하나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들이어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카메라를 이리저리 대 보나 빠르게 스쳐지나 갈 뿐, 영상으로도 잡히지 않는다. 꿈이려니, 영화를 보는 중이려니 생각하면서 눈으로나 실컷 감상하자고 느긋이 마음먹어 본다.

얼마쯤 달리던 모두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바닷가로 돌출된 언덕의 흙과 바위색이 아주 독특하여 바닷물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멋진 곳이 나타난 것이다.
잠시 차를 세우고, 모두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았다. 주변의 돌들이 유난히 붉은 색이다. 맞 은편 산도 기묘하게 생긴 붉은 절벽과 커다란 동굴이 있어 지금까지 보던 경관과는 아주 다르 게 구별된다. 그 일대에는 집도, 마을도 없다. 이 독특한 경관을 보호하려는 것인지, 강도가 약한 바위 지대라 집을 짓기에는 지반이 약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절벽 아래로 부서지는 흰 파도, 붉은 바위, 푸른 바다, 이름 모를 온갖 야생화가 만발한 절벽들이 색채의 향연을 벌이듯 화려하고 멋스럽다. 내 나름대로 멋진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국제 영화제와 각종 축제로 명성을 날리는 도시 칸느. 우리가 방문한 시기가 마침 칸느 영화제 기간이어서 그 유명세에 걸맞게 곳곳이 교통 체증 현상을 보인다.
1834년에 이곳에 최초의 별장을 지은 영국의 브로엄 경 때문에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도시 자체는 여타 지중해 도시들에 비해 큰 의미가 없지만 1세기의 시계탑과 그 앞으로 이어지는 크루아제트 대로는 예쁜 정원과 종려나무들이 내내 함께 하기 때문에 산책하는 기분이 최고라고 한다. 그러나 우회 도로를 서행하는 내내 좁은 도로 옆으로 아파트들이 항구를 향해 다닥다닥 붙어 있고, 항구에는 요트들이 초만원을 이루며 정박해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 낭만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영화제를 보러 온 사람들을 태우고 온 대형 크루즈 선 2대가 항구 밖 멀리 정박해 있는 모습이 보이고, 영화제가 열릴 때 레드 카펫이 깔린다는 영화관도 노란색 벽을 지닌 시골 극장 같은 소박함을 풍기는 곳이다.
어두워진 후 니스에 도착했다. 그 유명한 니스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이 되지 않은 건, 어두워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미로같이 뻗은 좁은 길들을 이리저리 빠져 허름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한가운데에 내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텔에서 체크인을 한 후 마 사장님은 니스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거니까 모두들 기대하란다. 호텔에서 걸어서 한 블록 쯤 떨어진 곳에 있는 BASSERIE FLO Restaurant은 꽤 유명한 곳인가 보다. 출입문에 레스토랑에 대해 소개한 브로셔가 부착되어 있는데 대단해 보인다.


레스토랑은 손님들로 꽉 차서 발 디딜 틈이 없다. 한가운데는 무거워 보이는 붉은 자주색 벨벳에 가장자리를 아름답게 장식한 커튼이 드리워진 무대이고 벽면은 온통 유리여서 내부가 더 넓어 보이고 개성적으로 보인다.
예전에 극장이었던 건물을 그대로 레스토랑으로 운영한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납득이 되었다. 저 무대 위에서 가끔 공연을 할까 궁금했지만 시설로 봐선 그곳이 주방일 것 같다. 내부가 너무 시끄러워 고함을 쳐야 서로 의사소통이 되는 탓에 더 이상 궁금함을 물어볼 수도 없다.

이어 제공되는 메인 요리는 그 차림부터가 요란하다. 테이블 한 가운데 3단으로 쌓은 전골판 같은 그릇부터 예사롭지 않은데, 거기에 담긴 해산물을 보는 순간 우리 일행 모두의 눈과 입은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석화라고 부를 굴에서부터 시작하여 각종 데친 조개류, 그 위에 삶은 새우, 쭈꾸미, 낙지, 맨 위 칸에는 커다란 바다 가재, 대형 게. 식탁에 차려진 가위, 송곳, 각종 기구들의 쓰임새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바로 이것들을 먹기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오늘 저녁과 같은 화려한 만찬에는 게걸스러움이 가장 안성맞춤이다. 고상하고 품위 있는 귀부인의 우아한 식사하고는 거리가 멀다. 탈렌트 장미희가 연기했던 드라마 "엄마는 뿔났다"의 부잣집 마나님은 죽어도 끼어들지 못할 식사이다.
양고인 나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식사인 양 황송해 하며, 두 눈 번득이며, 입술 가장자리에 덕지덕지 게살 묻혀가며, 바지 허리 풀어가며, 원시인처럼 야만성을 드러내며 뻑적지근하게, 요란하게 만찬을 즐겼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하루였다. 여행이라는 길 떠남에서나 가능할 일이다. 일상의 삶이 매일 오늘 같다면 아마도 감당하기가 벅찰 것이다.
잠들기 전, 오늘 지나온 길들을 조용히 하나하나 반추해 보아야겠다.
꿈 속에서나 그리던 니스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

 
 
 

 

니스의 낭만, 니스의 주변에 숨겨진 보석같은 곳들 1



모나코 가는 길 - 에즈 마을 - 로스차일드 저택 - 니스(구 시가지 답사-니스 해안)



< 해변 산책로-프롬나드 데 장글레 >< 물빛과 자갈밭이 인상적인 니스 해변 >니스의 새벽 바다, 물빛이 진하고, 공기는 달콤하다.
벤취에 앉아 시시각각 색깔을 달리하면서 밝아오는 바다를 응시하는 사람, '프롬나드 데 장글레'라는 이름으로 길게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산책하는 사람, 귀에 MP3 이어폰을 꽂은 채 해변을 조깅하는 사람, 자전거, 인라인을 탄 사람 등, 띄엄띄엄 새벽을 맞는 다양한 모습들이 정겹다.
난 천천히 자갈 해변을 걸으며 자박거리는 내 발소리를 듣는다.
귀를 간지럽히듯 속살대는 파도 소리는 전혀 낯설지 않고 정겹다. 이곳이 머나먼 이국땅, 프랑스의 남쪽, 코트다쥐르 지역의 휴양 도시인 니스라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세계의 바다는 결국 만나게 되어 있고, 이곳 지중해의 물도 어쩜 내가 즐겨 걷던 동해 바다의 그 어디쯤의 물과 어디에선가 만나고 섞여서 결국 하나가 된 그 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 곳을 고집하지 않고, 한 모습만 절대적이라고 우기지 않으면서, 낮은 데로 낮은 데로 자유롭게 속성 따라 흐른 끝에 도달한 바다. 그곳에서도 '나'보다는 '우리', '모두'를 더 소중히 했기에 이처럼 다양한 아름다움으로 거듭나는 삶이 가능한 물의 속성.
망망대해를 거치면서 시달리고 빼앗기고 내어주고 또 내어주면서, 좋고 기쁘기만 했을까?

아득한 저 심연의 어디쯤에서 시작되었을 속울음은 분노의 포효로 둔갑하기도 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다가 결국에는 모든 걸 용서하고 얼싸안으며 낯모를 해변으로 밀려올 때쯤엔 아름다운 노래로 변신하고야 마는 파도의 여정.
물의 쏠림 따라 또 다시 자신을 버림으로써 동글동글 예쁘게 새로 탄생한 분홍색, 노란색의 조약돌을 주우며 여러 가지 상념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어느덧 바다는 정신이 아찔하도록 새파란 속살을 드러내면서 내 눈 가득히 차오른다. 햇빛이 빛나자 부풀어 오르던 푸른 바다는 거대한 물고기처럼 은빛 비늘을 번득이며 완만하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온통 은빛, 금빛이다.
'찬 ---란---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에 참으로 제격이라는 생각이다.

"아침 바다 갈매기는 은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넓고 넓은 바다로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 바다 노 저어 가요."

어렸을 때 불렀던 동요가 문득 흥얼거려진다.
찬란한 바다 위 하늘로 갈매기 대신 비행기 한 대가 소리 없이 떠올라 멀리 수평선을 향해 날아간다.

해변을 뒤로 하고 복잡한 미로와 같은 구 시가지를 따라 걷다 보니, 분수가 있는 넓은 광장이 나온다. 이곳이 마세나 광장인가 보다.
그 유명한 '하늘에 떠 있는 사람들'의 설치 미술품. 비가 오나 바람 부나, 어두워지나, 해가 뜨나 저렇게 공중에 떠서 저들은 무엇을 보고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른 아침의 한산한 광장 이곳저곳, 높이 올라 앉아 새롭게 시작되는 하루를 말없이 맞이하는 저들의 자세가 숙연하다. 그 아래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올라탄 트램이 천천히 달린다. 광장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장밋빛 건물이 화사하다. 지중해의 밝은 햇살을 닮아 대체로 사람들의 표정들이 밝고 긍정적이라는 이곳 니스와 아주 잘 어울리는 색깔이다.

