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 토스카나와 돌로미테
작성자 :
테마세이투어
작성일 :
2015.08.06
조회수 :
7803
| 이 글은 김한종님의 여행후기입니다. 김한종님은 2015년 6월 3일부터 13일까지 11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토스카나와 돌로미테 여행을 다녀 오셨습니다. 글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를 클릭하시면 김한종님의 블로그로 자동 연결되며, 원글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Italia Tuscany &Dolomite 로마→티볼리→치비타→아시시→발도르시아→크레타세니지→시에나→산지미냐노→루카→친퀘테레→포르토피노→볼차노→코르티나→알페디시우시→가라다호수→베로나 글, 사진 : 김 한 종 ![]() (Alpe di Siussi 전원 풍경) 프로로그(Prologue) 국내가 어수선하고 여행을 가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 오랜만에 이탈리아를 찾아가기로 한다. 파리 행 대한항공 901편을 타기 위해 인천공항에 나가 게이트 17을 향해 패스트 트랙으로 통과하여 나가니 몇몇 낮익은 얼굴들이 등장한다. 파리 사르르 드골 공항까지 8937km(5553miles)에 11시간 30분이 소요되며, 파리와의 시차는 7시간 늦다. 대한항공 901기는 공항을 이륙하여 서해 상공에서 기수를 돌려 바다로 나가 산동반도로 향하면서 발해만 상공을 경유, 고도 3만 피트, 시속 800km로 날아 바다를 가로 질러 텐진 상공으로 해서 베이징 위로 통과하면서 몽골의 울란바타르를 향해 간다. 어느덧 6시간을 비행하면서 한국영화 “명량”을 다시 한번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충무공 이 순신의 “生卽死, 死?生” 좌우명을 한 번 더 새기면서 충무공으로 분한 배우 “최 민식”의 열연을 2시간 넘게 보면서 박진감을 함께하였다. 함상의 백병전에서 적장의 목을 베어 메달아 놓는 전쟁의 참혹함을 오늘날에 재현하는 것이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901기는 우랄산맥을 넘어 모스크바를 향해 날아가면서 이제 4시간이 남았으나, 장거리 비행이 참으로 인내하기가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마침내 현지 시간으로 18:45분 드골 공항에 안착하니 파리도 역시 하늘이 맑고 푸르다. 다시 이탈리아 로마를 향해 56 게이트로 이동하여 AF 1004 기로 20:15분 출발하여 로마 시간으로 10:17분 공항에 안착하니 시내의 밤 경치가 눈부시다. 공항을 버스로 나와 로마 남쪽 32km 지점에 있는“Tivoli”(티볼리)를 향해 한 시간 이상을 달려 이 튼 날 새벽 00:10 분 경 로마 교외 “Tivoli”의 고성에 위치한 “Torre S. Angelo Hotel”에 도착하였다. 아침 일찍 뜬 눈으로 밖으로 나오니 호텔 주변에 노란 후리지아 꽃들이 만발하여 지난밤의 피로를 다소 가볍게 하여준다. 호텔이 티볼리 시내를 바라보는 언덕 위에 고성지역에 솟아있어 고풍스럽고 조용한 곳이며 숲 속에 들어앉아 있어 한적한 곳이다. 주변을 30분간 산책 후 아침 일과를 시작한다. 이탈리아의 개요와 역사 이탈리아는 지중해 한복판에 장화처럼 유럽대륙에 달려있는 반도국가로 면적은 30만 1277㎢, 인구는 약 6천 만 명 이다. 전국토의 80%가 농지로 연안의 섬도 국토의 17%를 차지한다. 카도릭이 국교로 수도 로마 한복판에 인구 3만의 “Vatican”(바티칸)시가 들어있다.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로 따듯하며, 북부에서는 쌀, 밀, 옥수수 등 주로 곡물류가 생산되며, 남쪽에서는 올리브, 포도, 오랜지 등이 풍부하게 생산된다. 이탈리아의 최초의 조상은 에트루리아 인들 이었으며, 이들의 로마에 복속되어 공화정이 성립되면서 원로원이 구성되었다.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로마제국이 부강해지면서 지중해 연안을 넘어 영토가 확장되었다. AD 180년 이후 로마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면서 찬란한 문화와 아름다운 궁전과 경기장들을 세우게 되었다. 그로부터 로마 황제와 종교세력인 교황 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나면서 지방 영주들의 도시국가가 출현하였다. 이런 도시국가들 중에 베니스, 밀라노, 피렌체 등이 산업, 금융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15세기가 되면서 이탈리아는 예술과 학문이 발달하면서 위의 도시들이 예술의 중심지로 발달하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 “미케란제로” 등 불굴의 예술가들이 탄생하였다. 이 시기에 로마제국은 발칸반도를 넘어 콘스탄티노플지역 동로마제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절대 군주제도가 이루어 졌다. 천 년을 이어오던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프랑스, 스페인 등의 제국이 번성하면서, 베니스 등의 무역으로 번영하던 도시들이 쇠퇴하게 되었다. 1848년 주변국들과 나란히 공화국을 이루다가 “에마누엘” 2세 시대에 와서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으며 1871년에 이르러 Roma가 수도가 되었다. 이 후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에 가담하여 전승국이 되었으나 무소리니의 파시스트 정부가 들어서면서 세력이 강화되고 독일과 함께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었다. 2차 대전에서 패하면서 1948년 새 헌법의 제정아래 공화국으로 탄생하였다. 이 후 놀라운 발전을 이루면서 세계경제의 주축을 이룬 G7 국가중의 하나가 되었으나, 정치적으로 혼란기가 오래 계속되는 바람에 찬란한 로마 문명을 계승하기가 어려워 지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 이번 이탈리아 탐방은 전과는 달리 기존의 유적지와 가던 곳을 제외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중부 와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탐사하려 한다. ![]() (사진: 로마로부터 시작한 답사코스도) (1) 이타리아의 정원문화 1) 티볼리의 Villa D’este(빌라 데스테) 티볼리 시는 로마에서 약 32km 떨어진 곳으로 로마시대 부 터 왕족과 귀족들의 여름 휴양지였다. 강이 흐르고 그 주변에 구릉지가 형성되고, 기후가 온화하여 로마 시대의 황제와 귀족들의 별장지로 조성되어 정원이 아름다운 곳으로 자리잡았다. 호텔에서 아침 일찍 나와 언덕에 오르니 티볼리 시내가 아침 햇살을 맞으며, 중세 도시의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기 들어온 호텔은 교외에 있는 4성급 호텔로 언덕에 자리잡아 시내가 아주 잘 내려다 보였다. 이 중세도시에는 언덕에 궁전이 있고 궁전보다 낮은 곳에 정원이 있어 궁전에서 정원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옛날에 궁전은 지금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빌라 테스테는 Ferrara의 추기경인 “Lippolito D’Este”(1509~1572)에 의해 착상되었다. 그는 교황 “Julius 3세”에 의해 Tivoli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그때부터 이곳에 대저택을 지었고, 연회를 베풀면서 빌라 테스테가 탄생하였다. 그는 건축가 “Ligorro”와 여러 예술가들을 동원하여 화려하게 지었다. 그가 1572년에 죽자 1624년까지 “Alessandro D’Este”에 승계되었다. 그 후 새로이 물의 정원을 건축하였다. 그가 죽자 1918년까지 이곳을 지배하던 합스브르그 왕가에 넘어가면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1차대전이 끝나자 이곳은 국가로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새로이 복원되면서 오늘날의 시설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 궁전은 처음에 수도원으로 지어진 것을 개조한 것이다. 정원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큰 창문이 나있고, 실내 벽과 천정에는 후레스코화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벽에는 주로 그리스, 로마 신화가 그려져 있고 천정에는 구약성서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놓았다. 정원과 분수 궁전에서 나가 정원으로 내려가면 정원 곳곳에 크고 작은 분수가 600여 개나 되며, 수많은 분수가 솟아오르는 멋진 풍경이 연출된다. 데스테 가문의 권위를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의 영웅들을 조각해 놓았다. 수많은 분수가 저마다 솟아나면서 높낮이가 다양하다. a) Neptune 분수: 앞으로 물고기 연못과 더불어 이 정원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한 분수이다. 이 분수는 1920년대에 “Attilio Rossi” 가 만들었다. 분수는 서서히 밑에서 솟아오르고 점차로 위로 올라가면서 강렬하게 솟구친다. 물줄기가 대칭으로 솟아 오르면서 피라미드 형태로 솟구치고 있다. 분수의 아래로는 꽃과 나무 위로 물이 흐르고 있다. b) Dragon 분 수: 백 개의 분수 통로 아래에 있다. 4마리의 용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분수를 솟구친다. 가운데 용에서 높이 물이 솟아올라 장관을 이룬다. 분수 안쪽으로는 헤라클라스의 조각상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c) 백개의 분수(The hundred Fountains): 이 분수는 3단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Tivoli 지방의 3개의 강을 형상화한 것이다. 맨 위의 첫째 단은 백합과 매가 장식되어 있으며 이는 가문의 상징이 다. 둘째 단에는 장식 대리석을 사용하였고, 셋째 단에는 여러 인물들의 표정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분수의 물은 티볼리로 부 터 로마를 흐른는 “Aniene” 강을 의미한다. d) Nature Fountain(자연의 여신 분수): 정원의 입구에 서있는 자연의 여신상은 “Giglio della Velliea”의 작품으로 풍요와 다산을 상징한다. e) 올빼미 분수(The owl Fountain): 용의 분수 안쪽에 있으며 “Giovanni di Luca” 가 설계하였고, 이 분수는 기계로 분사하며, 물이 솟아오를 때마다 올빼미가 뛰어 오르는 모습으로 피리소리처럼 들리며 2 단의 분수로 장식되어 있다. f) 오르간 분수(The Organ Fountain): 분수기 솟아오를 때 오르간 연주의 소리가 나며 오전 10:30분부터 매 2시간 간격으로 솟아오른다. 프랑스인 “Claude Venard”가 1568~1611년 사이에 완성한 곳이다. 오르간 오른쪽에는 다이아나 여신상, 왼쪽으로는 아폴로의 조각상이 서있어 이 분수를 더욱 품위 있게 보이게 한다. 2) 빌라 란테(Villa Lante) 빌라 데스테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Villa Parmes 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3대 정원의 하나이다.르네상스 시대의 부유한 귀족들이 별장을 많이 지었는데 이 Villa Lante 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규모 면으로 보면 작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아주 아름답게 4단계로 된 정원이다. 이 빌라 란테도 경사면의 땅에 조성하여 위로 4각형의 집을 짓고, 아래로 정원을 꾸미고 분수를 만들어 놓은 곳이다. 이곳은 1590~1623 년 사이에 이 빌라의 소유주였던 “Mantalto” 추기경이 만든 것이다. 분수의 조각, 오베리스크, 배, 기타의 장식품들은 모두 돌 조각가들이 만든 것이다. a) 페가수스의 분수: 빌라란테에서 가장 아래쪽 넓은 광장에서 만나는 분수이다. 네 명의 여인들이 오른손으로 받들고 있는 중앙의 페가소스에서 물을 뿜어 올리고 있다. b) Lumini 분수: 이 분수는 정원의 입구에 위치해 있다. 70개의 분출구가 있으며 중앙의 분출구가 강력하게 물을 뿜어낸다. 이 분수의 양쪽에 Neptune과 Venus의 상이 서있는 동굴모양으로 꾸며진 곳에서 분출하며 티볼리의 빌라 데스테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c) 거인의 분수(Giant Fountain): 이곳에는 로마의 Tiber 강과 피렌체의 Arn 강을 상징하는 두 거인들이 서있다. 분수는 꽃무늬의 기둥으로 꽃병이 새겨진 난간이 있고, 위로는 측면으로 2개의 단이 있고, “Flora”와 “Pomona” 두 명의 여신상이 있다. d) 추기경의 테이블: 이 분수는 돌핀 분수와 거인 분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돌이 파여진 가운데로 물이 흐르고 야외의 피크닉 식탁 자리이다. 경사면으로 올라가면서 긴 돌이 연결되어 있다. 이 물의 분수는 Gambera 추기경에 의해 만들어 졌고, 물로 연결되는 소용돌이 모양의 달팽이 조각의 연결로 형성 되어 있다. 이 외에도 티볼리에는 “Hadrian’s Villa 와 “Gregoriana Villa” 가 있다. (2)치비타(Civita) -The dying city and Bangnoregio “치비타”는 “Eagle’s nest”(독수리 둥지)라고 불리었으며, 한때는 “Castel Gomiz”라 불리었던 중세의 요새 마을이다. 수 천년 전에 화산이 폭발하여 티버강 계곡에 Bangnoregio의 Civita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 후로 중세시대에 흑사병이 창궐하고 외래인 들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이 응회암 언덕에 마을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절벽 위에 좁은 곳에 마을이 생기고 성당과, St Peter 교회가 중세 초기에 세워졌다. 그러다가 1695년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그 후 수세기 동안 이 암석 위에 마을이 들어서고 동시에 성당이 커지 면서 절벽 위의 치비타 마을과 방뇨레지오 마을을 연결하는 다리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침식이 진행 되면서 1923년에 돌다리가 건축되고, 그 후 1965년에 지금의 콘크리트 다리로 대체되었다. 그로 부 터 자연 침식의 의해 치비타는 죽어가는 마을로 불리었으나, 역사적으로 꼭 남아있어야 하는 마을이 되었다. 긴 다리를 걸어 가파른 돌길을 올라 성문 안으로 들어가면 광장, 교회, 종탑이 솟아있고, 골목마다 옛 건물이 도로로 연결되어 있어 중세 마을의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모두 몇 개의 골목을 돌아보아도 현재는 10여 가구의 노인층만이 살고 있으며, 큰 골목 끝으로 가면 내려가는 길로 연결되어 계곡아래 마을로 연결되어 있다. 광장 옆 오른쪽 건물 안 3층에는 이곳 Civita가 옛날 화산의 폭발로 하나의 응회암으로 생성되어온 과정이 학문적으로 연구된 것이 전시되어 이 마을의 생성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의 발굴된 화석유물이 전시되어 이 산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이루어진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은 외적에 침입에 대비하여 성벽과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 예부터 천연의 요새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연 침식 작용으로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어 현재는 10여 가구의 노인 세대와 기념품 점 등이 몇 군데 있다. (3) 아시시(Assisi): 움부리아 주의 고도 아시시는 언덕 위에 세워진 중세 도시이다. 