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서울에 사시는 박완종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박완종님은 2001년2월에 13일간 테마세이투어와 함께 인도/네팔 여행을 다녀 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 1. 인도라는 나라 | | | | 내가 인도를 가겠다고 하니까 나의 주변에서는 고생할 텐데 그 곳에는 무엇 하러 가느냐고 들 했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부터 인도를 가보고 싶었다. 세게 4대문명발상지의 하나요, 우리 문화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불교가 태어난 나라, 그 불교를 발도 못 부치게 밀어내고 2,000여 년을 일관되게 고집해온 힌두교의 나라, GNP는 세계의 바닥권(약 410불)에 맴돌면서도 국민들이 스스로 느끼는 행복지수는 1, 2위를 다툰다는 나라,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을 그 나라의 유적들도 보고싶었지만 극심한 물질의 빈곤 속에서도 정신적으로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그 신비한 나라의 문화를 발로 더듬고 가슴으로 느껴 보고 싶었다.
건국대학교박물관에서 지도하는 유적답사팀이 인도를 간다기에 나도 동참을 해서 지난 16일(2001년 2월) 출발하여 28일에 돌아오기까지 13일간의 보고 느낀 것을 적어보려 하지만 면적이 우리 나라(남한)의 33배(3,287,782km2)에 달한다는 엄청난 국토의 일부를 겨우 밟아 보고 어찌 감히 인도를 보았다고 할 수 있으랴.
인도는 세계 7위의 넓은 국토에 중국 다음으로 많은 10억의 인구를 가진 나라로서 BC1500년 경부터 페르시아 방면에서 침입해온 아리안족(72%)과 그 아리안족에 밀려 남하한 원주민 드라비다족(25%)이 주류를 이루면서 남북으로 분포하였고, 그 외에도 티베트 미안마계를 비롯한 다양한 소수종족과 혼혈족 들이 살고 있다.
국가의 공용어는 힌두어와 영어이지만 그 외에 국가가 인정하는 언어가 14개나 더 있어서 화폐의 뒷면에까지 글자가 서로 다른 열 네 개의 단어가 깨알 같이 기록되어 있는 상황이고, 공식으로 인정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쓰이고 있는 말이 무려 700여 종에 이른단다.
이처럼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갖는 많은 지역이 하나의 인도문화권을 형성하고, 광대한 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종교의 힘이었다. 현재 인도에는 이슬람교(11%), 크리스트교(2.5%), 시크교(2%), 자이나교(0.5%), 불교(0.7%) 등 다양한 종교가 있지만 전체국민의 83%가 힌두교를 신봉한다. 힌두교는 원래 아리안족의 원시종교인 브라만교에서 발달하였다. 司祭階級으로서 브라만이 수 많은 自然神 들을 숭배하면서 소위 '카스트제도'라는 것을 만들어 신분차별을 심화시켰고, 이에 불만을 품은 종교개혁으로서 석가모니에 의한 불교, 마하비라에 의한 자이나교 등이 중생의 평등을 제창하면서 창시되었다. 이러한 신흥종교에 압도된 브라만교가 궁여지책으로 민간의 토착신앙을 끌어들여 결합한 것이 힌두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원시신앙이란 온갓 자연과 생물, 물질이 모두 신앙의대상이 되는 것이어서 힌두교에는 신이 3만 3천이나 된다느니 인도의 사람수보다 많다느니 하는 다신교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소도 숭배의 대상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소가 신은 아니고 어느 신이 타고 다니던 동물이었음으로 신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 것이란다. 그래서 큰길의 중앙분리대에는 소들이 줄지어 서 있거나 누어서 한가롭게 되새김질 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어디 소 뿐이겠는가. 임자 없는 개도, 염소도, 돼지도 거리의 차량과 인파 속을 헤집고 돌아다닌다. 시장바닥에서 먹을 것을 찾기도 하고, 야채상인들이 폐기물을 모아서 찾아오는 짐승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단다. 그러니 거리는 온통 짐승의 똥과 쓰레기와 건조한 기후로 인한 먼지, 낡은 차량들이 뿜어내는 매연으로 뒤덮여 있다. 거기에다 거리에 나서면 간난 아이를 안은 여인, 코를 땅에 끄는 할머니, 10세 미만의 어린이 들이 맨발에 남루한 천 조각을 걸치고 구걸의 손길을 내밀고 있어서 차마 그저 지나갈 수 없게 하는데 10루피 짜리 지폐 한장(300원 상당)을 건네주면 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나는 지금도 일곱 살 쯤 되어 보이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던 거지 어린이의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 반작이는 눈빛이 하도 예쁘고 가련해서 10루피를 쥐어 주었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또 다른 한 명이 위험한 차길 속을 비집고 내가 타고 가는 사이클릭샤(자전거로 끄는 인력거)를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또 한번은 이랬다. 타고 가던 버스가 고장이어서 모두 내려 쉬고 있는데 중, 고등학생들로 보이는 소년들이 모여들었다. 일행 중에서 누가 가지고 있던 볼펜을 한 학생에게 준 모양이어서 서로 자랑하고 부러워하기에 내가 버스 안에 들어가 가지고 가던 볼펜 한 묶음을 가지고 나왔다.
