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서울에 사시는 박길란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박길란님은 2009년 9월 9일부터 22일까지 14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그리스에게해일주 여행을 다녀 오셨습니다. 글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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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과 굴욕을 함께 키운 땅, 그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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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9일 - 2009년 9월 22일 박길란(parkkaz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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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로 본 여행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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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일정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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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발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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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는 참 이상하다. 처음 갈 때도 터키라는 나무의 잔가지처럼 붙어 내게로 왔다. 2005년, 아주 좋은 조건으로 내가 보고 싶은 터키를 가자면 그리스 땅도 밟아야 했었다. 이번에도 느닷없이 선희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리스 가자” “왠 그리스?” “숙제 해야지!” “음 ~~ 그래볼까?” 1분 만에 결정했다. 또 이렇게 내 의지나 열망과 관계없이 어느 날 갑자기 내게로 왔다.
개인적으로 그리스 문명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지구인으로서 그 문명에 원초적 빚을 지고 있다는 묘한 감정은 지울 수 없었다. 서구인의 시각으로 본 역사관에 틀을 맞춘 세계사를 배운 우리 세대의 사대주의적 학문 후유증이라고 폄하해도 심정적으로 몽땅 털어 낼 수는 없다. 삼국유사보다 그리스 신화집을 먼저 알았고 그 책은 나의 소녀 시절, 낭만과 모험의 상상으로 점철된 무수한 밤을 선물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집을 강제로 읽혀 시험까지 보게 하는 대회가 있었다. 그 시험 점수로 학교, 시, 도, 대표를 뽑아 최고 점수 취득자는 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를 갈 수 있는 기회까지 주어졌다. 일본 유학 시절 실지로 그 수혜자를 만난 적도 있다. 미래의 한국을 책임질 청소년들의 필독서로 그리스 신화를 읽게 한 그 당시 정책가들의 몽상은 참 낭만스럽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조금은 비장한 각오(?)로 존경과 예의를 갖추고 열흘 이상의 시간을 갖고 집중적으로 그리스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리고...... 이제 그를 만날 때가 되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제는 더 미룰 이유가 없다는...... 나도 소중한 무엇인가를 정리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크레타에 가서 그를 만나고 싶다는 오래된 나의 내밀한 소망을 밖으로 끄집어 낼 때가 왔다. 내 자아의 정체성에 따뜻한 원초적 숨결을 불어 넣어 주고 내 자유의 근원에 날개를 달아 준 가슴 속 은인을 세상 밖으로 불러내어 이제 내가 그에게 나의 생명을 나누어 주고 싶다. 먹물에 잠겨 본능에 족쇄를 채우는 것만이 아름다운 인간이라고 믿고 산 나를 멋지게 한 방 날린 사람. 자아의 목소리에 충실하고 간절히 원하는 것에 즉각적인 행동을 두려움 없이 하라고 일러준 그 분 ! 카잔차키스 !!
인류의 삶의 여정이 층층이 쌓여 신화가 되고 역사가 되어 푸른 지중해에 녹아있는 그리스! 그리고.... 카잔차키스 !! 이제 나는 준비가 되었다. 그들을 만나는 행운을 껴안을 준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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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9월 10일(제 2 일) - 죽은 자가 산 자를 압도하는 도시, 아테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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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일 오전 일행을 만나 파리를 경유해 아테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 30분. 호텔로 곧장 와 시차를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파김치가 되어 죽음 같은 잠에 빠졌다. 어젯밤, 공항에서 시내 호텔로 이동하면서 다시 본 아테네는 사랑스러웠다. 2005년 4월 정오 경, 밧모 섬을 경유해 피레우스 항구로 들어와 아테네 땅을 처음 밟았을 땐 항구 가득 했던 유쾌하지 못한 냄새와 어지럽고 남루한 근대적 풍경에 적이 실망했었다. 그러나 어둠에 싸인 지금 아테네는 고도(古都)가 가짐 직한 조용하고 안정된 아침의 농무(濃霧) 같은 야경이 펼쳐져 있다.
입담 좋게 생긴 가이드 김경자씨가 아테네의 야경이 제우스 신이 지휘하는 은은한 첼로의 선율 같다고 표현한다. 일순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이곳을 오기 전, 이 책 저 책을 뒤지다 여행 작가 이두영씨가 쓴 <신화보다 아름다운 그리스>라는 책에서 본 글귀라 웃음이 나왔다. 저 감흥은 이두영씨 것일까? 김경자씨 것일까?
시내로 들어서니 4년 전과 전혀 변함없는 어두운 뒷골목 풍경이 내 고향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처음 아테네를 보았을 땐 기대에 못 미쳐 이 도시가 의도적으로 나한테 사기를 친 것 같아 분개하기도 했었는데.... 하루를 묵은 호텔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10분 정도 걸으면 아크로폴리스에 오를 수 있고 또 스파르타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아테네가 건설한 성벽 일부가 지하에 남아 있어 식당을 갈 때마다 인류 역사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디바니아 폴리스 호텔).
화창한 날씨는 그리스 여행의 시작을 축복으로 여기기에 충분했다. 첫 방문지는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이다. 설레임을 안고 대면한 박물관 건물은 지극히 그리스적이고 단아하다. 2004년에 보수, 확장으로 완성된 건물은 아주 깔끔하고 건물을 떠받들고 있는 수많은 기둥이 인상적이다. 건물 중앙,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이오니아식 기둥은 전형적인 우아한 그리스 건축물의 힘을 보여준다.
전시물은 너무나 훌륭해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고, 역으로 단 하나에 집중할 수도 없다. 특히 금제 장식이 많은 미케네실의 전시물은 기원전 문명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그 섬세함과 수준 높은 미적 감각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전시물 사진만 몇 백장 찍었을 정도니 모든 것이 얼마나 경이로웠는지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다. 거창하게 서양 문명의 모태니 인류의 지적 능력, 예술적 기능의 상징이니 하는 말들이 오히려 치졸한 아부처럼 들릴 만큼 유물들은 빛이 났다. 또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세계 여느 박물관과 다른 역동적인 기운이 있다는 것이다. 체육관에서 느끼는, 젊음이 펄펄 끓는 기운은 아니지만 과거의 잔영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절제된 힘이 분명 느껴졌다. 신에 대한 봉헌물은 그리 내 시선을 끌지 못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을 극대화하고 삶 자체를 미화한 유물들이 더 압도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특히 내 관심을 끌었던 곳은 옛 그리스 장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전시실이었다. 정말 많은 대리석 묘비, 석관, 묘표(墓表), 장례 항아리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 무덤을 장식 했던 묘표는 한결 같이 아름답고 섬세한 조각내지는 부조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쿠로스(청년상)이다. 세상을 떠난 자의 조각도 있지만 살아남은 가족의 비탄에 빠진 모습, 하인, 애완동물 등의 조각품도 있다. 묘표를 보면 죽은 이의 직업과 가족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죽음이 삶의 연장이라고 위로하고 미화시켜도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원한 이별은 고통이다. 레테 강을 건넌 자들이 자신의 죽음을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 한 얼굴의 표정은 발길을 자주 붙잡는다. 비애 서린, 또는 삶의 허무함을 알아버린 자의 시선은 먼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시대를 초월한 슬픈 이별은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도 박제되지 않은 채 살아있는 나를 숙연하게 한다.
또 이 박물관에서 나를 즐겁게 한 곳은 2층 도자기 전시실이다. 동양의 도자기가 예술적 감각을 극대화하고 깊고 오묘한 빛깔에 심취하게 한다면, 그리스 도자기는 그 자체가 신화이며 한 권의 역사책이다. BC 3000년 경, 크레타 미노스 문명(청동기 문명)에서부터 나타난 토기는 로마 통치 시대로 들어가기 전까지 집중적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그리스의 수많은 박물관은 도자기 전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물의 수가 많다. 쓰임새도 장례용, 장식품, 생활도구, 성물... 등으로 다양했다.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민족답게 도자기 미술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기원전 유물이라고 믿기 힘들다. 초벌구이한 토기 정도의 수준이지만 도자기에 그려진 색채화는 인간의 본능적 예술 감각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이다.

BC 10~7C 경의 초기 도자기는 주로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려졌다. 연속된 동일한 여러 문양은 과학적 사고가 빈약한 사회의 불안한 심리의 표현으로 영원함을 염원하는 본능적 표출이다. 기하학적 문양의 토기 다음 단계가 흑회색 토기다(BC 7~6C). 얕은 음각으로 그려진 토기는 이제 인체 표현을 즐긴다. 실루엣으로 처리된 신화 속 신과 인간 군상들은 토기 속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다.
흑회색 토기 다음이 적회색 토기다(BC 6~4C). 흑회색 토기 중심지가 코린트였다면 적회색 토기는 아테네가 중심이다. 주황색 토기에 흑색 안료로 그림을 그리면서 그리스인들의 예술적 감각은 날개를 달았다. 이집트 미술의 영향으로 옆모습만 그리던 초기 기법에서 정면은 물론 원근법, 감정, 동작까지 표현된 도자기는 폭발적인 수요를 가져왔다. 글을 모르는 다수의 대중들에게 도자기의 그림은 알기 쉬운 신화와 역사의 교과서였고 이상(理想)이었다. 색채의 강렬함과 건강하고 아름다운 도자기 속 인간들은 활화산 같은 삶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그리스 도자기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백색 도자기였다. BC 5C 경에 잠시 만들어졌다는 백색 도자기는 우아한 기품을 뽐내고 있다. 여러 형태가 있지만 그 중 으뜸은 길고 가는 몸체의 도자기다. 주로 장제용 올리브 기름병이라는데(무덤 앞에서 이 도자기에 올리브유를 담아놓고 추모의식을 거행했단다) 도자기 표면의 그림도 여인들이 의식을 치루고 있는 것들이 많다. 여인들은 한결같이 우아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얇은 옷 속의 풍만한 몸매는 다 드러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예찬, 풍만한 육체와 삶의 예찬으로 가득한 박물관은 처음이다. 기원전 다른 지역의 문명들이 극복하기 힘든 자연과의 사투로 그 신비한 힘의 원천을 찾아 여러 신을 찾아 헤맬 때, 그리스 인들의 인간 중심 사상은 확실히 비범한 구석이 있다. 조각품들의 환상적인 몸매는 인체 탐구와 운동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리스인들은 이미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 속에서 강인하고 균형 잡힌 사고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몇 천 년의 간극을 넘어선 이 박물관의 인간들은 한밤중, 모두 깨어나 멋진 파티를 열 것 같다. 그 밤의 열기가 느껴진다. 루벤스 그림과 같은 건강한 생명력이 그리스 여행을 시작하는 나에게 활력소가 되어 준다. 이 박물관의 유물들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3,000년 전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당시 생활상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을 비교한다면 문명이 발전, 분화되면서 삶은 확실히 편리하고 안락해졌다. 하지만 예술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인류는 시간과 함께 그 감성도 발전했을까? 인류가 천부적, 또는 후천적으로 습득한 예술적 감성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고 본다. 기원전 유물들이 여전히 현재의 나를 감동시키고 활력을 주기까지 하지 않는가? 멋지고 아름다운 것은 항상 유효하다. 충만한 기분으로 박물관을 나오니 영롱한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다. 삶은 이렇게 경이로운 것이다.
조금 이른 점심을 먹고 제우스 신전으로 갔다. 정확하게 신전 터라고 해야 하나? 2005년 아테네에 왔을 때 하드리아누스 기념문 너머 보이는 이 신전 터를 몇 번이고 지나다니면서도 들어가 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 속상했었다.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고 있는 신전은 단일 신에게 바쳐진 곳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넓었다. 그 신이 모든 신의 아버지라고 해도.... 신전은 폐허로 변해 10개 남짓한 기둥만 이곳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 기둥이 범상치 않다. 20m에 가까운 기둥은 빼어난 자태로 보는 이로 하여금 제우스의 힘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기둥은 코린트 양식으로 아주 세련된 로마 건축물임을 암시한다. 그리스의 제우스 신전이라기보다 로마의 주피터 신전이라 함이 어울린다. 실지로 신전 착공은 BC 6C 경, 아테네로부터 시작 되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AD 131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끝이 났다. 황제는 이런 멋진 건축물을 세워 그리스 민족을 로마화했고 로마를 아테네화했다. 이제 이 폐허 속에서 제우스의 영광을 유추하기는 힘들지만 장구한 세월을 버틴 기념물은 영원할 듯싶다.
제우스 신전을 나와 국회의사당 쪽으로 이동하면서 근대 올림픽 경기장을 봤다. 2005년 그리스에 왔을 때, 전 해인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문에 이곳에 대한 환상이 컸었다. 우리의 양궁 선수들이 금메달을 휩쓸면서 여러 번 애국가가 울렸던 장소이다. 우리 부부는 모두가 잠든 한밤에 이곳에 와 굳게 닫힌 문을 부여잡고 아쉬워했었다. 추억의 장소를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국회의사당 앞 무명용사 묘를 지키는 보초병들의 교대식을 보고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그리스 지하철은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장소다. 현대식 역사(驛舍)를 통과해 지하로 들어서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특별한 세상으로 안내된다. 수천 년을 이어 온 그리스의 역사가 신화와 전설로만 흐른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를 지층에 새겨 놓았다. 지하철 공사를 하면서 나온 유물, 유적을 발굴된 장소 그 자리에 보존해 놓았다. 유골까지.... 발굴된 도자기를 지표 삼아 그리스 역사 연대를 쉬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아 역사 인식에 도움이 된다. 시간의 흐름이 무의미해 보이는 지하세계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들이 화석같은 표정으로 떼지어 바삐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니 모든 것이 찰나(刹那)라는 생각이 든다. 유리 벽 너머 편안히 누워있는 하얀 유골이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듯 보여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아테네에서는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기가 세다. 지하철은 한국의 <로뎀>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한 구간을 가기 위해 타보니 색다른 감회가 든다. 서구 문명의 모태라는 그리스 땅을 달리는 한국의 기술력이라니...... 유치한 자부심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모나스트리끼 역에서 내려 엘무 거리를 걸어 다시 신타그마 거리로 나와 학술원과 아테네 대학 본관 건물을 구경했다.
아테네 관광은 주로 폐허의 상징적인 유적지를 중심으로 보게 되는데 이 건물들이 그런 면에서 의미가 크다. 1850년대에 건축된 건물들은 BC 5C 경의 아테네 영광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았다. 두 건물의 실질적 얼굴 역할을 하는 이오니아식 기둥은 인상적이다. 장식성이 강하고 화려한 코린트 기둥은 아무래도 로마 문명의 상징으로 보이고 이오니아 기둥은 기본에 충실한 높은 품격이 돋보여 그리스 문명을 대변하는 것 같다. 황금빛 채색까지 되어있어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2,500여 년 전의 그리스 본래의 건축물들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특히 아테네 대학 본부 회랑의 프레스코화에서는 그리스 인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그리스의 모든 지성인들이 세월을 뛰어 넘어 토론과 명상에 빠져있고, 신화 속 신과 인물들은 여전히 역동적인 모습으로 현재를 살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화풍이 그리스의 르네상스를 실감나게 한다. 상징적으로 표현된 많은 인물들의 이름을 모르니 갑갑하다. 최소한 그리스어 읽기라도 될 만큼 공부 좀 할 걸.....
학술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좌우에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익숙한 포즈로 앉아있다. 철학을 설파하신 위대한 학자들은 여전히 깊은 사고에 빠져있다. 현재의 그리스는 이 위대한 철학자의 후예답지 않게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경제적 빈곤으로 전 세계 의 부담이 되고 있다. 자가당착의 포플리즘과 탈세, 부패로 나라가 거덜이 나도 자신들의 문제조차 인식 못하는 이 민족이 여전히 지혜롭고 합리적 사고의 지평을 넓힌 선조들을 자랑스럽게 기리고 있는 것이 왠지 낯간지럽고 씁쓸하다. 태양신 아폴론이 높은 기둥 위에서 자신의 그리스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테나 여신과 함께.... 이제 이곳은 현재의 그리스가 영광스러운 옛 그리스를 꿈꾸는 이상향이 되어 버렸다.
이곳을 끝으로 일단 아테네를 떠나 에게 해로 가기 위해 피레우스 항구로 갔다. 다시 보는 항구가 친근하게 다가온다. 5년 전에는 터키에서 배를 타고 이 항구를 통해 그리스로 들어왔었다. 그 때 배 갑판에 서서 멀리 보이는 피레우스 항구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바라보았었다. 그 당시 내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단 한 문장 ! <항구 도시 피레우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첫 문장이다. 산투리 하나 챙겨 들고 무작정 거칠고 협박에 가까운 말과 행동으로 자신을 어딘가로 데려다 줄 사람을 기다리던 조르바 ! 항구에 도착한 나는 카잔차키스와 조르바를 찾기 바빴었다. 소설 속에서는 비가 내렸었는데 태양이 작열하는 항구는 너무나 분주했었다. 바쁜 항구의 그리스 인들 뒷모습을 보면서 서푼 값어치도 없는 나의 치졸한 감상이 가슴 아파 슬펐었다. 그랬던 이 항구를 다시 대면하는 나는 이제 시간만큼 성숙해졌다.
배에 올라 항구를 내려다보니 현대, 삼성 중공업이 만들어 수출한 여객선들이 온 바다를 점령하고 있다. 그리스 에게 해 도서지방을 오가는 여객선의 대부분이 우리 기술로 건조된 것이란다. 한 때 선박왕 오나시스의 나라가 맞기나 한 걸까? 40년 전 현대 정주영이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 권 지폐와 백사장 사진만 가지고 멋진 배를 만들어 줄테니 먼저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을 때 그의 뚝심을 믿고 유조선 2척을 주문한 나라가 그리스였다. 아 ! 여행지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아름다운 저녁이다.
멀어져 가는 피레우스 항구를 보면서 모두 갑판에 나와 김밥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제대로 된 식사하기에는 시간이 어중간해 도시락을 준비했다는데 그런대로 재미있다. 에게 해의 멋진 노을을 기대했지만 두꺼운 구름이 끼면서 하늘은 낮에서 밤으로 곧장 바뀌었다. 추위를 느낄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분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 갑판을 떠나지 않았다. 에게 해 여행을 시작하는 첫 관문부터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모두의 기대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배는 4시간을 달려 밤 11시쯤 깜깜한 미코노스 항구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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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1일(제 3 일) - 모든 향락이 허락되는 미코노스! 경건한 섬 딜로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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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을 여니 바로 코앞에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하늘에는 두꺼운 구름이 깔려 있고 해는 그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지중해! 에게 해다.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은 아무래도 곱게 지나가지는 않을 것 같다. 어제 항구에서 차를 타고 구불구불 제법 산 위로 올라온 것 같은데 지금 보니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호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풀장으로 올라가니 미코노스의 중심지 호라(hora)가 한눈에 들어온다. 푸른 바다. 하얀 집. 그림이다. 어떤 군더더기도 없는 지중해의 풍경 ! 완벽한 풍경 ! 저 그림 속에 고물거리는 인간이 산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다. 바다와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는 듯한 풍경이다. 우리가 이틀 머물 호텔은 방가로 형태로 작은 집들이 위태롭게 계단식 논처럼 붙어 있다. 결국 아침을 먹고 있는 사이에 시원하게 굵은 비가 쏟아져 내리더니 딜로스 섬으로 가기 위해 호텔을 나설 때는 거짓말처럼 해가 나기 시작했다.
작은 배를 타고 딜로스 섬으로 향했다. 40여 분만에 도착했다. 내리기 전 갑판 위에서 바라보니 딜로스 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든 돌들은 가로로 누워있고 수많은 돌담만 가득하다. 9월 중순이라는 계절이 믿기지 않을 만큼 햇살이 따갑다. 우리는 선착장에서 곧장 이어지는 아고라에서 오른쪽으로 있는 주택가로 들어섰다. 미로 같은 길들을 따라 많은 집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BC 2C 경, 로마 시대에 이곳은 인구 3만 정도가 거주한 지중해의 중요한 자유무역항이었다. 이 주택 유적은 그 시대의 것이다. 딜로스는 작은 돌섬이지만 지도를 놓고 보면 에게 해의 중심이 되는 지정학적 이점이 있다. 이런 이유로 딜로스는 신화로 시작해 지중해의 모든 역사를 간직한 영욕의 땅이 되었다.