어제 저녁 식사를 했던 식당도 지나갔다. 식당 앞은 쓰레기를 수거하는 차량이 출입문을 막고 서 있다. 절반도 못 먹고 아까워하면서 남긴 음식들이 모두 쓰레기가 되어 저 음식물 처리용 차량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호텔 앞에 왔을 때 한 무리의 정장(흰 양복, 흰 모자 등)을 한 사람들과 장대 위에 선 키 큰 남, 여 한 명씩이 모여 왁자하게 떠들고 있다. 장대 위 에 선 남녀가 사람들에게 흰 모자를 나눠주고 있 고, 악사들은 경쾌한 음악을 연주한다. 호텔 건너 편 유대교 경당에서 무슨 행사가 있는 모양이다. 호기심에 이 사람, 저 사람 관찰하며, 서투른 말로 질문도 하며 상상력까지 발동시켜 추리해 본 결과.
어린이 2명의 세례식이 있는 날이다.
잘 생긴 2명의 소년은 정장에 멋들어진 선글라스까지 썼고, 유대인의 전통 모자인 빵 모자를 썼다. 소년의 어머니는 드레스와 멋진 모자로 완전 성장을 했다. 축하객들은 한결같이 정장을 했고, 모두의 얼굴은 기쁨에 들떠 있었으며 축제를 방불케 할 들뜬 분위기이다. 장대 위에 선 남녀가 길잡이인 모양이다. 유대인의 전통 의상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는 재미가 아주 컸다.
유대 경당 안에도 들어가 보았다. 오늘의 세례식을 축하하기 위한 풍선과 꽃 장식이 화려하고, 제대 정면에는 랍비로 보이는 분이 의식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이층 난간, 아래층에도 하객들이 가득 차 있어 유대인들에게 세례식은 얼마나 성대하고 중요한 의식인지 그 단면만 보아도 알 것 같았다.

 

느긋한 아침을 보낸 후 모로코를 향해 출발했다.
모로코로 가는 길은 절벽이어서 달리는 내내 지중해를 바라보는 전망이 무척 좋았다. 다소 기분파로 보이는 우리의 기사, 무슈 앙드레는 바다 경관이 멋진 장소에 버스를 세웠다.
멀리 해변을 따라 니스를 대표하는 최고급 호텔들이 멋지게 늘어선 ‘프롬나드 데 장글레’(영국인들이 1820년 코트다쥐르를 개발하면서 '영국인의 산책로'라 명명되는 보행자를 위한 넓은 도로. 도시와 바다의 경계를 이루는 11Km에 이르는 거리에 상점과 갤러리, 초호화 호텔들이 늘어서 있음. 현대적 감각과 지중해 해변의 자연이 잘 조화된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유명 인사들의 별장이 즐비하다는 빌프란체 수르 메르의 전경은 압권이다. 돌출된 반도에 이어진 방파제, 방파제 끝에 세워진 등대, 평온하고 아늑해 보이는 항구에 가득 정박해 있는 하얀 요트들, 짙푸른 바다에 부서지는 햇살 사이로 한가로이 노니는 백조들처럼 점점이 떠 있는 요트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멋지게 운집해 있는 별장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어 보이는 그 조화로운 풍경은 한 장의 그림엽서처럼 아름답다.
‘아름다운 별장, 그 앞에 떠 있는 흰 요트, 요트 난간에서 멀리 바다를 내다보는 두 남녀, 선글라스 낀 잘 생긴 얼굴에 미소가 멋진 남자 주인공, 차양이 긴 하얀 모자에 흰 원피스를 입은 금발머리의 아름다운 여인.’ 그림엽서의 안쪽 면에서 펼쳐지는 가장 낭만적이며 꿈같은 장면을 상상해 보면서, 그 남녀를 자신의 모습으로 살짝 바꾸어 본다.
니스 해변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왕실에서 나온 왕족이 되어 보기도 하고, 칸느 영화제에 참석하러 온 배우가 되어 보기도 하면서 일행들은 여왕의 폼으로, 왕자의 폼으로 사진들을 찍는다. 서로 포즈를 만들어 주기도 하면서 한참을 연극 무대 위의 배우라도 된 양 우아한 미소를 날리는 그들의 얼굴이 거짓 없이 화사하다. 비스듬히 기대 선 그들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 햇살이 바다색을 닮아 간다.

모나코로 가는 길은 세 갈래이다. 그 중 우리들은 가운뎃길로 달렸는데, 달리는 내내 멋진 전망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작년 그리스의 미코노스, 산토리니 섬을 여행했을 때 에게 해의 환상적인 물빛, 그 푸른빛에 온몸이 충분히 흠뻑 젖은 줄 알았는데, 오늘 또 다시 지중해의 환상적인 물빛에 기갈 들린 사람처럼 여한 없이 젖어 본다. 아울러 '별장'과 '요트'라는 비현실적이면서도 화려한 낭만도 마냥 꿈꿔 본다.
굽이를 돌 때마다, 햇살이 퍼지는 방향에 따라 바다의 물빛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그 미묘함에 매료되어 내 눈은 차창에 고정되어 떠날 줄을 모른다.

그레이스 켈리와 왕가 이야기가 중심 화제가 될 무렵, 우린 모나코 입국을 거절당했다. F-1 그랑프리 자동차 경주의 후유증 탓이다. 경주는 어제인가 끝난 걸로 아는데, 시내 곳곳에 설치한 자동차 경주를 위한 시설물 철거 및 정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 관광버스는 아예 진입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여행 마지막 날 다시 오기로 하고, 오후에 가기로 예정되었던 에즈(Eze)를 향해 버스를 돌렸다.

지중해 해변을 따라 늘어선 마을들과는 달리 에즈는 높은 바위산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것처럼 형성된 마을이다. 에즈의 매력은 역시 14세기에 형성된 좁은 골목길에 있다고 자료집에는 나와 있다.
역시 에즈는 매력적이었다. 성채가 올려다 보이는 언덕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점심 식사할 레스토랑의 위치를 확인한 후, 점심 식사 시간까지 에즈를 자유롭게 돌아볼 시간을 가졌다.

마을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왼쪽으로 니체의 산책길이 나왔다. 인적 없는 고즈넉한 산책길을 걸어가다 마주치게 되는 절벽, 이곳에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절규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절규를 쏟아낼 수밖에 없었던 구체적인 배경이나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이러한 산책길이라면 철학적인 명상보다는 시상(詩想)의 한 줄기를 붙잡는 게 더 자연스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대학 초년생일 때 어줍잖게 니체를 알겠다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끼고 다닌 적이 있다. 니체의 중심 사상을 문학적 상징과 비유를 사용해 풀어 쓴 철학 소설이긴 하지만, 초인, 권력에의 의지, 영겁회귀 등, 그의 심오한 은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던 데다가 얕은 내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별로 동조하고 싶지도 않은 이론들이어서 곧바로 외면해 버렸었다.
독일의 철학자인 그가 어떤 연유로 이곳에 머물렀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초인 철학을 탄생시켜 근대 철학의 탄생자로 자리매김 되는 그의 업적에 비추어 볼 때, 이곳은 대단한 장소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태양을 보고)"그대 위대한 천재여!
만일 그대가 비추는 대상을 못 가졌다면
그대의 행복이란 과연 무엇이겠는가?"
(짜라투스트라) "그대는 바다에서 사는 것처럼 고독하게 살아왔다.
인간은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 불완전한 것이다.
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할 어떤 존재이다.
인간이란 동물과 초인 사이에 걸쳐 놓은 하나의 밧줄이다."
 

프로방스 지역의 성채 마을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출입구도 방어 형태인 지그재그?모양이고, 출입구를 폐쇄시킨 상태에서 외부의 적을 향해 뜨거운 물이나 기름을 부어서 그들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던 아래쪽에 수로가 달린 돌 벽과, 건물 자체가 방어벽의 역할을 했던 건물이 초입에 버티고 있다.

아름다운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카페는 물론, 관광객을 부르는 기념품 가게들의 인테리어들도 어찌나 예쁜지 넋을 빼고 구경을 하게 된다. 특히 돼지가 포복절도하며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 갖가지 고양이들이 기품 있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오리, 닭들을 교수형 시키듯이 진열해 놓은 익살스럽고 유쾌한 발상들은 구경하는 재미를 한층 높여준다.


마을의 제일 윗부분으로 올라가면 폐허가 된 중세의 성이 나오는데, 이 일대가 각종 선인장을 비롯한 아열대 식물로 조경을 한 '이국 정원(Jardin Exotique)‘ 이다.
마 사장님이 넓적하고 큰 선인장을 가리키며 이름(학명)을 맞히면 알프스 여행 상품을 부상으로 준다고 선언했다. 모두들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 이름을 대 보았지만 '시어머니 방석'이라는 이름을 어찌 맞힐 것인가? 시어머니 슬하는 어렵고 고통스럽다는 정서는 동서양이 같은 모양이다. 우리나라 야생화 이름 중에 며느리, 사위, 시어머니가 등장하는 것이 많아 우리네 삶의 단면이 보이는 것 같아 재미있었는데, 선인장 이름에, 그것도 세계적인 학명으로 당당히 자리를 잡은 이름에도 그렇게 삶이 반영된 것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신기했다.