큰 차는 들어갈 수가 없어 아래 주차장에서 부 터 걸어서 도시를 순방하여야 한다. 기독교의 성인의 한 사람으로 추앙 받는 당시에도 프란체스코 교파는 당시 타락한 중세 교회에 맞서 청빈과 엄격한 규율을 지킴으로서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것이다. 우리는 이 고도에 들어와 걸어서 숙소로 이동하면서 이 도시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고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중세도시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이 도시는 카도릭 여행자, 순례자들이 모여 들면서 도시의 성가를 더해가며, 그의 기념성당인 “The Basilica of St. Francis”의 웅장한 3층 교회와 교회 안에 평생을 그림에 바친 성화가 “Giotto”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짧은 일생을 그린 28폭의 프레스코화가 가장 주목 받는 그림이다. 그리고 그가 태어나 곳을 성지화 시킨 성당 등 그와 관계가 있는 이 도시의 여러 곳을 방문하기로 한다. 아시시 전 도시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도시의 정상 부에 위치한 “로카 마조레” 성 등을 몸소 오르는 순례여행을 하고자 한다. a) St. Francisco 성당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위로를 구하기 보다는 위로하게 하시고, 사랑을 구하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시고……”의 기도문은 오늘날에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준다. 그는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나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예수와 가장 근접한 여생을 살아간 성자로 불리어 진다. 그의 이런 자비정신은 지금도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통해 이어지고 있으며, 그의 이런 구도의 신앙은 한국에서도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볼 수가 있다. > 그는 1182년 이곳 아시시에서 큰 의류상인을 하던 아버지와 어머니 “Pic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John”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후에 <프란치스코>로 바꾸었다. 어려서부터 부유한 집에서 자라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페루자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로 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 풀려 나와 이를 계기로 아시시의 토굴 속에서 수도에 정진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문둥병 환자를 만나면서 그의 생은 종교적인 삶으로 바뀌었다. 그는 자기의 옷을 병자에게 벗어 입히고, 그를 끌어안으면서 몸에서 전율이 일어나고 내면에서는 기쁨과 평안이 충만한 체험을 겪게 되었다. 이런 일이 일러난 후에 그는 그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고 특히 문둥병 환자를 돌보면서 검소하게 살아가는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로 인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한 수도회가 그의 이름으로 탄생되었고, 그들의 모임은 더욱 나환자와 버림받은 사람들의 구원에 전념하게 되어 많은 수도사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1226년에 불과 44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1228년 7월 16일에 교황 “Gregory 6세”가 그를 성현으로 추대하였고, 그의 시신을 이 성당은 그 후 점차 증축되면서 모두 3층으로 되었고, 지하층은 성인의 무덤이 있고, 1 층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기도실, 2 층은 고딕 양식으로 지은 교회로 발전하였다. 1269년부터 아시시의 교회는 순례자들이 모여 들었고, 지하교회에도 기도처가 만들어 졌다. 1280년이 되어 1층 교회에 프로렌스의 유명한 화가 “Cimabue”가 로마네스크 풍의 성화를 그리었고, 예술과 신앙의 하모니를 이룬 곳으로 1280년에부터 그린 십자가로 장식되었다. 왼쪽에 세례요한과 예수의 십자가상, 오른쪽에는 12사도와 십자가의 예수상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프레스코화는 그림 상태가 많이 훼손 되었다. 1층의 아래 부분에는 그의 제자인 “Giotto”가 프레스코화로 그의 일생을 그리어 28폭의 그림으로 천정 밑이 기득하다. 가운데 제단의 오른쪽 벽으로부터 시작하여 뒤로 한 바퀴 돌아 왼쪽 벽에 까지 장식되어 있다. 프란체스코의 일생의 그림은 그가 세속에서 벗어나는 장면부터, 교황으로부터 프란체스코 교단의 승인을 받는 장면, 그의 장례식에 이르는 모든 행적을 그림으로 그려 놓아 일종의 그림으로 된 전기가 완성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이 그림의 내용을 열거해 본다. ![]() ![]() ![]() ![]() ![]() ![]() ![]() ![]() ![]() ![]() ![]() ![]() 1)일반에게 프란체스코가 경배를 받는 모습. 2) 가난한자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주는 모습. 3) 꿈꾸는 장면. 4) 십자가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장면. 5) 아버지에게 입었던 옷을 벗어드리는 장면. 6)교황 인노센트 3세의 꿈을 꾸는 장면. 7) 교황이 프란체스코 운동의 승인. 8) 마차를 탄 선지자. 9) 천국에서의 모습. 10) Arezzo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그림. 11) 바비로니아 슐탄 앞에서의 불의 시험. 12) 프란치스코가 기도 중 공중을 나르는 모습. 13) 성탄 구유를 만드는 장면. 14) 샘에서 성수가 솟아나는 장면. 15) 새들과의 대화. 16) 어느 기사의 죽음. 17) 지도자들에게 설교하는 모습. 18) 제자 St. Anthony 의 설교. 19) Verona에서 기도 중 예수를 만나는 모습. 20) 프란치스코의 임종의 모습. 21) Augustine 형제와 Assisi 주교의 강림. 22) 승천 성흔의 확인 장면. 23) Clare가 시신을 보는 장면. 24) 교황 Gregory 9세 시성 장면. 25)교황그레고리 9세가꿈에 나타나는 장면, 26)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모습. 27) 죽은 여인을 안내하는 장면. 28) 회개한 사람들을 맞이하는 성인 등 모두 28개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b)미네르바 신전과 코무네 광장 로마 시대에서부터 지어진 이오니아식 미네르바 신전은 웅장하고, 석조 계단 위의 들어선 대리석 기둥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고, 성당 안에는 성단이 엄숙하게 있고 주위에는 성화로 장식되어 있다. 그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자리잡고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c) Francis’ Piccolino 성소 성 프란치스코의 출생지로 그가 죽은 후 1280년에 성인의 아들이 그의 영원한 안식처로 만들었고 1281년에 돌로 아취형태의 문을 만들었다. 안에는 당시에 프레스코로 그린 초상화가 안치되어 있다. d) 로카 마죠레 성(Rocca Maggiore Castle): Assisi의 로카 마지오레 성은 1천여 년 된 군사 요새였으며, 아시시 정상에 서 360도의 전방위로 방어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이 성에서 움부리아 계곡의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운 경치를 볼 수 있다. 1174년에 방어 목적으로 축성하였고, 그 후에 Frederich 2세가 이성에 머물렀다. 1972년에 이 요새는 “Brother Sun, Sister Moon”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이 Assisi 엔 모두 프란체스코 성인을 위한 13곳의 성당과 성지가 있다. 4) 중부 Tuscany(토스카나) 지역으로 로마 인근의 많은 유적과 유물은 이미 국내에 많이 소개되어 로마 문명을 우리에게 상당히 근접하고 누구나 많이 알고 있다. 이번 여행은 과거의 로마 중심의 답사여행에서 탈피하여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곳을 중심으로 답사를 하려는 것이다. 아시시의 중세도시를 걸어서 프란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대부분 둘러보고 이제 발 도르시아 주의 피엔차 퀴리코로 향하여 먼 곳으로 간다. 중부 이탈리아의 푸른 초원과 구릉지에 펼쳐지는 싸이프러스 나무들의 멋진 도열과 수확을 마친 밀밭과, 아직 푸르른 밀밭의 끝없는 구릉 지와 평야지대를 차창으로 내다보면서 “Loc La Foce” 라는 가든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한다. 사진에 등장하는 토스카나 지역의 아름다운 녹색지대의 길을 따라 굽이 굽이 돌아 오르는 곳의 싸이프러스 나무와의 앙상불은 사진 작가들이 즐겨 담는 경치이다. 이탈리아의 중부 토스카나 주는 르네상스 시대에 문화의 중심지였다. 당시의 문화의 중심지인 페렌체, 피사, 시에나, 루카 등이 독자적인 중심도시로 발전하면서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독특한 문화지대를 형성하였다. 특히 토스카나 지역의 낮은 구릉지대와 드문드문 들어선 농촌주택, 하늘로 고고하게 치솟아 오른 싸이프러스 등이 전원의 목가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발 도르시아” 지역이다. 이 지역이 이탈리아의 전원 풍경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중간에 차에서 내려 우리는 우리나라의 둘레길 개념으로 만들어진 발 도로시아 트레킹 코스 일명 ”순례의 길”에 들어섰다. 오후 뜨거운 태양을 피해 5시가 넘어 걷기를 시작하여 약 5.5 km 정도를 걸으면서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역의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노란 후리지아 꽃, 민들레, 붉은 양귀비 등 이름 모를 들꽃들의 향연을 눈과 몸으로 호흡하였다. 도로를 따라 양쪽으로 끝없이 전개되는 푸른 구릉지역의 아름다운 풍경을 뜨거운 오후의 태양열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저 멀리 언덕 위의 푸르고 외롭고 혼자 곧게 서있는 나무의 행렬, 그 끝자락에 외로이 서있는 교회와 탑 들, 너무나 목가적인 그림으로 다가온다. 그저 넓은 땅에 비옥한 농토가 그림같이 시야로 들어온다. 반환점에 이르러 오른쪽 이정표를 따라 가니, 풀밭 위에 외로이 서있는 오래된 자그마한 교회, 빛 바랜 문이 굳게 닫힌 문 위로 십자가만 외로이 서있고, 그 앞에 우물과 교회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에 담아본다. 다시 숲 속 길로 들어가니 정말로 이름 모를 들꽃들의 끝없는 향연이 펼쳐진다. 숲 속의 갈림길을 만나 리본을 확인하고 언덕으로 오르니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 지친 발걸음을 멈추게 하며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우리는 “Luca” 농장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다. 푸른 초원 위의 한 그루 나무가 하늘로 솟아있어 멋진 풍경을 연출하는 자연의 파노라마를 바라보며 이탈리아 농촌의 농장 앞을 지나가니 각종 농기구들이 쉬고 있다. 농장 앞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니 이정표가 보이며 오늘의 트레킹의 종착점이 다가온다. 우리는 자연을 벗삼아 트레킹을 마치면서 “Castello di Leonina”라는 시골 부자의 저택에 이른다. 이 저택은 지금은 숙소와 레스또랑으로 개조 되어 오늘은 이곳에서 쉬면서, 야외에서 전원풍경을 바라보며 저녁을 함께하려 한다. 오늘의 고요한 농촌 마을에서의 지는 태양아래 둘러앉아 담소하며 여유를 즐기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아침 일찍 눈을 뜨니 이제서야 7시간의 시차가 극복되는 듯하다. 오늘은 토스카나 지역의 아름다운 시골 풍경을 온몸으로 맞아본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산책에 나서니 싸이프러스 트리가 늘어선 길을 따라간다. 이 지방의 초원 구릉지대의 아침은 우리나라처럼 이름 모를 들꽃과 새들의 아침 울음소리와, 들꽃이 만발한 것과 교향악을 이루듯이 풀벌레들의 울음소리, 숲 속에서 큰 새들이 암수를 이루다가 사람이 접근하니 놀라서 푸드득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아침 일찍 길 위를 느린 자세로 가로질러 가는 큰놈의 달팽이도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가고, 푸드득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들, 땅의 미생물들과 함께 무한대로 피어나는 들꽃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이곳은 농장 지역으로 모두 크게 영역이 구분되고 중장비들을 갖춘 부유한 농촌이다. 상쾌한 아침, 푸른 밀밭, 익어가는 들판의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그로 인해 이곳은 세계의 사진작가들의 모델이 되는 곳이다. 나는 “박 목월” 시인의 “강나루 밀밭 길” 이라는 시를 읍조려 본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라는 시가 저절로 떠오른다. 새들의 지저귐은 큰 수풀 속에서 “구구구”하는 음향으로 퍼지간다. 먼 곳에서 답장하듯이 반응하는 새의 새벽의 노래는 “쿠 구구….” 하는 음향으로 울려 퍼지고, 정말 대자연의 품속에서 인간의 마음이 저절로 순화되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밀 밭 사이로 구비구비 돌아가는 길이 보이고 언덕 위로는 싸이프러스 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토스카나의 아침 풍경은 정말 평화로운 모습이다. 아침에 일찍 레오니아 지역을 떠나면서 그래도 미련이 남아 십여 분간 크레나 새니지 지역를 산책한다. 이곳은 오래 전 부 터 미술가, 사진가, 시인 등의 영감을 자극하는 곳으로, 중세의 르네상스시대에는 풍경화가들의 무대였다. 미련을 남기면서 아침산책을 마치고 이제 토스카나 지역의 중세의 중심지였던 “Siena”로 향해 간다. (5)“시에나”(Siena)중세도시 시에나라는 도시는 중세 이탈리아에서 피랜체 도시와 이 지역에서 서로 패권을 다투었다. 즉 16세기 경의 도시 국가인 피렌채와의 2년여에 걸친 영토전쟁에서, 시에나가 패한 후 발전이 멈추고 정체상태로 오랫동안 내려왔다. 