BC 5C 경, 그리스 동맹체는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아테네를 중심으로 딜로스 동맹을 결성했다(BC 478년). 바로 이 섬에서, “페르시아 왕의 영지를 토벌하고 그들이 입힌 피해를 보복한다.”라는 명분을 걸고... 에게 해를 앞마당으로 삼은 14개의 동맹 도시국가는 규약에 따라 군선 제공, 수병 파견, 동맹 기금 납부 중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폴리스들이 기금 납부를 선택해 결과적으로 해군력이 강했던 아테네로 하여금 그 기금으로 더욱 강한 군선과 수병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딜로스 동맹의 영향력을 장악하게 도와주는 꼴이 되었다. 아테네인 10인으로 구성된 신전자금 관리인들은 동맹국에게 납부해야 할 기금 액수를 통보하고 그 기금은 딜로스 섬 금고에 보관했다. 그러다 BC 454년, 노골적인 동맹의 맹주로서 우월감을 나타낸 아테네는 금고를 아테네로 옮겨갔다. 그리고 아테네 최고의 권력자 페리클레스 주도하에 동맹 기금을 전용해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파르테논 신전과 아테나 여신상을 건립했다. 제국의 면모를 보인 BC 5C 경의 그리스는 바로 이 섬에서 시작된 딜로스 동맹에 의해 전성기를 구가했고 안정된 국제 질서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비록 동맹 금고가 아테네로 옮겨갔지만 딜로스는 여전히 지정학적 이점으로 알렉산더 대왕 시절, 로마 시대에도 국제무역 도시로 번창했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 시절에는 지중해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국제도시답게 여러 인종이 모여 살았다. 멀리 페니키아, 시리아, 이집트 등지에서 온 무역상과 금융 자산가들이 많았다고 한다. 좁은 미로로 연결된 집터들은 2,0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의 시각으로 보아도 상당한 재력가들의 주택임을 알 수 있다. 정원을 장식하고 있는 모자이크는 문양과 색감이 아직도 너무나 뚜렷하다. 로마 시대를 끝으로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다는데 특별한 보호를 받지 않은 모자이크임에도 그 생생함은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이 주택 단지의 백미는 단연 <클레오파트라의 집>이다. 이집트 여왕의 집이 아니라 헬레니즘, 로마 시대에는 이 이름이 아주 흔했기에 붙여졌을 뿐 특별한 의미는 없단다. 그저 이곳을 발굴한 프랑스 고고학자들의 취향인지 모르겠다. 이 집에는 두 개의 조각상이 서있다. BC 2C 경의 부부상이다. 아쉽게도 둘 다 머리와 손 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그 당시 정원에 이런 걸 세우는 것이 유행이었는지 모르지만 요즘도 저렇게 큰 입상을 세우는 일은 쉽지 않다. 몸통 부분은 거의 원형이 남아 있는데 자태로 보아 생활의 여유와 풍요가 느껴진다. 몸매가 풍만하지만 결코 천박하지 않은 정숙한 아내와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부인을 사랑했을 남편의 그림이 쉽게 그려졌다. 박물관 조각상에서는 별로 느낄 수 없었던 삶의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진다. 주택지 가운데에 물 저장고 유적이 남아 있는데 아주 근사하다. 여러 개의 저수조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미적 감각까지 고려한 멋진 아치형 수문이 각각 설치되어 있다. 겨울 한철만 비가 내리는 이곳에서는 물을 확보하기 위한 이런 공공시설이 필수였을 것이다. 개인 주택도 물탱크가 있었다고 한다.
주택가를 벗어나니 커다란 극장 유적지가 나타났다. 규모는 상당하지만 너무나 심하게 훼손되어 안타깝다. 지금까지 내가 본 야외극장 중 가장 형편없다. 그러나 객석의 돌이 거의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복원만 된다면 본토에 있는 에피다우로스 극장에 뒤지지 않을 좋은 문화재가 될 것 같다. 실지로 어느 일본 건축가의 글을 보면 이 폐허의 극장에서 강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목소리가 너무나 멋지게 울려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반원형 객석의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딜로스 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짙푸른 에게 해가 호위 군사처럼 섬을 감싸고 있다. 저녁 무렵, 서늘한 바람이 불면 아름다운 옷으로 정장한 클레오파트라 부부 같은 시민들이 이곳에 모여 연극과 음악을 즐기고 토론과 연설을 들었을 것이다. 신과 더불어 삶을 향유했던 이 섬 시민들의 서사적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아고라의 왼편, 신전과 아폴론 거상이 있었던 지역으로 갔다. 아고라에서 신성지역으로 들어가는 대로는 지금도 옛 영화를 느낄 정도로 넓고 뒹굴고 있는 돌들도 범상치 않다. 김경자씨가 훼손되기 전의 상상도를 보여주는데 어제 본 학술원보다 멋있는 신전들이 줄지어 서 있다.
딜로스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섬의 신화를 알아야한다. 언제나처럼 제우스가 (이번에는 백조로 변해서) 레토라는 여신을 겁탈해 임신을 시켰고 헤라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해산을 도와주지 말 것이며 도와줄 경우 응분의 복수를 하겠다고 경고한다. 해산할 곳을 찾아 헤매는 레토를 가엽게 여긴 제우스는 떠다니는 딜로스를 고정시켜 그녀를 도와준다(여기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겨우 섬에 정착한 레토는 이 섬 유일한 작은 호숫가에서 출산해 쌍둥이 자녀를 얻는다. 그들이 태양신 아폴론과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다. 심신이 지쳐있던 레토는 자신이 무사히 출산만 하게 된다면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제물을 받치게 해주겠다고 서원을 했기에 딜로스는 아폴론 신앙의 중심지이자 신탁이 이루어지는 영험한 장소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곳은 그리스 전역의 모든 이들이 앞 다투어 제물과 귀한 성물을 봉헌했다. 이 거리 양쪽에는 그 봉헌물들이 보관된 신전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또 딜로스의 주신은 아폴론이지만 다른 신들도 자유롭게 섬겨져 이 섬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킨토스 산 주변에는 국제도시답게 이집트, 시리아 신들의 신전도 발견된다. 비록 무너진 신전들이지만 아직도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상 돌들이 많이 눈에 띈다. 특히 거대한 남근석은 많은 궁금증을 유발시키며 건재하고 있다.
1C 말, 에게 해의 무역 항로가 변하면서 딜로스는 상업적 지위를 잃고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 후, 무인 섬이 되다시피 한 역사적 명소에 중세의 베네치아, 오스만투르크가 들어와 자신들의 건축물을 짓기 위해 이곳의 신전 석재들을 다 실어 갔다. 현재의 딜로스는 완전한 유적지로 인간 거주를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관광객은 낮 동안 찾아왔다가 일몰 전에 나가야 하고 단지 유물 관리자와 소수의 고고학자만 거주가 허락된다.
아폴론 거상이 서 있던 곳은 흔적만 남아있다. 드디어 이 섬 최고의 볼거리 사자상이 보인다. BC 7C 경, 낙소스 인들이 봉헌했다는 사자들은 일제히 레토가 출산했다는 연못 터를 바라보고 있다. 16 마리였다는 사자상은 이제 4마리만 남아있다. 박물관에 4~5마리가 있고... 마모가 심해 사자라기보다 날씬한 허리를 가진 치타에 가깝다. 딜로스를 홍보하는 사진에 꼭 등장하는 이 사자들이 석양을 바라보는 뒷모습은 이 섬의 운명을 한 컷으로 표현하는 것 같아 애잔한 허허로움이 묻어난다.
연못은 1925년까지도 존재했었는데 모기 떼가 창궐하여 발굴단이 견딜 수 없어 메워 버렸단다. 인기있는 두 신의 출생지라 이 섬을 신성하게 여겨 어떤 출생도 장례도 금할 정도로 엄격했던 곳을, 그것도 실질적 신의 탄생지를 모기 때문에 없애버렸다니... 그 당시 발굴자들의 뇌 구조가 궁금하다. 초라하고 불결한 늪으로 변한 성지를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난다.
현재 그리스가 겪고 있는 경제적 재앙은 아폴론 신의 노여움일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이 든다. 세계 최초로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가 일어난 근원지는 믿기 힘들지만 바로 이 딜로스다. 딜로스 동맹으로 최대 금융 세력을 형성한 이곳 신전들은 신자들이 받친 금, 은으로 돈놀이를 즐기다 동맹국가 10곳으로부터 빚을 갚지 못하겠다는 선언을 당했다. 그 당시 새로운 신흥강국 마케도니아가 해상패권을 장악하면서 에게 해 주변 도시국가들은 극심한 교역량 감소로 경제적 자립도가 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2,000여 년이 흐른 지금 또 다시 그런 사태가 재연되고 있는 그리스를 보니 그냥 우연 같지만은 않다. 그 때와 달리 현재 그리스 경제의 먹구름은 외적 요인보다 내부적 포플리즘의 결과라니 이보다 더한 아폴론의 복수가 또 어디 있을까?
한 나라가 몰락하는 원인은 복합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의 비극은 군부 독재가 끝나고 좌파 사회당 정권이 들어서면서다. 그 당시 총리의 취임 일성은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줘라.”였다. 다른 유럽보다 복지 정책이 미약했던 상황에서 분배와 복지는 당연한 문제였다. 하지만 아무런 산업 기반도 없는 상황에서 일자리 창출만을 위해 끝없이 부채를 늘려갔다. 현재 그리스의 국가 부채는 GDP대비 143%이다. 우리나라 외환위기 당시 국가 부채 비율이 GDP의 18.6%였던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쉽게 인식이 된다. 61세에 은퇴한 그리스 인이 퇴직 후 받는 연금은 재직 월급의 95%. 연금 천국 국가다. 또 탈세와 부패가 만연해 4-4-2 탈세 수법이 정통법이란다. 세금 10 중 4는 탈루하고, 4는 세금공무원 뇌물 주고, 2는 국가에 납부하는 법.
내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크게 느낀 두 가지의 교훈이 있다. 첫째는 환경 보존이다. 지구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경이롭지만 너무나 빠른 속도로 황폐해지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터질 듯 불어나는 인간이다. 생각해 보면 지구에 사는 동물 중 가장 무모한 기생충은 인간이다. 생존을 위해 하늘부터 땅속까지 괴롭히지 않는 곳이 없다. 자연은 늘어나는 인류를 부양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고 그래서 죽어가고 있다. 단순한 환경보호 운동이 아니라 지구 인구가 반으로 줄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현재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자국민 인구증가 정책을 편다. 인구 감소는 국가와 민족의 존망을 가르는 중요한 잣대라며 애국심에 호소해 다자녀 정책을 유도한다. 세계를 하나의 국가로, 한 운명공동체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너무나 이기적이다. 모두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인간을 계량화하고 자본의 일환으로 생각하기에 비극인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몇 푼의 원조를 하면서 그 나라가 가진 자원 빼앗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선진국 국민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펑펑 쓰면서 배출하는 환경오염 물질을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거의 만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모든 피해는 오로지 그들 몫이다. 지구 오지로 들어가 선한 그들의 삶을 보면 정말 미안한 마음뿐이다. 어떤 문명의 이기도 없이 가장 기본적인 삶을 사는 그들은 성자에 가깝다. 내가 지구인으로 살면서 유일하게 훌륭한 일을 했다면 아들 하나 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인지하는 나로서도 그들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인류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진화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물론 환경에는 유익하지 못한) 끝없이 만들어내며 지구 운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예정된 길로 갈 것이다. 불나방처럼..... 그러니 지구를 살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용자를 줄이는 것이다. 중국이 이렇게 거대한 자원 소비국가가 되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지구는 평온했다. 그러다 14억 인구의 경제소비 규모가 커지면서 세계는 떨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모든 악행의 근원지인 서구가 새삼스럽게 중국의 비도덕적 자원 싹쓸이를 문제 삼는 것도 낯간지럽다. 지구를 살리는 방법은 인구를 줄여 자연으로 하여금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주어 자정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면 지구는 풍요롭게 장수할 것이다.
두 번째는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은 중독이다. 마약보다 무서운.... 인간은 필요에 의해 국가를 만들고 정치인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 정치인은 국민의 대변자라는 권력을 갖고 또 그 권력의 달콤함에 매료되어 다른 경쟁자들로부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대책 없는 포퓰리즘을 쏟아낸다. 퍼주기식 정책, 복지는 나중에 온 국민의 피고름이 되어 돌아온다. 전 사회가, 국민이 복지 의존 체질화로 바뀌면 문제 해결이 불가능해진다. 인간은 어리석고 불안전한 존재라 형편이 좋아 10을 주다가 사정이 나빠져 5를 주면 섭섭함을 넘어 분개하게 된다. 10이 이미 자신의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악성 포퓰리즘의 예가 바로 그리스다. 자신들의 국가부도설을 믿지도 않고 지식인들조차 그리스의 주변 바다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와 가스를 빼앗기 위해, 혹은 화석 에너지 시대가 가고 나면 태양 에너지 시대가 올 것을 대비해 전 세계가 탐스러운 그리스 태양 에너지를 차지하기 위해 벌리는 음모론이라고 말한단다. IMF와 유로 존이 사상 최대 규모의 1,100억 유로 구제 금융을 지원해 주는 대신 긴축재정을 요구한다고 연일 데모다. 지금까지 국제사회가 그리스에 지원한 돈은 빛 탕감 분까지 합하면 3,800억 유로(570조원), 국민 1인당 3,000유로(약 5,000만원)이다(우리는 외환위기 때 IMF으로부터 195억 달러를 빌려, 장롱 속 금반지까지 팔아 약속한 기일보다 3년 빨리 갚았다). 공무원 노조가 제일 먼저 임금 삭감과 구제금융 반대 시위를 했다. 세계는 이제 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어 그리스 부도는 유럽 전체를, 전 세계를 흔들 것이다. 완벽한 복지 정책이 이루어져 모든 국민이 균등한 대우와 분배를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달콤한 이상이다. 계급 타파와 균등한 분배를 위해 인류는 공산주의라는 훌륭한 사상을 만들었지만 결국 실패한 사상이 되었다. 평등을 관장하기 위해 더 지독한 독재자가 생겨 인간성 자체가 말살되는 기형적 사회가 만들어졌다. 경쟁력을 잃은 경제는 분배를 할 수 있는 파이를 키우지 못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상향된 복지지 하향 평균화된 복지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약자를 우리가 돌봐야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다. 인간은 동물이기에 어떤 방법을 써도 무리를 따라가지 못하는 소수의 허약자는 나오게 되어있다. 그들을 제대로 따뜻하게 돌보는 것이 우리의 의무지 그들과 같이 된다는 것은 진정한 평등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의 많은 신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자신들의 후손들을 내려다보고 있을까?
박물관에는 규모에 비해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만큼 이 작은 섬의 중요성을 대변하는 유물들이다. 하지만 심하게 파손된 것들이 많고 로마시대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박물관 구경을 끝으로 딜로스 섬을 떠났다. 앞으로도 전문 고고학자의 손길이 필요한 딜로스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옛 영화로웠던 시간들을 재현할 수 있을까? 김경자씨가 봄에 오면 이 섬 전체가 노란 야생화로 덮여 아주 멋진 곳으로 변한다고 알려준다. 이제 인간들의 금은보화도 필요 없이 이곳 신들은 스스로 아름다운 꽃들을 봉헌하고 있나 보다. 멀어져 가는 딜로스를 보면서 에게 해의 중심이었던 과거의 향수를 다시 확인했다.
미코노스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버스로 섬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7~8월 성수기에 비하면 여행자가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골목을 메우고 있다. 해수욕장 2곳을 가 보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반나체로 파라솔 밑에 누워 지중해의 햇살을 만끽하고 있다. 파라다이스 해변은 호라 지역에서 꽤 떨어져 있는 해수욕장으로 상당히 은밀한 곳임을 직감할 수 있다. 밤이면 젊은이들이 모여 그들만의 향연을 벌이는 곳이라는데 지구별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분위기가 완벽한 자유로움을 보장하는 내밀한 약속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세계 유명인들이 많이 찾는 장소라며 현지 가이드가 이름을 읊어댄다. 대체로 유럽 축구 선수들 이름이 많다. 우리는 가볍게 맥주 한 잔씩을 주문해 마셨다. 하지만 모두 벌거벗은 사람들 사이에서 햇볕이 무서워 완전 무장을 한 우리는 애꾸눈 마을에 불시착한 두눈박이 외계인들이다. 낯설고 소통되지 못하는 문화가 불편하다.
호라 지역과 이렇게 숨어 있는 해수욕장을 제외하면 미코노스는 황량한 돌섬이다. 척박한 자연환경, 특히 빗물 이외 어떤 생활용수도 확보할 수 없는 곳이다. 기록에는 이오니아 인이 이 섬에 처음으로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시대에 따라 여러 지배자들이 스쳐갔지만 관리자를 상주시키기 어려워 모두에게 관심 밖의 땅이었다. 오죽하면 17C 들어 겨우 성직자와 주민회의에서 통치자를 선출했겠는가? 딜로스가 번성할 때 가깝게 있다는 이유로 잠시 주목 받았고 17C 해적의 소굴이 되었을 때, 그들의 약탈품을 수출해 번 돈으로 잠시 풍족할 때가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궁핍한 섬이었다. 현재는 영혼의 완벽한 자유를 추구하는 자들의 향락의 섬이며 딜로스 관광을 가기 위해 머무는 중간 기착지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 문명의 뿌리가 없어 고매한 정신을 추구하기는 어려운 태생적 운명의 땅인가 보다. 상주 주민은 7,000여명을 넘지 못하고 대부분의 호텔과 상가 주인들은 여름 한철 장사를 하고 떠난단다.
우리는 이 섬에서 그나마 역사의 향기가 남아 있는 아노메라 지역으로 갔다. 높은 곳이라 지금은 멈춘 풍차 하나가 서있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는 미코노스가 가장 아름답고 선명하다. 미코노스의 상징이 된 카토밀리 언덕의 5개 풍차와 호라 지역의 하얀 집들이 바다와 어울려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다. 자연 앞에 서면 인간은 누구나 겸허해지지만 가끔은 신을 능가하는 무언가를 이루려하는 욕망이 부풀려지기도 한다. 그 현장이 바로 미코노스가 아닐까? 신이 포기한 구차한 자연을 인간의 손으로 이런 풍광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오늘 일정 마지막 장소 탁시아르쿠스 수도원을 방문했다. 미코노스에는 교회가 360여 개가 있단다. 물론 대부분이 개인 내지는 상징적 의미만 있는 교회지만 이곳은 멋진 종탑이 있는 수도사들이 거주하는 성역이다.
예배실은 전형적인 비잔틴 교회의 분위기가 역력해 엄격하고 무겁다. 하지만 지성소를 가로막는 이코노스타스는 러시아 정교회식이다. 전통 그리스 정교회 이코노스타스는 허리 정도 오는 낮은 단으로 지성소 내부가 보이는데 이곳은 완벽하게 차단시켜 놓았다. 가이드 말이 이곳도 여느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터키와의 독립전쟁 당시 그리스 인의 구심점이 되어 많은 사상자가 났던 곳이란다.