그 볼펜은 지방의 어느 마을학교를 방문할 때 주려고 준비해 간 것 중의 일부였는데 나는 그것을 한 학생에게 주어 나누어 갖게하려 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볼펜을 보는 순간 학생들은 벌떼 같이 달려들어 서로 뺏으려 해서 간신히 일렬로 서게 하고 서야 겨우 나누어 줄 수 있었다.
양 같이 순하게만 보이던 소년들이 물건을 보는 순간 이리로 변하는 것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명을 이어 가는 본능으로 유전한 것일까? 뿌리 깊은 輪廻思想 속에 아무 욕심도 없이 來世만 바라보고 산다는 이들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일면을 보는 듯 하여 갈피를 잡기 어렵게 했다. 하기야 모든 것이 신비스럽기만 한 이 나라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모든 운명은 前生의 業에 의하여 이미 정해져 있고, 모든 일상의 일까지 신이 결정한다고 믿으면서 시대 착오적인 수 천년 전의 신분제도인 소위 카스트제도가 아직도 상존하여 형언할 수 없는 불이익을 받으면서도, 1~2%의 특수층에게만 富가 편재하여 국민 전체가 빈곤 속에 허덕이면서도 별다른 불만도, 불행도 느끼지 안는다는 국민들, 그러한 빈곤과 불편한 환경 속에서도 싸움은 고사하고 성내는 일조차 없으며, 살인이나 자살은 물론, 교통사고나 사고사가 거의 없는 나라가 인도라고 하니 무엇이 인도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BC2000년 전부터 인도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힌두이즘이고, 변할 줄 모르는 종교 힌두교이다.
한국에 와서 3년이나 있었고, 연세대학교에서 6개월 동안 어학연수도 받았다는 안내원 꾸마루씨에게 어느 분이 내세에 다시 사람으로 還生한다면 어느 나라에 태어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그는 망설임 없이 인도라고 대답했고, 왜냐고 묻는 물음에도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명료했다.
인도는 다툼이 없어 편안하다고 했다.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일 없으니 마음이 편안하고 여유로 운데, 한국은 항상 빨이 빨이 시간에 쪼기면서 돈이 많아도 또 더 많이 벌어야하고, 배워도 더 많이 배워야 하고, 욕심이 끝도 없어서 사람사이에 싸워서 이겨야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고달파서 싫다고 했다.
딴은 옳은 말이다. 그도 힌두교인이라는 테 이러한 사고가 인도인의 보편적인 사고라고 볼 때 힌두교가 빈곤한 대중에게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면서 정신적인 안정을 갖게 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리고 쉽게 체념하면서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은 인도의 발전에 고질적인 걸림돌이 될 것이다. | | | | 2. 힌두교 사원들 | | 인도에는 힌두교 사원이 도처에 있고 집집마다 있다. 도시에는 독특한 힌두양식의 거대한 사원들이 역사를 자랑하고 있지만 대개는 이슬람교가 지배하던 무굴제국(1526~1857)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그 세력이 약화된 19세기 이후에 재건된 것들이고, 각 가정에는 자기가 받드는 신을 모시고 기도를 드리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원이 수도 뉴델리에 위치한 락슈미나라얀사원이다. 1938년에 어느 재벌의 기증에 의하여 건축되었다는 이 사원은 규모도 규모려니와 선명한 색채와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여러 개의 복합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받들어지고 있는 主神이 나라얀(비슈누신의 별명)과 그의 부인 락슈미이지만 시바신과 같은 다른 힌두신도 모시고 있을 뿐 아니라 별도의 건물이기는 하지만 불교의 사원마저 함께 있어서 모든 신을 포용한다는 힌두교의 실상을 느낄 수 있었고,신전 안에는 수 많은 神像의 조각들이 배열되어 있는데 부처도 힌두교신 중의 하나가 되어 비슈누신의 아홉 번째 化身으로 대접 받고 있었다.
힌두교에도 주요한 三神이 있고 셋이면서 하나라는 삼위일체신앙이 있다. 즉 창조의 신 부라흐마와 보호유지의 신 비슈누, 그리고 파괴의 신 시바이다. 창조와 보호유지, 파괴는 분리된 것이 아니고 하나라는 개념이다. 파괴가 있어야 창조가 있고, 창조가 있어야 보호유지가 있으며, 또다시 파괴되어야 창조된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신이 비슈누신인데 비슈누신은 독특한 化身思想을 내포하고 있다. 즉 세상이 혼탁해 질 때마다 비슈누신이 화신의 형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고 한다. 그래서 타 종교나 교파에서 신봉하는 신들을 모두 비슈누의 화신으로 규정하고 포용하는 것이다.
이 화신사상 때문에 인도에는 다른 종교가 발부치지 못한다고 한다. 근세에 기독교가 인도에 상륙하여 포교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여호와나 예수를 유일신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슈누신의 화신인 여러 힌두교신 들 중의 하나로 추앙하려고 한다니 기독교 선교사로서는 어이가 없을 노릇이다.