이런 것이 오늘날 시에나가 피랜체의 중세 모습과 함께 중세도시의 더 많은 풍모를 지니고 있으며, 얕으막한 산정에 요새를 이루고 있다. 차로는 시에나에 들어갈 수 없고, 시내 입구에 들어가도 차량도 진입세를 내야하고, 12시부터 14시 사이에는 아동들의 하교시간이라 일체 운행을 할 수가 없는 특이한 중세 도시이다. a) Duomo di Siena(시에나 성당) 1229년에 짓기 시작하여 1264년에 완공하였고 1284~1299년 까지 “Giovani Pisano”가 전면을 완성하였다. 전면은 세 개의 아취로 구성된 로마네스크 식으로 우아하고 조화로운 문이다. 지금의 모든 성당의 시설은 1382년에 가서야 완성되었고, 가운데 삼각형 탑 위에 성상도 완성되었다. 이는 “Orivieto” 성당 전면과 흡사한 고딕 양식을 띠었다. 이렇게 수십 년을 두고 로마네스크와 후기 고딕양식을 가미한 흰 대리석으로 된 아름다운 성당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성당의 주 출입구를 통해 내부로 들어가면 바닥에 시선이 집중되니 이는 1372~1562년 사이에 대리석바닥에 여러 조각가,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새기었다. 제일 중앙 입구 앞에 1번에는 “Giovanni de Stefano”가 1488년에 무기를 새기기 시작하여 안으로 들어가면서 기하학적 무늬와 구약 성경 이야기를 새겨 놓았다. 흰색과 검은색의 대리석을 설치하고, 바닥에 모두 49곳에 대리석에 조각을 하였다. 성당 가운데에는 1532년 “Peruzzi”가 만든 <니콜라 피사노> 설교제단이 설치되었고,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왼쪽 10번 옆 방에는 나무로 된 성가단이 마련되어 있고, 당시에 성가 악보가 라틴어로 쓰인 것이 전시되어 있고 천장에는 성화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중앙 제단 기둥에는 십자가의 예수가 조각되어있고 기둥 사이에도 아름다운 조각상이 둘러 있다. 성당 전체가 거대한 예술작품으로 모두가 문화유산이다. b) 캄포 광장 이 광장은 시에나의 역사를 대표하는 도시의 상징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 있다. 3개의 면으로 언덕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중심을 향하여 경사진 반원형으로 되어 있고, 1347년경에 벽돌을 깔았고, 오늬(herring bone)모양으로 햐얀 돌을 깔아 세로로 아홉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이 특별한 형태는 조개 껍데기의 모양으로 되어있다. 광장의 특이한 모습과 둘러싸고 있는 종루가 높이 솟아오른 민중궁전, 피코로미니 궁전, 가이아(Gaia) 샘, 중세 상인들이 쓰던 사업장인 메르칸치아 등 궁전의 건물들은 중세의 분위기를 더욱 고색창연하게 보이게 한다. 지금은 시청으로 쓰이는 이 건물은 광장과 더불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광장의 전 지역을 감싸는 구조로 되어 있고, 1288년에 시작하여 1320년에 완성되었고, 1327년 경 부 터는 감옥으로 사용 되었다가 14세기 중엽부터 시청으로 되었다. 본 건물 양쪽으로 건물을 추가로 연결하여 지었다. 토스카나의 고딕 양식의 건축물 중 가장 뛰어나 것으로 맨 아래층은 돌로 아취형의 창문으로 구성 되었고, 2~3층은 다른 궁전과 같이 3개의 방사성 창살의 흰 대리석 기둥으로 장식한 벽돌 건축물이다. 4층은 가운데 한층 높이로 올라가고, 그 가운데 동판에는 1425년에 “Niccolo di Padava”에 의해 “Jesus Christ” 를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시청의 왼쪽으로 “Francesco di Rinald”(1338~48)가 쌓은 102m 높이의 탑이 솟아 있으니, 이 탑은 벽돌로 되어 있고, 꼭대기에는 종탑이 있으며, 큰 종은 “Sunto”로 불린다. 이 탑 위로 오르면 시에나와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캄포 광장의 중심에 있는 가이아 샘은 시에나의 최고의 조각가였던 “Jacopo Quercia(1374~1438)에 의해 만들어진 고딕 양식의 르네상스 스타일로 조각하여 만들어진 샘터로, 한편의 조각이요 그림이다. 이 샘터의 모든 조각 품들은 지금은 시청 소관으로 되어 있다. 시에나를 떠나면서 “몬테리지오” 라는 작은 성곽으로 둘러 쌓인 마을로 가서 이 지역에서 으뜸가는 요리라고 하는 돼지고기 요리를 맞보기 위해 좁은 공간의 “Pozzo Restaurant”에서 한 시간 이상을 머무르며, 맥주와 더불어 요리를 맛보며, 주인의 넉살을 바라보며 좁은 공간에서 함께한다.. (6) 중세 도시-산 지미나노(San Gimignano) 토스카나 지역의 자그마한 중세도시로서 “산 지미나노”는 334m의 언덕에 위치하고, 성벽 아래로는 수많은 탑들이 솟아 있었으나, 다른 도시에 가려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던 작은 도시로 최근에야 “아름다운 탑의 도시” 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중세도시는 에투루스칸과 로마시대 이전부터 이 지역의 중심이 되었고, 1130년 후에 독립을 이루었다. 13세기에 와서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 부자들이 주목할만한 탑을 건축하였다. 1353년에 프로렌스의 침공으로 힘이 약화 되었다. 11세기에 세운 문이 3개가 있으며 두 번째로 쌓은 성벽은 동서 방향으로 완전하게 남아있다. 산 위로 성채가 있고, 중간지대에는 13세기에 이루어진 시가지, 그 아래로는 두 번째의 성벽으로 둘러 쌓인 14세기의 시가지가 공존하고 있으며, 탑은 한때 76개나 되어 자그마한 언덕 위의 도시가 탑으로 하늘이 불규칙하게 보일 정도였다. 13~14세기 경에 중세 상인들이 서로 부를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쌓았다 하나 지금은 모두 14개의 탑만이 남아있다. 아주 특이한 스카이 라인을 이룬 토스카나 지역의 상징적인 소 도시이다. 당시에는 피렌체시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여 탑이 160여 개가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차장에서 내려 골목으로 걸어 올라가 성문을 통해 들어가면 이 중세 도시의 특이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산 지미나노를 유명하게 만든 탑과 건물은 도시의 중심인 “Piazza del Duomo”(두오모 광장)와 “Cisterna” 광장에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포폴로 광장의 “Torre Grossa”와 “Rognoso”탑과 “Gugnanesi”탑과 쌍둥이 탑인 “Salvucci”와 “Devils” 탑이다. 포폴로 광장은 1239년에 되었고, 백 년 후에 확장되어 옆에 “Rognoso”탑이 서있고, 궁전 안에 극장이 들어섰고, 광장 건너편에 지금은 시청건물로서 가장 높은 탑이 오른쪽으로 서있다. “Dante”가 여기에 왔을 때 머물렀다 한다. a) 포폴로 궁전: 궁전보다는 탑의 존재로 유명하며 이곳의 듀오모 성당보다 높아 언덕 위에 “Torre de Grossa”(그로사 타워)라는 54m나 높이 솟아있는 탑이 서 있어 유명하다. 이 탑 안으로 미로 같은 사다리를 타고 탑의 꼭대기로 오르니 조그만 소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토스카나 지역의 로마, 피렌체, 베니스의 탑의 풍경을 초월하는 모습이다. 맨 위에 아주 큰 종이 달려 있다. b) 듀오모(Duomo Di San Gimingnano)성당: 계단 위에 자리잡은 중세 풍의 성당으로 교회 벽에는 신, 구약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프레스코화가 14 세기의 미술가 “Giuliano da Miano”, 조각가 “Benedetto”의 걸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c) 물 저장소: 언덕 위로 걸어올라 넓은 광장에 이르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 광장 가운데에는 돌로 네모의 문틀 모양으로 쌓아 올린 둥근 샘터가 있으니, 이는 중세시대의 큰 물 저장시설이 그 아래에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둥글게 돌계단으로 둘러 있어 관광객들의 휴식처이다. 특히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맛있는 크림을 사서 이곳에 앉아서 먹는 관광객이 많으며 누구나 앉아서 휴식하기 좋은 장소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d) “성채”: 성당 옆 탑 아래로 가파른 길을 오르면 이 소도시의 방어용 성채가 남아있다. 전망대도 있고 조그만 소도시의 맨 위 산정에 있어 요새를 이루고 있다. 유명한 탑으로는 51m의 “Torre de Salvucci” 로 두오모 성당 아래 오른쪽으로 솟아있다. 이 소도시는 골목마다 상가가 많으며 천천히 중세 시를 감상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돌로 깐 길이 반들 반들하게 닳아 있어 조심 하여야 한다. 도시를 남북으로 갈라서 올라가 내려가는 언덕을 중심으로 모든 탑들이 솟아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소도시는 순례자들이 찾아 들어 성지가 되면서 발전하였으나 1348년 흑사병의 창궐로 쇠퇴하게 되어 1353년에 피렌체에 합병되었으며 그 후 잊어진 도시가 되었다. 그 후 이곳이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가 990년, 994년 두 차례나 로마를 방문하면서 이곳에 머무르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그 후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 들었다. 오늘의 숙소는 물 저장소 앞에 푸른 담쟁이가 3층까지 덮여 올라간 “La Cisterna Hotel”로 이 지역의 오래된 건물이라 좁은 공간이 특징이다. 투숙 후 작열하는 오후의 태양을 피해 2시간 반을 쉬다가 종탑으로 올라가 시내를 내려다 본 후 내려오면서 이곳의 조그만 박물관을 보니, 중세 유명 화가인 “Palazzo Comunale”와 “Torre Grossa” 의 그림으로 전시되어 있다. “Sala di Dante”의 그림들, 시에나와 프로렌스 학파의 걸작품이 전시된 곳으로 조그마한 도시인 “San Gimignano”의 대표적인 곳이다. San Gimignano 교회는 교황 “Eugene 3세”가 1148년에 건축하였으며 교회내부에는 “Batalo, Memmi, Bartno “ 등 거장들의 프레스코화가 전시되어 있다. 이 소도시는 그 후 1990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꾸준히 발전하여 오고 있다. (7) 중세도시-루카(Lucca) Lucca는 에트루리아인들이 만들었으나 기원전에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기독교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갈 때 루카는 주교구가 되었으며 발전을 거듭하였다. 9~12세기에는 토스카나 지역에서 가장 발전한 도시였다. 루카의 공국은 500여 년이나 계속되었고, 1805년에 나폴레 옹에 의해 점령 되었었으나 1870년에 이탈리아로 통합되었다. 루카의 성벽은 규모와 크기로 보아 도시를 대표한다. 역사적인 곳을 둘러 싸고 있고 최근에는 산책로로서, 자전거코스로서 완벽한 곳이다. 현 성벽은 1645년 르네상스 시대에 축성 되었고 네번째에 가서야 완성 되었다. 예수 탄생 후 180년에 시작되어 중세 12~13 세기를 거처 1265년에 완성되었다. 3번째의 성벽은 1544년에 완성되었다. 전체 4.2km로 11m의 높이로 되었고 보루가 12개가 있고 그 안에 무기나 화약을 보관한 11개의 성채가 있다. 구조는 12m의 높이로 벽돌로 쌓았고 해자로 둘러 쌓여 있고, 흙과 보호 방벽으로 되어 있다. 도시의 입구 문은 다리로 연결 되었고 도시와는 철문으로 구분되어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우리는 Anna성문으로 진입하여 로마시대의 중심지대로 들어가 “카르로” 중심 광장으로 간다. 현 주민은 9천 여명이 살며 외곽으로는 8만 명이 살고 있다. a) 시계탑: Fillungo 입구에 서있는 50m높이로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명물이다. 13세기에 세워졌고 “Sismadi”와 “Ceci” 가문의 소유였다. 이 탑은 소유권 분쟁으로 “불화의 탑” 이라 불리었다. 1471년에 벨이 울리는 시계가 설치되었고 현재의 시계는 1752년 “Louis Simon”이 설치하였다. b) Guinigi 탑: 이 탑은 Lucca 의 부유한 상인 “Guinigi” 가문의 소유이다. 꼭대기에는 오래된 너도 밤나무(Holm oaks)가 심어져 있다. 당시에는 시계탑보다 높이 쌓을 수가 없어 나무를 심어 높이 보이게 하였으며, Andrea 입구에 서있다. c) San Martino 대성당: 골목길을 벗어나 광장에 이르니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성당을 만나니 이 성당에서 바로 “푸치니”(Puchinni)가 오르간 연주를 했다는 곳이다. 푸치니의 가문의 악사들이 이 성당에서 주로 연주했다는 것으로 유명해진 성당이다. d) Anfiteatro 광장: 옛 로마시대의 원형 경기장으로 2 세기경에 “Fibio”가 건축하였고. 아직도 타원형으로 남아있다. 네 군데의 입구가 있고, 지금은 주택으로 둘러 쌓여 있다. e) 푸치니(Puchinni) 생가: 중세의 성당 산 마르치노를 지나 “푸치니” 동상이 서있는 광장으로 가서 동상을 만나보고, 동상 뒤에 있는 그의 생가를 찾아간다. 그는 이곳 Lucca 에서 태어나 밀라노로 유학가서 그곳과 토리노에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이곳의 그의 2층 주택은 그가 17년간을 살았던 곳으로 지금은 그의 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이 안에는 1901년에 제작하여 사용하던 그랜드 피아노가 전시되어있고, 그의 미완성의 “트란도트”도 이곳에서 쓴 것이다. - 푸치니와 베르디 이태리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그들은 이태리의 오페라를 세계무대에 등장시킨 주인공이다. 이태리에서는 베르디를 신이라고 추앙하며 그의 노래는 아주 대중화 되어있다. 그러나 이태리 밖으로 더 유명한 작곡가로는 바로 푸치니이다. 독일에는 베토벤과 모찰트로 대표된다면 이태리는 푸치니와 베르디로 대표된다. 우리는 푸치니의 작품 “라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등 유명한 오페라가 모두 국내에서 연례행사로 공연되어 너무나 친숙하다. 예컨대 “그대의 찬손”, 토스카의 “별은 빛나고” 등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애창곡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뮤지컬 무대에서 자주 공연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가 만년에 쓴 미완성의 “투란도트”는 이제는 전세계의 풍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상암 경기장에서 공연하여 수많은 관중들에게 이태리의 진수를 보여준 일이 있다. (8)포르토피노-지중해변의 최고의 휴양지 토스카나 지역을 떠나 이제는 제노아 방향으로 달려 지중해의 최고의 휴양지인 리구리아 주의 포르토피노로 간다. 차창 밖으로 대리석재를 잘라다 쌓아놓은 석재들이 즐비한 상가 너머로 먼 산 밑의 대리석 광산이 하얀색으로 하늘과 맞닿아 있다. 지중해의 바닷가에 이르니 이곳은 한여름이다. 해수욕 객으로 바닷가는 인산 인해이다. 우리는 “Havaianas” 호텔 앞 해변가에서 멈추어 택시를 타고 해안 휴양도시로 간다. 이곳은 명배우, 소피아 로렌, 펌프리 보가드, 리즈 테일러, 리차드 버튼, 에바 가드너, 가르보 등 숱한 명배우와 정치인 재벌들 등 유명인사들이 해안가에 자리잡은 포르토피노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다. 