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세이 여행이야기

박길란 - 시칠리아와 아말피

  • 작성자 :

    테마세이투어

  • 작성일 :

    2015.10.07

  • 조회수 :

    8503

 
  이 글은 박길란님의 여행후기입니다. 박길란님은 2014년 4월 25일부터 5월 6일까지 12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이탈리아 시칠리아와 아말피 여행을 다녀오셨습니다. 글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서양 공존의 역사가 모자이크로 새겨진 땅! 시칠리아
 
2014년 4월25일 ~ 5월6일

2014년 4월 25일 ~ 5월 6일

박길란

 

 
 
제1일 (2014년 4월 25일) - 출발일 -

 지독한 아침 출근 차량에 막혀 공항 도착이 늦어졌다. 함께 여행하게 될 일행들은 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수속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12시 15분 출발, 뮌헨으로 향했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은 여전히 고통이다.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과 에세이집 한 권을 읽고 나서야 비행기에서 풀려났다.

 오늘 묵을 호텔은 공항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특별한 경관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조용하고 마을에서 떨어져 있어 굳었던 근육을 풀 정도의 산책은 충분한 곳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보니 아이슬란드 여행을 함께 했던 부부도 계시고, 작가 김수현씨, 배우 김해숙씨, 임예진씨가 보인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 몸이 세계화 되었는지 시차적응은 잘 되어 쉽게 잠들 수 있었다.

 

제2일 (4월 26일) - 시칠리아 최고의 영웅이 사랑한, 체팔루 -

  팔레르모로 가는 9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른 아침,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2시간 비행 끝에 드디어 팔레르모 !
 이번 여행 인원은 마사장님을 포함해 22명인 줄 아는데 어제 뮌헨 공항에 내려서 보니 아무래도 20명이 넘지 않았다.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해 일행 중 네 분은 뮌헨이 아니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서 팔레르모로 오셨단다.

 버스에 오르니 그 네 분이 기다리고 계셨다. 그런데 한 여성이 낯익다. ‘어디서 본 사람이지?’ 머리를 굴려 보니 아무래도 일본 유학 시절 인연인 것 같다. 그 쪽도 내가 낯익나 보다. 잠시 머뭇거리다 다가가니 “혹시 S여대와 관계있나요?”하고 물어온다. 내가 대학 선배라고 생각 했나보다.
“그건 아니고 일본 유학생이셨나요? 쯔꾸바?”
“맞아요. 맞아!”
“애기 이름이?”
“준형이요”
“맞아, 준형이 엄마”
 대충 30년만의 조우다. 유학 시절, 같이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면서 꽤 친하게 지냈지만 먼저 공부를 끝내고 돌아가는 바람에 연락이 끊어졌었다. 형님이랑 만나면 준형이 엄마 이야기 하면서 보고 싶어 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부부가 함께 왔다. 준형이 아빠는 그 당시 일본 회사에 입사하셨단다. 준형이 엄마는 별로 변하지 않았지만 준형이 아빠는 몸이 많이 불어 몰라보게 변하셨다.
 우리는 형제가 같이 유학하고 있었기에 나름 유명(?)했었다. 준형이 아빠가 남편의 형님 이름을 대면서 안부를 물었다.
“아 ! 네. S대학에 계시고 잘 살고 계십니다.” 했더니..
 옆에 계신 한 분이 “그 홍OO 교수.. 아무래도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요?” 하신다. 자신은 S고등학교 2년 선배고 S대학에서 같이 근무하다 일반 회사로 옮기셨단다. 갑자기 주위 모든 분들이 다 연결된 인연으로 시칠리아 여행의 시작이 즐거워졌다. 한국사람 세 사람만 거치면 다 아는 사람 된다더니 우연 치고는 참 극적이다.

 우리는 팔레르모를 뒤로 하고 곧장 체팔루로 향했다.
 오늘부터 시작된 시칠리아 여행은 팔레르모를 중심으로 시계 방향 즉 동쪽으로부터 돌아 다시 팔레르모로 올 것이다. 현지 가이드로 나온 조안나씨는 성악을 공부하기 위해 이태리에 왔다가 같은 한국인 유학생을 만나 로마에 눌러앉았단다. 붙임성이 좋은 허스키 보이스의 젊은 아줌마다.

 팔레르모는 교통체증이 심하다던데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도시를 빠져나왔다. 2시간 정도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도로를 달리니 멀리 체팔루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이 그 바위산에 기대어 있다. 성당의 높다란 종탑이 가장 높이 솟아 마을을 아우르고 있다. 지중해의 푸른 물빛과 붉은 지붕의 집들이 대조를 이루면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마을 외곽에 차를 대고 우리는 걸어 중심 광장에 있는 두오모 성당으로 향했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3~5층 정도의 연립주택 같은 집들이 빽빽하게 서있다. 좁아 보이는 집이지만 모두 베란다를 갖고 있고 한 결 같이 빨래가 널려있다. 무수한 깃발들 사이를 걸어가는 듯하다. 왠지 모를 포근함이 밀려오면서 진정한 시칠리아의 정서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두오모 성당 바로 앞 식당에서 먼저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음식이 어찌나 늦게 나오는지 모두 성당을 몇 번씩 들락거리면서 기다려야했다. 물론 지중해에 왔으면 태양과 바람을 즐기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야함이 정석이겠지만...
 우리는 오늘 아침 비행기에서 내린 여행객 아닌가?
 또 얼마나 먼 곳에서 왔는가?
 주변의 모든 이국적인 풍광이 진득하게 앉아 있지를 못하게 한다.
 체팔루 두오모의 외관은 투박한 몸체와 작은 창을 보면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이지만, 사각형의 육중한 첨탑은 아랍풍이다. 초기 모스크의 미나렛과 흡사하다. 첨탑 꼭대기의 피라밋 조형물도 특이하다. 이런 식의 건축 양식이 시칠리아 노르만 양식이란다. 거친 바이킹의 일족인 노르만족답다는 느낌이 든다.

 시칠리아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찌나 스쳐간 민족이 많은지 어지럽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전쟁, 혹은 결혼, 종교적 이유로 시칠리아 땅을 차지했다. 민족 대이동 이런 것이 아니라 지배자들만 수시로 바뀌었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숨 가쁜 역사 속에서 진정으로 시칠리아를 사랑해 시칠리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지배자는 11C~12C의 노르만 왕조였다.
 로마의 민족주의자들이 비잔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불러들인 노르망디 지역의 노르만족, 오트빌 가문은 야금야금 알프스를 넘어와 오히려 로마를 위협하는 존재로 컸다. 어떤 방어도 소용없게 되자 교황 니콜라우스 2세는 로마 남부와 시칠리아를 오트빌 가문에 넘긴다. 이 초대장을 손에 쥔 노르만족은 그리스인과 아랍인이 차지하고 있던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시칠리아 최초의 단일 국가를 건설한다.
 1072년, 팔레르모를 점령한 사람이 루지에르 1세다. 그러나 루지에르 1세는 철저한 노르만인으로 본토의 대백작 칭호에 만족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루지에르 2세는 달랐다. 이탈리아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그는 야망에 불타는 시칠리아 인이었다. 교황과의 오랜 줄다리기 끝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허가를 받아내어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체팔루는 그 루지에르 2세가 사랑한 마을이었다.
 어떤 연유로 이곳에 공을 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이 성당도 그가 세웠다.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부인과 함께 이 성당에 묻혔지만 그의 아들 굴리엘모 1세가 팔레르모 대성당으로 옮겨갔다.

 두오모 내부는 눈부시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주 흥미롭다.
 회중석은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이다. 예배 장소와 복도는 로마 코린트 양식의 아름다운 기둥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성소를 장식하고 있는 황금빛 모자이크는 틀림없는 비잔틴 양식으로 예수님 얼굴이 이스탄불 성 소피아 성당의 예수님과 쌍둥이 같다.
 천정은 완전히 아랍 양식이다. 시리아, 모로코 지역에서 익히 보아온 것으로 우리나라 서까래처럼 일정한 크기의 나무를 발처럼 엮어 장식했다. 나무를 장식했던 채색이 많이 훼손 되었지만 화려했던 아라베스크 문양의 그림이 희미하게나마 잘 남아있다. 지성소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품도 훼손 된 것들이 많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신의 거처라는 성스러운 기운은 느낄 수 없지만 시칠리아의 풍상 많은 역사가 가슴에 와 닿는다.

 두오모를 나와 로마시대의 빨래터가 있다는 곳으로 이동했다. 빨래터는 마을 한가운데 있었는데 여전히 맑은 물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체팔루는 BC 4C 경 그리스인들이 이주해오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다. 이런 훌륭한 샘이 있었으니 그들에게는 축복의 땅이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여자들의 사교의 장이며 온갖 풍문이 만들어진 장소였을 것이다.

 드디어 이 마을 최고 인기 장소인 바닷가로 나왔다.
 낯익은 곳! 바로 <시네마 천국>의 촬영지다. 이 마을이 유명한 관광지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시네마 천국이 촬영된 주 무대는 이곳에서 내륙으로 100km정도 떨어져있는 팔라조 아드리아노이다. 분수대가 있는 광장과 세트로 만든 영화관이 있는 곳이다. 이 체팔루 바닷가는 더운 여름밤, 많은 사람들이 시원하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야외에 가설극장을 세웠던 장소다. 입장권을 사지 않은 사람들이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와 도둑 영화를 보는 장면은 꽤 인상적이었다.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는 시칠리아 출신이라 이 섬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나보다. 그가 만든 영화에는 시칠리아의 아름다운 풍광들이 잘 담겨져 있다.

 체팔루를 뒤로 하고 타오르미나로 향했다.
 이제 우리는 시칠리아 북쪽 바다를 버리고 내륙의 고원지대를 거쳐 동쪽바다로 간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지만 가끔씩 드러나는 푸른 하늘과 햇살이 비치는 고원의 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답다. 얼핏 보면 스위스의 알프스 전원 풍경과 비슷하지만 유순한 작은 구릉들이 나열되어 있어 정겹다. 목초지 사이로 야생화가 지천이다. 주로 노란 꽃이 많지만 개양개비도 그 붉음을 자랑하고 있다. 시칠리아에 봄이 제대로 와있다.

 오늘 하루의 피곤이 몰려와 눈을 좀 붙여볼까 하는데 저 멀리 타오르미나가 보인다. 높은 언덕 위 하얀 집들이 수반위의 꽃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이틀 동안 묵을 호텔은 그 언덕 위가 아니라 아랫동네, 해변가에 있었다.
 마사장님은 위, 아래 호텔을 놓고 많이 고민하셨단다. 지중해의 풍광을 즐기기에는 아랫동네가, 이른 새벽 산책하기에는 윗동네가 좋지 싶다. 예상대로 호텔 방 귀여운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기가 막힌다. 푸른 이오니아 해가 반호(半湖)를 그리며 떠있고 저 멀리 메시나 방향 해변을 따라 길게 길게 마을이 연결되어 있는 경치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밤에는 마을의 따뜻한 불빛이 호수로 착각 될 만큼 잔잔한 바다에 내려앉아 있다. 하늘의 푸른 별빛과 대조를 이루며....

 저녁 식사는 S그룹의 회장이 먹어보고 칭찬을 했다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생각보다 너무 좁아 우리 인원이 다 들어갈 수도 없어 급하게 야외에 자리를 만들었다. 음식은? 음..... 무엇을 기준으로 칭찬했는지 모르겠다. 너무 평범하고 맛도 평이해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왠지 사기 당한 기분?


제3일 (4월 27일) - 그리스인의 예술혼이 담겨있는 타오르미나 -

 우리는 6시에 호텔을 나섰다.
 여행은 동행에 따라 여행의 질이 결정된다. 황안나 선생님과는 20여 년을 함께 해서 눈빛만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이다. 취미가 같아 공유하는 것이 많지만 특히 우리 둘은 걷기의 찬미가다. 길 위에서 만나 의기투합해 정말 많이도 걸었다. 선생님은 나보다 먼저 걷기에 입문하셔서, 처음 만났을 때는 이미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책을 펴낸 프로 도보꾼이시다.

 서로의 첫 인상이 좋지는 않았다. 둘 다 쉽게 속을 보이지도 곁을 내주지도 못하는 성향이어서 탐색의 시간이 필요했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류(流)의 인간은 일단 상대방에게 내 우리를 허락하게 되면 서로 최고의 친구가 될 수 있다. 나이 차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다.
 나는 선생님이 좋다. 나이는 15년 정도 차이가 나지만 선생님은 결코 올드하지 않다. 그 많은 시간을 함께 했지만 선생님은 연장자라고 나에게 충고도 간섭도 하신 적이 없다. 도덕적 룰이 너무 몸에 배여 있어 매사에 모범을 보이시는 어른도 어렵고 매력 없다. 하지만 선생님은 귀엽게 허술한 부분도 많고 촌철살인 같은 천부적 유머 감각이 뛰어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한다. 특히 선생님의 최대 강점은 젊은이들을 많이 칭찬하신다. 조금만 잘 해도 입에 바른 칭찬이 아니라 본능적 질투가 조미료처럼 가미된 진정한 칭찬에 능하시다. 이런 면은 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천부적 능력이다.
 아직도 한 달 평균 책 10권 이상 읽으시고 75세 연세에도 IT기기 능력자이시다. 화술도 좋으셔서 대한민국에서 송해 아저씨보다 더 바쁘신 어르신이다. 그 많은 강연, 방송, 각종 자문위원, 저술 활동으로 시간을 초 단위로 나누어 쓰면서도, 내가 어딘 가로 떠난다고 말씀 드리면 열 일 제치고 따라 나서신다.

 우리는 호텔을 나와 어제 저녁 식사를 한 식당까지 가보기로 했다.
 해변을 따라 크고 작은 예쁜 호텔과 집들이 늘어서 있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도 차도 없어 산책 코스로는 그저 그만이다. 우리는 천천히 걸으면서 골목 깊숙이 들어가 보기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아침 해변의 타오르미나를 마음껏 즐겼다. 
 타오르미나 해변 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솔라 벨라는 짙푸른 바다와 어울려 유난히 아름답다. 하기야 이름 자체가 <아름다운 섬>이다. 영화 <그랑블루>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날씨도 너무 좋아 머리에 하얀 만년설을 인 에트나 산이 그림처럼 깨끗하게 보인다. 구름에 가려지지 않은 에트나를 보기가 쉽지 않다는데 우리는 첫날부터 행운을 누렸다.

 아침을 먹고 에트나 등반길에 올랐다. 산으로 향하는 길은 꽤 멀었다. 빤히 보이지만 제주도와 비슷한 지형으로 유순하게 경사진 도로를 따라 끝없이 올라간다.
 마을을 벗어나니 완전한 산림 지대가 나타난다. 수종이 소나무라는데 우리나라 소나무와는 전혀 다르다. 우선 나무 모양이 우산을 편 것 같다. 침엽수림 잎으로 바늘처럼 가늘지만 우리네 소나무 잎보다 길고 보드라워 바람에 일렁인다. 사랑스런 녹색으로 다정다감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소나무는 로마시대에 특히 사랑을 많이 받았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아피아 가도의 가로수가 바로 이 소나무다. 로마는 길을 만들 때 일정한 간격으로 이 소나무도 같이 심었다. 소나무는 길을 만드는 노동자와 행군하는 군인들의 휴식처가 되어 주었다.
 이 소나무는 평안한 안식의 상징이 되어 귀족들의 저택 담장에 솔방울 장식으로 표현되었다. 오늘날에는 보편적인 이태리 집 당장을 장식하는 기호가 되었다.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타오르미나의 집에도 솔방울 장식이 많았다. 이태리 작곡가 레스피기의 <로마의 소나무> 중, 제 4부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가 가장 사랑 받는 이유이기도하다.

 산 중턱에 위치한 케이블카 승차장으로 갔다. 올라오면서보니 2000년 이후 거의 해마다 분출되는 용암 때문에 지붕 꼭대기만 남기고 파묻힌 집들이 보였다. 산천은 의구(衣舊)하다는 말이 무색한 지형이다.
 산 아래 맑고 투명한 세상과 달리 이곳은 짙은 수증기에 싸여 한 치 앞이 안 보인다. 오히려 케이블카를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오니 앞이 조금 보였다. 사람도 많고 바람도 불고 무엇보다 춥다. 그냥 내려가자고 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여행은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꼭 경험하고 싶다는 열망만 있으면 무조건 감동이 있다. 내 몸을 움직여 이동하다보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고 좋든 나쁘던 추억이 된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된다는 신념은 유아적인 망상이다. 이번 여행 일행들은 내가 길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 중에 가장 소극적인 편이다.

 솔직히 에트나는 나에게 큰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화산 지형 경험이 많은 것도 있겠지만 아이슬란드가 문제다. 지구가 살아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모든 것을 아이슬란드는 품고 있었다. 거칠고 척박했지만 경이롭고 고요했으며 미려하기까지 했다. 그 한여름 밤의 꿈같은 경험이 너무 선명해 항상 그곳과 비교하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우리는 다시 셔틀 버스를 타고 화구 근처까지 더 접근했다. 시야는 더 나빠졌다. 화구까지 가본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지경이다. 모두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며 서성거렸다.
에트나에는 딱 두 가지 색만 존재한다. 흰색과 검은 색. 눈에 젖은 땅은 검디 검고 그 위를 덮은 눈은 희디 희다. 사람만 없다면 절대 고독을 처절하게 맛 볼 수 있는 곳이다. 뚜벅뚜벅 걸어 나가면 그냥 피안의 세계로 홀려 들어갈 수 있는 이승의 마지막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곳처럼 보인다.
 사막보다 더 막막하기 그지없는 풍경!
 무채색 풍경 속 사람들!
 웃고 있어도 모두 등 시린 사람들처럼 보인다.