정원 중간 중간에 세워진 조각 작품들이 있어 선인장, 기타 식물과 꽃들이 더 운치 있어 보이는데, Barbara, Isabeau 등 작가가 다른데도 조각품들의 이미지가 비슷하여 한 작가의 작품처럼 보인다.
선인장 사이로 고독하게 우뚝 서 있는 조 각 중에 어린왕자를 연상시키는 것이 있다. 멀리 지중해 쪽, 항구인지 수평선인지를 응 시하고 있는 이유는 하루에 해가 마흔 세 번이나 진다는 소혹성 B612호가 그리워서 일까? 아님 두고 온 자신의 장미꽃을 생각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에게 여러 가 지 삶의 지혜를 일러준 친구, 여우를 기다 리고 있는 걸까?
멋진 여인이 응시하고 있는 바다와 해변 과 마을들의 풍경도 아주 매혹적이다. 평화로움과 행복만이 존재하는 꿈의 세계처럼 아련하고 아득하다.

이국 정원에서 내려오는 길에 그림이 좋아 저절로 발길을 끄는 작은 아뜰리에 몇 군데, 목각의 예수님 얼굴이 아주 인상적인 성당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고풍스러우면서 도 현대적이고, 생활공간이면서도 예술적인 골목을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 걷는다는 사실이 이처럼 자유롭고 좋을 수가 없다.
전망 좋은 카페에서 카푸치노 한 잔의 여유 시간을 가졌다. 미래의 손자들이 저렇게 귀여우리라 생각되는, 발코니에 장식된 앙징스런 조각에 사랑스러운 미소도?보내고, 동양 여자의 출현에 호기심을 보이는 잘 생긴 청년 직원을 애인삼아 사진도 한 장 찍었다.
부드럽고 향긋한 카푸치노에 에즈의 아름다운 분위기와 상쾌한 공기의 맛까지 첨가시켜,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커피 타임을 즐겼다.

점심 식사를 한 레스토랑의 주인은 말을 좋아하는 건지, 그림을 좋아하는 건지, 우연히 좋아하는 화가가 말을 주로 그리는 사람인지, 아니면 나처럼 말을 그린 그림을 좋아하는지는 몰라도 벽을 장식한 말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유의 공간에 커다란 시계,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 기차, 망연한 눈빛의 말 등을 극사실적 그림으로 표현하던 화가 이석주의 그림을 알게 된 이후로 말을 소재로 그린 그림에 관심이 많아진 나인지라, 밥 먹는 일은 건성으로 하면서 그 그림들을 사진에 담았다.

모나코 일정이 바뀌는 바람에 오후에는 예정에 없던 코스로 니스의 명소인 로스차일드 개인 저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유럽 최고의 은행 재벌로 알려진 로스차일드 집안에서 100여 년쯤 전 이곳 별장 부지를 확보하게 된 과정에서 보여 준 돈의 위력, 19살 때 상속받았다는 상속녀 이야기는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들렸지만 니스에 자리 잡은 갑부들의 공간을 살짝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게 된 건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어, 열대 식물, 에스파뇰, 일본, 장미 등 7개의 주제로 꾸민 정원을 먼저 둘러 보았다. 개인이 소장한 정원이란 점에서는 대단하게 여겨졌지만 둘러보는 동안 내 관심은 정원의 꽃, 나무, 석물 및 장식물 사이로 바라보이는 바다 전망에 더 집중되었다. 돌출된 작은 반도 끝 쪽으로 형성된 정원이라 바다 이쪽저쪽이 모두 바라보이고, 바라보는 방향 따라 펼쳐지는 바다 풍경이 모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코발트빛으로 빛나는 잔잔한 수면에 고요히 잠자듯 떠 있는 하얀 요트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에서는 물질의 냄새보다는 사람들이 바라고 꿈꾸는, 순수할 정도로 평화로운 최고의 풍경인데, 이 정원들에서는 억지스러울 정도로 인위적인 냄새가 너무 강하다.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이처럼 인위적인 정원을 꾸밀 게 아니라 원래 있었을 숲, 구릉, 흙길 등이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아있는 야산이었더라면 이곳의 풍경들이 주는 분위기가 더 조화롭지 않았을까? 정원은 있으나 그 정원을 사랑하고, 정원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살이의 냄새가 나지 않는 정원은 물질, 부의 과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별장으로 지어진 저택이어서인지 건물 규모는 별로 크지 않고, 1,2층 각 방에는 세계 각지로 여행하면서 관심 있게 모은 수 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으로 기능하 면서 비싼 입장료를 받고 방문하는 사람들 에게 수집품 관람을 시키고 있었다.
박물관 가이드는 거의 사명감을 가지고 차근차근, 상세하게 설명하느라 우리들의 개별적인 관람의 자유와 취향을 무시하고 통제하는 듯해서 굉장히 불편하고 불쾌하기 까지 했다. 수집품들은 시대와 지역을 망라 할 정도로 다양하고 양이나 규모도 개인이 수집하기에는 어마어마한 것이지만, 수집가의 철학이나 취향을 반영한 것 같지 않아(전시 현태와 관람 방법의 문제일 수도 있었는데) 돈 있는 자들의 문화적 허영이나 과시욕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삐딱한 시선이 생겨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호감이 갔던 전시물도 꽤 많았는데, 즐기면서 관람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같은 부호의 저택이라 해도 미국의 캘리포니아 산 시메온 언덕에 자리 잡은 허스트 캐슬을 방문했을 때의 기분은 이렇지 않았다. 유럽의 유명한 건축물을 모방하고 건축 자재도 거의 유럽에서 수입해서 지었다는 건물 자체에서도 볼거리가 어마어마했고, 그 안에 소장되어 있는 방대한 수집품들도 건물 내부의 인테리어로서 아주 조화로웠다. 정원과 저택 부지에 속한 광대한 주변 풍광도 전혀 억지스럽지 않았다. 굉장히 비쌌던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물론 이곳 로스차일드 저택에 비해 어마어마한 규모여서 비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도 하겠지만.
이처럼 상반된 기분이 드는 건, 부의 규모가 달랐기 때문인가, 아니면 부자들이 보여준 문화적인 코드와 수준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인가?

 
아래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내내 시선과 마음을 빼앗아 가는 지중해의 물빛, 그 물빛을 한가하게 즐길 수 있었다는 것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리라. 이만한 부를 소유해 보기는커녕,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내가 감히 무얼 더 논하겠는가?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거기에 가장 어울리는 인생관을 가지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는 건 결국 아름다운 것 아니겠는가? 이 세상은 아롱이다롱이가 모여 어울리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라고 하지 않는가?

일행 모두는 물빛에 취한 몽롱한 기분들이 되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시간을 다소 많이 보냈다 싶었는데, 결국 오늘 방문하기로 했던 샤갈 미술관에 늦게 도착한 관계로 관람을 못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소위 문화 선진국이라고 하는 프랑스에도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날 즐겁게 했다.
우린 입장 마감 시간인 5시(관람 시간은 오후 6시까지)보다 정확이 10분전에 매표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표를 팔지 않는 거다. 입장이 끝났다는 거다. 관람 출입을 관리하는 여직원의 태도는 완강했다. 황당한 상황 앞에서 우리들은 미술관의 규칙을 들어가며 항의했다. 직원 왈 매표소 직원뿐만 아니라 미술관 책임자 모두 자리에 없어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계속 시간 안 지킨 우리가 잘못이라는 고압적인 태도를 취한다. 방법이 없다. 괘씸하지만 관람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식으로 '책임자 나오라고 그래, 상급 기관에 항의 하겠어, 너희들 퇴근 시간도 안 지키고 무단으로 근무지 이탈한 것 아니야?'라고 윽박지르며 무식하게 나가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처럼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고, 원칙대로 움직인다는 소위 선진 프랑스에도 이런 일이 생긴다는 사실에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래, 사람 사는 곳이다. 포장지를 벗겨 보면 그 안에는 삐그덕거림이 있는 이런 게 사람 사는 세상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곳의 공직 사회도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이다. 이제 마음이 놓인다. 이들도 우리랑 같다. 우리의 적당하게 안일한 무책임, 불법에 열등감을 가질 필요 없다.'
기분 좋은 쾌재를 부르고 나니 마음이 한결 느긋해졌다. 잘 나 보이는 상대방의 약점을 발견한 것 같아 오히려 즐겁기까지 했다.

그 이후 니스 시내 답사에 나섰다. 새벽에 혼자 걸었던 마세나 광장에서부터 좁고 복잡한 미로 같은 구 시가지를 거쳐 해변까지 일행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한가로이 걷는 이 기분도 꽤 괜찮다.
19세기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법원, 17세기의 건물인 경시청, 매일 아침 과일과 채소 시장이 열리는 살레야 광장, 옛날 역마차 터미널이었던 생-프랑스와 광장이 구 시가지의 명소들이다. 쉬엄쉬엄 거리를 산책하다가 노천 카페에 앉아 다리품을 쉬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이곳이 휴양지임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여름 피서 철엔 이곳이 한층 더 북적댈 것이다.