시바신은 파괴를 일삼는 무서운 신인데도 인간의 욕망과 인연의 끈을 움켜쥐고 죽음을 주관하면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권능을 가진 신으로 신봉되고 있으며, 시바신을 따르는 수행자들은 창조와 보호유지의 영역도 모두 시바신의 것이라고 믿는다고 하니 자애로운 어머니 보다는 엄한 아버지를 더 두려워하며 따르는 것일까.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性의 숭배로 神에의 접근을 모색하려는 신앙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도 中北部에 위치한 카주라호 지방의 에로틱 寺院群이다. 10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건축되었다는 거대한 사원들은 붉은 색 沙岩에 요염한 女人像과 갓 가지 男女交合像, 심지어는 人獸交合像까지 대담한 조각들로 외벽을 장식하고 있다.
이들도 일종의 힌두교사원이고 이슬람교의 침입으로 85개의 사원이 모두 파괴되고 22개만 남았다고 하는데 모든 사원들이 하나 같이 외설스럽고 정교하면서도 서로 다른 조각들로 이루어졌다. 이를 일컬어 가마 수투라(Kama Sutra)라고 하는데 가마는 Sex를 뜻하고 수투라는 방법을 의미한단다.
달의 신에 자손이라는 찬텔라왕국이 전성기에 性을 숭배하면서 국민들에게 성교육을 위하여 건축하였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하기야 원시신앙으로서 생산의 원천이라고 생각되는 성을 신성시하면서 신앙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이 같은 사고는 세게 도처에 퍼져 있어서 우리 나라에도 남근석이니 여근석이니 하는 성숭배 풍습의 흔적이 여기 저기 남아 있지 않는가.
그렇다 치더라도 인도에서 유일한 종합대학이면서 2만 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고 자랑하는 힌두대학의 캠퍼스 안에 그것도 근래에 건축된 사원이 통칭 '링가'라고 불리는 남녀의 性器만을 돌로 다듬어 결합시킨 神像?을 모셔 놓고 숭배하는 것은 이해 할 수 없었다.
요니(yoni)라고 하는 여성기 위에 링가(ringa)라고 하는 남성기를 세워 놓고 그 위에는 갠지스강에서 떠왔다는 聖水?병을 달아매어 조금씩 흐르게 해 놓았다. 순례 하는 젊은 부녀자들이 링가 위에 꽃을 받친 후 합장하고 한 바퀴 돌아서 요니에서 흐르는 물을 손으로 정성스럽게 받아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은 그들의 자세가 아무리 근엄해도 역겹기 짝이 없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이 사람의 정신세계를 그토록 외곬으로 몰고 가는 것일까? 동양철학의 원류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서양철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철학의 나라 인도가 나 같은 문외한의 눈에는 원시 미신의 迷夢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대로 看過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1,000년 전부터 사원에까지 性畵가 등장하고 性器를 숭배하는 문화였다면 성도덕의 해이와 문란이 팽배했을 것이라고 속단하기 쉽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남녀의 순결이 다 같이 존중될 뿐 아니라 인도 어디에도 매춘이란 존재하지 안는다. 그것도 어느 누구의 통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지키는 자율적 도덕률에 의해서라고 하니 더욱 놀랍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 | | 3. 이슬람교 사원들 | | | | 7세기 초에 아라비아의 예언자 마호메트가 완성시켜 오늘날 세계 인구의 25%가 신봉함으로서 3대종교의 하나가 된 이슬람교가 인도의 서북부 인더스강 유역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11세기였다.
그 후 16세기에 들어와서는 이슬람교도이면서 몽골의 피를 받은 바르브가 이슬람국가인 무굴제국을 세우기에 이르렀고,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16세기 후반 악바르대제 때에는 인도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슬람교하면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 이란 말이 떠 오르는데 인도에서도 그들은 무력으로 힌두교도들을 개종시켰고, 힌두의 카스트제도 하에서 압박 받던 하층 계급인 슈트라 계층은 알라신 앞에 모두 평등하다는 이슬람의 교리에 많이 기울었단다. 따라서 전국의 힌두교사원들이 거의 다 파괴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사원들이 세워졌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뉴델리에서 남쪽으로 약 15km 지점의 평원에 세워진 쿠타브미나르(Qutab Minar)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이 사원에는 기저부의 지름이 14.5m나 되고 높이 73m에 이르는 거대하고도 독특한 원형 탑이 우뚝 서 있다.
5층으로 되어 있는 이 탑의 아래 3층은 赤砂岩이고 그 위는 대리석과 사암을 조화시켜 아름다운 건축미를 보이고 있는데 외벽에는 그들의 경전인 코란의 문구를 도안한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내부도 당연히 그러하련만 관광객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있어서 유감스러웠다.