마 사장님이 이제부터 자유 시간을 가지라면서 저녁 식사비를 나누어 준다. 선희부부와 같은 방을 쓰는 상민씨와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섬 탐험에 나서려 하니 비가 내렸다. 처음에는 무시할 정도였지만 곧 우산 없이는 걷지 못할 지경이 되어 버렸다. 할 수 없이 해변 가까이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 먹는 것을 즐기기로 하고 마음껏 시켰다. 어차피 잘 알지 못하니 이것저것 다양하게 주문하면서 메뉴판에 있는 가장 비싼 스파게티를 시켰더니 종업원이 눈을 크게 뜨고 재차 확인한다. 그러니 더 궁금하다. 마 사장님이 주신 돈을 초과했으니 심했나? 결과는 대성공 ! 내 팔뚝만한 새우 2마리가 올라와 앉아 있는 멋진 스파게티였다. 맛도 최고였다. 모를 때는 비싼 것이 정답이라는 정설을 확인하면서 모두 행복해 했다. 시킨 음식마다 양도 많아 늦게 합류하신 교장선생님 내외분과 함께 먹어도 남을 정도였다. 좋은 사람들과 멋진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즐기는 미코노스의 밤! 빗소리까지 예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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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2일(제 4 일) - 불굴의 의지의 섬, 산토리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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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은 1층 주방에서 새어나오는 향긋한 빵 굽는 냄새를 맡으며 눈을 떴다. 나를 위해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느끼니 너무 행복하다. 누구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주부로 오래 살다보니 이런 느긋함은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 생각이 난다. 나도 마음껏 어리광부리는 것이 허락되었던 유년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처럼 밀려온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하지만 신기하게 우리가 움직이려 하면 멈추어 준다. 오후 산토리니행 배를 타기 전까지 자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오늘은 항구를 벗어나 무조건 호라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올라온 반대쪽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상가를 벗어나 위로 올라갈수록 작고 소박한 현지인들의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집들이 나타난다. 지붕과 벽을 서로 맞대고 비탈에 위태롭게 서 있는 집은 서글플 정도로 허름하다. 해풍에 빛바랜 낡은 빨래가 짠하다.
역시 해풍과 햇살에 젊음을 소비한 여인들이 분주하게 아침을 열고 있다. 계단까지 하얀 칠이 된 길은 좁고 미로처럼 엉켜 있다. 문이 굳게 닫힌 집들이 많고 집을 빌려주겠다는 팻말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부겐베리아가 활짝 핀 집들 사이에서 작은 노천극장을 발견했다. 아주 소박하지만 주민들 문화생활의 한 축을 담당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선희 부부가 2년 동안 갈고 닦은 스포츠 댄스를 선보이면서 관객 없는 극장을 독차지했다. 동현이 아빠의 활짝 웃는 행복한 얼굴을 보니 나까지 즐겁다. 여행은 쉽게 자신을 내려놓게 하고 환한 대낮에도 별똥별을 보게 한다. 위대한 일은 평범한 행복이며 인간의 일들이려니.....
골목마다 어찌나 고양이가 많은지 내가 그들의 구경거리가 된 것 같다. 고양이 사랑에 일가견이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리스 섬 어느 곳이든 고양이가 많고 섬마다 고양이의 특별한 도민성이 있단다. 콕 집어 설명하기 힘들지만 얼굴, 털 빛깔, 눈초리 등이 다르단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코노스의 고양이를 어떻게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건강 상태도 양호하고 그만하면 예의도 있고 인간에 대한 비굴함도 전혀 없어 보인다. 온순하며 사진 찍히기에도 익숙하다. 그래서 에게안이라는 고양이 품종이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나보다. 아몬드형의 초록빛 눈동자에는 깊은 지중해의 물결이 숨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86년 11월 초순, 이 섬에 와 글을 썼다. 하루키는 그리스의 조용한 여러 섬을 찾아다니면서 글을 많이 썼는데 이 섬에서 태어난 소설이 그 유명한 <노르웨이의 숲> (우리나라에서는 <상실의 시대>로 번역되었다)이다. 관광객이 다 떠나간 겨울에 와 소설을 쓰고 싶어 몸이 안달을 하고 몸이 언어를 찾아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열정으로 단숨에 400자 원고지 900매를 채웠다.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아무리 일본인이지만 주인공 와타나베의 전형적인 일본 남성의 성격 묘사에 감탄했었다. 또 이 책을 접한 시점이 나도 일본에서의 6년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라 불쑥불쑥 일본 생활이 그리웠던 때였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백화점 옥상에 있는 아이들 놀이터에 대한 묘사 장면에서는 눈물도 흘렸다. 비 오는 날, 노란 비옷을 입은 아들이 놀이기구 사이를 뛰어다니며 행복하게 웃던 웃음소리와 그 모습을 보며 우산 위로 떨어지던 빗소리를 즐겼던 그 순간이 너무도 그리웠었다. 일본적인 표현으로 가득 찬 소설이 전 세계 젊은이들의 허무, 상실을 대변하는 책이라는 찬사는 매우 놀라웠다.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이런 우울한 일본적 자화상에 세계인들이 깊이 공감한다는 사실이 참 의외였다.
하루키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 동네 어디 쯤 있는 연립주택에서 낮에는 열심히 글 쓰고, 밤이면 비탈진 계단을 내려와 해변 근처 바에서 칵테일을 즐겼다. 날씨 좋은 날은 바다에서 갓 잡아온 생선이 항구에서 즉석 판매되었는데 그걸 사다가 풍로에 석쇠를 올려놓고 구워먹었다. 단조롭고 규칙적인 하루하루를 보내며 열심히 쓴 그 소설은 그의 이름을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단숨에 올려놓았다. 일본 풍경과 너무나 다른 이곳에서 전혀 흔들림 없이 정교한 일본 감성의 끈을 놓치지 않은 그가 새삼 놀랍다. 선희와 단둘이라면 수소문해 그 연립주택을 찾았겠지만 다른 일행도 있고 나도 나이를 먹었는지 이제 그런 호들갑이 싫다. 지금 내가 누비고 있는 골목들을 하루키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으리라는 상상만으로 충분히 즐겁다.
가게에서 파는 기념품들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반영한 예쁜 것들이 많기는 하지만 가격대비 그 가치는 그다지... 기념으로 붉은 천연 돌로 된 목걸이를 하나 샀다. 걷다보니 드디어 5개의 풍차가 서있는 카토밀리 언덕까지 왔다. 많은 사람들이 미코노스 최고의 장소로 뽑아줄만한 풍광이다. 내 카메라에도 멀리서, 가까이서 찍은 이곳 사진이 가장 많이 저장되어 있다. 현재는 이 섬을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지만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섬 최대의 일꾼이었다. 이 거대한 풍차는 주변 섬들의 밀까지 다 빻아 주었단다. 풍차와 얼굴을 마주한 곳에 리틀 베네치아가 있다. 툭 튀어나온 해변 바위 위에 성냥갑 같은 집들이 동양적인 장식이 돋보이는 이층 목조 발코니를 갖고 있어 색다른 이국적 풍경을 자아낸다. 이태리 베네치아를 연상시켜 붙여진 이름인지 잠시 이곳을 차지하고 있었던 베네치아(16~17C)지배 시절에 생긴 집들인지 확실치 않지만 파도에 몸을 마냥 맡기고 위태롭게 서 있는 모습이 애잔하다.
점심은 리틀 베네치아가 한눈에 들어오는 식당에서 하기로 했다. 미코노스에 들어오는 관광객 모두가 선호하는 최고의 명당자리라는 노천에서 낭만적인 식사를 즐기려 했건만 갑자기 세찬 비가 내려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문어 구이부터 시작된 정찬은 아주 훌륭했다. 식사가 끝나니 또 하늘이 깨끗하게 개였다. 제우스도 동양의 기 센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나보다. 좁은 미로를 즐기며 더 걷다가 산토리니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나왔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 했지만 바다는 그리 거칠어 보이지 않는데 우리를 태울 배는 30분, 40분이 지나도 오질 않는다. 결국 2시간 늦게 나타났다. 하루키가 미코노스를 떠나는 날도 바람이 몹시 불어 비행기가 늦게 떴다. 소설 원고로 배 불룩해진 여행 가방을 내려다보며 그는 아주 짤막하게 “잘 있어라. 미코노스 !” 라고 했다. 나도 그 못지않은 포만감 깃든 가슴을 안고 멀어져가는 미코노스에게 말했다. “영원히 행복해야 돼 ! 미코노스 !”
그리스는 재정난으로 이 섬 국유지 3분의 1을 매물로 내놓았다. 곧 어느 돈 많은 투자자가 이곳에 에게 해 최고의 관광단지를 조성하겠지... 어떤 경우라도 이 섬이 세계인들로부터 영원히 사랑받는 멋진 장소가 되길 바란다. 하루키는 다시 올 것을 염두에 두었기에 평상시의 인사를 했지만 난 다시 오기 힘들 걸 알기에 내 축복을 바쳤다.
배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기대에 부푼 산토리니행이 아니란 걸 알았다. 배의 흔들림이 심상치 않다. 피레우스 항을 떠날 때처럼 큰 배가 아닌 산토리행 작은 배는 파도를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난 배 멀미를 심하게 하는 편이라 엄청남 공포가 밀려왔다. 무조건 자리에 앉아 눈을 꼭 감고 내 몸이 최대한 긴장을 풀도록 애를 썼다. 여기저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여행자의 미덕은 그저 참는 것이려니.....’
그래도 기나긴 고통 끝에 드디어 산토리니에 도착했다. 멀미를 심하게 한 상민씨는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모든 인생사가 그러하듯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나 보다. 그저 배에 몸만 실으면 그림같은 산토리니에 갈 수 있으려니 하고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호된 신고식을 치룬 것이다. 가이드 경자씨는 미리 멀미를 할 수 있다는 말을 일부러하지 않았단다. 경험상 미리 이야기를 하면 손님들이 너무 신경을 써서 더 멀미를 많이 하더란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보니 내가 상상했던 산토리니가 아니다. 검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아주 낯선 곳이다. 버스를 타고 검은 절벽을 옛 대관령 고개를 넘듯 올라갔다. 그 순간 !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산토리니다 !! 두꺼운 구름 사이로 은빛 햇살이 폭포처럼 바다로 쏟아져 내리고 그 바다는 힘찬 청어 떼처럼 일렁이고 있다. 내가 오르고 있는 절벽 끝에는 하얀 집들이 커다란 요새처럼 도열해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카 오디오에서는 야니의 <산토리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가이드 경자씨가 우리에게 주는 센스있는 선물이다. 그리스 출신 뉴 에이지 음악의 거장, 야니의 산토리니를 들었을 때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것처럼 씩씩하고 장엄한 도입부가 상상 속의 산토리니 이미지와 연결되지 않았었는데 이곳에 와 보니 비로소 충분히 이해된다. 점층적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한순간에 전부를 다 펼쳐 보이는 극적인 풍경을 야니는 음악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산토리니는 흔히들 알고 있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장소만은 아니었다. 극적인 감동이 있다. 그것도 아주 색다른...
여행을 다니다가 거대하고 호방한 자연 앞에 설 때면 내 존재의 미약함을 인지하면서 행복한 복종을 서약하게 된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절대자의 존재를 느끼며 그의 품에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면서 작아지는 기쁨을 누린다. 그런데 이곳은 인간이 신을 이겼다. 집요하고 무모한 인간은 모든 것을 날려버린 절대자가 실수로 남겨놓은 한쪽 귀퉁이 땅에 붙어 살아남았다. 그리고 보란 듯이 두 손만으로 천국을 일궈냈다. 산토리니를 오기 전에는 단지 이곳의 풍광에만 관심이 있었지 지리적인 특성은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그저 화산섬, 플라톤이 말한 전설 속의 아틀란티스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라는 정도의 지식만 있었을 뿐이다.
이곳은 그리 단순한 섬이 아니다.
신은 3,600여 년 전, 화산 분출로 섬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이 상황을 제주도와 비교하자면 백록담이 터져 섬 전체가 공중 분해되고 백록담 기슭만 고리 모양으로 남았다. 그리고 백록담 안쪽으로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상상하면 그것이 바로 산토리니다. 이 정도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이제 전설의 땅이 되었다고 신도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시 돌아와 포기하지 않고 남은 지형을 십분 이용해 더 멋진 곳으로 만들었다. 절대자가 경악할 정도의 천국으로..... 절벽 위쪽으로 완전히 올라와 산토리니 전체를 조망했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들이 부르는 눈물어린 환희의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는 야니의 <산토리니> 선율로 구체화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옆에 있는 선희에게 “신에 굴복하지 않은 인간 승리 최고의 장소다.” 라고 속삭였다.
저녁 식사는 이 섬 끝, 이아에 예약이 되어 있었다. 그곳의 일몰 감상을 염두에 두고 예약을 했을텐데 배의 연착으로 이미 날은 어두워진 상황이다. 그래도 예약이 되어 있으니 이아까지 가기로 했다. 산토리니의 중심 마을 피라에서 이아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바다에 가까운 옛길로 가는데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댄다. 어둠에 잠긴 산토리니는 7~8월 태양에 모든 것이 말라버린 듯하며 하얀 집들만 어둠 속에서 푸른 보랏빛으로 부각되어 보인다. 나무들은 바람에 넋을 놓고 흔들리고 검은 바다는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카 오디오에서는 이런 상황과 관계없이 지극히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그 조합이 절묘하게 감성을 자극한다. 멀미에 지친 일행들도 너무 조용하다. 이 상태로 영원히 달렸으면 좋겠다.
이아에 도착해 식당까지 이동하면서 대충 이 마을을 구경할 수 있었다. 오밀조밀한 좁은 골목에는 예쁜 기념품 가게가 대부분이다. 귀엽고 앙증맞은 동화 속 세상에 들어온 것 같다. 사람들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일시에 나왔는지 몸을 비집고 다녀야 할 정도로 복잡하다. 미코노스보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분위기다. 그 유명한 카스트로 식당에 도착했을 땐 바람이 더 심해졌다. 야외 식탁에 세팅된 모든 것들이 날아다니고 심한 한기를 느낄 정도로 춥기까지 했다. 예약된 비싼 요리가 나왔다. 두툼한 스테이크와 예쁜 디저트까지..... 하지만 대부분 배멀미 끝인지라 일행 중 누구도 식욕을 보이는 이가 없다. 모두들 먹지는 않고 바람에 날아다니는 냅킨, 식탁보, 물컵 등의 물건들을 붙잡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도 이 난감한 상황을 재미있는 이벤트로 여기는 듯 즐거워한다. 오로지 마 사장님과 가이드 경자씨만 죽을상을 하고 있다. 이렇게 책임진 자와 책임 없는 자의 차이는 극명한 것이다. 결국 너무 추워 더 있을 수가 없어 일찍 일어났다. 마 사장님 왈, “낭만과 궁상은 백지장 한 장 차이입니다.” 너무 상심해하며 반팔 옷만 입고 떨고 있는 마 사장님께 내 머플러를 둘러 주었다. 추위를 덜어주기 위함보다는 위로랄까? 날씨와 상관없이 행복한 우리들의 심정을 따뜻하게 전하고 싶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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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3일(제 5 일) - 자발적 고립감이 달콤한 산토리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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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묵은 엘 그레코 호텔은 정말 예쁘다. 지중해의 낭만을 건물 자체가 듬뿍 안고 있다. 사랑스런 살구빛, 흰색, 파란색이 어우러진 건물 앞으로 진분홍 부게베리아가 한창이다. 클래식한 그리스 여신들이 부조된 방갈로식 건물이 달콤한 휴식을 보장해 주는 듯하다. 어제의 사납던 바람은 어디로 갔는지 맑고 청명한 하늘이 기분 좋은 하루를 예고한다. 붉은 암석으로 유명한 레드 비치를 본 후, 산토리니에서 가장 높은 프로피티일리아에 올랐다. 정상 부근에 18C에 지어졌다는 수도원이 있었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내부는 볼 수 없었지만 다양한 색깔의 응회암으로 쌓은 담이 퍽 인상적이다. 최근에 보수가 되었는지 너무 말끔하다. 이 언덕에 서면 산토리니의 지형적 특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좌측으로는 화산 폭발로 생긴 칼데라에 바닷물이 들어와 내해를 이루고 우측에는 화산 폭발 이전의 땅이 완만한 평원으로 남아있다. 미코노스와 비교하면 섬 전체에 골고루 마을이 발달한 편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경작지도 제법 보이는데 대부분 포도밭이다. 산토리니의 포도밭은 참 흥미롭다. 포도 덩굴을 세워서 키우지 않고 뱀또아리처럼 둥글게 말아 키운다. 덩굴을 땅에 바짝 붙여놓은 것은 그만큼 바람이 심하다는 증거이다. 일년내내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곳에서 포도가 자란다니 신기하지만 비밀은 바로 토질에 있다. 기공이 많은 화산석이 낮과 밤의 심한 온도 차이로 생기는 안개의 물방울을 잡아두어 포도를 키우는 것이다. 이 섬 전체 생산량은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 화이트 와인이며 향기 좋은 포도주가 생산된다. 품질이 좋아 상당히 고가의 포도주란다. 뜨거운 태양이 당도 높은 포도를 키우는 것이다. 중국 투루판에서도 불지옥 같은 더위 속에서 지상 최고의 포도가 자라고 있었지만, 말라비틀어진 뱀 허물 같은 저 덩굴에서 신의 물방울이 자란다니 보고 있어도 믿기 힘들다.
산토리니는 여러모로 나를 놀라게 한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아름다운 섬이라기보다 특이한 지형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으며, 지혜롭고 창의적인 인간 삶의 결정체가 숨어있는 곳이다. 척박하고 혹독한 자연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산토리니는 더러운 웅덩이 속에 핀 연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덕을 내려와 아랫마을 피르고스를 구경했다. 산토리니 제3의 마을이라는데 관광객도 거의 없어 아주 한적한 곳이다. 현지인의 조용하고 소박한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점심은 포도밭 한가운데 있는 식당(피르코스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창밖으로 넓은 산토리니 평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곳이다.
식사를 끝내고 선사 박물관으로 갔다. 작은 섬에 있는 박물관이라 큰 기대 없이 들어섰는데 유물은 아주 훌륭했다. 오전에 레드비치로 이동하면서 슬쩍 본 아크로티리에서 발굴된 것들로 화산 폭발이 있기 전, BC 17C 이전의 유물들이다. 아크로티리는 현재 발굴과 함께 정비 중이라 개방을 하지 않았었다. 도저히 석기, 청동기의 유물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예술적 수준이 뛰어났다. 대체로 호방한 선과 힘찬 느낌의 그림들이 눈에 띈다. 날렵한 제비의 그림이 많은 것이 이채롭다. 특히 각종 토기의 문양은 미노아(크레타) 문명권임을 나타낸다. 항아리의 형태도 다양한데 여자의 유두를 연상시키는 모양과 새의 주둥이를 흉내낸 것이 시선을 끈다. 고도의 해학적 표현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유물로 보아 그 당시 이곳의 주민들은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청동 거울과 구리로 만든 장식품들은 수입된 선진 유물일 것이다. 이곳이 지중해의 중요한 해양 무역의 전진기지였음을 말해준다. 집안 벽을 장식했던 아름다운 벽화에서 상당히 높은 문화적 수준을 엿볼 수 있었다.
박물관을 나오니 햇살이 어찌나 뜨거운지 케이크 같은 하얀 집들이 녹아내릴 듯하다. 우리도 지쳐 피라의 앞바다가 멋지게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마 사장님이 오늘 저녁 식사를 또 이아의 카스트로 식당으로 예약했단다. 어제 그 유명한 이아의 일몰을 보지 못했으니 다시 가야하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식당까지 그곳을 예약한 것은 과잉이다. 특히 카스트로 식당은 이아의 홍보 사진이나 전문가 사진에 꼭 찍히는 장소다. 그만큼 위치가 좋아 이아의 일몰을 보기 위해 모인 모든 관광객들의 로망인 식당이다. 이런 이유로 식당의 요리 값에 비싼 자리 값까지 포함되어 있어 우리 같은 패키지 여행객에게는 과한 곳인데 2번씩이나 간다는 건 예정에 없이 무리한다는 것이니 마음이 편치 않다.
테마로 여행 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처음에는 다른 여행사보다 비싼 가격에 놀라 망설이지만 여행을 끝내고 나면 모두 팬이 되고 이 여행사에 중독된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라고 묻는다. 처음에는 구구절절 설명하려고 애썼지만 지금은 “한 번 해보시면 압니다.”로 요약한다. 꼭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테마 직원들의 마음이 고맙다.