 나는 쉽게 에트나의 정상까지 올라왔지만 230년 전(1786년) 이곳에 온 괴테는 힘겹게 노새를 타고 산 중턱까지 왔다. 하지만 기상 악화와 주변의 만류로 도로 산을 내려갔다. 괴테가 에트나에 오른 시기도 5월 4일이었으니 딱 지금 이 맘 때다. 야무지게 분화구에서 용암 채취까지 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접근 했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18~19C 유럽은 근대 학문의 기조가 형성되는 시기로 엘리트 내지 부르조아층들은 모험적 여행에 심취해 있었다. 괴테는 어릴 적부터 미술, 문학, 연극 등 예술적 기질과 관심도 많았지만 서른이 넘어서는 고고학, 식물학, 광물학에 더 열중했었다. 특히 마흔 넘어 친교를 맺게 된 훔볼트의 영향으로 더 깊이 빠졌다. 37살에 쓴 이탈리아 여행기 중 시칠리아 편에는 문학적 수사보다 광물, 지질학 탐구 내용이 더 많다.
 그런 그가 그렇게 갈망한 에트나 분화구를 눈앞에 두고 돌아섰을 때 가슴이 쓰렸겠지만 죽음의 공포가 꽤 컸던지 하산을 결정한 자신의 자제력이 적지 않게 자랑스럽다고 했다. 상당히 낙천적인 대가의 귀여움에 그 부분을 읽으면서 많이 웃었다.

 괴테에 비하면 모파상의 에트나 등반기는 아주 문학적이며 극적이다.
 괴테보다 100여 년 뒤에 이 산을 오른 모파상은 정상도 찍은 듯하고 그 무용담을 아주 자세히 묘사했다. 처음 접한 이 경이로운 땅과 경험에 고무되어 감동, 감동 일색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이 모험을 오랫동안 울겨 먹었지 싶다.
 용암 분출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전무 했던 고대인들은 이곳이 대장장이 신 헤파에스토스의 작업장이라고 믿었다. 유사 이래 셀 수 없는 폭발로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인간들은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위험한 장사 마진도 좋듯이 지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 화산재는 쌓이고 쌓여 부드러운 토양이 되었다. 토양은 너무나 기름져 포도, 올리브, 레몬, 오렌지 같은 질 좋은 과일이 잘 자랐다. 인간은 영리하기도 하지만 이익 앞에서는 무모하다.

 산 중턱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윗동네로 갔다. 그런데 슬슬 내리던 비가 갑자기 폭우가 되어 쏟아졌다. 
 모두 비옷까지 갖추어 입고 타오르미나의 최고 볼거리 그리스 야외극장으로 갔다. 항상 관광객들로 붐빈다는 극장은 비 덕분에 조용하다. 관람석에서 바다가 내려다보인다더니 비에 감싸인 극장은 단지 동그란 몸체만 보인다. 일행들은 한 바퀴 돌아보고 미련 없이 움베르트 거리로 몰려 나갔다. 마사장님께 우리는 이곳에 있다가 약속 시간에 맞추어 성당 앞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남았다.

 텅 빈 극장에 우리 둘만 남았다. 황선생님을 앉혀놓고 MP3 이어폰을 꽂아드렸다.
 <파바로티>다.
 시야를 가리는 사람도 없고 비는 모든 소음까지 삼기고 극장 무대만 남겨놓았다. 파바로티는 우리를 위해 주옥같은 아리아를 들려준다.

 <별은 빛나건만> <공주는 잠 못 이루고> <그대의 찬 손>...
<남 몰래 흐르는 눈물> <축배의 노래> <여자의 마음> <카루소> .....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신음 소리 하나 없이 봇물처럼 터진 눈물은 끝없이 흘러내렸다.
 가만히 어깨를 꼭 안아드렸다. 그냥 마음껏 울게 해드리고 싶었다.
 말하지 않아도 선생님 가슴 속 응어리가 다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많은 길을 걸으셨지만 아직도 남은 한이 있으신가보다.

 선생님과 달리 나는 파바로티와 극장과 내가 온전히 하나 되는 감동이 몰려와 소리를 질려댔다. 유서 깊은 극장에서 관객 딱 둘만을 위해 하는 공연을 듣고 있자니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것도 파바로티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기립 박수를 보냈다. 아무도 없는 그리스 극장에서 똑같은 음악을 들으며 우리 둘은 서로 다른 시간을 보냈다.
 한 시간 쯤 파바로티에 빠져있으니 기적처럼 비가 멈추고 저 먼 바다부터 햇살이 구름을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극적이고 황홀한 순간이다. 드디어 슬금슬금 다가온 태양은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관람석 꼭대기에 앉아있는 우리 앞 무대 기둥 사이로 지중해가 시야에 들어왔다.
 일어서서보니 오른쪽으로 저 멀리 아름다운 낙소스 마을이 보인다. 낙소스 마을 뒤로 하얀 눈이 반짝거리는 에트나가 너무나 깨끗하고 선명하다. 지중해를 앞마당으로, 유럽 최고의 활화산을 무대 배경으로, 도시 제일 높은 곳에 노천극장을 만들 줄 아는 그리스인들 ! 그들의 예술적 감각이 새삼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 극장의 단점은 로마인들이 만든 무대 뒤의 벽이다. 모파상은 시칠리아에서 꼭 한 곳만 봐야한다면 두말 할 것 없이 이 타오르미나라고 했다. 그 이유가 바로 이 그리스 극장이다. 황선생님과 나는 이 경이로운 장소에서 그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경이로운 행운을 누렸다. 날도 어두워지고 약속 시간이 다가와 일어섰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큰 울음을 토해내신 선생님이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꼭 잡으신다. 이심전심! 충분하다.

 움베르트 거리는 화려하다.
 세련된 상점과 물건들, 여행의 자유로움으로 들뜬 관광객들이 거리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시칠리아 과일과 과자에서 뿜어 나오는 달콤한 향기가 가득하다.
 나는 이 거리에서 꼭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이 타오르미나를 휴양지 내지는 이상향으로 유럽인들에게 알린 사람은 독일 사진작가, 빌헬름 폰 글뢰덴(1856~1931년)이다. 춥고 흐린 날이 많은 독일 사람들은 따뜻한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로망이 있는 듯하다.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 차 온 그는 근사한 역사적 유적을 가진 이곳 사람들의 소박하고 가난한 삶에서 깊은 영감을 받아 취미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점점 사진에 빠진 그는 타오르미나 주위의 거친 풍광을 배경으로 누드화를 찍었다. 그 대상이 10대 후반 소년들의 나체 사진이었다. 그리스, 로마 유적을 배경으로 상당히 고혹적인 사진을 연출했다. 시대를 앞선 그의 사진은 파격적인 남성 누드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소프트 포르노라는 경멸의 눈길을 받았지만 원초적 본능과 고상한 유적의 결합은 거부하기 힘든 매력으로 유럽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결국 촬영지 타오르미나는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장소로 부각 되어 19C 후반부터 고급 휴양지가 되었다.
영화 <태양의 가득히>에서 타오르미나는 한 장면도 나오지 않지만 알랑 드롱이 궁극적으로 가고 싶어 하는 이상향이 바로 타오르미나였다. 이 움베르트 거리에 오면 쉽게 글뢰덴의 사진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상상했는데 한 장도 보이질 않는다. 그의 사진도 이제 유물이 되었나보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왔지만 거리는 여전히 불야성이다.

제4일 (4월 28일) - 박제된 바로크 도시, 시라쿠사, 노토. -

  오늘은 어제와는 반대 방향인 낙소스 쪽으로 산책에 나섰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후회가 됐다. 걸어보니 낙소스까지 1시간 반 정도의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고 차들을 피해 들어 설 곳도 마땅치 않아 위험하고 무엇보다 차들이 달리면서 내는 소음으로 지쳐버렸다. 잠시 해변을 거닐다 돌아왔다.

 오늘은 시라쿠사로 간다. 정말 보고 싶었던 도시다.
 해안 도로를 따라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길 주변 풍경은 낙후된 지역임을 여실히 보여 준다. 가끔 바다에 가스를 채굴하는 탑들이 이방인처럼 서있다.
 시라쿠사에서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의외의 장소, 눈물의 성모 성당이었다. 일행 중 어느 분이 간절히 원했나보다.

 성당은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이 아니라 성당 천정 전체가 하늘로 치솟아 오른 비행 물체 같았다. 멕시코시티의 과달루페 신성당과 아주 닮았다. 내부도 상당히 비슷하다. 깔대기 모양의 천정에서 환한 빛이 쏟아지고 있지만 짜임새 없이 넓은 공간은 경건함을 담기에는 무리가 있다. 제대조차 존재감이 없고 너무 소박하다.
 우주선 안에 억지로 예수님을 끌어다 가두어놓은 꼴이다.

 이 성당은 어느 일반 가정집에서 모시던 세라믹 성모 마리아상이 4일 동안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을 분석해보니 인간의 눈물 성분과 똑같아 바티칸에서 성모의 기적으로 인정 했단다.
 그 후, 이 성모상을 모시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으로 이 성당이 세워졌고 1994년 봉헌식이 이루어졌다. 요한 바오르 2세도 다녀가셨단다.
 심플한 제단 위에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상이 걸려있고 바로 아래 예수님 눈길이 향한 곳에 문제의 성모상이 자리 잡고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성모님은 아름답고 색감이 곱다. 눈물은 믿을 수 없지만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서인지 독특한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일행 중에는 다섯 분 정도의 카톨릭 신자가 계셨다. 황선생님을 포함해서....
 그 분들 중 유난히 눈길을 끄는 이가 있었다. 배우 김해숙씨였다.
 처음에는 기도하는 황선생님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돌렸지만 바로 옆에서 기도하고 계신 김해숙씨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간절함이 배여 있는 기도하는 모습이 심장을 찔렀다.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보는 황선생님에게서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만의 염원이 느껴졌다.
 배우라고 특별히 눈길이 가는 복장도 아니다. 오히려 낡은 듯한 분홍색 추리닝 옷이 의아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남들보다 오래오래 성모님 앞에 무릎 꿇고 간절함을 빛으로 뿜어내고 있는 그녀는 이 성당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아주 가깝게 사진 찍고 싶은 욕망을 참아내며 그녀를 보고 있자니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런 게 배우의 힘인가? 저 절절한 간구함은 무엇일까?
 우리 나이의 여자가 자신을 위해 저런 기도를 할 수는 없다. 자녀 아니면 부모님?
 정말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를 너무도 지독하게 미워해 그 마음을 빨리 내려놓게 도와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 같다.
 기도를 끝내고 내 앞으로 지나가는 그녀를 무조건 끌어안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녀도 울고 있었다.
 말없이 같이 울었고 천천히 걸어 밝은 햇살이 눈부신 성당 밖으로 나왔다.
 초면인 사람끼리 아주 황당한 경험이지만 사람들의 시선과 몸짓에 익숙한 그녀는 쉽게 나를 이해했고 그녀도 내 속에 쉽게 들어왔다.
 
 몇 년 전부터 난 TV 드라마 보기를 포기 했다.
 말도 안 되는 내용의 드라마를 보면서 분개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해 TV와 멀어졌다.
 그러다 우연히 여기 오기 직전에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드라마에서 김해숙씨가 누군가에게 잡혀있으면서 변호사 딸과 통화하는 장면을 보게 됐다.
 죽음을 예감하고 마지막 당부를 하는 그녀는 자신이 죽은 뒤 복수 같은 멍청한 짓을 하지 말라고, 쓸데없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을 소비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장면이었다.
 극한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며 딸에게 충고는 하고 있지만, 핏줄 선 눈은 공포와 꼿꼿한 자존심을 같이 담고 있었다. 신들린 연기에 소름이 돋았다.
 한국에 돌아와 김해숙씨의 동영상을 찾아보다 역시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딸이 변호사로서 첫 재판에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빗자루 들고 개다리 춤을 추는 장면을 봤다. 자식의 선전이 자랑스러워 주체를 못하는 어머니의 기쁨을 온 몸으로 나타내는데 그저 감탄사만 연발 했다. 그 거칠고 투박한 어머니에게서 여자의 사랑스러움이 뚝뚝 흘렀다. 김해숙씨와 함께 여행하게 될 줄도 몰랐었는데 앞으로 애정 갖고 바라볼 스타가 생겼다.

 성당을 나와 고고학 공원이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바다를 낀 평지에 발달한 시라쿠사에서 살짝 언덕진 장소로 그리스 사람들은 이 언덕 암석을 채굴해 도시를 건설했다. 우리는 유도화라는 예쁜 주황색 꽃이 탐스럽게 핀 인공 꽃 터널을 지나 <디오니소스의 귀>라는 동굴로 갔다.
 그리스 신화 속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아니라 시라쿠사의 왕이었던 디오니소스다.

 시라쿠사는 BC 8C, 풍요로운 땅을 찾아 헤매던 그리스인들이 이 해안으로 몰려와 세운 도시다. 정착한 그리스인들은 지중해 무역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착실하게 경제적 부를 늘려 시칠리아 내 다른 그리스 식민도시의 맹주 역할을 하는 최대 도시로 성장했다. 그리스의 문화가 이식되고 수준 높은 예술적 소양을 기초로 본토 아테네 못지않은 영광을 누리는 도시가 되었다.
 BC 413년, 아테네는 자신들보다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시라쿠사를 견제하기 위해 함대를 끌고 왔다. 하지만 니키아스가 이끄는 부대는 자신감만 충만했지 전략적 오판과 무지로 배는 다 가라앉고 살아남은 6,000여명이 포로로 잡혀 바로 이 동굴로 끌려왔다. 포로들은 8달 동안 이곳에 갇혀서 기아와 갈증으로 죽어갔으며 그나마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이들마저 노예로 팔려갔다. 니키아스의 패배는 아테네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왕은 동굴 밖에 있는 구멍을 통해 포로들이 하는 소리를 훔쳐 들었단다. 동굴 입구 모양이 정말 인간의 귀와 흡사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시원하고 상당히 넓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목욕탕처럼 공명되어 울린다.
 그 때, 서양인 한 팀이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시작했다. 오우~! 근사하다. 10명 남짓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 배가 되는 인원이 부르는 것처럼 울리면서 곧장 콘서트장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노래가 끝나자 조안나씨가 “우리도 질 수 없죠? 아리랑 합시다!”
 아리랑도 에코를 동반하니 오합지졸의 합창단이 제법 오랜 연습이 된 것처럼 들렸다. 아리랑이 끝나니 모두 진정어린 박수를 쳐준다.
 동굴을 나오다 만난 채석장에는 푸르름이 가득하다. 온갖 종류의 나무와 꽃들이 피어있고 맑은 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산은 자신의 속살을 다 내어주고 그 위대함을 찬양하는 꽃들에 싸여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동굴 위 언덕을 올라서니 그리스 극장이 나타났다.
 상당히 넓은 딱 반원형의 전형적인 그리스 식 극장이다.
 하지만 극장은 완전 공사장이다. 여름 공연을 위한 무대와 관람석을 만들고 있어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워 맥이 풀렸다. 타오르미나 극장과 너무나 비교되는 상황이다.
 지름 140m에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극장은 BC 5C 경에 조각하듯 만들어졌다. 시라쿠사가 아테네에 버금가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 그리스의 비극 작품이 초연되고 마임(mime)이라는 연극 형태가 처음 올려 진 무대도 바로 이곳이다. 지금까지도 시라쿠사에는 그리스가 아닌 곳으로 유일하게 그리스 연극 학교가 있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폐허의 빈 공간에서도 무릎에 힘이 빠지고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벅찬 순간이 있다. 신비로운 영적 감화로 고통 같은 행복감이 가시화되는 순간 말이다. 아주 쉽게 나만의 공간이 만들어지고 시간을 뛰어넘어 옛 것과 조우하는 기쁨이 충만해지는 순간 !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정반대의 경우다. 그냥 이름뿐인 2500년 전의 그리스 극장이다. 잠시 앉아 망치질하는 사람들과 사진 찍기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극장을 나왔다.

 점심을 먹고 노토로 향했다. 노토는 원래 계획에 없던 도시다. 여기를 오기 전 여행지를 대충 알아보고 왔지만 노토는 생소한 지명이었다. 시라쿠사에서 자동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는 도시란다.
 시라쿠사를 벗어나 서쪽으로 달렸다. 차창 밖의 풍경은 건조하고 햇볕은 따갑다. 해안도로를 벗어나 내륙으로 들어서자 메마르고 삭막한 대지가 연속되어 ‘도대체 이런 곳에 무슨 구경할만한 도시가 있다는 걸까?’ 싶었다.
 드디어 저 멀리 도시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자 직감적으로 아! 김영하의 ‘노토’가 떠올랐다. 주차장에 도착해 차 밖으로 나오니 틀림없다. 지금까지 시칠리아에 들어와 맡은 공기와 전혀 다른 아프리카의 열풍이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김영하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에서 노토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내용보다 성당 앞 높은 계단과 화려하면서도 우아했던 건축물이 떠올랐다.
 단정하게 가지를 정돈한 가로수 길을 걸어가니 곧 멋진 성문과 함께 신기루 같은 도시가 시작됐다. 아기 피부 같은 살구 빛 석회석 건물들이 넓은 대로를 중심으로 도열해있다. 한 채, 한 채 다른 듯 같은 느낌의 건축물들은 돌을 연마해 만든 보석처럼 빛난다.

