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세이 여행이야기

이용진 - 프랑스완주

  • 작성자 :

    테마세이투어

  • 작성일 :

    2015.08.05

  • 조회수 :

    2247

 
 이 글은 서울에 사시는 이용진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이용진님은 2015년 5월 29일부터 6월 15일까지 18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프랑스완주 여행을 다녀 오셨습니다. 글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북프랑스 테마여행의 백미
 
샹보르 성과 모나리자
- 인간의 지식과 기술로서 이루어진 불후의 명작-

1. 프랑수아1세는 프랑스왕 중 최고의 행운아
 프랑수아는 원래 정통 왕족은 아니지만 태어나서 부터 어머니는‘시저2세왕’이 되어 달라고 매일 성당에서 기도한 결과인지 청년으로 성장한 프랑수아는 루이12세의 외동딸인‘클로드’와 결혼 하였는데 그 당시 루이12세는 아들이 없게 되자 사위인 프랑수아는 왕의 후계자가 되어 어머니의 기도가 성취되는 최고의 행운아가 되었다. 왕좌에 오른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투표로 결정하게 되었는데 황금 1.5톤을 썼으나 2톤을 쓴 스페인왕‘카를로스’에게 패하여 황제(이분이 카를5세)가 되지 못하였으나, 20년이 지난후 샹보르성을 완성한 1595년에 ‘카를5세’를 초청하여 샹보르성을 지켜본 카를5세는‘인간의 지식과 기술로서 이루어진 불후의 건축물’이라 극찬을 받아 샹보르성이 불후의 예술품 명작으로서 승리의 만족감을 느낄수 있었다.

2. 다 빈치와의 만남과 모나리자(Mona Lisa)
 예술적감성을 지닌 호방한 푸랑수아1세는 즉위와 함께 밀라노를 진격하여 성공한 김에 나폴리까지 확대하려 하자 바디칸의 교황 레오10세와 특기할 만한 협약을 맺게되는 데 프랑수아1세는 전쟁 전리품으로 바디칸의 자랑인‘라오콘 군상’을 요구하자 진품대신 카피본을 주면서 환심을 사기 위해 준비한 것이 바로 다빈치와의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그 당시 22세인 프랑수와 1세는 64세인 다빈치를 앙부아즈성의 지하통로를 이용하여 자주 만나 노예술가이지만 양아버지로 인정할 정도로 존경하였으며 다빈치가 가지고 온 미술품‘세례요한, 모나리자, 성안나와 모자상’셋중서 모나리자를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으며 다빈치의 임종을 지키고 나서야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빈치는 3년동안 궁중에서 생활하면서도 한점의 그림조차 그리지 않았으며, 67세때까지 프랑수와1세의 품안에서 임종할 정도로 매우 우정이 두터웠으며 사망후 생위베르성당에 묻히게 되었고,‘모나리자, 성안나와 모자상’을 인수받아(미완성 작품 이라는 공통점) 오늘날까지 루불박문관에 소장하게 되었다.

여기서 모나리자(Mona Lisa) 그림에 대하여
(모나는 마돈나 약칭으로 여자의 존칭, 리자의 원이름은 리자 게라르디니)
 다빈치는 피렌체의 거상 조콘다의 아내인 리자의 초상화를 그리던 중 리자 부부가 유럽여행을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아 눈썹을 마저 그리지 못한 미완성 작품으로서 그 그림기법을 수프마토(음식물 수푸와 토마토의 합성어? 일까)라고 하는데 이 기법은 우선 붓으로 물감을 칠한 다음 손가락으로 쓱쓱 색을 문질러 윤곽선을 지워버리는 방법으로 리자의 눈가와 입가의 미소짓는 자태는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음과 양의 색이 번지는 듯한 효과를 지닌 신비를 갖춘 불후의 미술품으로 다빈치의 지문이 현재 실제로 남아 있는지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 봄이 어떨까 ?