지중해 해변 리구리아 해안가의 포르토피노는 명사들의 휴양지로 명성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친퀘테레>의 아름다운 해변과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리구리아 해변의 만으로 파도가 완만하고, 물결이 잔잔하여 파란바다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해안으로 가면서 별장지대가 언덕에 절묘하게 형성 되었고 당대의 고관과 부자들의 별장지대 언덕에 자리잡은 “Belmond Splendido Hotel” 에 도착하여 바다를 바라보면서 비싼 음료수를 한잔씩 하면서 잠시 쉬기로 한다. 언덕에 바다를 향한 비탈에 각종 꽃들이 만발한 곳에서 자연 풍광에 취하다가 걸어서 포르토피노 선착장으로 내려와 유람선을 타고 산 마르게리타 리구레로 와서 동굴 통로로 산으로 올라 오늘의 숙소인 “Grand Hotel Castelli”에 이른다. 호텔이 최고의 시설로 언덕의 고성 안에 위치해 있고, 3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 있다. 리구리아 해변의 유명인사들의 피서지에 우리는 2일간을 쉬기로 한다. (9) 친퀘테레(Cinque Terre) 오늘은 바닷가 산비탈에 이루어진 작은 어촌 마을이었던 “친퀘테레”(Cinque Terre)라는 마을을 찾아간다. 이 곳은 이름없던 어촌마을로 산비탈 바위 위에 이곳 원주민들이 어업을 하거나 돌밭을 일구어 포도를 재배하던 아주 가난한 어촌마을 이었다. 중세 시대부터 원주민이 소박하게 마을을 이루며 농사도 짓고 어렵게 살던 곳이며, 이곳의 지명이 “Liguria”라고 불리었으며 4개의 주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큰 도시는 “Genoa”였고 인구가 58만 명이나 되었다. 제노아의 동쪽 해안가가 “리구리아”라고 알려졌으며, 험한 해안가를 따라 지금은 “Cinque Terre”라고 불리지고 이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Milan”, ”Pisa” 등 이탈리아의 주요도시가 있다. 친퀘테레는 “Riomaggiore”, “Manarola”, “Corniglia”, “Vernazza”, “Monterosso” 의 다섯 개의 마을로 이 섬에는 대개 5천여 명이 살고 있으며 여름에는 인구가 늘고 있다. 이들 5개의 특별한 자연 풍경으로 인해 1997년 UNESCO 세계 자연 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중세부터 지중해의 아름다운 해변가에서는 연어, 돌고래 등 어족자원이 풍부하여 주로 어업에 종사하였다. 가장 흥미있는 일은 이곳 주민들이 어떻게 수백 년 동안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가고, 포도, 레몬,올리브 등의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 비탈을 개발하였는가 이다. 이런 과정이 중세부터 친퀘테레가 맛있는 와인과 오일을 생산하여 유명하게 되고 세계의 관광지가 된 것이다. 우리는 호텔에서 걸어서 기차역인 “Sestri Levante” 로 와서 09:40분 기차를 타고 출발하니 기차는 비교적 깨끗하고 출발 역에서 3번째인 “Deiva Marina” 역에서 급행이 지나가도록 정차하고, 이어 출발하여 바닷가로 나가면서 “Bonassola” 역이라는 표지판이 객실 앞뒤에 전자 보어드판에 뜨고 다음 정차역인 “Levante”역에서는 사람이 많이 타고 내린다. 어느덧 친퀘테레 입구인 “Monterosso” 역에 이른다. 전구간이 해안 절벽을 이어가기 때문에 터널이 유난이 많아 주변 경치를 볼 수가 없다. “Corniglia” 에서 서있던 승객의 대부분이 내리고 기차는 이제 해변가를 신나게 달린다. 또 하나의 긴 터널을 지나 거의 한 시간 만에 기차는 친퀘테레의 관문인 “Riomaggiore” 역에 이르러 우리는 기차를 벗어난다. 지금 주민들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야 하며 건물을 짓거나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는 법으로 금하고 있다. 그로 인해 몬태로소 지역 이외에는 호텔이나 숙박시설이 없다. 주민들은 기차나 승용차로 다녀야 한다. 열악한 도로사정으로 모든 일상 용품은 배나 기차로 운반된다. 언덕에 여기 저기 자리잡고 있는 주택으로는 걸어서 가거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 걸어서 가야 한다. 해안가 도로를 따라 리오마조래와 마나롤라 만 두 곳을 연결하는 버스로 다닐 수 있다. 친퀘테레는 중국의 만리장성과 쌍벽을 이룬다. 수세기 동안 6729km(4181miles) 의 산 길이 만들어 졌으니 이는 만리장성의 7000km 와 맞먹는 것으로 둘 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곳 5곳의 하나 하나를 돌아보기로 한다. a) 리오마죠래(Riomaggiore)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섬 이름은 계곡을 흐르는 개울에서 생기었고 집들은 다리로 연결되고 있어 “Little Venice”로 불리고 있다. 작은 성이 도시를 내려다보는데 있다. 이 성은 “Turcotti”가문이 1260년 경에 방어목적으로 쌓았다. 성 앞면에는 15세기말에 세운 작은 교회가 있다. 역에서 나와 해안가 바위 절벽으로 난 길을 오르니 위로는 빨간색, 노란색으로 벽을 칠한 집들이 절벽 아래로부터 마치 포개져 있듯이 보이며 대개 8~9개 층의 높이로 바위 절벽에 계단식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해안 절벽에 여기저기 선인장의 노란 꽃, 붉은 꽃이 피어 있으며, 이는 백년초로 바위틈에서 자라나 한여름에 피는 꽃이다. 바위 위로는 길이 나있으니 이는 “Trail of love”(사랑의 길)라는 아름다운 낭만의 길로 리오마조래와 마나로라를 연결하는 약 1km의 길이다. 지금은 여러 번의 사고로 패쇠되어 있으나 수많은 연일들이 걷던 길이었다. 두 섬의 주민들은 이제는 산의 터널을 뚫어 연결시키고 있다. 이전에는 두 곳이 포도밭 사이의 구불구불한 산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해안 길은 절벽으로 가파르고 위험하나 연일들에게는 낭만의 길이었다. 우리들은 이 사랑의 길에서 수많은 자물쇠를 발견하고, 이 영원한 사랑의 심볼이 이곳에서 시작 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이 자물통은 지금도 이곳 선물코너에서 팔고 있다. 이곳은 벌써 여름철이라 해수욕의 계절로 모두 반라의 사람들로 해변가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바위가 겹겹이 겹쳐서 서있는 모습이 신기하며, 그 위로 사람이 가까스로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 나있어 연인들이 사랑을 만끽하며 걸어갔었다. 바위 틈마다 이름 모를 식물들이 자라나서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리오마조래를 둘러보고 부두에서 관광선을 타기 위해 기다리며 바위들 사이의 길을 따라 해안가로 내려가니 반바지에, 온몸을 노출한 사람들이 즐비하다. 한 쪽에선 조그만 낚시 배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좁고 위험한 낭떠러지 바위 길에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리오마조래에서 관광선을 타고 시원한 바다로 나가니 마나롤라와 코르닐리아의 마을이 그림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면서 배는 베르나차 마을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려 이 마을을 돌아본다. b) 베르나차(Vernazza) Monterosso와 더불어 Vernazza 는 친퀘테레에서 가장 오래된 1080년대에 세워진 마을이다. 골목을 걷다 보면 중세시대를 연상하며 Genoa 시대의 건물이다. 이 마을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긴 개울을 갖고 있다. “Vernaccia“라는 와인의 어원을 가진 “Vernazzola”가 바로 그것이다. 동쪽의 리구리아에서 가장 멋진 경관을 가진 거리의 끝인 “marina” 거리가 나온다. 성 왼쪽에 탑에 오르는 티켙을 사서 오르면 13세기에 성을 볼 수 있으며 바다를 지키던 망루를 자세히 볼 수 있다. 망루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높이 때문에 전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방어목적으로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언덕에는 17세기에 세운 “San Francesco”교회가 있고 공동 나는 탑을 건너 마을 산 위로 올라가 오른쪽 언덕길을 올라 바다를 향해 정상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면서 이 마을 최 정상에 있는 레스또랑에서 도마도 스파개티, 오렌지, 빵으로 점심을 대신하며,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휴식을 하다가 30분 후에 내려와 바다가 선착장에 이르렀다. c) 몬테로소(Monterosso) 몬테로소은 베르나차와 함께 친퀘테레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고 큰 마을 이다. 마을은 1056 에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다른 곳에 비해 공간이나 시설이 크다. 이곳의 중심도 “Rio Buranco” 강 연안에 집중되어 있다. 마을은 2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배로, 기차로 둘러 볼 수 있다. “Fegina” 마을은 비치가 좋고 호텔도 많이 있다. 넓은 백사장이 펼쳐진 해변은 오랜지 색, 하늘색의 파라솔이 줄지어 있어 아주 아름답고 건물들도 밀집하여 휴양지로서 최고이다. 마을도 기차정거장에서 가까워 관광객에게 가장 인기를 끌고 있다. 산책길은 주차장으로 통하고 그곳에는 14m에 이르는 거대한 바다의 신“Neptune” 상이 산기슭에 있다. 1910년에 “Arrigo Minerbi”가 돌로 만든 것이다. 몬테로소 신 시가지는 기차역에서 내려 터널을 지나면 구경할 수가 있고, 구시가 중심지는 언덕 위에 있다. 이곳에서 고대 성곽유적을 볼 수 있고 성채에 뚤려 있는 성벽총안을 볼 수 있고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에는 17세기에 지은 “San Francesco” 교회가 있다. 이곳에서 멋진 파노라마 경치를 볼 수 있다. 몬테로사에는 많은 관광객이 들어왔고, 골목마다 음식점은 성황을 이루었고 기념품점도 붐비었다. 바다 가에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색색의 파라솔이리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사장 위로는 오래된 건물들이 밀집하여 관광지로서 구경거리 많았다. 우리는 구시가지로 들어와 자유시간을 갔고 마을을 골목마다 둘러보았다. d)마나롤라(Manarola) 리오마죠래와 유사한 마을로 도로 밑으로 흐르는 Groppo 강 언덕에 마을이다. 이곳 주민들은 언덕에 있는 Volastra 옛 마을에 살다가 흑사병으로 인해 골짜기로 내려와 14세기에 마을을 형성하였다. 기차역에서 180m의 터널을 걸어 지나오면 마을에 이르고 아름다운 교회를 만날 수 있다. 모든 마을 길은 바다로 통한다. 이 교회는”San Lorenzo”교회로 1338년에 고딕 스타일로 돌로 지었다. 입구에는 사람과 사자머리의 조각이 있고 안에는 15세기의 친퀘테래의 거장의 작품으로 화형당한 “St. Lawrence” 성인의 그림이 보존되어 있다. 전면에는 예전에는 바다를 감시하는 감시탑 이었으나 지금은 종탑으로 되어있다. 공원에는 포도수확을 그린 조각이 여러 점 있다. 마나로라에서는 일몰 감상이 가장 뛰어난 곳이다. 마을을 관통하여 바다가로 내려가서 해안가 절벽위로 난 길을 따라가니 바다가운데 조그만 섬에서 다이빙하는 젊은이들도 볼 수 있으며, 모두 한여름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절벽위로 난 길을 끝까지 걸어가면서 언덕 위의 집들도 모두 고만 고만한 집들로 빨간색, 노란색 등의 화려한 색 갈로 칠을 하여 더욱 호화롭게 보였다. 다시 돌아 올라 오면서 계단 옆에 마나로라 사람들의 옛날 사진을 보았다. 그들은 예전에는 주로 농사를 지었고, 과일을 재배하였던 조상들의 힘들었던 과거를 사진으로 남기어 전시하고 있으니… 흑백 사진들은 원주민의 고달픈 삶이 그대로 조명되어 있어 현재의 생활상과 비교되고 있다. 지금은 관광지로서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고 있으니, 자연의 무한한 혜택을 받는 축복된 현대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e)코르니글리아(Corniglia) 코르니글리아는 바닷가에 직접적으로 면하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 Lardarina(라다리나)라고 부르는 돌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면 다 을 수 있다. 불규칙한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 세 개의 램프를 지난다. 이곳에는 철도 정거장으로부터 편리한 샤틀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코니닐리아는 높이가 약 100m 에 이르는 바다로 뛰어나온 절벽으로된 암벽이다. 마을은 길다란 도로로 연결되어있다. 걸어가면서 수확철에는 포도향기를 맡을 수 있다. 마을은 둘로 나뉘었는데 광장 버스 타는 곳에서 몇 계단 오르면 주민들이 성금을 거두어 1334년에 세운 “San Pietro” 교회를 볼 수 있다. 교회내부에는 15~19세기에 지역 예술가들이 그린 그림들이 장식되어있다. 건물전면에는 하늘의 수호자로 손에 키를 쥔 “St.Peter”의 작은 동상을 만날 수 있다. 교회 근처에 마을에서 오래된 탑이 있는 집을 볼 수가 있다. 그 근처에서 2차 대전 때 죽은 전사자들을 위한 동상 조각을 만날 수 있다. 동상 뒤로는 “Santa Caterina” 작은 교회를 만날 수 있다. 역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니 더위에 지칠 지경이나 포도밭에는 포도를 재배하는 주민이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다. 버스가 운행되나 시간이 안 맞아 걸어올라 광장 옆 골목 집에서 갈증으로 레몬 주스를 주문하였으나 초만원이라 다시 걸음을 재촉하였다. 다시 골목 위로 올라 바다가 보이는 마지막 지점에 올라갔다. 좁은 골목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서 내려가면 면 바다가 언덕 위로 코르니글리아 해안에서 마나롤라의 해안을 볼 수가 있다. 멀리서 보이는 마나로라 마을은 동화 속에 마을모양 바위 언덕 위에 둥글게 자리잡고 있다. 바닷가 산정마을 순방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골목에서 레몬주스를 주문하여 마시면서 오늘의 일정을 마감한다. 이로서 친퀘테래의 해안 절벽 마을 5곳을 모두 다 방문하여 마을마다 특이한 형태를 살펴볼 수가 있었다. 다섯 마을을 모두 돌아보고 다시 기차를 타고 오후 6시가 넘어 아침에 출발 하였던 “Sestri Levante” 역에 내려 콜택시를 불러 탄다. 역 건너 길 전주에 콜 택시를 부르는 전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텔에 도착하여 바쁜 하루를 마감하며, 저녁에는 걸어서 해안가로 내려와 바다가재, 생선 요리, 와인을 함께 하며 느긋한 저녁시간을 대화로 풀면서 어둠이 깔리면서 호텔로 돌아와 중세 마을을 돌아본 느낌을 간단히 메모해 둔다. 