 드디어 무니치피오 광장이다. 낯익은 그 성당 앞 계단이다.
 18C에 건설 된 도시라면 족히 200여 년이 넘은 건물들이 너무 깨끗하다. 돌로 만들었다기보다 흙을 구워 만든 테라코타 작품 같다. 건축물들의 기 센 자족감 때문에 관광객들이 고물거리는 흉한 이물질처럼 보인다.
 이 도시는 시칠리아 동북부를 강타한 1693년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었다.
 그 당시 시칠리아의 주인은 스페인이었다.
 시칠리아는 지중해 정 가운데 있는 가장 큰 섬이다. 유럽, 아프리카, 중동에서의 접근성도 좋고 좋은 기후로 포도, 오렌지, 올리브, 밀, 아몬드 같은 작물을 키울 수 있는 곳이기에 여러 민족이 탐을 내던 땅이다.
 흔히 우리나라를 대륙과 섬을 잇는 반도 국가라 붙임이 많았다고 하지만 시칠리아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민다. 청동기 문화를 가진 기존의 원주민 시쿠리 인부터 인간 거주가 시작되어 BC 8C, 그리스, 페니키아인이 이 땅에 정착, 문명이 덧칠해졌다.
 그 후, 로마, 반달, 동고트, 비잔틴, 이슬람, 노르만,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모든 민족이 한차례씩 거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지배구조는 초창기 이슬람 제국을 몰아낸 노르만 시칠리아까지는 정복에 의한 것이지만 12C부터 노르만 왕족의 남자 대가 끊기면서 혼인에 의한 왕권주고 받기로 혼란에 혼란을 거듭했다.
그러다보니 편의상 프랑스, 독일, 스페인이라고 말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스페인 시대도 여러 왕가로 세분된다. 유럽의 중세 국가는 현재와 같은 국가적 개념이 아니라 한 가문의 영지를 중심으로 정략결혼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니 시칠리아의 복잡한 왕권 교체는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노토를 스페인 합스부르크가는 마음먹고 새로운 도시로 건설했다. 원래 있었던 도시에서 조금 비껴나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다. 오늘날의 파리를 있게 한 오스망 남작 같은 인물, 쥬세페 란자 공작이라는 인물이 그 당시 유행한 바로크 양식으로 철저한 계획 아래 신도시, 노토를 건설한 것이다.

 황선생님과 나는 골목 탐방에 나섰다.
 대로에 면해 있는 건물은 대부분 상점으로 쓰이고 있지만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거의 빈 집처럼 인기척이 없다.
 도시 전체를 위에서 조망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았지만 문 열어놓은 곳이 없다. 이 도시는 모두를 위한 삶의 공간이 아니라 특권층만을 위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스페인 정복지의 도시들은 한 결 같이 그 사이즈만 다를 뿐 똑같다.
 광장과 대로를 중심으로 관청, 종교기관, 특권층 주택이 있고 그 뒷면 후미진 곳에 도시를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서민 주택이 있다. 노토도 이런 이분법으로 건설되어있다.
 이 정도의 도시를 건설하려면 엄청난 부가 필요했을 터인데 그 부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18C 시칠리아 산업이 대부분 1차 산업이었다고 가정하면 올리브, 오렌지 농업이었나?
 이 도시에서 하룻밤 묵고 싶다.
 김영하가 보았던 밤 풍경도 보고 싶고 무엇보다 도시 뒤에 가려진 이곳 주민들의 삶이 궁금하다. 감질나게 보고 떠나야하니 더 안타깝다.

 다시 시라쿠사로 돌아왔다.
 오늘 묵을 호텔은 오르티자 섬 해변 가까이 있어 방에서 지중해가 그대로 내다보였다.
 호텔은 개인 집을 개조해 좋게 말하면 오밀조밀 하지만 방이 좁고 다닥다닥 붙어있어 답답하다. 우리에게 배정된 방은 일층 깊숙한 곳으로 정식 건물에 덧대어 방을 낸 듯 허술하고 바다 쪽 벽이 얇아 춥다.
 하지만 침대 맡에 걸려있는 나체화에 우리 둘은 미친 듯이 웃었다. 도저히 예술적 가치를 두기 힘든 올록볼록한 여자가 비스듬히 누워있는데 아무리 봐도 커다란 곤충 같다. 호텔은 좁고 허름해도 전반적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다. 고풍스러운 이 건물에 저 그림을 건 안목은 정말 엽기적이다.
 안나씨 설명에 의하면 이 집 주인은 스페인 부르봉왕가의 서자 출신으로 19C 초반의 건물이란다. 현재는 호텔 주인이 이 집을 임차해 호텔로 개조했단다.
 시라쿠사의 영욕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는 오르키자 섬을 구경하기에는 딱 좋은 위치의 호텔이다. 호텔을 나서서 1분만 걸어가면 아레투사의 샘이 있다.
 드디어 두오모 광장이다. 광장은 상상했던 것보다 작고 조용하다. 좁고 기다란 광장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바로크 건축물들이 도열해있다.
 내가 이 광장을 기억하는 것은 영화 <말레나> 때문이다. 아름다운 모니카 벨루치가 광장에 모여 있는 모든 남성의 시선을 받으며 커다란 꽃무늬로 덮인 검은 원피스 차림으로 이 광장을 가로질러가던 모습.
 유리알 같은 검은 포석 위로 심장소리와 닮은 하이힐 소리를 내며 무심한 얼굴로 걸어가던 벨루치! 두오모 성당을 비롯한 광장 주변의 오래된 건축물 때문에 그녀는 전설에서 튀어나온 섹시한 여신이었다.

 성당은 어제 완성 된 듯 깨끗하다. 모든 자연적 마모 요소들이 피해간 듯하다. 
 성당 정면 가장 높은 곳에 이 도시의 수호신 산타 루치아 상이 있다.
 아름답고 귀품 있는 모습이 마리아 같다.
 루치아는 시라쿠사 출신으로 로마의 박해로 순교한 처녀다. 좋은 가문의 배필과의 약혼을 파기하면서까지 기독교에 입문해 선교 활동을 하다 훗날, 두 눈이 뽑히고 참수되어 성녀로 추앙되었다.
 이 두오모 광장에 루치아가 매장된 장소가 있는데 그곳에 성당이 세워졌다. 성당이 세워질 당시 시칠리아에 와 있던 카라바조가 그 유명한 <산타 루치아의 매장>을 그려 이 성당에 받쳤다. 그 그림이 걸려있는 성당은 문이 잠겨있어 아쉬움이 컸다. 두오모 성당 정문 위에 노르만 왕조의 문장인 독수리상이 위풍당당하게 걸려있다.

 그 옛날 시라쿠사 참주 겔론은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이곳에 아테나 여신의 신전을 지어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그리고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교회로 변신, 신전이 교회로 바뀐 최초의 사례로 기록 되었다. 하지만 시라쿠사에 이슬람 세력이 들어왔을 때는 모스크로, 또 카톨릭 왕조에서는 성당으로 지배 세력의 색깔에 따라 변신을 거듭했다.
 성당 정면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최초 아테나 신전 당시의 도리아식 기둥이 벽 사이로 남아있다. 내부는 겉모습보다 화려하지 않지만 성소로서의 기품이 흘렀다. 특히 지성소의 조각 장식들 솜씨가 뛰어났다.

 성당을 나와 사람들이 붐비는 큰 대로에서 벗어나 뒷골목을 걸었다.
 시라쿠사도 노토와 함께 1693년 지진으로 붕괴되고 대부분 다시 건설되었다.
 똑같은 세월이 흘렀지만 노토에 비해 누추함이 흐른다.
 관광객들이 점령하고 있는 대로변에는 나름 개성 있는 상점들이 즐비하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찌든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좁은 골목에 내걸린 낡은 빨래들의 흔들림이 애잔하다.

 마사장님은 시칠리아 들어와서 제대로 된 식사를 못했다며 예약한 식당 주방장을 불러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요리를 내 오시요”라고 주문했다.
 신난 주방 책임자는 완성된 요리들을 직접 들고 나와 선보이면서 우리 눈치를 본다. 시칠리아 먹거리는 총동원 된 것 같고 훌륭해 모두 흡족해 했다. 싹싹 비우는 접시를 보면서 써빙하는 이들도 이태리 사람 특유의 흥분된 몸짓으로 즐거워한다.
 저녁 식사 후 자유롭게 시라쿠사의 밤을 즐기라고 했지만 우리는 내일 새벽을 위해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 방이 추워 겨우 세수만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제5일 (4월 29일) - 천상의 꽃길이 열려있는 곳, 판탈리카 -

  내가 테마세이투어와의 여행을 고집하는 이유 중 하나가 오늘 아침 같은 하루를 만끽하기 위해서다. 테마는 호텔 시설이 좀 떨어지더라도, 교통이 불편하더라도 유서 깊은 도시에서는 꼭 구시가지 호텔을 고집한다.
 무수한 사연을 가진 오래된 도시는 관광객이 밀물처럼 몰려다니는 낮이나 상점과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함께 유흥을 기대하며 흥청거리는 밤이 사라진 새벽에 도시는 자신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준다. 피곤하고 노쇠한 얼굴도 보여주고 부지런한 이방인을 위해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테마 상품 중 가장 멋진 새벽을 즐겼던 곳은 발틱 3국으로 묶여있는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에서였다. 에스토니아의 탈린, 라트비아의 리가, 리투아니아의 빌리우스, 이 세 도시의 구시가지는 동화 속 나라처럼 예쁘고 한자 동맹 연맹 지역이라 중세 유럽 상업적 권력을 상징하는 멋진 건축물이 즐비했다. 결국 빌리우스에서는 너무 멀리 걸어갔다가 돌아오는 길을 못 찾아 택시로 겨우 겨우 찾아오기도 했다. 

 호텔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면 바다다. 곶 끝에 탑이 하나 서있다.
 원형이 남아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878년, 시라쿠사가 북부 아프리카 사라센의 공격을 받아 항복할 때까지 9달 동안 마지막 저항을 했던 총 지휘부가 있던 곳이다. 탑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놓아 멀리서 보기만 했다.
 해안 쪽 건물은 한 눈에도 유서 깊어 보이는 훌륭한 집들이다. 그 옛날 관공서 건물이지 싶다. 현재는 대부분 호텔로 개조해 쓰이고 있다.
 이른 시간이라 텅 빈 도시는 인기척도 없다. 온 인류가 멸망하고 겨우 살아남은 우리 둘이 먹거리를 찾아 헤매는 그림이 그려졌다.
 너무 암울한 도시다. 작은 골목을 찾아 헤매는 우리는 먹거리가 아니라 따뜻한 인기척이 절실히 필요한 유아처럼 걷고 또 걸었다.
 가끔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의 표정이 어둡다. 그들은 새벽 이방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젊은 여인의 계절과 상관없는 보푸라기 잔뜩 인 털 쉐터가 아프다.
 영화로웠던 역사를 가졌지만 모두 소수 권력자의 흔적일 뿐 시라쿠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핍을 숙명으로 알고 살았다.

 시라쿠사와 함께한 골목길의 포석이 무심하게 보이질 않는다. 다른 구시가지 포석보다 편편하고 사이즈가 크다.
 몇 번의 항쟁 끝인 878년 5월 21일 새벽, 사라센인들이 이 도시에 들어 닥쳤다. 야수 같은 모습의 그들은 성을 넘어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살해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죽은 이들의 피는 성 안 모든 도로를 적시며 흘러 도망치는 사람들은 미끄러워 움직일 수가 없었단다. 이 도시의 검은 역사는 이 포석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돌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보니 아르키메데스 광장이다.
 교차로 가운데 있는 다이아나 여신 분수가 증거다. 이 광장 근처에서 아르키메데스가 태어났고 부력의 원리를 깨달은 기쁨에 알몸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뛰어다닌 곳이다.
 우리는 섬을 한 바퀴 돌아 해변의 멋진 가로수 길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이제 시라쿠사를 떠난다.
 나는 이 도시에서 꼭 고고학 박물관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하룻밤 머무는 일정으로는 무리한 계획이었다.
 1889년, 모파상은 건강상의 이유로 시칠리아에 왔었다. 나폴리에서 배를 타고 팔레르모로 들어온 모파상은 긴 여정을 거쳐 마지막 여행지 시라쿠사에서 아프리카 알제리로 넘어갔다.
 모파상은 어느 여행자의 앨범에서 한 비너스 조각상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다. 그 조각상이 있는 곳이 바로 이 시라쿠사였다.
 그는 기행문에서 문제의 그 조각상을 보는 순간 살아있는 여인처럼 사랑하게 되었으며 이 이유로 시칠리아 여행을 꿈 꿨다고 고백했다.
 시라쿠사 비너스는 머리도 한 쪽 팔도 없다. 하지만 모파상은 이 여인이야말로 신적인 여인, 이상화된 여인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여인, 그냥 포옹하고 싶은 여인이라고 했다. 박물관에서 이 비너스를 대면한 모파상의 찬사는 너무 지나쳐 얄밉기까지 했지만 또 그 이유로 나 역시 호기심을 감출 수 없었다.
 고대 예술가들에 의해 번식을 목적으로 만들어낸 돌로 된 여인에게서 미치도록 애무하고 싶은 감정을 느낀다는 세계 최고 이야기꾼의 허황된 꿈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또한 그의 소설 <여자의 일생> 속 잔 같이 온 몸을 바쳐 사랑하는데 길들여진 여자의 모델을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녀를 못보고 가는 건 너무 아쉽다. 다시 온다는 보장도 없는데.....

 나도 모파상과 똑같은 경험이 있다.
 2001년 인도 사르나트 박물관에서 유물 구경을 하고 나오다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 한 장을 봤다. <석가모니 고행상>이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이것이 진짜 부처의 모습이다’라고 단언했었다. 피골이 상접한 미이라 같은 육체! 눈빛은 형형하고 꼿꼿한 기상이 보는 이들의 정신을 깨웠다. 저 정도의 치열한 수행이 있었기에 인류의 정신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는 신뢰가 생겼다.
 그 부처상이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에 있다는 말을 듣고 구체적인 꿈을 키우다 정확하게 5년 뒤 그 부처님을 대면했다.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며 마주한 부처는 내 여행 최고의 감동적 순간이었다.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멀리서도 그녀를 알아보고 연정을 풀어낸 모파상의 심정을 나는 깊이 공감한다.

 오늘은 아주 특이한 장소로 간다.
 2005년, 시라쿠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대단한 경관을 가진 유적지는 아니지만 역사적 의미가 큰 지역이다.
 시칠리아에서는 보기 드물게 깊은 석회암 계곡이 형성되어 있고, 그 계곡을 따라 BC 13C~7C에 걸쳐 조성된 5,000여개의 고대 무덤군이 모여 있는 곳이다.
 바다를 버리고 내륙 깊숙이 들어갔다. 마사장님은 기사님이 길을 잘 몰라 헤맸다고 하시지만 나는 어차피 모르는 길이고 창 밖 풍경에 넋이 나가 있었다.
 아이슬란드를 다녀온 뒤 내 인생에서 더 이상의 야생화 보기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었다. 눈길 닿는 끝까지 지천으로 피어있던 야생화 천국!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꽃들은 눈부시게 선명했다. 감동이었다. 신이 허락한 너무 짧은 시간 속에서 튼튼한 다음 세대를 키우기 위한 꽃들의 치열한 번식력이 눈물겨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경솔하기 짝이 없는 판단이었다. 4월의 시칠리아 야생화가 또 나를 감동시켰다.
낮은 구릉이 연속되는 유순한 대지 위로 따뜻하고 포근한 봄이 내려 앉아있고, 그 연두 빛 언덕에는 가녀린 야생화들이 넘실대고 있다. 조각보처럼 다양한 색의 향연이다. 노랑, 보라, 하양, 빨강..... 누구의 의도도 아닌 신의 섭리로....
 작은 꽃들은 누구를 위해서도 무엇을 위해서도 아닌 항상 그랬듯이 봄을 즐기고 있다. 행복해 보였다.
 뒤에 앉아 있던 김해숙씨도 “아! 꼭 영화 속 장면 같다.”며 감탄하신다.
 차를 세워 잠시라도 저 들판을 걷고 싶다. 결국 유럽 봄의 전령사 야생 양귀비가 가득한 곳이 나타나자 나도 모르게 “차 좀 세워주세요!”하고 외쳤다.
 마사장님은 나올 때 세워보겠다고 약속 했지만 완전 다른 길로 나오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간에 페를라라는 작은 마을에 들러 차를 한 잔씩하고 판탈리카로 향했다.

 계곡이 상당히 깊어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멋진 풍광 속의 유적지는 초라했다. 특별한 도구 없이 숟가락으로 파 낸듯한 작은 구멍들이 몇 개 있을 뿐이다. 몇 천 년을 버틴 유적지로는 보기 어렵다.
 이 지역은 시칠리아에서도 상당히 오지에 속해 이슬람 세력이 쳐들어왔을 때 방어 기지 내지는 은신처 역할을 했고 최근 1960~70년대까지 일부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이곳은 고대 무덤군이라기보다 목동, 양봉업자들이 잠시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만든 임시 거처 같았다. 그을음이 엉겨붙어있는 구멍도 있다.
 점심 식사는 현지 가이드로 나온 분의 목장 식당을 이용했다.
 온 가족이 나서 만들어낸 요리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토속적 가정식이다.
 구수하고 푸짐해 따뜻한 정이 느껴지는 성찬이었다. 농장은 노란 꽃밭이었다.
 푸른 하늘, 하얀 구름, 녹색초지와 앙상블을 이룬 노랑 꽃, 고요한 천국의 모습이다. 모두 풍경에 반해 떠나길 싫어했다.

