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세이 여행이야기

김신영-코카서스3국

  • 작성자 :

    테마세이투어

  • 작성일 :

    2011.06.15

  • 조회수 :

    5549

김신영-코카서스3국
 
이 글은 서울에 사시는 김신영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김신영님은 2010년10월6일부터 10월17일까지 12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코카서스3국 여행을 다녀 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10월6일(수) 1일차 : 코카서스3국으로 향하다

 
 터키, 이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면서 카스피해와 흑해를 접하고 있는 곳, 큰 코카서스 산맥과 작은 코카서스 산맥 사이에 있는 코카서스 3국, 아제르바이젠, 조지아(그루지아는 러시아식 이름, 영국식 이름은 조지아), 아르메니아가 이번 여행지이다.
 일반 관광 여행지로는 국내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여행지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어 선뜻 나서기가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코카사스라는 이름이 막연하게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인천공항 12:50 출발하여 모스크바로 향한다. 아제르바이젠의 바쿠로 가기 위해 서는 모스크바 공항에서 환승을 하여야 한다.
  러시아 항공은 2007년 시아 여행시 이용하였는데 그 당시 탑승한 비행기의 천장이 높아 마치 화물기를 타고 가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는 비행기가 비교적 작다. 승무원의 무표정한 얼굴로 기내 서 비스를 마지못해 하는듯한 모습은 그때와 변함이 없다. 구 소련의 체제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국영기업의 한계를 보는 것 같다. 황석영의 ‘강남몽’이라는 책을 읽으며 8시간 40분을 날아서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하였다.
 터미널을 이동하여 아제르바이젠의 바쿠 행으로 환승하여 3시간을 더 가야한다. 바쿠에 도착하니 23시 30분 (한국시간 10.07. 03:30)이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라 도심은 한가하여 도로에는 자동차가 거의 없어 소통이 잘 된다. 평소에는 이곳에도 교통체증이 심하다고 한다.
 도로변의 건물은 4-5층 규모로 아담하 고 유럽풍이며, 은은한 야간 조명에 거리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전기 사정이 나빠 제한 송전까지 한다고 하는데 과소비를 하는 것은 아닌지 괜한 노파심이 든다. 공항에서 40분 후 호텔에 도착했다. 카스피해가 바로 앞에 보인다.  

 
 

10월7일(목) 2일차 : 바람의도시 바쿠

 
 바쿠는 아제르바이젠의 수도로 코카서스 3국에서 가장 큰 도시 이며 인구는 170 만이다.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나와 무척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곳으로, 실크로드 무역의 거점 도시였으며 아제르바이젠은 이슬람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이슬 람 국가이다. 바쿠는 페르시아 어로 ‘바람의 마을’이라는 뜻인데 카스피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강한 곳이다.
 아제르바이젠 지역에는 약 40만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BC 4세기경 아라따(Aratta), 구티인(Gutians), 룰루바이트 (Lullu bite)같은 부족 연합체가 등장하였으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점령 된 이래 1세기부터 로마와 페르시아, 아랍, 셀주크 투르크에 정복되어 이슬람화 하였고, 13C 몽골침입으로 전국토가 유린당했다.   
 16C 이란의 지배, 19C에는 러 시아에게 대부분의 지역을 빼앗겼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틈타 1918년 러시 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1920년 적색 러시아군의 침공을 받고 소비에트 연방의 위성국으로 전락하였다. 구 소련이 무너지면서 1991년 8월 아제르바이젠 공화국으로 독립함으로써 비로소 독립국가 연합에 편입된 파란만장한 지배의 아 픔을 갖고 있는 땅이다.
 러시아로부터의 독립 투쟁 시 많은 국민이 희생이 되어 러시아에 대해 피맺힌 원한을 잊지 않고 있다. 밤새 구름이 잔뜩 끼어 있더니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코카서스 3국의 일정 시작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호텔을 나선다. 간간히 오던 비가 제법 많이 내린다. 바쿠에서 제일 높은 언덕인 ‘블바르 파르크’로 갔다. 추모공원인 그곳은 바쿠 시 내를 전망할 수 있는 언덕에 있는 곳으로 시내와 카스피해가 한 눈에 내려다 보 인다. 19세기 초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젠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였다. 1917년 10월 러시아에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난 틈을 타 1918년 5월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1920년 4월 적색 러시아군의 침공을 받았다. 러시아 침공 시 저항하다 희생당한 희생자를 위한 무덤과 추모탑이 이곳 ‘블바르 파르크’에 있다.
 추모공원에 잠든 넋들의 눈물인 양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리며 잠들어 있는 넋 들의 슬픔을 위로하듯, 까만 비석과 묘지 석판을 깨끗이 씻어 주고 있다. 입구부터 잘 정비된 공원에는 추모탑과 비석이 있고, 추모탑에 있는 꺼지지 않는 불이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있다. 공원에서는 아제르바이젠의 대형 국기와 송신탑이 보이고, 카스피해의 전경과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시내 중심가는 초 현대식 고층 건물을 짓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시내 중심가를 지나 구시가로 갔다. 19세기에 조성된 시가지 중심가는 유럽풍의 건물이 파스텔 톤의 색깔로 밝은 느낌을 준다. 석유가 발견되고 오일 갑부들이 투자한 건물들이 고딕, 로코코 등 다양한 양식으로 들어서 있다. ‘이카리 샤하르(Icheri Sheheri)’라고 불리는 구시가지는 흔적만 남아있는 성벽을 통과하여 들어갔다.
  구시가지는 규모는 크지 않아 보인다. 비도 서서히 그치고 해가 비추기 시작한다. 이카리 샤하르(Icheri Sheheri)로 들어서니 넓은 광장이 나오고 주위에 외국 대사관이 보인다. 이곳에 있는 슈르반샤 궁전(Shirvan Shah palace)은 12세기 슈르반샤 왕조의 수도였던 쉐마카(Shemakha)가 지진으로 황폐화 되자 바쿠로 도읍을 옮기면서 이곳에 궁정을 지었는데 15세기 경이다. 궁전 내에는 왕릉, 목욕탕, 왕의 집무실, 사원, 저수조 등이 있던 것으로 짐작되며 아치와 돔을 적절히 배치하여 만들어 이슬람 건축기법의 높은 수준을 짐작케 한다. 역사-건축 특별 보호구역으로 각종 자기, 수공예품, 양탄자, 그림, 인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왕궁은 2층 구조로 1층 은 왕의 가족을 위한 공간으로 동양 왕궁의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고, 지상층 은 왕궁의 식솔들이 사용하였다. 왕의 가족들이 사용한 목욕장은 벽과, 일부는 돔 지붕이 남아 있고, 물을 공급하던 토관 파이프가 벽에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왕궁은 1964년대에 새롭게 복원되었다는데 옛 정취는 없다.
 궁전을 나와 구시가지의 골목길로 들어가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본다. 이곳의 건물은 페르시아식 발코니가 특색 있다. 목재로 만들어진 2층의 발코니는 건물에 정취를 더해 주고 있고, 발코니에서 밖을 내다보던 한 할머니가 우리 일행을 향하 여 정겹게 손을 흔든다. 골목길을 나오니 길거리에서 화덕에 빵을 굽고 있고, 누렇게 익어가는 구수한 빵의 냄새에 코가 벌름거린다.
 즉석에서 구워진 구수한 빵을 맛보며 내려가니 성채에 아치형 문이 2개인 곳이 나오고 큰 광장이 보인다. 실크로드 교역시 자유무역지구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골동품상들이 즐비하다. 갑부가 지었 다는 한 건물에 조각되어 있는 고양이 3마리가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구시가에는 실크로드 교역의 대상들 숙소로 사용되었던 카라반사라이가 2곳이 남아 있는데, 인도인과 아제르바이젠 상인협회가 만든 숙소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카라반사라이를 나오니 대부분이 무너지고 벽과 기초가 남아 있는 모스크, Hamam이 보이고, 구시가에서 제일 유명한 ‘메이든 타워(Maiden's Tower)’가 나온다.
  메이든 타워는 이카리 샤하르 지역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타워이며 ‘처녀의 망루’라고 불린다. 12세기에 건축되었고, 28m(8층 규모)의 높이에 성벽은 5m에 이른다. 대부호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지은 곳이라는데, 1층에서 사다리를 치우면 누구도 올라갈 수 없는 곳이라 한다. 타워 꼭대기에 올라가면 바쿠 시내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보이는 곳이라는데 내부 수리로 아쉽게도 외부에서만 관람을 하였다. 메이든 타워 주위에는 기념품 가게들이 많이 있다. 메이든 타워 거리를 걷다 개인이 기부하였다는 모스크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화려한 문양과 갖가지 색상으로 장식되어 있고 바닥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고, 한 사람씩 앉을 수 있도록 양탄 자에는 문양으로 구획되어 있었고 앉아 있는 방향이 메카를 향하고 있었다.
 메이든 타워 옆에는 1900년 초 오일 갑부가 지었다는 흰색의 5층 건물이 있다. 메이든 타워에서 큰길을 건너면 공원이 나오고 카스피 해변이 나온다. 해변을 따라 넓직한 공원이 잘 정비되어 있다. 오후에는 배화교의 신전을 방문하였다.
 코카서스 지방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조로아스터교(배화교)가 크게 성행했었다. 그 흔적이 바쿠 외곽에 있는 ‘아타샤하 신전(atashgah temple)’이다. 아직도 땅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을 성스럽게 모 시고 있는 곳이다. 입구는 고대 산크리스트어와 힌두어로 새겨진 비문이 있고 신전의 상징인 양파 모양의 돔 지붕이 눈에 뜨인다. 신전은 성채로 둘러싸여 있고 성채에는 순례자를 수용하기 위한 숙소가 있다. 마당 한가운데 장방형의 신전에는 불을 모셔놓은 성소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다. 성채를 둘러싼 전시실에는 조로아 스터교와 관련된 자료와 모형들을 전시하여 실크로드시대 모습을 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었다. 신전 밖으로는 유전탑이 곳곳에 보인다.
 신전 앞 건물 벽면에는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는 대상들과 땅에서 불이 타오르는 형상이 그려져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실크로드의 대상들이 다가오는 느낌을 주었다. 이곳에서 북동쪽 20km에 있는 슈라카니 마을은 종교 건축물들이 모여 있는 더 큰 단지가 있다고 한다. 고대 페르시아 철학자이자 예언자로 불리는 조로아스터(Zoroaster)에 의해 창시된 조로아스터교는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며,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배화교라고도 불려 불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불이 타오르는 제단 앞에서 치르는 제례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원론적 일신교로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 아래, 우주를 선(善)과 악(惡)의 원리로 설명하며, 세상은 선과 악이 싸우는 투쟁의 현장으로 인간을 이성과 자유의지로 한쪽을 선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조로아스터교는 기독교와 불교, 힌두교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카스피해를 따라 이번에는 ‘고부스탄(Gobustan’)으로 간다.
 바쿠 남쪽 65km 지 점에 있는 고부스탄은 2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새겨 놓은 암각화로 유명하다. 12,000여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4,000여 개의 비문들이 있으며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로 새겨 놓은 암각이 많으며 당시대 사람들이 누구 였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고부스탄의 박물관은 소박한 건물에 아제르바이젠의 역사와 고고학 유품, 석기 시대 암편 조각,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는데 내용이 빈약하다. 산책로를 따라가니 암각화가 보인다.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과 배, 동물 등의 그 림이 바위에 조각되어 있는데 강도가 약해 바위에 조각하기 쉬운 사암으로, 사암 속은 비어 있는 구멍이 많아 바위를 두들기면 소리가 울린다. 풍화된 바위에는 바 위속 구멍이 드러나 있어 암각화가 많이 그릴 수 있었던 이유를 유추해 볼 수가 있었다. 조각난 바위 덩어리가 을씨년스러운 풍경이고, 이곳에서 바라본 카스피해의 풍경은 일품이었다. 카스피해를 바라보면서 바쿠로 돌아왔다. 해변 곳곳에 유정탑이 보이고 원유 채 굴기가 쉴 사이 없이 움직이며 석유를 뽑아낸다. 바쿠 시내에 가까워질수록 유정 탑이 더 많이 보인다. 바쿠는 원유를 깔고 앉아 있는 도시 같다. 자원면에서 부럽기도 했다. 저녁식사는 이슬람 전통식으로 그득한 상이 푸짐하다. 야채, 전병, 전골, 양고기 구이, 차 등으로 한상 푸짐하게 차려져 있다.
 