구시가지 골목에는 니스 사람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관광객을 부르는 생업의 현장부터 빨래가 주렁주렁 널려 바람에 펄럭이는 건물 풍경까지. 왠지 우리의 이웃을 만난 것처럼 편안하고 친근한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경계의 벽을 허물게 된다. 넘쳐나는 식당, 카페, 기념품 가게 앞을 지나며, 일상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에게 인심 후한 미소와 인사말도 마구 날려 보낸다.
생 레파라트 성당까지 이어진 구시가지 산책 을 마치고 해변으로 나가 해변에 누워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에 섞여 파도와 노닐었다. 밀리는 파도와 파도 사이에 문득 높은 파도가 떠밀려와 옷을 적셨지만 그마저도 즐거워 우리는 깔깔거 린다. 젊은이들 한 무리도 우리들처럼 파도를 쫓 으며 즐겁게 뜀 박질을 한다. 그들도 우리들도 모두 자유롭고 유쾌하다. 바다는, 파도는 이렇게 모두를 자유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오늘의 니스에서의 낭만 여행은 이렇게 저물어 갔다.


 

 

 

니스 주변의 보석같은 곳들 2


생 폴 드 방스 - 방스의 로사리오 성당 - 구르동 - 투레트 쉬르 루 - 모나코(왕궁-몬테 카를로)


오늘은 언덕 위의 성곽도시인 생폴 드 방스의 독특한 매력에 젖어본 후, 니스 북부의 협곡을 답사하는 날이다.
루 협곡은 알프스 너머에서 발원하여 지중해로 흐르는 루강이 지중해로 떨어지기 전에 만들어 낸 깊은 계곡 지대를 일컫는다. '늑대'라는 뜻을 지닌 '루'는 계곡이 깊어 사람들로 하여금 야생 동물로부터 느끼는 공포감, 고립에서 오는 두려움이 컸던 지역이었기에 협곡 이름도 그렇게 지은 게?아닌가 싶다.
니스에서 동쪽 모나코 방향으로 가다가 살짝 산 쪽으로 방향을 틀면 루강을 따라 협곡이 펼쳐지고, 아슬아슬한 절벽을 돌고 돌다 보면 폭포도 만나고, 험준한 산 속 곳곳에 별장처럼 보이는 예쁜 집들이 박혀 있어 주변 환경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드디어 산 위 높은 곳에 성채가 보인다.

생폴 드 방스(Saint Paul de Vence). 원래 프랑스의 다른 곳에 ‘생폴’이라는 지명이 있어서 그곳과 구별하기 위해 '방스 옆에 있는 생폴'이란 뜻으로 이곳을 생폴 드 방스로 부른다. 그동안 프랑스에서 둘러 본 다른 성채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3세기에 로마의 침략을 피해 산 속으로, 높은 곳으로, 바위 절벽을 이용해 숨은 듯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곡면을 이뤄 입구만 차단하면 외부인의 출입을 완벽히 막아낼 수 있는 방어 형태의 도시로, 8세기 이슬람의 침략에도 그런 식으로 자신들을 방어하고 보호했던 곳이다.

 
주차장에서 마을로 걸어가는 도중 올려다 본 생폴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고, 빨간 지붕과 짙푸른 플라타너스가 조화를 이루어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이 작은 마을에 가장 많은 것들이 예술가들이 작업을 하고, 작품들을 전시하여 구경도 시키고, 팔기도 하는 아뜰리에와 갤러리라고 한다. 단위 면적당 예술가들의 공간이 가장 많을 정도로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란다. 증명이라도 하듯 마을 초입부터 샤갈 그림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고, 풍만한 여체의 브론즈 조각도 멋들어지게 서 있다.
 
생폴 드 방스는 샤갈을 비롯하여 내노라 하는 화가들과 작가들의 작품 무대이기도 했던 곳으로 이곳을 사랑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묵었다는 콜롱보 여관은 그래서 탄생한 명소가 되었다. '황금 비둘기'라는 뜻의 간판 '라 콜롱브 도르(La Colombe d'Or)‘는 식당과 여관을 겸하고 있는데, 가난한 화가들이 밥값이나 숙박비 대신 지불했던 그림들이 이 집의 내부에 걸려 있다고 한다.

보고 싶긴 하나 예약한 손님이 아니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다고 한다.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은 말년을 이곳에서 보낸 러시아 화가 샤갈을 비롯하여 피카소, 수틴, 시냐크, 콜레트, 모딜리아니, 콕토, 젤다, 스콧 피츠제랄드, 사르트르, 보부아르, 브라크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또한 이브 몽땅이 이곳 테라스에서 결혼식을 올려서 더 유명해졌다는데 황금비둘기 간판과 테라스 입구에 있는 세자르 작품의 거대한 엄지손가락 조각은 이곳을 더욱 명소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 같다. 담쟁이 넝쿨이 어우러진 하얀 파라솔 아래에 앉아 차를 마시는 투숙객들. 이들은 지난 밤 어느 유명인의 꿈을 꾸며 누가 거쳐 간 침대에 누웠던 사람들일까?
 
마을의 중심도로인 그랑 거리는 16세기와 17세기의 문장이 그려진 고풍스러운 길을 따라 기념품 가게, 갤러리, 아뜰리에가 이어지는데, 바닥에 깔린 자갈들의 문양에서부터 건물 벽에 장식한 꽃이 담긴 화분까지 운치가 있고 예술적이다. 중세풍의 집들의 고풍스러움과 어우러진 예술가들의 거리는 카메라만 대면 모두 예술 작품이 될 정도로 멋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른 아침이라 한산해 보이는 골목에는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곳이 많아 유리문 안으로 들여다 본 갤러리 중에는 욕심나는 작품들도 많았는데 들어가서 구경하지 못하는 게 아쉽기만 하다. 그나마 카메라에라도 담을 수 있는 몇몇 작품들에서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다. 도자기로 구운 갖가지 고양이들이 마을을 이룬 쇼윈도 앞에서는 군침만 삼켰다. 충분히 작품들을 볼 수는 없었지만 대체로 관광객들을 겨냥한 상업화된 것들이 많아 보이긴 했다.
골목을 관통해 간 끝 지점, 멀리 들판과 지중해 가 바라보이는 방향에 있는 공동묘지에 샤갈 무덤이 있었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렸던 샤갈은 살아 생전에 부와 명성을 모두 누렸지만 유대인으로서 타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고 하는 데, 이곳 생폴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이곳에서 죽 고 묻혔다.
그의 무덤은 커다란 대리석 판 위에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꿈꾸는 듯한 표정의 날 개 단 천사 형상의 단순한 선 그림이 그려진 것 이외에는 별 장식 없이 소박한 모양이다. 무덤 위 에는 분홍색 장미꽃 한 송이와 몇 개의 자갈돌이 올려져 있을 뿐이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풍습으로 참배객의 마음을 돌멩이를 올려놓는 것으로 대신 한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올려놓은 여러 개의 돌멩 이의 사연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갔지만 아름다운 색채 속에 담긴 사랑의 형상들로 전 세계인의 마음을 울리고 사로잡은 화가의 생명은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를 추모했다.
아침 햇살이 퍼져 나가는 묘지는 고요하면서도 따뜻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든다. 묘지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그 느낌이 너무 좋아 마음에 드는 십자가가 있는 이름 모를 무덤 곁에 내 그림자를 묻었다. 내 앞으로의 삶은 이와 같은 평화로움을 안고 더 이상 욕심 없이 소박하게 일상의 감사로움을 되돌리는 착함으로 살아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안고서.
묘지를 나와 남은 시간들을 마을 외곽의 성곽을 따라 자유롭게 배회하다가 마을 밖의 버스 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작고 앙증맞은 우체국에 들러 남편에게 엽서를 썼다. 내일이 남편 생일인데 옆에서 축하해주지는 못하지만 이곳 생폴의 풍경이 담긴 사진엽서로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이다. 오늘 쓰면 내일 소인이 찍힐 거고, 남프랑스의 작은 마을 우체국 소인으로 선물을 대신하려 한다.

생폴 드 방스를 떠나 방스의 로사리오 성당(엄밀히 말해 ‘경당’ Chapelle)을 향해 가는 내 마음은 기쁨으로 벅차 올랐다. 애당초 일정에 없던 곳이지만 시간이 되면 이곳에 꼭 방문해 달라고 조르고 싶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노쇠한 마티스가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의 삶의 마지막 혼신을 다해 설계하고 장식했다는 이 성당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무척이나 가 보고 싶었던 곳이다.

한국 경제 매거진 Art &Culture 50호(1996.11.19)에?"색과 빛으로 승화된 삶의 즐거움 - Henri Matisse in Rosary Chaple"의 제목으로 실린 글을 인용해 본다. 로사리오 성당을 통해 마티스의 예술적 정열과 혼, 그의 영성을 조금 더 가까이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방스의 마티스 성당---

칠십이 넘은 노년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는 1941년 정월, 리옹에서 십이지장 암수술을 받고 작품을 마무리 할 수 있게 삼사년만 더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의사에게 간청했다. 마티스는 바닷바람을 쐬라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니스 북쪽 시미에의 높은 곳에 위치한 대형 호텔 레지나로 작업실을 옮겼다. 이 호텔은 영국에서 오는 겨울 관광객을 위해 1897년 지어진 호텔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묵은 적이 있는 특급 호텔이다. 하지만 1943년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시미에 공습이 있은 뒤 마티스의 한 시기도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의 니스 시대는 루마니아 블라우스를 입은 채 졸고 있는 모델을 그린 <꿈>(1940)과 함께 끝났다. 마티스는 니스를 떠나 산기슭에 자리 잡은 중세도시 방스의 별장 ‘르 레브’로 작업실을 옮겼다. 노대가 마티스는 앓아눕는 일이 잦았다. 평생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담배로 인한 폐색전증과 위하수증 때문에 쇠로 된 벨트를 차고 다녔는데, 그 때문에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지난 50년 동안 나는 잠시도 작업을 중단한 적이 없다.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일하고 점심을 한다.
 