 다음 여행지 칼타지로네로 가는 길은 천상의 길이었다. 내가 죽어 하늘로 향할 때, 걸어서 가는 걸 허락 받는다면 이런 길을 천천히 걸어가고 싶다.
 시칠리아의 자연 풍광을 담은 사진으로 보아온 익숙한 정경이다.
 낮은 구릉이 연속되고 녹색 밀밭과 과수원이 줄지어 서있다.
 가끔 그 그림 속에 소박하지만 정갈한 집들이 보인다.
 많은 색채도 필요 없다. 다양한 구성 요소도 필요 없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봄이다.

 1787년, 시칠리아에 온 괴테는 이런 풍광을 보고 싶어 아그리젠토에서 카타니아로 가는 길을 택했다. 아그리젠토에서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면 안전하게 훌륭한 도시 시라쿠사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괴테는 애써 시라쿠사는 빛나는 명성 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자위하면서 시칠리아 내륙으로의 여행을 감행했다. 19C까지 시칠리아에는 산적이 많아 내륙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목숨을 거는 행위였다.
 이렇게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말 보고 싶었던 것은 시칠리아의 밀밭이었다. 시칠리아는 로마 최대 곡창지대였다.
 바다 건너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도 이 땅을 포기할 수 없어 이곳에서 로마와 일전을 치렀다. 그 싸움이 바로 포에니 전쟁이다. 로마는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많은 나무를 베어내어 시칠리아 전체를 농지로 바꾸었다.
 하지만 시칠리아 땅에서 숲을 완전히 없앤 독한 지배자는 스페인이었다. 그들은 이곳의 나무를 베어다 배를 만들어 전 세계를 휩쓸고 다녔다. 시칠리아 동서남북 어디를 달려도 숲을 보기는 힘들다.
괴테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묵묵히 지켜본 시칠리아의 진정한 대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떠올리면 괴테의 기행서는 정말 의외다.
 문학적 향기보다 보고서적 경향이 짙다. 놀랄 정도로 지질학에 밝고 지형, 생물에 관심이 컸다. 그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보면

< 지르젠티 (지금의 아그리젠토)로부터 패각 석회암을 내려가면 희끄무레한 지면이 나타난다. 이것은 옛날의 석회암이 다시 나타나면서 그것에 부착된 석고라는 것이 나중에 판명되었다. 널따랗고 평평한 골짜기는 정상 부분에서도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때로는 그 너머까지 뻗쳐있는 경우도 있다. 오래된 석고에는 풍화되기 쉬운 새 석회암이 나타난다. 갈아놓은 밭을 보면 거무스름하고, 때로는 자색을 띠고 있는 석회암의 색조를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다. >

< 목장은 이들 선량한 가축에게는 충분한 넓이인데 터무니없이 군생하는 엉겅퀴 때문에 목초는 점점 위축되어 간다. 이 식물은 여기서 스스로 씨를 뿌려서 그 종족을 증식할 절호의 장소를 얻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널리 퍼져 있어서, 그런 목장은 두 개의 대농장만큼이나 크다. 엉겅퀴는 다년생 식물이 아니기 때문에 꽃이 피기 전인 지금 잘라버린다면 근절시키는 것은 문제없는 일이다. >

 시칠리아를 다녀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괴테는 “시칠리아를 보지 않고는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을 자주 인용한다. 기자들조차 이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
 정확하게 괴테는 ‘시칠리아 없는 이탈리아란 우리들 마음에 아무런 심상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시칠리아야말로 모든 것을 푸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라고 했다.
 두 문장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똑같은가?
 괴테가 시칠리아에서 진정으로 보고 싶었던 것은 여러 문명이 거쳐 간 흔적 같은 표면적 유적이 아니라.... 모든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시칠리아의 대지에 서서 인류의 대서사시를 고찰하고 싶었던 것이다.
 괴테는 시칠리아의 여행을 끝내고 나폴리로 향하는 배 위에서 자신이 시칠리아에서 본 것은 자연의 흉폭한 행위와 끈질긴 농락, 인간들 서로의 적대적 분열에 의한 증오 같은 것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려는 인류의 허망한 노력을 봤다고 했다.
 그는 시칠리아가 이탈리아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나는 지금 200년 전에 괴테가 본 그 대지를 원 없이 보고 있다.

 차는 천천히 도시로 들어서고 있다. 칼타로지네다. 나지막한 언덕 하나가 도시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크고 작은 집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도시 건물들은 모두 후기 바로크 양식이지만 노토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아랍권의 한 도시에 들어온 느낌이다. 이 도시도 노토와 마찬가지로 1693년 지진 피해로 다시 재건축된 도시다. 정갈한 노토와 달리 이곳은 눅진한 공기와 빛바랜 건물들에서 피곤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현지인들의 모습은 여유롭고 편안해 보인다.
 시칠리아에서 처음으로 사람 냄새를 맡는다.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모습, 거리 모퉁이에 하릴 없이 앉아 거리 구경을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지구 끝동네 같았던 튀니지의 작은 마을에서 본 정경과 흡사하다. 한 번도 다른 세상을 동경한 적 없고 또 자기 고향을 떠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마을 같다. 사람들 얼굴도 아랍인에 가깝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작은 전동차로 옮겨 타고 좁은 골목들을 구경하면서 도자기 계단으로 갔다. 도시 꼭대기에 있는 성당을 향해 뻗어있는 계단은 천국을 향하는 듯 까마득하다. 모두 142계단이다. 계단 가득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칼타지로네는 오래 전 크레타로부터의 도기 기술이 전수되어 이 도시의 중심 산업이 되었다. 그 상징적 홍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세라믹 계단이다.
 계단 하나하나에 다양한 문양으로 그려진 타일이 장식되어 있다.
 한 계단도 똑같은 문양이나 그림은 없다.
 타일의 색감이나 기법이 수준 높은 편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나쁘지 않다.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계단 양쪽 가게들은 대부분 도자기를 팔고 있는데 이태리 특유의 세련되고 화려한 마졸리카 제품들이 많다.
 계단 마지막 가장 높은 곳에 소박한 성당이 있다.
 번쩍이는 것들로 치장된 신의 처소보다 정겨워 우리는 한참을 앉아있었다.
 하루를 내려놓기 참 좋은 장소다.

 오늘 호텔은 아주 마음에 든다.
 건물 자체는 오래되어 정갈한 느낌은 없지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그저 그만이다. 높은 곳에 위치한 호텔은 이 도시 외곽 농촌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고만고만한 구릉 위로 녹색 밭과 과수원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로 소박한 마을이 보인다. 오늘의 마지막 햇살이 황금빛으로 부서져 내린다. 밀레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생명 있는 모두에게 편안한 하루였기를...


제6일 (4월 30일) - 돌로 새긴 로마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카살레 빌라 -

  아침 일찍 일어나 주변을 산책하고 피아차 아르메리나로 향했다. 빌라 로마나 델 카살레를 보기 위해서다. 마사장님 경험상 일찍 가지 않으면 많은 관광객들 때문에 여유 있게 구경하기 힘들다더니... 막 문을 연 매표소 앞은 꽤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카살레 빌라는 로마 막시미아누스황제 (284~304년)의 별장이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3C 말, 로마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주변국의 연속된 외침과 내란으로 삶이 팍팍해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전염병까지 돌았다.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부하였던 막시미아누스를 끌어올려 공동 황제 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부 황제 2명을 임명해 로마 영토를 4등분해 다스렸다.
 그 때,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를 다스린 인물이 막시미아누스다. 이곳을 발굴한 젠티리는 시칠리아의 외딴 곳에 이런 규모의 빌라를 지을 수 있는 재력이라면 황제 정도는 되어야할 것이라고 가정한 것이다.

 전체 면적 3,500㎡에 63개의 방이 있으며 그 중 43개의 방에 모자이크 장식이 있다. 이 모자이크 때문에 이 빌라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카살레 빌라는 346년 지진으로 큰 피해를 보았고 1161년, 또 한 차례 대규모 산사태로 땅에 묻혀 버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오랜 시간 인간의 야비한 손길에서 벗어나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다.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졌던 카살레 빌라는 1950년대에 들어와 700여년 만에 발굴되었다. 처음 발굴은 유물을 찾기 위한 수준이어서 유적지는 많이 훼손되었고 또 발굴 중 홍수 피해도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빌라는 로마 최대 모자이크 유적지다.
 처음에는 이곳이 이곳의 집정관이었던 인물이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기 위해 4C 경에 건설한 별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 발굴할 당시 조수였던 젠티리가 나중에 발굴의 책임자가 되어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별장이라고 밝혔다. 그는 막시미아누스 별장이라는 증거로 모자이크된 모든 내용을 연구해 제시했다.
 많은 증거 중 흥미로운 몇 가지를 든다면 막시미아누스 자녀 중 사시인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후에 잠시지만 황제에 오른 막센티누스이며, 콘스탄티누스에게 제압당한 황제이다. 모자이크의 모든 사람들의 눈은 사각형 돌을 썼는데 유독 한 남자아이의 눈만 삼각형 돌을 썼다.
 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권력의 신성(神性)을 고취시키기 위해 제우스의 지혜를 가진 디오클레티아누스, 힘과 용기를 가진 헤라클레스라는 식으로 자신들을 어필했었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카살레 빌라에는 12공덕을 테마로 하는 거대한 헤라클레스의 모자이크가 있다. 또한 로마시대의 보편적 옷, 추니카에 헤라클레스의 여러 심볼 중 하나인 아이비(관상용 넝쿨식물)가 새겨진 옷을 입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런 여러 증거를 모아 젠티리는 이곳이 막시미아누스의 별장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입구를 통해 들어서면 제일 먼저 욕탕을 만난다.
 열탕을 데우던 아궁이 설비가 잘 남아있어 목욕탕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화려한 채색이 되어 있었을 벽면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떨어져나갔지만 바닥의 모자이크는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곳이 많다. 지금까지 여행을 다니면서 로마의 모자이크를 수없이 보았지만 이곳처럼 규모가 크고 다양한 테마의 모자이크는 처음이다.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는 각각의 방에는 1,700여 년 전 작품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스케일이 크다. 정말 로마황제 급이다. 색감도 훌륭하다.

 각 방은 방의 용도에 따라 각기 다른 테마의 이야기로 장식되어 있다.
 신화 속 이야기, 마차 경기, 동물의 머리 (중정 회랑 바닥을 장식하는 160개의 동물 머리 모자이크), 사냥, 항해, 운동 경기, 기하학적 문양, 등등 심지어 노예에게 심한 매질을 하고 있는 모자이크까지 있다. 그 당시 귀족들의 생활상을 총 망라해서 짐작할 수 있는 보물 창고다.
 카살레 빌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방은 비키니 차림의 여성 모자이크가 있는 곳이다. 늘씬하지만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이 돋보이는 10명의 젊은 여자들이 각종 운동 경기 연습과 승리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비키니 차림의 여성도 신선하지만 두 단으로 나누어 여백의 미까지 살린 모자이크의 조화가 상당히 현대적이다.
 이 여성들을 보면 로마가 그리스 문화의 전승자로서 건강한 신체를 이상적 모델로 삼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방의 용도는 주인의 침실로 짐작하고 있다.
 카살레 빌라의 모자이크 중 사람을 표현하는데 있어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대부분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반면 이 비키니 차림의 여성만은 나무랄 곳이 없다.
 아무래도 다른 방과는 제작 시기가 다르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본 방은 사랑의 침실이다.
 이곳도 인기 있는 방으로 커다란 녹색 카펫이 깔린듯한 모자이크 한 가운데 반나체의 두 연인이 끌어안고 있다. 여성의 적극적인 자세도 흥미롭지만 특히 다 드러낸 풍만한 엉덩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이곳은 유독 모자이크 상태가 좋아 훼손된 부분이 적다.
 로마시대 부와 권력을 측정 하는데 부인의 체중이 척도가 되기도 했다. 통통한 부인은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암시하여 그 집안이 안락하고 번영하는 증거로 본 것이다.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 사이좋은 부부가 영원히 복되게 살고자하는 염원이 이 방에 오롯이 담겨있다.
 카살레 빌라는 3천만 개도 넘는 37가지 색(21개의 자연석과 16종의 유리)의 작은 돌이 아로새겨져 있는 인류 유산이다. 장인 한 명이 1평방미터의 모자이크를 완성하는데 보통 6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단다. 고도의 섬세한 작업이 요구되는 기술이다.
이 빌라는 로마시대의 정치, 경제, 종교, 가족 개념과 사회상을 만화경처럼 담고 있어 무한한 가치가 있다. 진정한 돌로 새긴 인류의 역사인 것이다.
 하지만 고급 예술적 향기가 없는 점은 큰 아쉬움이다. 스케일은 크지만 정교함이 없고 품격 높은 예술적 가치를 두기에는 거칠어 조화로운 아름다움이 없다. 집 주인이 황제까지 올랐지만 출신이 미천한 탓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그래도 좀 더 시간을 갖고 여유롭게 둘러보았으면 좋았을 장소다.
 우리가 구경을 끝내고 나오니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든다.

 아그리젠토로 향했다.
 신전을 보러가기 전에 점심을 먹기로 했다.
 무사히 시칠리아를 반 바퀴 돌아 아그리젠토에 입성한 기념으로 이 식당에 5병 밖에 없다는 포도주로 자축했다. 포도주 맛을 잘 모르니 안타깝기는 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시칠리아를 여행지로 결정하게 하는 1등 공신의 사진은 <신전의 계곡>이라는 타이틀 아래 멋지게 치솟아있는 콘코르디아 신전의 모습이다.
 그리스 본토보다 더 완벽한 자태로 남아있는 그리스인에 의해 건설된 신전의 모습은 신기하고 매력적이어서 누구든 마음을 빼앗기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아그리젠토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라는 풍문을 현실로 만들어버렸다.
 너무 관광 1번지가 되어버려 신전들 앞으로는 고속도로 같이 쭉 뻗은 대로가 나있고, 그 대로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어 폐허의 유적지에서 맛볼 수 있는 쓸쓸하고 고즈넉한 낭만이 없다. 아쉬운 대로 그리스인들이 만든 도시답게 바다와 맞닿아 있는 평원 뒤 언덕 위에 신전들이 줄지어 서있어 시원한 풍광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아스라이 아프리카로 향하고 있는 지중해와 과수원으로 덮인 평원을 신전들은 굽어내려다 보고 있다. 충분히 근사한 한 컷의 그림이다.

 이 도시는 BC 6C 말에 건설되어, BC 5C 초 카르타고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짧지만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 후 잠시 도시의 기능을 회복했었지만 다시 BC 2C 말에 포에니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현재의 아그리젠토는 신전의 계곡보다 더 높은 곳으로 이동했다. 신전 군 너머 언덕 위에 현대 도시의 건물들이 줄지어 서서 기원 전 옛 신전들을 내려다보고 있어 묘한 대조를 보인다. 상반된 두 이미지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운명처럼 부자연스럽고 역설적이다.
 신전들은 비록 새로운 도시를 올려다보고는 있지만 여전히 이곳이 아크라가스(아그리젠토의 옛 이름)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가까이서 본 콘코르디아 신전의 장중한 모습은 감동이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완벽한 모습은 초기 그리스 건축양식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주 건축 자재인 구릿빛 석회암은 강도가 약해 그만큼 훼손도 쉬웠을 텐데 이렇게 훌륭하게 견디어냈구나 싶어 마구 마구 칭찬을 해주고 싶어진다.
 대리석 그리스 신전에 익숙한 우리들 눈앞에, 결코 고급 석재라고 할 수 없는 미완성 암석이 완벽한 건축미를 자랑하며 지나간 오랜 시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이 너무도 대견하다.
 헤라, 헤라클레스 신전은 도리아식 기둥 몇 개만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본 제우스 신전은 기둥조차도 서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신의 제왕, 제우스 신전답게 흩어져 있는 건물의 잔해만으로도 그 규모가 엄청났다는 것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신전은 미완성 건축물이었다. 완성도 되기 전, BC 406년에 카르타고의 침공으로 부서졌다.
 신전의 지붕을 받치고 있었을 7.5m의 거인상이 누워있다.
 원본은 박물관으로 가고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모조품이다.
 그래도 앞에서 본 신전들보다 심상을 자극하는 그 무엇이 있다. 무성한 수풀 사이로 거대한 돌덩이들이 나뒹굴고 있어 인간의 인위적 보호를 벗어나 무심한 시간과 함께 자연으로 귀화하는 폐허의 공허함이 전해져 한 동안 앉아있었다.