10월8일(금) 3일차 : 옛 영광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바쿠 - 마라자 - 쉐마카 - 쉐키가 오늘의 일정이다. 쉐키까지는 385km. 바쿠 외곽으로 나가기 위해 중심가를 통과한다. 출근 시간대 러시아워는 여기도 마찬가지로 시내로 들어오는 차들로 2차선 도로가 계속 막히고 지체된다. 시내를 빠져나와 북쪽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시 외곽으로 나오니 시내 고층빌딩, 유럽풍 의 건물과는 거리가 먼 서민들의 삶이 배어있는 풍광으로 서서히 바뀐다. 대중교통으로 노선별로 다니는 봉고형 차가 대부분이다. 마을 정류소마다 만원인 버스를 타기위해 사람들이 몰려 있다. 출근을 하느라 분주하고 시내로 향하는 차량 행렬은 끊임이 없다. 시 외곽의 서민들 집은 궁핍해 보인다. 사암벽돌에 슬레이트 양 철 지붕을 얹은 집, 3-4층짜리 누런 회색 일색의 낡은 아파트 등에서 서민들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1인당 GNP가 3600$(2007년)로 석유 생산량은 많지만 부의 대부분은 일부 부유층으로 돌아가고 서민들의 삶은 나아지고 있지 않다.
  마라자로 가는 길에는 차량이 거의 없어 차가 속력을 내며 시원스럽게 달린다. 외곽길을 1시간쯤 달려 도로 옆에 차를 세우고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갔다. 초원으로 뒤덮인 언덕위로 올라가니 얕은 진흙 봉오리가 여러 개 보이는데 머드 볼카노(진흙 화산)이다. 유전지대는 지표층-머드층-가스층-원유층-물로 지층이 이루어져 있는데, 가스가 지표면이 약한 부분 으로 분출되면서 머드를 밀어내며 머드 볼카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보골보골 가스가 올라오며 밀어낸 머드가 봉오리에서 흘러 내 리며 화산이 분출하는 형상을 보여준다. 겨울 로 접어드는 언덕의 초원은 초록에서 누런색으로 변하고 있고 사방이 누런 초원이라 황량한 풍광이었다. 다시 북쪽으로 길을 나서 작은 마을인 ‘마라자’에 도착하였다.
  마라자 마을 외곽에는 바위산 밑에 이란의 위대한 이슬람의 신비주의 교단인 수피파의 성자인 ‘디 리 바바’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절벽에 구멍을 뚫어 만든 모스크 형식으로 그 앞 에 건물을 지어 묘지를 만든 곳으로 주변 절벽과의 조화, 거칠고 우유 빛이 나는 무덤의 돌과 간결한 건축이 어우러져 주변 환경과 조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14세기 ‘디리 바바’가 행한 기행과 언행들은 아직까지 전설로 남아있어 ‘살 아있는 할아버지’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으며 수많은 순례객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마라자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쉐마카’로 이동한다.
 쉐마카는 중세시대 슈르반 왕조의 수도였던 곳으로 12세기 이 지역의 엄청난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어 바쿠로 수도를 이전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인 도시로 옛 왕조의 영광을 추측할 만한 유적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예띠 굼바즈’에 슈르반 왕들의 7기의 돔형 무덤과 지진으로 쓰러지고 방치된 묘비석은 세월의 무상함을 전해주고 있다. 지진으로 파괴된 돔형 무덤은 관리가 안되어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기울어지고, 넘어진 묘비석은 옛 왕조의 영광을 묻어버리고 있었다. 허물어진 무덤에서 가장자리에 앉아 건너편 마을을 바라보았다.
  쉐마카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은 지진으로 파괴 되었다는 것을 빼고는 풍요로워 보이는 마을이었다. 소에 여물을 먹이러 나온 촌부의 한가로운 모습에서는 옛 왕조의 권력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예띠 굼바즈를 나와 휴게소에 들러 차, 커피,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어간다.
 마라자부터 서서히 풍광이 초록빛의 초원이 많이 보이고, 언덕에도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이곳부터 쉐키까지는 풍광이 좋았다. 산에 나무도 많이 자라고 있고, 고도가 높아지니 나뭇잎은 단풍이 들었다. 도로변에는 양고기와 사과 등을 팔고 있는 노점 상이 간간히 보인다. 기후가 좋고 물이 풍부해 숲이 울창하며 농작물 경작이 잘되 는 지역으로 보인다. 도로의 고도를 높이며 산길로 올라간다. 마치 강원도 산길을 가는 기분이다. 도로변에는 가로수가 울창하고 곳곳에 리조트 겸 식당들이 곳곳에 있다. 지대가 높은 곳이라 여름에 현지인들이 휴가로 많이 찾는 곳인 것 같다. 안개가 많이 끼여 속도를 내지 못하고, 앞차의 후면 불빛만 보며 달린다. 가로수 가 울창한 도로는 잔뜩 낀 안개로 어둑어둑하여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내려서 안개 속 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쉐키까지는 갈 길이 먼데 속력은 낼 수 없고 쉐키에 도착하여 갖기로 계획된 점심 시간이 지체되어 중간에 적당한 식당 앞에 차를 세워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였다. 식당 밖 화덕에서 빵을 굽고 있던 아주머니가 30여명이나 되는 동양인이 갑자기 들이닥치니 놀라고 부끄럽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며 연신 화덕에 빵을 떨 어뜨리는 실수를 한다. 화덕 옆으로 모여들어 빵 굽는 것을 보며 아주머니와 같이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주방에서는 젊은 청년 두 명이 갑자기 들이 닥친 동양인 손님들 음식 준비에 정신이 없다. 준비할 수 있는 음식이 없어 갖 구 운 따뜻하고 구수한 빵과, 치즈, 도로변 노점상에서 급히 사온 과일, 야채, 오이지 , 맥주 등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여행은 예정에 없던 변수가 많아야 재미도 있고 추억이 오래 남는다. 작고 예쁘장한 아주머니는 전생에 인연이 있어 생판 모르는 한국인과 이렇게 만날 운명이었나보다. ‘쉐키(Sheki)’에는 4시경 도착하였다.
 쉐키는 실크로드의 주요한 교차로였던 곳이었고, 실크로드 교역을 하던 대상들의 숙소였던 곳이 카라반사라이(Caravan sarai)이다. 지역영주들은 낙타가 하루 걸을 수 있는 거리인 20-30km마다 대상 을 상대로 한 숙소를 만들어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며 대상들을 자신의 지역으로 통과하도록 하였는데, 그들로부터 얻는 경제적 이익이 엄청나 서로 앞을 다퉈 카라반사라이를 지어 대상들을 유치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호텔로 개조하여 쉐키를 찾는 여행자들의 숙소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 짐을 내리고 쉐키 칸의 궁전으로 올라 갔다. 몽고 침략과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kan국이 있던 쉐키 왕국. 이곳에서 꼭 보 아야 할 곳이 쉐키 칸의 여름궁전이다. 세계문화유산 쉐키 칸 궁전이라는 안내 간 판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고, 왕국으로 들어가는 성채의 문을 지나니, 넓은 길이 나오고 우측으로 벽돌 2층 건물과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알바니아 성당이 보인다. 성당을 끼고 좌측으로 돌아서면 쉐키 칸의 궁전이 나타난다. 궁전은 큰 나무와 넓은 정원에 전면이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되어져 있다. 양쪽 대칭으로 지어져 있고, 섬세한 스테인드글라스와 벽의 문양, 궁전 입구 문에 거울 조각으로 만든 돔 천장은 섬세하고 화려함에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궁전의 내부와 정원 어디에 서나 코카사스 산맥과 숲에 둘러싸인 마을이 보이게 설계되어 전망을 중시하여 궁전을 지었고, 겨울에는 난방 문제로 주로 여름에만 사용했던 궁전으로 알려져 있다. 쉐키 왕조는 짧은 역사를 갖고 있어, 독립왕국을 이루고 있던 시절에 건설 된 궁전은 정교한 축성술이 볼만 하며 특히 스테인드글라스가 화려한 곳이다. 스테인드글라스는 5,500여 개의 나무 조각으로 정교하게 이어붙인 갖가지 문양의 나무틀에 화려한 색깔의 유리를 끼워 넣어 만들었다고 하는데, 궁전 안으로 비쳐 진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며 화려하고 환상적인 빛을 내뿜을 때의 정경은 가히 일품이라 하겠다. 1층은 접견실로 사용되었다. 빨강, 파랑, 노랑, 청록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비스 듬히 통과한 저녁햇빛은 화려한 문양과 어울어져 환상적인 빛의 조화를 연출하고 있어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접견실의 벽과 천장은 화려한 색깔로 그려진 꽃과 나무, 하얀 색의 나무틀의 거울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2층은 왕비가 거주하던 곳으로, 벽과 천장의 여러 장식과 동, 식물 벽화가 더 화 려하다. 조용하고 한적한 쉐키에 이런 훌륭한 문화유산이 있어 많은 관광객을 찾게 하고 있었다. 궁전 아래 박물관으로 개조한 알바니아 성당은 생활자기, 악기, 보료, 양탄자 등 생활용품을 전시하고 있었고, 건너편 생활사 박물관에는 이 지방의 동물 박제, 식 물류, 생활용품, 무기류, 마차, 악기(두둑), 특산품(실크류)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을 나오니 해가 기울기 시작하여 어둠이 내린다. 저녁식사는 이슬람식으로 푸짐한 양과 많은 음식 종류가 먹기도 전에 질리게 한다. 숙소로 돌아가는 중간에 버스를 내려 산책 겸해서 쉐키의 밤거리를 음미하며 걸었다. 디저트가게, 잡화상 , 명품상점, 은은한 조명이 비춰지는 건물과 발코니는 쉐키를 고고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은은한 조명이 비추고 있는 카라반사라이는 낮에 보던 것과는 다른 풍광으로 운치가 있다. 정문의 문 높이는 키가 큰 낙타가 드나들 수 있게 입구가 높고 아치 형으로 큰 나무문에 사람이 들나들 수 있는 작은 쪽문이 있다. 정문을 들어가면 돔형 지붕의 광장이 나오고 발코니가 돔 지붕 안쪽으로 둘러싸고 있고, 아치형의 작은 통로를 지나면 중정이 나온다. 2층 구조로 아치형 통로에는 칸칸이 숙소로 되어있다.
 벽돌로 둘러싸인 아치형의 복도에 비치는 햇빛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보 고 있으면 영화 ‘위대한 침묵'과 같은 고요한 수도원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ㅁ자형 건물의 중정에는 작은 연못과 정원이 있다. 장거리 여행에서 지친 대상들 이 찾아들었던 카라반사라이. 그들에게는 오아시스로, 고단한 여행의 피로를 풀고 편히 쉬며 각 지역에서 온 대상들과 정보 교환과 교역을 하던 장소였던 곳이다. 지금 이곳의 시설은 소박하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아치형 방문을 들어서면 소박한 소파와 탁자, 작은 옷장, 간단한 샤워실, 침실에는 전등이 하나 뿐이어서 어두운 조명은 운치가 있어 좋고, 난방이 안돼 추위는 체온으로 녹여야 한다. 바닥은 나무로 되어있어 층간 방음이 전혀 안되어 1층에서 2층의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 이런 불편함에도 카라반사라이가 가지고 있는 소박하고 독특한 정취는 먼 과거로 돌아가 대상들이 고단한 여행의 피로를 풀었던 이곳의 향기를 느껴보는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10월9일(토) 4일차 : 와인의 발생지 그루지아