여행은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베푸는 축제라고 생각한다. 여행에 관한 문구 중 “열심히 산 그대 ! 떠나라 !”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여행지에서 만큼은 일상의 이해타산이나 자질구레함을 잊고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즐기고 싶다. 그런 면에서 테마는 완벽하게 “즐기세요 ! 모든 건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으니 당신의 감성을 마음껏 표출하세요.”하면서 무언의 속삭임을 들려준다. 좋은 호텔, 맛있는 식사를 넘어서 내 여행의 감성을 이해해 주는 진심어린 서비스에 어찌 감동받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다보니 몇 번 여행을 하고 나면 가족같은 생각이 들어 이렇게 과한 지출을 보면 진심으로 걱정이 된다. 모두 이런 여행사는 오래오래 남아 번창해야 하는데 망할까 무섭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한다. 대한민국에서 여행자가 여행사를 걱정해 주는 곳이 테마 말고 또 있을까? 선희 부부가 마 사장님께 호된(?) 충고를 하고 있다.
이아로 이동해 저녁식사 전까지 자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어제 식당 위치는 알아두었기에 걱정할 일은 없다. 산토리니에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상상했던 낭만은 피라가 아니라 이아에 있다. 검붉은 절벽, 하얀 집, 하얀 성당, 눈 시린 푸른 문과 창, 뜨거운 태양, 은빛 바다, 한가로운 요트, 젊은 연인, 인간의 욕망과 허영, 자발적인 달콤한 고립감 등등이 내재된 꿈속의 장소가 바로 이아다. 선희부부와 정한 곳 없이 마냥 걸었다.
이아에는 정착된 삶이 없다. 관광객이 밀어닥치는 5월 정도부터 10월까지는 좁은 마을이 사람들로 넘쳐나지만 성수기가 지나면 모두 떠나간다. 소수의 사람만 남고 모든 상점은 굳게 문이 닫힌다. 조상 대대로 살면서 뼈를 묻고 가문을 지키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키우는 장소와는 거리가 멀다. 집 주인들조차 이곳을 고향으로 만들지 않는다. 모두 바람처럼 와서 낭만을 꿈꾸며 찰나의 휴식을 즐기다 매정하게 떠나버린다. 그 매정한 건조함이 화랑에 걸린 그림 속에 한결같이 고여 있다. 겨울 이아는 미친 듯 불어대는 바람 속의 쓰레기와 주인 없는 개들만이 주인이 되는 음산한 죽은 마을이 된단다. 현재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풍경이다. 집을 대여한다는 작은 간판들이 내걸려 있다.
걷다보니 이아의 또 하나의 상징인 요새 터까지 왔다. 요새는 그 흔적만 조금 남았을 뿐 폐허의 장소인데 오히려 그 느낌이 완벽한 이곳의 경치와 대비되면서 묘한 운치가 있다. 비잔틴 제국 내지는 낙소스 지배 시절의 유적을 보니 비로소 산토리니의 긴 호흡이 느껴진다. 이곳에서 보는 일몰도 훌륭해 많은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벌써부터 진을 치고 있다.
레스토랑으로 오니 이곳도 식당을 중심으로 많은 인파가 몰려 있다. 화려한 부겐베리아로 덮힌 핑크빛 식당은 모든 집들의 화룡점정이다. 많은 사람들을 뚫고 식당으로 들어서려니 뒤통수가 가렵다. 인간의 본능적 허영을 꽉 채워주는 장소다. 마 사장님은 여행사를 차리기 전,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왜 멋진 장소에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에는 항상 서구인들만 앉아 있을까?’ ‘왜 동양인 패키지 여행객은 한 끼 배만 채우는 허름한 식당만 이용할까?’를 많이 생각했었단다. 급하게 볼거리만 찾아다니는 것이 여행은 아닌데 말이다.
꼭 최고 등급의 화려한 호텔, 최고급 식당이 아니라도 여행지의 추억을 업그레이드해 줄 요소는 비싼 돈을 지불하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마 사장님의 여행 철학이다. 오늘 메뉴는 해산물구이다. 모두 만족해한다. 구름이 두꺼워 일몰은 50점짜리였다. 그러나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분위기만으로도 너무 행복한데..... 맑은 화이트 와인 잔에 담긴 노을만으로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낭만은 충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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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4 일(제 6 일) - 화산섬 산토리니의 심장에 뛰어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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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날씨가 너무 좋다. 아침 식사 전 호텔 주변을 산책하다가 공사를 하느라 땅을 다 파놓은 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곳은 산토리니의 지층이 선명하게 다 들어나 있었는데, 화산재가 오랜 시간의 압력으로 응회암으로 변해 여러 겹으로 쌓여 있다. 이렇게 약한 지반 위에 세워진 예쁜 집들이 새삼 걱정스러워진다. 종국에는 터키의 카파도피아와 같은 지형으로 변할 운명의 땅이다. 그래도 인간은 또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을 것이다.
아침 식사 후 칼데라 바다 한가운데 있는 화산섬 네아깜메니로 갔다. 출발 전부터 꼭 수영복을 준비하라더니 오늘을 위해서였다. 화산섬을 구경하고 따뜻한 온천수가 샘솟는 곳에서 수영을 할 계획이란다. 배를 타고 30여 분만에 섬에 도착했다. 먼저 온 관광객도 많아 섬은 꽤 소란스럽다. 섬은 어떤 생명체도 볼 수 없는 바위섬이다. 산토리니를 통째로 날려버리고도 용암은 수시로 바다를 뚫고 계속 분출되었다. BC 1620년의 대폭발 이후, 마지막 폭발은 1926년에 있었다. 메마르고 거친 현무암 자갈길을 올라가니 여기저기 크고 작은 분화구가 나타난다. 정상 부근의 분화구에서는 미약하지만 유황 냄새가 나는 수증기가 올라오고 있다. 지구의 지형을 설명 할 때면 흔히 몇 만 년, 몇 억 년 단위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전혀 현실감이 안 느껴지는데, 이곳은 현재 진행형으로 지형 변화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두 이 거친 지구의 속살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을 보니 아름답고 거대한 것만이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란 걸 다시 한 번 느끼겠다. 플라톤이 말한 아틀란티스가 산토리니라면 이곳 어디쯤에 포세이돈 신전이 있었을 것이다. 섬 중앙 가장 높은 곳에 신전이 있었다고 했다. 플라톤도 대폭발이 있고 난 후, 1,000여 년 뒤에 태어난 사람이니 아틀란티스의 이야기는 전설을 토대로 썼을 것이다. 하지만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근거 없는 낭설은 아니기에 직접 와서 지형적 특성을 보고나니 그 전설을 믿고 싶어졌다. 전설은 인류의 역사이며 모두가 공유 할 수 있는 낭만이 있지 않은가?
이 화산섬에서 바라보는 산토리니의 풍광은 정말 근사하다. 절벽에 붙어있는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검은 섬과 그 섬을 장식하고 있는 하얀 집들 참으로 선명한 색채가 대비되는 극적인 아름다움이다. 섬 한쪽으로 바다에서 온천수가 솟는 장소에 배가 멈추자 비키니 수영복의 서양인들이 일시에 바다로 뛰어든다. 이런 장면에서 확실히 동양인들은 세련되지 못하다. 나부터 수영복 차림이 영 불편하다.
내 나이에 에스라인을 뽐낼 일은 없지만 벗은 몸을 남에게 보인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래도 수영복은 입었겠다, 푸른 바다를 보니 청춘이 발동해 뛰어들었다. 말할 수 없는 짜릿한 환희가 온몸으로 퍼져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러대며 바다를 마음껏 즐겼다. 온천수는 그리 뜨겁진 않지만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이라 신기하기만 하다. 오랜만에 근육을 마음껏 풀고 나니 날아갈 듯 상쾌했다.
지금은 산토리니로 들어오는 대형 여객선들이 대부분 신 항구로 들어오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부에서 오는 모든 배는 피라 마을 바로 아래에 있는 작은 항구로 들어왔다. 그리고 마을까지 걷거나 아니면 말을 타고 600여 개의 계단 길을 올라갔다. 지금은 그곳에 케이블카가 생겨 많이 편해진 대신 나귀를 타고 올라오는 것이 관광 코스로 자리를 잡았다. 점심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서 올라올 때는 당나귀를 탔다. 나귀들은 키도 작고 온순해 특별한 재미는 없었다.
사람 태우고 오르내리는데 이력이 난 나귀는 스스로 알아서 힘들면 쉬기도 하고 도착 지점에 와서는 멈추어 선다. 완벽하게 감정이 배제된 나귀의 행동이 너무 성자 같아 내가 어렵다. 이 계단을 재미로 걷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별로 현명한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말똥과 먼지가 너무 많아 절대 유쾌한 경험이 될 수 없다. 악취도 장난 아니다.
말타기를 끝으로 이제 산토리니와도 이별이다. 크레타 섬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 선착장으로 왔지만 배는 또 연착이다. 이리 날씨도 좋은데.... 결국 예정 시간을 훨씬 넘긴 밤 9시 30분경에 이라클리온에 도착했다.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멀미는 하지 않았다. 늦게 온 탓에 호텔 뷔페식당은 파장 분위기로 먹을 음식이 별로 없었다. 식사 후 잠깐 산책을 나갔다가 빨리 들어왔다.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았고 가로등조차 너무 어둡고 거리는 적막하여 안전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바람까지 지독하게 불어대는 것이 온 세상을 심판하려는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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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5일(제 7 일) - 깨어있는 자의 고향, 크레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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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왔다. 크레타다 !! 카잔차키스가 태어나고 잠들어 있는 곳 !! 나에게 있어서 크레타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크레타는 곧 카잔차키스다. <희랍인 조르바>를 읽었고 그 책은 내 인생에 한 획을 그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인간은 ‘지식으로 무장된 이성적 인간’이라는 확고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책 속의 조르바를 만나면서 그 편견은 쉽게 깨졌다. 그것도 기분 좋게, 통쾌하게..... 조르바가 머릿속에 먹물로 꽉 찬 주인공을 놀려먹고 훈계하면서 인생을 가르치는 과정을 나 또한 즐기면서 인간에 대한 지평을 넓혔다. 거칠고 무식하지만 영혼이 자유롭고 따뜻한 인간이 우리의 이상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난 그 책에서 얻었다. 그 느낌은 전율이었다. 난 사람보다 된 사람이 돼야 한다는 진정한 의미를 조르바를 통해 이해했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으로 하며 육체와 정신이 둘이 아니라는 것, 아니 육체의 언어에 충실함이 진실에 더 가깝게 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했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의 억센 손으로 내 머리통을 제대로 갈겨주었다. 교만함이 하늘을 찔렀던 내가 너무 쉽게 무식쟁이 조르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새롭게 인간 이해에 눈을 뜬 나는 카잔차키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대단한 위험에서 탈출한 기쁨, 구원의 문을 연 확신을 가졌다. 부처도 예수도 공자도 못한 것을 카잔차키스가 그려낸 조르바를 통해 나는 영적 확장을 했다. 이런 이유로 카잔차키스는 나에게 글 쓰는 사람으로서는 유일한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그 카잔차키스를 키운 대지 위에 지금 내가 서 있다.
오늘은 박물관 보기부터 시작했다. 날씨가 어찌나 더운지 아침부터 땀이 비 오듯 한다. 고고학 박물관은 호텔 가까이 있어 걸어서 갔다. 박물관 외관이 독특하다. 유물 보관과 도난 방지를 위한 본연의 의무에 충실하도록 지은 아주 실용적인 건물이다. 창살 속 박물관 ! 하지만 전시실에 들어 선 순간, 입이 벌어졌다. 전시물들이 내뿜는 통일된 기운은 삶의 찬가였다. 지금까지 내가 본 박물관 중 최고는 멕시코의 고고학 박물관이다. 그 박물관은 유물도 훌륭하지만 건물 자체도 훌륭한 볼거리였다. 현대적인 건물 한가운데에 분수가 있고, 그 분수가 있는 중정(中庭)으로 햇살이 쏟아지면 무지개가 만들어지던 황홀한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또 유물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섬세한 배치 감각은 단연 세계 최고였다. 올 봄, 멕시코를 다녀오신 어느 사진작가 분도 나랑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해 즐거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박물관은 유물 자체가 너무나 유쾌하고 또 수준 높은 예술성을 자랑하고 있다.
 미노아(크레타) 문명은 석기 시대를 벗어난 인류가 청동기 시대 절정기에 꽃 피운 문명이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청동기 시대는 대략 BC 2500~BC 1100여 년으로 본다. 크레타는 그 시기 에게 해를 아우르는 중심 지역으로 에게 문명의 중심지였다. 동굴, 움집에서 동물 가죽 옷을 입고 수렵 생활을 하던 인류가 농경에 눈 뜨고 정착과 더불어 청동(구리+주석의 합금)이라는 야금술로 혁신적인 발전을 한다. 청동기 시대는 인류가 동물과 확실하게 구별되는 즉, <만물의 영장>이라는 칭호에 합당한 발전을 구가했던 시기다. 이곳의 유물 대부분이 그 청동기 시대의 것이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대표 유물인 고조선의 즐문토기 정도만 보아온 나로서는 이 박물관은 충격 그 자체였다.
토기, 벽화, 장신구 등에서 보이는 예술적 감각은 21C의 그 어떤, 그 어느 예술가의 솜씨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또 자유분방하고 활기찬 기운은 삶을 즐기던 그들의 여유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한다. 항아리 전체를 덮고 있는 문어는 사실적이면서도 어찌나 역동적인지 지금도 그대로 스르르 항아리 표면에서 미끄러져 나올 것 같다. 도기에 그려진 그림들은 주로 주변 바다의 생물과 식물이지만 간혹 보이는 세련된 추상적 도안은 몬드리안과 로스코가 울고 갈 정도다. 이 박물관에 들어온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다면 그건 두말할 것 없이 벽화들이다. 허리가 날씬한 건강하고 멋진 몸매, 우아한 헤어스타일, 세련된 의상,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려진 벽화는 이제 막 동물 가죽을 벗어던진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벽화 옆에 <파리지엔>이라고 이름을 붙여놓았겠는가? 벽화에는 다양한 삼라만상이 그려져 있다. 크레타 인들은 유독 백합을 좋아했었는지 백합 그림이 아주 많다.
이 박물관 최고의 유물은 역시 뱀을 들고 있는 여신상이다. 관광객 대부분이 이 유물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도기를 빚은 솜씨는 다른 유물에 비해 그리 훌륭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평범한 예술품이 아니라 어떤 상징적 의미가 숨어있어 있음이 틀림없다. 가슴을 드러내고 양손에 뱀을 잡고 어떤 의식을 진행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카잔차키스는 <크노소스 궁전>이라는 책에서 이 유물을 떠올리며 대축제날 화려한 옷을 입은 공주가 왕을 비롯한 모든 국민이 모인 궁전 뜰에서 빠르고 절도 있는 몸놀림으로 뱀을 머리에 올리고 춤을 추는 정경을 실감나게 그렸다.
크레타의 종교관은 그 시대 다른 문명권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다른 지역에서는 자연과 환경의 변화에 민감해 그 대상을 신적 존재로 여기거나 또는 가상의 절대자를 만들어 맹목적 경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크레타에서는 신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보이는 경직된 사회의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그 증거가 이 박물관에 있는 행복한 기운의 유물들이다. 물론 전혀 신적 존재가 없지는 않았음을 시사하는 유물이 있기는 하지만 그 대상이 수확의 기쁨과 연계된 풍요의 여신상, 황소상, 양날도끼 정도이다.
크레타의 유물은 인류가 신적 존재를 만들고 만들어진 신에 과도한 충성을 보이면서 파생된 불합리한 도덕에 억압되기 전의 인간 본연의 낙천적이며 순수한 감성이 그대로 녹아있다. 소잔등에서 날렵한 소년이 보여주는 아크로바트 벽화는 건강한 생명의 찬사처럼 보인다. 크레타 고고학 박물관은 인간이 추구하여 다시 돌아가야 할 시대를 보여주는 인류의 이상향을 품고 있는 장소로 기억될 것 같다. 그리스 문명의 뿌리는 분명 크레타에 있다.
박물관을 나와 크노소스 궁전으로 갔다. 벌써 입장을 기다리는 관광객이 끝없이 줄을 서있고 날씨는 어찌나 더운지.... 궁전 터 입구에 아서 에번스의 브론즈가 세워져있다. 전설로 전해내려 오던 이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해 크레타 문명의 실체를 증명하고 더 나아가 서양 문명의 모체로 만들었으니 이 정도의 영광은 누려 마땅하지만 왠지 크노소스 궁전이 그의 놀이터라는 증명서를 붙여놓은 것 같다. 좀 더 젊었을 때 얼굴이 좋았을 것 같은데.... 허물어진 담 사이로 복원된 유적이 뜰을 중심으로 서 있다. 단순하지만 우람한 붉은 기둥, 검은 기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우리에게 익숙한 여느 궁전의 모습보다 오늘날의 빌라에 가까운 다층구조의 성이다. 방들은 계단을 중심으로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다. 현재는 수백 개의 방 중 몇 개만 복원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많은 방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었으며 방마다 아름다운 벽화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 채광, 통풍을 위한 과학적인 시스템이 있었고 특히 수도관, 배수 시설도 완벽해 수세식 화장실, 욕실, 세면대 등의 유적이 있어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자들마저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전망을 고려한 아름다운 베란다까지 발굴되었다.
이 궁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왕의 접견실을 보기 위해서는 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선명한 색감의 그라핀(사자 몸에 독수리 머리를 가진 상상 속 동물)이 그려진 방에는 그 유명한 석조 옥좌가 놓여 있다. 이 접견실의 옥좌를 발굴한 후, 흥분한 에번스는 그리스 왕에게 전보를 쳤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옥좌에 앉아 보시라고.....
크노소스 궁의 발굴은 역사에 기억될 세기적인 사건이며 또 고고학적으로 큰 수확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야심가인 에번스의 소설적 무대, 아니 마법의 장소이기도 하다. 1900년부터 발굴을 시작한 에번스는 1935년, 드디어 <미노스 궁전>이라는 6권의 책을 발행했다. 발굴된 모든 지식을 동원해 쓴 것으로 많은 그림, 도면, 사진을 실어 미노아 문명의 백과사전을 만들었다. 발굴된 유물, 유적도 자신의 의도대로 분류, 통합했다.
또 크노소스 궁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방 내부를 칼라로 재현하고 유물을 멋지게 배치했으며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을 다 등장시켜 그 시대의 삶까지 연출해 책에 실었다. 이 접견실도 두 번이나 다른 색으로 덧칠했다. 신화와 전설이 역사가 되면서 한 고고학자의 상상력도 십분 발휘된 것이다. 대부분 자신의 돈을 써서 복원했으며 1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복원할 때 건축 재료로 시멘트, 철골 등을 사용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오늘날, 에반스의 무례한 발굴이 비난받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미노아 문명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점에서는 선구자적 선택이었다고 그를 평가하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궁전 뜰을 중심으로 접견실과 마주보고 있는 중앙 계단 벽면에 백합꽃 왕자 벽화가 있다. 발견된 부분보다 상상해 그려진 부분이 너무 많아 에번스의 허구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회자되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미노아(크레타)문명은 지중해의 중심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과의 교류,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크노소스 궁의 수많은 창고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항아리들을 보면 그 부를 짐작할 수 있다. 왕궁 터에서는 공방도 발견되는데 이는 왕실이 직접 공예품을 만들어 수출했음을 알려준다. 또 하나 크노소스 궁의 특징은 궁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성벽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활발한 국제 교류로 다인종 집합지였지만 상당히 평화로운 사회였음을 시사한다. 왕도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을 겸한 상징적 존재였거나 반대로 막강한 해상지배권을 가진 왕이 요새를 건설하는 것보다 자신의 위대함을 평화를 사랑하는 현자의 모습으로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크레타는 개방적이고 부유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았던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중심지였음이 틀림없다. 크레타 문명 사회에서도 분명 사회적 불평등은 존재했었다고 추측된다. 또 최근 영국의 워렌 교수가 1979년 크노소스 궁 지하에서, 인간 제물로 바쳐졌을 법한 증거로 보이는 어린아이 유골을 발굴해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상당히 야만적 행위도 있었을 것으로 유추된다(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노아 문명 사회는 어렵고 힘들게 인본주의를 외치기 전에 인간 본연의 의지에 충실한 낙천적 성향을 가진 자연 일부분으로서의 삶을 살았음에 틀림없다.