점심 후 낮잠을 간단히 잔 다음 오후 2시에 다시 붓을 들고 오후 내내 저녁때까지 줄곧 일을 했다. 상상이 안 갈 것이다”라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붓 대신 가위를 들고 휠체어에 앉아 종이 오리기 작업을 하였다. 방스의 로사리오 성당 <생명의 나무> 작업의 초안을 시미에 레지나 호텔 천장 높은 그의 작업실에서 완성했다. 로사리오 성당의 인연은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옹의 젊은 간호사 모니크 부르주아는 마티스를 간호하면서 맺은 인연으로 드로잉과 유화의 모델이 되기도 하고, 마티스 만년의 걸작 <재즈>의 종이 오리기를 도와주기도 하였다. 1946년 수녀가 되어 자크 마리로 불리게 된 그녀는 방스에 있는 도미니쿠스 수도회로 옮겼고, 그곳에서 마티스와 인연을 다시 이어가기 시작했다. 1947년 말 자크 마리 수녀의 추천으로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레시기에 수사가 마티스에게 방스에 성당을 지으려는 계획을 알려 왔다. 자크 마리 수녀는 수녀들의 예배당 스테인드글래스를 마티스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다. 마티스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자신의 삶과 예술을 ‘건축학적 그림’인 스테인드글래스로 완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대가의 의지는 열정으로 불 타 올랐다. 성당은 가로 15m에 세로 6m 높이 5m로 ‘ㄱ’자 형의 작은 공간이었다. 마티스는 요한계시록 22장 2절 에 나오는 “…내게 생명수가 흐르는 그 강은 그 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어서 일 년에 열두 번,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또 그 잎은 모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라는 구절을 주제로 선택하였다.
 
---마티스의 생활---

레지나 호텔의 마티스를 가까이 지켜 볼 수 있었던 자클린 뒤엠은 훗날 자신의 기록인 <선과 그 밖의 것들>에서 마티스의 하루 일과와 계절에 따라 파리와 니스를 오가던 생활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니스 작업실 풍경과 빛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여름이 끝날 무렵 우리는 다시 (파리에서) 니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제는 레지나 호텔에서 묵을 차례였다. 그 호텔의 로비는 으리으리한 장식물로 치장되어 있었고, 호텔에 들어서면 마치 박물관이나 사원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박물관 같은 공간을 이루는 다른 방들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고색창연한 골동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니스와 방스의 마티스 거처에서만 볼 수 있는 그 특이한 빛, 태양의 위치에 따라 반쯤 드리운 얇은 커튼에 여과되어 들어오는 그 부드러운 빛은 마치 수도자가 생활하는 그리스 어느 사원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마티스의 작업실은 실제로 수도자의 생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방스의 도미니쿠스 수도회 성당의 모형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마티스의 성당 드로잉 작업은 종이에 자크 마리 수녀가 마티스가 원하는 녹색 노랑 파랑의 과슈 물감을 칠하면 마티스가 연필로 드로잉하고 그에 맞추어 종이오리기를 한 다음 벽에 풀로 붙여 나가는 방식이었다. 언뜻 보면 마티스가 대가의 노련함으로 쓱쓱 쉽게 잘라낸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종이를 원화의 의도에 가깝도록 수없이 자르고 덫 부쳐 작업을 <생명의 나무>를 완성했다. 그 뿐 아니라 세라믹 타일에 그려진 드로잉은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을 팔십 노대가의 눈으로 그려낸 마티스 최후의 만찬이다.
 
마치 추사의 절필 봉은사 <판전(板殿)> 편액을 보는 듯하다. 예술 최고의 경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가 보다. 고졸함이 바로 그것이다. 마티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어린아이가 사물에 다가갈 때 느끼는 신선함과 순진함을 보존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평생 어린아이로 남아 있으면서도 세상의 사물로부터 에너지를 길어오는 성인이 되어야 한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아무런 걱정도 간섭도 없이 그림을---

방스 성당의 그림을 설계하면서 마티스는 일에 깊이 몰입하여 한때는 수도자가 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종교는 그림이었다. 1951년 로사리오 성당의 <생명의 나무>연작을 마무리하면서 마티스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나는 아무런 걱정도 간섭도 없이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여건만 마련된다면 독방에서 수도자로서 살아가고 싶다. 성당에 와서 내가 해야 할 주 임무는 빛과 색채로 채워진 표면 하나와 흑백의 선 드로잉으로만 그려질 다른 쪽 벽사이의 평행을 만드는 일이었다. 내게 그 성당은 내 작품에 헌신한 전 생애의 완성을 의미했다. 그것은 힘들고 까다롭지만 정직한 노동의 개화였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택한 작업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되어 온 내 예술적 탐구의 과정에서 운명적으로 나에게 점지된 작업이다. 성당은 그 탐구를 종합함으로써 마침내 그것을 현실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나에게 열어 주었다.
 
이 작업이 헛되이 끝나지 않고 지금은 지나가 버린 한 시기의 예술적 표현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운동이 완전히 실현되기 전까지는 아직은 확신을 갖고 단언할 수 없다. 인간의 감정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저절로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러나 조형적 전통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생명력은 여전히 살아남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생명력을 나의 계시라고 부르고 싶으며, 뿌리를 더듬어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그 계시가 넉넉하고 힘 있게 표현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마티스의 소원대로 그는 아무런 걱정도 간섭도 없이 그림을 그리고 종이로 오려 성당을 완성했다. 성당의 제단은 성당 한 가운데 정 동쪽으로 자리하여 신자와 합창단 사이 기둥 모서리를 향하여 단정하게 자리 잡았다. <생명의 나무>연작은 초록 노랑 그리고 파랑 세 색으로만 이루어졌다.
 
제단의 오른쪽 스테인드글래스는 선인장의 몸에 폴리네시아 바다 풀잎으로 방식하여 생명이 넘쳐나게 표현하였고, 성당 남쪽 창문에는 나뭇잎사귀가 자라 춤추는 형상으로 그려 내었다. <성모자상>과 <십자가의 길> 드로잉은 어린아이 그림처럼 단순 천진하게 그려져 있다. <성 도미니쿠스상>은 해탈한 성자의 진실만 남은 절대경지의 선묘화이다. 대가의 숨결은 평범함이다. <글 : 최선호(화가)>

"이 성당이 완성되기까지는 내 몸을 거두지 마소서."라는 간절한 기도와 함께 “도미니코 수도회와의 인연으로 내 평생의 예술에서 이룬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한다.”라고 고백하면서 성당 건립에 진력한 그의 열정, 집념, 혼의 결과물들은 방문자를 꼼짝 못하게 마비시켜 놓고 만다.
  


성당 정면의 성모자상, 출입구 위의 성가족 그림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순백의 벽에 만화 드로잉처럼 단순한 선들 위로 지극한 고난과 슬픔을 따뜻하게 품어 안은 어머니의 자애로움이 그대로 묻어나와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눈물을 삼키려 고개 를 들어 하늘을 보는 순간 또 다시 눈물이 왈칵. 너 무 성스러운 아름다움이 하늘에 펼쳐져 있기 때문 이다. 가장 절제된 숭고한 마음을 오롯이 하늘로만 지향하고 있는 간절함, 절절함이 거기에 있다. 지붕 은 그대로 흰 구름이 떠 있는 하늘이고 그 위의 진 짜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반사하고 있는 종루 없는 나신의 종과 철십자가는 하늘을 향해 너무나 정직하다.
 
성당 내부는 ㄱ자 형인데 정면과 측면은 커다란 생명의 나무를 형상화했다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빛을 받아 흰색의 성당 바닥과 벽면을 푸르고 노 란색으로 물들여 환희의 송가를 부르듯 춤을 추고 있다. 시간과 햇빛의 양에 따라 실내의 분위기를 은총이 넘치는 화사한 밝음으로 다양하게 연출하는 흰색의 내부는 하느님의 사랑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솔직하고 겸손한 피조물들을 연상케 한다.
빵의 느낌이 나는 구멍 뚫린 엷은 노란 갈색의 돌로 된 제대, 그 위 꽃모양으로 형상화한 촛대, 제대 돌을 파서 그 안에 설치한 감실, 제대 뒤 벽에 그려진 도미니코 성인의 눈, 코, 입이 생략된 얼굴과 제의 윗부분의 M(Maria의 두문자 상징)으로 디자인 된 간결한 모습, 그 모든 게 마티스의 예술혼과?영성과의 눈부신 만남이다.
성당 후면은 마티스가 드로잉하여 세라믹으로 구운 벽면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한 벽면 가 득 그려져 있는데, 얼 핏 보아 어린아이의 낙 서처럼 서툰 그림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고 난 과정을 깊이 묵상하 며 기도하는 자세로 수 없이 드로잉을 한 끝에 가장 단순화시켜 얻어낸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참된 신앙이란 저처럼 간결하고 단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사여구가 동원된 요란한 말보다는 조용한 침묵이 보다 진실한 기도라는 성경 말씀도 있듯이. 14처를 따라 고난의 길을 묵상하다 보면 예수님의 담담하면서도 절절한 인간 사랑의 그 마음이 얼얼하게 가슴에 다가온다.
 