 일단 호텔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노을 지는 바다를 보기 위해 해변으로 이동했다. 언덕 위에 차를 대고 어설프게 만들어진 길을 따라 바다로 내려갔다. 해변을 따라 좀 걸으니 하얀 언덕이 나타났다. 그야말로 순백색이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낯익은 장소? 그래, <말레나>다.
 말레나는 혼란스러운 전쟁 중에 홀로 살아남아야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고전분투기이지만 그 아름다운 여인을 흠모하면서 성인으로 커가는 소년 성장기이기도하다.
 그 소년이 친구들과 몰려와 자신들의 성기 사이즈를 비교하면서 수컷의 우월감을 확인하던 장소이며, 때론 소년 혼자와 말레나에게 전하지도 못할 연서를 공들여 쓰기도 했던 해변이다.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이벤트다. 티 하나 없는 순백의 절벽은 황홀할 정도로 근사하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터어키인들의 계단>이란다. 그 옛날 터어키인들이 이 해변을 통해 자주 쳐들어와 붙여진 이름이란다.
 절벽은 파도에 의해 자연 계단화 되어 앉아서 바다 구경하기 좋은 천혜의 장소로 변했다. 아직 태양이 뜨겁기는 하지만 계단에 앉아 눈 시리게 푸른 지중해를 보고 있자니 꿈만 같다. 태양이 녹아든 바다는 은빛으로 반사되어 경이롭고, 그 은빛 물보라 속에서 비너스가 ‘폭’ 올라올 것만 같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 자리를 지킬 것만 같던 사람들이 해가 지려면 1시간 쯤 기다려야하고 바람이 불어 춥기까지 하니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결국 황선생님과 나만 남게 되니 방법이 없다.
 오늘 할 일은 밥 먹고 잘 일만 남았는데....
 아~! 다수를 따라야하는 민주주의는 슬프다.



제7일 (5월 1일) - 카뮈의 티파사를 만난 곳, 세리눈테. -

  언제나처럼 간단하게 아침 산책을 하고 세리눈테로 갔다.
 아그리젠토의 기차역 풍광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도시가 높은 곳에 있다 보니 짙푸른 지중해가 역사(驛舍)에서 그대로 내려다 보였다.
 세리눈테는 BC 7C에 그리스인이 세운 도시국가로 주변 큰 도시국가들이 카르타고와 크고 작은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중립을 위지하며 현재의 스위스처럼 평온을 지켜온 작은 도시국가였다.
 특별함이 없었기에 역사서에 기록된 사건도 없고 남아있는 신전조차 정확하게 누구의 신전이라고 알려진 것이 없다.

 내가 세리눈테라는 지명을 알게 된 것은 오래 전 일이다.
 일본 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일본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칭하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글을 읽고 나서다. 그는 1972년 한 겨울 32세 때에 세리눈테에 왔었다. 그리고 이곳 신전과의 감격적인 만남을 통해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하게 된다.
 다카시는 추운 겨울, 너무도 장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세리눈테의 신전을 보면서 우리가 배우는 역사, 기록된 역사가 시간을 통과하면서 얼마나 각색되고 윤색되는지를 상기하면서, 기록되지 못하고 언급되지 못했지만 무언의 언어로 자신을 말하는 역사가 진실이라고 확신했다. 나 역시 그 때 쯤에 역사 속에 있었던 팩트는 하나인데 역사학자라는 타이틀을 걸고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역사학계의 속성을 간파하고 분개해 있었다. 나의 오랜 배움의 시간이 사기 당한 기분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역사란 것이 팩트보다 해석의 중요함이 더 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몫이라는 걸 이해하는 정도는 되었지만....
 그래서 무언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은 키워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난 세리눈테가 정확하게 어딘 줄도 모르면서 기억하고 있었고 그리고 왔다.

 개찰구를 통과해 나서니 시야를 가리는 것 하나 없는 넓은 평원 저 멀리 신전이 하나 서있다. 아 ! 이건 다카시가 말한 세리눈테가 아니다. 카뮈의 티파사다.
 티파사는 알제리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로마 유적지다. 페니키아인들로부터 시작된 티파사는 BC 2C 로마에 정복되어 신전, 원형극장, 목욕탕 등이 완비된 영광된 도시였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카뮈는 이곳을 여행하고 <티파사에서의 결혼>이라는 에세이를 썼는데 폐허의 유적지와 봄의 만남을 이렇게 아름답게 쓴 글은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를 능가할 작가는 없을 것이다.

 멀리 보이는 신전은 하얀 엉겅퀴 꽃에 싸여있다.
 난 지금 카뮈가 티파사에서 본 봄을 시칠리아 세리눈테에서 똑같이 보고 있다.
 신전까지 걸어가고 싶었지만 보기보다 멀어 전동차를 타야한단다.
 가까이서 본 신전은 규모가 엄청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흥분시킨 건 신전 내부를 마음대로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전 주위에는 누워있는 돌기둥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모파상은 그 돌들이 죽은 군인 시체 같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여기는 전쟁터가 아니라 축제의 장이다.

 카뮈의 입을 빌려 말하면 “신전은 인간의 손길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다시 돌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왔습니다. 위대한 대자연은 귀향한 탕녀인 딸들을 위해 아낌없이 꽃을 피워놓았습니다. 과거를 다 떠나보내고 본연의 자신이 되어... 아니, 더 심오한 정신을 가지고 돌아온 딸들을 위해 자연은 뜨겁게 뜨겁게 환영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영광된 순간 한가운데로 초대받은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어 옆에 있는 황선생님을 끌어안아보고, 마사장님을 얼싸안아 봐도 심장을 진정 시킬 수가 없다.
 봄의 세리눈테에는 신이 내려와 산다. 빛과 색채는 원색으로 요동치고 뜨거운 햇살에 몸을 태운 야생초는 이 신전에 꼭 알맞은 향기를 토해내고 있다.
 인간의 찬가가 멈춘 신전은 이제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더 위대한 존재로 거듭나 있다.
 이곳에 온 축복 받은 사람들은 행복했고 세리눈테에 흠뻑 빠져있다.

 다시 전동차를 타고 온갖 꽃들이 가득한 들판을 가로질러 아크로폴리스 유적지까지 갔다.
 이곳은 옛 대도시의 면모를 두루두루 갖추고 있지만 서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인간 거주지라 아픈 사연이 많아서인지 핏빛 개양귀비가 더 많이 피어있다.
 아름다운 것을 본 기쁨 뒤에 오는 정체모를 슬픔이 목구멍을 긁고 가슴에 작은 상처를 낸다.
 불안전한 삶을 사는 인간의 숙명적인 예감일까?

 < 하늘과 대지가 만나 꽃이 되었습니다.
    사랑과 먼지가 만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무죄입니다. >

 점심을 먹고 트라파니 마르샬라 염전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려 염전을 보니 ‘역시나...’ 싶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린 사진을 보면 뾰쪽 지붕의 풍차가 아주 낭만적으로 찍혀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모든 이들이 찍은 사진이 쌍둥이처럼 닮았다.
 이는 풍차 말고는 아무것도 담을 것이 없다는 소리다.
 풍차, 기왓장으로 덮어놓은 소금더미! 끝!
 더 놀라운 것은 시칠리아 들어와 처음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찻집이 하나 있는데 의자라고 이름 붙은 곳은 만석이다.
 덥고 시끄럽고....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다.
 유럽인들에게는 염전이라는 곳이 매력적인 관광지인가보다.

 사실 이곳이 시칠리아 최고의 낭만적인 장소로 각광 받은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보다 더 먼 옛날, 지구는 한 덩어리였고 시간과 함께 서서히 분리되면서 오늘 날과 같은 모양의 지구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시칠리아와 아프리카 북부 튀니지는 같은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다.
 두 지역을 잇는 산맥이 바다에 잠겨있을 뿐이다. 이 산맥은 지중해를 동서로 양분하고 있어 지중해 중에서 가장 수심이 얕으며 폭도 좁아 아프리카와 겨우 128km 떨어져있다.
 이런 지형학적 이점이 있어 카르타고의 페니키아인들은 이 트라파니에 해양거점 도시를 만들어 그들의 수중에 두었다.
 시칠리아가 로마에 장악되기 전까지는 시칠리아 동부를 차지하고 있던 페니키아인과 시칠리아 서부를 차지한 그리스인들과 잦은 충돌이 있었다.
 충돌의 중심 장소는 항상 이 트라파니 해역이었다.
 그 후 카르타고는 로마와도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었고 결국 포에니 전쟁으로 이어졌는데 그 대 해전의 중심지도 이곳이었다. 지중해 해상권의 확보와 시칠리아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매력적인 땅이었다.
 세월이 흘러 AD 1266년, 그 당시 지중해를 주름잡던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좀 더 유리한 지중해 상권 장악을 위한 일전이 벌어진 곳도 바로 이 해안이다.
 이 전쟁의 승자 베네치아는 지중해를 자신의 앞바다로 만들었다.
 가깝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해병대가 시칠리아를 공격했을 때도 이 해변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이름 없이 사라진 많은 이들이 피를 뿌린 이곳에서 오늘날에는 유럽 최고의 소금과 시칠리아 최고 고급 와인 마르샬라가 탄생된다. 그리고 낭만이 깃든 관광지가 되었다.
 이 해변에서 옛 선조들이 흘린 피는 전혀 다른 혈통을 부여받아 새롭게 태어났다.
 이곳에 온 모든 이들은 해맑게 웃고 즐겁게 마시고 있다. 이만하면 옛 임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았나보다.

 염전을 나와 트라파니 해안을 내려다보고 있는 에리체로 향했다.
 에리체를 감추고 있는 에리체 산은 해발고도 750m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해안 가깝게 수직으로 솟아있어 그 존재감이 크다. 주변 모든 것을 제압하듯 당당하다.
 우리는 산꼭대기에 있는 에리체로 가기 위해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는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영매가 되어 힘차게 날아오른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조금 올라가니 자그마한 성문이 나타나고 곧장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 줄지어 서있는 성내로 연결된다.
 첫 눈에 들어온 것은 집들이 아니라 길을 덮고 있는 포석이다. 일정한 형태의 사각형 돌이 아니라 크고 작은 돌을 조합해 규칙적인 무늬가 나타나는 포장석이다.
 이 마을과 운명을 함께 했음을 온 몸으로 말하고 있다. 에리체의 얼굴은 포석이다.

 우리 호텔은 성문 가까이 있어 짐을 두고 자유롭게 마을 구경에 나섰다.
 곧 해가 질 시간인데 의외로 많은 관광객들이 골목길을 오가고 있다.
 동네가 너무 조용해 집 주인들이 관광객들에게 마을 전체를 비워주고 긴 여행을 떠난 것 같다. 관광객들조차 떠드는 이가 없다. 모두 침묵 속에 천천히 걷고 있다.
 처음에는 구불구불 나있는 길에 취해 걸으면서도 호텔로 돌아오는 길을 잊어버릴까봐 조바심을 냈지만 성문에서 가장 멀리 있는 성까지도 한 시간이 체 걸리지 않는다는 걸 감으로 알 것 같아 발길가는대로 걸었다. 황선생님과 나는 되도록 인적 없는 길만 찾아 걸었다.
 에리체는 참 특별하다. 가끔 골목에서 노는 아이가 있기도 하지만 수도원 같다.
 중세 도시의 오래된 연륜이 형태로 나타나기보다 공기로 느껴지며 세속적인 욕망을 모두 벗은 현자의 모습이다. 윤회의 수레바퀴는 더 이상 없어 보인다.

 드디어 에리체 최고의 전망을 볼 수 있는 성채까지 왔다.
 성 입구를 막아놓아 들어갈 수는 없다.
 티레니아해와 트라파니의 전경이 그림처럼 내려다보인다.
 공중에 떠서 아래 세상을 보고 있는듯하다.
 에리체는 태생이 신비롭다.
 에리체는 BC 12C 경, 바빌론에게 밀린 터키 아나톨리아 지역의 엘림족이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다.  대부분의 책들은 에리체가 아프리카에서 들어오는 배들의 등대 역할을 했다는 걸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은 에리체가 큰 권력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후대의 이야기고 산 속 깊숙이 숨겨진 형태상 처음 시작은 은둔이었다고 보여 진다.
 세상에 잊혀 진 상태로 살고 싶었던 공동체였을 것이다.
 또한 시칠리아와 유럽의 해안지역은 북아프리카 사라센 해적의 표적이었다.
 해적들은 재물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끌고 가 노예로 팔았다. 튀니지에 갔을 때, 유럽 각지에서 잡아온 기독교인들이 팔려나간 노예 시장터를 본 적이 있다.
 시칠리아에는 에리체처럼 접근이 힘든 높은 지역에 오래된 도시들이 많다. 그 도시들은 대부분 여름에 자신들의 특정 수호성인들을 앞세우고 거리를 누비는 축제를 벌인다.
 사라센 해적들은 여름철 사하라에서 불어오는 리베초(남서풍), 시로코(남동풍)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다. 그 때, 각 마을의 수호성인들이 기적을 행하여 대피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것을 기념한 축제이다.
 스페인 점령 이 후, 대부분의 수호성인들은 성모 마리아로 바뀌었다.

 에리체의 주신은 비너스다.
 지금 노르만 성채가 우뚝 서있는 이곳이 바로 비너스 신전이 있던 장소다.
 에리체라는 이름도 비너스의 그리스식 이름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릭스에서 유래한다. 아름다운 여성,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 비너스는 시칠리아 여러 곳에서 숭배되어왔다. 노르만족은 이곳이 전략적으로 훌륭한 요충지라고 생각했었는지 점령과 동시에 비너스 신전을 파괴하고 튼튼한 성채를 쌓았다.

 노르만 성채에서 내려다보면 에리체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길이 보인다,
 구불구불 유려한 시 한 줄처럼 매력적인 길이다.
 “선생님! 내일 새벽 저 길 걸어볼까요?”
 “아이구! 어떻게 내려가냐?”
 “길은 다 통하게 되어있으니 찾으면 돼요.”
 분명 케이블카와 자동차가 올라올 수 있는 대로가 생기기전부터 에리체와 함께 했을 옛 길이다. 성벽을 따라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대충 길의 흐름을 파악해 두었다.
 에리체는 작은 마을이지만 중세 도시가 갖추고 있는 요소는 다 있다.
 광장도 여러 개 있고 분수도 있다. 또 작은 교회가 여러 개 있어 골목 탐방이 지루할 틈이 없다. 에리체의 모든 것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또 걸었다.
 낮에 골목길을 메우고 있던 관광객들은 다 사라졌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에리체에서 잠을 자진 않는다.
숙박 시설도 부족하고 비싼 이유란다.
 살짝 한기를 느끼게 하는 밤공기가 너무 좋다.
 그러나 정말 좋은 건 역시 바닥의 포석이다.
 흐린 가로등 불빛을 받은 돌들은 뚜렷한 암흑색으로 빛나고 있다.
 미국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은 에리체 포장석의 검은 회색은 내적 성찰을 환기 시킨다고 했다.  또 이 회색빛은 인간이 겪었던 모든 일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는 색이라고 극찬했다.
 많은 인파에 시달린 포석은 모두가 떠나간 밤에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빛난다.
 오로지 길에 홀려 걷다보니 낮에 왔던 노르만 성채까지 왔다.
 인적 없는 성채 주변은 낮과 달리 괴기스러운 한기가 흘렀다.
 여자 둘이 감당하기에는 심하게 무섭다. 갈 때와 달리 돌아오는 길은 날아온 것 같다.

 

제8일 (5월 2일) - 중세 원형의 시간이 그대로 멈춘, 에리체 -

  새벽 5시에 일어나 세수만 하고 호텔을 나섰다.
 로비 소파에서 자고 있던 주인아저씨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아련한 주황색 가로등 빛에 싸인 골목길은 너무 고요해 에리체 전체가 묵상기도를 하고 있는 듯하다. 얼른 길 위에 나서는 게 망설여졌다.
 심호흡을 하고 조용조용 재빠르게 성 밖으로 나왔다.
 어제 눈으로 익혀둔 길은 성 밖에서 시작하는 듯 보였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작은 주차장에서 담을 넘어 내려 설 수 있는 철 계단이 보였다. 좁고 위태로운 모양새가 사용자가 많지는 않나보다. 내려서니 곧장 숲 속 오솔길로 연결된다.
 여명 속 숲길은 무모한 탐험을 시작한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이 숲만으로도 아침 일찍 일어난 보상이 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사라졌다.
 20분 쯤 걸으니 숲길이 끊어졌다. 돌아갈 수는 없어 무조건 덤불을 뚫고 아래로 내려오니 큰 길이 보였다. 어제 본 에리체의 옛 길과 연결 될 것 같았다.
 “선생님 ! 8시까지는 호텔로 가야 하니 우리 1 시간 정도 걷다 돌아가요.”
 큰 길을 걷다보니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아닌 노르만 성채 바로 아래로 가게 될 것 같은 좁은 오솔길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오솔길로 들어섰다.
 가파른 길을 조금 올라서니 갑자기 어제 성채에서 내려다 본 트라파니 정경이 펼쳐졌다.
 옅은 안개에 감싸인 트라파니가 신기루 같다. 세상 모든 것이 정지된 순간을 우리 둘이서 감당하고 있는 것 같아 감격스러우면서도 슬쩍 공포심이 엄습한다.
 하늘을 향해 가듯 길은 허공에 떠있다. 그리스 메테오라보다 더 영적인 순간이다.
 둘은 현실 감각을 잃고 무작정 걸었다. 선생님이 이제 돌아서야한다고 신호를 보내셨다.
 시계를 보니 7시 30분이다. “네, 네 ” 대답은 하면서도 몸은 계속 앞으로 향했다.
 눈앞에 어제 본 성채 바로 아래 멋지게 휘어진 길이 보인다. 유독 S자로 휘어진 그 부분만 키가 큰 가로수가 서있어 묘하게 유혹적이다. 그 길을 눈에 담으며 돌아섰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뒤돌아서 “선생님 ! 저 믿지요 ? 이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으니 우리 이 길 끝에서 마을로 올라가는 숨은 길을 찾아봐요, 네?”
 “이 길이 옛길이 분명하다면 성 안으로 연결되는 샛길이 있을 거예요. 그 대신 빨리 걸읍시다.”
 앞장 서 뛰다시피 다시 돌아서 가던 길을 걸었다. 눈으로는 절벽을 올라갈 길을 찾으면서....
 S자 길이 끝나는 지점에 와 올려다보니 “유레카!” 길이 있다. 절벽에 하얀 가르마 같은 돌길이 있다.
 뒤돌아보니 선생님이 양손 가득 벗은 옷을 들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신다.
 새벽 나올 때, “선생님 따뜻하게 입으세요. 이른 시간이라 추울 것 같아요.”
 똘똘한(하하하.....) 내 말대로 바지까지 겹쳐 입으셨으니 젊은 나를 따라오신다고 얼마나 뛰셨으며 또 얼마나 더우셨을까! 그래도 길을 찾았다고 하니 환하게 웃으신다. 난 선생님이 참 좋다. 75세이시지만 아직 체력도 좋으시다. 최고의 여행 파트너이시다.