아테네 왕자, 테세우스가 크노소스 공주,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이 왕궁 지하에 갇혀 있던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죽이고 제물로 바쳐졌던 자국의 젊은이들을 구했다는 신화는 단지 신화일 뿐 이 뜨거운 햇살 아래 빛나고 있는 왕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카잔차키스도 아테네에서 공부하던 중, 막 발굴이 된 이 왕궁을 보러 왔었다. 그는 이 왕궁을 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크레타는 이 궁이 발굴되면서 더 깊어지고 위대해졌으며 이 섬에 발을 디딘 모든 사람들은 핏속으로 따뜻하고 온화하게 퍼지는 신비한 힘을 의식하여 영혼이 자라기 시작함을 깨닫게 된다.” 라고 했다. 다분히 문학적인 감상적 표현이지만 이 왕궁을 보고 있자니 허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크노소스 궁을 뒤로 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산뜻한 느낌의 식당은 아니지만 어딘지 시골스러운 크레타와 닮은, 요즘 뜨고 있는 담백한 정통 지중해식 정식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푸근한 곳이다. 예상대로 특별한 양념을 쓰지 않은 양고기의 맛은 일품이었다. 부드럽고 깊은 풍미가 느껴지는 양고기는 지금까지 중동이나 중국에서 먹던 맛과 차원이 다르다. 냄새가 전혀 없어 좋았다. 볶은 밥을 포도 잎으로 싼 돌마데스도 나왔다. 약간 심심한 맛이지만 신선한 향이 좋다. 크레타의 농산물은 믿을 수 있는 100%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것이라니 샐러드에 녹색 빛이 감도는 올리브를 듬뿍 쳐 행복한 점심을 먹었다.
식사가 끝난 뒤 마 사장님이 햇살도 뜨겁고 소화도 시킬 겸 해변에서 좀 쉬다 가잔다. 식당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니 예쁜 해변이 나왔다. 운치 있는 갈대 파라솔이 해변을 따라 줄지어 서 있고 모래는 정말 깨끗하다. 참 한가롭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러나 나는 다음에 찾아갈 장소를 알기에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고 초초해져서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일행들과 좀 떨어져 얼굴을 모자로 가리고 누워 있었다. 스피커에서 경쾌한 음악이 나오니 선희와 사모님이 이곳 분위기에 취해 춤을 춘다. 두 사람은 평소 꾸준히 춤을 즐기며 배우는 사람들이라 몸놀림도 유연하고 가볍다. 이 순간을 온몸으로 즐기는 두 사람이 참 보기 좋다.
드디어 차에서 내려 앞장서서 경사진 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너무나 눈에 익은 익숙한 묘지 ! 카잔차키스다 ! 소박하고 외로운 나무 십자가 ! 어떤 의미도 담지 않은 물 속 같은 공기 ! 뜨겁기만 한 단조로운 햇살 !
십자가를 슬쩍 만지자마자 눈물이 나왔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너무 쉽게 감정을 보이는 내 자신이 싫었다. 그러나 터진 봇물은 어쩔 수가 없다. 드디어 그를 만났다. 땅 위와 땅 속. 어쩌겠는가?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묘지명을 보고 있자니 더욱 통제를 잃은 슬픔이 밀려왔다. 그리스어로 쓰여 있지만 어찌 저 뜻을 모르겠는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그래서 지독한 편견과 몰이해 속에서 외로웠던 초인. 그는 한 번도 그리스도를 놓아본 적이 없었다. 구세주를 이해하고 더 사랑하기 위해 그의 수난과 희생을 헛되지 않게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뼈 속까지 그리스도의 진정한 자식이 되고자 했기에 종교의 실체를 파고들어 위선으로 가득찬 성직자와 또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조국의 정신적 지도자들을 거침없이 풍자하고 조롱했다. 인간 몸으로 태어난 그리스도가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신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나 같은 무신론자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필력으로 쓴 책이 바로 <최후의 유혹>이다. 그러나 그리스 정교회는 이 명서를 이유로 그를 파문시켰다. 예수님에게서 신성을 빼앗은 죄로 말이다.
카잔차키스는 예수님을 모독하지도 신성함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단지 신에게 이르는 길이 그들과 달랐을 뿐이다. 크리스트교 사회에서 파문은 사회적 매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어떤 비난과 모독과 제약에도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외로움은 비수 같았을 것이다. 신념으로 의연할 수는 있지만 항상 겉돌아야 하는 신세는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외로움이 이제 내 가슴에 꽂혀 끝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색다른 경험이다. 50여 년 전에 죽은 이와 이렇게 감정이입이 되다니.....
최근 <열린 책들>이라는 출판사에서 카잔차키스 사망 50주년을 기리면서 30권짜리 전집을 냈다. 카잔차키스의 모든 것이 녹아있는 책들로 소설, 시, 희곡, 에세이, 여행기가 망라되어 있다. 카잔차키스는 ‘대중은 사이렌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했다. 잘 알다시피 사이렌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요정이다.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선원들을 유혹해 침몰 시키는 님프이다. 카잔차키스는 모든 사람이 사이렌의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에게만 들린다고 했다. 다수를 차지하는 대중의 우매함도 꼬집지만 들리는 자의 책임과 의무를 상기시키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카잔차키스야말로 깨어있는 자의 표상이었다.
카잔차키스는 두 번이나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지만 고국 정교회의 방해를 받았다. 1951년에는 스웨덴 페르 라게르크비스트에게 밀렸다. 그는 유명한 도적 <바라바>를 모델로 쓴 책으로 상을 받았다. 그 해의 노벨 재단은 마음먹고 예수를 소재로 한 작가에게 상을 주기로 했었나 보다. 극히 개인적인 평가지만 예수님 덕분에 목숨을 건진 탕아 바라바가 예수님 사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하는 상상은 정말 신선했지만 그의 필력을 카잔차키스와 비교한다는 자체가.... 그래도 그 책에서 남다른 예수의 은혜를 입었고 또 예수를 믿고 따르려고 노력해도 종교화 되지 않는 현대판 인간상을 그려냈다는 점에는 박수를 보낸다. 인류 사유(思維)형성의 출발점인 그리스에서 태어난 카잔차키스는 기질적, 체험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키워져 위대한 초인이 되었다.
선희가 다가와 나를 깨운다. 먼저 죽은 신랑 묘지에 온 마누라 같다고.... 참 주책은 주책이다. 나 죽으면 카잔차키스, 한번은 만나주려나? 묘지 너머로 푸른 에게 해가 넘실댄다. 이제는 편안한 자세로 누워 그를 키운 바다와 어떤 고뇌와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해변을 따라 드라이브 하면서 그의 잔영을 털어냈다.
이라클리온으로 돌아와 시내 구경에 나섰다. 아침에도 잠시 호텔 주변을 산책했는데 의외로 세련된 현대식 도시도 아니고 고풍스러운 운치도 느껴지지 않는 모든 것이 어중간한 몰개성의 도시였다.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스쳐가서 기력이 쇠잔해진 느낌이었다. 이 섬 최고의 과거는 고고학 박물관에 모셔두고 늙고 지친 도시는 어디다 무엇을 어떻게 배치하고 보호, 발전시켜야 할지를 모르는 넋 나간 공무원 같다.
크레타는 지도를 놓고 보면 그 위치가 너무 매력적이다. 지중해 정 가운데 있어 동양과 서양,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가 충돌, 혹은 화합, 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크레타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노아 문명기가 가장 행복한 황금기였다. 그 이후의 역사는 지리적 위치가 이점이 되기보다는 늘 누군가에게 예속되어야 했고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야 했다. BC 17C, 산토리니의 폭발로 크레타는 직격탄을 맞았다. 해일, 화산재, 유독가스는 120km 떨어진 크레타 대부분의 도시를 날려 버렸다. 그나마 크노소스 왕궁은 온전한 편이었다. 2004년 인도네시아 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가 수천km 떨어진 인도를 덮쳐 큰 피해가 났던 것을 떠올리면 그 위력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된다. 크레타 전체가 자연 재앙의 비극에 빠져있을 즈음에 미케네가 침략, 미노아 문명은 끝이 났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그리스 본토인 미케네의 침략을 시작으로 크레타는 로마, 비잔틴, 무슬림 해적, 베네치아, 터키의 지배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시내를 다니다 보면 도심의 중요한 건물 대부분은 베네치아의 유산이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을 핑계로 이 섬에 들어온 베네치아 인들은 400여 년간 이곳에 눌러앉아 주인 행세를 했다. 지중해 최고의 상인들은 이 섬의 효용성을 제대로 알아 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문화를 식민지에 이식시켰다. 지금도 석 사자가 장식된 모로시니 분수를 비롯해 교회, 관공서 건물, 정원 등 이라클리온 시내의 우아한 건축물은 대부분 베네치아 풍을 뽐내고 있다.
아드리아 해의 작은 석호에서 출발한 베네치아 명성이야 세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지만 이번 여행 곳곳에서 그들의 위세를 확인하니 새삼 어제일 처럼 한기를 느낀다. 페니키아 인들이 카르타고를 점령해서 지중해 해상권을 키웠듯이 베네치아는 크레타를 거점으로 에게 해 섬들을 복속시키고 15C 지중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베네치아가 떠난 자리는 터키가 차지했다. 잠시 크레타 자치령을 가진 적도 있지만 1913년 그리스로 편입되었다. 그리스 독립전쟁 당시만 해도 섬 인구 45%가 무슬림이었다는데 시내 어느 곳에서도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없는 것 보면 크레타 인의 터키 증오가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다.
크레타 인들은 자신들을 그리스 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터키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했을 때도 그들은 그리스 군복을 입지 않고 자신들만의 군복을 입었단다. 본토인들 역시 기질이 센 크레타 인들을 경멸해 부른다. 항상 다른 민족의 지배 속에서 차별 받으며 산 사람들의 광기에 가까운 강인함이 몸에 배여 있을 것이다. 근사한 노천 식당에서 향기로운 포도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고 아테네로 향하는 밤배에 올랐다. 뱃전에 서서 멀어져 가는 크레타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주황색 불빛에 싸인 크레타는 미친 듯 불어대는 바람 속에서 너무 작아 보인다. 유쾌했던 박물관의 유물들, 크레타의 심장이라는 크노소스 궁, 그리고, 카잔차키스 ! 작은 섬으로 품기에는 너무 큰 유산들을 생각하며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기를 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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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6일(제 8 일) - 바다에서 육지로 그리스 문명을 인도한 미케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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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경에 피레우스 항에 도착해 한식 식당으로 갔다. 이 시간에 우리에게 밥 줄 곳은 우리 동포 밖에 없다는 마 사장님의 말씀 ! ㅎㅎㅎ... 식당에 도착해서 보니 4년 전에 왔던 곳이다. 그 때 갈치조림을 참 맛있게 먹었던 추억의 장소였다. 주인 부부는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위해 육개장을 준비해 놓으셨다. 부부는 그 사이 많이 힘드셨는지 지쳐 보였고 식당 인테리어도 중국풍으로 변해 있다. 외국 생활이 쉽기만 하겠는가? 주인만큼 퇴색된 식탁과 의자를 보니 마음이 짠하다.
4년 전 아테네에서 코린트로 갈 때는 국도를 이용해 많이 막히고 멀기도 해 굉장히 지루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사이 고속도로가 생겼는지 금방 코린트 운하에 도착했다. 서쪽 이오니아 해와 동쪽 에게 해를 하나로 연결하는 운하는 여전히 강직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행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잠시 운하를 내려다보더니 금방 버스로 돌아왔다. 아침 햇살을 받은 운하로 때맞추어 커다란 화물선이 통과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특별할 것 없는 나른한 일상처럼 지나갔다. 똑같은 여행지도 계절, 시간, 날씨, 여행의 동반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니 재밌다.
4년 전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땅거미가 내려앉을 시간이었다. 깊은 단애(斷崖)속에서 푸른빛을 반사하고 있는 검은 바다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지구의 모양을 바꾼 미욱한 위대함이 진한 감동으로 몰려왔었다. 특히 같이 온 일행들의 환호성을 잊을 수가 없다. 터키를 거쳐 그리스로 넘어온 우리는 여행의 마지막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까지의 여행이 대부분 폐허의 장소에 누워 있는 돌기둥만 보면서 과거의 시간 속을 떠돌다가 밝은 조명의 화물선이 콘테이너를 가득 싣고 보무도 당당하게 운하로 진입하는 모습에 모두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었다. 여행에 지쳐있던 사람들이 현재 진행형의 역사 현장을 보면서 갑자기 생동감을 느낀 것이었다. 자신들 모두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받은 것처럼... 그런데 지금은 나부터 신선한 충격도, 감동도 없는 그저 운하일 뿐이다.
미케 네로 이동해 박물관부터 구경했다. 박물관의 유물들은 고고학적 의의나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들은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에 빼앗기고 이곳이 미케네 문명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는 정도의 것들만 있다. 이라클리온 박물관에서는 유물 자체에서 내뿜는 행복 바이러스가 느껴졌다면 이곳의 유물들은 왠지 건조하고 경직된 분위기여서 관람 내내 지루했다. 미케네 문명을 대변하는 토기의 문양도 두꺼운 선으로 표현된 기하학적 무늬가 대부분이다. <아가멤논의 가면>이라는 미케네 최고의 유물은 복제품이 놓여 있다. 진품은 아테네 박물관 특별 전시함 속에서 신비한 광채를 뿜으며 관람객들을 위엄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여성 장신구가 많은데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보다 신분의 징표처럼 보인다. 또 수많은 금속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이는 미케네의 군사적인 사회 문화를 유추하게 한다.
박물관 을 나와 드디어 성터로 올라갔다. 곧 익숙한 사진 속 사자상이 나타났다. <사자의 문>이다. 성 입구 문 위에 2마리의 사자가 기둥을 사이에 두고 앞다리를 기둥에 의지해 마주보고 서 있다. 한눈에도 이곳이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막강한 세력가의 영역임을 암시한다. 뜨거운 햇살, 우람한 성벽, 단단한 근육의 사자 상, 무거운 공기. 고압적 분위기다. 성문을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곧 원형 묘지가 나타났다.
이곳에서 미케네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곳을 발굴한 슐레이만은 엄청난 유물량에 놀라 세계 박물관의 반 이상을 채울 분량이라고 외쳤다. 트로이 발굴로 유명한 슐레이만은 1876년, 이곳을 또 발굴했다. 크노소스 궁도 에반스보다 먼저 슐레이만이 발굴하려고 했지만 땅 주인과 협상이 결렬돼 꿈을 이루지 못했다. 정식으로 고고학을 배우지도 못한 슐레이만이 이룬 고고학적 업적은 아무리 유적 훼손이라고 폄하해도 그 의미는 너무 크다. 그리고 그의 타고난 직감과 통찰력은 단순히 운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요즘 우리가 시쳇말로 하는 <꿈은 이루어진다!>의 전형적인 인물일 것이다. 커다란 우물 터 같은 곳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미케네의 역사보다 슐레이만의 안목이 더 크게 다가온다.
원형 묘지를 지나 언덕을 올라서면 바로 성터다. 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다. 유적지로 보호될 만한 것은 보이지 않고 무너진 돌덩어리만 가득하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채는 후대에 나올 아크로폴리스의 전형이다. 특히 견고한 요새의 성벽이 특징이다. 저 멀리 넓은 아르고스 평야가 보인다. 에게 해도 보인다는데 확인할 수는 없다. 넓은 평원에는 올리브와 포도밭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과거의 화려한 신화, 광기어린 전설, 부유한 문명을 기억하는 이 땅에 감도는 현재의 적막함과 쓸쓸함이 참 허허롭게 다가온다. 돌덩이 사이로 가녀리고 소심한 들꽃이 너무나도 무심하게 피어있다.
미케네는 북쪽의 아카이아인(인도-유럽어족)들이 내려와 터를 잡았다. 학자들은 대개 BC 1600~1100년 사이를 미케네 문명기로 보지만 신화에는 BC 14C 경, 아가멤논의 할아버지 페르세우스가 세웠다고 전한다. 미노아(크레타)문명이 해상 무역으로 그 세력을 키웠다면 이들은 전쟁과 침략으로 힘을 키웠다. 초기에는 크레타와 아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산토리니 폭발로 치명적 자연 재앙을 맞아 약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그곳으로 쳐들어가 크레타를 차지했다. 미케네는 크레타보다 활동 영역을 넓혀 소아시아 서부, 마케도니아 북부, 시칠리아, 이탈리아 해안지역을 식민지로 삼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펼쳤다. 해상 무역의 범위도 넓어져 이탈리아 전역에서 미케네 도기 파편이 나온다. 또 이집트와의 교류도 활발했다. 그 증거가 원형 묘지에서 쏟아져 나온 금 유물이다. <아가멤논의 가면>처럼 죽은 자의 얼굴을 가리는 황금가면은 아무래도 이집트 문명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미케네문명 당시 금의 최대 공급지는 이집트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트로이 전쟁 전설은 미케네 인들의 호전적 성향을 잘 나타내는 이야기다. 이런 극화된 전설을 포함하고 있어도 미케네 문명이 미노아 문명을 흡수해 위대한 그리스 문명으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한 것만큼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다.
성터를 내려와 ‘아트레우스의 보물창고’로 명명된 피리미드 모양의 건축물을 보았다. 죽은 자를 위한 장소라는데 정확한 자료가 없는 것을 보면 아직 충분한 연구가 안 된 것 같다. 그래도 성터에 비하면 훌륭한, 살아있는 유적이다. 군사적 강성함과 활발한 대외무역, 대도시 형성, 우수한 인적 자원까지 갖춘 이 문명의 몰락은 현재까지 수수께끼다. 다른 민족의 침략 흔적도 없이 아주 서서히 모래알 날리듯 사라졌다. 학자들은 침략자가 이곳을 점령만 한 후, 다른 곳으로 이동했거나 역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자연 재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는 설을 내놓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증거는 없다. 이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땅은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자신만의 추억에 잠겨 침묵하고 있다.
점심을 먹고 코린트 유적지로 향했다. 코린트는 여전했다. 내가 식상할 만큼.... 바람 한 점도 없는 유적지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멈추어져 있다. 박물관 유물도 심드렁하게 놓여 있다. 유물 중 반듯하고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은 로마시대의 것이고 토기류 정도가 그리스 유물이다. 여전히 이 도시의 맏형 아폴론 신전의 우람한 기둥이 이곳의 풍경을 압도하고 있다. 투박하고 땅딸한 신전 기둥은 겨우 7개(원래는 36개)만 남아 서 있지만 이곳이 아테네와 함께 그리스 문명을 견인했던 역사적 도시임을 상기시켜준다. 이 아폴론 신전 유적을 빼면 코린트는 로마의 도시였다. 바다와 가까이 있는 입지조건 때문에 코린트는 로마에 정복당할 때 처절하게 파괴되었지만 필요에 의해 더욱 거대한 도시로 재탄생 되었다. 튀니지의 파르타고와 똑같은 길을 걸었다. 인구 30만에 이르는 코린트는 로마를 대표하는 경제도시로 성장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여러 종족이 어울리는 국제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부는 향락과 나태로 연결되어 지적인 아테네인들이 조롱하는 부도덕한 코린트 인으로 낙인찍혀 졌다.