‘성 안나와 함께 있는 모자상’에 대하여 (안나는 루이12세의 아내 이름)
 이작품은 루이12세가 외동딸인 클로드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다빈치에게 주문했으나 완성되기 전에 루이12세는 죽고 없어서 다빈치의 임종을 지킨 프랑수아 1세 에게는 행운의 여신이 준 모나리자와 함께 얻게 되어 매우 의미있는 선물이 되었으니 정말 프랑수와1세는 왕중에 행운아 왕이야?

3. 다빈치의 이중계단 샹보르성
 프랑수아1세는 신성로마제국선정 투표에서 카를5세에게 고배를 마신것과 이탈리아 침공하고 아들을 불모로 제공하고서야 석방되는 등 이탈리아 패권사이에서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영향권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으나 문화적 기품을 지닌 프랑수와1세는 밀라노, 나폴리의 화려한 궁전에 비추어 프랑스의 궁들은 요세와 같은 보잘것없는 것을 깨닫고 퐁텐불로궁을 비롯한 샹보르성 건축등 여생을 르네상스 문화열정을 쏟아 부었다.

 원래 샹보르성은 파괴되었고 다빈치가 죽고 나서 다빈치의 스케치와 설계도를 참조하여 2중 나선형계단(계단은 왕의 권위를 상징)으로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이 서로 만나지 않게 설계되었으며, 특히 자신만의 모나리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모나리자의 뒤 배경인 숲을 연상하여 샹보르성 주변을 루아르강의 아름다운 자연의 배경을 숲으로 조성한 샹보르성은 북프랑스여행을 마감하는 백미라 하여 그 마음 놓을 데가 없어라!

4. 쉬농소 성과 메디치 가문
 신화를 주제로한 르네상스의 발전된 양식에 특유의 에로티즘을 덧붙임하여 관능미와 우아함을 겻들인 쉬농소 성을 건축하게 되고 국왕의 후계자인 앙리2세는 12살 때 애인이었던 디안느와 결혼하지 못하고 이탈리아 명문가 메디치가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카드리 느 메디치를 며느리로 들이면서 이탈리아 문화와 예절 격식 등을 프랑스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프랑스적 르네상스를 정착시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쉬농소 성에서 왕비인 카드리 느 메디치와 애인인 디안느와 동거하게 되는데 디안느는 1층 7호방에 청색매트와 싱글침대, 침상 상층부에서 눈여겨 보는 왕비 메디치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반면, 2층 같은 방위치에는 붉은 메트와 더불침대, 나부의 여인상이 걸려있어서 이렇게 배치한 것은 여성의 질투심이 아닐까?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아래층 디안느 침상을 위층에서 엿볼수 있는 구명이 있다고 야담으로 전하고 있는데 발견할 수 없어 다소 아쉬운 것은 남성들의 호기심 일까?

5. 메디치 가문에 대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메디치 가문의 역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할아버지인 조반니 메디치는 피렌체에서 무역상을 상대로 사금융(일명 고리대금업)을 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로마교황에게 도움을 준 것을 계기로 교황청의 금고를 관리하게 되면서 부터 피렌체의 최대 금융권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권까지 군림하게 되었으며‘권력은 사라져도 예술은 영원한 것임’을 자각한 손자 로렌초 메디치는 문화와 예술에 막대한 자금으로 후원활동을 전개하여 모름지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최대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 당시 교황청은 재정난에 시달려‘평신도라도 돈만 내면 수도원 지하에 매장될 수 있으며, 수도원과 예배당을 그림으로 장식하면 천국으로 갈수 있다’는 등으로 부유한 상인들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 수도원 벽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손자인 로렌초 메디치는 세속적인 수도원에의 그림을 이용하지 않고 특히 선조가 바람직하지 않은 고리대금업자였지만 선조를 지옥이 아닌 천국으로 보내 드리기 위한 효심의 발로에서 인지 수많은 수도사를 위해 대형 수도원인 마르코 수도원과 두오모 성당을 건축하게 하는등 남다른 문화와 예술에 지대한 후원활동을 전개하므로써 이탈리아의 문예부흥을 뒷바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