이제 토스카나 지역을 다 탐방하고, 이탈리아의 “Cinque Terre National Park”를 하루 종일 5군데를 다 둘러보고, 이 국립 공원 지역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세계각지에서 이곳을 보려는 관광객이 밀려드는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바닷가 해안 절벽으로 연결된 천연의 요새에서 주민들이 중세 때부터 척박한 바위산을 일구어 포도밭을 만들고, 오렌지 등 과일을 심고, 비탈진 곳에는 올리브 나무를 재배하여 고달픈 삶을 이어간 조상 들이 이곳을 개척한 정신을 높이 사야 한다. 그들의 후예들은 오늘날 이 천연의 유산을 계승하여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누구나 오고 싶어하는 곳으로 가꾸어 놓았다. 이 튼 날은 이제 알프스의 마을인 Dolomiti 로 가는 날이다. 버스로 09:00시에 출발하면서 도로 주변의 경치를 보면서 여유 있게 간다. (10) 아! Alps- Dolomite…… 이 튼 날 우리는 일 찍 출발하여 이제 알프스 돌로미테로 향한다. 버스가 가는 도로주변에 마을이 숲 속에 들어 않거나 언덕 위에 다양한 색깔로 몇 채식 나타난다. 이탈리아의 6월은 정말 다양한 색깔의 모습이다. 우리 차는 한 시간 만에 안펜 산맥을 넘어 간다. 언덕위로는 외딴 집이 한 채 외로이 서있다. 아주 낮고 푸른 구릉지대에 자리잡아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얀 모습의 주택, 주위의 푸른 나무들, 산맥을 넘어 오기 전 비가 내리더니 다시 불볕더위가 계속된다. 우리가 탄 차는 카녹사 지역을 지나니 이곳에는 중세 때에 왕권과 종교의 권위가 충돌하며 왕권이 굴복하는 “카녹사의 굴욕” 이라는 역사상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다가 왕권이 무릎을 꿇은 사건을 말한다. 즉 중세의 기독교군이 십자군 전쟁에 지면서 교황의 권위가 약화 되어 종교적으로 이탈자가 많이 생겨 났다. 그로 인해 교권이 약화되면서 성직자에게 세금이 부과되고, 황제의 권한과 교황의 권위가 다툼으로 계속되다가, 마침내 로마의 “Heinlich 4세”가 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우리가 탄 버스는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간직한 곳을 지나면서 정오경이 되니 도로변의 푸른 밭, 포도 나무에 스프링 쿨러가 작동되어 물을 뿌리고 있다. 차는 이제 밀라노 방향으로 진입하여 밀 밭, 포도밭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넓은 평야지대인 베로나 지역을 지나 점심때가 되어 이번에는 중간 휴게소에서 중식을 해결한다. 선택 식 부패로 야채 샐러드, 감자 튀김, 티본 스테이크, 하이네켄 맥주 등으로 한 시간 동안 여유로운 식사를 하고 다시 버스는 간다. 이 지역 부터는 원래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그 왕가의 영토였으나 1차 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패배함에 따라 이탈리아의 통치를 받게 되어 언어도 독일어가 사용된다. 버스가 다시 출발 하여 가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오른쪽으로 산이 하얗게 보이는 연봉이 계속되고, 오스트리아 쪽에서 들어오는 물류수송 차량이 끝없이 이어지고, 도로 주변은 이제는 Alps 산 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우리는 이제 프렌티노 주의 가장 청정 지역으로 간다. 이곳은 전기도 수력, 풍력, 태양광으로 발전 시키면서 그야말로 청정지역을 자랑한다. 주변에는 포도, 사과 밭이 즐비하다. 우리가 가는 좌측으로는 태양열 집열판이 늘어서 있다. 오른쪽 언덕 위로는 성채가 보이고 이제 우리는 알프스 산속으로 들어간다. 점차 고도가 높아지면서 수직으로 비죽비죽 솟은 하얀 봉우리들에는 얕은 나무들이 돌 틈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푸른 언덕으로는 드문드문 하얀 집이 한 채, 마치 동화의 나라처럼 보인다. 도로미테 산 군은 알프스 산맥 중 이탈리아 북부 산악지대로 약 5.500㎢에 이르는 넓은 면적에 석회암과 백운암으로 이루어지고, 오랫동안 풍화작용을 거처 뽀족 뾰족한 암봉의 연속으로 병풍을 두른듯이 다가오고 있다. 1차 대전에서 패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1918년 이탈리아 령으로 되었다. “Dolomites”라는 지명은 Dolomite 라는 암석에서 유래되었다. 돌로마이트 암석은 칼슘, 마그네슘, 카보네이트가 석회암과 오랫동안 합쳐져서 침식하여 형성된 돌이다. 그것은 이 지역이 수 억년 전에 바다였던 것이 지층의 변동으로 융기하여 오늘의 지형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고로 오랫동안 자연침식 작용으로 인해 이렇듯 다양한 암봉들을 형성 하여 놓았다. 알프스 지역은 1800년대에 들어와 수많은 등산인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이곳이 암벽 등반의 매카를 이루었다. 암벽등반 붐이 형성 되면서 유명하여 졌으며 이곳 출신의 이제 도로미테 알프스의 관문 “Bolzano” 마을로 진입하였다. 이곳은 해발 262m로 그렇게 더위에 시달린 우리에게 제법 시원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오늘은 도로미테 초입의 관문을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이 잡혀 있다. 시간이 어느덧 15:20분 넘어가니 우리는 여기서 케이블카를 타고 1.220m인 “Sopra Bolzano”에 오른다. 케이블카는 밭 위로 올라가면서 드문 드문 주택위로 밭과 밭을 이어주는 소로가 구불구불하고 포도나무가 질서 정연하게 줄지어 일정한 높이와 간격으로 산중턱까지 심어 졌다. 고도가 오르면서 얕은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숲 속으로는 가느다란 포장도로가 나있고 숲 속중간에는 바위가 마치 터키의 카파도키아의 버섯바위를 연상하듯이 뾰족뾰족 솟아있는 모습도 장관이다. 정상 바로 밑에는 목초를 거두는 트렉터가 움직이고 있다. 20분간의 케이블카를 타고 Bolzano 에서 내려 주변을 산책하며 돌로미테의 전반적인 풍경을 보고 이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Collalbo”(1160m) 마을로 가면서 도로미테 주변과 눈 덮힌 Alps 연봉을 보면서 그 져 감탄을 연발한다. 기차역 끝에서 내려 걸으면서 돌로미테 산 군의 기기묘묘한 연봉과 병풍같이 둘러싼 바위 암봉,그 오른쪽으로 만년설의 연봉이 계속되는 것을 즐기면서 걸어서 주차장 까지 오면서 즐비한 쇼핑가를 아이 쇼핑하면서 모두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암봉이 바로 지척에 보이는 마을 코랄보에서 오후의 가벼운 트레킹을 마치고 오늘의 숙소인 Ortisei 마을의 “Grones”에 이르니 오후의 햇살에 구름에 쌓인 이름 모를 암봉이 아주 신기하게 보이는 곳에 위치한 호텔, 오늘은 그림 같은 경치를 보면서 하루를 마감하였다. Alps-Dolomite 산 군을 트레킹하면서 오늘은 “Grand Dolomiti”를 본격적으로 정상을 향해 오르는 날이다. 알프스의 이태리 지역이 가장 광범한 곳이 돌로미테로서 2009년 경치가 뛰어난 것을 인정받아 UNESCO 세계 자연 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어제는 도로미테 초입에서 주로 중간을 트레킹하고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본 날이었다면 오늘은 산 능선을 향해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아래 산자락에 숨어있는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투숙한 호텔에서 <오르티세이> 미술 사진 책에서 사진으로 돌로미테의 여러 봉우리를 감상한 후 아침 일찍 08:05분에 출발하여 오늘은 험준한 자연속에서 하루를 산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날이다. a) 셀라 고개(Sella Pass): 버스로 “Ortisei”(1.236m)에 호텔을 떠나 가까운 곳에 있는 2080m에 위치한 전망대에 오르니 이곳이 셀라 패스로 도로미테의 여러 곳 중의 한곳의 자연을 눈높이에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전면에 “Langkofel”(3.181m)봉, 옆의 “Plattkofel”(2.955m)봉의 구름 덥힌 모습, 왼쪽으로 ”Sella”봉(3.152m) 산정 위로 곤돌라가 오르고 멀리 설산이 장벽처럼 둘러쳐 있는 곳으로 참으로 경이로운 산 경치에 몰입하게 되는 곳이다. b) 포르도이 고개(Pordoi Pass): 포르도이 고개는 2239m에 위치한 곳으로 하늘이 푸르고 쾌청해 아름답고 기온이 제법 선선하다. 우리가 이곳에 오르니 오토바이를 탄 젊은이 들이 행렬을 이루고 산 위로 올라온다. 주변에는 나무를 자르고 도로를 정비하는 인부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포르도이 고개는 산장이 크게 자리잡고 있으며, 이곳은 “Piz Boe”계곡으로 트레킹을 하는 출발점이다. “Val Mezdi”를 거처서 “Gardena”로 향하는 곳이다. 이 고개는 사방이 탁 트이고 태양이 비치면서 앞의 먼산에서 눈이 빛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Cable Car(요금 14.50 Euro)를 타고 2.950m에 있는 “Maria”로 오르니 정상 주위는 경이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른쪽으로 나아가니 햇살이 퍼지면서 절경을 연출한다. 봉이 엄청난 눈을 이고 병풍처럼 막아 선다. “Capanna Passo” 3152m 아래 계곡 Piz Boe에서 올라오는 구불거리는 산악 도로에는 오트바이를 탄 젊은이들이 올라온다. 좌우 정상에서 30여분간 주변을 감상하고 사진에 담은 후 내려오니 노란 야생화가 융단처럼 깔리었고, 산록에는 집이 한, 두 채 씩 드문드문 자리잡은 곳으로는 좁은 길이 나있고, 주민들이 거주하니 도로, 수도, 전기 등이 다 설치되어 있다. 이런 산간에도 주민의 살 권리를 존중하여 정부에서 시설을 뒷받침하여 준다 하니? 또 한 경이로운 것은 이런 산간 비탈에 조그마한 마을에도 교회가 서있고 종탑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c) 팔자레고 고개(Falzarego Pass): 차로 2.105m 고개까지 올라와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2.751m “Lagazuoi Torri Tre Sass”에 오르니 정말 가까이에서 현무암, 석회암의 암봉들이 풍화작용으로 부스러져 내려온다. 정상에 내리니 “To Fana Di Rozes”(3.225m)에서 아래 “La Villa” 계곡, 주변의 산 군에는 눈이 하얗게 쌓였고 해가 비추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정상에서 주변의 수시로 변하는 자연의 섭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모든 것을 사진에 담고 우리는 자연의 신비에 그저 할말을 잃고 다시 아래로 내려온다. 12:00시가 넘어 산길을 내려 가니 “Dampezzo”(담배초) 마을이 나타난다. 담배초 마을은 동계 올림픽이 2 번이나 개최된 곳으로, 산간에 상당히 큰 도시이며 도시 전체가 하얀색으로 조화를 이루어 환상적으로 보인다. d) Misurina Lake(미수리나 호수) 이번에는 아름다운 호수를 찾아간다. 1.756m고지에 분지 위에 빙하에서 녹아 내린 물로 맑고 청정한 호수가 생겨난 곳이다. 호수 주변의 “Monte Pluna” 산(2.305m)과 “Cadini” 산과 그 아래 자리 잡은 호텔 풍경이 어울러져 물속에 잔영이 투영되어 일렁거린다. 주변에도 수많은 모터 싸이클을 타는 젊은이 들이 모여 들어 아름다운 절경을 즐긴다. e) Durensee(듀렌 호수) 미수리나 호수를 떠나 이번에는 조금 더 내려와 듀렌 호수가에 이른다. 주변의 쏟아질 듯한 산 봉우리가 호수에 투영되어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호수 앞 뒤로 모두 깎아지른 듯한 석회암의 하얀 돌산으로 막혀 있고, 그 암벽에도 나무들은 자라고 있다. 앞으로도 뾰족 뾰족한 암봉들이 눈을 이고 서있다. 돌로미테의 하루의 모든 순방을 마치고 다시 Ortisei 의 “Grand Grones Hotel” 로 돌아간다. (11)시우시(Alpe Di Siusi)의 대초원 트레킹 대초원 트레킹 개념도 ![]() Ortisei(1.236m)→St.Christna(1.446m)→Piz(2.109m) →Trekking→Siusi→Compatsch(1.825m)→Sciliar(1.000m) 오늘은 돌로미테의 마지막 날로 하루 종일 트레킹 코스를 함께하기로 한다. 1.236m 산 중턱에 아름다운 산밑에 자리잡은 “Ortisei Grones Hotel”을 출발하여 버스로 5분 거리에 있는 케이블카를 탄다. “Val Cardena” 계곡 위로 4.3km를 올라 1.446m나 되는 “St. Christna”위의 정상에서 내린다. 케이블 카에서 나와 이번에는 “Piz~Compatsch” 구간, 약 10km의 그릉지대를 트레킹하는 날이다. 56㎢의 넓이에, 고도 2000m 높이의 광활한 초원지대가 끝없이 펼쳐진 곳이다. 산중턱으로 난 트레킹 코스는 아주 낭만적으로 가늘게 뻗어있다. 걷기가 어려운 사람은 이곳에서 한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저 아래 평탄한 길로 해서 목적지까지 갈수가 있다. 고원 풀 밭 사이로 난 길을 들어가니 노란 후리지아, 하얀 민들래, 노란 민들레 등 이름 모를 들꽃이 고원에 가득하게 피어 있어 꽃방석을 깔아 노은듯 하다. 몽골의 초원보다 더 아양하고 아름다운 들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정말 어린 시절의 노래, “목장길 따라…..”의 노래가사가 저절로 나온다. 우리나라의 분주령, 곰배령은 넓은 들이 아니나 이곳은 알프스의 저 먼 산들이 둘러쳐져 있는 아주 아늑한 구릉지대에 끝없이 들꽃들이 피어나고 그사이로 우리는 간다. 아침 햇살의 싱그러움과 들꽃향기의 냄새가 온 누리에 퍼지면서 가도가도 끝이 없는 꽃들의 잔치이다. 수없이 사진에 담아보며 정말 즐겁고 이렇게 자연에 풍경에 사로 잡혀 하루 종일 걸어도 피로가 오지 않을 것 같다. 삼거리에서 한동안 쉬다가 거리를 단축하면서 “Monte Piz” 로 걸어 내려와 이번에는 소들이 마음 것 자유롭게 풀을 뜯는 목장 길로 들어가서 젓소 가족의 생태를 살펴본다. 목장을 지나 휴식처로 내려오니 “샤논” 레스또랑으로, 통나무로 지은 야외 쉼터에서 커다란 차양우산 아래 나무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Frishe Buttermich”(신선한 버터밀크)라는 통나무 간판이걸려있어 인상적이다. 이곳은 중간 휴식처로서 트레킹을 계속하려면 여기서 각종 음료와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큰 우산이 바람에 넘어 갈가바 아래에 고정 나사못을 나무 판에 박아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게 한다. 트레킹 중간에 차를 마시거나 쉬는 사람이 많아 주문이 한참 밀려 기다리는 것이 언제나 미덕이다. 한 시간 이상을 쉬면서 전원의 아름다움과 향그런 공기를 함께 하면서 다시 트레킹에 나선다. 날씨가 갑자기 구름이 끼면서 어느새 빗방울이 떨어진다. 1500m 넘는 산간이라 항상 방풍 복과 우산을 준비하고 다녀야 한다. 전설과 마녀들의 속삭임이 전해 내려오는 쉴리야르산, 멀리 알프스의 준봉들이 병풍을 두른듯이 주위를 둘러 사고 그 안에 끝없는 들판에 융단처럼 노란, 들꽃이 펼쳐진 곳이다. 아주 멀리 구름과 안개 속에 이곳에서 가장 높은 3.343m에 만년설을 머리에인 “Marmolada”산이 하얗게 빛나며 조화를 이룬다. 지나가는 비를 맞으며 트레킹을 계속하여 “Huntes & Gods” 지역에 오니 이곳에서 Alps 지역의 조상들이 2.300 년 전 부 터 살았다는 유적지를 만난다. 해설 판을 보면서 한동안 알프스의 조상 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다시 이어지는 꽃 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 오니, “Compatsch” 지역에서 14:00시가 넘어서 오늘의 트레킹을 끝내게 된다. 