코린트 유적의 중심은 아고라다. 아고라를 중심으로 아치형 상점가의 유적이 남아있고 아고라 중앙에는 사람들이 연설하던 단상이 지금도 단단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51년 기독교 선교를 위해 이곳에 온 바울은 저 단상에서 선교 연설을 했고 또 유대인들의 고발로 단상에 세워져 재판을 받기도 했다. 바울은 이 도시에서 1년 정도 머물며 선교를 했는데 터키 에페소에 비하면 상당한 성과도 있어 특별한 애정을 가졌던 것 같다. 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크로코린트 산 정상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의 무녀들이 매춘까지 일삼는 도시의 타락에 깊은 우려를 보였던 바울은 코린트를 떠나서도 교인들에게 절절한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가 유명한 <코린도 전서>다. 코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라는 구절은 일반 가요로도 만들어져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지혜로 사랑받고 있다.
두 번째 방문으로 신선한 감동은 퇴색된 유적지지만 <페이레네의 샘>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리스 시대부터 맑은 물이 쏟아졌던 이곳은 2C 로마시대에 현재와 같은 화려한 장식의 저수조가 되었다. 우아한 아치 장식 사이로 가늘지만 지금도 맑은 물소리가 흘러나와 내 귀에 들린다. 강의 신 아소푸스의 딸 페이레네가 실수로 날라 온 원반에 아들이 맞아 죽자 비통함이 극에 달해 결국 몸이 눈물에 녹아 이 샘이 되었다는 전설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마 사장님이 나타나 지나치리만큼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으신다. “마 사장님 ! 이곳이 처음이세요?” “아니요. 여러 번 왔지요.” “감탄이 너무 과한데요?” “음 ! 멋지기도 하지만 자기 최면도 있습니다.” 아무리 신화적 신비와 역사적 호기심으로 가득한 유적지라도 두 번째 오는 이곳이 좀 지루하다. 우습게도 4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도 어찌 이리 똑같냐? 며 나무라기까지 했다. 그러니 매년 한 번 정도는 같은 장소를 가는 마 사장님 같은 분은 어떤 기분일까? 진심으로 궁금했었다. “같이 오시는 분들이 매번 다르니깐 항상 새롭지요.” 하시겠지만 그런 말은 너무 상투적이어서 짜증날 것 같다. 자기 최면이란 말이 훨씬 진솔하고 신선하다. 아무리 여행의 고수라도 직업으로 같은 곳을 여러 번 즐겁게 오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여행지의 감성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코린트를 나와 올림피아로 이동했다.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북쪽 해안을 따라 생각보다 장시간 버스를 탔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해안선을 따라 붉은 지붕의 예쁜 집들이 계속되었다. 참 평화롭고 따뜻한 풍경이다. 용재 오닐의 바로크의 비올라 선율이 딱 어울리는 저녁녘이다.
오늘 묵을 호텔은 올림피아 시내와 좀 떨어진 구릉 위에 있어서 아주 한적하고 조용하다. 우리 호텔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 통 털어도 손님은 우리만 보인다. 호텔은 전형적인 지중해 풍으로 예쁜 수영장까지 있어 선희를 포함해 일행 중 몇 분은 수영을 즐기기도 했다. 저녁을 먹고 산책 삼아 시내까지 걸어갔지만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그리스 민속 음악이 담긴 CD만 사가지고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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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7 일(제 9 일) - 진정한 그리스 정신의 기념비적 장소, 올림피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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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가 좋아선지 오랜만에 아주 깊은 잠을 잤다. 신들의 음료 넥타를 꿈에 얻어 마셨는지 몸도 원기충전이 제대로 된 것 같다. 아침을 먹고 곧장 올림피아 유적지로 갔다. 오늘날까지 4년마다 뜨거운 열기 속에 열리는 지구촌의 축제, 올림픽을 생각하면 신화와 연결될 만큼 오랜 유적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이곳은 특별한 감동을 받기에 충분하다. 너무 조용하다. 햇빛은 적당한 수분 속에서 따뜻하고 공기는 깨끗하며 우거진 숲이 뿜어 내놓은 수액의 냄새로 달콤하다. 커다란 환호성과 서구인의 진한 체취가 배여 있을 것 같은 유적지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너무 다르다. 순결한 처녀들이 성화 채집하는 것만이 이곳의 역사인 듯 단정하고 순수한 분위기다.
입구에서 곧장 만나는 김나지움(연습장)에는 억 겹의 시간이 내려앉은 기둥들이 도열해 있고 그 사이 빈 공간에는 애기 같이 사랑스러운 싱싱한 녹색의 나무들이 서있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유적지는 과거의 기억만을 간직한 폐허로 남지 않고 건강한 생명력으로 빛나는 나무와 함께 영원불멸의 공존을 택했다. 이렇게 수목이 울창한 유적지는 처음이다. 인공조림은 아닌 것 같고 어디선가 날아 온 씨앗들이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우연의 산물치고는 너무 멋진 선택을 한 것 같다. 서 있는 푸른 나무로 인해 누워있는 회색 돌들의 선명함과 존재성이 더 돋보인다. 우리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올림피아를 만끽했다.
 5C 경에 세워졌다는 초기 교회 건물을 제외하고는 기록상으로 남아있는 수많은 신전과 경기장, 분수들은 그 위치만 몇 개의 기둥과 돌무더기로 알 수 있다. 다 같은 폐허지만 호르메스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칭찬한 제우스 신상이 있던 제우스 신전은 그 중 볼 만하다. 우람한 기둥의 잔해는 역시 제우스 ! 오랜 시간과 두 번의 큰 지진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아 신의 제왕임을 말하는 위엄이 있다.
헤라 신전은 올림픽 성화 채굴로 알려져 낯설지 않지만 상상보다 너무 좁다. 이곳에서 산란된 햇빛을 모아 불씨를 만들고 그 불꽃이 여러 대륙을 거쳐 인류의 소망을 담은 상징으로 활활 탈 때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에 순진한 인류애가 스쳐간다. 몇 개의 기둥만으로 어머니 헤라는 여전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신성한 영역을 지나 아치형 통로를 통과해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경기장은 너무도 반듯하게 발굴되어 있다. 현재의 경기장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어 살짝 실망스럽기도 하다. 아무것도 담지 않은 텅 빈 공간이 부담스러워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맹목적으로 뛰면서 자신의 소리를 즐기고 있다. 관람석 풀밭에 올라서 내려다보니 경기장을 감싸고 있는 숲속에 유적지의 돌이라고 딱히 규정짓기도 애매한 돌무덤이 가득하다. 돌무덤에는 무상하다든지 서글프다든지 하는 낭만적 우울감보다 자신의 소임을 다한 역군의 용사들이 조용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초월적 평온함이 있다. 서있기를 면죄 받은 그들은 서로 의지하고 누워 햇빛을 즐기고 있다.
우리는 다시 되짚어 올림피아를 천천히 걸어 나와 박물관으로 향했다. 낮은 언덕을 올라 박물관이 시야에 들어오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곳은 꼭 와보고 싶었던 곳 중 한곳이다. 카잔차키스는 1937년(54세) 펠레폰네소스를 여행 한 뒤 <모레아 기행>이란 책을 썼다(모레아는 중세시대 펠레폰네소스의 명칭). 25년간 여섯 번에 걸쳐 펠레폰네소스를 여행한 카잔차키스는 이곳 올림피아에 와서 폐허 속 경기장 신전 등은 싹 잊어버리고, 이 박물관에 전시된 제우스 신전의 박공을 장식했던 조각상에서 옛 그리스의 영광을 보았고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그리스 인으로서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조상보다 쇠락하고 천박해진 민족적 열등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박물관 전시물은 대부분 신들에게 봉헌된 물건과 무기들이다.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바쳐진 크고 작은 유물의 양은 엄청나다. 살아남은 양이 이 정도라면 과거 이곳의 위상이 어떠했을지 쉽게 상상이 간다.
그래도 이 박물관 최고 전시물은 단연 <헤르메스>상이다. 여행자, 목동의 신 그리고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의 군살 하나 없는 단단하게 균형 잡힌 몸매는 모든 이의 시선을 오래 붙잡는다. BC 3C 경의 작품이라는데 대리석 상태가 너무 좋다. 이렇게 멋있는 헤르메스가 배다른 동생,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안고 있다. 저 귀여운 아기가 훗날 화가들에 의해 고주망태로 그려질 운명이라니 ! 아버지 제우스의 바람기로 태어난 동생을 아버지의 부탁으로 자신의 어머니 헤라 몰래 키워 줄 요정을 찾아 나서면서 동생의 슬픈 운명을 안타까워하는 형으로서의 눈빛이 압권이다.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어머니를 잃었고 질투심이 남다른 자신의 어머니 헤라의 무지비한 구박을 예감한 헤르메스의 애틋한 눈길에 모두 한 번 더 발길을 멈춘다. 저 헤르메스상이 헤라 신전에서 발견되었다니 이 또한 범상치 않은 아이러니다.
헬레니즘, 로마 시대의 석상들을 둘러보고 드디어 메인 홀 5호실에 들어섰다. 이곳이다. 정말 내가 보고 싶었던 곳이.... 다른 방보다 넓고 양쪽의 조각상으로만 조명이 집중되어 신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한쪽 은 <헤라클레스의 12고역 (苦役)>, 반대편은 <신과 켄타우로스(반인반수)의 전쟁>. 우선 신전 벽면도 아니고 지붕 밑 삼각 공간을 장식했던 조각품들이 이 정도였다면 신전 전체의 모습과 위용은 어떠했을지 상상이 되어 놀랍다. 이 조각상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를 무찌르고 그리스라는 하나의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사기가 충전해 있을 때 제작된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살라미스 해전 같은 영광된 전쟁의 한 장면을 새겼을 법한데 신화 속 이야기를 기념비로 삼았다는 것이 과연 그리스답다. 이집트의 람세스 2세가 신전마다 히타이트와의 전쟁, 카네쉬 전투로 도배를 한 것과 많이 비교된다. 카잔차키스는 이 방에 들어와 그리스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인류가 야만적 원시성을 딛고 새로운 문명 세계로 도약하는 기념비적 순간을 맛본다.
여행을 하기 전, 이 책 저 책을 뒤지다보면 너무 많은 것을 숙지하게 되어 정작 여행지에서는 신선한 감흥도 잃고 익숙한 것으로 착각해 맥 빠질 때도 있다. 하지만 모르면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볼 수도 있다. 지금과 같은 경우가 그렇다. <모레아 기행>을 읽지 않았다면 이 방의 감동을 절대 느낄 수 없다. 문제는 카잔차키스의 감동과 나의 감동이 일치하게 되면 오롯이 내 것이 아니라는 불쾌감이다. 나도 켄타우로스가 라피타이족 여인을 쫒아가 유방을 움켜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동물적 본능으로 이글거리는 야만적인 육체의 힘을 온 몸으로 느꼈다.
이 메인 홀의 최고의 작품은 <헤라클레스 12고역>의 한 장면이다. 끝없이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 불운한 헤라클레스가 대지의 무게를 혼자 감당하고 있을 때, 헤라클레스 뒤에 나타난 여신이 그윽한 눈빛으로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대지를 슬쩍 받혀주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신의 모습인가?’ 그리스 인들은 저런 자비로운 신을 칭송하면서 자신들의 조상도 함께 기린 것이다. 유한(由限)한 생명체인 인간들보다 영혼불멸의 신들을 새겨 동시대의 승리를 역사적 사건의 시간 울타리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기념비로 승화시켰다. 그리스 인들의 이런, 순간을 영원으로 승화시킨 예술혼도 멋지지만 그런 정신을 찾아 읽을 줄 아는 카잔차키스는 더 멋지다. 내가 그리스 인이 아니니 카잔차키스 같은 심오한 영혼의 울림을 느낄 수는 없지만 그리스 인들의 지혜롭고 신중한 지적 덕목은 이 방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화창한 햇살이 눈부신 박물관 밖으로 나오니 최면 속 세상을 거닐다 최면사의 손가락 소리에 놀라 현실로 돌아온 것처럼 모든 것이 낯설다. 올림피아를 끝으로 이제 펠레폰네소스를 벗어나 리오안티리오 다리를 건너 그리스 본토로 들어간다. 2004년에 완공된 이 다리는 현대 그리스의 최대 공학적 자부심으로 내가 알기로는 알렉산더 이후 가장 큰 자랑거리지 싶다. 우리의 인천 대교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어딜 가나 있는 관광엽서에 몇 천 년 전 유적과 나란히 꽂혀 있는걸 보면 말이다.
이오안니나는 중부 그리스의 최대 도시로 이오안니나 주의 주도다. 도시의 첫 인상은 높은 빌딩 숲은 없지만 현대적이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찾아간 구시가지는 전혀 다른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튼튼하고 우람한 성벽에 둘러싸인 낡은 거리는 틀림없는 이슬람 국가를 연상시켰다. 낡은 모스크와 건축 양식이 오스만 터키 지배 시대의 잔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조용하고 아름다운 팜보티스 호수를 끼고 있어 누적된 시간들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이오안니나는 로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도시가 형성되었고 11C에 도시 방어 성벽이 형성되기 시작해 현재의 성벽은 오스만 터키 지배 시절, 알리 파샤(1788~1822년)가 완성했다. 알리 파샤는 전설적인 인물로 일개 산적으로 시작해 콘스탄티노플의 술탄에게 많은 선물 공세를 한 끝에 이 지역 파샤가 되었다. 알리 파샤는 잔인한 인물로 알려졌지만 유능한 면도 있어 15C 경부터 이 도시에 발달한 상업과 교역을 체계적으로 확대시키고 현재의 알바니아 일부까지 영토를 넓히기도 했다. 특히 학문과 예술에 대한 관심도 많아 이오안니나(그 당시는 자니나)를 문화 중심지로 키웠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현재의 이오안니나는 대학도시로 알려져 거주 인구의 연령이 다른 도시보다 젊다.
 팜포티스 호수 가운데 숲이 우거진 조그마한 섬이 있다. 마 사장님이 오늘 저녁은 저 섬에서 먹기로 했다며 배를 빌려 타고 들어가잔다. 별 기대 없이 찾은 섬은 결과적으로 이번 여행 최고의 이벤트였다. 너무나 조용하고 소박한 풍경이 경이롭기까지 한 장소였다. 좁은 골목길은 하얀 돌로 포장이 되어있고 고졸한 하얀 돌담 집, 집집마다 창가에 내어놓은 앙증맞은 꽃 화분, 낡은 수도원과 종탑, 오로지 우람한 나무 한 그루만 서 있는 작은 광장, 집 앞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수줍지만 단정한 몸짓의 할머니들, 종이 한 장 떨어져 있지 않은 마을의 정갈함..... 예사롭지 않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는 품위가 느껴졌다.
이 마을의 연혁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터키 흑해 남부 해안 벽지에 살고 있는 라즈(Laz)라는 민족이 떠올랐다. 독일의 한 학자가 우연히 이 민족이 모여 사는 마을을 찾게 됐다. 대다수의 주민들이 이슬람교도였지만 특이하게 자신들만의 고유한 언어, 복식, 신화를 지니고 있었다. 영민한 학자는 이들을 관찰한 결과 한때 기독교인이었음을 알아냈다. 그리고 연구를 계속해 그들만의 문자를 개발 해주어 라즈 인 스스로 자신들의 과거와 문화에 관심을 갖도록 도와주었다. 그 학자는 터키 당국에 체포되어 태형을 당하고 영구 추방되었다. 터키는 자국의 소수민족(특히 쿠르드족)들이 이런저런 요구를 해오는 터라 골머리를 썩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떠난 뒤에도 라즈 인들은 민족의식이 고취되어 비인가 학교를 만들어 그들의 역사와 시를 가르쳤고 1999년에는 드디어 라지스탄(라즈어 사용자)의 인정을 요구하는 라즈 당이 생겼다.
이 섬도 라즈 인처럼 자신들만의 문화를 공유하는 정체성이 견고한 공기가 되어 떠다니고 있다. 이 섬은 13C, 은둔하는 수도사가 찾아들기 시작하면서 수도원들이 생겨났다. 성 니콜라스 수도원(13C), 세례자 요한 수도원(16C), 기적을 일으킨다는 성모 마리아의 이콘이 보존되어 있는 자비의 성모 수도원(15C), 성 판테레이몬 수도원(17C) 등이 있다. 한편 오스만 터키의 술탄은 알리 파샤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두려움을 느껴 이 도시를 포위하고 그를 잡아들이려고 했다. 알리 파샤는 그 때 이 섬으로 도망을 쳤지만 결국 1822년, 이곳에서 살해되었다. 이런 연유로 알리 파샤를 따라 이 섬에 들어온 일행들의 후손이 현재까지 몸을 낮추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즈 민족과는 반대로 이슬람교도들이 그리스정교 신도가 되어..... 여행은 이래서 즐겁다. 무엇을 상상하든 너무 멀리만 가지 않는다면 역사를 재해석하고 성찰할 수 있는 지적유희를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마을을 돌아보고 있는 중에 너무 어두워져 수도원 깊숙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무런 조명 시설도 없고 인기척 없는 귀곡 산장 같은 수도원이 무섭다. 저녁 식사 메뉴가 멋지다(?). 개구리 튀김이 나왔다. 의외로 일행 대부분이 대단한 흥미를 느끼면서 거부감 없이 즐긴다. 난? 내 식성의 옹졸함이 참 싫다. 섬에서 나와 차를 타고 호텔로 갈 사람과 걸어 갈 사람으로 나뉘어졌다. 호수와 성벽 사이로 난 길은 희미한 가로등 때문에 더 몽환적인 운치가 있다. 알리 파샤의 도시는 그리스가 아닌 오스만 터키의 추억으로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리스 인들이 증오하는 터키의 문화는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새로운 혈통을 부여받아 이 나라 모자이크의 한 부분이 되었다. 문화의 근원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드라마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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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8일(제 10 일) - 그리스 속의 또 다른 그리스, 자고리와 메초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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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여행지는 색다른 그리스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가 그리스라는 나라를 떠올리면 예수님이 태어나기도 전에 건설된 유적과 신화, 아니면 에게 해의 그림 같은 섬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좀 더 그리스에 관심이 있다면 아그네스 발차, 나나 무스쿠리의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아닐까? 이 증상이 심해 TV 속 그리스인들이 연금 축소 반대 시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갑옷과 투구, 잠자리 날개 같은 여신들의 옷을 입히고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스는 유럽 최고의 산악 국가이다. 전 국토의 80% 이상이 산이고 그 산은 험준하고 계곡이 깊다. 우리에게 설악산 풍광이 있듯이 그리스의 석회암 지대 산들은 오랜 세월이 빚어낸 조각으로 가득하다. 오늘 동양에서 온 관광객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찾아가기도 힘든 그리스의 산악지대로 들어간다.
호텔을 나오니 작은 미니버스 두 대가 서 있다. 대형 버스로는 가기 힘든 곳이란다. 그래서 더 강한 호기심으로 마음이 설렌다. 차는 곧 핀토스 산맥 깊숙이 들어섰다. 장대한 산들이 끝없이 연결된 풍광을 굽어보면서 구불구불 힘겹게 한참을 오르니 저 멀리 동상이 하나 보인다. 제법 큰 동상으로 등짐을 진 여인은 가냘프게 보이지만 키가 크고 깊은 눈을 가진, 신념에 가득찬 인상이다. 나치 독일 점령 당시 게릴라 활동을 했던 유명한 여인이란다. 그리스는 2차 대전 당시 16만 명 이상 사망했다. 대부분 독일의 곡식 수탈에 의한 기아, 추위가 원인이었다. 총을 든 남자 게릴라보다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한 여성 게릴라 상이 이곳에 어울린다.