공개하지 않는 이유가 관광객의 안전을 위해 서란다. 내부는 원형 사다리를 타고 상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언젠가 안전사고가 크게 난 후로 폐쇄했다니 이 또한 인도다운 안이한 처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럽의 어느 유명한 사원에도 뒤지지 않는 관광명소가 될 것인데 안전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폐쇄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사원 안에는 파괴된 힌두교사원의 잔해가 여기 저기 남아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우리 나라 교과서에도 나오는 높이 7m의 철기둥(Iron Pillar)이다. 이 철기둥은 4세기 굽타왕조 시대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아무 칠도 하지 않은 원형 鐵柱가 1600여 년 동안 녹 하나 쓸지 않고 서 있어서 순도 100%에 가깝다는 당시의 제철 기술수준에 세계가 놀라고 있다고 한다.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자랑하는 또 하나의 사원이 올드델리의 구시가지에 우뚝 솟은 거대한 모스크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이다. 건축광이었다고 알려진 무굴제국의 5대왕 샤 자한이 1658년에 완성시켰다는 이 사원은 모스크 돔과 높은 철탑이 건너 편의 '붉은 성'이라 불리는 크고 아름다운 성과 더불어 무굴시대의 델리를 상징한다.
붉은 성 앞까지는 버스가 들어가지만 거기서부터는 릭샤를 타야 한다. 무굴제국시대에야 말할 것도 없이 큰 길이 뚫린 번화가를 형성했었겠지만, 2만 명을 수용했다는 그 큰 사원이 지금은 극소수의 이슬람교도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기 때문에 큰 길이 모두 없어지고 서민의 거리가 되어 무질서한 재래시장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릭샤에는 자전거에 인력거를 부착한 사이클 릭샤가 있고, 오토바이에 인력거를 부착한 오토 릭샤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복잡한 시장거리를 비집고 가야하기 때문에 오토릭샤보다는 사이클릭샤를 타기로 했다. 인도 어디에서나 그렇지만 릭샤를 타려고 하면 릭샤왈라라고 불리는 운전수들이 벌떼 같이 몰려든다.
릭샤왈라들은 대개 집이 없거나 시골에서 올라와 노숙을 하면서 일거리를 찾지만 승객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란다. 그래서 겨우 10루피(300원)정도를 받고 우리 나라 택시의 기본요금 거리 이상을 땀을 흘리며 페달을 밟아야 시장의 노점에서 목구멍에 풀칠을 하는 것이 이들의 생활이요, 또한 인도의 서민생활이란다.
이슬람사원은 거대한 돔으로 이루어진 건물이 있을 뿐, 내부에 神像이나 그 어떤 상징물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붉은 사암과 흰 대리석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공간에서 그저 성지 메카를 향하여 기도하고 예배를 드릴 따름이다.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드리는 이들은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도 마침 기도시간이어서 한참동안을 밖에서 기다린 후에야 신을 벋고 맨발로 정숙을 지키면서 아무 것도 없이 텅 빈공간을 돌아볼 수 있었다. 잡다한 신상들로 가득 찬 힌두사원의 내부와는 너무나 대조적임을 새삼 느끼게 했다.
이슬람교와 힌두교는 一神敎와 多神敎라는 교리상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생활규범에까지 너무도 상반되는 것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힌두교에서는 돼지고기는 먹지만 신성한 소를 잡아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데 이슬람교에서는 소고기는 먹되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다.
그래서 더욱 앙숙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힌두인들은 비교적 너그러웠던 듯, 무굴제국이 쇠퇴한 후에 이슬람사원들을 대개 그대로 보존한 것 같다. 하기야 제국은 망했어도 그 종교는 그대로 남아서 북부인도에는 동,북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하여 이슬람국가를 건설하지 않았던가.
묘하게도 힌두인과 이슬람에게 같은 점이 있다면 수저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다는 것과, 용변 후에 휴지를 사용하지 않고 물로 씻는다는 점일 것이다. 도심의 큰 호텔에도 화장실에 0.5리터 쯤 되는 물 컵이 놓여 있어서 용도를 얼른 짐작 키 어렵게 했다.
더욱이 인도는 원래 화장실이 없는 나라이다. 지금은 도시에는 물론, 지방에도 공공건물들에는 화장실이 있지마는 시골에는 아직도 화장실이 없이 주변의 논밭이나 숲 속을 자연스럽게 이용하고 있었다.
대개 아침은 남자들의 용변시간이고 저녁은 여자들의 것이어서 자그마한 물통을 들고 집밖으로 나오는 것은 모두 용변을 보러 가는 것이라고 하니 화장실하나 덧붙지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수 천년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새삼스럽게 불편한 줄을 모르는 모양이다. | | | | 4. 불교유적지 | | | | 인도하면 먼저 불교가 머리에 떠오르지만 인도는 불교의 발상지일 뿐, 불교는 그 나라에서 이미 떠난지 오래다. 현재는 불교신도가 전체인구의 0.7%에 불과하고, 따라서 불교유적지는 있으되 불교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통상 四大佛跡 또는 四大聖地라 하여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와 깨달음의 땅 부다가야, 그리고 처음으로 설법을 행한 사르나트와 최후로 입적한 쿠시나가르를 지칭하지만 출생지인 룸비니는 인도의 북쪽 경계에 근접한 히말라야산 기슭의 네팔 땅이고, 나머지 세 곳이 인도의 북부지역인 간지스강 유역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불교유적은 아무 것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옛날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법한 풍경이 펼쳐져 있거나, 또는 도성이 있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그 세곳 중에 비교적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는, 우리에게 鹿野苑으로 잘 알려진 사르나트를 가 보았다. 갠지스강 유역의 힌두교 성지로 이름난 바라나시(Varanasi)에서 북동쪽으로 약10km 지점에 있다.