 
  아침 7시.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둡다. 아침산책을 위해 숙소 앞의 언덕에 있는 마을로 올라간다. 어둠에 싸여 마을이 어렴풋이 보이고, 굵은 자갈로 포장을 해 놓은 언덕길을 올라 거닐다 보니, 건너편으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마을인 쉐키가 여명 속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햇살이 비추니 평화로운 시골의 정경이 드러난다. 골목길로 들어가니, 일터로 나가는 마을 사람들이 간간히 보이고, 인사를 하니 환한 미소로 답을 한다. 새와 닭소리가 분주히 아침을 알린다. 오늘은 아제르바이젠에서 일정을 마치고 그루지아로 넘어 간다. 국경으로 가기전에 쉐키 바자르에 들렀다. 재래시장이 주는 서민들의 활기찬 삶의 모습은 시장 구경을 하는 독특한 재미이다.  시장규모가 제법 크다. 버스정류소에서 차를 기다리는 주민들, 달콤한 디저트 가게는 벌들이 날아들어 시식을 하고 있고, 갖 구운 빵을 비닐봉지에 담고 있는 아저씨, 붉은 무, 고수, 가지, 파프리카, 파 등 각종 채소류, 갓 따온 포도, 석류가 그득하고, 샤프란, 후추 등 갖가지 향신료, 적나라 한 정육점 거리, 복권을 파는 할아버지, 각종 생필품, 견과류, 의류 등 상점마다 상품이 그득하고 소리 높여 손님을 부르는 소리로 북새통을 이루는 시장에는 활기가 가득차다. 가슴에 훈장이 달린 양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생닭을 사들고 가고 , 생선가게에서는 갓 잡아온 생선을 고르고 있다. 양머리들이 넘쳐나는 푸줏간  사람들은 지나가는 우리를 향해 힘찬 외침과 웃음으로 익살스런 자세를 취한다. 시장 사람들 얼굴에서는 건강한 웃음이 넘쳐나고 사는데 신나서 어쩌지 못하겠다는 긍정의 힘이 느껴진다.
 쉐키 인근을 연결하는 버스들로 이 재래시장은 더욱 북적대고 활기가 넘치는 것 같다. 실크로드의 교차지이며 중심 교역지였던 이곳 이 현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바자르를 나와 국경으로 향했다.
 나뭇잎이 무지하게 큰 단풍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국경으로 간다. 쉐키에서 2.5시간 거리에 그루지아와의 국경이 있다. 울창하게 자란 호두나무가 도로 양 옆으로 숲을 이루고 있다. 중간에 차를 세워 숲길을 걸으며 아제르바이젠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아쉬워하였다. 아제르바이젠은 카스피해에 매장된 막대한 석유와 천연가스로 경제성장이 크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소수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고 서민들에게는 실질적인 혜택이 없이 높은 물가와 부족한 일자리로 서민들의 생활은 팍팍한 나라이다. 지정학적으로 북쪽은 러시아연방, 서북쪽에 그루지아, 서남쪽에 아르메니아, 남쪽은 이란 에 둘러싸여 있고, 아르메니아와는 영토문제로 극심한 적대 관계가 있어 아제르바 이젠에서 아르메니아로 직접 출입국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적대관계에 놓여 있다.
 러시아가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영토를 묘하게 분할함으로써 생긴 여러 문제로 복합적인 아픔의 역사를 가진 아제르바이젠을 뒤로 하고 국경을 넘어 그루지아로 갔다. 아제르바에젠 국경사무소는 지금 신축공사 중이다. 허름한 지금의 국경사무소 아래쪽에 짓고 있는 국경사무소는 마무리 단계로 내년이면 개장을 한다고 한다. 국경에서 출국절차를 마치고 현지가이드와 버스기사와 헤어지고 그루지아 국경 사무소로 향한다. 그루지아는 무비자로 간단한 절차를 거치고 그루지아 땅으로 들어서니 12시30분경. 그루지아에서의 첫 여정 시작이다.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 국가로 들어오니 문화와 생활양식이 차이가 나고, 풍광도 많이 바뀐다. 2차선 도로를 달려가는 시골길은 포장상태가 좋지 않고, Bus까지 요동이 심하여 멀미를 하는 일행들이 나온다. 주변 농가는 아제르바이젠보다 더 허름하고, 서민들의 삶의 모습은 더 궁색한 것 같다.  그루지아는 포도가 많이 생산되어 집집마다 포도나무가 심어져 있고, 포도밭이 계속 이어진다. 그루지아가 포도주의 발상지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농가 문 옆에는 간이의자가 집집마다 놓여져 있고, 의자에 앉아 있는 주민들이 간간히 보인다. ‘가바자’ 마을 농가에서 그루지아 시골밥상으로 점심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가지구이, 야채, 양배추로 싼 만두, 통만두(육즙이 많음), 고기구이, House wine, 코냑 등으로 푸짐하게 차려진 점심이다. 초청한 넉넉한 몸집을 가진 남성 4중창 단이 붉은색 상의를 입고 전통 악기를 틀며 중후한 음성으로 민요를 들려주고 ‘타마다’(그루지아식 건배)를 외치며 일행을 환영해 주었다.
 카케티 지역에 있는 ‘글레미’에서 첫 일정을 시작한다. 글레미(Gremi)는 카케티 왕국의 수도였던 곳으로 실크로드 대상들의 교역지로 번성한 곳인데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수도를 텔라비로 옮김으로써 쇠퇴해버린 도시이다. 글레미 성채는 16세 기에 지어졌으며 대부분 폐허가 되고 성채와 교회만 남아 있다. 언덕에서 홀로 서서 코카서스 산맥을 뒤로 하고 드넓은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카케티 지역은 포도가 많이 생산되어 포도주 생산지로서도 유명한 곳인데 10월에 수확하여 포도주를 담는다고 한다. 전세계 포도의 종류는 약 4,000여 종이라 하는데 그루지아에서 500종이 재배되고 있다. 특히 이곳 카케티 지방산이 최고의 와인 이라고 한다. 와이너리를 방문하여 포도주 시음을 하고 수확이 끝나고 포도가 일부 남아 있는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기도 하였다. 코카서스 지방의 최고 와인 농장이라는 씨난달 리(Tsinandaly)가문의 저택을 방문하였다. 씨난달리 가문에서는 러시아의 황후가 배출되었고, 거대한 저택과 농장을 가진 그루지아에서는 유명한 가문이다.  입구에서 저택까지 200여미터나 되는 길 양쪽으로는 잘 가꾼 나무가 방문객을 맞고 있다. 저택은 그루지아 전통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2층 건물로 붉은색 벽돌과 회색의 돌을 사용하고, 흰색과 푸른색이 어울어진 발코니가 건물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었다. 정원이 무척 넓고 우거진 나무사이의 산책길이 가문의 기품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저택 내부는 가문에서 사용하던 생활용품과 사진 등을, 갤러리에는 미술품을 전시하며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었다. 저택 앞으로는 눈 덮인 코카서스 산맥 줄기가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어두워진 19시경 ‘시기나기’에 도착하였다. 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불 켜진 마을의 야경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코카사스 평원 언덕 위의 작은 마을로, 여름에 무척 더운 곳으로 비교적 시원한 산 위에다 영주가 평원을 내려다보며 관리하기 위해 산 위에 성채를 만들었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도로에 급커브 구간으로 대형 버스가 진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저녁식사 후 마을 산책을 나섰다.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마을의 거리는 평화롭고 운치가 있었고 작은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오붓함이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고 있었다. 마을에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늦은 밤까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소란을 피워 조용한 마을 분위기를 깨고 있었다.