 편안한 마음으로 올라오다보니 노인 몇 분이 길을 보수하고 계시다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신다. 분명 관광객 차림에 더더욱 동양 여자 둘이 이른 아침 아래서부터 올라오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 환하게 웃으며 한국말로 “안녕 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다. 한 여자는 빨래 감을 잔뜩 안고 있고... 하하하.....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조합이다. 성 안으로 들어와 요리조리 골목길을 돌아 호텔에 당도하니 8시가 조금 넘었다. 선생님은 연신 “너 정말 다시 봤다. 대단해. 대단해.” 하신다.
 “후후후.... 제가 심하게 용감하죠?”
 아침 식사는 대충 점만 찍고 에리체를 떠났다. 눈으로 가슴으로 내 발로 꼭꼭 눌러 담은 에리체! 어디에서도 해볼 수 없는 특별한 여행지였다.

 우리는 팔레르모로 들어가기 전에 몬레알레 성당으로 갔다.
 새벽 탐사의 여파로 꼬박꼬박 졸다 눈을 뜨니 성당 아래 주차장이다.
 전면에서 보는 성당은 육중한 노르만 양식의 요새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당 문을 통과하는 순간, 내부는 황금으로 빛나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지성소의 커다란 예수상은 이 성당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준다. 바실리카 양식의 회중석은 입구에서 제단까지의 거리가 상당해 깊숙한 느낌이다. 천정은 체팔루 두오모에서 본 아랍의 나무 장식이다.
 하지만 체팔루보다 섬세한 표현과 화려한 색감으로 다마스쿠스의 어느 왕궁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제단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모두 금빛 모자이크다.
 유리에 금박 종이를 붙여 만든 모자이크다. 비잔틴 예술의 정점이다.
 이스탄불에서도 이렇게 예술적 기교가 탁월한 모자이크를 보지 못했다.
 성당 내부의 모든 벽은 예수의 생애와 성서 이야기로 가득하고 그 그림과 그림 사이를 아랍의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장식 했는데 이 모두가 다양한 색을 사용한 모자이크다.
 완성할 당시에는 바닥도 모두 모자이크였다는데 지금은 대리석으로 대체되어있다.
 하지만 그 대체품 역시 여러 색의 대리석을 써 상감 기법으로 깔았다.
 건축 기법으로 동서양 문화의 융합을 이렇게 완벽하게 승화시킨 인류 유산이 또 있을까?
 어설픈 흉내 내기가 아니라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통합하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멋진 장소다. 이 질적인 요소들은 서로에게 유쾌하게 스며들어 역사를 다시 썼다.

 몬레알레 성당은 시칠리아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루지에르 2세의 손자, 굴리엘모 2세의 주도하에 건설되었다. 1174년부터 짓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신의 이름으로 교황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던 노르만 왕가는 교황을 대신하는 팔레르모 대주교의 세력을 억제하고, 교황의 권위에 대항하는 힘을 보여주기 위해 팔레르모 외곽 몬레알레에 팔레르모 대성당을 능가하는 건축물을 세운 것이다.
 몬레알레는 성당은 베네딕투스 교단의 수도원으로 쓰였기에 카톨릭 통제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다분히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힌 세속적 욕망의 표상으로 시작된 건축물이 세월이란 동지를 만나 그 욕망은 거세되고 인간의 허망한 욕심을 꾸짖는 장소가 되었다.

 성당 내에는 별도의 요금을 내고 들어 갈 수 있는 노르만 왕가만의 작은 기도실이 있다.
 작은 기도실은 그 자체가 하나의 보석이다. 대리석, 목재, 상아, 준보석 등을 조합해 빚어낸 최상의 작품이다. 정교함과 그 화려함에 기가 막힌다.
 500년 뒤에 올 바로크적 장식을 미리 보는 것 같다.
 돈 자랑의 끝판을 보는 씁쓸함과 최고급 예술품이 주는 눈의 즐거움이 교차하면서 복잡한 심정이 된다. 이 성당 최대의 볼거리는 수도원 중정을 장식하고 있는 돌기둥이다.
 하지만 모두가 극찬하는 그 중정을 개방하지 않아 볼 수가 없었다.
 여행은 이렇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정석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미련을 빨리 버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성당 정면 우측으로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소박한 집들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 있다.
 성당 출입이 금지된 하층민들이 성당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삶의 위안을 얻기 위해 하나 둘 모여들어 형성된 마을이다. 정면으로 향하지도 못하고 납작 엎드려 서로 의지하고 있는 집들이 이곳의 슬픈 사연을 대변하고 있다. 몬레알레는 왕의 욕심으로 갑자기 인류사에 남을 건축물이 세워졌지만 원래는 시칠리아 마지막 산적의 피난처이기도 했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법의 사각지대였다. 이제 군림하던 자도 군림 당하던 자도 하늘이라는 똑같은 이불을 덮고 백골이 되어 누워있다. 인간이란 동물은 죽어야 완벽한 인권 평등이 실현된다.

 포르타 누오바를 통과하면서 팔레르모 여행은 시작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리고 있던 스페인 지배시절인, 1535년에 튀니지 해적과의 싸움에서 대승한 기념으로 카를로스2세 때 세워진 개선문이다. 포르타 누오바에는 슬픈 얼굴의 아랍인들이 부조되어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아틀라스처럼 시칠리아를 떠받들고 있어야하는 형벌을 받은 것 같다.
 우리는 마시모 극장 앞으로 갔다.
 극장 앞에 마차가 쭉 서있는 것을 본 마사장님이 마차를 타자고 제안했다. 내일 다 둘러보겠지만 빨리 팔레르모를 보고 싶어 냉큼 올라탔다. 대충 둘러본 팔레르모는 어둡고 지저분하고 무엇보다 생기가 없다.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즐비하지만 노토의 살구 빛 건물과는 너무 다르다. 건설된 이 후 한 번도 보수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대부분의 건물이 많이 노후 되었다.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의 얼굴과 같다. 안타깝다.

 팔레르모는 BC 10C 경, 카르타고의 페니키아인이 들어와 살던 작은 식민 도시였다.
 그 후 로마 비잔틴 지배를 받을 당시만도 팔레르모는 문화의 중심지에서 빗겨나 있는 한미한 지역이었다. 시라쿠사가 663년, 잠시지만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될 정도의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스페인의 아랍인과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 연합군이 비잔틴을 시칠리아에서 몰아내면서 832년, 팔레르모는 명실상부한 아랍 시칠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878년, 시라쿠사까지 점령하면서 시칠리아는 온전한 아랍국가로 거듭났다.
 시칠리아를 차지한 아랍인들은 물이 풍부하고 온화한 기후가 연속되는 이 땅에 아랍의 작물을 옮겨왔다. 레몬, 오렌지, 샤프란, 올리브...
 살림이 윤택해지니 페르시아의 철학, 천문학, 수학, 기하학, 의학 등의 학문을 이식시켜 결국은 유럽에 이 모든 것을 전달하는 중간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시칠리아는 아랍인에 의해 지중해의 경제, 문화의 중심 센터가 된 것이다.
 그 핵심 본부가 있던 곳이 바로 팔레르모였다.
 이 당시 시칠리아를 방문했던 여행자들의 글을 보면 이구동성으로 섬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칭찬한다. 이슬람교도의 지배자들은 종교적으로도 너그러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거나 노예화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에게 부과되는 지즈야라는 약간의 인두세만 내면 모든 활동에 제약을 두지 않았다. 아랍의 시칠리아 지배는 200여년(AD 827~1072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다 프랑스계 노르만족이 예루살렘 성지 순례로 이탈리아를 들락거리다 비잔틴 세력의 확대를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과 교황 니콜로 2세의 도움으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지배권을 인정받고 드디어 1072년, 팔레르모를 점령했다.
 시칠리아의 새 지배자는 아랍 시칠리아를 넘어선 선정을 베풀었다.
 처음 이 땅을 밟은 노르만의 오트빌 가문의 루지에르 1세는 대백작의 직함에 만족했지만 그의 아들, 루지에르 2세는 달랐다. 시칠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교묘한 줄타기로 교황의 허락을 받아내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당당히 대관식을 치루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주 훌륭한 전략가였다. 적은 수의 노르만인으로 시칠리아를 완벽하게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모든 시민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기독교들에게 부과되었던 인두세도 없앴다. 물론 아랍인들에게도 인두세를 부과하지 않았다.
 팔레르모에는 300여 개의 모스크가 있었고 그 수만큼의 교회에서 하루 종일 당당하게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든 민족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게 하여 높이 썼다.
 그리스인들에게는 막강한 해군을 양성하게 하고 국가 재정은 수학 실력이 뛰어난 아랍인들에게 맡겼다. 또 통 큰 예술 후원자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그의 궁전은 12C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들었고 팔레르모는 유럽 최고의 지적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 되었다. 중세 과학에서 중요한 언어는 그리스어와 아랍어였는데 이 두 언어를 모두 배울 수 있는 곳은 팔레르모가 유일했다.
 18C 괴테가 왔을 때도, 19C 모파상이 왔을 때도 팔레르모는 그런대로 옛 영화가 깃들어 있는 훌륭한 도시였다. 그러나 21C, 여기 온 나는 소낙비, 가랑비 모두 맞아 후줄근해진 이 도시를 대놓고 칭찬할 수가 없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핏기가신 모습이지만 고색창연한 건축물을 싹 밀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차 투어를 끝내고 다시 마시모 극장으로 왔다.
 이 극장이 이 도시에서 가장 반짝반짝 윤이 난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오페라 극장은 대부의 촬영 장소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통일 기념으로 1861년부터 짓기 시작해 1897년에 완공되었다. 하지만 극장 운영을 놓고 마피아와 결탁한 공무원들의 비리 문제가 불거져 25년간 (1974~1999년) 문을 닫기도 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호두 빛 나무로 장식된 내부는 다른 유럽 극장에 비해 화려함은 덜 하지만 격조 있어 보인다. 곧 모차르트의 <돈 조바니> 공연이 올려 질 예정이어서 무대 장치가 한창이었다. 천정과 벽은 아름다운 여신, 천사, 꽃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색감도 부드럽고 과하지 않아 고급스럽다.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기법이다.
 로얄박스 석 요금이 100유로가 좀 넘는다는데 우리 돈으로 환산해보니 20만원이 채 못 된다. 3,000명이 들어올 수 있는 유럽에서 3번째로 큰 규모지만 이 도시의 경제 상황으로 보면 만석이 될 경우는 거의 없지 싶다. 극장 구경을 끝으로 오늘의 일정이 끝났다.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 나니 꼼짝도 하기 싫다. 오늘 하루 너무 길었다.

 

제9일 (5월 3일) - 시칠리아를 사랑한 두 영웅이 잠들어 있는, 팔레르모 -

  언제나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팔레르모 거리 구경에 나섰다.
 대도시의 한산함이 너무 낯설어 신기하다. 우리나라 아침 6시의 거리 풍경을 떠올려보면 참 많이도 다르다. 호텔을 나와 무작정 걷다보니 가르발디 극장이 보였다.
 질주하는 청동 말들이 올려진 개선문 닮은 파사드 뒤로 콜로세움 같은 원형 건물이다.
 이오니아식 열주가 인상적이긴 하지만 너무 많이 훼손되어 민망하다.
 포스터는 붙어있지만 극장으로 쓰여 지지는 않는 것 같다.
 극장 앞 공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니 어린아이 둘을 모델로 한 청동 조각상이 보였다. 두 아이는 고아인 듯 춥고 배고픈 고통 속에 있음을 암시한다.
 맨발의 발가락을 잔뜩 오그리고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의 팔레르모를 보는 듯하다.

 12C 중엽 노르만 시칠리아 시대에 이곳을 방문한 이븐 주바이르는 팔레르모의 인구가 약 25만 명이며 수많은 시장과 거리에 기술자와 장인들이 득실거리며, 사원마다 왕이 넓은 토지를 하사한 덕분에 금과 은으로 만든 십자가로 넘친다고 말했다.
 이는 그 당시 유럽에서 이스탄불 다음으로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였다.
 1889년, 팔레르모에 온 모파상은 상점과 소음으로 가득 찬 인구 250만의 도시는 활기와 유쾌함이 넘쳐나 놀랐다고 했다. 2011년 통계로 팔레르모 인구는 70만 정도이다.
 모파상이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이 도시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 나라가 기우는 데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시칠리아의 가장 큰 타격은 정치적 이유지 싶다.

 시칠리아는 노르만 시칠리아 시대의 최전성기를 끝으로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노르만 왕가가 물러난 뒤 들어온 지배자들은 이 섬을 착취의 대상으로 여겼지 자신들의 고국으로 만들 계획이 전혀 없었다. 독일의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이어 들어온 프랑스계 앙주 왕가와 스페인계 왕가들은 너무나 기독교적이어서 관용과 공생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모든 시민은 의무만 짊어진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했다.
 스페인 지배 시절 모든 모스크는 사라지고 아랍인들은 개종을 강요받았다.
 이로서 지중해의 기적은 사라졌다. 시칠리아인들은 외부 세력에 민감해지는 체질로 변하고 내 주먹만 믿는 가족끼리의 응집력이 강해졌다. 이는 시칠리아 마피아 탄생의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1908년에 이 섬에서 태어나 자란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작가, 엘리오 비토리니의 자서전 격 소설 <시칠리아에서의 대화>를 읽어보면 대부분의 시칠리아인들은 오렌지 농장 노동자이며 급료를 오렌지로 받아 생활하는 비참한 현실을 고발했다.
 1860년에 가르발디에 의해 이탈리아로 통합된 시칠리아는 북부 이탈리아에 비하면 아무런 기반 산업도 없는데 그들과 똑같은 세금 징수에 등골이 휘었다.
 이 빈곤의 사슬을 끊는 방법으로 많은 시칠리아 인들은 미국 등지로 떠났다.
 2차 대전 때는 파시스트 진압을 이유로 연합군의 집중적인 포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도를 넘는 악행을 계속하는 마피아 집단 때문에 시칠리아는 반역의 땅이 되어 중앙 정권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현재의 이탈리아는 전체적으로 큰 경제적 난관에 봉착해있다.
 그리스보다는 괜찮지만 일본, 독일과 함께 세계 최고령 인구 비율이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또한 옛 로마의 네로 황제에 비견될만한 베를루스쿠니의 무책임한 퍼주기식 복지정책으로 나라는 앞이 안 보이는 위험에 빠져있다.
 젊은이의 실업률이 42%나 되는 기형적인 나라가 되어 매년 4만이 넘는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세계를 떠도는 차지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칠리아의 사정이 좋아질 기미는 없어 보인다. 그 옛날 유럽인들이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나라를”하며 선망했던 풍요로운 시칠리아는 이제 박제된 과거일 뿐이다.

 조금이라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찾아보고 싶어 해변으로 향했다.
 괴테가 아침이면 행복한 마음으로 산책했다는 바닷가로...
 하지만 해변은 소음 가득한 하역부두로 변해 접근조차 힘들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골동품 상점을 만났다. 문은 닫쳐있지만 창에 붙어있는 한 장의 사진이 눈길을 붙잡았다. 모간티나 여신상이다.
 시칠리아에 오기 전 이것저것을 뒤지다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2011년 3월 21일, 시칠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은 온통 축제의 분위기였다.
 악대까지 동원되어 온 주민이 맞아드린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 폴. 게티 미술관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조각 작품 하나, 모간티나의 여신이었다.
 BC 5C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미술품은 게티 미술관이 1988년 우리 돈으로 200억(1,800만 달러)이라는 기록적인 가격으로 구입해 전시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이 작품이 오래전에 약탈범에 의해 밀반출된 불법 거래품이라며 반환을 요구했고 여러 경로를 통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결국 게티 미술관은 반환을 약속한다.
 이 조각품이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 아이도네 박물관으로 인도된 사연은 더 흥미로웠다.