마을의 “Zental Cafe” 에서 휴식을 하며 오늘 대자연의 품속에서의 들꽃과의 대화를 끝내려 한다.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오늘의 트레킹을 마감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소나기가 쏟아진다. 이곳의 “Alps Di Siusi” 1.850m의 고원 지대에서 다시 빗속에 Cable-Car를 타고 “Siusi Allo Sciliar” (1.000m) 지역으로 내려온다. 오늘은 10km에 4시간 이상을 걸으면서 정말 가슴이 시원하도록 신선하고 향긋한 공기를 평생 처음으로 마음껏 마신 날로 기억될 것이다. 이제 알프스 돌로미테 지역에서 하루는 중간 산간지대 트레킹, 다음날에는 5곳의 Pass(고개마루)를 기점으로 주변산을 오르내리고, 호수를 찾아가는 일정을 마무리하고 마지막으로 끝없는 초원지대를 벗어난다. 들꽃과 시원한 공기를 마시면서 하루를 보내고 15:00시 경에 출발하여 Milano~Venetia 고속도로 나와 알프스의 산간을 달린다. 2시간 이상을 달려 우리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호수로 둘레만도 150km 이상으로 큰 바다 같은 “Garda Lake” 가에 이른다. 이 호수는 알프스의 석회암에서 녹아 내리는 빙하의 물이 모여 들어 호수 물이 맑고 투명하다. 호수의 좌우로 알프스의 암봉이 솟아있고 그 중턱에는 하얀 성이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다. 석회암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좌측으로는 멀리 시야가 트이고 넓은 바다처럼 끝없이 호수가 뻗어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말을 맞아 수영을 하거나 싸이클을 타거나 산책을 한다. 연못에는 흰 거위가 6마리의 새끼를 거느리고 유영을 하고, 한편에서는 검은 오리가 아주 작은 새끼 4마리를 인솔하고 수영을 가르치고 있다. 이 주변도 예전에 합스브르그 왕가와 귀족들이 주거지였고 최근에는 유명 인사들의 별장지대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돌로미테의 자락에서 하루를 보내기 위해 오늘은 “Du Lac et Du Parc. Grand Hotel” 에 여장을 풀고 쉬어 가기로 한다. 아침에 호수 가를 산책하니 이른 아침에는 어제 저녁과는 다르게 조깅하는 사람만이 있어 한산하다. 이 호수는 남으로 길게 뻗어있고 알프스의 빙하에서 발원한 물리 유입되어 호수물리 아주 청정 하다. 아침 09:40분에 호텔을 떠나 이제 마지막 탐사지인 ”Verona”로 간다. 한 시간 만에 베로나에 진입하여 성벽 앞에서 아레나 광장으로 이동하였다. (12)중세도시 Verona(베로나) 광장 앞에서 관광용 꼬마열차를 타고 베로나 시내의 골목골목을 따라 명소를 방문하면서 중세도시를 우선 시각으로 느껴보았다. 열차의 마지막 여정은 베로나 시의 중심 광장인 “Erbe” 광장 이었다. 광장에는 중세건물이 주위에 죽 둘러서 있고 가운데로는 텐트를 친 임시 상가가 있다. 광장을 중심으로 골목마다 중세 건물이 즐비하고 광장 중앙에는 “람베르티” 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이탈리아의 오페라 축제가 열리며,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가 쓴 “Romeo and Juliet”의 작품의 배경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다. 희극 속에 주인공이 살던 집이 이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루지 못한 사랑의 연인들이 만나던 장소를 찾아와 그들의 젊은 시절을 희상하고 있다. 이제 베로나 시의 중세 유적을 몇 가지 스크린 하기로 한다. a) Arena Amphitheatre(아레나 경기장) 로마시대의 원형극장으로 중세도시의 성밖에 위치하고 있다. 이 경기장은 1세기 초에 세워진 것이나 3세기에 와서 “Gallienus” 황제가 지금처럼 크게 지었고 규모나 웅장한 면에서 로마의 “Colosseum” 다음의 규모를 자랑한다. 서의 축성은 베로나 주변에서 모은 벽돌과 돌로 축성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2층의 아취는 장미빛 붉은 돌로 쌓은 것이다. 서의 벽은 수세기 지나는 동안 무너지고 지금은 1층에 남아있는 4개의 아취가 3층까지 이어져 있다. 경기장 내부는 거대한 테라스로 이루어졌고 둥글게 원형으로 되어있다. 경기장은 456 x 360feet나 되는 거대한 크기이다. 이 경기장에서는 검투 경기와 기타 경기용으로 사용되었고 1913년 부터는 대규모 오페라 공연장으로 사용되었다. b) Piazza Delle Erbe(엘베 광장) 엘베광장은 이태리에서 가장 화려하고 역사적인 광장이고 베로나의 생생하고 살아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둘레에 역사적인 건물과 동상이 즐비하다. 1301년에 “Alberto I“가 설계하고 19세기 초까지 도시가 이루어 졋느며, 거대한 로마네스크식 건축물인 “Domus Mercatorum”과 광장 끝에 1668년에 건축한 가장 인상적인 “Palazzo Maffei” 궁전 건물이 유명하다.. Maffei 궁전은 “Hercules, Jupiter, Venus, Mercury, Apollo, Minerva”의 신상을 전면 난간 위에 조각한 건물로 가장 아름다운 신상이다. “마파이” 궁전 왼쪽으로 1370년에 벽돌로 쌓아 올린 “Gardello 탑”이 웅장하게 서있고 1626년에 가서야 종탑이 완성 되었다. 또 광장 북동쪽으로 첫 번 째 건물인 16세기에 “A. Cavalli”가 그린 신화의 프레스코화로 장식한, 그림 같은 모양의 “Mazzanti”의 석조 건축물 등, 모두가 중세 풍의 건물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다. 그 옆으로 “Lambertl 탑”, 이 탑은 베로나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274Ft이다. 이는 1172년에 시작하여 둥근 종탑과 더불어 1464년에 가서야 완성되고 이 종탑에는 2개의 오래된 종이 보존되어 있다. c) Juliet’s House 베로나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유명한 문호 Skakespeare의 작품 “Romeo and Juliet”의 작품 무대가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이다. 줄리엣의 집은 엘베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고, 벽돌로 전면이 쌓아진 건물로 13세기에 지어졌다. 이 집은 줄리엣 가문의 집이었다. 이 집은 2층에 밖으로 내민 발코니가 있고, 세익스피어의 비극의 대사구절이 영어와 이탈리아 어로 틀에 새겨져 있다. 줄리엣의 집은 14세기 풍으로 재생되었으며 큰 홀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그린 그림이 있고, 2,3층 방에도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엘바 광장은 주변이 중세의 건축물로 4각형으로 둘러져 있다. 그리고 건축물 위에 4명의 조각상이 서있으니 이는 “Enrico Noris”, “Scipione Maffei“, ”Fracastoro” 로 아취형 문 위에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광장 한가운데에는 1865년에 “Ugo Zannoni”가 조각한 “Alighieri Dante”의 상이 높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Maffei궁전 건물 안에 중세 레스또랑에서 유명한 Chef 가 요리하는 4 코스의 요리로 이태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려 한다. 이 식당의 유명한 조개요리(실 같은 감자로 쌓은 것), 육회요리를 맞보며 이탈리아의 요리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에필로그(Epilogue) 이번 이태리의 여행에서 보고 느낀 바를 정리하여 우리의 나아갈 바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선 이번 탐사여행은 과거와는 달리 거창한 유적이 아니라 중세부터 숨겨져 내려온 소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다. 티볼리 시의 중세도시의 색 갈은 고동색에 노란색이 가미된 특이한 색갈이다. 도시 전체가 색갈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정원문화가 그 가운데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돈 많은 귀족이나 위정자들의 작품이나 그것도 역시 푸른 숲의 색 갈과 하얀 물의 분수가 어울러지는 기막힌 색의 조화가 연출되어 동양인에게 신비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 소도시에 이런 정원이 여러 개가 집중되어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토스카나 지방으로 가면서 우리는 끝없는 푸른 구릉지대와 싸사이푸러스 트리의 조화를 눈부시게 바라보면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생각해 낸다. 구릉지대의 푸른 밀밭, 군데 군데 누렇게 익어간 밀밭이 조화를 이루어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옛 주택을 개조하여 호텔을 만들고 조그만 방이라도 멋 지게 꾸미었다는 것도 그들만의 장점이다. 가는 곳마다 현지의 이태리 음식도 아주 특이하고 우리에겐 전혀 생소하거나 입맛의 거리를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치비타, 시에나 중세도시, 산 지미나뇨, 아시시, 루카 등 조그만 중세 도시들의 고색 창연한 고성, 수 백 년 내려온 주택 등이 원주민들은 불편할 텐데 그 주택의 외관은 두고 내부만 개조하여 살아가는 지혜가 부럽다. 내가 투숙했던 산 지미나뇨의 “Cisterna Hotel” 은 담장이가 올라간 3층의 좁은 건물을 그대로 개조하여 호텔로 사용하고 2층의 레스또랑도 문을 열면 고대 도시가 한눈에 보이고 TV 안테나가 시야로 들어오고 멀리 고성이 정상에 둘러있다. 나는 맨 위 3층의 방에서 문을 열고 중세도시를 내려다보는 기쁨을 누리었다. 또 여러 형태의 주택이 공존하고 어디를 가나 조그만 교회도 있고 종탑이 늘 옆에 있다. 그 색갈도 비슷하다. 이런 것이 다 색의 조화와 예술이다. 시에나 시의 캄포 광장은 정말 특이하다. 높은 데서 내려다본 광장의 고동색 칼라는 정말 중세적인 모습이다. 그곳에 자리잡은 듀오모 성당은 그야말로 보물이다. 성당 안의 그림은 그들의 종교사 생활사, 개인의 종교 일생을 모두 프레스코화로 표현하여 수세기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유럽의 성당 문화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불교문화가 산재하고 있다. 예컨대 합천의 해인사, 양산 통도사, 순천의 송광사 등 우리나라의 전통사찰도 고구려 소수림 왕 때인 AD 372 년에 불교가 들어온 이래 2000천년 가까이 되었고, 불교나 불교 문화유산도 많은 것이다. 사찰마다 다 불화로 장식하고 불교 미술품도 많으니, 예컨대 석가의 팔상도를 비롯하여, 탱화가 사찰을 장식하고 있다. 종교와 그림이 합하여 지면 시너지를 발휘할 것이다. ![]() 또 그리스의 산토리니 섬은 마치 친퀘테레의 해안가 절벽과 유사하다. 다만 그리스는 해안 단애에 지은 옛 주택을 하늘색으로 지붕을 칠하고, 벽은 흰색으로 칠하여 모두 산뜻한 색 갈로 보이기 때문에 사람의 눈길을 끈다. 이런 것이 이번 리구리아 해안가 친퀘테레에서는 빨간색, 하늘섁, 노란색 등으로 외벽을 칠해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조그만 발상이 관심을 끄는 것이다. 인도에 가면 라자스탄주의 도시인 “Jaipur”는 핑크 색을, “Udaipur”는 흰색을, “Jodhpur”는 푸른색으로 치장하여 “Triangle City” 를 만들어 Delhi시와 연결하여 찾는 사람이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고 관광객이 넘친다.. 그리고 친퀘테레는 해안 절벽 바위지대에 터널을 뚫어 기차를 다니게 하여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세계 자연 유산, 문화유산으로 되려면 이렇게 발상의 전환이 중요하다. 또 알프스의 돌로미테 지역도 수 많은 봉우리를 여러 곳에 케이블카 등을 설치하여 산과 경관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누구나 사계절에 절경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우리 나라도 이제 발상의 전환을 할 때가 되었다. 제조업도 사양화되고 기술개발도 한계에 이르고, 우리의 음식문화도 이제는 세계화하여야 한다. 크로아티아를 여행 하였을 때 조그만 한국식당에서 한국음식에 대한 책을 칼라 풀 하게 발행하여 홍보에 열을 내는 것을 본일이 있다. 우리도 이제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으니 지혜를 발휘할 때가 되었고 우물 안 개구리 시대를 탈피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이런 발상의 전환으로 관광대국을 이루었으나, 정정의 불안, 잦은 선거로 인한 복지의 증가 등으로 그리스, 스페인, 폴투갈, 이타리아 등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이다. 문제는 국가관리를 제대로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대영제국도 이제는 세계 중심 국가에서 멀어져 가고 있으니, 세계의 주도권은 대서양를 건너 미국으로 갔으나 이제는 다시 태평양을 건너 동방으로 오고 있다. 우리나라도 일본 열도와 중국 대륙 사이에 낀 나라로 오로지 머리 싸움에서 이겨야 존립할 수가 있는 시대에 온 것이다. 이런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며 이번 여행을 마감하려 한다. 15:30분 공항으로 출발하여 30분이나 늦게 AF 1177기 편으로 파리의 사르르 드골 공항으로 향하였다. 비행기는 초원위로 낮게 나르니 프랑스의 전원풍경이 내려다보이고 풍력 발전기가 돌아가는 농촌풍경을 내려다 보니 풍요롭게 보인다. 시간이 늦어 빨리 움직이어 가장 먼 이동거리에 있는 L-48 게이트에 이르러 수속을 마치니, 비행기는 이내 이륙하여 안트워프 상공을 지나 네델란드를 건너 발틱해로 나가 타린 앞 바다를 건너 러시아를 가로 질러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로 고공으로 비행하여 울란바타르르 지나니 2시간 30분이 남았다. 발해만을 지나 인천공항에 14:45분에 무사히 착륙하여 돌아왔다. 국내에서는 “메르스 중후군”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있다. 이는 중세 유럽이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사회발전이 정체된 예에서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 이런 바이러스성 증후의 만연은 현대문명의 정체를 가져올 수 있다. 이제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런 현대 괴질의 발병원인을 규명하여 예방하는 것이 나라발전의 지름길이다. -The end- PS:이 여행기를 쓰는데 참고서적 영문판: 1)Villa D'este, 2) Civita and Bagnoregio, 3) Tuscany, 4) Assisi, 5)Siena, 6) Cinque Terre, 7) Lucca, 8) Verona등과 현지 유인물을 참고 하였읍니다. 오류를 지적하여 주시면 수정하곘읍니다. 감사합니다.- (김 한종)- |


테마세이 대표번호
여행 문의하기.jpg)
공항을 버스로 나와 로마 남쪽 32km 지점에 있는“Tivoli”(티볼리)를 향해 한 시간 이상을 달려 이 튼 날 새벽 00:10 분 경 로마 교외 “Tivoli”의 고성에 위치한 “Torre S. Angelo Hotel”에 도착하였다.