고해실로 들어가는 문짝의 문양, 성당 입구의 성수 담은 성수대까지 '마티스답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게 한다.


마티스의 '춤', '음악'에서 단순함 속에 배인 강렬한 생명력, 열정, 에너지가, 복잡한 수식이나 기교가 배제된 드로잉 작품에 깃든 삶의 관조성이 좋아 그를 사랑했었는데, 이 성당 장식에 그의 평생을 녹여내면서 하늘 가까이 다가간 그의 전심전력에서 새로운 열망이 온몸으로 전해짐을?느끼겠다.

한 인간이 걸어가는 길은 너무나 복잡하고 복합적이며, 많은 얽힘 속에 자유로움이 침해당할 수밖에 없다. 또, 엄청난 양의 물질들의 필요 안에서 욕심마저 만발해짐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그런데 그의 이 작고 소박한 성당에서 내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가볍고 명쾌해진다. 솔직, 담백해진다. 그러면서 '오로지' 한 곳으로만 지향하고 싶은 열망이 솟구친다.
내 주변을, 나를 구성하는 복잡함을 모두 떨어 버리고 빈 몸으로, 알몸으로 단순해지고 가벼워지고 싶다. 그래서 스스로 자유로워지고 자유로움을 살아가고 싶다. 여행의 막바지에서, 특히 철저히 혼자가 되어 여행하는 지금 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너무나 작고 왜소하고 무력하고, 보잘 것 없다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크기가 허무할 정도로 빈약하다는 사실 앞에 당황스럽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워진다.
이런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그 사랑의 주님께 나의 전존재를 의탁하고 싶다.

13세기에 유럽을 휩쓴 사라센 세력들은 일찍 이 유럽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자 남부 프 랑스의 요충지대로 960m 높이의 산 위 절벽 위를 선택하여 성을 쌓았다. 그 성 주변으로 집 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형성된 요새 마을이 구 르동이다.
방스에 있는 마티스의 로사리오 성당에 이어 서 방문한 곳이 바로 구르동 마을이다. 험준한 계곡을 구비구비 돌아 파트리트 쥐스킨트 소설 <향수>의 무대가 된 그라스로 가는 길과의 갈 림길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었다.
소설과 영화에 등장했던 그라스에 대해 잠깐 상념에 젖을 즈 음 깎아지른 듯 높은 바위산이 첩첩이 눈 앞을 가로막는다.
절벽을 이룬 바위산 꼭대기에 자리 잡은 구르동은 멀리에서 보기에도 천혜의 요새처럼 단단해 보인다. 너무 높아 하늘과 맞닿아 있는 동네, ‘구로동’이 아닌 ‘구르동’ 전망대에 서니 사방이 탁 트인다. 루 계곡 전경이 눈앞에 아득히 펼쳐지고, 골짜기에 점점이 박힌 마을들의 고즈넉함이 저 멀리 지중해까지 이어진다. 아스라이 펼쳐지는 하늘 아래 지중해는 사막 위의 신기루같이 신비롭게 일렁인다.
마을 중앙에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을 설계한 노트르가 만든 테라스 정원이 있는 성은 현재 개인 소유인데, 마침 주인이 출타 중이어서 오늘은 성을 관람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별로 아쉽지 않다. 발아래 펼쳐지는 저 광대한 협곡의 파노라마야말로 조물주가 우리에게 내린 아름다운 선물일 터.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이 달콤한 향내로 코를 자극한다.
고개를 내밀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위치에 자리 잡은 예쁜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올리브를 갈아서 만든 된장처럼 보이는 소스를 발라 먹는 바게뜨 빵맛이 환상적이다. 또, 맛있는 하우스 와인이 흰색, 노란색, 분홍색 3가지나 제공되는데 맛의 차이가 미묘하고 오묘하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작고 예쁜 구르동 마을의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향수, 크리스탈, 면 수공예품이 주종을 이루는 가게를 기웃거려 보았지만 시선은 자꾸만 골짜기 쪽으로 향한다. 지중해까지 툭 터진 전망은 보고 또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구르동을 떠나 투레트 쉬르 루 마을 로 이동했다. 투레트 쉬르 루도 요새 개념으로 형성된 오래된 마을이다. 마 을 외곽에 형성된 오래된 저택들이 자 연스럽게 성벽의 역할을 하는 특이한 구조이다. 아직은 웬만한 여행자들에 게도 생소한 마을이라는데, 투레트 쉬 르 루 마을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우 린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인솔자 마 사장이 투레트 쉬르 루에 대해 소개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마을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마을이 지닌 고즈넉함과 평온함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치 중세 이후 세상과 단절된 채로 지금까지 살아온 듯, 골목의 돌길과 집 담벼락마다 세월의 흔적이 속속들이 배어있는 느낌이다. 특별히 여행객을 의식한 가게도 보이지 않고, 골목에는 인적도 거의 없어 사람들이 살기는 사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마을 초입에 세워진 전쟁에서 희생된 이 마을 출신 병사의 추모비라든가, 개성과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집집마다의 문패, 창가를 장식한 화분이나 예술적인 오브제들, 내 건 빨래들이 사람이 사는 마을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문명의 편리함보다 오래되어 손때 묻은 삶의 흔적들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인 것 같다. 자신들의 삶의 자국들도 이곳에 보태며 잠깐 왔다 가는 인생, 그 유한한 삶이 자신으로 끝나버리는 것은 의미가 없고, 세대를 거듭하여 유구하게 이어질 때 역사가 만들어지고 전통의 가치가 빛나면서 비로소 인생이 의미를 발한다는 진리를 직시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들이 거주하는 물리적인 공간은 과거로 둘러싸여 있지만, 미래에 대한 비전, 추구하는 행복관에 맞춰 전통적인 옛 정취와 정신을 즐김과 동시에 끊임없이 새롭게 현재를 창조해 나가고 있는 것이리라. 골목과 외관만을 슬쩍슬쩍 훔쳐보듯이 구경하는 단계를 넘어 저들의 삶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저들의 손길이 스친 곳곳에서 저들이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어느 정도 읽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얘기를 나누고 싶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이고, 마을이니까 불편해도 꾹 참고 그냥 눌러 앉아 살아가고 있는 건 분명 아닐 거란 생각이다.

 

과거를 쉽게 잊어버리고, 불편한 것은 퇴보라는 논리 아래, 옛 것, 전통을 쉽게 외면해 버리려는 오늘날, 투레트 쉬르 루는 나에게 짜릿한 만족감을 넘어 행복을 안겨 주었다. 물질과 자본의 논리에 밀려 관광지로 개발되고, 북적이면서 상흔으로 도배되는 여느 관광지처럼 변해 버릴까 염려된다. 소박하고 한적한 이 분위기 그대로 남아 있어 어느 날 아무 예정 없이 이 마을을 찾은 고단한 나그네에게 영혼의 안식 같은 평온함을 안겨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구비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예쁜 집들의 매력에 흠씬 도취되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작지만 큰 나라 모나코, 그리고 남프랑스를 사랑한 두 거장과의 만남
 

모나코 - 니스(샤갈 미술관-마티스 미술관) - 귀국
 


총 면적 1.8 평방킬로미터로 여의도의 4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나라인 모나코. 지하자원이나 산업시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왕국으로 기록되는 나라. 세기의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 레이니에 공, 알버트 왕자, 캐롤라인 공주, 신문 지면에 커다란 활자로 대두되었던 왕가의 가족들, 카지노 산업, 그리고 F-1 그랑프리 자동차 경기로 웬만한 사람들의 입에 한두 번 오르내렸을 나라. 그 모나코에 드디어 입성했다.

바다 쪽을 향해 가파르게 경사진 언덕을 따라?빽빽이 들어찬 높은 빌 딩들은 마치 장난감 레고 블럭을 첩 첩이 쌓아놓은 형상이다. 좁은 공간 을 이용해 들어서 있는 건물들의 형 태와 도시 구조는 도시 설계자들의 연구 대상이라고 하는데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감탄스러운 미로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겠다.
국제적인 행사의 후유증을 앓는 듯 도시는 나른한 피로감에 젖어 있다. 미처 철거하지 못한 대회 시설물 사이로 어지럽게 흩어진 잔해들이 경기의 치열함, 관객들의 환호, 축제의 분위기로 들떠 있었던 경기 장면들을 말해주는 것 같다. 버스는 꼬불꼬불한 좁은 도로를 곡예 하듯 빠져 나가서 지하 터널을 따라 지그재그 그리기를 한참 하더니 드디어 왕궁 지하 주차장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 그레이스 왕비의 무덤 >모나코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뉜다. 하나는 왕궁이 있는 모나코 빌이고, 또 하나는 카지노가 있는 몬테카를로 지역이다.
최근 축구 선수 박주영이 모나코 프로팀에서 뛰고 있어 그 장소에 왔다는 감회 외에는 솔직히 모나코에 대한 관심은 별반 크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레이스 왕비의 친서민적 자세와 소박한 생활 방식, 자녀 교육에서 보인 어머니로서의 열성(학교의 자모회에 여느 평범한 어머니들과 같은 입장이 되어 주저없이 참석하고, 걱정거리를 함께 나누기도 했단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 배우였던 유명세를 충분히 활용하여 국제적인 행사를 유치하여 경제적인 이익을 취한 업적, 말썽부리는 자녀들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야 했던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 그녀의 비운의 죽음 등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듣다 보니, 방문하는 시청사, 박물관, 국회, 대성당, 왕궁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왕실 무덤이 있는 대성당에서 그레이스 왕비의 무덤을 대했을 때는 모로코 국민들이 갖는 왕비에 대한 존경과 찬사의 마음에 나도 동화되어 꽃 한 송이를 바치는 마음으로 잠깐 묵념했다.