 2m 30cm의 여신은 머리와 팔은 질 좋은 고급 대리석이지만 몸통은 석회암이었다. 그 석회암을 분석한 결과 옛 그리스 식민지였던 모간티나 고대 유적의 암석과 일치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옛 모간티나에 가까운 아이도네 박물관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게티 미술관에 있을 때는 이 조각상이 아프로디테라고 추정되어 아프로디테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하지만 원산지가 시칠리아로 밝혀지면서 농업의 여신 데메테르라는 추측이 더 지배적이다. 우선 몸매가 풍만하면서도 당당해 내 눈에도 미의 여신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데메테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농업의 여신이다.
 특히 시칠리아 최고의 여신으로 시라쿠사에 신전도 있었다.
 데메테르는 제우스의 여동생이자 부인으로 둘 사이에는 페르세포네라는 어여쁜 딸이 있었다. 지하의 신 하데스가 그녀를 보고 반해 지하세계로 납치해 갔다.
 이 사실을 안 데메테르는 슬픔에 겨워 농업의 신으로서의 직무를 내팽개쳐 농사가 엉망이 되고 인간들은 기아에 허덕이게 된다. 결국 중재에 나선 제우스가 하데스를 설득해 페르세포네는 일 년 중 반은 지하세계에서, 반은 어머니와 지내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진으로 보니 머리 부분은 많이 훼손되었지만 앞으로 걸어 나가는듯한 당당한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된 멋진 그리스 조각품이었다. 여신상에 대한 이야기는 각 방송국이 연일 중계를 해 많은 이탈리아인들의 관심을 받았으며 특히 시칠리아에서는 여신의 귀환이 옛 영화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의 신호로 해석해 시칠리아 전체가 흥분했었다. 아이도네 박물관은 1년 내내 찾는 방문객이 1만 명을 넘지 못했었는데 이 여신상의 귀환으로 방문자가 10배 이상 늘었단다.
 내심 이 조각품이 보고 싶어 시칠리아에 도착한 첫날 안나씨에게 아이도네 위치를 물어보니 다행히 우리 일정에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은 것 같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여행을 해보니 기본 일정을 소화하기도 매일매일 숨 가빴다. 이런 상황에 내 개인적인 욕심을 내세울 수 없어 마음을 접었는데 이렇게 시칠리아에서 사진으로나마 보게 되니 조금 위안이 된다.

 오늘 처음 일정을 시작한 곳은 팔레르모 대성당이다.
 유럽 성당의 전형적 건축물이다. 12C 카톨릭 대주교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해 600여 년(1185~1809년)에 걸쳐 증, 보수가 이루어졌다.
 처음은 돔이 있는 정교회 십자가 형태의 비잔틴 양식으로 시작해 고딕 양식도 첨가되고 바로크적 장식도 더해졌다. 내부로 들어서니 지붕을 받치고 연결된 하얀 아치형 천정이 첫눈에 들어온다. 어지러울 만큼 많은 색들의 조화로 빛나던 몬레알레 성당과 비교하면 흰빛의 성당은 정갈하고 단순해 마음이 편안해진다. 진정한 신의 처소다. 관광지 느낌의 몬레알레 성당과 대조적이다. 잔잔한 네오 클래식(신고전주의) 벽면 장식이 귀품을 더 한다. 하지만 내가 이 성당에서 정말 보고 싶은 것은 시칠리아를 진정으로 사랑했고 번영과 관용의 땅으로 이끈 두 걸출한 왕의 무덤이다.

 시칠리아 최고의 왕! 루지에르 2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왕이기도 했던 프리드리히 2세 !
 루지에르 2세의 손자, 굴리엘모 2세(몬레알레 성당 건설)가 후손 없이 죽자, 고모 루지에르 2세의 딸인 콘스탄차가 독일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하인리히 6세와 결혼하면서 시칠리아의 왕권은 신성로마제국에 흡수됐다.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프리드리히 2세다.
 독일인의 혈통을 이어받았지만 시칠리아 태생의 프리드리히 2세는 루지에르 2세와 너무도 닮았었다. 박학다식한 르네상스적 군주로 노르만 왕조의 치적에 버금가는 선정을 베풀었지만 이미 기우는 나라의 운세는 어쩔 수 없었다.
 특히 그는 교황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시작한 6차 십자군 원정에서 그 당시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던 이집트 술탄과 보여준 우정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이집트 술탄, 알. 카밀에게 아랍어로 직접 작성한 여러 번의 서신을 보내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설명했다. 이런 프리드리히 2세의 인품과 박식함에 감동 받은 술탄은 드디어 만나 그를 예루살렘 왕으로 인정했다. 예루살렘 통치권은 기독교 국가가, 성소 관리권은 이슬람이 갖기로 협상했던 것이다. 물론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의 성지 순례는 허락하기로 했다.
 교황은 아무런 전리품 없이 끝난 이 전쟁에 분노해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시켰다.
 그 후로도 프리드리히 2세와 알. 카밀의 우정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알. 카밀이 죽은 후 협상은 파기되고 다시 전쟁은 시작됐다.
 알. 카밀의 죽음과 협상파기를 프리드리히 2세는 많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800여년 뒤, 그의 관을 열어보니 알, 카밀과 나눈 서신, 선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으며 그의 수의에는 아랍어로 알. 카밀에 대한 찬양 글귀가 수 놓여 있었다고 한다.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경계를 초월한 범세계적인 인물 프리드리히 2세!
 중세의 모든 인류가 별다른 고민 없이 맹목적으로 광적인 종교에 매달려있을 때, 그는 종교의 무용론까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종교가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일 뿐이라는 인식과 인간 중심 세상에 더 가치를 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에 대한 여러 일화를 봐도 사랑이 넘치는 인물은 아니지만 과학적 사고와 실험을 즐겨하던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그의 사상을 글로 남겼다면 니체보다 60~70년 앞당겨 ‘신은 죽었다’고 외쳤을지 모른다.

 실제로 그는 문학적 재능도 뛰어나 시칠리아 시파를 주재해 중세 이탕리아어 기조를 닥았다. 또 아랍 최대 고급 취미였던 매샤냥에 심취해 <새를 이용한 수렵술>이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선한 인간, 악한 인간, 위대한 인간, 권모술수가 능수 능란한 인간 등등... 그의 한평생을 한문장으로 표현 할 수 었는 굴곡진 인생을 산 프레드리하 2세! 알면 알수록 흥미롭고 매력있는 인물이다.
 우리에게 <양철북> 작가로 유명한 권터 그라스도 그의 자서전 격 책인 <양파 껍질을 벗기며>에서 프리드리히 2세라면 그의 종자가 되어 팔레르모까지 모시고 싶다며 존경심을 표했다.

 이태리 르네상스를 200여년 앞당겨 포문을 연 위대한 인물의 석관은 내가 본 석관 중에 최고다. 붉은 화강암 석관은 그 자체로 명작이다.
 흔히 우리나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석재는 단단한 화강암이라 섬세한 돌 예술품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저 단단한 화강암을 밀가루 반죽처럼 주물러 대리석보다 정교한 장식을 한 이곳의 석관을 보면 우리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게 된다.
 분명 이집트 아스완에서 공수해 왔을 황제의 돌이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석관 뒤에 루지에르 2세의 석관이 있다.
 석관을 둘러싸고 있는 아랍 식 상감 기둥이 참 아름답다.
 본인은 자신이 건설한 체팔루 성당에 묻히기를 염원했지만 아들은 끝내 이곳에 모셨다.

 성당을 나와 팔레르모의 중심축이 되는 콰트로 칸티를 둘러보고 수치의 분수가 있는 프레토리아 광장으로 왔다. 나신의 조각상들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둥글게 서있는 상당히 큰 분수다.
 조각상을 자세히 보면 시칠리아 풍은 절대 아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피렌체 왕궁을 장식하기 위해 피렌체 사람이 만들었단다.
 그러나 피렌체 왕 톨레도가 그의 동생에게 분수 전체를 선물로 주어 644 조각으로 나누어 가져와 1584년에 완성된 것이란다.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들로 시칠리아에서는 이질적이지만 아름다운 분수다. 처음 시칠리아 내에서도 많은 수의 사람들이 벗은 몸을 드러내고 있는 분수가 부담스러웠던지 수치의 분수라는 조금은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이 붙은 것 같다.

 수치의 분수와 연결된 작은 벨리니 광장으로 갔다.
 이 광장에는 꼭 보아야할 라 마르토라나 교회와 산 카탈도 교회가 있다.
 우선 마르토라나 교회로 갔다. 상당히 많은 관광객들로 교회는 만원이다.
 아담한 교회는 비잔틴 양식의 황금빛 모자이크로 눈이 부셨다.
 특히 천정의 청금색에 노란별이 박혀있는 장식은 신선하고 경이롭다.
 정교한 아랍 풍 상감기법의 벽장식도 그 세밀함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몬레알레 성당과 비교해 스케일이 작다는 것 이외에 나무랄 곳이 없다.  오히려 가까이서 모자이크를 감상할 수 있어 더 매력적인 장소다.

 1143년에 시리아 출신 해군 제독이 건립 했다는 이 성당은 동방정교회 신자답게 처음에는 완벽한 비잔틴 양식의 교회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라틴계 교회 요소가 더해진 특이한 경우다.
 시칠리아답게 다른 문화적 요소가 충돌 없이 자연스럽게 융합된 것이다.
 이 성당의 가장 큰 볼거리는 루지에르 2세가 신으로부터 직접 왕관을 받는 장면이 새겨진 모자이크다. 교황이라는 중계자 필요 없이 자신은 신으로부터 직접 왕권을 부여 받은 지존이라는 정당성을 돌로 새긴 것이다.

 마르토라나 성당을 나와 잠시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고 카타콤베를 보러 갔다.
 카타콤베란 지하 공동묘지다. 우리가 간 곳은 프란치스코 교파 중 하나인 카푸친 수도원 카타콤베다. 이 카타콤베 이야기는 모파상 여행기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이라 기대감으로 약간 흥분됐다. 입장료를 내고 지하로 내려갔다. 와우 ! 와우 !! 끔찍하다.
 유럽 수도원에서 백골이 된 머리만 모아놓은 묘지도 보았고 페루에서는 선반 가득 메우고 있던 엄마 뱃속에서처럼 웅크리고 앉아있는 해골도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옷을 갖추어 입고 사지를 늘어트리고 서있는 해골 집단은 처음이다.
 거의 8000여 구나 된다. 바래고 헤어진 옷을 걸친 모습은 기괴하다 못해 연옥을 떠올리게 한다. 천국과 지옥 사이가 아니라 이승과 저승 사이에 갇혀 울부짖는 형상이다.
 그러나 공포보다 더 큰 호기심으로 발을 내딛으면서 그들을 보고 있으면 점차 공포심이 사라지면서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살아있는 인간 모두 얼굴과 몸이 다르듯 그들도 마찬가지다. 유난히 고통스러워 사지가 뒤틀린 이도 있지만 온화한 미소를 띤 해골도 있다.
 더더욱 박장대소를 하고 있는 듯한 해골을 보면 나도 같이 웃게 된다.
 대부분 수도사들이 입었던 망토 비슷한 옷을 걸치고 있지만 멋진 정장 차림의 신사도 있고, 왕관을 쓰고 멋진 드레스를 입은 해골도 있다. 하얀 면사포와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은 대부분 결혼 하지 않고 죽은 10대 후반의 처녀들이란다. 그녀들을 보고 있자면 어쩔 수 없이 깊은 연민에 빠진다. 빛났을 청춘이 너무 아깝다.

 드디어 이 카타콤베를 세계적 명소로 만든 1등 공신 미이라와 대면했다.
 1920년, 두 살 때 죽은 <잠자는 공주, 로잘리아>다.
 머리카락이며 속눈썹까지 완벽한 잠자는 아이 얼굴이다.
 풍성한 머리에 매단 리본도 어제 단 듯한 인형처럼 예쁜 아이다.
 부모의 요청으로 유명한 의사가 방부처리 했기에 이 아이는 영원히 잠자는 공주가 될 수 있었단다. 영원한 안식은 갖지 못했지만 모든 이들의 영원한 사랑은 분명히 받고 있다.
 이 카타콤베에 들어온 사람들이 무겁고 서글픈 심정으로 돌아다니다 이 아이를 보면 환한 서광을 보는 심정으로 미소를 띠게 된다. 살아있는 있는 것 같은 아이를 보면서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소중함과 기적에 감사하게 된다.

 이 카타콤베는 16C 수도사들의 묘지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이 지하묘지는 시체의 분해가 빨리 이루어져 1년 정도가 지나면 바싹 말라 미이라 상태가 되거나 아니면 완벽한 백골이 되었다.
 이 사실이 입소문 나면서 가족을 영원히 보기 위한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고 이곳에 묻히게 되었고 1년이 지나면 가족이 와 시체를 꺼내 옷을 입혀 걸어두기 시작했다.
 모파상이 이곳을 방문 했을 때가 1889년이었다. 그 당시는 시칠리아 사람들도 더 이상 이곳에 가족을 의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파상은 1880, 1881, 1882년 이라는 명패를 목에 걸고 서 있는 해골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불과 7~8년 전까지 자신과 똑같이 살아 움직이던 사람들이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미래의 내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는 이런 경험은 아프고 씁쓸하다. 모파상은 4년 뒤(1893년) 저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다.
 다시 한 번 내 죽음은 남에게 알리지도 말 것이며 하얀 가루가 되어 흔적 없이 이 세상과 작별하겠다고 다짐한다.

 오전 마지막 방문지는 국립미술관이었다.
 일정표에는 없었던 곳인데 이곳 역시 누군가가 강력하게 원했나보다.
 미술관 건물이 아름답다. 넓은 중정을 가운데 둔 이층 건물로 가는 기둥으로 둘러싸인 회랑이 돋보이는 화려하진 않지만 격조 높은 중세 풍 건물이다.
 중세 유럽을 휩쓴 페스트의 광풍을 그린 <죽음의 승리> 프레스코화를 먼저 보고 이 미술관의 얼굴인 안토넬로 다 메시나 (1430~ 1479)의 <성모영천 마돈나>를 보러갔다.
 내가 알고 있는 그림보다 너무 깨끗하다. 최근 복원을 했지 싶다.
 푸른 옷의 야무진 얼굴의 마돈나 ! 색다른 마리아다.
 마리아의 수태고지 이야기는 너무 많은 화가들이 다루어 특별할 것이 없는 테마다.
 10대 마리아 앞에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성령의 힘으로 아기예수 잉태를 알린다.
 “두려워 마라, 마리아여! 너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 너의 아이를 잉태할 것이니 그 아이를 낳고 예수라 이름 지어라.” (누가 복음 )
 복음서의 내용처럼 대부분의 마리아는 두려운 얼굴로 아니면 기쁜 얼굴, 그것도 아니면 순종적 표정으로 가브리엘이 전하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드린다.
 그리고 그 영광된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것들이 숨은 그림처럼 들어있다.
 가브리엘이 나타나야하고 비둘기도 날라야하며 마리아의 순결을 의미하는 백합도 그려져야 한다.  또한 가브리엘이 혼자 오면 모양이 빠지니 귀여운 천사도 함께 해 온 사방이 성령의 빛으로 충만해야 근사한 종교화로 사랑 받을 수 있었다.
 그런 교과서 같은 성화로 가득한 시기에 안토넬로는 달랐다.
 딱 한 분, 마리아만 그렸다. 책을 보고 있는 푸른 옷의 마리아!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지적인 용모의 반듯한 얼굴이다. 결코 미인은 아니지만 귀품이 엿보인다. 마리아의 시선과 손짓을 보면 옆에 가브리엘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가브리엘이 성령에 의한 잉태를 고지할 때, 마리아는 낮고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됐다. 가브리엘이여 !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복음서가 전하는 내용과 다르지만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오시는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할 정도의 선택 받은 여인이라면 그 수태고지를 두려움이아니라 기꺼이 담대하게 받아드리는 성모를 그리고 싶은 욕망을 누군가는 갖지 않았을까 ?
 그가 바로 안토넬로 다 메시나였다.

 시칠리아 출신 안토넬로는 사망하기 3년 전 거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 마리아를 그렸다.
 마리아의 얼굴도 시칠리아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아랍 여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사람에 따라선 마리아의 손짓과 표정이 수태고지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고 단언하는 몸짓이라지만 이는 실지로 이 그림을 보지 못한 사람들의 평가라고 생각된다.
 마리아의 눈은 그런 어리석음을 담고 있지 않았다.
 동시대를 살았던 얀 반 에이크 (1395~1441년)의 많은 수태고지와 비교하면 참 흥미롭다.
 에이크의 성모는 여인도 아닌 그렇다고 소녀도 아닌 조금은 미 성숙된 얼굴이다.
 너무나 평범해서 성스러운 감동은 없다.
 잠시 자유시간이 주어졌지만 이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을 천천히 감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충 둘러보고 나왔다. 많은 시간을 대여 미술품으로 해외에 나가 있다는 안토넬로 성모를 본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점심 먹을 식당으로 이동하는 도중 잠시 부치리아 시장 통을 지나갔다.
 한 눈에도 시장 경기는 명성 같지 못 하다는 걸 알겠다.
 너무 낡은 점포들은 곧 재개발을 앞 둔 달동네 같다. 부서져 내린 집 내부를 보니 아직 채색이 아름다운 아라베스크 문양의 벽장식들이 남아있다. 아랍 상인의 집이었나 보다.
 시칠리아 출신 화가 구투소의 그림 <부치리아>에서 본, 활기 넘치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 민중의 삶이 녹아있던 시장의 풍경은 어디에도 없다.

 오늘 점심은 시칠리아에서 먹은 식사 중 최고였다. 그 중 문어 샐러드는 지중해의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듯 했다. 살짝 익혀낸 문어와 각종 신선한 야채가 상큼한 레몬 향기에 어울러져 오감을 깨운다. 감탄을 연발 했더니 안나씨가 더 갖다 주어 결국 샐러드로 배를 채웠다.