 

10월10일(일) 5일차 : 고독한 수도사들의 자취를 찾아서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둠에 잠겨 있는데, 아침 산책을 나섰다. 어둠이 서서히 가시기 시작하며 마을 모습이 드러난다. 붉은 지붕의 마을들이 산자락을 따라 점 점이 있다. 붉은 지붕의 집이 아담하고 예쁘다. 산등성이를 따라서는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곳곳에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고 일부는 성벽을 이용하여 집을 지어 놓은 곳도 보인다. 망루 옆에는 자그마한 성당도 보인다.
 여유있게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없어 주마간산 격으로 이곳저곳을 급하게 돌아보려니 마음이 바쁘다. 인적이 없는 새벽의 고요한 거리에는 떨어진 낙엽을 쓸고 있는 마을의 할머니, 할아버지로 보이는 청소부가 눈에 뜨인다. 어제 밤 학생들로 떠들썩하던 소란스러움은 없이 조용하고 한적한 산골 마을 풍경이다. 어둠이 가시니 산 아래 넓은 평야에는 큰 마을이 보인다.
 시기나기 마을을 출발하여 마을을 전망하기 좋은 건너편 도로에서 잠시 마을 전경을 감상하고, 보드베 수도원으로 향한다. 9세기에 건립된 그루지야 정교회의 주교 성당으로 지금은 수녀원(소비에트 시절에는 병원으로 사용)으로 사용되고 있어 내부 관람은 할 수가 없었다. 4세기 여성 선교사이자 그루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니노의 유물이 모셔진 곳으로 그루지야인들에게는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이다. 3km 밖에 있는 성 니노의 샘물은 효험이 있어 질병 치료에 사용되었다 한다.
 오늘의 주요 방문지는 ‘다비드 가레자 동굴수도원’ 지역이다. 시기나기에서 약 2.5시간이 소요되는 곳이다. 시기나기 지역의 울창한 나무숲에서 점차 황량한 사막성 기후로 바뀌어 주위 풍광이 나무 하나 없는 초원의 구릉지대이다. 산등성 이로 난 구불구불 외길을 따라 초원 사이로 달려간다. 누렇게 변한 구릉지의 초원 이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지고, 말라버린 엉겅퀴가 초원 곳곳에 깔려 있다. 구름이 지평선을 이루는 곳에 간간히 나무 한 그루가 외로운 수도자의 모습을 하고 서 있는 모습이 색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황량한 초원에 수도원이 정말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인데 이런 황량한 곳을 찾아 들어와 수도생활을 해야 했던 수도사들의 정신세계가 더욱 궁금해진다. 지금은 편하게 차를 타고 가도 험한 길인데, 길도 제대로 없던 그 시절에 걸어서 가야했던 그 당시에는 어떤 마음으로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들어갔을까. 무더위와 추위, 물도 없는 곳에서 신앙심 하나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던 수도사들의 생활이 경이로 울 뿐이다.
 차에서 내려 황량한 외길을 따라 한 없이 걷고 싶은 마음이다. 걷다보면 수도사 들의 내면과도 다소 통할 것 같은 풍광이다. 6세기 경에 세워진 ‘다비드 가레자 수도원’은 19개의 독립된 수도원으로 이루어 져 있는데 동방 정교회 수도사들의 정수에 해당되는 곳이다. 수도원은 산의 절벽 에 동굴을 파서 수도사들의 수행처로 사용되었다. 입구에 있는 대표적인 동굴 수도원 ‘라브라(lavra) 수도원’은 6세기에 창시된 곳 이다. 출입구를 들어서면 마주보이는 경사진 산자락에 동굴을 파고 수행처를 만든 곳이 눈에 들어온다. 경사진 산자락에 만들어진 수행처에서 수도사들은 일생을 보낸다. 이곳은 수도사들이 기거하고 있어, 내부는 입장을 할 수가 없다.
  산속의 고요함과 고난의 세월을 견디며 수도원을 지켜낸 수도사들에게 절로 옷깃을 여미며 고개를 숙이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황량한 곳에 수도원을 만들고 생활을 하였던 수도사들은 어떤 심정이었을 까? 수세기에 걸쳐 침략을 당하고 수도원이 파괴되고 다시 복구, 이를 반복하며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몽골의 침입시 폐쇄, 13세기 지진, 1362년 페르시아 압바스 왕조의 수도승 말살 정책, 소련의 군사시설 등으로 수도원은 고난의 세월을 보냈으며, 지금 수도원을 다시 재건하고 있는 중이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수도 행렬은 끊임이 없었던 이곳은 그루지아의 영혼 같은 곳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기다리고 있다는 수도원은 그루지아가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이다.
  라브라 수도원을 나와 수도원 뒤에 있는 산으로 올라간다. 산 너머에 절벽에 동굴 수도원이 있다. 가파른 산길을 따라 30여분 오른다. 무성한 풀이 바람에 흐 느적거린다. 산위에 오르니 광활한 대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광활한 대지 저편으로는 아제르바이젠 영토라고 한다. 하늘을 가렸던 구름이 걷히며 햇살이 비추며 다가오고, 광활한 대지 위에 구름 그림자로 인해 광명과 어둠이 교차하며 대지를 지나간다. 잠시 휴식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고 한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절벽을 따라 있는 오솔길로 들어선다. 오른편은 가파른 급경사로 미끌어지지 않게 주의를 하며 가야 한다. 왼편 절벽으로는 동굴구멍이 곳곳에 보인다. 척박한 이곳에 굴을 뚫고 수도생활을 하던 곳이다. 여름이면 40도가 넘는 무더위와 한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어야 하는 지형이다.
  대부분의 동굴은 흔적만 남아 있는데 절벽 동굴 수도원 중 ‘우다부노 사원’은 꼭 보아야 할 곳이다. 프레스코 벽화가 남아있고, 다비드의 벽화도 볼 수 있었다. 식사를 하던 곳은 바위에 일렬로 홈을 파서 개인별 식탁으로 사용하였다 한다. 수도사들의 집회 장소로도 사용되었던 곳으로 비교적 넓은 곳이다. 중요한 문화 유산이 관리가 소홀하여 곳곳이 훼손되고 있고, 얼마 전에는 동굴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문화유산 등재도 중요하지만 더 이상 훼손이 되지 않도록 관리가 더 시급한 것 같다. 절벽 동굴수도원의 오솔길을 오르니 산위에 자그만 붉은 벽돌 로 지어진 성당이 있다. 조용하던 정상이 소란스러워진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침묵과 묵상을 하며 조용해야 할 수도원에서 학생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떠들기 바쁘다. 어디를 가나 아이들 노는 것은 같았다.
 산 정상에서 광활한 대지를 보며 상념에 젖다가 아쉬움을 남기고 수도원 정상을 내려왔다. 무성한 풀 사이 오솔길은 정선의 민둥산 억새 길을 걷는 것 같았다. 내려오는 길은 반대편으로 내려 왔는데 바위산에는 홈을 파서 바위 아래 큰 바위 웅덩이로 연결하여 물을 모으고 있었다. 물이 부족한 이곳에서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바위 위로 흐르는 빗물을 아래 바위 웅덩이에 물을 저장하여 사용한 것이다. 이곳에는 식당이 없어 점심으로 도시락(샌드위치, 토마토, 닭고기 등)을 준비하여 풀밭에 앉아서 광활한 계곡을 보며 식사를 하였다. 오전에 이곳에 들어올 때는 구름이 잔뜩 끼어 비가 올까 걱정을 했는데, 오후가 되니 구름이 물러가고 하늘이 맑게 개이고 구름이 간간이 박혀 있다.
 이제는 트빌리시를 향하여 떠나야 하나, 떠나기 싫은 아쉬움이 남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트빌리시까지는 약 2.5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포장도로로 나오니 길가에 버스 기사 딸이 기다리다 갓 수확한 포도를 건네준다. 집이 이 부근이어서 미리 준비를 시켰다고 한다. 따뜻한 정이 느껴진다. 트빌리시는 그루지아의 수도로 150만 명이 거주하고 있고, 기후가 온화하다. 투라 강을 따라 길게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버스를 타고 시내 주요 거리를 둘러 본 후 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성당을 방문하였으나 시간이 늦어 문이 잠겨 있다. 문 밖에서 잠깐 보고 성당 앞을 흐르는 투라 강 위의 다리에서 야간 조명으로 은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나리칼라 성채를 바라본다.  트빌리시는 ‘뜨거운 곳’ 이라는 뜻인데 이는 유황온천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저녁식사 장소인 시내 중심 가인 자유 광장으로 향한다. 자유의 광장으로 가는 길에 성벽이 보였는데 특이하 게 성벽을 따라 성벽 위에 집을 지어 놓고 있었다. 길거리 조명으로 트빌리시의 밤거리는 환상적이었다.