이탈리아는 지중해 한복판에 장화처럼 유럽대륙에 달려있는 반도국가로 면적은 30만 1277㎢, 인구는 약 6천 만 명 이다. 전국토의 80%가 농지로 연안의 섬도 국토의 17%를 차지한다.
15세기가 되면서 이탈리아는 예술과 학문이 발달하면서 위의 도시들이 예술의 중심지로 발달하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 “미케란제로” 등 불굴의 예술가들이 탄생하였다. 이 시기에 로마제국은 발칸반도를 넘어 콘스탄티노플지역 동로마제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절대 군주제도가 이루어 졌다. 천 년을 이어오던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프랑스, 스페인 등의 제국이 번성하면서, 베니스 등의 무역으로 번영하던 도시들이 쇠퇴하게 되었다. 1848년 주변국들과 나란히 공화국을 이루다가 “에마누엘” 2세 시대에 와서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으며 1871년에 이르러 Roma가 수도가 되었다. 이 후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에 가담하여 전승국이 되었으나 무소리니의 파시스트 정부가 들어서면서 세력이 강화되고 독일과 함께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었다. [0].jpg)
빌라 테스테는 Ferrara의 추기경인 “Lippolito D’Este”(1509~1572)에 의해 착상되었다. 그는 교황 “Julius 3세”에 의해 Tivoli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그때부터 이곳에 대저택을 지었고, 연회를 베풀면서 빌라 테스테가 탄생하였다. 그는 건축가 “Ligorro”와 여러 예술가들을 동원하여 화려하게 지었다. 그가 1572년에 죽자 1624년까지 “Alessandro D’Este”에 승계되었다. 그 후 새로이 물의 정원을 건축하였다. 그가 죽자 1918년까지 이곳을 지배하던 합스브르그 왕가에 넘어가면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1차대전이 끝나자 이곳은 국가로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새로이 복원되면서 오늘날의 시설로 거듭나게 되었다.
a) Neptune 분수: 앞으로 물고기 연못과 더불어 이 정원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한 분수이다. 이 분수는 1920년대에 “Attilio Rossi” 가 만들었다. 분수는 서서히 밑에서 솟아오르고 점차로 위로 올라가면서 강렬하게 솟구친다. 물줄기가 대칭으로 솟아 오르면서 피라미드 형태로 솟구치고 있다. 분수의 아래로는 꽃과 나무 위로 물이 흐르고 있다.
수: 백 개의 분수 통로 아래에 있다. 4마리의 용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분수를 솟구친다. 가운데 용에서 높이 물이 솟아올라 장관을 이룬다. 분수 안쪽으로는 헤라클라스의 조각상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다. 둘째 단에는 장식 대리석을 사용하였고, 셋째 단에는 여러 인물들의 표정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분수의 물은 티볼리로 부 터 로마를 흐른는 “Aniene” 강을 의미한다.
기계로 분사하며, 물이 솟아오를 때마다 올빼미가 뛰어 오르는 모습으로 피리소리처럼 들리며 2 단의 분수로 장식되어 있다.
이 빌라 란테도 경사면의 땅에 조성하여 위로 4각형의 집을 짓고, 아래로 정원을 꾸미고 분수를 만들어 놓은 곳이다.
b) Lumini 분수: 이 분수는 정원의 입구에 위치해 있다. 70개의 분출구가 있으며 중앙의 분출구가 강력하게 물을 뿜어낸다. 이 분수의 양쪽에 Neptune과 Venus의 상이 서있는 동굴모양으로 꾸며진 곳에서 분출하며 티볼리의 빌라 데스테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치비타”는 “Eagle’s nest”(독수리 둥지)라고 불리었으며, 한때는 “Castel Gomiz”라 불리었던 중세의 요새 마을이다.
면서 절벽 위의 치비타 마을과 방뇨레지오 마을을 연결하는 다리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침식이 진행 되면서 1923년에 돌다리가 건축되고, 그 후 1965년에 지금의 콘크리트 다리로 대체되었다. 그로 부 터 자연 침식의 의해 치비타는 죽어가는 마을로 불리었으나, 역사적으로 꼭 남아있어야 하는 마을이 되었다.
광장 옆 오른쪽 건물 안 3층에는 이곳 Civita가 옛날 화산의 폭발로 하나의 응회암으로 생성되어온 과정이 학문적으로 연구된 것이 전시되어 이 마을의 생성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의 발굴된 화석유물이 전시되어 이 산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이루어진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은 외적에 침입에 대비하여 성벽과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 예부터 천연의 요새로 여기고 있다.
기독교의 성인의 한 사람으로 추앙 받는
이 도시는 카도릭 여행자, 순례자들이 모여 들면서 도시의 성가를 더해가며, 그의 기념성당인 “The Basilica of St. Francis”의 웅장한 3층 교회와 교회 안에 평생을 그림에 바친 성화가 “Giotto”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짧은 일생을 그린 28폭의 프레스코화가 가장 주목 받는 그림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문둥병 환자를 만나면서 그의 생은 종교적인 삶으로 바뀌었다. 그는 자기의 옷을 병자에게 벗어 입히고, 그를 끌어안으면서 몸에서 전율이 일어나고 내면에서는 기쁨과 평안이 충만한 체험을 겪게 되었다. 이런 일이 일러난 후에 그는 그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고 특히 문둥병 환자를 돌보면서 검소하게 살아가는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로 인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한 수도회가 그의 이름으로 탄생되었고, 그들의 모임은 더욱 나환자와 버림받은 사람들의 구원에 전념하게 되어 많은 수도사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jpg)
.jpg)
.jpg)
[0].jpg)
.jpg)
.jpg)
.jpg)
.jpg)
.jpg)
.jpg)
.jpg)
.jpg)
로마 시대에서부터 지어진 이오니아식 미네르바 신전은 웅장하고, 석조 계단 위의 들어선 대리석 기둥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고, 성당 안에는 성단이 엄숙하게 있고 주위에는 성화로 장식되어 있다. 그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자리잡고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서 360도의 전방위로 방어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이 성에서 움부리아 계곡의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운 경치를 볼 수 있다. 1174년에 방어 목적으로 축성하였고, 그 후에 Frederich 2세가 이성에 머물렀다. 1972년에 이 요새는 “Brother Sun, Sister Moon”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로마 인근의 많은 유적과 유물은 이미 국내에 많이 소개되어 로마 문명을 우리에게 상당히 근접하고 누구나 많이 알고 있다. 이번 여행은 과거의 로마 중심의 답사여행에서 탈피하여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곳을 중심으로 답사를 하려는 것이다.
중간에 차에서 내려 우리는 우리나라의 둘레길 개념으로 만들어진 발 도로시아 트레킹 코스 일명 ”순례의 길”에 들어섰다. 오후 뜨거운 태양을 피해 5시가 넘어 걷기를 시작하여 약 5.5 km 정도를 걸으면서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역의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노란 후리지아 꽃, 민들레, 붉은 양귀비 등 이름 모를 들꽃들의 향연을 눈과 몸으로 호흡하였다. 도로를 따라 양쪽으로 끝없이 전개되는 푸른 구릉지역의 아름다운 풍경을 뜨거운 오후의 태양열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저 멀리 언덕 위의 푸르고 외롭고 혼자 곧게 서있는 나무의 행렬, 그 끝자락에 외로이 서있는 교회와 탑 들, 너무나 목가적인 그림으로 다가온다. 그저 넓은 땅에 비옥한 농토가 그림같이 시야로 들어온다.
아침 일찍 길 위를 느린 자세로 가로질러 가는 큰놈의 달팽이도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가고, 푸드득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들, 땅의 미생물들과 함께 무한대로 피어나는 들꽃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1229년에 짓기 시작하여 1264년에 완공하였고 1284~1299년 까지 “Giovani Pisano”가 전면을 완성하였다. 전면은 세 개의 아취로 구성된 로마네스크 식으로 우아하고 조화로운 문이다. 지금의 모든 성당의 시설은 1382년에 가서야 완성되었고, 가운데 삼각형 탑 위에 성상도 완성되었다. 이는 “Orivieto” 성당 전면과 흡사한 고딕 양식을 띠었다. 이렇게 수십 년을 두고 로마네스크와 후기 고딕양식을 가미한 흰 대리석으로 된 아름다운 성당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1372~1562년 사이에 대리석바닥에 여러 조각가,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새기었다. 제일 중앙 입구 앞에 1번에는 “Giovanni de Stefano”가 1488년에 무기를 새기기 시작하여 안으로 들어가면서 기하학적 무늬와 구약 성경 이야기를 새겨 놓았다. 흰색과 검은색의 대리석을 설치하고, 바닥에 모두 49곳에 대리석에 조각을 하였다. 성당 가운데에는 1532년 “Peruzzi”가 만든 <니콜라 피사노> 설교제단이 설치되었고,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광장은 시에나의 역사를 대표하는 도시의 상징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 있다. 3개의 면으로 언덕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중심을 향하여 경사진 반원형으로 되어 있고, 1347년경에 벽돌을 깔았고, 오늬(herring bone)모양으로 햐얀 돌을 깔아 세로로 아홉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이 특별한 형태는 조개 껍데기의 모양으로 되어있다.
특히 캄포 광장의 중심에 있는 가이아 샘은 시에나의 최고의 조각가였던 “Jacopo Quercia(1374~1438)에 의해 만들어진 고딕 양식의 르네상스 스타일로 조각하여 만들어진 샘터로, 한편의 조각이요 그림이다. 이 샘터의 모든 조각 품들은 지금은 시청 소관으로 되어 있다.
토스카나 지역의 자그마한 중세도시로서 “산 지미나노”는 334m의 언덕에 위치하고, 성벽 아래로는 수많은 탑들이 솟아 있었으나, 다른 도시에 가려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던 작은 도시로 최근에야 “아름다운 탑의 도시” 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a) 포폴로 궁전: 궁전보다는 탑의 존재로 유명하며 이곳의 듀오모 성당보다 높아 언덕 위에 “Torre de Grossa”(그로사 타워)라는 54m나 높이 솟아있는 탑이 서 있어 유명하다. 이 탑 안으로 미로 같은 사다리를 타고 탑의 꼭대기로 오르니 조그만 소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토스카나 지역의 로마, 피렌체, 베니스의 탑의 풍경을 초월하는 모습이다. 맨 위에 아주 큰 종이 달려 있다.
c) 물 저장소: 언덕 위로 걸어올라 넓은 광장에 이르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 광장 가운데에는 돌로 네모의 문틀 모양으로 쌓아 올린 둥근 샘터가 있으니, 이는 중세시대의 큰 물 저장시설이 그 아래에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둥글게 돌계단으로 둘러 있어 관광객들의 휴식처이다. 특히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맛있는 크림을 사서 이곳에 앉아서 먹는 관광객이 많으며 누구나 앉아서 휴식하기 좋은 장소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시를 남북으로 갈라서 올라가 내려가는 언덕을 중심으로 모든 탑들이 솟아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소도시는 순례자들이 찾아 들어 성지가 되면서 발전하였으나 1348년 흑사병의 창궐로 쇠퇴하게 되어 1353년에 피렌체에 합병되었으며 그 후 잊어진 도시가 되었다. 그 후 이곳이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가 990년, 994년 두 차례나 로마를 방문하면서 이곳에 머무르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그 후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 들었다.
오늘의 숙소는 물 저장소 앞에 푸른 담쟁이가 3층까지 덮여 올라간 “La Cisterna Hotel”로 이 지역의 오래된 건물이라 좁은 공간이 특징이다. 투숙 후 작열하는 오후의 태양을 피해 2시간 반을 쉬다가 종탑으로 올라가 시내를 내려다 본 후 내려오면서 이곳의 조그만 박물관을 보니, 중세 유명 화가인 “Palazzo Comunale”와 “Torre Grossa” 의 그림으로 전시되어 있다. “Sala di Dante”의 그림들, 시에나와 프로렌스 학파의 걸작품이 전시된 곳으로 조그마한 도시인 “San Gimignano”의 대표적인 곳이다.