 식사 후 노르만 궁으로 갔다.
 팔레르모 최대 인파가 몰려있다. 처음으로 한참 줄서 기다리다 입장할 수 있었다.
 입장해서도 팔라티네 성당을 보기 위한 줄을 또 서야했다.
 성당을 들어서니 이미 몬레알레 성당에서 비잔틴 금빛 모자이크 예술에 푹 빠져보았기에 새삼 충격 받을 일은 없지만 그래도 무릎이 탁 꺾이는 전율이 왔다.
 몬레알레 성당이 금빛과 섞인 온갖 색채의 향연이 벌어진 장소였다면 이곳은 커다란 금덩어리 속에 들어온 황금색의 향연이다. 왕궁의 부속 성당이기에 규모는 크지 않다 (길이 33m, 너비 13m).
 오 ! 난 천정 장식에 혼을 빼앗겼다.
 바실리카 양식의 양쪽 복도 천정은 지금까지 시칠리아에서 익히 보아온 다마스쿠스식의 아랍 풍이지만 가운데 회중석의 천정은 페르시아식 로제트 문양이 가득한 종유석모양의 나무 천정이다. 저 종유석 모양의 장식은 인도 무굴 제국의 건축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이곳은 신의 접견 장소가 아니라 노르만 시칠리아 왕국의 힘의 크기를 보여주기 위한 과시의 장소다. 또한 모든 민족과 그들의 문화를 포용하는 화합의 한마당이기도 하다.
 영세 받은 술탄, 루지에르 2세에게 딱 어울리는 기적의 장소다.
 지중해 한가운데서 동서양의 모든 문물을 받아드리며 거대한 교역 중심으로 우뚝 서 스폰지처럼 세상의 부를 빨아들인 부자왕의 치세를 이 조그마한 성당에서 확인했다.
 밖을 나오니 가는 비가 내리고 있다.
 밖에서 본 왕궁은 투박하기 그지없는 멋없는 건물이다. 그러나 시칠리아 최고의 보물을 품고 있다.

 예레미티 교회로 갔다.
 이 교회 역시 1142년 루지에르 2세의 명으로 건설되었다.
 로마 교황으로부터의 독립을 과시하기 위해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수도사들에게 내어주었다.
붉은 색 돔이 아름다워 유명하지만 진짜 볼거리는 아랍 식 정원이라고 들었기에 기대가 컸다.
 하지만 정원의 식물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볼품이 없다.
 제라늄, 재스민, 오렌지 꽃, 향기가 달콤한 파라다이스 같은 곳을 꿈 꿨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내부도 너무 많이 훼손되어 특별한 감흥이 없다.

 마지막으로 오전에 보지 못한 산 카탈로 교회로 갔다.
 이곳 역시 1160년에 건설된 베네딕투스 수도원 성당이다.
 특이하게 팔레르모 우체국으로 사용되기도 했단다. 현재는 비워져 있는 상태지만 기대했던 예레미티 교회보다 훨씬 느낌이 좋다. 귀여운 붉은 돔이 인상적이다.
 내부로 들어서면 예레미티 교회처럼 모든 장식이 다 사라지고 붉은 벽돌의 뼈대만 남아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장식 없이도 너무 훌륭하다. 시칠리아를 거쳐 간 모든 건축 양식이 집약되어 있다.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로마네스크의 투박한 아치를 화려한 코린트 기둥이 받치고 있다.
 바닥에는 아라베스크 문양의 대리석 흔적이 남아 있고 특히 여러 문양의 돌 창문은 너무나 아름다운 아랍 풍이다. 건물 전체가 완벽한 아랍, 노르만 양식의 칵테일이며 동서양의 조화다.
 이 교회의 처음 모습이 정말 궁금하다. 스테인그라스 창이 아니라 삼라만상 모든 것을 담은 석창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을 기둥에 기대서서 보고 있자니 중동의 어느 사원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장소다. 이곳의 모든 것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어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비는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고 있다.
 호텔로 돌아가는 도중 갑자기 온 거리가 핑크빛 물결을 이루고 경적을 울려대는 차들로 소란스러워졌다. 시칠리아 축구팀이 2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진출했다는 경사스러운 뉴스 때문이란다. 노쇠한 회색빛 도시의 젊은 생기가 반갑다.
 150년 전 이곳에 온 모파상은 소박하지만 기묘한 그림이 그려진 짐수레들이 거리를 메우고 마차를 끄는 짐승들은 방울과 알록달록한 마구를 쓰고 내달려 유럽과 다른 이국적인 정취로 가득한 거리라고 썼다.
 그러나 지금은 이 나라 최고의 스포츠, 축구가 시칠리아에 인공호흡을 하고 있다.
 매일매일 비슷비슷한 코스요리에 염증이 나 지나가는 말처럼 정말 이태리적인 일반 음식, 피자 한 번 먹자고 마사장님께 말씀드렸더니 기억하셨는지 오늘 저녁은 피자란다. 더 말할 필요 없이 훌륭한 피자였다.



제10일 (5월 4일) - 이탈리아 최고의 바다 사나이들의 고향, 아말피 -

  오늘은 기차를 타고 팔레르모를 출발해 메시나 해협을 건너 이태리 본토로 들어가는 날이다.
 이제 시칠리아와는 이별이다. 일찍 출발하는 우리를 위해 호텔에서 로비에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주었다.
 기차는 메시나에서 토막토막 잘려 배에 실렸다.
 모두 기차에서 내려 갑판 위로 올라가 마지막까지 시칠리아를 눈에 담았다. 메시나도 참 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황금 성모상의 배웅을 받으며 시칠리아와 멀어졌다.

 기차에 내려 버스를 타고 아말피 해안이 시작되는 살레르노에 도착하니 이미 3시가 넘었다. 기차에서 제대로 된 점심을 못 먹었기에 간단하지만 커피와 케이크로 배를 채우고 아말피로 향했다.
 버스는 산허리를 휘감은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달린다.
 2차선도 되지 않은 도로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커브를 돌 때마다 온 몸이 사정없이 좌우로 흔들리고 앞에 차가 나타나면 나도 모르게 긴장한다.
 솔직히 마음 놓고 풍경에 집중할 수가 없다.
 몇몇 분은 멀미도 하신다.

 아말피를 두고 세계 3대 절경 해안이니, 내셔널 지오그래픽 기자들이 선정한 꼭 봐야할 곳, 1위니 하며 아말피를 지상 낙원처럼 홍보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유치한 주관적 순위를 혐오한다. 어떻게 여행지를 줄 세울 수 있으며 그 하나하나의 특이점을 보편화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여행의 주체인 나의 정서는 어쩌라구?
 아말피! 물론 아름답다.
 짙푸른 청록색 바다가 보이고 험준한 지형을 끼고 돌 때마다 나타나는 하얀 집의 마을들! 규모가 크든 작든 마을 중심에는 어김없이 우아한 돔을 가진 성당이 자리 잡고 있어 신비한 영적 기운이 감돌기도 한다.
 하지만 지상낙원도, 뼈가 녹아내릴 것 같은 감동은 없다.
 아말피 해안이 모든 이들의 마음을 빼앗았다면 그건 자연적 요소보다 인간 승리 같은 위대한 풍경이다. 반듯하게 펼쳐진 땅 한 뼘 찾기 힘든 해안선을 따라 인간의 힘으로 이 풍광을 만들었다.
 살레르노에서 소렌토까지의 50km 해안선에는 인간이 축적해놓은 영롱한 눈물 같은 마을들이 박혀있다. 곡괭이와 굵은 땀방울 없이는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풍경이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 산토리니와 많이 닮아있다.
 가끔 이 지역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는 해변의 요새와 어우러진 마을을 보면 가슴이 저리면서 더 친밀하게 느껴진다.

 호텔에 짐을 두고 재빨리 나왔다. 먼저 호텔 바로 뒤 안드레아 성당으로 갔다.
 높은 계단 위 성당은 아름다웠다. 종탑은 아랍의 미나렛을 닮아 동양의 향기를 풍기고 무어 양식의 회랑 석재의 색의 교차는 스페인을 떠올리게 한다.
 내부는 화려한 바로크 장식으로 눈부시다. 거기에 정교한 대리석의 상감 장식이 더해져 기둥마다 모든 건축 양식을 섞어놓은 전시장 같다.
 아말피와 영락을 함께한 모든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최근까지 변모에 변모를 계속한 성당임에 틀림없다. 제단을 장식하고 있는 성화의 예수도 지금껏 본 적 없는 특별한 모습이다.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지만 몸은 헤라클레스처럼 건장해 십자가가 장식품처럼 매달려있다.

 성당을 나와 상가와 식당이 밀집된 대로를 통과해 민가가 모여 있는 산기슭로 올라갔다.
 부산 풍경과 비슷하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집은 포개진 것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래도 쇠락한 느낌의 집들이지만 좁은 마당에는 꽃들이 피어있고 노란 레몬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 한 두 그루는 자라고 있다.
 마을 끝 지점에 서 주변을 둘러보니 눈길 닿는 곳에는 모두 레몬 나무가 심어져있다.
 뜨거운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도록 검은 비닐 그물로 나무를 덮어놓아 낭만적인 풍경은 아니다. 관광객이 붐비는 해변에서 20여 분만 걸어 올라오면 비탈진 땅을 기를 쓰고 개간한 좁은 경작지가 있고 자동차의 접근은 꿈도 꾸지 못할 이런 집들이 있다.
 어촌도 농촌도 아닌 풍성한 햇빛 하나로 살고 있는 이곳 사람들의 곤궁한 삶이 한 눈에 그려진다. 이곳이 그 옛날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중동의 아랍인과 먼 아프리카인들을 상대로 교역을 한 용감한 사나이들의 고향이란 걸 인식하기는 참 어렵다.

 로마 멸망 후 지중해는 로마의 ‘우리 바다’에서 이슬람교도들의 안마당이 되었다.
 교역의 안마당이라기보다 해적질의 주마당이 되었다. 이런 지중해에 반격을 가한 주체는 이탈리아의 ‘4대 해상 공화국’ 아말피,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였다. 이들에 의해 지중해는 새로운 교역의 무대가 되었고 그 부흥기는 대략 9C 부터였다.
 이들 중 아말피는 다른 곳보다 시작이 빨랐다.
 이는 로마의 주요 군항이 나폴리 만에 포진되어있어 어느 정도 해상 활동에 익숙하기도 했겠지만 그보다 경작지 한 평 구하기 힘든 외진 지형적 조건이 이들에게 바다의 사나이가 되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던 것이다. 1,000년이 지난 지금도 좁은 해안 도로 이외 외부로 나가는 방법은 바다 말고는 없다.

 해양국가 아말피의 최전성기는 10C 중반에서 11C 중반, 100여 년 동안이었다. 이 당시 세계 상업 중심지에 아말피의 상인이 주재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콘스탄틴노플에는 이들을 위한 전용 교회와 수도원이 있을 정도였다.
 아말피는 나폴리보다 번성한 도시였다.
 중국에서 만든 나침판이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 유럽에 가장 먼저 전해진 곳이 바로 아말피였다. 나침판은 영국에서 개량되어 아라비아에 역수출 되었는데 그 가운데에 아말피 상인이 있었다. 사막을 횡단해야하는 메카 순례자들에게 개량된 작은 나침판은 꼭 필요한 물품이었다.
 이런 폭발적인 수요는 아말피 상인 같은 중계인들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 주었다.
 또 아말피는 중계 상인뿐만 아니라 자체 생산품으로 제지 공업이 발달해 질 좋은 종이를 생산해서 교황청을 비롯한 많은 수도원에 독점 납품해 고소득을 올리기도 했다.

 아말피는 중앙 집권적 정치형태로 상권을 평등하게 관리했던 베네치아와는 달리 완전한 자유 경쟁 체제여서 개인적으로 성공한 상인이 많았다.
 그 중 마우로라는 인물은 개인 재산으로 예루살렘에 순례 오는 신자들의 편의를 봐주는 성 요한 기사단을 설립해 숙박과 진료를 책임져주었다. 이는 역사상 상인에 의한 봉사 조직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말피는 최대 해운사업이었던 십자군 전쟁의 참여 기회를 놓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다 결국은 1073년, 새로운 남이탈리아의 지배자 노르만족에 의해 정복당하고 만다. 세계 각지에서 활약하던 아말피 상인들은 졸지에 나라 잃은 존재가 되어 고전분투하다 그 존재 자체가 미미해져 결국 그 지역민으로 흡수되었다.
 아무리 상술이 좋은 상인이라도 든든한 뒷 배경이 되어주는 나라가 없으면 외교적으로 기를 필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재 이 지구에서 나라 잃고 세계를 떠도는 민족들을 떠올려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나라 잃은 서러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도둑 나라를 세워놓고 그 땅을 지키기 위해 양심도, 종교적 영혼까지 팔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아말피에서 옛 영화를 기억하는 장소는 성 안드레아 성당뿐이다.

 저녁을 먹고 들어오다 김해숙씨를 만났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
 “저 김선생님! 한 가지 부탁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필로미나의 기적>이란 영화 보셨죠?”
 “네”
 “우리도 주디 덴치 같은 배우 한 명 쯤 가지면 안 되나요?”
 “제발 선생님 만이라도 얼굴 고치는 짓 하지 말아주세요.”
 김선생님은 웃으면서 자기도 절대 그런 짓 하고 싶지 않단다.
 세월이 무섭다고 의술의 힘을 빌려 모두 똑같은 가면 쓴 얼굴을 만들어 어머니는 없고 경박한 엄마만 있다. 주디 덴치 같이 주름 가득한 나이든 여배우의 얼굴은 천의 얼굴을 연기한 내공이며 우리의 추억이다. 필로미나의 기적을 보면서 주디 덴치의 얼굴을 보고 난 탄성을 질렀었다. 자연스러운 미소,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배우에게 얼굴은 자존심이며 책임감이다. 부풀어 터질 것 같은 배우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한숨이 나온다. 배우에게 개성 실종이 더 무서운 형벌 아닌가?
 “김선생님!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마지막 밤, 언제나처럼 아쉽기도 하고 또 빨리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중적 마음으로 쉽게 잠이 오질 않는다.



여행을 끝내고....

  한 동안 남자 배구에 푹 빠져 살 때가 있었다.
 관심 있는 경기가 있는 날은 모든 것을 작파하고 TV 앞을 떠나질 않았다.
 그 중 박희상이 소속된 대한 항공 경기는 나에게 필수 전공이었다.
 그 당시 최고의 에이스는 신진식과 김세진이었다.
 그들의 멋진 스파이크는 보는 사람 모두에게 전율 그 자체였다.
 하지만 나의 사랑은 박희상이었다.
 기량은 그들보다 조금 떨어지지만 그도 틀림없는 에이스였다. 성실하고 노력도 많이 하지만 그 둘을 넘어서지 못하는 벽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는 듯 한 슬픈 눈망울을 가진 박희상이 나는 좋았다.
 특 일등이 아닌 태생적 일등인 그에게 마음이 쓰이고 안쓰러워 깊은 애정을 가졌었다. 가수 휘성도 박희상과 비슷한 이유로 사랑한다. 분명 본능적 모성의 발로일 것이다.

 시칠리아가 그랬다. 훌륭한 여행지다.
 자연적 조건, 역사적 배경, 풍부한 먹거리, 빛나는 유적, 유물....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춘 완벽한 곳이다.
 하지만 특 A는 아니다. 아이슬란드 같이 압도하는 자연적 요소도 없고, 세계를 호령했던 역사에서도 비켜나 있으며 베르샤이유 궁전 같은 거대한 유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자의 마음을 빼앗는 요소는 얼마든지 있다.
 각각 성향이 다른 외부 권력자들이 남기고 간 조각들이 멋진 모자이크로 남아있고 또 그 세월을 살아낸 사람들의 숨어있는 숭고한 자부심이 있다.

 여행을 시작할 때는 열흘 정도면 대충 시칠리아를 본다고 생각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오만이었다. 섬 전체가 역사의 현장이었고 각기 다른 매력과 개성을 가진 마을들이 포진되어있어 1년을 여행해도 부족할 것 같다.
 17C~ 18C, 유럽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 휴가와 교양을 얻기 위해 남유럽을 여행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그 때 시칠리아는 필수 코스였다.
 시칠리아는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건축과 예술을 공부하고 세계사적인 안목을 키우기에 이보다 완벽한 학습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의 가장 아쉬운 점은 시칠리아의 박물관을 한 곳도 못 보았다는 것이다.
 이제 여행을 관광의 목적보다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전문가는 아니라도 수준 있는 시각으로 사물을 보려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본다.
 그 장소는 두말 할 필요 없이 박물관이다. 그 지역의 기억의 장소인 박물관을 못 보고 어떻게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깊은 애정을 갖게 된 최고의 여행지지만 오늘날의 시칠리아 사정은 옛 영화로웠던 추억에 의지한 출구 없는 미로 같았다.
 <시네마 천국>의 대사에서 어린 토토의 인생 스승이었던 극장 영사기 기사, 알프레도가 청년이 된 토토에게 이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충고한다.
 시칠리아는 미래가 없는 유령들만 있는 곳이라고... 시칠리아 출신 영화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생각일 것이다.
 며칠 있으면서 내가 본 시칠리아도 젊은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활기찬 장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명의 산책자로서 여유롭게 시간을 음미할 수 있는 장소로는 시칠리아만한 곳이 없다. 물질적인 풍요가 모든 행복의 척도가 될 수는 없으며 찬란한 문명이 퇴색 될 수도 없다.
 시칠리아를 표현하는 말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시칠리아는 신의 아름다운 눈물 한 방울이다>.
 이보다 더 멋진 표현은 없을 것이다.
 마피아의 고향이라서 위험하다고?
 진심으로 그런 마피아 만나보고 싶네.
 여행자의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영화 속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