차는 모노덴드리 마을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걸어 옥시아 전망대까지 간다. 지붕까지 하얀 돌만 사용하여 지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은 사람의 흔적이 낯설 정도로 정갈하다. 푸른 나무 몇 그루를 제외하면 이 마을을 이루는 모든 것은 돌이다. 하지만 차가운 느낌보다 흰 석회암이 주는 보드라운 기운은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핀토스 산맥 중간에 위치한 이런 마을들을 <자고리>라고 하는데 46개 정도가 있다. 모두 산 속 깊숙이 숨어 있지만 아름다운 전통 석조 집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유럽인들에게는 건강 식단과 더불어 트레킹 또는 휴양지로 유명하다. 한여름의 관광 시즌이 지나간 마을은 마을 사람들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조용하다. 마을 돌길을 지나 좁은 오솔길을 통과하니 작은 수도원이 나타났다. 모두에게 잊혀진 듯한 수도원은 이미 자연의 일부가 되어 바람을 따라 멀리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수도원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드디어 옥시아 전망대다. 장엄한 깊은 계곡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온다. 1997년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계곡의 깊이는 가늠하기 힘들다. 그랜드 케년과 같이 바람, 물, 시간을 부모로 둔 형제지만 그 개성은 판이하다. 육신을 다 드러낸 그랜드 케년이 맹목적인 원초적 욕망을 품고 있다면 이곳은 소복소복 전설 같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애잔하면서도 따뜻하지만 고단한 일상적 삶을 전한다. 벼랑 끝에 매달린 길은 너무 위험하다. 그래도 일행들은 아이들처럼 즐거워한다. 생각지도 않았던 스릴 넘치는 모험을 온몸으로 즐기고 있다. 이 완고하게 닫혀 있는 세상에도 예쁜 야생화는 다가올 겨울을 힘껏 밀어내면서 긴 햇살을 즐기고 있다. 수선화 닮은 맑은 노란 꽃은 이 가파른 절벽을 더욱 외롭게 한다.
긴 여운을 뒤로 하고 자고리의 명물, 돌다리들을 보러 나섰다. 어제 묵은 호텔 로비에 비치 되어있는 책에서 깊은 계곡을 연결하는 많은 돌다리 사진을 보았다. 한결같이 돌다리들은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져 박물관의 환한 조명 속에서 빛나는 멋진 유물보다 더 근사한 예술품처럼 보였다. 그 많은 다리를 다 볼 수는 없고 2개만 보겠단다.
먼저 코코스의 아치형 다리로 갔다. 다리 아래를 흐르던 물줄기가 완전히 사라진 빈 계곡에 무지개를 꼭 닮은 긴 아치형 다리가 걸려 있다. 커다란 호형(弧形) 다리는 한 눈에 봐도 보통 솜씨가 아니다. 산골 마을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이 아니라 공학적 기초가 탄탄한 전문가의 지휘 아래 만든 것 같다. 이 자고리 마을들은 오스만 터키가 지배하던 18~19C에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도약을 했는데 그 부의 원천은 직조 가내수공업이었다. 오스만 시절, 발칸반도 전역에 건설된 다리의 명성은 지금도 자자하니 이 다리도 그 중 하나일 것 같다. 이렇게 훌륭한 다리니 비극적인 전설 하나 없겠는가? 그 중 하나가 다리 건설 책임자는 견고한 다리를 만들기 위해 자기 아내를 제물로 바치고 그 위에 다리 기초를 세웠단다. 누군가의 희생 없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전설은 없는 법이다. 멀리서 보면 가느다란 둥근 선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니 정교하고 튼튼해 앞으로 몇 백 년도 문제없어 보인다.
다시 차를 타고 3개의 아치가 연결된 다리로 갔다. 푸른 숲에 싸여있는 우아한 자태의 다리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모두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고운 나비가 내려앉아 있는 듯했다. 다리는 극히 현실적인 실용적 구조물이다. 하지만 이 다리는 비현실적 환영 같다.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다. 몸이 약했던 여자는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지상에 남은 남자는 신에게 간청한다. 연인을 딱 한 번만 보게 해 달라고.... 너무나 간곡한 오랜 기도에 마음이 움직인 신은 나비 같은 다리를 만들면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리하여 다리는 완성되었지만 그 남자는 힘든 노동으로 늙고 지쳐 완성된 다리 위에서 그녀를 기다리다 죽고 만다. 그 후, 보름달이 뜨면 이제는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된 남녀는 이 다리에 와 회포를 푼다. 그 때, 푸른 달빛 속에서 다리도 나비가 되어 그들을 등에 태우고 춤을 추며 날아다닌다. 물론 나의 상상이지만 이런 전설을 가졌을 법한 로맨틱한 다리다.
아놀드 뵈클린의 작품 중에 <결혼 여행>이란 그림이 있다. 사랑스런 남녀가 높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그림이다. 이 다리는 분명 뵈클린 그림 속 남녀처럼 두 사람의 연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믿고 싶다. 우리는 이곳에서 도시락 점심을 먹기로 했다. 다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아 있으니 내가 만든 전설이 더 실감나고 그래서 더 행복하다. 이런 날씨, 경치를 밖에 세워두고 어두운 식당으로 들어간다면 나에게 온 행운을 발로 차버린 꼴이 될 것이다. 마 사장님 센스 최고 !! 점심을 먹고 산 속에 흩어져 있는 작은 자고리를 찾아 나섰다. 키포이라는 곳은 제법 큰 마을이었지만 여기저기 공사 중인 곳이 많다. 동양인까지 찾아 올 정도로 명성이 자자해졌으니 숙박 시설이 필요할 것이다. 이 마을에서 내려다보이는 산들은 하나하나가 커다란 성이며 성벽처럼 보인다. 야성적인 산들은 모두 균형 잡힌 사고를 가진 신들의 모습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미크로 파핑코라는 마을로 갔다. 너무나 조용해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다. 우리가 차를 댄 곳 바로 옆에 낡은 성당이 있다.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정원의 큰 나무, 이끼 낀 지붕, 바실리카 양식을 흉내 낸 회랑, 하얀 돌담, 윤기 흐르는 포석. 모두 무채색 같은 담담한 풍경이 나를 놓아주질 않는다. 이 외롭고 적막한 풍경이 너무 좋아 그저 앉아 있었다. 실려 오는 바람 속에 마지막 남은 여름의 열기가 건조하게 남아있다. 곧 눈으로 쌓여 깊어질 이곳 정경이 쉽게 그려진다. 이 동네도 젊은이들은 다 도시로 떠나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먼 옛 이야기가 된 듯싶다. 한때는 마을의 수장 노릇을 톡톡히 했을 성당도 이제 권위를 내려놓고 한 세대를 마감하고 있다. 낙엽이 쓸쓸한 소리를 길게 흘리며 굴러간다.
이제 오늘의 잠자리를 찾아 메초보로 향했다. 내일 갈 메테오라에 좀 더 가깝게 가고 있다. 우리를 태운 차는 점점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가을을 기다리는 산악 경치는 마지막 초록빛으로 윤기가 흐른다. 무지개까지 떠서 우리를 흥분시켰다. 마 사장님이 마이크를 잡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이제 여행도 마지막에 가까워 오고 모두 한국 식구들 생각이 나시지요?” “한국 식구들도 여러분이 얼마나 그립겠습니까?” “여기 어느 남편 분이 오늘 결혼기념일을 맞아 아내에게 꽃다발을 보냈습니다.” 모두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친다. 나도 즐거워하면서 ‘누구인지 나랑 똑같이 9월에 결혼을 하셨구나.’했다. 그 때, 마사장님이 “박길란 선생님 ! 축하드립니다.” 순간 멍~~ 해지면서 ‘아이, 이 아저씨 ! 무슨 짓을 한 거야.’ 싶다.
부끄러워 몸둘바를 모르겠다. 낭패한 얼굴로 나갔지만 막상 장미, 백합이 어우러진 커다란 꽃다발을 품에 안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마 사장님, “아니 카잔차키스 묘 앞에서는 그리 우시더니 감동을 받으셨으면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며 놀리신다. 선희를 비롯해 모두 한 마디씩 축하 인사를 건네신다. 나도 큰 소리로 “오늘 저녁 포도주는 제가 쏩니다.”하고 외쳤다. 하지만 속으로는‘아니, 자기와의 결혼을 이렇게 국제적인 이벤트로 만들 일이야?’하며 툴툴댔다. 못생긴 신랑이 보고 싶다. 심심산골로 들어 온 것 같은데 메초보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큰 호텔은 없지만 가족 단위로 경영하는 형태의 호텔은 상당히 많았다. 오기 전에 강 차장이 메초보에 무슨 국제 규모 회의가 있어 호텔 구하는데 애를 먹었다는 소리를 했었다.
이런 곳에서 무슨 국제회의씩이나 싶지만 어쨌든 조용하고 공기가 맑다. 심한 한기를 느낄 정도로 추워 난방이 필요했다. 저녁 식사는 멋 부리지 않은 소박하고 정감있는 가정식 요리였다. 정성 깃든 스프가 아주 한국적으로 구수하다. 메초보는 맛있는 포도주로 유명하단다. 생산되는 양이 너무 적어 이곳 아니면 맛보기 힘들단다. 저녁을 먹고 산 아래 시내로 내려가려 하니 비가 쏟아졌다. 그래도 모두 이 멋진 밤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산책에 나섰다. 광장은 비가 와서인지 너무 조용하다. 상점도 거의 문을 닫았고 어둡기까지 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 결국 어둠 속에서 호텔로 돌아오는 길을 잊어 버려 죽도록 고생만 했다. 밤새도록 대지를 살찌우는 비는 끝없이 내렸다. 일찍 잠자리에 누워 어둠 속에서 빛나는 꽃다발을 쳐다보고 있자니 정말 내가 멀리 와 있구나 싶다. 꽃다발과 빗소리 ! 싸~~한 그리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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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9일(제 11 일) - 은둔의 역사가 전설이 된 곳, 메테오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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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비는 완전히 물러나고 하늘은 정말 맑고 푸르다. 어제 마을을 제대로 보지 못한 아쉬움에 일찍 일어나 내려갔다. 성당 정원의 우람한 밤나무가 눈길을 끈다. 먹지 못한다는 너도밤나무의 밤이 지천으로 떨어져 있다. 내 주먹만큼 크고 튼실한데 먹을 수는 없다니.... 독이 있는 걸까? 우리 조상 같으면 무슨 지혜를 써서라도 저 잘생긴 놈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 같다.
오늘이 일요일인가? 여행을 다니면 요일 감각이 없어진다. 성당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러시아 여행 중에 본 정교회 미사가 생각나 얼른 따라 들어갔다. 실내가 어찌나 어두운지 내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성당 안은 10평이나 될까? 놀랄 정도로 좁고 값나갈 만한 성물도, 성스러운 느낌의 그림도 없었다. 산골 가난한 집 부엌 같다.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그을림과 먼지로 뒤덮인 부엌 말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사람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 갑자기 나타난 외국인을 보고 놀랐다기보다 불편함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미사에 적극 동참할 자세로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신부님까지 나를 힐끔거리고 몇몇 여자는 살기가 느껴지는 눈으로 나를 째려본다. 도저히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다. 신을 위한 예배 장소가 아니라 그들만의 비밀 집회 장소임을 인정해야 했다. 모두가 주시하는 눈길을 따갑게 느끼며 육중한 문을 열고 나왔다. 험준한 지형, 긴 겨울과 메마른 대지 속에서 폐쇄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기본 성향일거라고 이해는 하지만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메초보 사람들, 특히 검은 머리 수건을 두른 여자들의 눈초리는 잊을 수가 없다.
한국에 돌아와 메초보를 찾아보니 참 흥미로운 곳이었다. 그들의 조상은 대부분 로마에서 흘러들어온 양치기 내지는 산적들이었다. 좁고 메마른 토지에서는 1년 중 한두 달만 보리를 재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숲에서 나는 각종 버섯, 열매를 따고 숯과 목재, 심지어 눈까지 평지 사람들에게 팔아 연명했다. 그 중 산적은 쉽고 좋은 돈벌이였다. 1830년대 이 일대를 여행한 한 외교관은 “온 천지에 산적 떼와 관련한 경종으로 가득 찼다.”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들의 가장 큰 수입원은 역시 양치기였다.
발칸 지역에서 양치기의 황금기는 17~20C 초까지였다. 양치기는 현금을 만질 수 있는 사업이었고 양가죽, 양모 제품, 치즈 등의 가공품을 만들어 먼 곳까지 내다 팔아 부유한 상인으로 자리잡는 사람도 생겨났다. 양치기로 얻어 생겨난 2차 산업의 중심지가 바로 메초보였다. 그 당시로는 시대를 앞선 벤처 기업기지였다. 19C 중반까지 이 산속 마을 메초보는 놀라울 정도의 부를 누리며 살았다 (발칸의 역사 - 마크 마조워) 그러니 시셋말로 메초보 사람들은 옛날 한 가닥 했던 사람들의 후손인 것이다. 그들의 강인한 인상은 혈통에서 연유했다고 할 수 있다.
성당에서 쫓겨나 광장으로 나오니 아침시장이 서 있다. 밭에서 갓 따온 싱싱한 채소와 함께 한눈에도 중국산임을 알 수 있는 각종 공산품이 함께 팔리고 있다. 유치한 색깔의 허접한 중국산 물건들은 온 지구에 흩어져 인류의 품격을 낮추고 있다. 호텔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하고 메테오라를 향해 떠났다. 최근에 건설되었다는 고속도로가 있었지만 우리는 옛 국도를 택했다. 빨리 가는 것보다 매순간 그리스를 음미하고 싶었다. 부드러운 음악과 함께 그리스 산하는 굽이굽이 많은 신화를 껴안고 차창 밖에서 흐른다. 신과 전사가 떠난 자리에 무심한 자연이 웅성거리고 있다. 드디어 저 멀리 메테오라 특유의 암봉이 나타났다. 모두 일어서 감탄사를 쏟아내니 기사 아저씨가 메테오라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차를 세워준다. 나도 4년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이들과 똑같이 흥분했었다.
칼람바카 시내에서 우선 점심을 먹기로 했다. 메테오라 암봉이 병풍처럼 펼쳐진 것이 바라다 보이는 식당으로 갔다. 4년 전 4월, 이곳에 왔을 때는 이 일대 모든 식당이 나이 지긋한 백인 손님들로 넘쳐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식당 통 털어 손님이 우리 밖에 없다. 양고기 구이가 나왔다. 크레타에서 양고기 구이를 먹으면서 내 인생에 이보다 더 맛있는 구이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었다. 하지만 오늘 양고기 구이는 더 맛있다. 크레타 요리는 재료 본연의 맛이 그대로 살아있었다면 오늘 구이는 우리의 갈비 맛과 아주 흡사하다. 부드럽고 익숙한 양념의 맛이 황홀하다. 모두들 흡족해 한다.
먼저 메가로 메테오라 수도원으로 갔다. 현재 남아있는 수도원 6개 중 가장 크고 가장 먼저 세워진 곳이다. 1388년 건설되기 시작해 1484년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발람 수도원과 비교하면 상당히 넓다. 교회당을 비롯해 부속 건물이 많다.
수도원 입구를 통과해 바로 만나게 되는 납골당의 많은 유골은 보는 즉시 숙연해진다.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허물고 선반 위에 가지런하게 놓인 모습은 공포, 두려움보다 청빈하고 경건한 삶을 살다간 사람의 특별한 인격이 느껴졌다. 평생을 기도 속에서 산 그들에게 이렇게 하얀 유골만 남기고 옮겨간 그곳의 삶은 어떠신지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영원히 자유로운 바람이 되었다고 느꼈다. 철학자의 말대로 인간이 죽음이 두려워 신을 만들었다면 그들은 이제 진정한 의미의 무(無)가 되었을 것이다.
중앙 성당은 돔과 십자가형이 특징인 전형적인 비잔틴 양식으로 정갈한 붉은 벽돌이 인상적이다. 크레타 파 화가들이 그렸다는 내부의 벽화는 돔을 비롯해 벽 전체에 빈틈없이 그려져 있다. 메테오라 최전성기인 16C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는 전반적으로 어둡고 강열한 느낌이다. 끈질기게 이어져 온 이곳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수도원의 식당 건물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물 보관과 더불어 그리스가 외부의 침략과 지배의 힘든 시간을 보낼 때 그리스 정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정교회 수사들은 독립전쟁 때 앞장서 그리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국민과 더불어 싸웠다. 정교회가 신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수사들의 비도덕적 행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신뢰와 함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오래된 교회에는 어김없이 국민과 함께한 고난의 역사 흔적이 남아 있다. 메테오라 제1의 수도원답게 관광객도 많아 고즈넉한 분위기는 즐길 수 없다.
메가로 수도원을 나와 루사노 수녀원으로 갔다. 메테오라에서 가장 예쁜 건물이다. 좁은 바위 위에 자리잡은 앙증맞은 수녀원으로 메테오라 어디서든 돋보인다. 수녀원으로 가는 길도 조용한 오솔길을 따라가게 되어 있어 특별한 운치가 있다. 14C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이 수도원은 메테오라 수도원 중에서도 특히 역사적 기록이 없는 곳이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역사적 증거 없이 그저 입으로 전해지는 설이 전부다. 루사노라는 명칭조차 그저 루사나라는 마을에서 온 사람이 처음 이곳을 개원 했다고 소문으로만 전해진다. 이 수녀원 최고의 볼거리는 성 바바라의 초상화다. 교회 내부는 다른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크레타 파의 화가에 의해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빈틈없이 그려져 있다.
수녀원을 나와 메테오라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로 갔다. 낮과 밤이 자리를 바꾸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대여서 바람이 제법 소슬하게 불어 한기를 느낄 정도지만 상쾌한 공기 덕분에 기분은 최고다. 청명한 날씨라 발아래 칼람바라 마을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메테오라 암봉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는 수도원들이 그림 같다. 일행들 모두 조용히 앉아 내가 버리고 온 아래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위태롭게 매달린 수도원은 보고 있어도 비현실적이다. 금욕적인 삶을 지향하며 많은 종교인들은 여러 형태의 수도원을 건설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기 위해 지하로 숨어들기도 했다. 메테오라도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든 수도사들에 의해 수도원들이 세워졌다고 하나 철저한 자발적 고립은 아닌 것 같다. 누가 보아도 눈에 띄게 아니 더 관심 받기 위한 위치 아닌가? 이곳의 수도자들은 신을 향한 자신의 신념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벼랑 끝에 선 자신의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같은 형태의 수도원을 세운 것 아닐까?
기독교 수도원의 금욕과 은둔의 삶은 헬라 문화의 금욕 전통에서 시작되었다. 손으로 무엇을 만들어 완성하거나 완전하고 모범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하는 운동내지는 훈련의 의미를 가진 <아스케시스>가 기독교의 ‘금욕’이란 단어로 거듭났다. 기독교적 완전한 삶을 지향했던 금욕주의 수도자들은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인간 관계를 끊고 또 세상의 모든 문명 이기(利器)를 단절시키며 참회, 회개, 기도, 명상을 통해 영적 훈련 아스케시스를 추구했다. 이런 초기 기독교 금욕주의 수도원의 원형 모태가 이곳 메테오라다. 이런 그리스적인 아스케시스 정신이 있었기에 이슬람 국가 오스만 터키의 360여 년 지배 속에서도 정교회는 살아남았고 또 그리스 문화를 계승시켰다.