Lucca는 에트루리아인들이 만들었으나 기원전에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기독교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갈 때 루카는 주교구가 되었으며 발전을 거듭하였다. 9~12세기에는 토스카나 지역에서 가장 발전한 도시였다. 루카의 공국은 500여 년이나 계속되었고, 1805년에 나폴레 옹에 의해 점령 되었었으나 1870년에 이탈리아로 통합되었다.
e) 푸치니(Puchinni) 생가: 중세의 성당 산 마르치노를 지나 “푸치니” 동상이 서있는 광장으로 가서 동상을 만나보고, 동상 뒤에 있는 그의 생가를 찾아간다. 그는 이곳 Lucca 에서 태어나 밀라노로 유학가서 그곳과 토리노에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이곳의 그의 2층 주택은 그가 17년간을 살았던 곳으로 지금은 그의 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이 안에는 1901년에 제작하여 사용하던 그랜드 피아노가 전시되어있고, 그의 미완성의 “트란도트”도 이곳에서 쓴 것이다.
이태리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그들은 이태리의 오페라를 세계무대에 등장시킨 주인공이다. 이태리에서는 베르디를 신이라고 추앙하며 그의 노래는 아주 대중화 되어있다. 그러나 이태리 밖으로 더 유명한 작곡가로는 바로 푸치니이다.
국내에서 연례행사로 공연되어 너무나 친숙하다. 예컨대 “그대의 찬손”, 토스카의 “별은 빛나고” 등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애창곡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뮤지컬 무대에서 자주 공연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토스카나 지역을 떠나 이제는 제노아 방향으로 달려 지중해의 최고의 휴양지인 리구리아 주의 포르토피노로 간다. 차창 밖으로 대리석재를 잘라다 쌓아놓은 석재들이 즐비한 상가 너머로 먼 산 밑의 대리석 광산이 하얀색으로 하늘과 맞닿아 있다.
이들 5개의 특별한 자연 풍경으로 인해 1997년 UNESCO 세계 자연 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중세부터 지중해의 아름다운 해변가에서는 연어, 돌고래 등 어족자원이 풍부하여 주로 어업에 종사하였다.
지금 주민들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야 하며 건물을 짓거나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는 법으로 금하고 있다. 그로 인해 몬태로소 지역 이외에는 호텔이나 숙박시설이 없다.
지금은 여러 번의 사고로 패쇠되어 있으나 수많은 연일들이 걷던 길이었다. 두 섬의 주민들은 이제는 산의 터널을 뚫어 연결시키고 있다. 이전에는 두 곳이 포도밭 사이의 구불구불한 산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해안 길은 절벽으로 가파르고 위험하나 연일들에게는 낭만의 길이었다. 우리들은 이 사랑의 길에서 수많은 자물쇠를 발견하고, 이 영원한 사랑의 심볼이 이곳에서 시작 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이 자물통은 지금도 이곳 선물코너에서 팔고 있다.
Monterosso와 더불어 Vernazza 는 친퀘테레에서 가장 오래된 1080년대에 세워진 마을이다. 골목을 걷다 보면 중세시대를 연상하며 Genoa 시대의 건물이다. 이 마을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긴 개울을 갖고 있다. “Vernaccia“라는 와인의 어원을 가진 “Vernazzola”가 바로 그것이다.
몬테로소은 베르나차와 함께 친퀘테레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고 큰 마을 이다. 마을은 1056 에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다른 곳에 비해 공간이나 시설이 크다. 이곳의 중심도 “Rio Buranco” 강 연안에 집중되어 있다. 마을은 2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배로, 기차로 둘러 볼 수 있다.
리오마죠래와 유사한 마을로 도로 밑으로 흐르는 Groppo 강 언덕에 마을이다. 이곳 주민들은 언덕에 있는 Volastra 옛 마을에 살다가 흑사병으로 인해 골짜기로 내려와 14세기에 마을을 형성하였다. 기차역에서 180m의 터널을 걸어 지나오면 마을에 이르고 아름다운 교회를 만날 수 있다. 모든 마을 길은 바다로 통한다. 이 교회는”San Lorenzo”교회로 1338년에 고딕 스타일로 돌로 지었다. 입구에는 사람과 사자머리의 조각이 있고 안에는 15세기의 친퀘테래의 거장의 작품으로 화형당한 “St. Lawrence” 성인의 그림이 보존되어 있다. 전면에는 예전에는 바다를 감시하는 감시탑 이었으나 지금은 종탑으로 되어있다. 공원에는 포도수확을 그린 조각이 여러 점 있다. 마나로라에서는 일몰 감상이 가장 뛰어난 곳이다.
코르니글리아는 바닷가에 직접적으로 면하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 Lardarina(라다리나)라고 부르는 돌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면 다 을 수 있다. 불규칙한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 세 개의 램프를 지난다. 이곳에는 철도 정거장으로부터 편리한 샤틀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이제 토스카나 지역을 다 탐방하고, 이탈리아의 “Cinque Terre National Park”를 하루 종일 5군데를 다 둘러보고, 이 국립 공원 지역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세계각지에서 이곳을 보려는 관광객이 밀려드는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바닷가 해안 절벽으로 연결된 천연의 요새에서 주민들이 중세 때부터 척박한 바위산을 일구어 포도밭을 만들고, 오렌지 등 과일을 심고, 비탈진 곳에는 올리브 나무를 재배하여 고달픈 삶을 이어간 조상 들이 이곳을 개척한 정신을 높이 사야 한다. 그들의 후예들은 오늘날 이 천연의 유산을 계승하여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누구나 오고 싶어하는 곳으로 가꾸어 놓았다.
차는 이제 밀라노 방향으로 진입하여 밀 밭, 포도밭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넓은 평야지대인 베로나 지역을 지나 점심때가 되어 이번에는 중간 휴게소에서 중식을 해결한다. 선택 식 부패로 야채 샐러드, 감자 튀김, 티본 스테이크, 하이네켄 맥주 등으로 한 시간 동안 여유로운 식사를 하고 다시 버스는 간다.
우리가 가는 좌측으로는 태양열 집열판이 늘어서 있다. 오른쪽 언덕 위로는 성채가 보이고 이제 우리는 알프스 산속으로 들어간다. 점차 고도가 높아지면서 수직으로 비죽비죽 솟은 하얀 봉우리들에는 얕은 나무들이 돌 틈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푸른 언덕으로는 드문드문 하얀 집이 한 채, 마치 동화의 나라처럼 보인다. 도로미테 산 군은 알프스 산맥 중 이탈리아 북부 산악지대로 약 5.500㎢에 이르는 넓은 면적에 석회암과 백운암으로 이루어지고, 오랫동안 풍화작용을 거처 뽀족 뾰족한 암봉의 연속으로 병풍을 두른듯이 다가오고 있다. 1차 대전에서 패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1918년 이탈리아 령으로 되었다.
알프스 지역은 1800년대에 들어와 수많은 등산인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이곳이 암벽 등반의 매카를 이루었다.
기차역 끝에서 내려 걸으면서 돌로미테 산 군의 기기묘묘한 연봉과 병풍같이 둘러싼 바위 암봉,그 오른쪽으로 만년설의 연봉이 계속되는 것을 즐기면서 걸어서 주차장 까지 오면서 즐비한 쇼핑가를 아이 쇼핑하면서 모두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버스로 “Ortisei”(1.236m)에 호텔을 떠나 가까운 곳에 있는 2080m에 위치한 전망대에 오르니 이곳이 셀라 패스로 도로미테의 여러 곳 중의 한곳의 자연을 눈높이에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포르도이 고개는 2239m에 위치한 곳으로 하늘이 푸르고 쾌청해 아름답고 기온이 제법 선선하다. 우리가 이곳에 오르니 오토바이를 탄 젊은이 들이 행렬을 이루고 산 위로 올라온다. 주변에는 나무를 자르고 도로를 정비하는 인부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봉이 엄청난 눈을 이고 병풍처럼 막아 선다. “Capanna Passo” 3152m 아래 계곡 Piz Boe에서 올라오는 구불거리는 산악 도로에는 오트바이를 탄 젊은이들이 올라온다. 좌우 정상에서 30여분간 주변을 감상하고 사진에 담은 후 내려오니 노란 야생화가 융단처럼 깔리었고, 산록에는 집이 한, 두 채 씩 드문드문 자리잡은 곳으로는 좁은 길이 나있고, 주민들이 거주하니 도로, 수도, 전기 등이 다 설치되어 있다. 이런 산간에도 주민의 살 권리를 존중하여 정부에서 시설을 뒷받침하여 준다 하니? 또 한 경이로운 것은 이런 산간 비탈에 조그마한 마을에도 교회가 서있고 종탑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차로 2.105m 고개까지 올라와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2.751m “Lagazuoi Torri Tre Sass”에 오르니 정말 가까이에서 현무암, 석회암의 암봉들이 풍화작용으로 부스러져 내려온다. 정상에 내리니 “To Fana Di Rozes”(3.225m)에서 아래 “La Villa” 계곡, 주변의 산 군에는 눈이 하얗게 쌓였고 해가 비추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정상에서 주변의 수시로 변하는 자연의 섭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모든 것을 사진에 담고 우리는
자연의 신비에 그저 할말을 잃고 다시 아래로 내려온다.
이번에는 아름다운 호수를 찾아간다. 1.756m고지에 분지 위에 빙하에서 녹아 내린 물로 맑고 청정한 호수가 생겨난 곳이다. 호수 주변의 “Monte Pluna” 산(2.305m)과 “Cadini” 산과 그 아래 자리 잡은 호텔 풍경이 어울러져 물속에 잔영이 투영되어 일렁거린다. 주변에도 수많은 모터 싸이클을 타는 젊은이 들이 모여 들어 아름다운 절경을 즐긴다.
미수리나 호수를 떠나 이번에는 조금 더 내려와 듀렌 호수가에 이른다. 주변의 쏟아질 듯한 산 봉우리가 호수에 투영되어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호수 앞 뒤로 모두 깎아지른 듯한 석회암의 하얀 돌산으로 막혀 있고, 그 암벽에도 나무들은 자라고 있다. 앞으로도 뾰족 뾰족한 암봉들이 눈을 이고 서있다. 
고원 풀 밭 사이로 난 길을 들어가니 노란 후리지아, 하얀 민들래, 노란 민들레 등 이름 모를 들꽃이 고원에 가득하게 피어 있어 꽃방석을 깔아 노은듯 하다. 몽골의 초원보다 더 아양하고 아름다운 들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한 시간 이상을 쉬면서 전원의 아름다움과 향그런 공기를 함께 하면서 다시 트레킹에 나선다. 날씨가 갑자기 구름이 끼면서 어느새 빗방울이 떨어진다. 1500m 넘는 산간이라 항상 방풍 복과 우산을 준비하고 다녀야 한다.
이제 알프스 돌로미테 지역에서 하루는 중간 산간지대 트레킹, 다음날에는 5곳의 Pass(고개마루)를 기점으로 주변산을 오르내리고, 호수를 찾아가는 일정을 마무리하고 마지막으로 끝없는 초원지대를 벗어난다.
이 호수는 알프스의 석회암에서 녹아 내리는 빙하의 물이 모여 들어 호수 물이 맑고 투명하다. 호수의 좌우로 알프스의 암봉이 솟아있고 그 중턱에는 하얀 성이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다. 석회암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좌측으로는 멀리 시야가 트이고 넓은 바다처럼 끝없이 호수가 뻗어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말을 맞아 수영을 하거나 싸이클을 타거나 산책을 한다. 연못에는 흰 거위가 6마리의 새끼를 거느리고 유영을 하고, 한편에서는 검은 오리가 아주 작은 새끼 4마리를 인솔하고 수영을 가르치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돌로미테의 자락에서 하루를 보내기 위해 오늘은 “Du Lac et Du Parc. Grand Hotel” 에 여장을 풀고 쉬어 가기로 한다.
로마시대의 원형극장으로 중세도시의 성밖에 위치하고 있다. 이 경기장은 1세기 초에 세워진 것이나 3세기에 와서 “Gallienus” 황제가 지금처럼 크게 지었고 규모나 웅장한 면에서 로마의 “Colosseum” 다음의 규모를 자랑한다. 서의 축성은 베로나 주변에서 모은 벽돌과 돌로 축성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2층의 아취는 장미빛 붉은 돌로 쌓은 것이다. 서의 벽은 수세기 지나는 동안 무너지고 지금은 1층에 남아있는 4개의 아취가 3층까지 이어져 있다.
엘베광장은 이태리에서 가장 화려하고 역사적인 광장이고 베로나의 생생하고 살아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둘레에 역사적인 건물과 동상이 즐비하다.
베로나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유명한 문호 Skakespeare의 작품 “Romeo and Juliet”의 작품 무대가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이다. 줄리엣의 집은 엘베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고, 벽돌로 전면이 쌓아진 건물로 13세기에 지어졌다. 이 집은 줄리엣 가문의 집이었다. 이 집은 2층에 밖으로 내민 발코니가 있고, 세익스피어의 비극의 대사구절이 영어와 이탈리아 어로 틀에 새겨져 있다. 줄리엣의 집은 14세기 풍으로 재생되었으며 큰 홀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그린 그림이 있고, 2,3층 방에도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조각한 “Alighieri Dante”의 상이 높이 자리잡고 있다.
토스카나 지방으로 가면서 우리는 끝없는 푸른 구릉지대와 싸사이푸러스 트리의 조화를 눈부시게 바라보면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생각해 낸다. 구릉지대의 푸른 밀밭, 군데 군데 누렇게 익어간 밀밭이 조화를 이루어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옛 주택을 개조하여 호텔을 만들고 조그만 방이라도 멋 지게 꾸미었다는 것도 그들만의 장점이다. [0].jpg)
또 그리스의 산토리니 섬은 마치 친퀘테레의 해안가 절벽과 유사하다. 다만 그리스는 해안 단애에 지은 옛 주택을 하늘색으로 지붕을 칠하고, 벽은 흰색으로 칠하여 모두 산뜻한 색 갈로 보이기 때문에 사람의 눈길을 끈다.
인도에 가면 라자스탄주의 도시인 “Jaipur”는 핑크 색을, “Udaipur”는 흰색을, “Jodhpur”는 푸른색으로 치장하여 “Triangle City” 를 만들어 Delhi시와 연결하여 찾는 사람이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고 관광객이 넘친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