도시의 혼잡함에서 벗어나 큰 가로수들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도로를 따라 나아가면 푸르른 나무들과 아름다운 잔디밭이 넓게 펼쳐진 유적지가 나오고, 그 가운데 커다란 수투파(Stupa:불탑)와 사원 건물이 보인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크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다메크 수투파 이다.
내부 구조물이 아무 것도 없이 그저 산처럼 둥그렇게 2단으로, 지름과 높이가 모두 족히 100m는 되어 보이는 이 거대한 수투파는 아마도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기 위한 묘에서 비롯되었다는 불탑의 원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탑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무덤 같다고 해야 할 엄청난 이 구조물이 탑이던 무덤이던 간에(탑도 하나의 무덤이겠지만) 내가 본 것 중에서는 가장 큰 것이었다. 6세기에 축조된 것이라는데 일부 파손되기는 했지만 외양은 말끔하게 남아 있다. 지금도 이 탑의 주위를 돌며 승려들이 예불을 드린단다.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석가는 그 깨달음을 가슴에 간직하고 먼 거리를 혼자 걸어서, 그 때에도 지금처럼 많은 종교인 들이 모여들던 바라나시를 향하여 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찍이 같이 수행하던 5명의 제자를 만나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처음으로 설법한 자리가 바로 여기란다.
그래서 여기는 불교의 주요성지가 되었고, B.C 3세기에 이르러서는 우리에게 阿育王으로 알려진 아소카왕이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불교성지를 모두 답사하면서 가는 곳마다 둥근 돌기둥을 세워 불교를 장려했다는데 이 곳에도 폐허 속에 묻혔던 네 개의 불어진 돌기둥 밑 부분이 남아서 옛 영화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 돌기둥 위에는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어서 박물관에 별도로 보존하고 있는데 그 사자상이 지금도 인도의 국장이 되어 있고, 동전의 뒷면에도 도안되어 인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했다.
넓은 잔디밭 가운데 융성했던 불교사원들의 유적이 발굴되어 빨간 벽돌 구조물들이 그 규모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늘어서 있고, 정면에는 화단으로 둘러싸인 근래에 새로 지은 사원이 보인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면 벽면 가득히 석가모니의 생애를 묘사한 벽화가 화려하다.
그 벽화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석가가 부다가야에서 수행중에 아리따운 여인으로부터 공양을 받는 그림이다. 그 공양으로 인하여 탈선했다고 오해한 제자들이 곁을 떠났고, 혼자 외로이 깨달음을 얻은 후 이 곳에 와서 그 제자들을 만나 처음으로 자기가 깨달은 바를 전했다고 한다.
또 한편에는 아담한 스리랑카의 사원이 있는데 그 정원의 큰 고목 밑에는 석가가 다섯 제자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조형한 조각상이 있어서 녹야원의 의의를 더욱 실감케 했고, 그 외에도 여러 나라들이 세운 절들이 있다는데 모두 돌아보지 못했다.
B.C 1500년 경 인도에 들어온 아리안족이 인도 전역을 지배하기 위해서 내세운 것이 카스트제도와 브라만교였다. 카스트제도란 최고의 신인 '브라흐만'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司祭階級으로서의 브라만과 왕족과 무사 등 支配階級으로서의 크샤트리아, 그리고 平民階級인 바이샤와 賤民階級인 수드라의 四姓階級으로 나눈 신분제도이다.
따라서 왕보다도 높은 지위를 가지는 부라만계급이 신과 접촉하여 왕과 무사의 출전여부를 결정하고 승리를 기원하며, 왕과 무사들은 그 대가로 전리품을 받치게 하였다. 동시에 사성신분은 신이 정한 것이고 그 신분은 輪廻하는 것이어서 잘 순종해야만 來世에 높은 신분으로 還生하거나 解脫할 수 있다 하여 일체의 불만을 표출할 수 없게 한 것이 브라만교였다.
B.C 6세기에 이르러 부란만계급의 횡포에 반기를 들고 일이 난 것이 불교요, 자이나교이다. 신분계급과 관계 없이 누구나 修行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있다고 갈파함으로서 사제인 브라만의 제사의식을 통해야만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브라만 교에 정면으로 대응하였다.