 

10월11일(월) 6일차 : ‘신들의 요새’우플리스치케 와 고리

 
  어제 저녁 문이 닫혀 보지 못한 메데키 성당으로 향했다. 12세기에 지어진 메데 키 사원은 트빌리시 시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는데, 배화교를 믿는 남편 에 의해 살해된 그루지야 최초의 순교자 성 수사니크의 유해가 이곳에 묻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투라 강이 바로 아래에 흐르고 강 건너에는 나리칼라 요새가 보인다. 이어 메데키 성당 건너편에있는 유황온천 (Sulfur baths)으로 갔다. 트빌리시의 온천은 아랍 칼리프 시대에 시작되었고, 현재 온천탕은 17∼19세기에 만들어 졌 고 귀부인들의 사교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벽돌로 된 돔 형태의 지붕의 굴뚝 에서는 수증기가 나오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온천탕에 붙여진 이름은 옛 주인 의 이름이라 하며 온천의 수온은 24∼26℃ 정도라 한다. 온천탕 옆으로 구시가지가 있는데 개조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2015년까지 구시가지의 건물들을 개조 한다고 한다.
 구 시가지를 지나 나리칼라 요새로 들어가는 성채 오솔길을 따라 가니 정문이 나온다. 방금 지나온 구시가, 온천탕, 메데키 성당, 대통령궁 등이 한 눈에 들어 오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트빌리시의 상징인 나리칼라 요새는 트빌리시 역사 자체이며 최고의 요새이다. 5세기 도시의 형성과 같은 시기에 축성되어, 우마이야 왕조, 몽골, 페르시아 등에 의해 침략을 받을 때마다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여 지 금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루지아 역사의 영광과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트빌리시를 나와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 고리(Gori)로 향한다. 고리는 스탈린의 탄생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으로, 그는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이른 사망으로 단칸방에서 홀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고, 성장은 타지에서 했다고 한다. 스탈린이 권력을 잡자 고리 주민들은 기대에 부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의 권력 유지에 영향을 줄까봐 고향에 대한 배 려보다는 더 많은 배제와 탄압을 하여 그루지아에 서는 러시아와 스탈린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대단하다고 한다. 스탈린 박물관에는 생가를 보존하기 위한 건물을 지어 놓고, 타고 다니던 객차,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우플리스치케(Uplistsikhe)는 고리 외곽에 있다. ‘신들의 요새’라는 별칭이 있는 거대한 암석을 깎아 만든 동굴 유적이다. BC 1,00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그루지아 최초의 도시 정착민이 거주했던 곳으로 추측하며, 2만명이상 거주했다고 한다. 사암지대로 동굴을 파기가 비교적 쉬워 동굴도시가 형성된 곳이다. 커다란 바위산에 구멍을 숭숭 뚫어 거주하였던 곳으로 갖가지 시설이 있었다. BC 7세기부터 AD 3세기까지 1,000년간 동굴 도시는 카르트리 고대 왕국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4세기경 기독교가 전파된 후 인근 므츠헤타가 중심지가 되었고, 지진과 아랍과 몽골의 침략으로 점차 황폐해졌다. 거대한 바위산에 판 동굴 안에는 극장, 약국, 지도자의 집, 거대한 집회 장소가 있고 왕궁 터에는 빵 꿈터와 와인 저장소, 감옥 등이 있다. 빗물을 모으기 위한 저장소, 비상 탈출용 동굴 터널 등도 있었다 . 동굴 도시 앞으로는 강이 흐른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동굴도시 중턱에 외로이 홀로 서 있는 사원은 9세기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사원 축성 시 기초는 지반 형태를 따라 맞춰 지었다고 한다. 거주하는 사람이 없이 고요하고 한적한 우플리스치케는 관광객만이 옛 도시의 흔적을 찾아온다.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어떻게 생활을 하였는지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고리를 나와 러시아-그루지아 군용도로를 이용하여 구다우리로 향한다. 군용도 로는 한때 실크로드 대상들이 오가던 길이었는데, 제정 러시아가 1799년 그루지 아를 합병하기 위해 만든 군사도로이다. 4년 전 러시아의 국경 폐쇄로 러시아에서 통행을 제한하여 경제, 상업적인 도로의 기능은 많이 상실되어 있는데 조만 간 러시아 측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국경을 개방할 예정이라 한다.
 
 구다우리는 유명 한 스키리조트로 해발 2000m 이상의 산간지대이며 트빌리시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곳이다. 여름에는 피서지로 겨울에는 스키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한다. 스키 슬로프가 18km나 되어 유럽인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특히 헬기를 이용한 산악 스키를 즐기러 온다고 한다. 계곡사이로 뚫린 군용 도로로 계속 고도를 높여가니 가을을 알리는 단풍이 짙어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산길 도로도 험해 진다. 구다우리 막바지 길이 급경사, 대형차량인 우리 버스가 급커브를 겨우 돌려 올라갔는데 지나온 길을 내려다 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의 낭떠러지 길이다. 구비구비 고개 길을 따라 힘겹게 차들이 오르내린다. 구다우리에 17시30분경 도착했다. 한라산보다 높은 해발 2000m의 고지대. 맑은 하늘에 공기가 차갑고 상큼하다. 아직 눈이 쌓이지 않은 스키 스로프를 올라가 보았다. 고산지대여서 날씨 변동이 심하다고 하는데, 지난주에는 비, 안개등으로 날씨가 나빴다고 하는데 앞으로 1주일간은 날씨가 좋을 거라는 예보여서 내일 카즈벡 산을 조망할 수 있는 행운이 우리에게 주어질 거란다. 꼭 그렇게 되길 소망한다.