< 폰트 빌 항구에 정박해 있는 요트들 >왕궁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그 밑으로 펼쳐지는 폰트 빌 항구의 멋진 경치를 감상하며 정박해 있는 요트들 중 에 멋들어진 것을 찾아 내 것으로 찜하는 장난도 즐겨 본다. 살인적인 물가에 도 불구하고 왕가를 중심으로 유명한 배 우나 세계적인 갑부들, 저명인사들의 사 교장으로 유명하다는 모나코, 국민들에 게 부과하는 세금도, 징병제도도 없는 부유한 나라, 프랑스가 끊임없이 사욕을 드러내는 곳, 세기의 딜러들이 사업상의 이득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기웃거린다는 이 나라.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표가 부착되어 있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시장 길을 지나면서 부가 이룩하는 향락의 삶이 어떤 즐거움과 의미를 가져다줄까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다.
왕궁에서부터 바닷가에 조성된 공원을 따라 산책을 즐긴 후, 오늘날 모나코에 부와 번성을 가져다 준 그랑 카지노가 있는 몬테카를로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랑 카지노는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를 설계한 샤를 가르니에가 1878년에 설계한 건물인 '호텔 드 파리'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옆으로 수많은 스타들이 들른다는 '카페 드 파리'가 있는데, 그곳에는 멋진 갑부를 헌팅함으로써 인생 한 방을 꿈꾸는 '귀여운 여인들'이 고혹적인 차림과 표정으로 시간을 죽이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 그랑 카지노 건물 앞 풍경 >과연 명소답게 멋지게 차려 입은 잘 생긴 사람들과 그들을 구경하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길거리에는 영화에서나 보았음직한 유명한 외제차들이 줄을 이어 주차되어 있다. 이곳에 있다 보면 세계적으로 모모한 얼굴들을 자주 보게 된다고 하는데,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들이니 그런가 보다, 그렇기도 하겠다 정도의 심드렁한 반응만 하게 된다.
홍수처럼 일렁이는 부와 향락의 장소에서 마땅히 할 일도 없어서 철거하지 않은 경기장의 메인 관람석에 앉아 30여분 동안 그랑 카지노 앞의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번쩍이는 최고급 차들, 화려한 명품으로 멋들어지게 차려 입은 선글라스 맨들, 그들의 사치스러움, 풍요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느리게 부유하는 걸음걸이들. 이처럼 마음을 내려놓고 한가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것도 그런대로 괜찮다.

F-1그랑프리 중에서도 매년 한 번씩 열리는 모나코 대회가 가장 인기 있다고 한다. 몬테카를로 지역을 달리는 경기 코스의 스릴 때문이 우선적인 이유이고, 거기에 덧붙여 출전 선수들의 화려함, 세계 굴지의 자본을 자랑하는 단체의 스폰서들, 스포츠 관람이라는 명목 아래 사업상의 물밑 작업을 노리는 세기의 딜러들, 또 이런 명성을 쫓으려는 많은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이란다. 대회 기간 중에 보이는 도시의 혼잡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하는데, 시즌 중에는 호텔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평소에 300유로 정도의 호텔이 1,000유로를 호가할 정도로 값이 뛰어오르고, 그래도 숙소를 구할 수 없어 인근 프랑스 니스, 칸느까지 그 여파가 밀린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여행은 칸느 영화제, 모나코의 그랑프리 시즌과 모두 겹쳤으니 오죽 하겠는가? 니스에서의 첫날 묵었던 숙소는 2~3배 뛰는 숙박료에 대한 욕심으로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는 바람에 호텔을 잡기가 어려워, 둘째, 셋쨋날은 몇 배로 비싼 숙소, 그것도 평소보다 훨씬 비싸게 숙박료를 지불하면서 호텔을 옮길 수밖에 없었노라는 뒷얘기를 들었다. 덕분에 우리들은 여행자들의 꿈인 니스 해변 프롬나드 데 장글레 중간쯤에 자리 잡은 멋들어진 호텔에서 잠을 자는 행운을 얻기는 했다. WEST-END NICE HOTEL. 비록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방은 아니었지만.
치즈를 듬뿍 얹은 양파스프에 개구리 뒷다리 요리까지 먹었으니 꿈에 개구리 떼들의 공격을 받지나 않을까 살짝 두려워지기도 한다. 그래도 남프랑스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날이니, 개구리들도 이해하고 다정한 친구들로 등장해서 그동안 신나고 멋지고 운치 있고 감동적이었던 내 여행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클라이막스에 해당되는 축제를 열어주지나 않을까 내심 기대도 해 본다.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그런데 밖이 환하게 빛나지 않고 회색빛으로 잔뜩 우울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빛으로 더욱 빛나는 보석 같은 이곳의 알맹이들을 우리에게 모두 보여주려고 햇빛마저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버리고서 기운이 소진하여 자리에서 일어날 최소한의 힘조차 없는 걸까? 문득 코트다쥐르 지역을 사랑하는 지중해의 햇살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어제 미술관이 휴관이었던 것도, 그래서 햇살 가득한 모나코 방문이 가능했던 것도 보다 나은 후식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위한 하늘의 뜻이었던가? 비가 추적거리는 모나코는 절대 만찬용 후식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인가?
오늘은 감미로운 후식을 먹는 날이다. 우리의 후식은 샤갈과 마티스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일이다. 그들의 그림 세계에 빠져 들기에 이보다 더 좋은 날씨가 있겠는가? 긴 시간 동안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끌었던 화려한 여행 만찬에서 누렸던 메인 요리의 다양함과 화려함과 우아함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그 여운을 오래오래 지속시켜?줄 후식의 달콤함, 쌉싸름함, 상큼함. 아픔 같은 아련함,?조용한 아쉬움에 마음이 촉촉이 젖는다.

 샤갈 미술관.

미술관은 정원이 딸린 단층 건물인데, 원래 샤갈은 니스가 아닌 방스(Vence)에 그의 미술관이 지어지길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당국과 합의가 원활하지 않아 무산된 후 이곳에 지어졌다고.
관람하려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입구에는 샤갈 연대표가 벽에 부착되어 있다.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서 세계 2차 대전을 겪을 땐 유대인으로서의 서러움과 전쟁을 목격한 충격 등이 그림에?녹아나기도 하지만 부인 벨라에 대한 사랑을담았을 거라 여겨지는 부부, 행복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우리에겐 더 익숙하다.
프랑스 파리에서부터 전쟁 중에는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이동, 결국에는 미국으로의 망명까지 생활 주거지를 옮기며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던 그는 1948년 이후 다시 프랑스 파리 교외에 들어와 살다가 결국 따뜻하고 화창한 남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냈다.
"고향 없이, 머물 곳 없이, 늘 떠돌아다니는 영혼, 마르크 샤갈. 그는 스스로를 그런 나그네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향수와 그리움이 가득하다."(이주헌, <프랑스 미술관 순례> 중에서)

그의 심약한 성격 때문인지, 유대인으로서 느끼는 서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남들과 다른 그의 그림 세계 때문인지 생전에 부와 명성을 모두 누린 그이지만 사교계의 주류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감 속에서 외로이 지냈다고 한다. 오로지 그는 부인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다고 한다.
큰 꽃다발과 우울한 어릿광대, 날아다니는 연인들, 환상적인 동물들, 성서의 예언자들, 지붕 위의 바이올린 연주자 등의 이미지들을 묘사한 민속적인 작품들로 말미암아 샤갈은 20세기 파리파의 중요한 전위 미술가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이 환상적인 주제를 화려한 색과 특유의 능란한 붓질로 묘사했는데, 그의 양식은 표현주의나 입체파, 추상미술과 같은 1914년 이전의 운동들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변함없이 개인적인 성향을 띠었다. Daum 백과사전에서는 '비평가들은 때때로 그의 작품 대부분에는 가벼운 감상이 깃들어 있고 작품의 질이 고르지 않으며 모티프가 지나치게 되풀이된다고 비판하지만, 그의 걸작들은 현대의 작품들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각적 은유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하는 데에는 누구나가 공감하는 평가'
라고 마티스를 소개하고 있다.