이리하여 불교는 브라만 계층이 아닌 지식인들과 하층 민중들에게 크게 호응을 얻어 번져 나갔고 한때 국교로까지 등장했었으나 이에 위기를 느낀 브라만교가 민중들의 토착신앙을 끌어 안고 개혁을 일으켜 힌두교로 발전하면서 교세가 위축되었고, 무력을 앞세운 이슬람교의 침입으로 본거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8세기에 바로 이 녹야원을 비롯한 고대 인도의 불교성지를 두루 답사하고 往五天竺國傳을 쓴 慧超스님의 기록에 의하면 그 때에 벌써 "불타의 유적은 황폐하여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며, 사원은 있으나 승려가 없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큰 사원에는 승려가 3,000명이어서 공양미가 매일 15석이나 소요되므로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 곳도 있다"고 하였으니 이슬람국가인 무굴제국이 건설되기 이전에 인도에서의 불교는 이미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던 듯 하다. | | | | 5. 무굴제국의 유적들 | | | | 16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인도지역을 통치한 이슬람왕조 무굴제국의 시조 바브르는 중앙아시아를 전전하다가 인도 북부의 텔리왕조를 무너뜨리고 1526년 무굴제국을 창시하였고, 18세기 영국의 개입으로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1857년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슬람이 침입한 어느 곳에서도 그랬듯이 인도에서도 뿌리 깊은 토착종교인 힌두교를 무력으로 개종시켰고, 300여 년 통치하는 동안 북부지역에서는 이슬람이 뿌리를 내리어 무굴제국이 망한 후에도 교세는 숙으러 들지 않았다.
그래서 2차대전이 끝난 후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인도가 독립할 때에 인도의 북부지역 이슬람들이 남부의 힌두교도와 단일국가를 이루는데 반대하여 동서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 하였다가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가 되었고, 서 파키스탄은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
이러한 무굴제국이 초기 100년간 전성기를 누리면서 수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으며, 그 중에서 우리 일행은 UNESCO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다섯 개를 볼 수 있었는데 둘은 수도인 델리에 있고, 나머지 셋은 갠지스강 상류의 한 지류인 야무나강을 따라 동으로 내려간 아그라 지역에 있었다.
텔리 정복을 기념하여 힌두교사원을 헐고 그 자리에 이슬람사원을 세웠다는 구타브 미나르는 이미 기술한 바가 있거니와 델리에 있는 또 하나의 세계문화유산이 후마윤 묘이다.
후마윤은 무굴제국의 2대 왕이었는데, 그가 죽은 후 왕비가 섭정하면서 1565년 남편을 위하여 세운 이 건축물은 중앙의 돔을 정점으로 정확하게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관리가 잘 되지 안는 듯 색채가 변하기는 했지만 붉은 砂岩에 흰 대리석을 조화시킨 색의 대비가 그래도 아름답다.
건물 안의 중앙에 자리 잡은 하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조각된 묘는 일반에게 보이기 위한 假墓이고 실제 유해는 바로 아래의 지하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사원도 궁궐도 아닌 墓로서의 이 건축물은 건축사에 또 하나의 걸작품이라고 하는데 후일 그 유명한 타지마할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후마윤 묘가 왕비가 그 남편을 위하여 세운 것이라면 아그라에 있는 타지마할은 왕이 왕비를 위해 세운 무덤이요 건축물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요 7대불가사의의 하나라고 하는 이 궁궐 아닌 墓는 무굴제국의 5대왕 샤 자한이 왕비 무무타즈 마할을 위해 1653년에 완성한 건물이다.
어느 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시골 처녀에게 첫눈에 반하여 뜨겁게 사랑했다는 샤 자한은 17년 동안 함께 살면서 열 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은 아름다운 아내와 생전에 했던 두 가지 약속인 '재혼을 안 할 것' 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에 묻어 줄 것' 을 모두 지켜 이 건축물을 세우고 아내를 안장하였단다.
세계 각지에서 아름다운 돌을 수입하고 우수한 기술자를 모아 무려 22년 간이나 걸려서 완성했다는 이 건물은 기단부의 크기가 사방 95m, 본채는 사방57m, 높이67m이고 네 귀에 있는 탑의 높이는 43m라고 한다.
넓게 트인 야무나강 가에 홀로 우뚝 솟은 흰 대리석의 이 건물은 주변의 푸른 숲, 파란 하늘과 조화를 이루어 낮에는 그 거대함에 압도되고, 밤이 되면, 특히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더욱 매혹적이어서 한 남성의 지극한 사랑을 사후에까지 지니고 싶어하는 뭇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샤 자한은 야무나강 건너편에 타지마할과 대비되는 똑 같은 구조의 건거물을 검은 대리석으로 지어서 자기의 묘로 하려고 했는데, 재정이 바닥 나고 國基가 흔들리는 것을 염려한 셋째 왕자가 부왕을 아그라성에 유폐시키고 이를 중단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샤 자한은 아그라성에서 타지마할만 바라보면서 7년을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해는 타지마할의 왕비 곁에 안치되었는데, 애초에는 왕비만 이 곳에 안장하고 왕은 건너편에 새로 건물을 지어 마주 보도록 장사하려고 하였으므로 왕비의 석관을 정 중앙에 두었단다.