 

10월12일(화) 7일차 : 코카서스의 숨은 진주 카즈벡

 
 새벽 공기가 차갑다. 하늘은 맑아 한밤중에 초롱초롱한 별들을 볼 수가 있었다. 산중턱에는 구름이 걸쳐 있고 햇살이 서서히 비추기 시작하고 하얀 설산은 황금 빛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리조트 일대를 산책하니 머리가 맑 아지고 상쾌하다. 앞에 보이는 3,000m가 넘는 산에는 며칠 전 내린 눈으로 하얗 게 덮여있고 서서히 떠오르는 햇살에 산 봉오리부터 흰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구다우리에서 카즈벡으로 가기 위해서는 즈바리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고개는 올라 갈수록 험해진다. 산 중턱에는 오늘 일용할 양식을 찾아 맛있는 풀을 찾아가 고 있는 양떼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가고 있는데 모습이 마치 구름 무리가 몰려가 는 것 같다.
  이 도로는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구다우리까지는 매일 제설 작업을 하여 도로가 개통이 되지만, 구다우리부터 카즈벡까지는 제설 작업이 어려워 제한 통행을 하거나, 눈이 녹을 때까지 통행을 할 수가 없을 정도라 한다. 2년 전 2008년 8월 그루지아의 영토인 남오셰티아와 얍하지야 지방의 독립 문제로 러시아와 그루지 아는 격렬한 전쟁을 하였다. 그루지아의 영토로 되어 있는 그 지역은 문화, 인종 적으로 러시아권이고 러시아 시민권과 투표권도 가지고 있어 그루지아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 특징을 지니는 지역이어서 그루지아로 부터 벗어나기를 원해 90년대 부터 내전이 자주 일어난 지역이다.  북경 올림픽이 개막되는 날, 친미정책을 추진 해온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그 지역을 공격하여 평화유지군으로 주둔중인 러시아 군도 공격하여, 러시아는 그루지아를 맹렬히 폭격을 하고 군용도로를 이용하여 전 격적으로 그루지아를 점령하여 5일 만에 그루지아는 항복하고 말았다. 이때 지금 우리가 달리고 있는 이 군용도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정치, 군사적으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지만, 코카사스 산맥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경치가 더욱 관심을 끌게 한다. 5개의 5,000m급 산중의 하나인 카즈벡산 (5,047m)의 비경은 비극적인 역사적 배경은 잊어버릴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즈바리 고개 중턱에는 페르시아 침공 시 러시아군 파병을 기념하여 1980년에 만든 고비에트 기념조형물이 있다. 원형 조형물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조형물 밑으로는 깊은 계곡이 이어져 주변 경관을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계곡 밑에서 안개가 스물스물 올라오더니 순식간에 주위를 둘러 싸 버린다. 대형트럭이 힘겹게 간간히 오가는 즈바리 고개(cross pass 2,495m)를 올라가니 해발 표지판이 보이고, 러시아 포로로 잡혀 군용도로 건설에 동원되어 희생된 독 일군 포로의 묘지가 고개 정상을 쓸쓸히 지키고 있다. 고개를 넘으니 초원이 펼쳐 지고 양떼들이 보인다. 7월이면 야생화가 만발하여 장관이라고 한다. 여기저기 말라있는 엉겅퀴를 비롯한 야생화 줄기를 통해 노랑색, 보라색으로 온통 물든 구릉 들을 상상해 본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야생화 구릉을 볼 수 없는게 한스러울 지경이다. 한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7m까지 쌓인다는데 이 시기에는 도로가 폐쇄되기도 한다. 게르게티 마을로 가는 길에는 터널이 6개가 있는데, 겨울 에 눈이 많이 내려 눈사태 등으로 도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독일군 포로를 동원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도로 양쪽으로는 높은 산으로 둘러 싸여있고, 계곡을 따라가는 도로가 만들어져 있는 것이, 마치 차마고도에 와 있는 것 같다. 맑게 개인 푸른 하늘에 간간이 구름이 하늘에 박혀 있고, 나무 한 점 없이 누렇게 바랜 초원 경치는 환상적이다.
 게르게티 삼위일체 성당은 카즈벡산 아래 해발 2,170m의 산봉우리에 홀로 서 있는 성당으로, 외롭고 쓸쓸해 보이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게르게티 마을에서 올려다 본 삼위일체 성당 뒤로 가즈벡 산이 보이고 성당은 산봉우리에 외로이 서있다. 14세기에 지어졌으며 전쟁 중에는 보물 피난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걷기 좋은 길이다. 그러나 올라가는 시간이 많이 걸려 시간 여유가 없는 관광객을 위한 찦차가 운행되고 있어 이것을 이용하여 올라 갔다. 시간 여유를 갖고 트레킹으로 올랐으면 감동은 배가 되었을 것인데 아쉬 움이 남아 있다.
 마을을 통과하여 험한 비포장길을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숲길을 지나자 넓은 평 원이 나오고, 눈 덮인 카즈벡 산을 마주보고 있는 삼위일체 성당이 나온다. 평원 저편 산봉우리에 홀로 서있는 성당의 자태는 너무나 기품이 넘쳐 감히 다가서기 가 두렵게 느껴진다. 성당에 접근하는 것을 막을 듯이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어 모든 것을 날려 버릴 것 같다. 세찬 바람과 옷 속으로 스며드는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무엇에 홀린 듯이 성당을 향한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삼위일체 성당을 향하여 카메라를 들이대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마치 구세주에게 구원을 갈급 하는 듯한 모습이다. 소란스런 세속에서 멀리 떨어져 산꼭대기에서 속세를 내려다 보며 홀로 고고히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초원을 지나 성당 입구는 경사진 길이다. 길을 돌아 들어가면 종탑의 입구를 통 과하고 성당이 나온다. 성당 입구에는 벽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아래는 작은 창 이 있어 성당 내부로 빛이 들어오게 하였다.
 성당 위로 비치는 찬란한 햇빛에 눈이 부시다. 게르게티 마을이 저 아래 까마득하 게 내려다보이고 마을 뒤에는 눈 덮힌 웅장한 산이 버티고 서있다. 카즈벡 산과 함께하는 삼위일체 성당은 주위 풍광과 잘 어우러진 최고의 성당이었다. 아름답고 웅장한 풍광을 뒤로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구다우리로 되돌아 나간다.
 
어제 구다우리로 들어오는 길에 지나친 아나우리 요새(Anauri fortress)를 방문 하였다. 러시아 시절 만든 댐 호수 옆에 자리하고 있어, 인공호수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14세기 이 지역의 지배자였던 아라그브 백작의 본성이다. 라이벌 관계이던 샨스세 공작에게 공격을 당해 멸망하였다. 두 가문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비슷한 배경을 가진 관계로 가문 간 잦은 싸움 끝에 농민반란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비극의 역사를 가진 곳이나 잘 보존된 성채는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고 UNESCO 문화유산 등재를 기다리는 중이다.
 3,00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 므츠헤타(Mtskheta).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 고대 도시였던 우플리스치케에서 그루지아의 중심지로 바뀐 곳이다. ‘그루지아 종교 수도’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곳으로, BC 3세기부터 AD 5세기까지 이베리아 왕국 의 수도였으며, 317년 그루지야 최초로 기독교를 수용하여 종교 중심지로, 성지 로 성장하였다. 타라 강과 아라그비 강이 합류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고, UNESCO 문화유산인 ‘즈바리 수도원’과 ‘스베트츠호벨리 성당’이 있다. 도시 초입 에는 1∼3세기에의 성벽과 로마군이 지나갈 때 사용한 폼베이우스 돌다리가 있다.
 6세기에 세워지 즈바리 수도원(Jvari church)은 므츠헤타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4세기 초. 최초로 그루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여성 선교 사 성 니노가 당시 왕이었던 밀리안 3세를 개종 시킨 후 이 자리에 나무십자가를 세웠다고 한다. 성 니노는 로마 장군의 딸로 296년에 탄생하여 터키 카파도키아 에서 거주하였고, 14세에 성모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데, 포도나무에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묶어 세웠다고 하는데, 이 십자가는 국보로 트빌리 시에 보관되어 있고, 이곳에 있는 것은 모형이란다. 트빌리시의 시오니 성당에 보 관중인 진품 십자가는 1년에 2번만 공개 행사를 한다는데 이때는 수십만의 인파 가 모인다고 한다. 이곳은 조로아스터교의 불의 신전이 있던 곳으로, 6세기에 성 당이 건립되어 성지 순례지의 하나로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스베티츠호벨리 성당’(Svetitskhoveli cathedral). 일명 ‘12사도의 성당’이며 그루지아는 물론 코카사스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이다. 4세기 성 니노의 제안으로 건축되었고, 예수의 성의와 예언자 엘레야의 망토가 묻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성당 안에는 프레스코 벽화로 둘러싸인 기둥(삼나무)이 유명하다. 4세기에 지어진 성당은 파괴되어 현재 건물은 11세기의 것으로 그루지아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이다. 13세기 몽골의 침략과 지진, 15세기 증축, 17세기 복원 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당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정문에는 소머리상이 양쪽으로 있는데 이는 이교도를 상징한다고 한다. 성당 앞은 행사를 앞두고 공사 를 하느라 소음과 먼지로 어수선하였다.
 므츠헤타에서 트빌리시까지는 20km거리이다. 트빌리시는 타라 강을 따라 도시 가 형성되어 있다. 강 양안으로 도로가 뻗어 있다. 날이 어두워지고 퇴근하는 차량으로 도로는 오가는 차량이 많다. 트빌리시에 19시경에 도착하였다. 어둠이 깔리고 늦은 시간이지만 그루지아 정교회의 총 대주교좌 성당인 시오니 성당을 방문하였다. 성 니노의 십자가 진품이 보관된 곳이다. 늦은 시간인데도 많은 시민들이 성당을 방문하여 기도를 드리고 가는 모습에서 이 성당에 대한 그루지아인의 자부심을 보는 것 같았다.