이제 메테오라는 완전히 관광지화 되어 은둔적 삶은 없다. 지상 최고의 종교적 행복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은 아토스로 옮겨 갔다. 이제 메테오라의 영적 기운은 사라졌지만 이곳이 간직하고 있는 종교적 전설과 메시지는 저 신비한 수도원 건물과 함께 영원할 것이다. 칼람바카 마을의 인간들 움직임을 상상하니 참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옛날 이곳의 수도사들도 이런 마음으로 저 아래 세상을 바라 봤을 것이다. 마 사장님을 졸라 걸어서 산을 내려갔다. 이 길 양편으로 봄에는 야생화가 지천이었는데.... 돌아다보니 멀리 보이는 메테오라가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액자 속 그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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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0일(제 12 일) - 인류 최고의 영험한 기운이 서린 곳, 델포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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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칼람바카의 밤은 너무나 생생하다. 바람 때문이었다. 여행 중 친해진 몇 분과 야외 카페에서 맥주를 마셨다. 그때 달콤한 꽃향기를 머금은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슬쩍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존재감에 모두 감탄하고 행복해 했었다. 여행 중이라 어떤 상황에서라도 행복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그 바람은 달랐다. 감미로워 너무 감미로워 일시에 모두들 가는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환한 카페에는 그리스 남자들이 모여 TV 축구 중계를 보고 있었다. 그 열기가 대단해 한 골이라도 들어가면 여기저기 카페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으로 지축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들의 환희에 찬 함성을 들으며 우리 일행 모두 즐거워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칼람바카는 너무 달라져 있다. 밤거리는 어둡고 활기가 싹 사라졌다. 모든 것이 시들해 보였다. 확실히 그리스 경제 사정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상점의 물건은 싸구려 중국산으로 덮여있고 현지인들의 얼굴이 너무 어둡다. TV 앞에 몰려있던 그 싱싱한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밤마실을 나갔던 나도 기운이 빠져 일찍 호텔로 들어왔다.
남쪽으로 다시 길을 잡아 오늘은 아테네로 돌아간다. 출발해서 조금 달리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결코 기름지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리스에서는 보기 드문 농경지가 이어졌다. 자세히 보니 목화밭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 수확이 끝난 가을빛 빈 농지가 많다. 가을비에 젖는 들판은 참 외롭고 쓸쓸하게 한 해를 마감하고 있다. 평온한 침묵이 창을 사이에 두고 평행하게 흐르고 있다. 내면으로 침잠(沈潛)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델포이 가 가까워질 때쯤, 차창 밖 풍경이 낯익다. 4년 전 아테네에서 테살로니카로 올라가면서 온천수가 흘러나오는 곳에서 잠시 멈춰 발을 담그고 놀았던 곳이다. 그런데 이곳은 그리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장소였다. 그 당시는 가이드조차 언급이 없어 몰랐었는데 이곳은 그 유명한 테르모필레(뜨거운 문) 전투가 있었던 장소였다. 우리에게 영화 <300>으로 알려진 그 전투 말이다. BC 480년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대 군단이 북으로부터 진격해 올 때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와 300인의 정예부대가 이곳을 막아 아테네로 하여금 살라미스 해전을 준비할 시간을 벌게 하고 모두 장렬하게 몰살당한 전투였다. 현재는 길이 넓혀져 별로 실감나지 않지만 고대에는 남쪽 그리스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1km, 폭 5~20m 정도의 좁은 유일한 통로였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현장에는 이제 기념 벽과 레오니다스 왕, 청동상만 서 있다. 서양 군대 최고의 지휘자라는 찬사를 지금도 듣고 있는 왕은 죽어 전설이 되었다.
조국애 ! 라는 이 신성한(?) 정신은 분명 스파르타의 산물이다. 모든 면에서 상반된 문화적 가치를 지녔던 아테네와 비교하면 오늘날 스파르타의 옛 영토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들은 그들을 과시할 어떤 기념비적 유물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을 대변하는 것은 오직 폭력, 억압, 고통, 인내가 포함된 경쟁 사회에서 형성된 맹목적 조국애뿐이다. 그 조국애가 이곳에서 처참한 최후의 항전으로 인류의 숭고한 정신이 되어 피어났다. 레오니다스는 델포이 신탁에서 “왕이 죽지 않으면 스파르타는 멸망할 것이다”라는 계시를 듣고도 기꺼이 전장으로 나갔으니 그 희생적 조국애는 불멸의 전설로 남아 마땅하다.
하지만 오늘날, 죽음으로 피어난 그 화려한 조국애가 여러 가지 기형적 가지를 치면서 점점 괴물로 변해가고 있다. 자국의 욕망을 미화시키는 비열한 수단이 되어 많은 선량한 인류의 고통이 되고 있다. 그리스의 옛 시인이 바친 시가 새겨져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스파르타의 사람들에게 가서 전해 주시오. 당신의 법을 받들어 우리들, 여기 잠들었노라고.” 나그네는 명을 받았지만 전해줄 그대들의 동포도, 명분도 없어졌다고 잠든 그대들에게 다시 전하노라고...
델포이로 향하는 길은 천상으로 통하는 문답게 비범한 기운이 느껴진다. 구불구불 산악도로는 쉽사리 자신의 존재를 드려내지 않는 성지의 상징이다. 그 옛날 그리스 전역에서 신탁을 받으러 온다는 자체가 고행이며 수행이었을 것 같다.
발아래 드넓은 테살리아 평원이 펼쳐져 있다. 가물거리는 바다까지 이어진 평원은 올리브 나무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인간의 상상력을 압도하는 은빛 올리브 숲은 그리스를 함부로 평가하지도 사랑한다고 외치지도 말라고 충고하는 듯하다. 숲 자체가 그리스 신화 같다. 무심히 씨앗을 키우고 있지만 그 씨앗은 그리스의 혼이 담겨있음을 커다란 풍경으로 말하고 있다.
먼저 박물관으로 갔다. 델포이는 그리스 최고의 신탁지였다. 신의 말씀이 필요한 이들은 최고의 예물을 바쳤고 또 그 영험함을 경험한 이들은 최상의 기념물을 세웠을 것이니 박물관에는 다양한 유물이 있다. 델포이가 지구의 배꼽이라고 생각해 만든 상징물 옴파로스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박물관에 인상적인 유물이 있기는 하지만 온전한 형태의 것은 거의 없다. 그리스의 영광과 함께한 장소이기에 로마가 지배하면서 약탈의 장소가 되었고 그리스도교 공인과 더불어 이곳은 폐허로 변했다. 심지어 19C 말까지 이곳에는 마을이 있었다. 1892년 발굴이 시작되면서 마을은 주변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곳에 유물, 유적이 온전히 남아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아폴론 신전으로 올라가는 성스러운 도로를 중심으로 전성기에는 300여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이제는 상상조차 쉽지 않은 추억일 뿐이다. 신탁을 얻기 위해 어렵게 이곳에 온 사람들이 신전과 봉헌된 기념물들이 도열되어 있는 성스러운 도로를 따라 올라와 아폴론 신전에 이를 쯤에는 이미 경외심으로 가득차게 됐을 것이다. 이스탄불 히포드롬 광장에는 초라한 모습이지만 세 마리 뱀이 엉켜 붙어있는 청동 조형물이 있다.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를 델포이 신탁 조언으로 승리한 기념으로 페르시아 군의 창과 방패를 녹여 만든 이곳의 봉헌물이었다. 그 봉헌물은 훗날 콘스탄티누스 황제(330년)에 의해 이스탄불로 옮겨갔다.
아폴론 신전은 얼마 전 붕괴 사고가 있어 관광객이 다치는 바람에 출입금지 구역이 되어 있다. 멀리서 우람한 기둥 몇 개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아폴론 신전 아래서 델포이를 둘러보니 한국식으로 말하면 명당자리인 것 같다. 건너편 높은 산에 가려 답답해 보이기는 하지만 은밀하고 내밀한 비밀 장소로는 적격이다. 두 개의 단층선이 지나는 이곳에는 약한 가스가 올라왔는데 그 가스를 흡입한 피티아(무녀)는 환각상태에서 신의 말씀을 전했고 그것을 남자 신관이 해석해 사람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신관이 전하는 내용은 에스트라다무스 예언서나 요한계시록 내용과 비슷해 해석은 결국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우리에게 소크라테스의 위대한 명언으로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도 실제는 이곳의 신탁 내용이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몸을 낮추는 겸손의 미를 일깨우는 철학자의 세련된 충고지만 이것이 신탁 내용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절실한 마음으로 간구하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온 사람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일갈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나를 몰라서 왔는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기 이전에 육신을 보존해야 살 수 있는 동물이다. 그러니 목숨을 저당잡은 신과 자연 앞에서 불안전하고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다. 이런 모호한 신의 목소리라도 듣게 되면 희망찬 예측을 품에 안고 발걸음도 가볍게 돌아갔을 것이다. 이제 그 많던 흰 이야기들은 바람이 되어 흩어지고 신화 속 희극과 비극만 남아 떠돌고 있다. 많은 이들의 염원을 들었던 대지는 이제 인류의 영물(靈物)이 되었다.
아폴론 신전을 내려와 가이아 신전으로 갔다. 델포이는 원래 대지의 신 가이아의 땅이었고 이곳을 물려받은 아들 피톤을 아폴론이 내쫓고 자신의 땅으로 만들었다. 가이아 신전은 그 형태가 여느 그리스 신전과 달리 원형이라 더 유명해졌다. 그리스 신전의 특징은 장방형이다. 여신의 신전답게 그 선이 유려해 아름답고 푸근한 감성을 일깨운다. 겨우 초석과 기둥 몇 개만 남았지만 독특한 형태가 주변 바위산과 대비를 이루고 있어 오늘날에는 델포이의 얼굴이 되었다. 비록 누워있는 도시의 잔재지만 여전히 돌덩이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빛나고 그 돌들은 이곳의 환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델포이를 뒤로 하고 겨울철 스키 족들로 북적인다는 작은 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아테네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는 자유롭게 하기로 하고 플라카 거리에서 일행들과 헤어졌다. 낮도 밤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대여서인지 거리는 명성에 비해 너무 한산하다. 거리 전체가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 가게로 포위되어 있는 느낌이다. 그리스를 기념하기 위해 선희는 지중해 노을빛을 담은 반지, 나는 지중해의 물빛을 담은 반지를 하나씩 샀다. 흥미를 가질 만한 것이 없어 지루하다. 호텔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골목을 배회하다 일행들과 함께 필로파포스 언덕을 올랐다.
이 언덕은 파르테논 신전을 위시한 아크로폴리스가 한눈에 들어오는 비밀의 장소다.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진 곳도 아니고 이 깊은 밤에 이곳까지 오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가로등 하나 없는 숲길을 걸어 언덕을 오르니 갑자기 눈앞에 환한 조명에 감싸인 파르테논 신전이 나타났다. 너무나 쉽게 시공간을 초월해 신화의 세계로 들어왔다. 모든 것을 제압하고 서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나 여신보다 제우스를 닮았다. 밤의 아크로폴리스는 낮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숭배와 선망의 땅으로 시작했지만 국운과 더불어 모멸과 질시를 받으며 상처 난 자존심으로 전전긍긍하는 아픔이 어쩔 수 없이 배어 있는 아크로폴리스 ! 그러나 밤의 아크로폴리스는 인류 유산 최고의 권위를 되찾은 품위가 있다. 조명 속에 빛나는 아크로폴리스는 젊고 따뜻하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밤에 인위적인 조명을 사용해 유적지를 밝혀놓은 곳이 많다. 신비감은 들지만 강열한 조명으로 유산들이 상할 것 같아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크로폴리스의 조명은 꼭 필요하다는 데 한 표를 던진다. 하늘의 별과 대지의 정령까지 제압하고 서 있는 밤의 포스는 그리스 여행의 백미며 인류 예술의 정점이다. 21C 그리스에 와서 죽어라 기원전 그리스만 찾다가 아쉬워하고 실망했다면 이곳에서 보는 밤의 아크로폴리스가 모두 보상해 준다. 상징적 의미가 기호처럼 나열된 그리스가 아니라 왜 그리스가 우리의 영원한 정신적 이상이 될 수 있는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경건한 침묵의 한마당을 즐긴 우리는 언덕을 내려왔다. 선희 부부, 상민씨와 함께 2005년에 신랑과 맥주를 즐겼던 레스토랑에 들러 똑같은 자리에 앉아 밤의 아크로폴리스를 더 즐기다 호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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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1 일(제 13 일) - 문인들 영감의 장소, 수니온 곶 ! - |
| 그리스 여행 마지막 날이다. 한 나라에 머무는 시간이 13일 정도면 보통 여행자로서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닌데 떠난다니 아직도 허기진 배가 아프다. 많은 곳을 보고 경험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더 크다. 아크로폴리스로 걸어 올라갔다. 꽤 이른 시간인데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4년 전과 똑같이 공사 중이다. 아니 그 때보다 판이 더 크게 벌어져 파르테논 신전은 석조와 철재 빔이 엉켜있는 기묘한 괴물이 되어 있다. 아쉬운 대로 한쪽으로 비껴 들어오는 아침 햇살로 깊은 음영이 만들어져 여신의 신전은 뿌연 먼지 띠로 몽환적이긴 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파르테논이라는 건물에 열중했지만 다시 만나니 그리스의 상처 깊은 역사가 더 크게 다가온다. 이런 선진 문명을 주도한 나라가 터키 지배 370여 년(1453~1822년)이라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370년은 가혹함을 넘어 이론적으로 말살이라는 단어가 정답 아닌가? 그런데 그 세월을 넘어선 것 보면 그리스 민족의 강인함이라기보다 인류가 만든 민족이라는 집단적 존재 방식의 완고함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아크로폴리스의 진정한 주인은 여전히 떠돌이 개들이었다. 느릿느릿 걷고 조용히 눕는 개들은 우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 유적을 지키고 있다. 이곳을 방문한 마종기 시인도 나만큼 아테네 개들의 존재가 특별했던지 이런 시를 썼다. 개 짖는 소리에 선잠이 깬 새벽녘 서양 문명의 시작이 휴지되어 날리고 어두운 개가 조상의 뼈를 씹는다. 그 위에 옷 벗고 달아나는 서양 달 날개 잃은 아이들이 무대 뒤로 사라진다.
시인도 많은 의미가 부여된 안쓰러운 파르테논 신전을 보면서 소진된 세월이 힘겨웠나 보다. 4년 전에는 에릭시온 신전에 줄이 쳐져 있어 멀리서만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신전 안까지 들어갈 수 있다. 모조품이지만 가까이서 본 6개의 처녀 상은 우아하고 아름답다.
아크로폴리스를 나와 아레오파고스에 올라 다시 한 번 아테네를 조망하는 것으로 그리스 여행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 사장님이 가 볼 곳이 남았단다.
아직 공항가기는 이르니 수니온 곶을 달려보잔다. 모두 특별 보너스에 난리가 났다. 보아도 그만, 못 보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장소를 가게 된다니 갑자기 못 보고 가게 된다면 천추의 한이라도 될 것처럼 흥분했다. 솔직히 난 수니온 곶 하면 영화 <페드라>의 마지막 장면만 떠오른다. 앤서니 퍼킨스가 바흐의 음악을 틀어놓고 수니온 곶 해안도로를 질주하면서 계모, 페드라를 부르며 절벽 아래로 사라지던 장면 ! 유난히 뜨거운 지중해 태양이 느껴지는 이 도로를 달리니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때마침 카 오디오에서는 마리아 칼라스의 오페라 <메데이아>의 아리아가 흘러나온다. 그녀의 외마디 고음이 앤서니 퍼킨스의 마지막 목소리와 중첩되어 들린다.
아테네에서 포세이돈 신전까지 가는 해변 도로 변에는 그리스 상류층 사람들의 아름다운 별장들이 그림처럼 흩어져 있다. 여기 오기 얼마 전에 전 세계의 큰 뉴스가 되었던 산불 난 곳도 보인다. 포세이돈 신전이 서 있는 위치는 가히 포세이돈답다. 포세이돈 스스로 이곳을 자신의 장소로 지정했지 싶다. 바다로 불끈 튀어나온 정수리에 신전은 튼튼한 다리를 세우고 서 있다. 어찌나 존재감이 특별한지 지구 최초의 건축물이며 최후의 건축물이 될 운명처럼 보인다. 온전했다면 더 멋졌겠지만 이 삭막한 땅 끝에 외롭고 쓸쓸하게 서있는 폐허의 유적은 영원함을 보장받았음에 틀림없다. 포세이돈은 에게 해의 모든 역사를 우리에게 말하지 않고 신전의 다리에 걸쳐 놓았다. 무수한 문인들이 왜 이곳을 유난히 사랑하는지 알 것 같다. 우리는 신전이 바라다 보이는 카페에서 차를 한 잔 마시는 걸로 그리스 여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
| 여행을 정리 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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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신문을 펼치면 그리스에 대한 기사가 없는 날이 거의 없다. 세계의 불량 채무자로 전락한 그리스는 만신창이다. 여행을 떠날 때까지도 그리 심하지 않았는데 이 글을 쓰는 동안 동네북에, 뻔뻔한 철면피 국가가 되어 버렸다. 그리스의 조용한 내륙과 그림 같은 섬들을 구경하고 온 나로서는 참 당혹스럽다. 여행 내내 2005년과는 다른 기운을 느꼈지만 경제적으로 이렇게 한심한 상황일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우리가 귀국한 뒤 신타그마 광장은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로 조용한 날이 없단다. 유럽 문명의 모태, 민주주의 탄생지, 철학의 출발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신화의 고향, ..... 이 경이로운 찬사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과거는 그저 흘러간 시간일 뿐 오늘을 사는 후손에겐 아무런 힘이 없는 걸까?
카잔차키스도 자신의 조국을 여행하면서 옛 도시국가들의 전설 같은 우아한 문명, 명민하고 독창적인 선조들의 흔적은 폐허로 남고 현재(20C 초)를 사는 그리스 인들에게 실망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오랜 식민지 국민으로 살아 한 세기가 지나갔는데도 과거를 잊지 못해 외국인에 대한 불안감 혹은 원초적 공포가 깔려있고 영리하지만 천박하고 형이상학적 고민이 없는 자신의 민족을 안타까워했다. 21C의 카잔차키스라면 현재의 그리스에게 어떤 일갈을 할까? 백인의 조상이 되어버린 그리스 인들이 세계인의 골칫거리가 된 상황을 그 역시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국 찬란한 문명을 일군 민족도 유약한 인간 본성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자존심도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 공짜의 단맛은 독이다. 젊은이들의 희망이 없는 땅 앞으로 오랫동안 이 나라는 자존심, 삶의 질은 회복하기 힘들 것이다. 어느 정치인의 입을 빌려 그리스의 사태가 인류에게 준 예언적 명언은 <정치인은 다음 선거를 목표로 하지 말고 먼 지평선을 보아야 한다.>라는 명제이다.
골병 든 현재의 그리스 사태와 분리해 내가 본 에게 해의 섬, 산골마을, 유적지와 유물들. 찬사가 오히려 불경스러울 만큼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다. 특히 크레타의 박물관에서 받은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인류의 소망인 평온한 복된 삶의 원형질이 그곳에 있었다. 유물들은 4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들의 멋진 인생을 뽐내고 있었다.
지중해의 중심에서 여러 대륙의 문명이 충돌의 모습이 아닌 자연스런 화합으로 스며들어 우리가 이상향으로 꿈꾸는 르네상스를 보여 주었다. 무가치한 이념으로 심한 동, 서양의 갈등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거칠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작은 무리를 이루고 사는 자고리 마을들은 왜 옛 그리스가 작은 도시국가들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주었고 지금도 외부의 영향 없이 소박한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의 그리스 사태도 그들에게는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것 같다.
그리스는 다양한 면모를 지닌 나라다. 특히 지형적 요소는 이 민족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좁기는 하지만 평야와 산악지대가 번갈아 나타나고 해안지대와 산악지대의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성향의 기질로 대조를 이룬다. 진취적이며 개방적인 해안 사람들에 비해 산악 지대 사람들은 여전히 3,000년 전의 그리스인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보수적이며 폐쇄적 성향이 짙다. 실지로 내가 본 그리스인들은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나의 꿈같이 로맨틱했던 그리스 여행 위로 TV에서 보여지는 광분한 신타그마 광장의 그리스인들이 오버랩 되는 것은 참 씁쓸하다. 민주주의 최대 장점은 평화로운 변화라는데 그 민주주의 발상지 국민들이 요구하는 평화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아 남의 일 같지만은 않다. 아무리 합리적인 사상과 법안이 있어도 인간 자체의 도덕적 소통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말뿐인 모래 위 누각을 짓고 흥망의 사이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알렉산더 이후 역사의 전면에 나서 본 적 없이도 인류의 지성과 상식의 출생지로서 대접 받는 그리스의 권위는 이제 회복 불가능한 박제된 신화로 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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