그런데 왕비의 석관을 최초의 자리에서 옮길 수 없어 왕의 석관을 그 옆의 한편으로 치우치게 놓을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타지마할은 전후좌우 사방이 모두 정확히 대칭을 이루지만 관 두 개의 위치만 이 건물에서 유일하게 대칭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다음에 가 본 곳이 샤 자한이 그의 아들에 의하여 유폐되었던 아그라성이다. 이 성은 후마윤의 뒤를 이어 13세에 왕위에 오른 후 무굴제국을 강성한 국가로 만들어 낸 3대왕 악바르대제가 1565년에 축조한 성이다. 넓고 깊은 해자를 건너 성문을 들어서면 아름다운 정원과 늘어선 궁전의 모스크가 더 없이 화려하다.
일반 접견실, 특별 접견실 등을 비롯한 수 많은 궁전들이 늘어서 있고, 샤 자한이 유폐되었던 한 탑에서는 구부러진 야무나강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타지마할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샤 자한은 첫 부인 말고는 오직 한 여인만을 평생 사랑하면서 여기에서 그 여인의 묘인 타지마할만 바라보다가 74세로 생을 마감했다고 하니 사랑을 독점하고 싶은 모든 여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을는지는 모르지만 나라를 지탱하기 어려울 만큼 사랑에 빠졌었다니 그야말로 그 왕비 무무타지마할은 傾國之色이었나 보다.
아그라 서남쪽에 또 하나의 세계문화유산인 '파테푸르 시크리' 라고 하는 성이 있다. 아들이 없던 악바르대제가 여기에 사는 聖者의 예언에 의해서 아들을 얻은 후 이 곳에 성을 쌓아 왕궁을 짖고 이 곳으로 수도를 옮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성에는 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불과 14년 후에는 옛 도성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니 한 위정자의 그릇된 판단이 국가의 재정을 얼마다 낭비하고 국민을 도탄으로 몰아 넣었을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겨우 14년만 사용된 거대한 도성이 별로 손상되지도 않은 채 붉은 사암이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사하면서 무심히 서 있어서 과거의 허황한 역사는 아랑곳 없이 오늘의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다만 이 궁궐에는 악바르대제의 포용정책이었던, 힌두와 이슬람을 비롯한 각종교의 문화적 융합이라 할 수 있는 건축양식을 보여 주고 있어서 흥미롭다. 이슬람을 상징하는 아치와 힌두의 코끼리, 불교의 연꽃과 기독교의 십자가까지 다양한 문양을 조각하여 조화롭게 장식하였다.
遷都에는 실패했지만 악바르대제의 종교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은 國庫을 관리하는 관방장관까지 힌두교인을 등용하였다고 하니 그러한 너그러움이 그의 통치를 순조롭게 하여 세력을 키우고 국토를 넓히는데 이바지 하였나 보다. | | | | 6. 갠지스강 가에 형성된 문화 | | | |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에서 발원하여 인도 북부의 평원을 가로질러 벵골만으로 빠지는, 장장 2,000여km를 유유히 흐르는 갠지스강 유역의 중간쯤 된 지점에 바라나시(Varanasi)라는 도시가 있다. 원래 베나레스(Benares)로 많이 알려졌지만 그것은 영어명이고, 인도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은 바라나시이다.
3,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힌두聖地 중의 성지요, 힌두三神 중에서도 파괴의 神으로서 죽음을 관장하고 還生과 解脫의 권능을 가진, 가장 위력을 떨치는 신 중의 신인 시바신의 聖都이다. 옛부터 인도문화의 중심지였으나 12세기에 이슬람의 세력권에 들어갔다가 18세기 영국의 진출과 함께 힌두 지배로 돌아온 곳이다.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공포의 대상이면서 멸망의 순간에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있는 희망의 신, 바로 그 시바신이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갠지스강은 성스러운 강이요, 그 물은 聖水이다.
그러기에 힌두교인들은 갠지스강에서 목욕하여 모든 죄를 씻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요, 죽에서도 시신이 그 성수에 담겨졌다가 강 가의 장작더미 위에서 火葬되고, 타고 남은 재가 그 강에 뿌려져서 시바신의 가호로 輪廻의 사슬을 끊고 解脫에 이르기를 염원한다.
강 가에는 목욕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때때로 펼쳐지는 우리의 굿을 연상케 하는 예배의식,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瞑想에 잠긴 사람, 이 곳에서 裸身으로 평생을 산다는 '사두' 라고 불리는 修行者, 火葬하는 연기, 향 피우는 연기, 냄새, 냄새, 대기하는 屍身, 빨래하는 사람, 인도철학에 심취한 듯 싶은 근엄한 자세의 白人 巡禮者, 여러 나라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항상 寧日이 없다.
강 위에는 작은 배들이 신비한 갠지스강의 日出 또는 석양의 落照, 강변의 진풍경들을 보려는 순례자와 관광객들을 태우고, 화장 재, 신에게 받쳐진 꽃과 촛불, 주변에서 여과 없이 흐르는 하수, 온갓 쓰레기들이 뒤섞여 흐르는 물 위를 배회한다. 요즘은 강폭이 서울의 한강만 하지만 雨期에는 水量이 엄청나서 강폭이 배로 늘어나고 강물도 淨化된단다. 모든 것을 삼키며 흐르는 大河는 바다로 흘러 들고, 하늘로 올라가 다시 모든 물의 源泉이 되는 또 하나의 윤회를 거듭한다.