 

10월13일(수) 8일차 : 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세반 호수로

 
 그루지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아르메니아로 이동하는 날이다. 트빌리시에서 국경까지 1.5시간 정도 소요가 된다. 아르메니아에 입국을 하기위해 국경에서 비자를 받아야 하기에 출발 시간을 서두른다. 국경에서 버스를 내려 현지 가이드와 작별을 하고 짐을 갖고 이동을 한다. 출국장과 입국장의 거리가 2∼300m는 되는 것 같다. 무거운 짐을 끌며 걸어가자니 숨이 가쁘다. 날씨가 좋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굳은 날씨였다면 비바람을 피할 곳도 없고 고생을 했을 것이다. 입국 수속을 하는데 아르메니아 현지 가이드가 도와주고, 출입국 수속을 마치니 11시30 분. 비교적 빨리 끝났다. 국경을 통과하고 현지 가이드와 같이 아르메니아에서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이어지는 전원 풍경이 바뀌고 있다. 좁은 계곡 사이로 도로가 계속 이어진다. 강원도 산길을 가는 것 같다. 거리에 전개되는 농촌의 모습은 아르메니아도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음이 읽힌다. 낡은 건물들에서 궁핍한 삶의 모습 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국경에서 40분을 달려 ‘아흐파트 수도원’(Haghpat monastery)을 방문하였다. 9세기에 건축되어, 12C 쉘주크, 13C 몽골의 침입으로 훼손되었으나 다시 복구 되었다. 아르메니아 종교 건축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고, 비잔틴 사원양식과 코카 서스 지방의 토속적인 사원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발전된 형태를 보여 준다. 사원은 현무암을 사용하여 검은색으로 선이 단순하고 육중하고 무게감이 있다. 내부는 장식이 없고 벽 그 자체이며 프레스코화도 없는 코카서스 토속 사원 양식 이다. 이 사원은 복합단지라 하는데, 예술과 교육에 있어 중요한 곳이다. 도서관, 교육시설, 사원 등이 있으며 역사적인 문서와 벽화들이 수도원 사자실에서 제작 되었고, 아르메니아 고유문자를 교육하였던 곳이다. 곳곳에 십자가가 조각되어 있었고 ‘아르메니아의 성 십자가’로 불릴 만큼 예술성이 뛰어났다. 수도원의 분위기가 고즈넉하고 한갓지다. 도서관으로 이용된 건물은 지붕 바로 아래까지 흙으로 덮어 온도와 습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했다. 문서보관소에는 바닥에 항아리를 묻어 놓고, 종류별로 분류하여 두루마리 양피지를 넣어 보관하였는데 수시로 열람하였다 한다. 아르메니아 건축양식은 폭이 넓고 비교적 천장이 낮아 다소 답답한 느낌이 나고, 아치, 창, 돌출 벽 등 밖의 모양을 보면 내부 공간을 바로 알 수 있게 안과 밖의 구조가 같게 되어 있다. 제대는 장식이 거의 없이 단순하고 소박하며 정면 한 곳에만 장식이 집중되어 있다. 아르메니아 고유문자는 수세기간 변함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인 성당의 정문(하늘과 땅이 만나는 아치 )은 양 옆으로 아르메니아 문자, 각종 문양으로 아름답게 장식 되어 있고, 정면 위의 문자는 성당 건립 기부자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성당 벽에는 무수한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다. 소박한 마을 가운데서 문화, 교육의 요람으로 마을의 중심 역할을 하였을 이곳이 지금은 가끔 찾아오는 관광객을 반기고, 옛 영광을 회 상하며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높은 산들 사이의 좁은 협곡사이로 아랫마을이 들어서 있다. 점심식사를 하려는 식당 건너편 계곡에 제련소가 보이고 굴뚝에서는 메케한 연기를 뿜어낸다. 공해가 심한 곳이다. 이 주변 주민들은 직, 간접적으로 제련소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것 같다. 식당은 관광객으로 만원이고, 악사 2명이 즉석 연주를 하는데 러시아 가요 대부분으로, 귀에 익숙한 곡들이 들린다.(백만송이 장미 등) 산 중턱의 윗 마을에 있는 사나힌 사원군(Sanahin monastery)으로 간다.
 아흐파트 사원군과 비슷한데 규모가 작고 수도원이 많이 낡았다. 정적만이 감도는 고요한 사원 입구에 수예품, 토산품을 팔고 있는 상인들이 반색을 하며 반갑게 맞아주고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붉은 지붕의 첨탑이 보이고 검은색 벽에는 붉은색 의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에는 잡초 등이 무성하고 돌 벽 사이로 이끼 가 잔득 껴있다. UNESCO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있지만 관리를 할 여력이 미치 지 못하는 것 같다.
 사원을 나와 협곡의 길로 들어서는데 이곳의 지형이 특이하다. 산위의 넓은 대지 에는 마을이 점점이 보이고, 양떼들이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다. 용암이 천천히 흐르다 식어 지반의 약한 부분으로 침식이 발생하여 단애가 생긴 절벽과 협곡은 전형적인 용암대지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고, 주상절리가 협곡 도로를 따라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세반 호수로 가는 길은 가을걷이를 끝낸 농촌의 한가로움을 그대로 풍기고 있다. 겨울을 준비하려 초원에서 열심히 풀을 뜯으며 돌아다니는 소, 양떼, 밭에는 아직 수확 못한 작물들이 간간히 보인다. 산은 단풍으로 물들어가고 차창 밖으로 지나 가는 풍광이 왠지 낯설지 않다. 세반호수로 향한다. 지대가 높아지고 있고 산의 단풍도 점점 짙어진다. 딜리잔 마을에서 잠시 쉬어간다. 딜리잔은 아르메니아의 스위스라고 불리우는 한적한 마을이다. 겨울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관광객도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 마을이 한가하다. 딜리잔에서 고도를 높여 산길을 오르다 연장 이 2km가 넘는 긴 터널을 지나고, 터널을 나오자 주위 풍광이 갑자기 바뀐다. 산에는 나무가 보이지 않고 풀밭뿐이다. 세반호수는 해발이 1,900m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수 중의 하나이다. 세반호수는 여름에는 피서지로 예레반 등에서 피서객이 많이 오는 곳으로 호수 주변을 따라 리조트, 식당 등이 즐비하다. 리조트 주변은 비수기라 대부분이 휴업 상태. 세반 호숫가의 리조트에 오늘의 숙소를 정했다. 1층은 응접실, 2층은 침실로 콘도에 온 것 같다. 오랜만에 넓직한 방에서 호사를 하다. 리조트를 나와 세반반도 주변으로 산책을 나가니, 높이 자란 포플라가 노랗게 단풍이 들고 숲이 울창하다. 바람이 불고 기온이 많이 내려가고 상당히 추운 날이다.

10월14일(목) 9일차 :  최초로 가톡릭을 국교로 선포한 도시 에치미아진

 
 오늘 아침은 기온이 많이 내려가 쌀쌀하다. 하늘은 맑게 개어 있어 상쾌한 날 이다.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세반호수는 아르메니아의 진주라고도 불린다. 세반호수로 29개의 지류에서 강물이 유입되고, 1개의 강으로 나가며 이 강물은 터키까지 흘러간다고 한다. 고지대여서 여름에는 시원하여 휴가지로 붐비는 곳인데 겨울로 들어서니 낙엽이 지고 쓸쓸하고 고즈넉한 풍경이다. 호수에서 돌출되어 있는 곳 세반 반도에는 2개의 세반느 반크 성당이 언덕 위에 있다. 301년 세워졌다는 성당인데 먼저 간 남편을 추모하며 평생을 지 냈다는 여성 수도사의 사연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가을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언덕위에서 산책과 사색을 하기 좋은 곳이다.
   