오래 살고, 다작했던 샤갈의 그림은 세계 곳곳의 미술관에서 많이 접할 수 있지만 그의 인생 말년에 이곳 생폴에서 지내면서 그가 남긴 그의 <성서 이야기>는 그의 삶을 집대성하고 그가 살아온 흔적으로 후대에 길이 남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 <성서 이야기> 연작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어 니스의 샤갈미술관은 '성서 메시지 미술관'으로 유명세를 누린다고 볼 수 있겠다. 그의 <성서 이야기>들은 그가 즐겨 사용했던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의 조화를 통해 성서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신의 뜻, 하느님의 사랑, 구원의 메시지를 담으려 노력한 결과물로서의 대작이다.

< 에덴의 낙원 >< 뱀의 유혹 >

천지 만물 속에 하느님은 당신 모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그가 즐겨 사용하는 푸른 세계 속에 생명을 심었다. 한편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의 지상 낙원에는 푸른 색의 <샤갈의 마을>에 등장하는 온갖 피조물들이 푸르름을 만끽하면서 조화롭게 노닐고 있으며, 모세가 타오르는 떨기나무 숲에서 주님과 마주하는 장면 역시 온통 푸른색이다.
 
<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천사 ><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 >

 

< 아브라함의 순종 >아브라함이 100세가 넘어 얻은 외아 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는 장면의 그림. 여호와는 어느 날 갑자기 소중한 그의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였고, 아브라함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명령에 따르려고 한다. 이 때 천사가 나타나 당장 멈추라고 하며 그의 순종을 축복한다. 이것은 신약의 예수께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을 당하는 사건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 십자가를 진 예수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그것을 나타내려 했고, 푸른색의 천상과 노란색의 지상을 연결하는 붉은색의 제물. 희생을 통해 구원으로 나아가는 통로를 보이고 있으며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의 생생한 표정이 아주 인상적이다.
< 야곱의 사다리 >야곱의 사다리, 오름과 내림의 통로, 천상으로 나아가는 길과 지상으로 임하는 생명의 길에 서 있는 붉은 사람은 결국 피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반면에 그의 그림에는 흔하지 않은 채도가 높은 갈색의 소돔과 고모라의 죄인들 도시 앞에서는 마음이 암울해지기도 했다.
샤갈의 마을은 역시 평화와 자유가 넘쳐나고, 그의 사랑의 찬가는 붉은색의 환희로 인해 발은 땅에 서 있으나 천상으로 날아오르듯 붕 떠서 하늘까지 부풀어 오른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아예 충만한 사랑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연인/부부를 하늘에 붕붕 날아다니게 한 그림은 행복이라는 미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그래서 '사랑의 방'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전시실은 온통 붉은색의 사랑이 넘쳐나고 있다.


1958년 이후 스테인드 글라스 작업에 몰두했다는 샤갈의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 앞에서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내가 그토록 흠모하는 색, 그 색깔을 너무나 훌륭하게 나타내는 샤갈이기에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푸른색. 그 푸른색의 정수를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마주치게 되다니! 온통 푸른빛으로 꽃을 놓은 푸른색의 신비에 넋을 빼앗길 지경이다. 이 푸른색은 그의 색인 동시에 오늘부터는 나의 색이다. 욕심을 버리리라고 외쳐왔지만 이 정도의 욕심은 신도 용서하시리라.

< 스테인드 글라스 >< 스테인드 글라스 방의 창문 >


스테인드 글라스 방에는 어둠 속 무대 위에 그림이 그려진 피아노가 놓여 있고, 그곳으로 들어오는 빛도 온통 푸른빛 세상이어서 내 행복감은 절정에 이르른다.

"입체파 화가들에게 그림은 어떤 질서를 갖춘 형태들로 뒤덮인 표면이었다. 나에게 그림은 논리와 설명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어떤 질서를 갖춘 것들(물체, 동물, 인간)의 묘사로 뒤덮인 표면이다. 구도의 시각적 효과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 나는 '환상'과 '상징'이라는 말들을 싫어한다. 우리의 모든 정신 세계는 곧 현실이다. 그것은 아마 겉으로 보이는 세계보다 훨씬 더 진실할 것이다."(1947년 시카고대학교 출판부 발행 <마음을 그린 작품 The Works of the Mind> - Daum 백과사전 )

그의 진실이 담긴 현실 세계, 그 세계에 가득 넘치는 색깔들, 그 색깔들에서 묻어나는 따스함, 평화로움, 자유, 그리움, 그리고 행복. 이곳에서의 시간들이야말로 내 생애 최고의 후식이었다.
 
< 마티스 미술관 출구 앞 >미술관에서 만난 마티스. 그의 담백한 드로잉, 절제된 듯 동적인 동작을 강렬하지만 단순한 동작으로 표현한 춤, 그 정도 이외에는 그의 그림 세계를 잘 몰랐었는데, 방스의 로사리오 성당을 방문하고서부터 그를 좋아하기로 했다. 마티스미술관에서는 로사리오 성당 건물에 담고자 했던 그의 혼신어린 노력을 엿볼 수 있는 관련 습작들을 만났다. 성모자의 모습, 도미니코 성인의 모습, 14처에 표현하고자 한 예수 고난의 과정, 그리고 스테인드 글라스, 십자가, 촛대, ...... 동그라미 하나까지 세세하게, 반복적으로 드로잉하고, 잘라 붙이고, 모형에 빛을 쏘아 그 투과되는 색깔과 방향을 탐구하면서 가장 진실되고 성스러운 형태와 빛깔로 주님을 찬미하려고 한 그의 고뇌를 그대로 대할 수 있었다. 성당을 방문하기 전이었다면 소박한 규모와 많지 않은 빈약한 작품들을 큰 생각 없이 대충 관람했겠지만 오늘 여기서는 작은 크기의 드로잉 하나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성당 관련 전시물 외에는 브론즈 조각들과 색종이 그림이 비교적 많이 있었는데, 그의 그림 세계를 잘 모르는 터라 자세히 보려고 해도 가슴에 잘 와 닿지 않는다. 다만 같은 얼굴도 조금씩의 차이로 되풀이되는 모습이 많은 걸 보고서, 반복 작업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미의 세계, 절대 세계, 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그의 예술적인 정열, 혼, 그런 것들로 앙리 마티스를 이해하려고 애써 본다.

연결 통로를 지나 옆 건물에는 내가 감명 깊게 본 영화 <대부2>, <디어 헌터>, <택시 드라이버>, <미션>에서 인상 깊은 명배우로 각인된 영화배우 로버트 드니로의 아버지인 로버트 드니로 Sr.(아버지와 아들의 같은 이름을 구별하기 위해 아버지 드니로의 이름에는 Sr.를 붙임)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그 전시에는 비교적 관람객이 많았는데, 추상 화가이자 조각가인 그는 마티스의 그림 세계에 매료되어 그를 사숙하였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티스의 화풍을 가장 잘 이은 제자라고 평가받는 화가라고 한다.
마티스를 만나고 난 후 밖으로 나오니 공중에 떠 있는 빗방울 사이로 햇살이 빛난다. 다시 남프랑스의 밝음이 살아나면서 우리 여행의 마무리를 산뜻하게 해 준다. 올리브나무가 숲을 이룬 박물관 정원을 천천히 걸어 나오다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을 때, 처음부터 거기서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듯 붉은 장미색 건물이 방긋 미소를 지으며 작별의 손을 흔든다.

아름다운 니스, 코트다쥐르, 지중해, 프로방스, 남프랑스여, 안녕, 안녕.
마지막 순간까지 니스는 친절한 서비스를 잊지 않고 점심으로 가리비 리조또를 대접해 준다.
'이별의 말 대신 키스로'
공항 입구에 걸린 현수막의 멘트처럼 마음의 키스를 힘껏 날리면서 우리는 푸른 상공을 향해 힘차게 비상했다.

파울로 코엘료는 <순례자>에서,

"떠나라! 그리고 고향의 아가씨들이 가장 예쁘며 고향 산천의 풍치가 가장 아름다우며 그대의 집 안방이 가장 따뜻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돌아오라!"
고 했지만 이번 여행은 고난과 시련의 순례길이 아니었으므로?난 아직 위와 같은?상태가?아니다.
아직은 길 위의 풍치가 너무 아름답고, 만나는 사람들의 미소가 더할 수 없이 친절하고 아름다우며, 풍요로운 여행을 했기에 더 긴 길 위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오히려 두려울 정도로 꿈결같이 충만한 여행길이었다.

다만 신경림 시인이 말했듯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과 같은 시 구절처럼 여행길 내내 내가 거쳐 가는 길들은 나 자신을 철저하게 안으로 끌어 들였기에 이젠 나의 보금자리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남프랑스에서의 꿈결 같은 향연은 이제 끝났다. 꿈결 같던 축제에서 이젠 깨어나야지.
여행길이 나를 불러내어 세상 사는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길들은 또한 나를 안으로 끌고 들어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힘을 주었다. 그러니 건강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일상의 나날들을 축제인 듯 지내자.

여행길 내내 함께 한 초록의 향연, 부담스럽지 않은 햇살과 따스한 밝음, 그리고 바람, 바다. 이들에게 찬미를 드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언제나 함께 해 주신 주님께 감사한다. 더불어 신경림의 시를 새로운 마음으로 읽게 해 주심에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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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 물에 우정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신경림 - 길 ('쓰러진 자의 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