이 강의 성스러운 물은 인도의 집집마다 모셔진 神殿에도 받쳐지는 聖水가 되는데 성수를 사고 파는 법은 없고, 두 달, 석달 씩 걸려 苦行을 하면서 직접 갠지스강에서 떠와야 한다고 하니 그 정성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길거리에서는 꽃으로 장식한 물병을 양쪽에 달아맨 멜 대를 어깨에 메고 맨발로 걸어가는 행렬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가다가 쉬더라도 물병을 땅에 놓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이 들을 위해서 요소 요소마다 성수를 걸어놓고 쉴 곳과,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곳이 같은 신도들의 자진봉사로 제공된다고 한다.
강의 서쪽 기슭을 따라 60여 개에 이른다는 가트(Ghat)가 늘어서 있다. 가트란 강변에 계단으로 이어져 있는 堤防을 말하는데 주로 목욕하는 장소이고, 때로는 火葬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 그 위에는 옛 군소왕국들의 왕과 왕후들이 목욕하기 위하여 세웠다는 별장과 여러 사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거기에서 좁은 골목 길로 한참 들어가면 '세계의 중심' 을 의미한다는 비슈와나트(Vishwanath)사원이 있다. 1톤의 황금으로 탑의 상륜부를 장식하여 Golden Temple이라고도 불린다는 이 사원은 하도 신성한 곳이어서 힌두교도가 아니고서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 안에는 시바신의 상징인 링가(남성 성기 모양의 돌)를 本尊으로 모셨다는데 그 링가는 원래 시바신이 히말라야에서 가지고 온 것이란다. 그래서 여기에 神殿을 짓고 소중히 모셔 왔는데 이슬람이 침입하여 偶像이라고 갠지스강에 버리고, 그 자리에 이슬람사원을 세웠단다.
그 후에 힌두교가 세력을 회복하면서 그 옆에 다시 신전을 짖고 갠지스강에서 링가를 찾아다가 모셨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해서 이슬람사원과 힌두사원이 나란히 있게 되었고, 때로는 충돌이 일어나기도 해서 거리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인도의 경찰이 이 곳에서는 항상 무장경계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힌두교 중에서도 시바파에서 링가숭배사상이 두드러진 모양이다. 최고의 三神, 또는 三位一體 神으로 일컬어지는 브라호마, 비슈누, 시바 신은 모두 男神인데 이들은 至高한 法則과 原理를 가지고 있는 存在者일 뿐, 그 스스로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여성의 性的인 힘인 '샥티' 와 결합할 때 비로소 창조, 보호유지, 파괴 등의 활동이 가능하고, 샥티를 얻기 위한 배우자로서의 女神이 새로운 신앙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파괴의 신 시바의 링가는 그 배우자인 칼리여신의 샥티와 결합하여 그 무서운 존재를 세상에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것을 비슈누파의 '박티사상' 과 대비되는 '샥티사상' 이라고 한다는데 그 철학이 아무리 심오하고 그 존재가 비록 신성하다 해도, 그 사원으로 통하는 좁은 골목은 꽃과 향과 초 등을 파는 상점으로 어지러우면서 온갓 쓰레기로 불결하고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연간 100만 명의 순례자들이 모여든다는 이 바라나시에는 갠지스강으로 이어지는 4차선 쯤 되어 보이는 길이 있는데, 人道와 車道의 구분은 물론, 중앙선도, 차선도, 신호등도, 횡단보도도 아무 것도 없이 오직 소똥과 쓰레기만 여기 저기 널려 있다.
그 길을 사람과 소와 또 다른 여러 짐승들, 그리고 자전거, 릭샤, 마차, 승용차, 화물차, 그것도 아무 규격도 제한도 없이 크고 작게 개조하거나 임의 제작한 고물들이 매연을 뿜어 대며 물결을 이루어 빽빽이 몰려 다닌다.
그런데도 교통사고는 물론, 큰 소리 하나 내는 사람 없이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마치 갠지스 강물이 흐르기라도 하듯이 유유히 밀려 가고 밀려 온다. 이를 두고 '혼돈 속의 질서' 라고 일행 중의 한 분이 표현 했지만 참으로 신비롭기 그지 없었다.
누구의 통제나 그 어떤 제도에서가 아니라, 수 백년 내려오면서 힌두이즘으로 醇化된 여유로운 국민들에 의하여 저절로 이루어진 질서일 것이다. 老子가 말하는 無爲自然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도의 불결하고 나태한 것만을 빼고 安貧樂道하면서 悠悠自適하는 그 정신만을 수입할 수는 없을까.
볼수록 불가사의한 나라가 인도다. 극도로 무질서하면서도 그 속에 질서가 있고, 금방 탄로날 거짓 말을 예사롭게 하지만 별다른 악의는 없으며, 크게는 無慾 속에 살아가지만 작은 물질에 강하게 집착하는 그들, 거지는 많되 굶어 죽는 사람은 없고, 도둑도, 살인도, 자살도, 事故死(천재지변 말고)도 없는 나라가 바로 인도라고 하니 그 아니 신비로운가. | |