  예레반은 1.5시간 거리이다. 예레반 외곽 언덕에 있는 전망대에서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조망하기 좋은 곳에 잠시 들렀다. 시내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보인다. 왼쪽으로 대학가, 중앙에 오페라 하우스, 좌측으로는 국회가 보인다. 하늘이 맑으 면 정면에 아라라트 산이 보인다고 한다. 대학가를 지나 중심가로 간다. 마침 점 심시간대가 되어 많은 학생들이 거리를 메우며 오간다. 대학가답게 젊은이들로 활기가 넘친다.
 에치마이진(Etchmiazin)은 아르메니아에서 핵심지역이다. BC 340년-AD 184년 아르메니아의 수도였던 곳으로, 아르메니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며 한적하고 조용한 도시이다. 이 도시는 세계 최초로 가톨릭을 국교로 인정한 지역이며 세계 최초의 성당이 건립된 곳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313년)으로 기 독교가 공인되기 전인 303년, 이 지역의 왕이었던 티리다테 3세가 기독교로 개종 하고 대성당을 세워 세계 최초의 기독교 도시로 선포되었으며 현재도 ‘아르메니아 의 바티칸’으로 불리고 있다. 대성당은 세계에서 최초로 세운 성당으로 301-303년 사이에 건축되어 증축과 개축되어 현재의 성당으로 발전되어 아르메니아 대주교가 관장하는 최고 지위의 성당이다. 이 성당에는 중세의 보물을 많이 수집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소장품의 대부분은 예레반의 마테마다란으로 옮겨 보관중이지만 부속 보물실에는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창’과 ‘노아의 방주 뱃조각’을 보관 중이다. 성당 입구 에는 종탑이 세워져 있고, 입구 문에 조각된 장식품이 화려하며 이란인이 문양을 조각했다고 한다. 대성당 주위로 병원으로 사용되었던 건물, 신학교, 대주교 사옥 등이 주위에 있다. 성스러운 장소여서 성당을 찾는 신자들이 많이 있다.
  즈바노트 성당(Zvartnots Cathedral)은 에치마이진 인근에 있는 곳이다. ‘즈바노트’란 하늘의 천사라는 뜻이다. 건축가인 네르세스 3세는 이 성당과 자신 의 궁전을 지으면서 기존의 건축기법을 총동원하여 바티칸의 비잔틴 양식과 그리 스 양식, 아르메니아 전통양식 등을 총 결합시키고자 했다. 10세기경에 지진으로 무너져 남아 있는 것은 기둥과 일부 벽뿐인데 당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뛰어난 건축기법을 사용하였다. 당시에 지어진 규모로는 대단한 건축물로 시대를 뛰어 넘 는 기법은 현대에도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3층 규모로 아래층은 무겁고 단단한 돌을 사용하고, 위로 갈수록 가벼운 화산석을 사용하여 하중을 줄여 3층까지 건 축 하였다 한다. 남아 있는 기초의 규모가 당시에 최고의 건축이었음을 의심할 필 요가 없을 것 같다. 예레반으로 일찍 돌아와 자유롭게 시내를 돌아 볼 수 있는 시 간을 갖고, 중심가인 공화국 광장을 출발하여 미술관을 지나고 오페라 하우스까지 뻗어있는 넓은 길을 따라 걷는다. 깔끔하고 정갈한, 넓고 시원하게 곧게 뻗은 길 에는 퇴근하는 시민들로 바쁘게 움직인다. 밤이 되니 비가 온다.

 

10월15일(금) 10일차 : 최고의 주상절리 가르니 계곡

 
  밤새 비가 제법 많이 내렸고 아침에는 빗줄기가 많이 줄었다. 예레반의 남쪽에 있는 가르니 계곡으로 간다. 가르니 계곡 일대는 기독교 문명 이전의 종교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4,000년 전부터 사람들이 계곡에 밀집하여 살았다고 한다. ‘게그하드 사원’은 단풍이 절정인 산으로 둘러싸여있는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바위의 암벽을 쪼아 내어 만든 동굴 사원군 이다. 'Aiyrivank' 또는 동굴 수도원으로 알려졌으며 카톨릭 첫 성인 Gregory에 의해 4세기 초에 수도원이 설립되 었다고 전해진다. 그레고리와 아르메니아 문자를 창안한 St Sahak Partev에의해 발전되었다. 오직 사다리나 로프로 갈수 있는 곳, 노출되어 있는 많은 요소들, 절 벽 위의 수많은 작은 동굴 내부와 수도원 주변은 수도자의 금욕주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레고리는 이 동굴 중 한곳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1,2,3층 으로 동굴을 뚫어 사원을 만들었다. 4세기경부터 동굴사원이 조성된 것으로 추측 된다. 가장 큰 메인 성당은 1215년 건축되었다고 한다. 성당에서 연결된 1층 동 굴 사원은 규모가 대단히 크다. 단단한 암석을 깎아내고 사원을 지은 것인데 바위 를 쪼아낸 커다란사원으로 신앙의 힘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경이로울 뿐이다. 사원 주위는 가을 단풍으로 물들어가고 있어 고즈넉한 사원 분위기를 더욱 운치있게 해 주고 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며 흐린 날씨가 사원의 분위기를 더욱 숙연하게 해준다. 가르니 계곡에는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파간사원이 남아있다. BC 1세기 경에 지었다고 하는데 그리스 로마시대의 신전을 변형시킨 형태로 현무암을 사용 하였다. 1679년 대지진으로 붕괴된 것을 소련정부가 복원하였다.
 파간사원은 태 양신인 미트라를 위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원내서 ‘두둑’(아르메니아 전통 피리) 연주자가 관람객을 위하여 연주를 한다. 중후하고 저음의 무거운 느낌을 주 는 두둑의 소리가 사원 내부도 울려 퍼지며 가슴을 저미게 하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 두둑의 연주를 인상 깊게 들었었는데 익숙한 멜로디를 시공을 초월한 유적지에서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사원 내에는 성벽, 주둔지, 태양신전 터, 궁전 터, 로마식 목욕탕의 흔적이 남아있고 기둥사이로 뜨거운 물을 흘려보내 바닥을 데우고, 마지막 방은 목욕탕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바닥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다.
  마을에서 ‘Symphony of Stones'라는 계곡으로 내려가니 절벽이 보인다. 계곡은 용암대지로 주상절리의 절벽이 계곡을 따라 발달되어 있다. 가까이 가니 절벽의 높이가 무척 높다. 노출된 바위는 육각형의 바위가 위로 쭉 뻗어있다. 계곡을 따 라 내려갈수록 주상절리의 규모가 더욱 크고, 위를 올려다보아도 끝이 없다. 파이프 오르간의 파이프처럼 절벽에 육각형의 주상절리가 쭉 뻗어 있고, 일부 돌 들은 떨어져 나올 것 같고, 일부는 아래로 떨어진 것도 있었다. 주상절리가 위에 서 뻗어 내려온 것, 땅속에서 불쑥 솟아 나온 것 등 갖가지 형태의 바위로 가득 차 있다. 세계 1위의 규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시간 동안의 가르니 계곡 트레킹은 진한 감명을 주었다.   
    
 

 

10월16일(토) 11일차 : 고난과 억압의 땅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는 과거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받아왔고, 근대에 터키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은 아르메니아인의 가슴에 응어리로 맺혔다. 오스만 제국의 말기에 아나톨리아 지역의 아르메니아인 150만 명이 학살되었다. 이 학살 사건으로 터키와의 관계가 극도로 나빠지고 아르메니아인의 가슴 깊은 곳의 응어리는 영원히 풀리지 않고 있고, 이것을 잊지 않기 위해 아르메니아 대량학살 추도관을 만들어 매년 4월24일이면 수많은 참배객이 방문한다고 한다. 아라라트산을 상징 하는 2개의 뾰족한 탑이 겹쳐져 있고, 가운데는 꺼지지 않는 불을 중심으로 12주를 상징하는 12개의 기둥이 원형으로 둘러싸여 있다. 불꽃 주위로는 참배객이 놓고 간 꽃이 놓여져 있다. 불꽃 주위로 서로 손을 잡고 묵념을 드린다.
  
  가이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가신님을 위해 조용하고 엄숙히 노래를 부른다. 간간히 내리는 비는 가신님 들의 울음인양 추모탑 주위를 적시고 있다. 앞에 보이는 아라라트 산에는 구름이 산 중턱 위로 걸려 있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아라라트는 아르메니아인의 마음의 고향이자, 조상들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곳이고, 민족의 발원지라고 여겨 지는 산이다. 지금은 터키 땅으로 갈 수 없는 곳이기에 더욱 애듯하게 느껴진다.
 마테다다란(Matendadaran)은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다. 24,000여권의 고대 책이 수장되어 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는 36개의 문자를 4세기에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문자로 주변국에서도 자국의 언어를 기록하는 문자를 사용하였다고 하며 실크 로드의 교역 중심국으로 교역지마다 아르메니아 문자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을 설정해 교육도 엄격히 시켰다고 한다. 돌 판에 건물을 짓게 된 배경, 과정 등이 아르메니아 문자로 기록되어 건물 밑에 초석처럼 묻은 것이 여럿 발견 되어 있고 여러 유형의 여러 내용의 책들도 전시하고 있어 둘러보는 재미가 엄 나 시간가는 줄을 모르겠다. 암스테르담에 인쇄소를 두어 책을 만들고, 베니스에 출판을 의뢰하는 등 아르메니아 문자의 역할은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함에도 약소 국가라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르메니아는 인구 300만 명으로 이란, 터키,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젠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한국의 경상도를 합친 규모 정도의 영토로 인구의 1/3이 수도 예레 반에 집중되어 있다. 오래전부터 해외로 퍼져나간 아르메니아 인은 전 세계 60여 개국에 약8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자원 빈국으로 자력에 의한 경제 자립이 어 렵고 해외 교포의 송금이 아르메니아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제르바이젠과의 끊임없는 전쟁과 터키와 이란과의 불편한 관계로 아르메니아가 더욱 고립되어 있다.
 이번 여행한 코카사스 3국은 역사적으로 침략과 점령으로 고난을 받아오다 1990년대에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자립을 하기위해 몸부림 치고 있고 있는 나라들이다. 아제르바이젠은 석유와 천연가스를 기반으로 중흥을 꿈꾸고 있고, 그 루지아는 유럽으로 가는 천연 가스의 통로라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고 러시 아의 세력으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고, 아르메니아는 자원 빈국이지 만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큰 민족이다. 그러나 주변국과의 마찰은 국가 발 전의 저해 요소가 되고 있다. 자원과 지리적 이점, 종교문제 등으로 끊임없이 갈 등이 이어지고 있어,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이곳에서 영원한 평화를 찾기는 요원 한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